매미 선蟬

숲길을 가는데 갑자기 몇 걸음 앞서 길바닥에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매미 한 마리가 막 허물을 벗고 나오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매미를 벌 같은 다른 곤충이 공격했나 싶어 유심히 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매미는 거푸집을 끌고 서둘러 응달의 숲으로 몸을 피한다. ‘한사코 옆에 붙어 뜨겁게 우는 사랑’ 같은 매미(참조. 안도현, 매미)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뜨겁도록 쨍쨍하게 햇볕이 내리쬐는 중에 시끄럽도록 떼거리로 울어대야 매미는 매미답다. 요란한 매미의 울음이 햇볕의 뜨거움을 더하는 중에 의외로 사람의 마음은 차분해지고 주변은 한가하다. 매미 소리는 나 홀로 이유도 없이 어딘가에 뚝 떨어져 멀리 와 있다는 착각 속에서 문득 나를 돌아보게 한다.

‘매미 선蟬’이라는 글자는 뜻을 나타내는 ‘벌레 충虫’과 소릿값인 ‘홑 단/오랑캐 이름 선單’이라는 글자로 이루어졌고, 매미울음은 ‘선성蟬聲’이라 한다. 매미를 두고 중국 진晉나라 때 육운陸雲(232~303년)이 다섯 가지 덕이 있다 하였다더니 정말 그런가? 그의 <한선부寒蟬賦>에서 지극한 덕을 갖춘 지덕지충至德之蟲인 매미는 머리에 선비의 관대冠帶(갓과 허리띠)를 상징하는 모습이 있어 문덕文德이 있고, 이슬을 먹고 사니(실제로는 수액이나 식물의 즙과 같은 것을 먹는다) 맑은 청덕淸德이 있으며, 곡식을 먹지 않으니 청렴의 염덕廉德이 있고, 둥지를 만들지 않으니 검소함의 검덕儉德이 있으며, 반드시 절기를 맞추어 우니 신덕信德이 있다고 했다 한다. 이렇게 매미가 갖춘 문(文), 청(淸), 염(廉), 검(儉), 신(信) 다섯 덕목을 본받으려 임금도 매미의 양 날개를 위로 향하게 형상화한 익선관翼蟬冠을 머리에 썼고, 조정의 신하들도 매미의 양 날개를 옆으로 향하게 한 관모官帽를 썼다 하였다.

자기 소리에 가장 잘 맞는 소리를 가늠하는 암컷을 위해 수컷만이 운다는 매미, 작게는 3년부터 많게는 17년 홀수 해로만 기다려 유충 생활을 마치고 세상에 나와 짧게 살다 간다는 매미, 지구상에 무려 3천 종이나 존재한다는 매미, 동시에 큰 무리를 지어 세상에 나와야만 그나마 다음 세대를 위해 후손을 남긴다는 매미, 주파수가 맞지 않은 엉터리 라디오 소리 같은 소리를 넘어 이제는 진공청소기의 소음이고 밤중에 쇠를 깎는 것 같은 소리를 낸다는 매미, 새들과 거미와 사마귀를 천적으로 둔다는 매미, 땅이 큰 미국에서는 주기매미(Periodical cicadas)라는 이름으로 1에이커(약 4047㎡)당 최대 150만 마리까지 나타날 수 있다는 매미…, 아스라한 우리나라에서도 지금 장마를 넘어 막바지 여름 매미의 계절이 오고 있을 것이다.

홀로 독獨

‘홀로 독獨’이라는 글자는 ‘혼자’나 ‘홀로’라는 뜻을 지닌 글자이다. 이 글자를 순서대로 펼쳐서 큰 개나 사슴을 가리키는 ‘개 견犭’ + ‘눈 목目’ + ‘쌀 포勹’ + ‘벌레 훼/충虫’의 조합이므로 개와 벌레가 서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외롭다는 뜻이라고 풀이한 것을 읽고 피식 웃었던 적이 있다. 떠돌이 개가 목욕을 안 해서 애벌레가 붙어 있다는 식이거나 마당의 개나 풀밭의 애벌레가 상관없이 사는 ‘홀로’ 사는 삶이라고 풀이하는 것과 비슷해서였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뜻과 소릿값으로 나눠보는 방식에 따라 개나 사슴을 뜻하는 ‘개 견犭(=犬)’이라는 글자와 ‘해바라기 벌레/애벌레/나라이름 촉蜀’의 결합으로 보면서 개(犬)는 무리를 지으면 싸우므로 홀로 떼어놓아야 한다거나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성질이 있으므로 그렇게 썼을 뿐 글자의 한 부분을 차지한 ‘애벌레/나라이름 촉蜀’은 그저 음을 나타낼 뿐이라고 하면 풀이는 되지만 썩 개운치가 않다.

그래서 ‘애벌레/나라이름 촉蜀’이라는 글자를 뜯어본다. 누에처럼 생긴 해바라기 벌레, 혹은 애벌레의 모양에서 왔다는 ‘촉蜀’이라는 글자는 몸의 모양(勹)에 머리를 상징하는 눈(目→罒)이 붙어 있는 모습이었고, 나중에 벌레라는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벌레 충(虫)자를 추가하였다 한다. 삼국지의 유비劉備가 세운 촉蜀이라는 나라에서 두우杜宇라는 왕이 호의를 베풀었다가 나라를 빼앗기고 억울하게 죽어 대궐이 보이는 서산에서 밤마다 울었다는 두견새,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歸蜀道(*촉나라로 돌아가는 길) 운다’라는 싯구가 되었던 바로 그 ‘촉’이다. 그렇게 ‘蜀’을 풀어봐도 원래의 ‘홀로 독獨’이 왜 ‘홀로’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는가는 깔끔하게 파악되지는 않는다. 사전에서도 『개는 무리지어 살지 않고 혼자서 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홀로’라는 뜻이 생겼으며, 이로부터 단독單獨, 고립孤立, 독특獨特하다 등의 뜻이 나왔다. 또 자식이 없거나 아내가 없는 사람의 지칭으로도 쓰였다.(하영삼, 한자 어원 사전, 196쪽)』할 뿐이다.

독獨은 독毒이라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생은 결국 홀로이다. 맹자孟子 때부터 ‘환과고독鰥寡孤獨(홀아비 환, 적을/과부 과, 외로울 고, 홀로 독)’이라 하여 늙고 아내가 없는 사람, 젊고 남편이 없는 사람, 어리고 부모가 없는 사람, 늙고 자식이 없는 사람을 어울려 보살피는 것이 정치라고 하였으므로 나의 기억 안에도 감히 혼자 사는 이가 없던 시대와 사회가 있었지만, 어느덧 독거노인獨居老人이니 고독사孤獨死라는 말은 보편화가 된 지 오래고, 함께 모여 살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시대가 되었으며, 그렇다고 혼자 살게 된 이들을 소위 사회의 안전망이라는 시스템이나 연금 혹은 재취업 기회로 보살펴야 하는 것이 후세에 부담을 안겨주는 일이 될 뿐이라 하기도 하고, 홀로 내팽개쳐진 삶은 잘못된 삶을 살았던 본인이 자초한 것이니 어찌할 수가 없다 하기까지도 한다. 나이 들어 품위 있는 삶을 누릴 권리는 어쩌면 나이 들기 전의 영악함이나 이기적인 대비만으로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주 목요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던 할아버지 신부님들이 계시는 양로원에 다녀올 때면 다소 우울한 기분이 오래 남는다. 세계에서 문명이 가장 발달한 선진국이라는 이곳 미국, 그중에서도 편안한 노후를 위해 은퇴한 이들을 위한 도시라는 이곳 탬파, 그래도 괜찮은 축에 속한다는 양로원의 먼지투성이 침대에 간신히 걸터앉아 30분 이상 걸려 홀로 일회용 기저귀 팬티를 갈아입고, 앞인지 뒤인지도 모르게 고무줄 바지를 한쪽으로 쏠리게 입고 난 뒤, 기진맥진해서 침대에 다시 누워 깊은 잠에 빠져 기약 없고 대책 없는 소모의 들숨 날숨으로 끊어질 숨의 순간을 마냥 기다린다는 것은, 그곳이 일터요 생업인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를 지켜보는 모든 이에게 참으로 잔인한 일이다.

오늘 1935년 생이신 폴이라는 신부님이 그렇게 누워있는 침대 곁 탁자에는 구정물 같은 탁한 물에 틀니가 담긴 플라스틱 컵, 얼룩투성이의 안경, 아직 사용하지 않은 흐트러진 몇 개의 기저귀 더미, 플라스틱 소변 통, 하나는 내게 주어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3개들이 작은 비스킷, 그리고 빛바랜 성모님의 상본 한 장이 놓여있었다. 간병인은 며칠 전 뉴욕에서 왔던 전임 원장이 목에 걸어주었다는 아주 예쁜 묵주는 누가 훔쳐 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이 글은 2019년 10월 탬파에 있을 때의 글이다. 폴 신부님은 이미 올해 2020년 초에 돌아가셨다.)

잎 엽, 땅 이름 섭, 책 접葉

‘(나뭇)잎 엽葉’은 ‘풀 초艹’ 더하기 ‘인간 세世’ 더하기 ‘나무 목木’으로 구성되었다. 한가운데 ‘세상/인간 세世’를 품고 있는 글자이다. 나뭇잎을 가리키는 葉보다 枼이라는 글자가 먼저 쓰였는데, 이 글자보다도 먼저 나뭇잎을 가리키는 글자는 ‘世’라는 글자였다. ‘世’라는 글자 자체가 나뭇가지에서 돋아나는 순이나 잎사귀를 본떠 만들어진 글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나뭇잎이 나고 지는 것은 곧 해가 바뀌는 것이어서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는 ‘생애’의 뜻으로 점점 발전되어 일생이나 세대라는 뜻으로까지 나아간다. 같은 글자이지만, 온전히 인간이나 일생, 생애를 뜻하는 글자로는 ‘인간/대 세卋’라는 글자로 구별하여 쓰기도 한다. 이 글자는 ‘열 십十’이 세 개 겹쳐진 의미로 대략 30년을 한 세대로 지칭하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世’가 본래 뜻인 나뭇잎을 잃을 수 있으므로 그 글자 밑에 ‘나무 목木’을 붙여 ‘나뭇잎 엽枼’을 만들었다가 그 글자 위에 ‘풀 초艹’까지 더해 오늘의 ‘나뭇잎 엽葉’이 되었다. 이는 보통으로 나뭇잎, 꽃잎, 잎처럼 얇은 종이 같은 것, 책의 쪽, 동전을 세는 단위 등으로 쓰이고 ‘중엽中葉’에서처럼 한 세대나 시기를 뜻하기도 한다.

잎은 놀이개다. 백 보나 떨어진 거리에서 쏜 화살의 과녁이 된 버들잎(백보천양百步穿楊)이 있고, 나뭇잎을 가르는 검劍이 있으며, 애들이 한 장 한 장 떼어내며 가위바위보를 할 수 있어서이다.

잎은 가리개다. 첫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렸던 무화과나무 잎, 비오는 날 머리를 가리는 연잎, 당唐나라의 양옥환楊玉環이 손으로 건드렸더니 당해낼 수 없는 미모 앞에 부끄러워 잎을 말아 올려 자신을 숨겼다는 함수화含羞花 때문이다.

잎은 치장이다. 여러 색의 꽃잎으로 즙을 짜 굳혀 만든 연지臙脂로 뺨에 홍분紅粉을 칠했다는 복숭아 꽃잎이 있고 즈려밟고 가시라는 꽃길이 있어서이다.

잎은 대비對比이다. 한 송이 붉은 꽃을 돋보이게 하는 푸른 잎들이 있으며(만록총중홍일점萬綠叢中紅一點), 한해살이풀이지만 푸른 물감의 원료가 되는 청출어람靑出於藍(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의 쪽잎 때문이다.

잎은 계략이다. 벌레가 좋아하는 꿀로 역모逆謀의 글을 써서 역사를 바꾸어가던 음모陰謀의 나뭇잎이 있어서이다.

잎은 낭만이다. 연서戀書와 시詩의 바탕으로 붉게 물든 감나무잎(시엽지枾葉紙)이 있고, 노란 은행잎으로 덮인 길을 가는 연인의 팔짱 낀 모습이 있어서 그렇고, 이른 아침 이슬 맺힌 풀잎이 있기 때문이다.

잎은 세월이다. 섬돌 앞에서 가을을 알리는 오동나무 잎(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이 있어서이다.

잎은 거름이요 순환이다. 온갖 것을 말없이 받아들여 쌓이고 쌓이다가 버무리고 뒤섞이며 밟히고 썩어 생명을 낳는 거룩함을 담았기 때문이다.

잎은 먹거리다. 온 세상 언제 어디라도 한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있어서 여름 맛을 주는 깻잎과 상춧잎과 고춧잎을 비롯해 가난한 시절 뒷동산에만 오르면 누구나 캘 수 있었던 백여덟 가지나 된다는 나물 잎들이 있어서이다.

잎은 한恨이다. 망망대해에서 한 잎의 좁은 배를 탄 좁쌀 같은 인생살이의 슬픈 일엽편주一葉片舟와 그 위의 술잔이 있고, 빈산 잎이 지고 비마저 부슬부슬(권필權韠·1569~1612년 : 공산목락우소소空山木落雨蕭蕭)대는 시가 있으며, ‘나뭇잎이 푸르대야 시어머니보다 더 푸르랴?’ 하던 민요가 있기 때문이다.

잎은 사유와 성찰이다. 꺾이고 구부러지며 잎새의 폭이 풍성하고 수척해지는 변화와 반복 속에서 마음을 속이지 않고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으로만 그릴 수 있고 결코 남의 눈을 속일 수 없다는 난초의 잎이 있어서이다.

잎은 향이다. 덖고 우려 즐기는 찻잎과 선禪이기 때문이다.

잎은 길이다. 9년 동안 좌선하신(면벽좌선面壁坐禪) 달마대사를 동쪽으로 모셔 온 갈댓잎(노엽달마蘆葉達磨), 그리고 그 달마대사께 향기로 움직이는 동쪽의 땅을 펼쳐준 다섯 장의 꽃잎(오엽분피진단개五葉芬披震旦開-震旦:동쪽의 땅)이 있으며, 비가 거센 4월 어느 날 작은 벚꽃잎들로 하얗게 뒤덮인 길이 있어서이다.

잎은 죽음이다. 다양한 색과 모양으로 유일하게 사람이 이승을 떠나는 장례식을 송별하면서 죽음의 신비처럼 많은 꽃잎으로 자신의 속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 국화꽃 잎이 있기 때문이다.

숲에 들었더니 헤아릴 수도 없는 모든 잎이 하나도 예외 없이 전부 각자 자기 자리를 잡았다. 햇빛은 잎을 헤치고 감히 들어올 수가 없어졌으며 잎들 사이로 간간이 바람과 더불어 즐거운 숨바꼭질을 할 뿐이다. 위로는 새들이 가지를 바꾸고, 밑으로는 다람쥐들이 부스럭거리느라 바쁘고, 저만치서는 사슴들이 가끔 경계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가만히 쳐다본다. 친구에게는 곧잘 모습을 보여준다던 갈색과 회색 여우는 야속하게도 좀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답답할/번민할 민悶

‘답답할/번민할 민悶’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글자가 생긴 그대로 빗장 지른 문 안에 갇힌 사람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마저 곤란해져 괴로워하고 말 그대로 답답해서 미칠 지경인 경우를 뜻하면서 ‘우매하다, 밀폐하다’의 뜻으로까지 나아간다. 문 안에서 안(내면)으로 고통받는 상황이다. 흔히 ‘번민煩悶, 고민苦悶’ 할 때 쓰는 글자이다.

covid19 때문에 사람들이 갇힌 지 한 달도 훨씬 넘었다. 답답해한다. 뉴욕 날씨도 좀체 도와줄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 비가 내리며 흐리고 바람마저 거센 채, 봄인 줄도 모르게, 그렇게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날이 반짝하고 햇빛이라도 비칠라치면 넓은 이곳에는 공원마저 닫혀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몰려온다. 마스크를 쓰고서도 사람들은 재잘거리고, 성장한 딸과 아빠는 연신 뛴다.

숨었던 다람쥐들이 이리저리 바쁘고, 그라운드 호그라는 녀석이 연신 이 굴에서 보였다가 저 굴에서 보이며, 사슴들은 태연하게 무리를 짓고, 하늘이나 나뭇가지에 있어야 할 새들도 풀밭 위를 종종거린다. 길 잃은 야생 칠면조 한 마리는 며칠 전부터 맨날 같은 곳에서 겁 없이 뒤뚱거리고, 현관 바깥쪽 높은 곳에서는 수백 수천의 꿀벌들이 윙윙거린다. 움직이는 것들이 부산스러운 가운데, 개나리와 목련 같은 몇몇 꽃은 이미 졌고, 나무들은 하나같이 조용히, 그러나 여지없이 연둣빛과 초록빛들을 점점 더 내밀어 보이면서 세를 과시한다. 사람들이 답답하니 그동안 사람들 탓에 답답했을 것들이 활발하다.

벌써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시작되면서 모처럼 화창한 5월 셋째 날, 그리고 일요일, 창밖의 새 소리는 바로 옆이고, 멀리 나는 비행기 소리도 가깝다.

나그네, 군사 려/여旅

여객旅客, 여행旅行, 여정旅程, 여관旅館, 여권旅券 등에 쓰이는 ‘旅’라는 글자는 ‘나그네 려/여’ 혹은 ‘군사 려/여’라고 한다. 옛날 글자는 ‘𣃨’로서 깃발이 나부끼는 상황에서 깃발 아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형상화했다. 그래서 이를 ‘나부낄 언㫃’이라는 글자와 ‘좇을 종从’이라는 글자가 합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때 ‘나부낄 언㫃’을 ‘방향 방方’과 ‘사람 인人’의 결합으로 보아서 사람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알리는 깃발 신호라고 보면 앞뒤가 이어진다. 깃발은 사람들 집합체의 상징이다. 깃발 아래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은 함께 적을 대적해야 하는 전쟁과도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니 실제로 ‘旅’는 500명을 ‘一旅’라고 하는 군대 조직의 단위이기도 했다. 깃발 아래 모인 군인들은 전쟁을 위해 오랜 기간 집을 떠나 사방팔방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旅’에는 ‘여행하다’ ‘나그네’ ‘무리’ ‘나돌아다니다’라는 뜻이 담기게 되었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旅’에는 하늘에 제사를 바치는 역할을 해야 했던 왕이 많은 무리를 이끌고 이동하는 모습도 담고 있어서 ‘제사祭祀’의 이름이나 ‘제사 지내다’라는 뜻이 담겨있다고도 보지만 깃발 아래 많은 사람이 이동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뜻이다. 흔히 집단을 이루어서 해외여행을 다니는 패키지를 ‘깃발 부대’라고 부르는 것이 아마 이런 연유이지 싶다.

‘旅’라는 글자와 함께 만들어진 낱말 중 가장 멋지고도 보편적인 말은 아마도 ‘여행旅行’이다. ‘여행’이라는 말만큼 인생을 잘 상징하는 말이 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하나의 깃발 아래에 모여 있는 우주 만물이 각기 ‘계시’를 찾아 여행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가佛家의 오욕은 수면욕睡眠慾, 식욕食慾, 색욕色慾, 명예욕名譽慾, 재물욕財物慾이라 했고, 현대의 윌리엄 글라써William Glasser(1925∼2013년)는 개인의 욕구가 생존, 사랑, 힘, 자유, 즐거움 다섯 가지라고 했다. 어쩌면 이런 욕구들의 종합은 ‘여행욕旅行慾’이다. 욕구는 다스려야 한다. 그렇지만 사람은 누구나 여행을 꿈꾸고 계획한다. 사람은 일하지 않고 여행이나 하면서 사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 누구나의 꿈이라고 믿는다. 사람은 가슴이 뛸 때를 놓아두고 다리가 떨릴 때를 골라 하는 때늦음을 한탄하는 우매함 속에서도 여행을 바란다.

여행은 보는 것과 누리는 것, 그리고 소유하는 즐거움을 망라하는 놀이이다. 여행은 새로운 것, 낯선 것들과 지어내는 이야기이다. 여행은 누구에게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나면서도 ‘떠나고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서 이승에 사는 동안은 절대 끝나지 않을 인생길, ‘길 없는 길’의 여행을 다시 숙고하게 하는 숙제이다. 여행은 닻을 내릴 포구를 찾는 희망 속에서도 끝내 떠난 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귀향이다. 여행은 다시 돌아오는 귀향길에서도 누구나 떠남 자체가 보람되었다고 하는 미화이다. 여행은 나이가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자기 나이를 잊게 하는 마력이다. 여행은 다소의 허영과 모험, 영웅심과 동경, 전설과 환상이 뒤섞였다 해도 자기를 속이는 거짓이 함께 하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를 안은 무모함이다. 여행은 내 처지의 안타까움 안에서도 늘 꿈꾸는 동경이다.

옛날 여행을 떠나는 제자에게 스승은 꽃 한 송이를 꺾어오라 해서 그 꽃으로 제자가 가야 할 길의 길흉화복을 알려주는 화점花占으로 배웅했다. 배웅하는 스승은 고사하고 아무도 없이 혼자 떠났다 하더라도 여행은 의미라는 여행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개고생이고, 자칫 온갖 잡동사니를 짊어진 채 질질 끄는 고난의 행군이며 소모이다. 여행은 내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는 내가 만든 강박과 거짓 책임에서 스스로 벗어남이다. 여행은 바다와 산, 별과 사막, 사람과 낯섦을 찾아 떠나면서도 자기는 까맣게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이다. 여행은 별들을 보고 떠났다가 별이 길을 안내하는 지도가 아님을 알게 되는 과정이다. 여행은 길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멀리서 여행 떠나온 별들임을 발견하는 환희이다. 여행은 혼자이면서도 둘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미련未練이고 상념常念이며 그래서 서글픔이다. 여행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떠나면서도 자기를 벗어나는 인내, 침묵, 명상이다.

여행은 『머리(지성)에서 가슴(공감과 애정)까지, 그리고 가슴에서 발(삶의 현장과 변화)까지 이르는 공부이다.(신영복)』 여행은 『나와 나 자신을 갈라놓은 낭떠러지를 건너는 가장 중요한 여행을 생각하고, 이것이 없다면 다른 여행들은 아무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는 것을 아는 깨우침이다.(토마스 머톤)』 여행은 자신의 문에 이르기 위해 만나는 문마다 두드려야 하는 나그네이고, 안에 다다르기 위해 밖을 다니는 행로이다. 여행은 영원의 틈새를 흘낏 본 새들이 떠나서 먼 길과 긴 시간을 나는,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끝나는 법이 없는 미완이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여행은 언제나 미완이다. 성경의 여행은 뭐니 뭐니해도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여행이다.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향한 여행은 “어리석은 자의 말은 여행 중의 짐과 같고 지각 있는 이의 말은 기쁨이 된다.”(집회 21,16)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은 모든 일에 능통하다.”(집회 34,11) “나는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보았지만 내가 배운 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다.”(집회 34,12) 하는 말들처럼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을 알아가는 참 지혜의 습득 과정이었다. 그렇게 힘들었던 그 여행만큼 고생했던 바오로 사도의 여행 역시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2코린 11,26) 하는 말 그대로이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미완의 여로에 서 있다.

관계할/빗장 관, 당길 완關

‘관계할/빗장 관, 당길 완關’을 속자俗字로는 간단하게 ‘関’이라고 쓴다. 관문關門이니 관세關稅니 할 때 쓰는 글자이다. ‘관계할 관, 당길 완關’자는 왼쪽 문과 오른쪽 문을 가리키는 ‘문門’이라는 글자 안에 ‘실 사絲’, 그리고 ‘쌍상투 관丱’이라는 글자가 더해져 있다. ‘실 사絲’는 실의 원료가 되는 누에고치가 매달린 모습이고, ‘쌍상투 관丱’은 ‘卝’이라는 글자로서 어린아이의 머리털을 좌우左右로 갈라 두 개의 뿔같이 잡아맨 모양을 본떴다. 이를 종합하면 ‘관계할/빗장 관, 당길 완關(=関)’은 양쪽 문을 실 같은 것으로 단단히 잡아매어 묶고 빗장을 질러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게 된 상황을 뜻한다. 글자를 더 거슬러 올라가도 뜻은 마찬가지이다. ‘문 문門’ 안에 막대기 두 개를 꽂아놓고 그것들을 무엇인가로 서로 잡아매어 놓은 열쇠와 빗장을 ‘絲’자와 ‘丱’으로 표현하거나, 숫빗장을 암빗장에 찔러넣은 모습을 갖추어 ‘관계하다, 닫다, 가두다, 폐쇄하다, 묶여있다, 빗장’이라는 뜻을 갖는다. 내용이 같은 것처럼 보이고, 글자도 비슷하지만, ‘닫다, 막다, 가리다’라는 뜻을 표현할 때는 ‘닫을 폐閉’라는 글자를 쓴다.

COVID-19로 모두가 문을 닫아걸고, 서로 경계하며 거리 두기를 한다. 이른바 세계적 유행어가 되어버린 ‘Social distance’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관계할/빗장 관, 당길 완關’이 보여주듯이 지구라는 별 위에 살아가는 세상 인간 누구나 연결되어 있고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이는 ‘사이 뜰 격隔’이요 ‘닫을 폐閉’일 뿐이다. 문 안에 들어서 있는 사람들끼리 단단히 결속하여야겠지만, 문 안에 함께 있으면서도 누군가와 연결될 수 없어 외로운 수많은 사람과도 하나인 것을 알아서 관계를 맺어 함께 살아야 한다.

‘Social distance(사회적 거리)’라는 말에 반대되는 개념을 영어로 표현하면 ‘Social proximity(사회적 접근)’라는 말일 것이다. ‘사회적 거리’는 자칫 잘못하면 거리를 두어야 하는 상대방을 전제한다는 의미에서 이미 무엇인가의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의 개념이 된다. 모두 입을 모아 ‘사회적 거리 두기’를 외칠 때, ‘사회적 가까워지기’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는 많은 사람이 소외된 채 죽어간다. 그렇게 COBVID-19는 우리가 그동안 답하지 않고, 모른 척 살면서 외면하려 했던 본질적인 것에 대해 진실한 답을 하라 다그친다.

사이 뜰 격隔

‘사이 뜰 격隔’은 왼쪽에 붙어서 언덕이라는 뜻을 지닌 ‘언덕 부阝=阜’와 소릿값인 ‘막을 격鬲’이 합쳐진 글자이다. 너와 나 사이를 가로막는 언덕이나 장벽으로 갈라지고 나뉘어 가로막힌 상황이다. 그런데 ‘막을 격鬲’ 역시 항아리 같은 것을 올려놓고 밑에서 불을 지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상황을 묘사한 글자이니 이로 미루어 ‘사이 뜰 격隔’은 언덕과 언덕, 혹은 큰 언덕인 산과 산 사이의 공간이고 떨어져 있음이며 막힘이고, 경계를 넘어 멀리하다 보니 서로가 달리 바뀌어 가는 상황이다. ‘사이 뜰 격隔’에는 ‘칠, 부딪칠 격擊’이라는 뜻도 담겼다.

‘칠, 부딪칠 격擊’은 ‘손 수手’라는 하단부 위에 ‘수레 끌 수軗’라는 글자가 올라앉아 있다. ‘수레 끌 수軗’는 ‘수레 차車’와 ‘창 수殳’의 결합이니 수레 위에서 손에 창을 들고 상대방을 공격하고 친다는 뜻이다. 결국 ‘칠, 부딪칠 격擊’은 수레바퀴 같은 것이 돌면서 무엇인가에 부딪혀 큰 소리를 내는 상황이나 손으로 무엇을 가격하는 것을 넘어 수레 위에서 누군가를 공격하는 모양새다.

COVID-19라는 바이러스가 인간을 공격해왔고 급기야 하늘, 땅, 사람들 사이가 떨어졌으며(隔), 전자현미경으로나 보아야 보이는 작은 바이러스들이 온 세상을 내려친다(擊). 격리隔離(lockdown, isolation)요 격추擊墜(shutdown)이다. 누구나 난생처음 맞아보는 이변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별의 인사마저도 못한 채 서로 생을 달리해야만 했고, 아픈 이들을 돌보는 이들은 사투死鬪를 벌여야 하며, 서로는 두려움의 시선으로 살피고 움츠린다. 경험의 축적으로 살아가는 인간 사회는 사례가 없고 유례가 없어 당황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일상과 서로의 소중함을 발견하기 시작하고, 손으로는 닿지 못해도 마음으로 닿아야 하는 것들과 만지지는 못해도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를 새기며, 숨 가쁘게 급하기만 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우리가 그렇게 위대하다고 자부했었으나 그렇게도 작은 것 앞에서 속수무책일 만큼 연약함을 절감하며,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던 황갈색 이산화탄소로 뒤덮인 하늘이 푸른 빛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목격한다.(황색빛 하늘도 죽인 코로나···중국 대기가 파랗게 변했다-중앙일보, 2020.03.01. 참조)

하늘의 경고이자 숨 고르기이고, 땅의 쉼이며, 사람들이 기도하는 시간이다. 새들은 여전히 다시 울고, 꽃들은 다시 피기 시작하며, 봄이 다시 오고 있다. 낙엽이 수북한 숲속에 제멋에 살다가 요정의 구애를 아랑곳하지 않았던 수선화 몇 송이가 피었다.

“마리안 쉬라인(오늘 오후)”

소리, 그늘 음音

‘소리, 그늘 음音’은 원래 ‘말씀 언言’과 같은 글자에서 출발한다. ‘소리’와 ‘말’을 따로 구별하지 않다가 이를 서로 구별하기 위해서 ‘말씀 언言’의 ‘입 구口’에 ‘하나 일一’을 더함으로써 ‘말씀(말)’과 구별되는 ‘소리’를 나타낸다. 소리(音)와 구별되는 ‘말씀 언言’은 ‘매울 신辛’과 ‘입 구口’가 더해져 만들어진 글자인데, ‘매울 신辛’이 손잡이가 달린 쇠꼬챙이처럼 끝이 뾰족한 것을 가리키므로 얼굴의 구멍인 입(口)에서 나가 누군가 상대방에게 꽂히는 매서운(辛) 말이라고 풀이하기도 하는데, 대개는 입에 물고 부는 나팔과도 같은 악기를 그렸거나 입에서 퍼져나가는 말 자체의 형상을 묘사했다고 한다. 잔소리, 군소리, 흰소리(터무니없이 떠벌리는 말), 헛소리, 말 같은 소리에서처럼 소리와 말이 동의어로 쓰일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의 생각이 입을 통해 조직적으로 전해지는 말이나 말씀은 言이라 하고, 사람의 입을 통해 그저 나오는 소리나 그 밖 삼라만상의 소리를 통칭하여 音이라 할 것이다.

소리는 분명 말보다 먼저였다. 사람도 울음소리로 인생을 시작하여 점차 말을 하기 시작하니 말이다. 그리고 말 다음에 말이 기호가 된 글이었을 것이다. 소리는 땅의 소리, 하늘의 소리, 그리고 사람의 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가 어우러져 빛이 되고 어둠이 되며, 있는 것들의 꼴이 되고, 서로에게 기억과 존재 이유가 된다.

땅의 소리는 꽃과 새싹의 소리, 폭포와 불, 그리고 하늘을 맞는 땅의 소리, 계절과 얼굴을 바꾸는 소리, 땅에 인연을 맺어 발 디디고 기는 것들의 움직임이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은 주인 노릇을 하느라 사람이 아프게 한 땅의 신음이다. 하늘의 소리는 바람과 구름,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는 새의 소리이며 징조와 신호를 내는 예언이고 계시이다. 사람의 소리는 목소리와 기록, 체험과 기억의 맥박, 마음과 영혼의 울림과 탄식, 곡哭이며 노래와 찬미, 피리와 수금, 비파와 꽹과리, 북鼓처럼 하늘 모양을 본떠 만든 것들의 소리, 스스로 목소리를 지닌 인간의 눈물, 때로는 인간 자신조차 모르는 이야기이다.

새소리가 바뀌었다. 계절이 바뀌었다는 소리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여기저기 초록 잎과 개나리가 내미는 노란 끝의 소리, 창밖으로 보이는 큰 나뭇가지에 붉은 봉오리들의 소리가 맺혔으며, 사슴들은 느긋하다.

수도 없이 소리 내어 외웠을 작은 기도문 하나를 영어로 프린트해서 지갑에 담았다. 『Hail, Holy Queen, Mother of Mercy, our life, our sweetness, and our hope! To you do we cry, poor banished children of Eve; to you do we send up our sighs, mourning and weeping in this vale of tears. Turn, then, most gracious advocate, your eyes of mercy toward us; and after this our exile, show unto us the blessed fruit of your womb, Jesus. O clement, O loving, O sweet Virgin Mary! (여왕이시며 사랑이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 당신 우러러 하와의 그 자손들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나이다. 슬픔의 골짜기에서,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여, 불쌍한 우리 인자로운 눈으로 굽어보소서. 귀양살이 끝날 그때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를 뵙게 하소서.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

독 독毒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계가 두려움을 갖고 많은 이가 신음하며 몸살을 앓고 목숨을 잃는다. 바이러스라는 말의 근원을 쫓아 올라가면서 바이러스(virus)와 세균(bacterium, germ)의 차이를 공부한다. 세균보다는 크기가 아주 작고 늦게 발견되었으며, 살아있는 생물체인 숙주宿主, 곧 호스트가 있어야만 활동할 수 있는 생명과 물질 사이에 존재하는 바이러스는 라틴어에서 ‘끈적끈적한 액체류 같은 독毒slimy liquid, poison’을 뜻하는데 한자 말로는 ‘병독病毒’이라 옮긴다. 반면 독립된 세포로 이루어진 생물인 ‘세균細菌’에서 ‘버섯 균菌’이라는 글자는 ‘풀 초艹’와 ‘곳집 균囷’의 합자인데, ‘벼 화禾’를 가운데 품고 수확한 벼를 보관하던 창고(囗)를 그린 ‘곳집’이어서 곰팡이가 잘 자라던 습한 장소이고, 艹는 그곳에서 자라던 ‘버섯(곰팡이)’이다. 세균은 공기 중이나 사람의 몸속 어디서나 먹이가 있는 곳에서 증식한다. 인체에 위협을 가하는 바이러스는 항바이러스제로 치료하고, 세균류는 항생제로 치료한다.

바이러스는 결국 독毒이다. 그런데 그 ‘독 독毒’이라는 글자는 ‘어미 모母’를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어미 모母’라는 글자를 약간 옆으로 돌려볼 때 이는 ‘여자 여女’라는 글자에 젖을 물려 아기를 양육하는 어미 가슴을 두 개의 점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여자 여女’를 바탕으로 하는 글자에서 사물이나 사람에게 해가 되는 독을 가리키는 글자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의외이다. ‘어미 母’라는 글자 위에 ‘사람 인人’을 올리면 ‘매양 매每’가 되면서 날마다 젖을 물려야 하는 어머니, 혹은 매번 어머니로부터 젖을 먹어야 하는 아기로 ‘늘’이나 ‘마다’라는 뜻을 담지만, ‘어미 母’ 위의 ‘사람 인人’이 통상 여성들이 머리에 꽂는 비녀이니 비녀가 둘이 될 때면 ‘음란할 애毐’, 셋 이상 여럿이면 ‘독 독毒’이 된다. 사전도 『‘독 독毒’은 설이 분분하나 ‘음란할 애毐’에 가로획이 하나 더해짐이 분명하다. 머리에 비녀를 여럿 꽂아 화려하게 장식한 여인(母)에서부터 ‘농염하다’는 뜻을 그렸고, 그러한 여자는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독’같은 존재라는 뜻에서 ‘독’의 의미가 나왔다. 비녀를 꽂지 않은 모습이면 母이고, 하나를 꽂은 모습이면 ‘매양 매每’이며, 여럿 꽂은 모습이 毒으로 표현되었다. 설문해자에서는 ‘떡잎 날 철屮’과 ‘음란할 애毐’로 구성되어 독초를 말한다고 했다.(하영삼, 한자 어원 사전)』라고 풀이한다.

비녀가 셋 이상이어서 독이 되는 ‘팜 파탈femme fatale’이든, 어둠에서 번식한 음란의 싹이든, ‘독毒’은 일단 무섭고 두렵다. 인간에게 중독이고 치명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셀 수 없는 인간의 생각이 탐욕(貪慾), 분노(진‧瞋), 어리석음(치‧癡)이라는 3독三毒이 묻은 가시들 같아서 인간을 윤회시키는 전염병의 원균原菌들이라 했다.

그렇지만 독버섯이 그렇듯 독초는 그 아름다움에 비해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약藥’과 ‘독毒’을 함께 지닌 여린 품종이기도 하다. 백신도 미량의 독을 미리 주입해서 면역을 자가생성하자고 하는 원리가 아니던가? 독초는 사람들이 독초라고 규정했을 뿐이지 독초 자신이 스스로 칭한 것은 아니다. 자신은 그저 풀이다. ‘독초’는 인간의 논리이다. 그렇듯 꽃밭에 숨은 독사, 낙원의 뱀이 지녔을 독에는 호기심과 상상, 두려움과 진귀함, 섬뜩함과 놀라움, 징그러움과 아름다움, 쓰디쓴 것과 달콤함, 욕심과 기쁨, 격정과 쾌락, 죄와 탐스러움, 미움과 사랑, 죽음과 삶이 함께 담겼다.

어수선한 요즘이다. 생각이 상상되고 상상이 환상, 망상을 넘어 살상殺傷이 된다. 사람과 세상사가 본래 정중동靜中動이며 동중정動中靜이다. 정신없이 살다가 정신 차려야 할 순간이다. 해독解毒의 때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지혜 1,14) 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8) 하셨다.

바람 풍風

‘바람 풍風’은 원래 ‘봉새 봉鳳’과 같이 쓰여서 ‘무릇 범凡’과 ‘벌레 충‧훼虫’, 혹은 ‘새 조鳥’의 합자로 본다. 돛단배의 돛을 그린 ‘범凡’은 바람 없이 갈 수 없는 바람 그 자체이고, 옛 중국에서는 곤충이나 새가 모두 ‘벌레 충‧훼虫’에 속할 수 있었으므로 그렇게 썼을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바람이 불면 벌레가 생긴다는 생각(풍동충생風動蟲生)으로 ‘벌레 충‧훼虫’이 더해졌다고 하기도 하고, ‘새 조鳥’를 썼던 것은 봉새의 날갯짓으로 바람이 생긴다고 생각하여 그랬을 것이라 한다.

여덟 방위를 갈랐듯이 바람은 사방팔방에서 분다. 그렇게 부는 바람은 풍전등화風前燈火나 풍비박산風飛雹散처럼 형상이고, 미풍양속美風良俗이나 풍기문란風紀紊亂, 위풍당당威風堂堂처럼 풍습이나 풍속을 넘어 풍모나 풍채이며, 풍문風聞이나 풍설風說처럼 먼 곳에서 날아와 작은 틈새라도 어김없이 파고드는 속성이고, 풍경風景, 풍물風物, 풍광風光처럼 멋진 것이다. 바람은 농경사회에서 작풍作風을 관장하는 신이어서 ‘태풍 태颱’가 되면 크게(台·대, 臺의 속자) 부는 강한 바람이고, ‘폭풍 표飆’가 되면 사나운 개 여럿이 달려들 듯(猋·개 달리는 모양 표) 휘몰아치는 폭풍이며, ‘회오리 바람 표飄’가 되면 불꽃이 튀어 가볍게 솟아오르듯(票·표) 하늘로 솟아오르는 ‘회오리바람’이다.

비가시적인 실체인 바람은 사람들이 보고 싶고 손에 잡아보고 싶은 꿈이고, 새들이 높은 곳에서 활공滑空할 때 모든 것을 벗어나 유유자적하는 놀이이며, 연鳶(솔개 연)이 될 때 너와 나를 넘어 가면이고 하늘에 그리는 그림이자 환상이다. 바람은 나는 것들로 자신을 드러낸다. 바람은 아무도 볼 수 없지만, 누구나 볼 수 있게 자신만만하여 초당 몇 미터를 가는지로 자신의 힘과 방향을 과시하고, 골짜기에서 꼭대기를 향하여 가다가 꼭대기에서 골짜기로, 물에서 뭍으로 가다가 뭍에서 물로 가면서 종횡무진縱橫無盡이다. 새·곤충·꽃가루·종자 ·구름을 날리면서 바람은 제 할 일을 하는 우주의 숨과 기운이다. 바람은 모든 것을 씻은 듯이 날려버리는 찰나요 허무와 불안이어서 저돌적이고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풍요의 숨결이고 성스러운 정신이며 인간이 노래로 듣고 싶어 하는 가락이다.

밤새 어디서 어떻게 부는지도 모르게 큰소리를 치며 두려울 만큼 바람이 강하고 무섭게 불었다. 숲에는 나뭇가지들이 수북이 떨어져 내렸고, 다람쥐와 사슴들은 일제히 숨었다. 두 마리의 새들만이 높이 난다. 도토리들이 지천이라 다람쥐가 겨울 대비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따뜻하다더니 기온도 큰 폭으로 떨어지고 급기야 저녁나절에는 백 퍼센트의 확률로 눈이 내린다고 한다.

주님께서 엘리야와 만나실 때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1열왕 19,11-12)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에게 예수님은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8) 하신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 때, 너와 나 사이에 하늘 바람이 불면, 우리는 날고 영에서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