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암癌

‘암 암癌’이라는 글자는 사람이 병상에 기대어 드러누운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 ‘기댈 녁/역疒’이라고도 하고 ‘병질 엄疒’이라고도 하는 글자와 소릿값인 ‘바위 암嵒’이 더하여 이루어진 글자이다. ‘뫼 산山’을 위에 놓거나 아래에 놓아 만들어진 글자 ‘바위 암嵒’은 ‘바위 암嵓’과 뜻과 음이 같은 글자로서 생긴 모양 그대로 산 위나 산 아래에 있는 바윗덩어리들을 묘사했다. 그러고 보면 ‘바위 암岩’은 산 아래에 아예 직설적으로 ‘돌 석石’을 놓아 생긴 글자이다. 이렇든 저렇든 ‘암 암癌’은 사람 몸의 어딘가에 돌과 같은 덩어리가 덧붙여지게 된 상황이다.(참조. 김건중, ‘입 구口’, www.benjikim.com)

‘암’을 영어로 ‘cancer’라고 하는데, 그 연유를 찾아보니 저 유명한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BC 460~370년)가 종양의 형태를 묘사할 때 사용했던 ‘카르키노스καρκίνους’나 ‘카르키노마καρκίνωμα’라는 말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2천 년도 훨씬 더 넘는 세월 전에 그리스의 한 의사가 유방절제 수술을 하다가 악성 세포들의 말단 부분이 건강한 조직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현상을 발견하면서 게의 집게발을 연상하고 이런 악성 종양들을 그리스어로 “게”를 뜻하는 “카르키노마(karkinoma)”라고 명명했다고도 한다. 실제 ‘카르키노스’는 헤라클레스의 발뒤꿈치를 물었다가 밟혀 죽은 큰 게 모양의 그리스 신화 속 주인공이기도 하다니 예기치 않게 사람을 물어 병나게 하고 부풀어 오르게 하며 상처 나게 하는 못된 ‘암’의 이름으로는 제격이지 싶다. 하늘의 별자리인 ‘게자리’를 ‘Cancer Constellation’이라고 부를 때 영어 단어 ‘cancer’가 들어있는 것을 보면 이 모든 연관이 그럴듯하다. 그러니까 희랍어가 라틴어로 옮겨지면서 카르키노스는 ‘cancer’가 되었다.

양쪽 집게발을 지닌 게(카르키노스)의 사연은 이렇다. 제우스의 아내였던 헤라가 제우스의 외도로 태어난 헤라클레스에게 12가지의 어려운 과제를 냈고, 헤라클래스가 그것을 해결하려다가 머리가 아홉 개 달린 괴물 히드라의 목을 쳐내도 쳐내도 다시 두 개씩 생겨나므로 힘든 싸움을 하던 와중에 헤라가 히드라의 원군으로 보냈던 카르키노스가 헤라클래스의 발을 무는 데는 성공했으나 결국 그에게 밟혀 죽었으므로 이를 불쌍히 여겨 헤라가 하늘의 별자리가 되게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게자리는 어두운 별들로만 되어 잘 보이지도 않아 쓸쓸하게 남았다.

거의 매일, 아니 적어도 1주일에 한두 번은 만나는 나보다 한 두어 살 적은 친한 친구 신부님이 갑자기 암 선고를 받았다. 그 말을 들은 날 밤엔 밤새워 뒤척였다. 무섭고 겁나며 안쓰럽고 남 일 같지 않으며 두려워서였다. 어느 정도의 상황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암’이라는 한 글자 단어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위축되게 하는 것을 보면 암의 위력은 대단하다. 문득 잊고 살았던 나의 나이와 함께 나에게도 닥쳐올지 모른다는 육체적 암의 개연성은 암과 같은 아집과 사악한 욕망이라는 영혼의 암 덩어리들을 제거해주시도록 청하는 평상시 일상의 기도마저 머나먼 딴 나라의 일인 것처럼 일거에 나를 압도한다. 암담하다. 인간은 암담할수록 주님 안에 더욱 희망을 품게 된다는 말조차도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나도 서둘러 건강검진을 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인다. 이럴 때 인간은 무력을 느끼며 은총을 기도할 수밖에 없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신부님께 좀 더 건강한 삶을 허락해주시도록 청한다.

신부님께 뭔가 용기와 힘, 위로의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생각한다. 그런데 막막하다.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네며 살았다는 30년도 훨씬 더 넘는 사제의 생활이 고작 이런 것일까 싶어 부끄럽고 공허하다. 신부님과 밥을 먹으러 자주 가는 단골 식당이라 봉사하시는 아주머님께 누군가에게 용기와 힘, 위로의 말을 해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여쭤보았더니 ‘모든 게 잘 되어갈 것’이라 말해 달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그대가 하는 일이 모두 다 잘 되어 나가기를 빕니다. 또 그대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육신도 건강하기를 빕니다.”(3요한 1,2)라는 말씀을 몇 번이고 되뇐다. 히포크라테스가 『음식으로 못 고치는 병은 약으로도 못 고친다.(Leave your drugs in the chemist’s pot if you can cure the patient with food.)』라고 했다 한다. 2천 5백여 년 전 히포크라테스가 과연 그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신부님과 맛있는 것, 건강한 음식을 더 자주 먹어야겠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일상의 기쁨과 웃음이라는 선물을 더 자주 나눠야겠다.

성낼 분憤‧忿

‘분노’라는 말을 한자어로 찾으면 ‘성낼 분憤’을 써서 ‘분노憤怒’라고 하거나 같은 뜻을 가진 ‘분忿’이라는 글자를 써서 ‘분노忿怒’라고 쓴다. ‘분憤’이나 ‘분忿’은 전혀 다른 글자이지만, 뜻이 같으므로 서로 통용이 되는 ‘통자通字’이다. 우리말 사전에서도 ‘분노’를 검색하면 憤怒·忿怒라는 한자어를 나란히 기록해준다. ‘분노’는 속에서 화증火症이 치밀어오르는 것이고, 심하면 머리끝까지 끓어오르므로 비틀려 질질 나오듯 어느 순간 자아낼 수밖에 없고, 참다못해 버럭 성을 내며, 숨을 씩씩거리고 삭인다.

‘성낼 분憤’이라는 글자는 ‘마음 심心’자와 ‘클 분賁’이라는 글자가 결합하여 마음에 응어리진 것이 크게 분출하는 상황인데, ‘賁’이라는 글자는 커다란 북을 형상화하였다고 알려진다. 예전에 전쟁을 치르기 전에 북소리를 울려 병사들의 사기士氣를 극도로 끓어오르게 하는 상황을 뜻하는 ‘賁’자에 ‘心’자를 결합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마음 심心=忄, 㣺’과 소릿값인 ‘분分’을 합하여 만들어진 ‘성낼 분忿’은 그려진 모습이 훨씬 단순하다.

‘성낼 분憤‧忿’ 두 글자는 모두 ‘마음 심心’을 바탕으로 생겨난 글자이니 ‘분노’는 분명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누군가로부터 나 자신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거나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오해받는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누군가가 내 말이나 행동‧태도를 부분적으로 잘라서 이용한다고 생각하면 속상하다. 하지만, 삐져서 속앓이하다 간혹 앙심이 되는 것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마음에 품다가, 말로 표현하다가, 가혹한 비난과 비판의 행동으로까지 3단계로 표출된다.』 했던 ‘욱’하거나 ‘버럭’으로 터져 나오는 속상함도 세월이 가면서 무디어지다 못해 보이지 않게 미미해지고, 그것마저 횟수나 발생 주기가 뜸해지고 무디어지는 것을 보면, 그리고 나의 의사를 기껏해야 30% 정도나 묘사하고 살아야 하는 외국 생활에서는 체념 쪽으로 기우는 듯하기도 하다. 어느새 나와 나 자신의 의견이나 태도를 분리하는 법을 익힌 것이거나 처세나 요령이 늘었기 때문일까?

현대 사회는 우발적 범죄가 횡행하고 ‘분노 사회’가 된 지 오래며, ‘분노조절장애’라는 말이 흔한 말이 되면서 사람들은 그런 말 뒤에 숨어 분노를 처리한다. 분노의 다른 이름들인 화, 격분, 흥분, 충돌, 노여움, 울분, 분개, 분통, 짜증, 부아는 흔히 큰 소리나 불평불만, 욕설, 폭행이 되어서 타인을 파괴하기 위한 무질서로 표출될 때 주로 내가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대상에게로 향한다. 그러지 않을 때는 뒤에서 수동적 공격성인 은근한 어깃장이나 냉소가 되거나, 자학으로 자신을 못살게 굴기도 하면서 마침내 나를 해치고 타인을 해치는 죄가 된다. 그리고 내가 알든 모르든 큰 수치심을 동반한다.

분노는 가끔 음욕과 결합하든지 먹고 마시는 것과 결합하여 대체물을 통한 병적인 증상으로 나타나든지, 미적거림으로 변신해서 최선이 아닌 차선에 안주하게도 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오래 내재하여 만성적 분노로 자리 잡을 때가 있다. 누구나 분노가 없을 수는 없어서 살아 있는 것의 분출이라고도 하지만, 개인의 분노는 결국 폭력 사회를 조장한다. 물론 분노는 그 누구도 이뤄내지 못하는 예술의 경지를 이뤄내는 창조적 에너지와 자기방어를 위한 힘이 되어 생존의 동력이 되기도 하고, 공분公憤은 사회운동이 되어서 사회를 바꾸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 분노는 아예 병이 되고 장애가 된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걸 정도로 예기치 않게 파괴적 행위나 짜증으로 터져 나오는 간헐적 폭발 장애인 분노조절 장애가 있고, 누군가에게 당한 충격과 억울함이 굳어져 지속적 분노가 되고 예민해지거나 반대로 무관심해져서 일종의 불안 장애가 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도 있으며,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처럼 변덕스럽고 극단적이며 충동적인 경계성 인격 장애, 사이코패스가 되어 타인을 해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반 사회성 인격 장애로 나타난다. 심지어 신경계통을 손상하여 우울한 기분과 불면증, 식욕부진, 불안과 비관, 짜증, 감정기복 등의 증상을 계속 동반하면서 약을 먹게도 한다.(참조. 김인호, 그리스도인의 분노 다스리기, 경향잡지, 2018년 7월호, 17-19쪽)』

번지樊遲라는 제자가 공자님께 덕을 높이고 나쁜 마음을 닦아내며 미혹을 분별하고자 하면 어찌해야겠느냐고 여쭌다. 공자님께서는 물음 자체가 좋다 하시며 일은 먼저하고 대가는 뒤로하는 것이 덕을 높이는 것이고, 자신의 나쁜 점은 다스리고 타인의 나쁜 점은 공격하지 않는 것이 사특함을 다스리는 것이며, 한때의 분노로 자신을 잊고 부모에게까지 화가 미치도록 하는 것이 미혹됨이 아니겠는가 하셨다.(논어論語, 안연편顏淵編, 21)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식자들은 분노의 뿌리가 나를 지키려는 이기利己에 닿아있어서 어느 순간 타인을 향하여 뻗칠 때 한순간으로 모든 것을 망치게 되고 심지어 가까운 이들까지 피해를 보게 하니 자제와 인내라는 훈련으로, 그리고 이성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분노를 다스린다 하고, ‘식분熄忿(꺼질 식)’이라 하며, 『타오르는 불과 같으니, 참음으로써 꺼야 한다고 하고, 참으면 없어지고 고요하면 물러난다(忍則去, 靜則却) 한다.(빤또하, 칠극七克, 일조각, 1998년, 200쪽)』 곰곰이 그 뿌리와 원인이 무엇인지 헤아리고, 목구멍을 넘어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하며, 내가 나를 상하게 하고 있음을 간파해야 하는 것이 분노이다.

바오로 사도는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에페 4,26) 하고, 오래전 현자는 “분노에 더딘 이는 매우 슬기로운 사람이지만 성을 잘 내는 자는 제 미련함만 드러낸다.”(잠언 14,29) 한다.

매미 선蟬

숲길을 가는데 갑자기 몇 걸음 앞서 길바닥에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매미 한 마리가 막 허물을 벗고 나오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매미를 벌 같은 다른 곤충이 공격했나 싶어 유심히 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매미는 거푸집을 끌고 서둘러 응달의 숲으로 몸을 피한다. ‘한사코 옆에 붙어 뜨겁게 우는 사랑’ 같은 매미(참조. 안도현, 매미)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뜨겁도록 쨍쨍하게 햇볕이 내리쬐는 중에 시끄럽도록 떼거리로 울어대야 매미는 매미답다. 요란한 매미의 울음이 햇볕의 뜨거움을 더하는 중에 의외로 사람의 마음은 차분해지고 주변은 한가하다. 매미 소리는 나 홀로 이유도 없이 어딘가에 뚝 떨어져 멀리 와 있다는 착각 속에서 문득 나를 돌아보게 한다.

‘매미 선蟬’이라는 글자는 뜻을 나타내는 ‘벌레 충虫’과 소릿값인 ‘홑 단/오랑캐 이름 선單’이라는 글자로 이루어졌고, 매미울음은 ‘선성蟬聲’이라 한다. 매미를 두고 중국 진晉나라 때 육운陸雲(232~303년)이 다섯 가지 덕이 있다 하였다더니 정말 그런가? 그의 <한선부寒蟬賦>에서 지극한 덕을 갖춘 지덕지충至德之蟲인 매미는 머리에 선비의 관대冠帶(갓과 허리띠)를 상징하는 모습이 있어 문덕文德이 있고, 이슬을 먹고 사니(실제로는 수액이나 식물의 즙과 같은 것을 먹는다) 맑은 청덕淸德이 있으며, 곡식을 먹지 않으니 청렴의 염덕廉德이 있고, 둥지를 만들지 않으니 검소함의 검덕儉德이 있으며, 반드시 절기를 맞추어 우니 신덕信德이 있다고 했다 한다. 이렇게 매미가 갖춘 문(文), 청(淸), 염(廉), 검(儉), 신(信) 다섯 덕목을 본받으려 임금도 매미의 양 날개를 위로 향하게 형상화한 익선관翼蟬冠을 머리에 썼고, 조정의 신하들도 매미의 양 날개를 옆으로 향하게 한 관모官帽를 썼다 하였다.

자기 소리에 가장 잘 맞는 소리를 가늠하는 암컷을 위해 수컷만이 운다는 매미, 작게는 3년부터 많게는 17년 홀수 해로만 기다려 유충 생활을 마치고 세상에 나와 짧게 살다 간다는 매미, 지구상에 무려 3천 종이나 존재한다는 매미, 동시에 큰 무리를 지어 세상에 나와야만 그나마 다음 세대를 위해 후손을 남긴다는 매미, 주파수가 맞지 않은 엉터리 라디오 소리 같은 소리를 넘어 이제는 진공청소기의 소음이고 밤중에 쇠를 깎는 것 같은 소리를 낸다는 매미, 새들과 거미와 사마귀를 천적으로 둔다는 매미, 땅이 큰 미국에서는 주기매미(Periodical cicadas)라는 이름으로 1에이커(약 4047㎡)당 최대 150만 마리까지 나타날 수 있다는 매미…, 아스라한 우리나라에서도 지금 장마를 넘어 막바지 여름 매미의 계절이 오고 있을 것이다.

홀로 독獨

‘홀로 독獨’이라는 글자는 ‘혼자’나 ‘홀로’라는 뜻을 지닌 글자이다. 이 글자를 순서대로 펼쳐서 큰 개나 사슴을 가리키는 ‘개 견犭’ + ‘눈 목目’ + ‘쌀 포勹’ + ‘벌레 훼/충虫’의 조합이므로 개와 벌레가 서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외롭다는 뜻이라고 풀이한 것을 읽고 피식 웃었던 적이 있다. 떠돌이 개가 목욕을 안 해서 애벌레가 붙어 있다는 식이거나 마당의 개나 풀밭의 애벌레가 상관없이 사는 ‘홀로’ 사는 삶이라고 풀이하는 것과 비슷해서였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뜻과 소릿값으로 나눠보는 방식에 따라 개나 사슴을 뜻하는 ‘개 견犭(=犬)’이라는 글자와 ‘해바라기 벌레/애벌레/나라이름 촉蜀’의 결합으로 보면서 개(犬)는 무리를 지으면 싸우므로 홀로 떼어놓아야 한다거나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성질이 있으므로 그렇게 썼을 뿐 글자의 한 부분을 차지한 ‘애벌레/나라이름 촉蜀’은 그저 음을 나타낼 뿐이라고 하면 풀이는 되지만 썩 개운치가 않다.

그래서 ‘애벌레/나라이름 촉蜀’이라는 글자를 뜯어본다. 누에처럼 생긴 해바라기 벌레, 혹은 애벌레의 모양에서 왔다는 ‘촉蜀’이라는 글자는 몸의 모양(勹)에 머리를 상징하는 눈(目→罒)이 붙어 있는 모습이었고, 나중에 벌레라는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벌레 충(虫)자를 추가하였다 한다. 삼국지의 유비劉備가 세운 촉蜀이라는 나라에서 두우杜宇라는 왕이 호의를 베풀었다가 나라를 빼앗기고 억울하게 죽어 대궐이 보이는 서산에서 밤마다 울었다는 두견새,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歸蜀道(*촉나라로 돌아가는 길) 운다’라는 싯구가 되었던 바로 그 ‘촉’이다. 그렇게 ‘蜀’을 풀어봐도 원래의 ‘홀로 독獨’이 왜 ‘홀로’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는가는 깔끔하게 파악되지는 않는다. 사전에서도 『개는 무리지어 살지 않고 혼자서 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홀로’라는 뜻이 생겼으며, 이로부터 단독單獨, 고립孤立, 독특獨特하다 등의 뜻이 나왔다. 또 자식이 없거나 아내가 없는 사람의 지칭으로도 쓰였다.(하영삼, 한자 어원 사전, 196쪽)』할 뿐이다.

독獨은 독毒이라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생은 결국 홀로이다. 맹자孟子 때부터 ‘환과고독鰥寡孤獨(홀아비 환, 적을/과부 과, 외로울 고, 홀로 독)’이라 하여 늙고 아내가 없는 사람, 젊고 남편이 없는 사람, 어리고 부모가 없는 사람, 늙고 자식이 없는 사람을 어울려 보살피는 것이 정치라고 하였으므로 나의 기억 안에도 감히 혼자 사는 이가 없던 시대와 사회가 있었지만, 어느덧 독거노인獨居老人이니 고독사孤獨死라는 말은 보편화가 된 지 오래고, 함께 모여 살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시대가 되었으며, 그렇다고 혼자 살게 된 이들을 소위 사회의 안전망이라는 시스템이나 연금 혹은 재취업 기회로 보살펴야 하는 것이 후세에 부담을 안겨주는 일이 될 뿐이라 하기도 하고, 홀로 내팽개쳐진 삶은 잘못된 삶을 살았던 본인이 자초한 것이니 어찌할 수가 없다 하기까지도 한다. 나이 들어 품위 있는 삶을 누릴 권리는 어쩌면 나이 들기 전의 영악함이나 이기적인 대비만으로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주 목요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던 할아버지 신부님들이 계시는 양로원에 다녀올 때면 다소 우울한 기분이 오래 남는다. 세계에서 문명이 가장 발달한 선진국이라는 이곳 미국, 그중에서도 편안한 노후를 위해 은퇴한 이들을 위한 도시라는 이곳 탬파, 그래도 괜찮은 축에 속한다는 양로원의 먼지투성이 침대에 간신히 걸터앉아 30분 이상 걸려 홀로 일회용 기저귀 팬티를 갈아입고, 앞인지 뒤인지도 모르게 고무줄 바지를 한쪽으로 쏠리게 입고 난 뒤, 기진맥진해서 침대에 다시 누워 깊은 잠에 빠져 기약 없고 대책 없는 소모의 들숨 날숨으로 끊어질 숨의 순간을 마냥 기다린다는 것은, 그곳이 일터요 생업인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를 지켜보는 모든 이에게 참으로 잔인한 일이다.

오늘 1935년 생이신 폴이라는 신부님이 그렇게 누워있는 침대 곁 탁자에는 구정물 같은 탁한 물에 틀니가 담긴 플라스틱 컵, 얼룩투성이의 안경, 아직 사용하지 않은 흐트러진 몇 개의 기저귀 더미, 플라스틱 소변 통, 하나는 내게 주어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3개들이 작은 비스킷, 그리고 빛바랜 성모님의 상본 한 장이 놓여있었다. 간병인은 며칠 전 뉴욕에서 왔던 전임 원장이 목에 걸어주었다는 아주 예쁜 묵주는 누가 훔쳐 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이 글은 2019년 10월 탬파에 있을 때의 글이다. 폴 신부님은 이미 올해 2020년 초에 돌아가셨다.)

잎 엽, 땅 이름 섭, 책 접葉

‘(나뭇)잎 엽葉’은 ‘풀 초艹’ 더하기 ‘인간 세世’ 더하기 ‘나무 목木’으로 구성되었다. 한가운데 ‘세상/인간 세世’를 품고 있는 글자이다. 나뭇잎을 가리키는 葉보다 枼이라는 글자가 먼저 쓰였는데, 이 글자보다도 먼저 나뭇잎을 가리키는 글자는 ‘世’라는 글자였다. ‘世’라는 글자 자체가 나뭇가지에서 돋아나는 순이나 잎사귀를 본떠 만들어진 글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나뭇잎이 나고 지는 것은 곧 해가 바뀌는 것이어서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는 ‘생애’의 뜻으로 점점 발전되어 일생이나 세대라는 뜻으로까지 나아간다. 같은 글자이지만, 온전히 인간이나 일생, 생애를 뜻하는 글자로는 ‘인간/대 세卋’라는 글자로 구별하여 쓰기도 한다. 이 글자는 ‘열 십十’이 세 개 겹쳐진 의미로 대략 30년을 한 세대로 지칭하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世’가 본래 뜻인 나뭇잎을 잃을 수 있으므로 그 글자 밑에 ‘나무 목木’을 붙여 ‘나뭇잎 엽枼’을 만들었다가 그 글자 위에 ‘풀 초艹’까지 더해 오늘의 ‘나뭇잎 엽葉’이 되었다. 이는 보통으로 나뭇잎, 꽃잎, 잎처럼 얇은 종이 같은 것, 책의 쪽, 동전을 세는 단위 등으로 쓰이고 ‘중엽中葉’에서처럼 한 세대나 시기를 뜻하기도 한다.

잎은 놀이개다. 백 보나 떨어진 거리에서 쏜 화살의 과녁이 된 버들잎(백보천양百步穿楊)이 있고, 나뭇잎을 가르는 검劍이 있으며, 애들이 한 장 한 장 떼어내며 가위바위보를 할 수 있어서이다.

잎은 가리개다. 첫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렸던 무화과나무 잎, 비오는 날 머리를 가리는 연잎, 당唐나라의 양옥환楊玉環이 손으로 건드렸더니 당해낼 수 없는 미모 앞에 부끄러워 잎을 말아 올려 자신을 숨겼다는 함수화含羞花 때문이다.

잎은 치장이다. 여러 색의 꽃잎으로 즙을 짜 굳혀 만든 연지臙脂로 뺨에 홍분紅粉을 칠했다는 복숭아 꽃잎이 있고 즈려밟고 가시라는 꽃길이 있어서이다.

잎은 대비對比이다. 한 송이 붉은 꽃을 돋보이게 하는 푸른 잎들이 있으며(만록총중홍일점萬綠叢中紅一點), 한해살이풀이지만 푸른 물감의 원료가 되는 청출어람靑出於藍(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의 쪽잎 때문이다.

잎은 계략이다. 벌레가 좋아하는 꿀로 역모逆謀의 글을 써서 역사를 바꾸어가던 음모陰謀의 나뭇잎이 있어서이다.

잎은 낭만이다. 연서戀書와 시詩의 바탕으로 붉게 물든 감나무잎(시엽지枾葉紙)이 있고, 노란 은행잎으로 덮인 길을 가는 연인의 팔짱 낀 모습이 있어서 그렇고, 이른 아침 이슬 맺힌 풀잎이 있기 때문이다.

잎은 세월이다. 섬돌 앞에서 가을을 알리는 오동나무 잎(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이 있어서이다.

잎은 거름이요 순환이다. 온갖 것을 말없이 받아들여 쌓이고 쌓이다가 버무리고 뒤섞이며 밟히고 썩어 생명을 낳는 거룩함을 담았기 때문이다.

잎은 먹거리다. 온 세상 언제 어디라도 한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있어서 여름 맛을 주는 깻잎과 상춧잎과 고춧잎을 비롯해 가난한 시절 뒷동산에만 오르면 누구나 캘 수 있었던 백여덟 가지나 된다는 나물 잎들이 있어서이다.

잎은 한恨이다. 망망대해에서 한 잎의 좁은 배를 탄 좁쌀 같은 인생살이의 슬픈 일엽편주一葉片舟와 그 위의 술잔이 있고, 빈산 잎이 지고 비마저 부슬부슬(권필權韠·1569~1612년 : 공산목락우소소空山木落雨蕭蕭)대는 시가 있으며, ‘나뭇잎이 푸르대야 시어머니보다 더 푸르랴?’ 하던 민요가 있기 때문이다.

잎은 사유와 성찰이다. 꺾이고 구부러지며 잎새의 폭이 풍성하고 수척해지는 변화와 반복 속에서 마음을 속이지 않고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으로만 그릴 수 있고 결코 남의 눈을 속일 수 없다는 난초의 잎이 있어서이다.

잎은 향이다. 덖고 우려 즐기는 찻잎과 선禪이기 때문이다.

잎은 길이다. 9년 동안 좌선하신(면벽좌선面壁坐禪) 달마대사를 동쪽으로 모셔 온 갈댓잎(노엽달마蘆葉達磨), 그리고 그 달마대사께 향기로 움직이는 동쪽의 땅을 펼쳐준 다섯 장의 꽃잎(오엽분피진단개五葉芬披震旦開-震旦:동쪽의 땅)이 있으며, 비가 거센 4월 어느 날 작은 벚꽃잎들로 하얗게 뒤덮인 길이 있어서이다.

잎은 죽음이다. 다양한 색과 모양으로 유일하게 사람이 이승을 떠나는 장례식을 송별하면서 죽음의 신비처럼 많은 꽃잎으로 자신의 속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 국화꽃 잎이 있기 때문이다.

숲에 들었더니 헤아릴 수도 없는 모든 잎이 하나도 예외 없이 전부 각자 자기 자리를 잡았다. 햇빛은 잎을 헤치고 감히 들어올 수가 없어졌으며 잎들 사이로 간간이 바람과 더불어 즐거운 숨바꼭질을 할 뿐이다. 위로는 새들이 가지를 바꾸고, 밑으로는 다람쥐들이 부스럭거리느라 바쁘고, 저만치서는 사슴들이 가끔 경계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가만히 쳐다본다. 친구에게는 곧잘 모습을 보여준다던 갈색과 회색 여우는 야속하게도 좀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답답할/번민할 민悶

‘답답할/번민할 민悶’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글자가 생긴 그대로 빗장 지른 문 안에 갇힌 사람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마저 곤란해져 괴로워하고 말 그대로 답답해서 미칠 지경인 경우를 뜻하면서 ‘우매하다, 밀폐하다’의 뜻으로까지 나아간다. 문 안에서 안(내면)으로 고통받는 상황이다. 흔히 ‘번민煩悶, 고민苦悶’ 할 때 쓰는 글자이다.

covid19 때문에 사람들이 갇힌 지 한 달도 훨씬 넘었다. 답답해한다. 뉴욕 날씨도 좀체 도와줄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 비가 내리며 흐리고 바람마저 거센 채, 봄인 줄도 모르게, 그렇게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날이 반짝하고 햇빛이라도 비칠라치면 넓은 이곳에는 공원마저 닫혀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몰려온다. 마스크를 쓰고서도 사람들은 재잘거리고, 성장한 딸과 아빠는 연신 뛴다.

숨었던 다람쥐들이 이리저리 바쁘고, 그라운드 호그라는 녀석이 연신 이 굴에서 보였다가 저 굴에서 보이며, 사슴들은 태연하게 무리를 짓고, 하늘이나 나뭇가지에 있어야 할 새들도 풀밭 위를 종종거린다. 길 잃은 야생 칠면조 한 마리는 며칠 전부터 맨날 같은 곳에서 겁 없이 뒤뚱거리고, 현관 바깥쪽 높은 곳에서는 수백 수천의 꿀벌들이 윙윙거린다. 움직이는 것들이 부산스러운 가운데, 개나리와 목련 같은 몇몇 꽃은 이미 졌고, 나무들은 하나같이 조용히, 그러나 여지없이 연둣빛과 초록빛들을 점점 더 내밀어 보이면서 세를 과시한다. 사람들이 답답하니 그동안 사람들 탓에 답답했을 것들이 활발하다.

벌써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시작되면서 모처럼 화창한 5월 셋째 날, 그리고 일요일, 창밖의 새 소리는 바로 옆이고, 멀리 나는 비행기 소리도 가깝다.

나그네, 군사 려/여旅

여객旅客, 여행旅行, 여정旅程, 여관旅館, 여권旅券 등에 쓰이는 ‘旅’라는 글자는 ‘나그네 려/여’ 혹은 ‘군사 려/여’라고 한다. 옛날 글자는 ‘𣃨’로서 깃발이 나부끼는 상황에서 깃발 아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형상화했다. 그래서 이를 ‘나부낄 언㫃’이라는 글자와 ‘좇을 종从’이라는 글자가 합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때 ‘나부낄 언㫃’을 ‘방향 방方’과 ‘사람 인人’의 결합으로 보아서 사람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알리는 깃발 신호라고 보면 앞뒤가 이어진다. 깃발은 사람들 집합체의 상징이다. 깃발 아래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은 함께 적을 대적해야 하는 전쟁과도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니 실제로 ‘旅’는 500명을 ‘一旅’라고 하는 군대 조직의 단위이기도 했다. 깃발 아래 모인 군인들은 전쟁을 위해 오랜 기간 집을 떠나 사방팔방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旅’에는 ‘여행하다’ ‘나그네’ ‘무리’ ‘나돌아다니다’라는 뜻이 담기게 되었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旅’에는 하늘에 제사를 바치는 역할을 해야 했던 왕이 많은 무리를 이끌고 이동하는 모습도 담고 있어서 ‘제사祭祀’의 이름이나 ‘제사 지내다’라는 뜻이 담겨있다고도 보지만 깃발 아래 많은 사람이 이동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뜻이다. 흔히 집단을 이루어서 해외여행을 다니는 패키지를 ‘깃발 부대’라고 부르는 것이 아마 이런 연유이지 싶다.

‘旅’라는 글자와 함께 만들어진 낱말 중 가장 멋지고도 보편적인 말은 아마도 ‘여행旅行’이다. ‘여행’이라는 말만큼 인생을 잘 상징하는 말이 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하나의 깃발 아래에 모여 있는 우주 만물이 각기 ‘계시’를 찾아 여행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가佛家의 오욕은 수면욕睡眠慾, 식욕食慾, 색욕色慾, 명예욕名譽慾, 재물욕財物慾이라 했고, 현대의 윌리엄 글라써William Glasser(1925∼2013년)는 개인의 욕구가 생존, 사랑, 힘, 자유, 즐거움 다섯 가지라고 했다. 어쩌면 이런 욕구들의 종합은 ‘여행욕旅行慾’이다. 욕구는 다스려야 한다. 그렇지만 사람은 누구나 여행을 꿈꾸고 계획한다. 사람은 일하지 않고 여행이나 하면서 사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 누구나의 꿈이라고 믿는다. 사람은 가슴이 뛸 때를 놓아두고 다리가 떨릴 때를 골라 하는 때늦음을 한탄하는 우매함 속에서도 여행을 바란다.

여행은 보는 것과 누리는 것, 그리고 소유하는 즐거움을 망라하는 놀이이다. 여행은 새로운 것, 낯선 것들과 지어내는 이야기이다. 여행은 누구에게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나면서도 ‘떠나고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서 이승에 사는 동안은 절대 끝나지 않을 인생길, ‘길 없는 길’의 여행을 다시 숙고하게 하는 숙제이다. 여행은 닻을 내릴 포구를 찾는 희망 속에서도 끝내 떠난 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귀향이다. 여행은 다시 돌아오는 귀향길에서도 누구나 떠남 자체가 보람되었다고 하는 미화이다. 여행은 나이가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자기 나이를 잊게 하는 마력이다. 여행은 다소의 허영과 모험, 영웅심과 동경, 전설과 환상이 뒤섞였다 해도 자기를 속이는 거짓이 함께 하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를 안은 무모함이다. 여행은 내 처지의 안타까움 안에서도 늘 꿈꾸는 동경이다.

옛날 여행을 떠나는 제자에게 스승은 꽃 한 송이를 꺾어오라 해서 그 꽃으로 제자가 가야 할 길의 길흉화복을 알려주는 화점花占으로 배웅했다. 배웅하는 스승은 고사하고 아무도 없이 혼자 떠났다 하더라도 여행은 의미라는 여행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개고생이고, 자칫 온갖 잡동사니를 짊어진 채 질질 끄는 고난의 행군이며 소모이다. 여행은 내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는 내가 만든 강박과 거짓 책임에서 스스로 벗어남이다. 여행은 바다와 산, 별과 사막, 사람과 낯섦을 찾아 떠나면서도 자기는 까맣게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이다. 여행은 별들을 보고 떠났다가 별이 길을 안내하는 지도가 아님을 알게 되는 과정이다. 여행은 길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멀리서 여행 떠나온 별들임을 발견하는 환희이다. 여행은 혼자이면서도 둘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미련未練이고 상념常念이며 그래서 서글픔이다. 여행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떠나면서도 자기를 벗어나는 인내, 침묵, 명상이다.

여행은 『머리(지성)에서 가슴(공감과 애정)까지, 그리고 가슴에서 발(삶의 현장과 변화)까지 이르는 공부이다.(신영복)』 여행은 『나와 나 자신을 갈라놓은 낭떠러지를 건너는 가장 중요한 여행을 생각하고, 이것이 없다면 다른 여행들은 아무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는 것을 아는 깨우침이다.(토마스 머톤)』 여행은 자신의 문에 이르기 위해 만나는 문마다 두드려야 하는 나그네이고, 안에 다다르기 위해 밖을 다니는 행로이다. 여행은 영원의 틈새를 흘낏 본 새들이 떠나서 먼 길과 긴 시간을 나는,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끝나는 법이 없는 미완이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여행은 언제나 미완이다. 성경의 여행은 뭐니 뭐니해도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여행이다.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향한 여행은 “어리석은 자의 말은 여행 중의 짐과 같고 지각 있는 이의 말은 기쁨이 된다.”(집회 21,16)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은 모든 일에 능통하다.”(집회 34,11) “나는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보았지만 내가 배운 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다.”(집회 34,12) 하는 말들처럼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을 알아가는 참 지혜의 습득 과정이었다. 그렇게 힘들었던 그 여행만큼 고생했던 바오로 사도의 여행 역시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2코린 11,26) 하는 말 그대로이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미완의 여로에 서 있다.

관계할/빗장 관, 당길 완關

‘관계할/빗장 관, 당길 완關’을 속자俗字로는 간단하게 ‘関’이라고 쓴다. 관문關門이니 관세關稅니 할 때 쓰는 글자이다. ‘관계할 관, 당길 완關’자는 왼쪽 문과 오른쪽 문을 가리키는 ‘문門’이라는 글자 안에 ‘실 사絲’, 그리고 ‘쌍상투 관丱’이라는 글자가 더해져 있다. ‘실 사絲’는 실의 원료가 되는 누에고치가 매달린 모습이고, ‘쌍상투 관丱’은 ‘卝’이라는 글자로서 어린아이의 머리털을 좌우左右로 갈라 두 개의 뿔같이 잡아맨 모양을 본떴다. 이를 종합하면 ‘관계할/빗장 관, 당길 완關(=関)’은 양쪽 문을 실 같은 것으로 단단히 잡아매어 묶고 빗장을 질러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게 된 상황을 뜻한다. 글자를 더 거슬러 올라가도 뜻은 마찬가지이다. ‘문 문門’ 안에 막대기 두 개를 꽂아놓고 그것들을 무엇인가로 서로 잡아매어 놓은 열쇠와 빗장을 ‘絲’자와 ‘丱’으로 표현하거나, 숫빗장을 암빗장에 찔러넣은 모습을 갖추어 ‘관계하다, 닫다, 가두다, 폐쇄하다, 묶여있다, 빗장’이라는 뜻을 갖는다. 내용이 같은 것처럼 보이고, 글자도 비슷하지만, ‘닫다, 막다, 가리다’라는 뜻을 표현할 때는 ‘닫을 폐閉’라는 글자를 쓴다.

COVID-19로 모두가 문을 닫아걸고, 서로 경계하며 거리 두기를 한다. 이른바 세계적 유행어가 되어버린 ‘Social distance’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관계할/빗장 관, 당길 완關’이 보여주듯이 지구라는 별 위에 살아가는 세상 인간 누구나 연결되어 있고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이는 ‘사이 뜰 격隔’이요 ‘닫을 폐閉’일 뿐이다. 문 안에 들어서 있는 사람들끼리 단단히 결속하여야겠지만, 문 안에 함께 있으면서도 누군가와 연결될 수 없어 외로운 수많은 사람과도 하나인 것을 알아서 관계를 맺어 함께 살아야 한다.

‘Social distance(사회적 거리)’라는 말에 반대되는 개념을 영어로 표현하면 ‘Social proximity(사회적 접근)’라는 말일 것이다. ‘사회적 거리’는 자칫 잘못하면 거리를 두어야 하는 상대방을 전제한다는 의미에서 이미 무엇인가의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의 개념이 된다. 모두 입을 모아 ‘사회적 거리 두기’를 외칠 때, ‘사회적 가까워지기’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는 많은 사람이 소외된 채 죽어간다. 그렇게 COBVID-19는 우리가 그동안 답하지 않고, 모른 척 살면서 외면하려 했던 본질적인 것에 대해 진실한 답을 하라 다그친다.

사이 뜰 격隔

‘사이 뜰 격隔’은 왼쪽에 붙어서 언덕이라는 뜻을 지닌 ‘언덕 부阝=阜’와 소릿값인 ‘막을 격鬲’이 합쳐진 글자이다. 너와 나 사이를 가로막는 언덕이나 장벽으로 갈라지고 나뉘어 가로막힌 상황이다. 그런데 ‘막을 격鬲’ 역시 항아리 같은 것을 올려놓고 밑에서 불을 지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상황을 묘사한 글자이니 이로 미루어 ‘사이 뜰 격隔’은 언덕과 언덕, 혹은 큰 언덕인 산과 산 사이의 공간이고 떨어져 있음이며 막힘이고, 경계를 넘어 멀리하다 보니 서로가 달리 바뀌어 가는 상황이다. ‘사이 뜰 격隔’에는 ‘칠, 부딪칠 격擊’이라는 뜻도 담겼다.

‘칠, 부딪칠 격擊’은 ‘손 수手’라는 하단부 위에 ‘수레 끌 수軗’라는 글자가 올라앉아 있다. ‘수레 끌 수軗’는 ‘수레 차車’와 ‘창 수殳’의 결합이니 수레 위에서 손에 창을 들고 상대방을 공격하고 친다는 뜻이다. 결국 ‘칠, 부딪칠 격擊’은 수레바퀴 같은 것이 돌면서 무엇인가에 부딪혀 큰 소리를 내는 상황이나 손으로 무엇을 가격하는 것을 넘어 수레 위에서 누군가를 공격하는 모양새다.

COVID-19라는 바이러스가 인간을 공격해왔고 급기야 하늘, 땅, 사람들 사이가 떨어졌으며(隔), 전자현미경으로나 보아야 보이는 작은 바이러스들이 온 세상을 내려친다(擊). 격리隔離(lockdown, isolation)요 격추擊墜(shutdown)이다. 누구나 난생처음 맞아보는 이변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별의 인사마저도 못한 채 서로 생을 달리해야만 했고, 아픈 이들을 돌보는 이들은 사투死鬪를 벌여야 하며, 서로는 두려움의 시선으로 살피고 움츠린다. 경험의 축적으로 살아가는 인간 사회는 사례가 없고 유례가 없어 당황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일상과 서로의 소중함을 발견하기 시작하고, 손으로는 닿지 못해도 마음으로 닿아야 하는 것들과 만지지는 못해도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를 새기며, 숨 가쁘게 급하기만 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우리가 그렇게 위대하다고 자부했었으나 그렇게도 작은 것 앞에서 속수무책일 만큼 연약함을 절감하며,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던 황갈색 이산화탄소로 뒤덮인 하늘이 푸른 빛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목격한다.(황색빛 하늘도 죽인 코로나···중국 대기가 파랗게 변했다-중앙일보, 2020.03.01. 참조)

하늘의 경고이자 숨 고르기이고, 땅의 쉼이며, 사람들이 기도하는 시간이다. 새들은 여전히 다시 울고, 꽃들은 다시 피기 시작하며, 봄이 다시 오고 있다. 낙엽이 수북한 숲속에 제멋에 살다가 요정의 구애를 아랑곳하지 않았던 수선화 몇 송이가 피었다.

“마리안 쉬라인(오늘 오후)”

소리, 그늘 음音

‘소리, 그늘 음音’은 원래 ‘말씀 언言’과 같은 글자에서 출발한다. ‘소리’와 ‘말’을 따로 구별하지 않다가 이를 서로 구별하기 위해서 ‘말씀 언言’의 ‘입 구口’에 ‘하나 일一’을 더함으로써 ‘말씀(말)’과 구별되는 ‘소리’를 나타낸다. 소리(音)와 구별되는 ‘말씀 언言’은 ‘매울 신辛’과 ‘입 구口’가 더해져 만들어진 글자인데, ‘매울 신辛’이 손잡이가 달린 쇠꼬챙이처럼 끝이 뾰족한 것을 가리키므로 얼굴의 구멍인 입(口)에서 나가 누군가 상대방에게 꽂히는 매서운(辛) 말이라고 풀이하기도 하는데, 대개는 입에 물고 부는 나팔과도 같은 악기를 그렸거나 입에서 퍼져나가는 말 자체의 형상을 묘사했다고 한다. 잔소리, 군소리, 흰소리(터무니없이 떠벌리는 말), 헛소리, 말 같은 소리에서처럼 소리와 말이 동의어로 쓰일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의 생각이 입을 통해 조직적으로 전해지는 말이나 말씀은 言이라 하고, 사람의 입을 통해 그저 나오는 소리나 그 밖 삼라만상의 소리를 통칭하여 音이라 할 것이다.

소리는 분명 말보다 먼저였다. 사람도 울음소리로 인생을 시작하여 점차 말을 하기 시작하니 말이다. 그리고 말 다음에 말이 기호가 된 글이었을 것이다. 소리는 땅의 소리, 하늘의 소리, 그리고 사람의 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가 어우러져 빛이 되고 어둠이 되며, 있는 것들의 꼴이 되고, 서로에게 기억과 존재 이유가 된다.

땅의 소리는 꽃과 새싹의 소리, 폭포와 불, 그리고 하늘을 맞는 땅의 소리, 계절과 얼굴을 바꾸는 소리, 땅에 인연을 맺어 발 디디고 기는 것들의 움직임이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은 주인 노릇을 하느라 사람이 아프게 한 땅의 신음이다. 하늘의 소리는 바람과 구름,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는 새의 소리이며 징조와 신호를 내는 예언이고 계시이다. 사람의 소리는 목소리와 기록, 체험과 기억의 맥박, 마음과 영혼의 울림과 탄식, 곡哭이며 노래와 찬미, 피리와 수금, 비파와 꽹과리, 북鼓처럼 하늘 모양을 본떠 만든 것들의 소리, 스스로 목소리를 지닌 인간의 눈물, 때로는 인간 자신조차 모르는 이야기이다.

새소리가 바뀌었다. 계절이 바뀌었다는 소리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여기저기 초록 잎과 개나리가 내미는 노란 끝의 소리, 창밖으로 보이는 큰 나뭇가지에 붉은 봉오리들의 소리가 맺혔으며, 사슴들은 느긋하다.

수도 없이 소리 내어 외웠을 작은 기도문 하나를 영어로 프린트해서 지갑에 담았다. 『Hail, Holy Queen, Mother of Mercy, our life, our sweetness, and our hope! To you do we cry, poor banished children of Eve; to you do we send up our sighs, mourning and weeping in this vale of tears. Turn, then, most gracious advocate, your eyes of mercy toward us; and after this our exile, show unto us the blessed fruit of your womb, Jesus. O clement, O loving, O sweet Virgin Mary! (여왕이시며 사랑이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 당신 우러러 하와의 그 자손들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나이다. 슬픔의 골짜기에서,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여, 불쌍한 우리 인자로운 눈으로 굽어보소서. 귀양살이 끝날 그때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를 뵙게 하소서.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