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 엽, 땅 이름 섭, 책 접葉

‘(나뭇)잎 엽葉’은 ‘풀 초艹’ 더하기 ‘인간 세世’ 더하기 ‘나무 목木’으로 구성되었다. 한가운데 ‘세상/인간 세世’를 품고 있는 글자이다. 나뭇잎을 가리키는 葉보다 枼이라는 글자가 먼저 쓰였는데, 이 글자보다도 먼저 나뭇잎을 가리키는 글자는 ‘世’라는 글자였다. ‘世’라는 글자 자체가 나뭇가지에서 돋아나는 순이나 잎사귀를 본떠 만들어진 글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나뭇잎이 나고 지는 것은 곧 해가 바뀌는 것이어서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는 ‘생애’의 뜻으로 점점 발전되어 일생이나 세대라는 뜻으로까지 나아간다. 같은 글자이지만, 온전히 인간이나 일생, 생애를 뜻하는 글자로는 ‘인간/대 세卋’라는 글자로 구별하여 쓰기도 한다. 이 글자는 ‘열 십十’이 세 개 겹쳐진 의미로 대략 30년을 한 세대로 지칭하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世’가 본래 뜻인 나뭇잎을 잃을 수 있으므로 그 글자 밑에 ‘나무 목木’을 붙여 ‘나뭇잎 엽枼’을 만들었다가 그 글자 위에 ‘풀 초艹’까지 더해 오늘의 ‘나뭇잎 엽葉’이 되었다. 이는 보통으로 나뭇잎, 꽃잎, 잎처럼 얇은 종이 같은 것, 책의 쪽, 동전을 세는 단위 등으로 쓰이고 ‘중엽中葉’에서처럼 한 세대나 시기를 뜻하기도 한다.

잎은 놀이개다. 백 보나 떨어진 거리에서 쏜 화살의 과녁이 된 버들잎(백보천양百步穿楊)이 있고, 나뭇잎을 가르는 검劍이 있으며, 애들이 한 장 한 장 떼어내며 가위바위보를 할 수 있어서이다.

잎은 가리개다. 첫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렸던 무화과나무 잎, 비오는 날 머리를 가리는 연잎, 당唐나라의 양옥환楊玉環이 손으로 건드렸더니 당해낼 수 없는 미모 앞에 부끄러워 잎을 말아 올려 자신을 숨겼다는 함수화含羞花 때문이다.

잎은 치장이다. 여러 색의 꽃잎으로 즙을 짜 굳혀 만든 연지臙脂로 뺨에 홍분紅粉을 칠했다는 복숭아 꽃잎이 있고 즈려밟고 가시라는 꽃길이 있어서이다.

잎은 대비對比이다. 한 송이 붉은 꽃을 돋보이게 하는 푸른 잎들이 있으며(만록총중홍일점萬綠叢中紅一點), 한해살이풀이지만 푸른 물감의 원료가 되는 청출어람靑出於藍(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의 쪽잎 때문이다.

잎은 계략이다. 벌레가 좋아하는 꿀로 역모逆謀의 글을 써서 역사를 바꾸어가던 음모陰謀의 나뭇잎이 있어서이다.

잎은 낭만이다. 연서戀書와 시詩의 바탕으로 붉게 물든 감나무잎(시엽지枾葉紙)이 있고, 노란 은행잎으로 덮인 길을 가는 연인의 팔짱 낀 모습이 있어서 그렇고, 이른 아침 이슬 맺힌 풀잎이 있기 때문이다.

잎은 세월이다. 섬돌 앞에서 가을을 알리는 오동나무 잎(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이 있어서이다.

잎은 거름이요 순환이다. 온갖 것을 말없이 받아들여 쌓이고 쌓이다가 버무리고 뒤섞이며 밟히고 썩어 생명을 낳는 거룩함을 담았기 때문이다.

잎은 먹거리다. 온 세상 언제 어디라도 한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있어서 여름 맛을 주는 깻잎과 상춧잎과 고춧잎을 비롯해 가난한 시절 뒷동산에만 오르면 누구나 캘 수 있었던 백여덟 가지나 된다는 나물 잎들이 있어서이다.

잎은 한恨이다. 망망대해에서 한 잎의 좁은 배를 탄 좁쌀 같은 인생살이의 슬픈 일엽편주一葉片舟와 그 위의 술잔이 있고, 빈산 잎이 지고 비마저 부슬부슬(권필權韠·1569~1612년 : 공산목락우소소空山木落雨蕭蕭)대는 시가 있으며, ‘나뭇잎이 푸르대야 시어머니보다 더 푸르랴?’ 하던 민요가 있기 때문이다.

잎은 사유와 성찰이다. 꺾이고 구부러지며 잎새의 폭이 풍성하고 수척해지는 변화와 반복 속에서 마음을 속이지 않고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으로만 그릴 수 있고 결코 남의 눈을 속일 수 없다는 난초의 잎이 있어서이다.

잎은 향이다. 덖고 우려 즐기는 찻잎과 선禪이기 때문이다.

잎은 길이다. 9년 동안 좌선하신(면벽좌선面壁坐禪) 달마대사를 동쪽으로 모셔 온 갈댓잎(노엽달마蘆葉達磨), 그리고 그 달마대사께 향기로 움직이는 동쪽의 땅을 펼쳐준 다섯 장의 꽃잎(오엽분피진단개五葉芬披震旦開-震旦:동쪽의 땅)이 있으며, 비가 거센 4월 어느 날 작은 벚꽃잎들로 하얗게 뒤덮인 길이 있어서이다.

잎은 죽음이다. 다양한 색과 모양으로 유일하게 사람이 이승을 떠나는 장례식을 송별하면서 죽음의 신비처럼 많은 꽃잎으로 자신의 속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 국화꽃 잎이 있기 때문이다.

숲에 들었더니 헤아릴 수도 없는 모든 잎이 하나도 예외 없이 전부 각자 자기 자리를 잡았다. 햇빛은 잎을 헤치고 감히 들어올 수가 없어졌으며 잎들 사이로 간간이 바람과 더불어 즐거운 숨바꼭질을 할 뿐이다. 위로는 새들이 가지를 바꾸고, 밑으로는 다람쥐들이 부스럭거리느라 바쁘고, 저만치서는 사슴들이 가끔 경계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가만히 쳐다본다. 친구에게는 곧잘 모습을 보여준다던 갈색과 회색 여우는 야속하게도 좀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답답할/번민할 민悶

‘답답할/번민할 민悶’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글자가 생긴 그대로 빗장 지른 문 안에 갇힌 사람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마저 곤란해져 괴로워하고 말 그대로 답답해서 미칠 지경인 경우를 뜻하면서 ‘우매하다, 밀폐하다’의 뜻으로까지 나아간다. 문 안에서 안(내면)으로 고통받는 상황이다. 흔히 ‘번민煩悶, 고민苦悶’ 할 때 쓰는 글자이다.

covid19 때문에 사람들이 갇힌 지 한 달도 훨씬 넘었다. 답답해한다. 뉴욕 날씨도 좀체 도와줄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 비가 내리며 흐리고 바람마저 거센 채, 봄인 줄도 모르게, 그렇게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날이 반짝하고 햇빛이라도 비칠라치면 넓은 이곳에는 공원마저 닫혀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몰려온다. 마스크를 쓰고서도 사람들은 재잘거리고, 성장한 딸과 아빠는 연신 뛴다.

숨었던 다람쥐들이 이리저리 바쁘고, 그라운드 호그라는 녀석이 연신 이 굴에서 보였다가 저 굴에서 보이며, 사슴들은 태연하게 무리를 짓고, 하늘이나 나뭇가지에 있어야 할 새들도 풀밭 위를 종종거린다. 길 잃은 야생 칠면조 한 마리는 며칠 전부터 맨날 같은 곳에서 겁 없이 뒤뚱거리고, 현관 바깥쪽 높은 곳에서는 수백 수천의 꿀벌들이 윙윙거린다. 움직이는 것들이 부산스러운 가운데, 개나리와 목련 같은 몇몇 꽃은 이미 졌고, 나무들은 하나같이 조용히, 그러나 여지없이 연둣빛과 초록빛들을 점점 더 내밀어 보이면서 세를 과시한다. 사람들이 답답하니 그동안 사람들 탓에 답답했을 것들이 활발하다.

벌써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시작되면서 모처럼 화창한 5월 셋째 날, 그리고 일요일, 창밖의 새 소리는 바로 옆이고, 멀리 나는 비행기 소리도 가깝다.

나그네, 군사 려/여旅

여객旅客, 여행旅行, 여정旅程, 여관旅館, 여권旅券 등에 쓰이는 ‘旅’라는 글자는 ‘나그네 려/여’ 혹은 ‘군사 려/여’라고 한다. 옛날 글자는 ‘𣃨’로서 깃발이 나부끼는 상황에서 깃발 아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형상화했다. 그래서 이를 ‘나부낄 언㫃’이라는 글자와 ‘좇을 종从’이라는 글자가 합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때 ‘나부낄 언㫃’을 ‘방향 방方’과 ‘사람 인人’의 결합으로 보아서 사람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알리는 깃발 신호라고 보면 앞뒤가 이어진다. 깃발은 사람들 집합체의 상징이다. 깃발 아래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은 함께 적을 대적해야 하는 전쟁과도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니 실제로 ‘旅’는 500명을 ‘一旅’라고 하는 군대 조직의 단위이기도 했다. 깃발 아래 모인 군인들은 전쟁을 위해 오랜 기간 집을 떠나 사방팔방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旅’에는 ‘여행하다’ ‘나그네’ ‘무리’ ‘나돌아다니다’라는 뜻이 담기게 되었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旅’에는 하늘에 제사를 바치는 역할을 해야 했던 왕이 많은 무리를 이끌고 이동하는 모습도 담고 있어서 ‘제사祭祀’의 이름이나 ‘제사 지내다’라는 뜻이 담겨있다고도 보지만 깃발 아래 많은 사람이 이동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뜻이다. 흔히 집단을 이루어서 해외여행을 다니는 패키지를 ‘깃발 부대’라고 부르는 것이 아마 이런 연유이지 싶다.

‘旅’라는 글자와 함께 만들어진 낱말 중 가장 멋지고도 보편적인 말은 아마도 ‘여행旅行’이다. ‘여행’이라는 말만큼 인생을 잘 상징하는 말이 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하나의 깃발 아래에 모여 있는 우주 만물이 각기 ‘계시’를 찾아 여행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가佛家의 오욕은 수면욕睡眠慾, 식욕食慾, 색욕色慾, 명예욕名譽慾, 재물욕財物慾이라 했고, 현대의 윌리엄 글라써William Glasser(1925∼2013년)는 개인의 욕구가 생존, 사랑, 힘, 자유, 즐거움 다섯 가지라고 했다. 어쩌면 이런 욕구들의 종합은 ‘여행욕旅行慾’이다. 욕구는 다스려야 한다. 그렇지만 사람은 누구나 여행을 꿈꾸고 계획한다. 사람은 일하지 않고 여행이나 하면서 사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 누구나의 꿈이라고 믿는다. 사람은 가슴이 뛸 때를 놓아두고 다리가 떨릴 때를 골라 하는 때늦음을 한탄하는 우매함 속에서도 여행을 바란다.

여행은 보는 것과 누리는 것, 그리고 소유하는 즐거움을 망라하는 놀이이다. 여행은 새로운 것, 낯선 것들과 지어내는 이야기이다. 여행은 누구에게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나면서도 ‘떠나고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서 이승에 사는 동안은 절대 끝나지 않을 인생길, ‘길 없는 길’의 여행을 다시 숙고하게 하는 숙제이다. 여행은 닻을 내릴 포구를 찾는 희망 속에서도 끝내 떠난 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귀향이다. 여행은 다시 돌아오는 귀향길에서도 누구나 떠남 자체가 보람되었다고 하는 미화이다. 여행은 나이가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자기 나이를 잊게 하는 마력이다. 여행은 다소의 허영과 모험, 영웅심과 동경, 전설과 환상이 뒤섞였다 해도 자기를 속이는 거짓이 함께 하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를 안은 무모함이다. 여행은 내 처지의 안타까움 안에서도 늘 꿈꾸는 동경이다.

옛날 여행을 떠나는 제자에게 스승은 꽃 한 송이를 꺾어오라 해서 그 꽃으로 제자가 가야 할 길의 길흉화복을 알려주는 화점花占으로 배웅했다. 배웅하는 스승은 고사하고 아무도 없이 혼자 떠났다 하더라도 여행은 의미라는 여행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개고생이고, 자칫 온갖 잡동사니를 짊어진 채 질질 끄는 고난의 행군이며 소모이다. 여행은 내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는 내가 만든 강박과 거짓 책임에서 스스로 벗어남이다. 여행은 바다와 산, 별과 사막, 사람과 낯섦을 찾아 떠나면서도 자기는 까맣게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이다. 여행은 별들을 보고 떠났다가 별이 길을 안내하는 지도가 아님을 알게 되는 과정이다. 여행은 길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멀리서 여행 떠나온 별들임을 발견하는 환희이다. 여행은 혼자이면서도 둘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미련未練이고 상념常念이며 그래서 서글픔이다. 여행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떠나면서도 자기를 벗어나는 인내, 침묵, 명상이다.

여행은 『머리(지성)에서 가슴(공감과 애정)까지, 그리고 가슴에서 발(삶의 현장과 변화)까지 이르는 공부이다.(신영복)』 여행은 『나와 나 자신을 갈라놓은 낭떠러지를 건너는 가장 중요한 여행을 생각하고, 이것이 없다면 다른 여행들은 아무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는 것을 아는 깨우침이다.(토마스 머톤)』 여행은 자신의 문에 이르기 위해 만나는 문마다 두드려야 하는 나그네이고, 안에 다다르기 위해 밖을 다니는 행로이다. 여행은 영원의 틈새를 흘낏 본 새들이 떠나서 먼 길과 긴 시간을 나는,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끝나는 법이 없는 미완이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여행은 언제나 미완이다. 성경의 여행은 뭐니 뭐니해도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여행이다.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향한 여행은 “어리석은 자의 말은 여행 중의 짐과 같고 지각 있는 이의 말은 기쁨이 된다.”(집회 21,16)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은 모든 일에 능통하다.”(집회 34,11) “나는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보았지만 내가 배운 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다.”(집회 34,12) 하는 말들처럼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을 알아가는 참 지혜의 습득 과정이었다. 그렇게 힘들었던 그 여행만큼 고생했던 바오로 사도의 여행 역시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2코린 11,26) 하는 말 그대로이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미완의 여로에 서 있다.

관계할/빗장 관, 당길 완關

‘관계할/빗장 관, 당길 완關’을 속자俗字로는 간단하게 ‘関’이라고 쓴다. 관문關門이니 관세關稅니 할 때 쓰는 글자이다. ‘관계할 관, 당길 완關’자는 왼쪽 문과 오른쪽 문을 가리키는 ‘문門’이라는 글자 안에 ‘실 사絲’, 그리고 ‘쌍상투 관丱’이라는 글자가 더해져 있다. ‘실 사絲’는 실의 원료가 되는 누에고치가 매달린 모습이고, ‘쌍상투 관丱’은 ‘卝’이라는 글자로서 어린아이의 머리털을 좌우左右로 갈라 두 개의 뿔같이 잡아맨 모양을 본떴다. 이를 종합하면 ‘관계할/빗장 관, 당길 완關(=関)’은 양쪽 문을 실 같은 것으로 단단히 잡아매어 묶고 빗장을 질러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게 된 상황을 뜻한다. 글자를 더 거슬러 올라가도 뜻은 마찬가지이다. ‘문 문門’ 안에 막대기 두 개를 꽂아놓고 그것들을 무엇인가로 서로 잡아매어 놓은 열쇠와 빗장을 ‘絲’자와 ‘丱’으로 표현하거나, 숫빗장을 암빗장에 찔러넣은 모습을 갖추어 ‘관계하다, 닫다, 가두다, 폐쇄하다, 묶여있다, 빗장’이라는 뜻을 갖는다. 내용이 같은 것처럼 보이고, 글자도 비슷하지만, ‘닫다, 막다, 가리다’라는 뜻을 표현할 때는 ‘닫을 폐閉’라는 글자를 쓴다.

COVID-19로 모두가 문을 닫아걸고, 서로 경계하며 거리 두기를 한다. 이른바 세계적 유행어가 되어버린 ‘Social distance’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관계할/빗장 관, 당길 완關’이 보여주듯이 지구라는 별 위에 살아가는 세상 인간 누구나 연결되어 있고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이는 ‘사이 뜰 격隔’이요 ‘닫을 폐閉’일 뿐이다. 문 안에 들어서 있는 사람들끼리 단단히 결속하여야겠지만, 문 안에 함께 있으면서도 누군가와 연결될 수 없어 외로운 수많은 사람과도 하나인 것을 알아서 관계를 맺어 함께 살아야 한다.

‘Social distance(사회적 거리)’라는 말에 반대되는 개념을 영어로 표현하면 ‘Social proximity(사회적 접근)’라는 말일 것이다. ‘사회적 거리’는 자칫 잘못하면 거리를 두어야 하는 상대방을 전제한다는 의미에서 이미 무엇인가의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의 개념이 된다. 모두 입을 모아 ‘사회적 거리 두기’를 외칠 때, ‘사회적 가까워지기’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는 많은 사람이 소외된 채 죽어간다. 그렇게 COBVID-19는 우리가 그동안 답하지 않고, 모른 척 살면서 외면하려 했던 본질적인 것에 대해 진실한 답을 하라 다그친다.

사이 뜰 격隔

‘사이 뜰 격隔’은 왼쪽에 붙어서 언덕이라는 뜻을 지닌 ‘언덕 부阝=阜’와 소릿값인 ‘막을 격鬲’이 합쳐진 글자이다. 너와 나 사이를 가로막는 언덕이나 장벽으로 갈라지고 나뉘어 가로막힌 상황이다. 그런데 ‘막을 격鬲’ 역시 항아리 같은 것을 올려놓고 밑에서 불을 지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상황을 묘사한 글자이니 이로 미루어 ‘사이 뜰 격隔’은 언덕과 언덕, 혹은 큰 언덕인 산과 산 사이의 공간이고 떨어져 있음이며 막힘이고, 경계를 넘어 멀리하다 보니 서로가 달리 바뀌어 가는 상황이다. ‘사이 뜰 격隔’에는 ‘칠, 부딪칠 격擊’이라는 뜻도 담겼다.

‘칠, 부딪칠 격擊’은 ‘손 수手’라는 하단부 위에 ‘수레 끌 수軗’라는 글자가 올라앉아 있다. ‘수레 끌 수軗’는 ‘수레 차車’와 ‘창 수殳’의 결합이니 수레 위에서 손에 창을 들고 상대방을 공격하고 친다는 뜻이다. 결국 ‘칠, 부딪칠 격擊’은 수레바퀴 같은 것이 돌면서 무엇인가에 부딪혀 큰 소리를 내는 상황이나 손으로 무엇을 가격하는 것을 넘어 수레 위에서 누군가를 공격하는 모양새다.

COVID-19라는 바이러스가 인간을 공격해왔고 급기야 하늘, 땅, 사람들 사이가 떨어졌으며(隔), 전자현미경으로나 보아야 보이는 작은 바이러스들이 온 세상을 내려친다(擊). 격리隔離(lockdown, isolation)요 격추擊墜(shutdown)이다. 누구나 난생처음 맞아보는 이변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별의 인사마저도 못한 채 서로 생을 달리해야만 했고, 아픈 이들을 돌보는 이들은 사투死鬪를 벌여야 하며, 서로는 두려움의 시선으로 살피고 움츠린다. 경험의 축적으로 살아가는 인간 사회는 사례가 없고 유례가 없어 당황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일상과 서로의 소중함을 발견하기 시작하고, 손으로는 닿지 못해도 마음으로 닿아야 하는 것들과 만지지는 못해도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를 새기며, 숨 가쁘게 급하기만 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우리가 그렇게 위대하다고 자부했었으나 그렇게도 작은 것 앞에서 속수무책일 만큼 연약함을 절감하며,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던 황갈색 이산화탄소로 뒤덮인 하늘이 푸른 빛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목격한다.(황색빛 하늘도 죽인 코로나···중국 대기가 파랗게 변했다-중앙일보, 2020.03.01. 참조)

하늘의 경고이자 숨 고르기이고, 땅의 쉼이며, 사람들이 기도하는 시간이다. 새들은 여전히 다시 울고, 꽃들은 다시 피기 시작하며, 봄이 다시 오고 있다. 낙엽이 수북한 숲속에 제멋에 살다가 요정의 구애를 아랑곳하지 않았던 수선화 몇 송이가 피었다.

“마리안 쉬라인(오늘 오후)”

소리, 그늘 음音

‘소리, 그늘 음音’은 원래 ‘말씀 언言’과 같은 글자에서 출발한다. ‘소리’와 ‘말’을 따로 구별하지 않다가 이를 서로 구별하기 위해서 ‘말씀 언言’의 ‘입 구口’에 ‘하나 일一’을 더함으로써 ‘말씀(말)’과 구별되는 ‘소리’를 나타낸다. 소리(音)와 구별되는 ‘말씀 언言’은 ‘매울 신辛’과 ‘입 구口’가 더해져 만들어진 글자인데, ‘매울 신辛’이 손잡이가 달린 쇠꼬챙이처럼 끝이 뾰족한 것을 가리키므로 얼굴의 구멍인 입(口)에서 나가 누군가 상대방에게 꽂히는 매서운(辛) 말이라고 풀이하기도 하는데, 대개는 입에 물고 부는 나팔과도 같은 악기를 그렸거나 입에서 퍼져나가는 말 자체의 형상을 묘사했다고 한다. 잔소리, 군소리, 흰소리(터무니없이 떠벌리는 말), 헛소리, 말 같은 소리에서처럼 소리와 말이 동의어로 쓰일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의 생각이 입을 통해 조직적으로 전해지는 말이나 말씀은 言이라 하고, 사람의 입을 통해 그저 나오는 소리나 그 밖 삼라만상의 소리를 통칭하여 音이라 할 것이다.

소리는 분명 말보다 먼저였다. 사람도 울음소리로 인생을 시작하여 점차 말을 하기 시작하니 말이다. 그리고 말 다음에 말이 기호가 된 글이었을 것이다. 소리는 땅의 소리, 하늘의 소리, 그리고 사람의 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가 어우러져 빛이 되고 어둠이 되며, 있는 것들의 꼴이 되고, 서로에게 기억과 존재 이유가 된다.

땅의 소리는 꽃과 새싹의 소리, 폭포와 불, 그리고 하늘을 맞는 땅의 소리, 계절과 얼굴을 바꾸는 소리, 땅에 인연을 맺어 발 디디고 기는 것들의 움직임이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은 주인 노릇을 하느라 사람이 아프게 한 땅의 신음이다. 하늘의 소리는 바람과 구름,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는 새의 소리이며 징조와 신호를 내는 예언이고 계시이다. 사람의 소리는 목소리와 기록, 체험과 기억의 맥박, 마음과 영혼의 울림과 탄식, 곡哭이며 노래와 찬미, 피리와 수금, 비파와 꽹과리, 북鼓처럼 하늘 모양을 본떠 만든 것들의 소리, 스스로 목소리를 지닌 인간의 눈물, 때로는 인간 자신조차 모르는 이야기이다.

새소리가 바뀌었다. 계절이 바뀌었다는 소리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여기저기 초록 잎과 개나리가 내미는 노란 끝의 소리, 창밖으로 보이는 큰 나뭇가지에 붉은 봉오리들의 소리가 맺혔으며, 사슴들은 느긋하다.

수도 없이 소리 내어 외웠을 작은 기도문 하나를 영어로 프린트해서 지갑에 담았다. 『Hail, Holy Queen, Mother of Mercy, our life, our sweetness, and our hope! To you do we cry, poor banished children of Eve; to you do we send up our sighs, mourning and weeping in this vale of tears. Turn, then, most gracious advocate, your eyes of mercy toward us; and after this our exile, show unto us the blessed fruit of your womb, Jesus. O clement, O loving, O sweet Virgin Mary! (여왕이시며 사랑이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 당신 우러러 하와의 그 자손들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나이다. 슬픔의 골짜기에서,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여, 불쌍한 우리 인자로운 눈으로 굽어보소서. 귀양살이 끝날 그때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를 뵙게 하소서.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

독 독毒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계가 두려움을 갖고 많은 이가 신음하며 몸살을 앓고 목숨을 잃는다. 바이러스라는 말의 근원을 쫓아 올라가면서 바이러스(virus)와 세균(bacterium, germ)의 차이를 공부한다. 세균보다는 크기가 아주 작고 늦게 발견되었으며, 살아있는 생물체인 숙주宿主, 곧 호스트가 있어야만 활동할 수 있는 생명과 물질 사이에 존재하는 바이러스는 라틴어에서 ‘끈적끈적한 액체류 같은 독毒slimy liquid, poison’을 뜻하는데 한자 말로는 ‘병독病毒’이라 옮긴다. 반면 독립된 세포로 이루어진 생물인 ‘세균細菌’에서 ‘버섯 균菌’이라는 글자는 ‘풀 초艹’와 ‘곳집 균囷’의 합자인데, ‘벼 화禾’를 가운데 품고 수확한 벼를 보관하던 창고(囗)를 그린 ‘곳집’이어서 곰팡이가 잘 자라던 습한 장소이고, 艹는 그곳에서 자라던 ‘버섯(곰팡이)’이다. 세균은 공기 중이나 사람의 몸속 어디서나 먹이가 있는 곳에서 증식한다. 인체에 위협을 가하는 바이러스는 항바이러스제로 치료하고, 세균류는 항생제로 치료한다.

바이러스는 결국 독毒이다. 그런데 그 ‘독 독毒’이라는 글자는 ‘어미 모母’를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어미 모母’라는 글자를 약간 옆으로 돌려볼 때 이는 ‘여자 여女’라는 글자에 젖을 물려 아기를 양육하는 어미 가슴을 두 개의 점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여자 여女’를 바탕으로 하는 글자에서 사물이나 사람에게 해가 되는 독을 가리키는 글자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의외이다. ‘어미 母’라는 글자 위에 ‘사람 인人’을 올리면 ‘매양 매每’가 되면서 날마다 젖을 물려야 하는 어머니, 혹은 매번 어머니로부터 젖을 먹어야 하는 아기로 ‘늘’이나 ‘마다’라는 뜻을 담지만, ‘어미 母’ 위의 ‘사람 인人’이 통상 여성들이 머리에 꽂는 비녀이니 비녀가 둘이 될 때면 ‘음란할 애毐’, 셋 이상 여럿이면 ‘독 독毒’이 된다. 사전도 『‘독 독毒’은 설이 분분하나 ‘음란할 애毐’에 가로획이 하나 더해짐이 분명하다. 머리에 비녀를 여럿 꽂아 화려하게 장식한 여인(母)에서부터 ‘농염하다’는 뜻을 그렸고, 그러한 여자는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독’같은 존재라는 뜻에서 ‘독’의 의미가 나왔다. 비녀를 꽂지 않은 모습이면 母이고, 하나를 꽂은 모습이면 ‘매양 매每’이며, 여럿 꽂은 모습이 毒으로 표현되었다. 설문해자에서는 ‘떡잎 날 철屮’과 ‘음란할 애毐’로 구성되어 독초를 말한다고 했다.(하영삼, 한자 어원 사전)』라고 풀이한다.

비녀가 셋 이상이어서 독이 되는 ‘팜 파탈femme fatale’이든, 어둠에서 번식한 음란의 싹이든, ‘독毒’은 일단 무섭고 두렵다. 인간에게 중독이고 치명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셀 수 없는 인간의 생각이 탐욕(貪慾), 분노(진‧瞋), 어리석음(치‧癡)이라는 3독三毒이 묻은 가시들 같아서 인간을 윤회시키는 전염병의 원균原菌들이라 했다.

그렇지만 독버섯이 그렇듯 독초는 그 아름다움에 비해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약藥’과 ‘독毒’을 함께 지닌 여린 품종이기도 하다. 백신도 미량의 독을 미리 주입해서 면역을 자가생성하자고 하는 원리가 아니던가? 독초는 사람들이 독초라고 규정했을 뿐이지 독초 자신이 스스로 칭한 것은 아니다. 자신은 그저 풀이다. ‘독초’는 인간의 논리이다. 그렇듯 꽃밭에 숨은 독사, 낙원의 뱀이 지녔을 독에는 호기심과 상상, 두려움과 진귀함, 섬뜩함과 놀라움, 징그러움과 아름다움, 쓰디쓴 것과 달콤함, 욕심과 기쁨, 격정과 쾌락, 죄와 탐스러움, 미움과 사랑, 죽음과 삶이 함께 담겼다.

어수선한 요즘이다. 생각이 상상되고 상상이 환상, 망상을 넘어 살상殺傷이 된다. 사람과 세상사가 본래 정중동靜中動이며 동중정動中靜이다. 정신없이 살다가 정신 차려야 할 순간이다. 해독解毒의 때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지혜 1,14) 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8) 하셨다.

바람 풍風

‘바람 풍風’은 원래 ‘봉새 봉鳳’과 같이 쓰여서 ‘무릇 범凡’과 ‘벌레 충‧훼虫’, 혹은 ‘새 조鳥’의 합자로 본다. 돛단배의 돛을 그린 ‘범凡’은 바람 없이 갈 수 없는 바람 그 자체이고, 옛 중국에서는 곤충이나 새가 모두 ‘벌레 충‧훼虫’에 속할 수 있었으므로 그렇게 썼을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바람이 불면 벌레가 생긴다는 생각(풍동충생風動蟲生)으로 ‘벌레 충‧훼虫’이 더해졌다고 하기도 하고, ‘새 조鳥’를 썼던 것은 봉새의 날갯짓으로 바람이 생긴다고 생각하여 그랬을 것이라 한다.

여덟 방위를 갈랐듯이 바람은 사방팔방에서 분다. 그렇게 부는 바람은 풍전등화風前燈火나 풍비박산風飛雹散처럼 형상이고, 미풍양속美風良俗이나 풍기문란風紀紊亂, 위풍당당威風堂堂처럼 풍습이나 풍속을 넘어 풍모나 풍채이며, 풍문風聞이나 풍설風說처럼 먼 곳에서 날아와 작은 틈새라도 어김없이 파고드는 속성이고, 풍경風景, 풍물風物, 풍광風光처럼 멋진 것이다. 바람은 농경사회에서 작풍作風을 관장하는 신이어서 ‘태풍 태颱’가 되면 크게(台·대, 臺의 속자) 부는 강한 바람이고, ‘폭풍 표飆’가 되면 사나운 개 여럿이 달려들 듯(猋·개 달리는 모양 표) 휘몰아치는 폭풍이며, ‘회오리 바람 표飄’가 되면 불꽃이 튀어 가볍게 솟아오르듯(票·표) 하늘로 솟아오르는 ‘회오리바람’이다.

비가시적인 실체인 바람은 사람들이 보고 싶고 손에 잡아보고 싶은 꿈이고, 새들이 높은 곳에서 활공滑空할 때 모든 것을 벗어나 유유자적하는 놀이이며, 연鳶(솔개 연)이 될 때 너와 나를 넘어 가면이고 하늘에 그리는 그림이자 환상이다. 바람은 나는 것들로 자신을 드러낸다. 바람은 아무도 볼 수 없지만, 누구나 볼 수 있게 자신만만하여 초당 몇 미터를 가는지로 자신의 힘과 방향을 과시하고, 골짜기에서 꼭대기를 향하여 가다가 꼭대기에서 골짜기로, 물에서 뭍으로 가다가 뭍에서 물로 가면서 종횡무진縱橫無盡이다. 새·곤충·꽃가루·종자 ·구름을 날리면서 바람은 제 할 일을 하는 우주의 숨과 기운이다. 바람은 모든 것을 씻은 듯이 날려버리는 찰나요 허무와 불안이어서 저돌적이고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풍요의 숨결이고 성스러운 정신이며 인간이 노래로 듣고 싶어 하는 가락이다.

밤새 어디서 어떻게 부는지도 모르게 큰소리를 치며 두려울 만큼 바람이 강하고 무섭게 불었다. 숲에는 나뭇가지들이 수북이 떨어져 내렸고, 다람쥐와 사슴들은 일제히 숨었다. 두 마리의 새들만이 높이 난다. 도토리들이 지천이라 다람쥐가 겨울 대비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따뜻하다더니 기온도 큰 폭으로 떨어지고 급기야 저녁나절에는 백 퍼센트의 확률로 눈이 내린다고 한다.

주님께서 엘리야와 만나실 때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1열왕 19,11-12)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에게 예수님은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8) 하신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 때, 너와 나 사이에 하늘 바람이 불면, 우리는 날고 영에서 태어난다.

옮길 반搬

‘이사를 가다/하다’라는 것을 한자말로 표기하면 ‘옮길 반搬’이라는 글자를 써서 ‘반가搬家’라고 한다니 말 그대로 집을 바꾸는 것이고 옮기는 것이다.

이때 사용하는 ‘옮길 반搬’은 손을 뜻하는 재방변(扌=手)과 소릿값인 ‘돌, 옮길 반般’이 합하여 손으로 옮기는 행위를 나타낸다. ‘반般’이라는 글자는 배를 뜻하는 ‘배 주舟’와 나무 막대기를 뜻하는 ‘막대기 수殳’가 합해져 있고, 또한 배가 돌아다니거나 나르고 옮긴다는 뜻도 있으므로 옛날 사람들이 노를 젓는 배로 이사를 해서 그런 글자가 생겼나 하고 상상해 본다. ‘반般’을 실제 ‘손으로 잡고 배를 돌린다’는 뜻으로 풀기도 한다.(하영삼) 그런데 ‘반般’이라는 글자를 두고 한참 거슬러 올라가 갑골문에서는 이 글자를 이루는 ‘주舟’가 밥그릇이고 ‘수殳’는 손에 든 숟가락이라 한다고 한다. ‘그릇 명皿’을 붙여서 ‘쟁반’이나 ‘받침’이라는 뜻을 지닌 ‘소반 반盤’이 ‘반般’이라는 글자의 전신이었고, 밥 먹는 일과 같은 일상적인 것을 가리킬 때 ‘일반一般’이라 한다는 것을 보면 ‘반般’은 밥그릇이나 숟가락과 분명 깊은 관련이 있기도 할 것이다. 한편에서는 ‘소반 반盤’을 배처럼 바닥이 평평한 그릇이라 하기도 한다. ‘옮길 반搬’에는 이래저래 손, 배, 밥그릇과 숟가락 등이 엉클어져 있다.

불가의 스님들은 이동 시에 발우鉢盂(바리때 발, 사발 우)가 필수품이었다고 하지만, 적어도 오늘날 가톨릭의 수도자만큼은 이동할 때 밥그릇이나 숟가락을 가지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고, 소임 따라 옮겨간 집에 있는 밥그릇과 숟가락으로 다른 밥을 먹는 과정이 되므로, 그들의 이사는 단순하게 말해서 밥그릇과 숟가락 바꾸기 정도일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32개월이 채 못 되는 플로리다의 생활에서 뉴욕으로 배가 아닌 비행기를 타고 이주해왔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여름 나라에서 갑자기 영하의 나라로 왔다. 어린 시절부터 수도원에 살았고, 수도 없이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녔지만, 아직도 가장 싫은 일 중의 하나는 보따리 싸는 일이다. 몇 날 며칠을 한숨 쉬며 바라만 보다가 날짜가 목에 차서 이민 가방 한 개와 라면 상자 크기의 상자를 몇 개 구해서 꾸겨 넣었다. 주로 여름옷뿐이었으므로 이민 가방 하나에 옷은 모두 넣고도 공간이 남았다. 문제는 상자였다. 남은 소지품은 책 몇 권과 잡동사니까지 두 개의 박스면 충분했다. 우선 한 개에 책들을 모두 넣고 꼼꼼하게 테이프로 포장을 했지만, 그것을 들어 옮기려다 보니 허리를 상할 것 같았고, 배달하시는 분에게까지 큰 누가 될 것이라는 염려가 생겼다. 어쩔 수 없이 상자를 다시 풀어헤쳐서 다섯 개의 상자에 분배하여 넣고, 문방구에서 파는 packing nuts로 빈 곳을 메꾸고 포장하여 우체국에서 발송하는 것으로 이사는 끝났다.

휑한 침실에서 마지막 잠을 자려다 문득 열여섯 소년 시절 포근한 가을 어느 일요일 오후, 양쪽에 책이나 도시락을 넣고 가운데는 잡동사니를 넣었던 책가방 하나와 큰 보자기에 이불 하나를 싸서 수도원으로 가던 날을 생각했다. 다른 소임지로 이동할 무렵이면 항상 떠오르는 집을 떠나던 내 인생 첫 이사의 기억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이삿짐을 꾸리던 날로부터 팔십 줄에 앉은 아브라함이 길을 떠나던 날,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 자고 일어나면 다시 짐을 꾸려야 했던 몇십 년의 날들,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진할 수 있도록 그들 앞에 서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 속에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그들을 비추어 주셨다.”(탈출 13,21-22) 하던 날들…평생 이동과 이주를 매듭과 계기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일 것이기도 하지만, 이번 이사 후에 나는 몇 번이나 짐 보따리를 또 싸야만 하는 것일까?

높을 존, 술 그릇 준尊/물건 품品

‘높을 존, 술 그릇 준尊’ 이라는 글자는 술병 혹은 술독(酋)을 두 손(寸)에 공손히 받들고 바친다는 데서 존경의 뜻을 나타내어 「높이다」를 뜻한다. 이 글자는 술을 신에게 바치다→삼가 섬기다→존경을 높이 드린다는 것을 나타낸다. 품위品位라고 할 때의 ‘품品’은 ‘입 구口’ 세 개가 모여 쌓인 기물이나 물건의 아가리들의 모습이다. 기물이라는 것이 애초에 제사 등을 드릴 때 쓰는 용기이거나 용품이고 보면 굳이 해설하지 않아도 그 글자의 뜻이 짐작된다. 그렇게 보면 ‘존엄’이나 ‘품위’는 모두 인간이 하느님을 알아서 섬기는 상황과 연결되는 글자들이다.

나는 이곳 수도원의 한편에 있는 산 필립이라는 소위 양로원에서 미제美製로 세끼 밥을 먹는다. 그곳 식당에는 10명이 앉는 식탁이 두 개 있다. 나도 10명 중 한 명으로 한 식탁에 앉는데 내가 앉는 식탁에서는 내가 유일한 외국인이고 60이 한참 넘었어도 내 나이가 제일 어리다. 작년 봄에는 나의 오른쪽에 앉으셨던 마이클이라는 신부님이 돌아가셔서 그분의 장례미사를 지냈다. 나의 옆에서 가끔 농담도 주고받고, 애들이 날갯짓하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하듯 내가 말없이 오른팔로 옆의 신부님을 툭툭 건드리면 신부님도 왼팔로 나를 툭툭거리며 응답을 해주시던 분이다. 신부님은 전동 휠체어를 타거나 걷기까지 하시며 여기저기를 다니시거나 햇볕에 화상을 입을 정도로 정신없이 한참을 주무시기도 하면서 잘 지내시다가 이른 봄 어떤 날 거짓말처럼 병원으로 가셨고, 투석해야 한다는 의사들의 결정을 거부하여 10여 일 만에 선종하셨다.

올해 들어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나의 왼편에 앉아계시던 폴이라는 신부님이 병원으로 가셨다. 기력이 쇠하셨고 약간의 치매기까지 겹친 상황이었다. 매일 저녁 식사 때마다 포도주 반 잔에 물을 타서 드시고 치아가 좋지 않아서 씹는 것은 못 잡수시므로 모든 것을 죽처럼, 그리고 수프처럼 국물에 말아 드시기를 좋아하시던 분이다. 아니 좋아하셨다기보다 그렇게밖에 드실 수 없었던 분이다. 가끔 좋은 고기가 나올 때면 나 스스로 애가 타서 아주 잘게 썰어달라고 주방에 일부러 부탁해서 드리고, 드셔보시라 하면 한참을 애쓰다가도 결국 못 잡수셨던 분이다.

함께 계시던 할아버지들이 병원으로 가시면 응당 찾아가 뵙는 것이 도리인 줄 알지만, 썩 내키지 않는다. 이미 이곳에서도 현재로 보았던 나의 미래를 또 다른 모습으로 마주친다는 것이 두렵고 싫어서일 것이다. 폴 신부님께서 병원에 계시다가 요양원으로 옮기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저 생각만으로 요양원에 계시는 신부님을 가서 뵈어야지 하다가 그렇게 날이 하루 이틀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엊그제 본당의 한 자매가 신부님을 뵈러 다녀왔다고 했다. 자매님에게 전화해서 근황을 상세히 여쭤보았다. 얘기 중에 가진 옷이 하나도 없어서 그저 기저귀만 채워서 눕혀 놓은 것을 보고 허겁지겁 고무줄 달린 바지 같은 것을 사고 옷가지를 좀 사서 이름표 달아 입혀드리고 왔다고 했다. 요양원의 특성상 빨래를 공동으로 해서 이름표가 없는 옷은 주인 없는 옷이 되므로 그런 시설에 가게 되면 양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류에 이름표를 새기는 것이 필수이다. 온도 조절이 잘 되고 문제가 없을 것이므로 옷을 벗고 계셨어도 생존에 지장은 없었겠지만, 관리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그저 기저귀만을 채워서 눕혀 놓았다는 말을 듣고는 공허했고 왠지 모를 눈물이 핑 돌았다. 옷이 없으면 그 누구라도 옷을 가져오라고 연고자에게 전화 한 통 해주기가 어려운 미국의 시스템이라는 것과 개인주의, 그리고 가족 없고 마누라 없이 사는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새삼 품위와 존엄은 어디서 생겨나고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왜 인간은 그렇게 있으면 안 되는가 하는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었다.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거창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들은 제쳐놓고 그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타인에 의해서 그렇게 처리(?)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적어도 초자본주의 사회인 이곳 미국에서 인간의 품위는 그렇게밖에 유지될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의 품위와 존엄, 그리고 고귀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니 어떻게 지켜지는 것일까?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 의복일까? 생명이 붙어 있다는 사실일까? 생김새나 외모일까? 명료한 의식이 없을지라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행위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는 도덕적 기준에 입각한 습관으로 몸에 익혀진 행동의 반응일까? 하느님을 알아 모신다는, 아니 의식이 멀쩡했을 때 하느님을 알아 모셨다는 경력일까? 타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면서 나의 자율성을 확보해야 하는 동물이 인간이라 했는데, 그 자율성이 상실된 상황에서 자율성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이고 품위나 존엄성과는 관계가 있을까? 이런 의문들은 한낱 무엇으로 존중받는가가 아니라 왜 존중해야 하는가를 따져야 하는 건너편 남은 자들의 의문일 뿐일까? 실체적 개념들이 아니라 신·인간·자연이라는 관계의 맥락 안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존엄성을 근거 지어야 한다는 말은 과연 어떤 말일까?

생각은 많았지만, 답은 없었다. 그저 지금 의식이라는 것이 말짱할 때 내게도 닥칠 그런 상황에 대하여 글로라도 뭔가를 써 놓아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틈날 때마다 가진 옷들에 이름표라도 새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하느님께서는…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하여 그렇게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지어져 존엄하다 하였다. 온갖 시련을 겪느라 존엄이나 품위는 고사하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고통의 인간 욥이 주님 앞에서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욥 40,4) 할 때, “폭풍 속에서” 말씀을 이으신 주님께서 “존귀와 엄위로 꾸미고 존엄과 영화로 옷을 입어 보아라.”(욥 40,10) 하시므로, 욥은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 42, 5-6) 하며 고백한다. 바오로 사도 역시 “다만 모든 일이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합니다.”(1코린 14,40)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