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월 문文

‘문文’을 얘기할 때 통상 ‘글월 문文’이라고 하지만, ‘등 글월문’이라 하기도 한다. 글자의 생김새가 등을 돌린 듯이 보이는 ‘글월 문’이라는 뜻이다. ‘글월 문文’을 획수나 모양이 비슷하여 ‘몽둥이 수殳’나 ‘칠 복攵’과 같은 글자로 보기도 하지만, 역사나 내력을 가진 글자로서 자기 고유의 뜻을 지니고 수많은 세월을 살았던 글자, 신발 치수를 가리키는 말이나 사람들 성姓의 하나인 것을 떠나서라도 수십 가지의 뜻을 지니는 글자, 그럼에도 일반적으로는 ‘문장文章’이라는 뜻과 함께 ‘무武’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학문學問ㆍ학예學藝ㆍ문학文學ㆍ예술藝術 등을 이르는 글자가 바로 ‘글월 문文’이다. 500년 쯤 전인 1446년의 훈민정음 언해본에 ‘글월’을 ‘글왈’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 ‘글왈’과 근접한 말로 ‘글발(=적어놓은 글-표준국어 대사전)’이라는 말이 있다니 ‘문文’이라는 글자를 두고 ‘글월’ 문이라 한 것은 이래저래 흔히 ‘말발이 세다’할 때처럼 ‘글발이 그럴 듯하다’는 뜻을 담아 ‘아름답고 수려한 글’을 뜻하고자 했던 것일까?

‘글월 문文’이라는 글자는 상형문자이다. 혹자는 양팔과 두 다리를 활짝 벌리고 서 있는 사람의 모양을 본뜬 ‘큰 대大’의 다리부분이 양쪽으로 꼬아져 양반다리하고 앉아서 공부하는 모양이라 하기도 하지만, 원래는 사람의 가슴 부위에 문신으로 무늬를 새긴 모습이다. 고대에는 종교적 의식과 아이가 성인이 되어 부족사회의 성원에 가입하기 위한 통과의례로서 신체에 문신을 넣든가, (혹은 시체를 신성하게 치장하는 의식으로서 문신을 새기든가) 그림물감으로 장식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 ‘문文’이다.

그렇게 문신→무늬→글자→문장→학문→문화文化→문명… 이런 식으로 뜻이 발전하였다. ‘문장文章’이란 단어에 나오는 ‘글 장章’이라는 글자도 문신을 새기는 침(매울 신辛)과 문신의 모양(이를 조早)이 들어 있는 글자이다. 영어로 tattoo인 ‘문신文身’이라 할 때도 ‘몸 신身’에 ‘글월 문文’을 붙인다. ‘무늬 문紋’은 ‘실 사糸(=실)’를 옆에 붙여서 실로 짜는 옷감이나 천에 문신을 새기듯 무늬 새긴 것을 뜻한다. ‘어지러울 문紊’자도 ‘무늬 문紋’과 마찬가지로 ‘실 사糸’와 ‘글월 문文’이 합해진 글자이긴 하지만, ‘실 사糸’ 위에 ‘문文’을 올려붙여 ‘실(糸)로 짠 무늬(文)가 어지럽다’는 뜻을 담는다. 그래서 ‘문란紊亂’ 하면, ‘어지럽고(紊) 어지럽다(어지러울 난/란亂)’는 뜻이다. ‘흩어질 산散’을 붙여 ‘산문散文’이 되면 ‘정돈되지 않고 흩어진(散) 글(文)’로, 일정한 형식이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문장으로 소설이나 수필 등의 글이 되고, ‘운 운韻’을 붙여 ‘운문韻文’이 되면 ‘운율(韻)이 있는 글(文)’로, 보통 시詩의 형식으로 지은 글이다.

가슴에 새긴 무늬처럼 소박하더라도 가슴으로 쓰는 글이 좋은 글이라 했다. 가슴으로 새겨서 쓰는 글은 다른 사람의 가슴에도 자국을 남기는 글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때, 글을 쓰다보면 보아주는 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 글을 내가 왜 이렇게 쓰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1915~1968년) 같은 이는 글쓰기만이 침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거룩함에 이르는 자신의 길임을 알아서 썼다고 하지만, 나 같은 이에게는 아마도 너무도 부끄러운 내 마음 속을 그 누구에게도 열어 보일 용기가 없어서, 그래도 살아있어서, 개발새발 무늬를 새겨가듯이 끄적거리는 것일 게다. 그러다가 얼핏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어떤 문장, 어떤 단어들에 살짝살짝 자기의 속마음을 담아 흔적을 남기는, 아마 남모르는 고백일 것이다. 그래서 쓸 것이다.

일찍이 모세는 하느님의 마음을 돌 판에 새겼다.(참조. 탈출 34,28)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것을 몸소 돌 판에 “써서 주셨다”(신명 4,13;10,4)고 표현한다. 내가 과연 내 마음에,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에 새기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아니 어쩌면 내 인생 안에 하느님께서 새겨 주신 무늬를 어떻게 보존하고, 어떻게 내보여야 하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이미 뭉그러져버린 그 무늬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잠잠할 묵默

‘잠잠할 묵默’은 ‘묵黙’과 같은 글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음音을 나타내는 ‘검을 흑黑’과 ‘개 견犬’이 합하여 이루어진다. 개(개 견犬)가 소리를 지르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인데, 어둔 밤(검을 흑黑)에 검정색 개가 가만히 있는 것을 상상하면 대충 이해가 간다. 그래서 생겨난 ‘잠잠할/묵묵할 묵默’은 어떤 이가 말을 하지 않는 상황이다.

‘묵默’이라는 글자의 부분인 ‘검을 흑黑’은 사람이 서 있고 그 얼굴과 온 몸에 검게 칠한 상황이다. 칠은 숯이나 검댕이로 한다. 곧 얼굴과 온 몸에 숯으로 칠하는 것인데, 이는 죄인을 벌하는 형벌의 일종이다. 그렇게 생겨난 검정색의 의미는 ‘나쁘다, 저녁, 은밀한’의 뜻으로까지 나아간다. 글씨를 쓰기 위해 숯검정과 흙으로 만든 ‘먹 묵墨’이라는 글자도 ‘검을 흑黑’ 밑에 ‘흙 토土’를 붙여 그렇게 생겨났다. ‘검을 흑黑’에 ‘입 구口’를 붙이면 ‘입을 다물다’는 뜻이 되어 ‘잠잠할 묵默’과 거의 같은 ‘고요할 묵嘿’이 된다. 그래서 ‘묵默’은 ‘묵嘿’이다.

인류의 역사 안에서 소위 수도修道 정진하는 이에게 가장 중요한 글자 하나를 꼽으라면 그것은 ‘묵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이 ‘묵默’과 조합하여 만들어진 침묵沈默, 묵인默認, 묵념默念, 묵도默禱, 묵묵默默, 묵상默想, 묵묵부답黙黙不答, 묵살默殺 같은 말들은 무게감을 지닌다.

성철性徹(1912년~1993년) 큰 스님께서도 당나라 때의 승려 영가현각永嘉玄覺 대사大師(637/665~713년)의 시편으로 알려진 「증도가證道歌」를 해설하실 때에 ‘말씀 설說’과 ‘고요할 묵默’으로 선禪의 오묘한 경지에 관한 가르침을 주셨다. ‘말 없을 때 말을 하고 말을 할 때 말 없음이여默時說說時默(묵시설설시묵)’ 하신다. ‘묵이 곧 설이고 설이 곧 묵이라’ 하신다. 『…적적한 가운데 광명이 있고 광명이 있는 가운데 적적함이 있어서 말과 묵이 완전히 통하는 것…그리하여 죽음 가운데 삶이 있고 삶 가운데 죽음이 있는 것과 같이, 움직임 가운데 머무름이 있고 머무는 가운데 움직임이 있어서 움직임이 머무름이고 머무름이 움직임이며, 진(眞)이 곧 가(假)요 가(假)가 곧 진(眞)…이와 같이 모든 양변이 원유무애圓融無愛하고 융통자재融通自在한 것을 표현하여 ‘묵묵할 때 말하고 말할 때 묵묵하다’고 한 것이니, 이것은 전체에 다 통하는 것…』이라 하신다.

‘묵默’은 말이 없어도 백 마디 천 마디 말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고, 백 마디 천 마디 말이 있어도 조용함이다. 너와 나에게 모두 넉넉한 웃음이다.

그리스도교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음”(요한 1,14)을 믿는다. 성경이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코헬 3,7)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들어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함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묵默’은 ‘들음’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이다. 그래서 생명이 있는 사람이고자 함이다. ‘묵默’이라는 글자 하나에 이렇게 죽음도 있고 생명도 있다.

기쁠/기뻐할 흔欣

‘기쁘거나 반가워 기분이 좋다’는 것을 묘사할 때에 ‘흔연欣然하다’ 하고, ‘흔연스레’라고 하면 ‘기쁘거나 반가워 기분이 좋은 듯하여’라는 뜻이 된다. ‘기꺼운 마음으로 누군가를 잘 대접’하는 것을 ‘흔연대접欣然待接’이라 하고, ‘기쁘고 유쾌함’을 일컬어 ‘흔쾌欣快’라고 한다. 그래서 ‘흔희欣喜’는 ‘환희歡喜’와 같은 말이고, ‘흔감欣感’은 ‘기쁘게 여기어 감동함’을 표현하고, ‘흔희작약欣喜雀躍’은 ‘몹시 좋아서 뛰며 기뻐하는 것’이며, ‘흔흔欣欣하다’는 ‘매우 기쁘고 만족스럽다’는 말이 된다. 참고로, 이 말은 ‘훈훈薰薰(항초 훈)하다’라는 말과는 다른 말이다.

어떤 이는 이러한 말들의 앞머리인 ‘기쁠/기뻐할 흔欣’이라는 글자를 빙자해서 우리말의 ‘흔들다, 흔들대다, 흔들리다’라는 말들이 ‘기쁠 흔’과 어깨가 들썩거리는 상태를 묘사하는 ‘들썩이다’에서 파생되었다고도 하지만 이는 억측이다. 국립국어원에 의하면 ‘흔들다’는 순우리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기쁠/기뻐할 흔欣’이라는 글자는 ‘도끼 근斤’이라는 글자와 ‘하품 흠欠’이라는 글자가 더해져서 이루어진다. ‘도끼 근斤’은 오른 쪽으로 90도를 돌려놓고 볼 때에 도끼의 머리(가로 획)와 도끼의 자루(세로 획)가 나무를 내려치는 모습이다. 그렇게 도끼로 나무를 내려치면 나무가 갈라지고 틈새가 벌어지거나 뻐개진다. 기뻐서 크게 웃을 때에도 입이 크게 벌어져 웃는다. 옆에 붙어 있는 ‘하품 흠欠’ 역시 사람 위에 입을 크게 벌린 모습을 얹어 놓았다. 하품은 하지 않으려고 해도 절로 입이 벌려 하는 큰 호흡이다. 그래서 ‘기쁠/기뻐할 흔欣’은 마음이 무척 들떠서 나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려 웃는 상태이다. 틈새가 벌어지는 ‘도끼 근斤’ 쪽에 좀 더 무게를 두어서 ‘(실실 웃으며) 쪼개다’는 말이 나왔을까?

몇 달 전 언젠가 구순 잔치를 지내신 어르신께서 지난 한 달여 동안 몰라보게 웃음을 잃으시고 체중이 빠져나가는 듯하였다. 모셔다 좋아하시는 우거지 갈비탕을 대접해드리면서 억지로라도 자꾸 웃으시라고 했다. ‘그 동안 살만큼 살아서 좋은 꼴 많이 봤으니 괜찮다. 새로 오신 신부님께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 하셨다. 마음이 아팠다.

인생을 살다 보면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나는 때가 있고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나는 때가 있지만, 슬퍼도, 울고 싶어도, 억지로라도 웃어야 복이 온다. 그래야 죽지 않고 산다.

‘기쁠/기뻐할 흔欣’과 음과 뜻이 같은 글자들로서 ‘기뻐할 흔忻’은 ‘마음 심忄’과 합하여 마음이 기쁜 것이고, ‘기뻐할 흔訢’은 ‘말씀 언言’을 붙여 너에게서 나오고 나에게서 나가는 말이 기쁜 것이며, ‘화끈거릴 흔炘’은 ‘불 화火’를 더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기쁜 것이고, ‘기쁠 흔盺’은 ‘눈 목目’과 어울려 눈에 한가득 웃음이 가득하여 눈웃음치며 기뻐하는 것이다.

창세기의 사라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90이 된 나이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가져다주셨구나. 이 소식을 듣는 이마다 나한테 기쁘게 웃어 주겠지.”(창세 21,6)하고 말했지만, 지혜로운 자는 “어리석은 자의 웃음은 솥 밑에서 타는 가시나무 소리 같으니 이 또한 허무이다.”(코헬 7,6) 하고, “미련한 자들의 말은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그들의 웃음소리는 방탕한 죄악에서 나온다.”(집회 27,13) 하였다. 세상에는 비웃음도 많고 코웃음도 많으며 떠보고 속이는 웃음 또한 많지만, 올바르게 살아서 “우리 입은 웃음으로, 우리 혀는 환성으로 가득하였네.”(시편 126,2)하며 웃는 이들에게는 웃음이 끊일 날이 없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그 날에 천사는 “기뻐하여라!”(루카 1,28) 하는 말로 그 소식을 알렸다.

하/할 위爲

‘할 위爲’라고 하는 글자 위에는 ‘손톱 조爪’가 붙어있다. 이는 손톱이나 갈퀴의 모양에서 유래하면서 긁고, 할퀴고, 움켜잡는 모양새다. 이 ‘손톱 조爪’ 밑에 있는 모양을 원숭이라고 보기도 하고 코끼리라고 보기도 한다. 원숭이라고 보면 원숭이가 손톱으로 할퀴고 무엇인가를 움켜잡는 모양이다. 원숭이가 머리를 긁거나 쥐어뜯는 모습으로 재주 많은 원숭이를 표현하면서 원숭이가 사람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에서 ‘할 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설득력이 있는 글자 풀이는 원숭이보다는 코끼리의 옆모습을 90도 돌려놓은 모양(코끼리 상象)으로 보는 것이다. 곧 사람이 코끼리를 잡고 부리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코끼리를 길들이는 모습과 통하여 코끼리가 이러저러하게 어떤 행동을 하게하는 것으로 ‘하다’라는 의미를 담아 ‘할 위爲’가 되었다는 것이다. ‘할 위爲’의 갑골문 금문 시기의 모양(左)과 그 다음 시기인 소전체 문자(右)를 문자 학자 진태하 교수께서 그린 것을 보면 자명해진다. 코끼리 코를 잡은 사람의 손이 위에 붙어 있는 형상이다.

인도에서는 대략 기원 전 2천년부터 코끼리를 길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래 코끼리가 없던 중국에서는 기원 전 1000여 년 전에 코끼리를 들여와 전쟁에 사용했다. 당연히 우리나라에는 코끼리가 없었다. 내가 알기로 코끼리를 우리나라에 맨 먼저 소개한 분은 연암燕巖 박지원(1737~1805년) 선생이다. 그분의 중국 기행문인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는 묘사하기가 어려웠을 코끼리를 대개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소개한다.

“그 생김새가 몸뚱이는 소인데 꼬리는 나귀 같고, 낙타 무릎에다 범의 발굽을 하고 있다. 털은 짧고 회색으로, 모습은 어질게 생겼고 소리는 구슬프다. 귀는 마치 구름을 드리운 듯 하고, 눈은 초승달처럼 생겼다. 양쪽의 어금니는 크기가 두 아람이나 되고, 길이는 한 자 남짓이다. 코가 어금니보다 더 길어서 구부리고 펴는 것은 자벌레만 같고, 두르르 말고 굽히는 것은 굼벵이 같다. 그 끝은 누에 꽁무니처럼 생겼는데, 마치 족집게처럼 물건을 끼워가지고는 말아서 입에다 넣는다. 혹 코를 주둥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어, 다시금 코끼리의 코가 있는 곳을 찾기도 하니, 대개 그 코가 이렇게 길 줄은 생각지도 못하는 것이다. 간혹 코끼리는 다리가 다섯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혹은 코끼리 눈이 쥐눈과 같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대개 온 마음이 코와 어금니 사이로만 쏠려서 그 온 몸뚱이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을 좇다 보니 이렇듯 앞뒤가 안 맞는 비유가 있게 된 것이다. 대개 코끼리의 눈은 몹시 가늘어 마치 간사한 사람이 아양을 떨 때 그 눈이 먼저 웃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 어진 성품이 바로 이 눈에 담겨 있다.…그대가 말하는 이치란 것은 소나 말, 닭이나 개에게나 해당할 뿐이다. 하늘이 이빨을 준 것이 반드시 고개를 숙여 물건을 씹게 하려는 것이라고 치자. 이제 대저 코끼리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어금니를 심어 주어 장차 땅으로 숙이려고 하면 어금니가 먼저 걸리게 되니, 이른바 물건을 씹는 것이 절로 방해되지 않겠는가?…코끼리가 범을 만나면 코로 쳐서 이를 죽이고 마니 그 코는 천하에 무적이다. 그러나 쥐를 만나면 코를 둘 곳이 없어 하늘을 우러르며 서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장차 쥐가 범보다 무섭다고 말한다면 앞서 말한 바의 이치는 아닐 것이다.”(정민 교수의 글에서)

아무튼 지상의 포유동물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크다고 할 수 있는 코끼리를 길들이는 것은 정말 뭔가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할 위爲’라는 글자가 코끼리를 부리는 사람의 손이 붙은 글자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이 글자는 나아가 인위적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뜻에서 거짓으로 꾸미는 것인 ‘가장하다’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도 담게 되었다. 코끼리를 길들이는 것이므로 ‘다스리다’의 의미도 갖추게 되었고, 코끼리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가를 사람에게서 배우게 되었으므로 ‘배우다’의 의미, 여기에서 번져나가 ‘생각하다’의 의미, 그리고 전투 훈련 같은 어려운 목적을 위해 길들이는 것에서 ‘위하다’의 의미를 두루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하/할 위爲’에 ‘사람 인人’을 붙이면 인위적인 것을 강조하여 ‘거짓, 작위’라는 뜻을 갖는다. 그래서 ‘거짓 위僞’가 된다. 어쩌면 사람이 하는 것이나 하려고 하는 것은 본성적으로 ‘거짓’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짓 위僞’라는 글자는 정당하다.

그래서 일찍이 예수님을 몰랐던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爲無爲위무위 則無不治즉무불치 = 무위로써 하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라고 간파했던 것일까? 노자의 말에서 ‘다스릴 치治’는 삼수변氵(=水, 氺, 물)과 함께 만물을 이롭게 하는 물, 다투지 않는 물,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이어서 상선약수上善若水, 으뜸 선, 평화이다. 진정한 평화는 ‘할 것’이 없이 오로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기도하는 것뿐이다. 낮은 곳의 가난한 사람이 차지하는 복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하셨고,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21.26 루카 24,36) 하고 거듭 반복했던 것이다.

그르칠 오誤

‘그르칠 오誤’는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과 음을 나타내는 ‘오吳’로 이루어진다. ‘오吳’에서 ‘구口’를 뺀 ‘머리 기울 녈夨’은 머리를 기울인 사람의 모양이다. 사람 모양의 ‘대大’라는 글자에 머리를 붙이고 그 머리를 약간 기울이거나 머리를 떨구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면 그대로이다. 그래서 결국 머리를 갸우뚱하게 되는 ‘바르지 못함’을 뜻하게 된다. 거기에 ‘입 구口’가 붙어 있으니 상대방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거나, 내 입에서 상대방에게 나가는 말이 잘못되어서 인생사를 그르치거나 이치에 어긋나는 경우를 나타낸다. 음을 나타내는 ‘오吳’라는 글자만도 그러한데, 거기에 ‘말씀 언言’의 뜻까지도 더했으니 정말이지 ‘그르칠 오誤’는 주고받는 말의 중요성을 다시 더 일깨워주는 글자이다.

그런데 ‘머리 기울 녈夨’이 다른 유래를 지녔다는 설도 있다. ‘치우칠 편偏’이라는 글자를 ‘머리 두頭’에 붙여 만든 ‘편두偏頭cranial deformation’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어린이가 태어나면 납작한 돌이나 판자 등으로 머리를 누르거나 한 쪽 방향으로 쏠리게 외압을 가해 두상을 일정 형태로 만들어가는(서양에서 cone head라고 부르는 형태, 우리나라 신라 시대에도 이런 풍습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고대 문화의 습관이 있었는데, ‘머리 기울 녈夨’이라는 글자가 이렇게 일정하게 머리 꼭지 부분이 뒤쪽으로 쏠리게 만들어 종족이 일정한 두상을 갖게 했던 그 모습을 그대로 그린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머리를 갸우뚱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든지 아니면 한 쪽으로 쏠려 두상이 그렇게 생긴 모습을 그렸든, 어찌 되었든 ‘그르칠 오誤’는 잘못된 상황이고 바르지 못한 상황이다.(편두偏頭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르칠 오誤’는 특별히 사람의 입을 통해 오고가는 말이 잘못되어서 시작한 글자이다. 이 글자에 ‘흩어질, 깨달을, 풀이할’과 같은 뜻의 ‘풀 해解’를 붙이면 ‘오해誤解’가 되며, ‘지나갈, 실수할, 동떨어질, 틀릴, 오버할(?)’과 같은 뜻의 ‘과過’를 붙이면 ‘과오過誤’가 되고, ‘그릇되다, 어긋나다, 속이다, 기만하다’라는 뜻의 ‘류謬’를 붙이면 ‘오류誤謬’가 되며, ‘섞이다, 어지러워지다, 등지다’는 뜻의 ‘착錯’을 붙이면 ‘착오錯誤’가 된다. 사람들은 애초에 누군가의 의중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해 오해하며 원망하고 야속해하며 산다. 사람들은 다시는 과오를 범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비슷한 과오를 반복하며 산다. 사람들은 오류에 빠지고 방황하며 헤매고 휩쓸리며 산다. 사람들은 늘 하느님 앞에 있으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착오하며 산다.

지나놓고 보면 모두가 너의 뜻을 잘못 깨달은 나의 ‘오해’가 시작이었다. 미안하고 허물 가득한 일들이 하나같이 나의 ‘과오’였다. 이제 와서 보니 모두가 나로부터 빚어진 ‘오류’였다. 한때 ‘내 탓이 아니야!’라고 했던 모든 변명들이 나의 전적인 ‘착오’였다. 사람들의 모든 시간이 이처럼 ‘그르칠 오誤’라는 글자인 것을 인생 한 바퀴를 돌아 이제야 실감한다.

문득 눈을 들어 잔뜩 구름 낀 하늘을 보면서 ‘그러니까 그 말이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것이었구나!’라는 말 한 마디를 내가 나에게 하고 있다.

눈물 루/누淚

‘눈물 루/누淚’라는 글자는 모양(形)과 소리(聲)가 합쳐져 만들어진 형성문자이다. ‘물 수, 삼수 변(氵=水, 氺, 물)’의 의미 부분과 ‘어그러질 려/여戾(→루)’라는 발음 부분이 더해져 만들어졌다. 눈에서 나오거나 괸 물이어서 눈물이니 ‘삼수 변’까지는 그렇다쳐도 ‘어그러질 려/여戾’는 좀 풀어보아야 한다.

‘어그러질 려/여/태, 돌릴 렬/열戾’는 ‘집/지게 호戶’라는 글자와 누구나 잘 아는 ‘개 견犬’이 합해진 글자이다. (흔히 쓰는 단어 중에 ‘돌아올 반返과 어그러질 려戾’를 써서 ‘반려返戾’라고 하면 ‘되돌려 보내지다’가 된다.) ‘집 戶’는 문의 반쪽이어서 구멍, 출입구, 방이라는 뜻으로부터 ‘도울 호護’와 음音이 같으므로 입구를 수호守護하는 것으로 막다, 지키다, 주관하다는 뜻으로까지 나아간다. ‘개 견犬’은 개가 짖는 입 모양을 강조하여 개의 옆모습을 그린 글자라고 하는 것은 쉽다. 그런데 어그러진다는 것과 개가 무슨 상관인가 싶다. 그래서 그 개가 문 밑으로 억지로 기어 나오다가 문이 비틀리고 어그러져서 어그러짐의 뜻을 지녔다고 풀기도 하지만, 문 앞에서 쪼그리고 있던 개가 집 앞에 불청객이 나타나면 맹렬하게 계속 짖는 상황으로 보아서, ‘어그러질 려戾’는 ‘안정하다, 이르다, 사납다, 맹렬하다’의 뜻을 지니게 되었고, 낯설고 의심스러운 사람에게 개가 짖는 모양에서 ‘죄, 허물, 법’의 의미까지로 나아간다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이런 내용을 전제하고 ‘눈물 루淚’를 보면 개가 계속해서 짖는 것처럼 계속 이어지는 것을 의미하고 ‘삼 수氵’와 결합하면서 마음의 문인 눈이 어그러져 눈물이 계속해서 흐르는 모양을 나타낸다. 더불어 물이 빠르게 흐르는 것이나 촛농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어그러질 려戾’에 ‘삼 수氵’대신에 ‘마음 심忄’을 더하면 ‘서러워 할 려悷’가 된다. ‘서러워 할 려悷’는 눈물이 하염없이 계속 흐를 정도로 마음이 어그러져 슬퍼하는 것이다. ‘입 구口’를 더하면 ‘울 려/여唳’가 된다. 입으로 엉엉 소리 내어 우는 것이다.

조그만 종잇조각만 보여도 누군가의 이름을 그적거리고, 그 이름만을 적어도 눈물이 터져 나오는 아픔이 있다. 그렇게 눈물이 소리 없이 한참을 흐르고 나면 그래도 죽지 못해 다음 순간을 마주할 수 있게 되는 슬픔이 있다. 그렇게 눈물은 아픔과 슬픔에 연결되어 있다. 동물들과 비교해서 사람들은 울면서 자주 눈물을 흘리고, 앓으면서 아프고, 슬퍼하면서 슬프다. 그러나 내가 괴롭고 답답한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것은 누군가를 슬프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특별한 사랑을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랑은 바다를 보면 바다여서 눈물이 나고, 산을 보면 산이어서 눈물이 나며, 하늘을 보면 하늘이어서 눈물이 난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어서 눈물이 나고, 꽃이 피면 꽃이어서 눈물이 나며, 별이 뜨면 별이어서 눈물이 난다. 눈물이라는 것이 비참한 인간이 품위를 지니는 마지막 방도이기 때문일까? 슬픔과 신음의 눈물은 고운 이의 볼을 녹아내리게 한다. 이럴 때의 눈물은 울어서는 안 된다는 울음과 울기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두 울음이 부둥켜안고 우는 울음이다.

눈물은 소금 맛이다. 눈물이 땅에 떨어질 때에는 이름 없는 작은 풀꽃이라도 한 송이씩 그 자리에 피어나기를 기도하기도 해 보지만 이내 그런 소박한 바램마저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몰아치면서 쓸쓸해진다. 눈물은 늘 바람을 동반하고 비를 친구한다. 그럴 때 눈물은 스스로 노랫말이 된다. 눈물로써만 씻을 수 있는 죄들이 있지만, 눈물로도 씻어지지 않는 죄들이 있다. 눈물을 흘려서 뉘우쳐야 하는 자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거저 레테를 건너고 생수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깨트림이다. 그래서 자신의 눈물로써 항상 미소를 감추고 자신의 미소로써 항상 눈물을 감추어야 하는, 아직 이 땅의 광대들은 얼굴 위의 흰 칠을 매일 덧칠한다.

기억記憶

사람마다 기억의 저장고에서 꺼내는 것들이 어쩜 그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도대체 ‘기억記憶’은 무엇일까?

‘기억’의 ‘기’는 ‘기록할 기記’이다. ‘기록할 기記’는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과 음을 나타내는 ‘몸 기己’가 합하여 생긴 글자이다. ‘말씀 언言’은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서 ‘매울 신辛’이라는 글자 밑에 ‘입 구口’가 붙어 있는 형상이므로, ‘매울 신辛’이 창이나 꼬챙이의 형상이고 보면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상대방에게 곧장 날아가거나 날카롭게 가서 꽂히는 것이다. 그리고 ‘몸 기己’는 사람이 꿇어앉거나 몸을 굽히고 있는 형상, 혹은 구불구불한 끈 같은 것이다.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말씀 언’과 ‘몸 기’를 합해서 함께 정리하면, ‘기록할 기記’는 사람들 입에서 나가 상대방을 찔러대고 아프게 한 말들, 얽히고설킨 인간사의 굽어지고 산만한 것들, 뒤섞인 것들을 꿇어앉아 가지런히 적고 펴서 정리하는 것이라는 뜻을 담는다.

나의 기억을 적었다고 해도 그것은 너의 기억과 전혀 딴 소리가 되기도 한다. 인생사에서는 왕왕 나의 소중한 기억들이 상대방에게 다 다른 말로 적혀있을 때가 많다. 그리고 세월이 아주 많이 흐른 다음에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그 기억의 다른 끝을 발견할 때는 놀란다. 내가 가늠할 수 없었던 섭리의 오묘함, 기어이 나에게 와 닿아야만 했던 그때 그 일의 끝이 여기란 말인가 하게 될 때는 말이 없어질 수밖에 없다. 과거·현재·미래라는 구분으로, 연월일, 시분초로 끊임없이 쪼개지고 결국은 소멸되어 ‘시간’이라는 것이 본성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기억이라는 것이 현재의 찰나요 순간일 뿐이라 하더라도, 그럴 땐 그저 눈물이 난다. 말을 해버리면 그나마 아주 조금이라도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너와 나의 인연이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내내 해오다가, 너무 미워서 내 마음 속에 혼자 기억해놓기로 했던 것들을 막상 말해놓고 나면 그래서 후회가 된다.

‘기억’에서 뒷 글자인 ‘생각할 억憶’은 뜻을 나타내는 심방변(忄=心, 㣺 마음, 심장)과 음을 나타내는 ‘뜻 의/기억할 억意’이 합쳐진 글자이다. ‘의/억意’이라는 글자는 또 ‘소리 음音’과 ‘마음 심心’의 합자이니 마음에 있는 것이 소리되어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의/억意’을 만드는 윗부분 ‘소리 음音’은 ‘말씀 언言’의 ‘입 구口’ 속에 ‘하나 일一’을 더한 모양으로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 노래 부르거나 외우거나 하는 소리에 곡조를 붙인 것이다.

언言, 음音, 의/억意은 말, 소리, 뜻으로 점점 발전한 모양새다. 이는 모두 주술 통 같은 모양에서 나온 글자들이라 하기도 하여 주술사들이 주술 통에 뭔가를 넣고 흔들어대면서 나는 소리를 바탕으로 생겨났다 한다. 사람들은 주술을 통해 깨우친 신의 뜻을 헤아려 생각하고 마음에 담고 말하며, 소리 내고, 뜻을 새긴다.

목구멍 속에서 나는 소리, 뚜렷한 말이 되지 않는 음성이 ‘기억할 억’이 되어 마음에 단단히 눌러 새겨진다. 마음에 눌러 쓰는 것이 ‘억憶’이다. 그래서 memory이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에게 눌러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과 영혼의 기억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느님에게까지 도달하는 여정을 ‘기억’이라 한다.

달 월月

조카들 중에 기상천외한 발상과 억측으로 나를 대경실색大驚失色하게 하고 포복절도抱腹絶倒하게 하는 녀석이 하나 있다. 그렇다고 어린 나이는 아니고 아마 50쯤은 다 먹어갈 나이임이 분명하다. 언젠가 ‘구름 운雲’에 대한 글을 썼더니, ‘운수대통’과 ‘안전운전’으로 댓글을 달기도 하고, ‘입 구口’에 대해 쓴 글을 보고는 ‘구관명관’ ‘구사일생’으로 댓글을 달아 나를 웃게 만든다. 그래서 ‘구관명관 구사일생, 절묘하다 아연실색’이라고 말도 안 되는 4언 절구를 읊어줬다.

낮에 밝은 것은 해(날 일日)이고 밤에 밝은 것은 달(달 월月)이다. 그래서 달은 ‘밝다’는 뜻을 지녔다. 아울러 우리말의 ‘달’이 ‘ᄃᆞᆯ’에서 왔으므로 높은 것, 넓은 것, 큰 것이라는 뜻을 담는다. 해는 이지러짐이 없이 항상 둥근 모양이므로 둥근 모양 가운데 점을 찍어 ‘날 일日’이 되었지만, 달은 매번 기울고 차는 것을 반복하여 초승달이나 반달 모양이 되므로 글자 아래를 터놓고 가운데에 점 두 개를 찍어 ‘달 월月’이 되었다. 이런 달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진 글자 중에 ‘달 월月’의 옛 글자인 ‘저녁 석夕’도 있다. 저녁이 되면 달이 반쯤 뜨기 때문에 ‘달 월月’에서 점을 하나만 찍어 만들었다. ‘고기 육肉’의 간략형과 ‘달 월月’이라는 글자가 똑같은 글자이긴 하지만, 약간 다르다. 많은 경우에 글자의 왼쪽이나 아래에 붙으면 ‘고기 육肉’의 간략형이 붙어서 글자를 만든 것이고(예. 간肝, 항문 항肛, 복부 두肚, 기를 육育, 안주 효肴…), 오른 쪽에 붙어서 글자를 만들면 ‘달 월月’이 붙어서 글자를 만든 것(예. 밝을 랑朗, 아침 조朝, 바랄 망望…)이다.

속인에게 달은 외로움이고 눈물이며 멀리 있어 가 닿을 수 없는 곳이지만, 시인詩人에게 달은 벗님이고 놀이이며 나와 하나 되는 상징으로 누구나 가 닿는 곳이다. 세속의 달은 항상 동경이고 그리움이며 한恨이지만, 성경의 달은 항상 찬미의 도구이고 징조의 표징이며 조물주를 섬기는 시간이다. 달은 내 옆에도 뜨고 멀리도 뜨며 내 안에도 뜬다. 달은 싸늘했다가 부드러웠다가 나를 축축하게 젖게도 한다.

달은 이래저래 바라보는 인간에게 ‘생각’이다. 그래서 너나 나를 가늠하기 한참 전 집회서의 저자 벤 시라크는 “내게는 아직 할 말이 많으니 보름달처럼 온갖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집회 39,12) 한다.

미안未安

‘나무 목木’이라는 글자가 땅 밑에 세 가닥으로 뻗어나간 뿌리 모양과 땅 위로 솟아오른 줄기나 가지의 모양이라는 것쯤은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도 안다. 그 ‘나무 목木’의 땅 위로 솟아오른 줄기에 어린 가지 하나를 걸쳐 놓으면 ‘아닐, 혹은 끝 미未’가 된다. 아직 튼튼한 가지가 되지 않았고 가지 끝에 돋아난 또 다른 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어린 가지를 자르는 모양을 더해 놓으면 자른 나뭇가지의 중심이 붉다 해서 ‘붉을 주朱’가 되고, ‘나무 목木’에서 땅 밑에 단단히 박은 세 가닥 뿌리에 가로로 한 획을 그어놓으면 뿌리를 강조하는 것이 되면서 나무만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이라는 뜻을 담은 ‘근본 본本’이라는 글자가 된다.

‘미未’라는 글자는 나무 끝의 가느다란 작은 가지의 모양에서부터 나와서 ‘분명하지 않다’ ‘희미한 모양’ ‘아직…하지 않다’, 그리고 아직은 되지 않았으니 장차 될 것임을 암시하여 미래未來라는 뜻으로까지 나아간다. 말 그대로 ‘미래未來’는 ‘올 래來’와 함께 아직은 아니지만 장차 다가올 시점이고, ‘미완未完’은 ‘완전할 완完’과 함께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며, ‘미망인未亡人’은 ‘망할, 없을 망亡’과 함께 배우자인 남편과 더불어 죽어야 하지만 아직 죽지 못한 사람이라고 남편 잃은 여인이 누군가에게 자신을 낮춰 하는 말이 되고, ‘미구未久’는 ‘오랠 구久’와 함께 그리 오래지 아니함을 말하고, ‘미안未安’은 ‘편안할 안安’과 함께 누군가를 괴롭혀서 내가 편안하지 아니함을 말한다. 처세로 그저 한 마디 하고 넘어가자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내가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얘기하는 것은 ‘내가 너를 괴롭혀서 내가 편안하지 않으니 나를 편안하게 해 주세요!’라는 뜻이어서, 상대방의 너그러움과 용서를 받으려고 청하고 사정하는 것이다. ‘미안未安’을 이루는 ‘편안할 안安’은 ‘집 면宀’과 ‘여자 여女’로 이루어진 말이므로 ‘집에 여자가 있으면 모든 것이 평안하다’는 식으로 풀이를 하지만 다소 옹색하다. 오히려 ‘집 면宀’을 사당이나 신전과 같은 집으로 보면, 그 안에서 신의 뜻을 찾으려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풀어서, 그렇게 기도하고 신의 뜻을 찾다보면 편안해 진다는 의미로 새기는 것이 유용할 듯하다. ‘편안할 안安’은 그래서 ‘편안하다, (신의 뜻을 알고)즐거움에 빠지다, 어찌, 이에(이에, 그래서 내, 노 젓는 소리 애乃), 어디에, 안으로, 속으로’ 등등의 뜻을 지니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미안’은 누군가를 두고 내 마음을 헤아려 신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다.

에릭 시갈Erich Sigal(1937~2010년)의 소설을 두고 만들어져 겨울이면 항상 생각나게 하는 1970년의 영화 Love Story는 “사랑은 미안하다 말하는 게 아냐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라는 명대사를 가르쳐주었지만, 그렇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너의 불편한 마음을 알고도 남는다는 뜻을 가르쳐주기 전에, ‘미안하다’는 말에 인색한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부자는 불의를 저지르고도 큰소리를 치지만 가난한 이는 불의를 당하고도 사과해야 한다.”(집회 13,3)고 했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자기 불쌍한 줄을 알면 알수록 사람들에게도 미안한 것들이 너무 많아져서 미안해하지만, 자기 가련함을 모르면 모를수록 미안해하고 말 것도 없어서 뻔뻔해지고 거들먹거리며 큰 소리를 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미안해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가련히 여기시도록 하는 기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