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고孤

텃밭에 오이를 비롯하여 여러 열매가 달리는 계절이다. ‘외로울 고孤’는 ‘아들 자子’와 ‘오이 과瓜’의 결합이다. ‘아들 자子’야 워낙 익히 아는 글자이므로 사족이 필요 없다. ‘오이 과瓜’는 양쪽 덩굴손과 덩굴손 사이에 덩그러니 맺은 오이의 모습을 그렸다. 오이나 참외, 호박이나 박과 같이 마디 하나에 열매 하나를 맺는 수많은 덩굴 식물이 있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오이를 글자 이름으로 삼아 ‘오이 과瓜’라고 한다. 글자의 모양도 그러려니와 혼자는 기어오르고 설 수 없어서, 덩굴손으로 무엇인가를 감고 의지하는 식물이라 글자의 뜻을 새기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고아孤兒’라는 말에는 의지할 부모 없이 혼자 살아야 하는 외로운 아이와 오이 열매를 모습으로 담고, 글자 각각에 아이가 담겨 두 번 슬픈 말이다.

외로움은 이유 없이 나를 흔들어대는 공허함이다. 외로움은 차茶가 식는 줄 모르는 멍때림이다. 외로움은 짝짓지 못하는 상실과 부재, 분리이다. 외로움은 네가 아는 것과 내가 아는 것의 차이이다. 외로움은 어차피 혼자라는 자위이다. 외로움은 ‘이유 없이’라는 말의 되풀이이다. 외로움은 멀쩡하게 있다가도 불현듯 찾아오는 손님이다. 외로움은 어느새 저만치서 빤히 쳐다보는 바스락거림이다.

외로움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변덕이다. 외로움은 습관처럼 뒤적이는 책장이다. 외로움은 견주어 생각나는 박탈감이다. 외로움은 억울함으로 가중되는 냉랭함이다. 외로움은 나만 그렇다는 서러움과 섭섭함이다. 외로움은 상처받지 않으려고 웅크린 살쾡이이다. 외로움은 너의 외로움과는 다른 나만의 것이다. 외로움은 보이는 것들마다 붙이는 이름표이다. 외로움은 새 한 마리, 소나무 한 그루, 달, 쪽배, 깃대, 종소리이다.

외로움은 내 몸을 힘들게 하는 위협이요 질병이다. 외로움은 우울과 도피, 중독이다. 외로움은 의미 없음에서 의미를 만들려는 아등바등함이다. 외로움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눈물이다. 외로움은 무엇인가에 나를 미치게 하는 동력이다. 외로움은 누구, 무엇에나 있는 본질이다. 외로움은 어느 날 언제냐 싶게 숨는 재주꾼이다. 외로움은 견디는 아픔이 아니라 우주와 하나 되어 살아내는 삶이다.

뜻 의意

‘뜻 의意’라는 글자는 ‘소리 음音’과 ‘마음 심心’의 결합이다. 피리에서 나오는 소리를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지고, ‘말씀 언言’과 같은 글자였다고 알려지는 ‘소리 음音’이 ‘마음 심心’ 위에 앉았다. 옛사람들은 머리가 아닌 마음이 하는 것을 생각이라고 믿었으므로 마음의 소리는 ‘뜻, 의지, 의미, 생각, 헤아리다’ 이다. 나의 밖에 있는 대상을 보고 내가 한 생각, 대상이 나의 마음에 작용하며 불러일으킨 생각, 내가 보든 대상이 자신을 드러내어 나에게 비치든, 마음에 일어나는 소리와 맺히는 생각들이 ‘뜻 의意’이다.

‘소리 음音’에 ‘풍류 악樂’을 더해 ‘음악音樂’이 되면 마음의 소리가 가락을 통해 시간과 공간 속에 번진다. 음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악보’라는 약속 아래 같은 마음을 노래하는 인간의 또 다른 언어이다. 그래서 악보는 약속이고 언어이다. 세상 어디서나 그 악보에 따라서 같은 소리를 내고 같은 곡을 연주하도록 약속된 음악이라는 언어이다. 우리 인간은 남녀노소 누구나를 막론하고 하느님과 인간 간에 맺어진 약속을 따라 움직이도록 요청받는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마음이라는 악보에 양심이라는 음표와 지성이라는 박자를 당신 손가락으로 새겨 사람 수만큼의 멋진 인생 곡들을 연주하신다.

소리에 나의 가치관과 주관이 개입되어 정돈되면 ‘뜻 지志’가 된다. ‘뜻 의意’나 ‘뜻 지志’ 두 글자 모두 ‘마음 심心’을 기초로 한다. ‘지의志意’라고 하지 않고, ‘의意’가 먼저 오고 ‘지志’가 나중에 오는 것처럼 ‘의意’를 앞에 두어 ‘의지意志’라 한다. ‘회의會意’는 ‘모일 회會’를 더해 여러 생각을 모으는 것이다. ‘뜻 의意’에 ‘마음 심心’을 한 번 더 덧붙인 ‘억憶’이라는 글자는 통상 ‘기억하다’ 할 때의 ‘생각할 억憶’이 되면서 곱씹어 마음에 박히는 생각이다. ‘뜻 의意’에 ‘맛 미味’가 더해진 ‘의미意味’는 내가 새긴 것이거나 나에게 와서 스스로 새겨진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맛을 음미하듯이 혀끝으로 느끼는 인생의 뜻이고 값어치이다. 마음의 소리는 뜻이 되고, 뜻은 기억을 넘어 의미를 낳는다. 어쩌면 인간은 ‘의미’를 양식으로 삼아 생명을 연장한다.

의미를 찾으려는 욕구가 좌절될 때 인간은 절망한다. 단순한 욕구와 본능의 좌절이 아니고 실존적 공허에 휩싸일 때, 이를 ‘누제닉 노이로제noogenic neurosis’라 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유명한 빅토르 프랭클Viktor Emil Frankl(1905~1997년)의 말이다. 유다인으로서 다른 인간에 의해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속절없이 죽어가던 처절한 상황을 겪고, 이를 회상하면서 빅토르 프랭클은 「로고테라피」라는 독자적인 이론을 정리하는데, 그래도 살아야 했기에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 대신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빅토르 프랭클은 『한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는 있지만, 한 가지 자유는 빼앗아갈 수 없다. 바로 어떠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삶에 대한 태도만큼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더는 상황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도전을 받는다…수용소에서 누군가는 돼지였고 누군가는 성자였다. 돼지가 될 것인지 성자가 될 것인지 하는 것은 수용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결정이었다…』와 같은 체험을 내놓으며 인간 각자가 자기만이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창조가치),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체험가치),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시련에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태도가치) 행복해질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다 한다. 어쩌면 행복은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고 의미를 찾다 보면 덤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세상에는 (물론) 수많은 종류의 언어가 있지만, 의미가 없는 언어는 하나도 없습니다.”(1코린 14,10)

병 병病

‘병 질疾’이라고 하는 글자는 ‘병 병病’이라는 글자와 뜻이 같은 것 같아도 약간 다르게 쓰인다. 병상에서 팔을 늘어뜨리고 기댄 모양을 본뜬 ‘병들어 기댈 녁/역疒’에 ‘화살 시矢’가 들어간 ‘병 질疾’은 화살을 맞아 상처를 입은 사람이 끙끙거리고 있는 모습으로 비교적 가볍거나 전염성이 있는, 그러나 비교적 빠른 쾌유가 가능한 병에 쓰이는 글자이고, ‘병들어 기댈 녁/역疒’에 ‘남녘/셋째 천간 병丙’이 더해진 ‘병 병病’은 좀 더 심각한 병으로 만성적으로 몸져누운 경우를 뜻한다고 한다. 두 글자를 합하여 곧잘 질병疾病이라는 단어를 쓴다. 빨리 달리는 상황을 묘사하는 ‘질주疾走’라는 말에도 ‘병 질疾’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병 질疾’은 ‘병 병病’에 비해 위중하지 않은 것이 사실인 듯하다.

‘병 병病’은 ‘병들어 기댈 녁/역疒’과 ‘남녘 병/셋째 천간 병丙’이라는 글자의 합자이다. ‘남녘 병/셋째 천간 병丙’에 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물고기 꼬리 모양에서 생긴 글자라는 말도 있고, 제사상처럼 물건을 위에 놓고 옮기는 소위 포터 모양의 기물이라고도 한다. 또는 이를 대문이나 입구를 넘어 관문 같은 모양에서 시작하여 멀리 떨어진 곳을 뜻하는 ‘멀 경冂’이라는 글자 안에 ‘불 화火’라는 글자가 들어있는 모양이라고 풀기도 한다. 음을 빌어 ‘셋째 천간天干’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다소 생소한데, ‘천간天干’은 날짜나 하늘을 구분하여 소위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이야기할 때, 쉽게 말해 갑甲, 을乙, 병丙, 정丁… 할 때의 병丙이다.

얼마 전 노래 한 곡을 들었다. 이적(1974년~)이라는 싱어송라이터로 알려진 분이 작사와 작곡을 했다는 ‘꽃병’이다. 노랫말은 『생각나나요. 아주 오래전 그대 내게 줬던 꽃병 흐드러지게 핀 검붉은 장미를 가득 꽃은 꽃병. 우리 맘이 꽃으로 피어난다면 바로 너겠구나. 온종일 턱을 괴고 바라보게 한 그대 닮은 꽃병. 시절은 흘러가고 꽃은 시들어지고 나와 그대가 함께였다는 게 아스라이 흐려져도 어느 모퉁이라도 어느 꽃을 보아도 나의 맘은 깊게 아려오네요. 그대가 준 꽃병. 우리 맘이 꽃으로 피어난다면 바로 너겠구나. 온종일 턱을 괴고 바라보게 한 그대 닮은 꽃병. 시절은 흘러가고 꽃은 시들어지고 나와 그대가 함께였다는 게 아스라이 흐려져도 어느 모퉁이라도 어느 꽃을 보아도 나의 맘은 깊게 아려오네요. 그대가 준 꽃병 생각나나요, 아주 오래전 그대.』이다. 양희은(1952년~)씨가 부른 노래라는데, 나는 이무진(2000년~)이라는 젊은이가 부른 노래로 최근에 곱게, 감명 깊게 들었다.

노래 제목 ‘꽃병’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꽃 甁’이다. 꽃을 꽂는 甁(병 병)이고 ‘꽃 화花’를 쓰는 화병花甁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꽃병 같은 시절이 있다. 이렇게도 찍고 싶고 저렇게도 찍고 싶은 사진 같은 시절이다. 온종일 턱을 괴고 바라보게 한 시절과 함께 시절이 흘러가고 꽃이 시들어진 꽃병을 바라보는 일은 자칫 병病이 된다. 화병花甁을 바라보다 가슴에 멍울이 지는 화병火病이 된다. 그러면 큰일이다.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아야 하고 병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다닐/갈 행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오가는 네거리 길의 형상에서 왔다고 알려지는 ‘다닐/갈 행行’이라는 글자는 ‘행’이나 ‘항’으로 발음한다. 인생길을 가리키는 ‘행로行路’, 사람이 살아간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긴 ‘행장行狀’, 은밀하게 다니는 ‘암행暗行’ 등에서는 ‘행’으로 발음하고, 친족들의 서열인 ‘항렬行列’이나 다른 이의 형제를 높여 부르는 ‘안항雁行’, 군대의 행렬 대오를 가리키는 ‘항오行伍’ 같은 말에서는 ‘항’으로 발음한다. 한편, 서양식 가게인 ‘양행洋行’, 푸줏간을 가리키는 ‘육행肉行’, 약방을 가리키는 ‘약행藥行’. 금은방을 가리키는 ‘금은행金銀行’, 돈 가게인 ‘은행銀行’ 등에서 보는 ‘행行’은 ‘길’이나 ‘가다’라는 뜻이라기보다 가게나 상점, 회사이다.

이렇게 ‘다닐/갈 행行’은 네거리의 모습으로부터 길, 길을 함께 가는 사람들, 사람들이 붐비는 곳, 사람들이 모여 재주를 뽐내는 곳 등과 관련된 내용을 두루 지칭한다. 길 위에 있는 사람의 다리나 발의 형상은 ‘발 족足’이요 ‘발 지止’이다. 그래서 ‘行·足·止’ 이런 글자들이나 글자의 부분이 포함된 한자는 대개 길이나 걷는 동작과 관련된 글자들이면서 사람 발자취요 인간이 걸어가는 삶의 모습이다.

‘길 로路’는 사람의 발(足)이 마침내 다다르는 입구(各=뒤쳐져 올 치夂 + 입 구口)이고, ‘쉬엄쉬엄 갈 착辵’은 ‘조금 걸을 척彳’과 ‘발 지止’가 합쳐져 길(彳)을 가는(止) 모양새이다. 이 글자는 나중에 다른 글자들과 결합할 때 ‘辶’이라는 형태가 되면서 ‘통달할 달達’과 같은 글자를 표시하는데, ‘達’은 원래 ‘큰 대大’와 ‘彳’이 담겨 사람(大)이 다니는(彳) ‘큰길’이 되면서 사통팔달四通八達과 같은 경우에 쓰인다. 여기서 ‘통할 통通’은 속이 텅 빈 종이나 대롱(길 용/대롱 동甬)처럼 곧게 뻗은 길이다. ‘지하수 경巠’이라는 글자를 담은 ‘좁은 길, 소로 경逕’은 작고 좁은 길이다. ‘볼/의심하여 살필 구瞿’라는 글자를 行이라는 글자 가운데에 담으면 ‘갈림길, 네거리 구衢’로서 이쪽저쪽을 살피며 어느 길로 가야 할지를 망설이는 장면이다.

‘곧을 직直’은 사방으로 난 길(彳)에서 눈(目)을 들어 똑바로(뚫을 곤丨) 본다는 뜻이고, 지팡이를 짚은 사람이 길에서 두리번거리며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주저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는 ‘의심할 의疑’는 갈 길을 잃고 머뭇거리면서 의심하는 경우이며, 장애물障碍物과 같은 단어에 쓰는 ‘거리낄 애礙’는 돌(石)에 길이 막혀 갈 곳을 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疑) 모습이다. ‘걸을 지㢟’와 한 획 차이가 있는 ‘끌/늘일 연延’ 등에는 ‘길게 걸을 인廴’과 길(彳)과 발(止)이 담기면서 머나먼 길을 가는 모습을 상징화했으며, 물길(川)을 따라 이동하며 가는(辵) 모습인 ‘돌 순巡’은 시찰이나 경계 따위를 위해 돌아본다는 것이고, ‘돌아올 반返’이나 ‘돌아올 회回’는 모두 가던 길을 되돌아오는 것이다. ‘보낼 송送’은 원래 두 손(두 손으로 받들 공廾)으로 불(火)을 든 모습에 辵(쉬엄쉬엄 갈 착)이 더해져 밤에 횃불을 밝히며 사람을 보내는 모습이다. 이에 비해 ‘거스를 역逆’은 사람을 맞이함을 말했는데, 거꾸로 선 사람(屰·거스를 역)으로 사람이 밖에서 들어옴을 그렸다. ‘돌아올 반返’이나 ‘돌아올 회迴’도 모두 가던 길을 되돌아(反·반, 回·회)옴을 말한다.

‘길 도道’라는 글자는 ‘쉬엄쉬엄 갈 착辶’에 ‘머리 수首’를 더해서 만들어졌다. 동물의 머리처럼 큰 눈(目)과 눈 위 이마에 달린 뿔을 그린 것으로 알려지는 ‘머리 수首’는 머리이므로 우두머리라는 뜻 외에도 자라나고 떨어져 나가고 다시 자라나는 뿔 때문에 ‘길 도道’가 될 때 자연의 순환이자 운행(辵)의 법이요 인간의 길이요 순리라는 뜻까지 더해 철학적 의미를 담는다. ‘길 도道’에 손을 뜻하는 ‘마디 촌寸’을 더하면 이런 길(道)을 가도록 잡아(寸) 이끄는 ‘이끌 도導’이다.

설마 그 뜻을 알까 싶은 아홉 살 어린이 김태연이 최근 부른 ‘바람길’의 ‘끝이 없는 길, 걷다가 울다가 서러워서 웃는다’는 길(신유진 작사), 故 최인호 작가의 ‘길 없는 길’, 그리고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며 말씀과 치유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을 향하여 끝까지 올라가야만 했던 ‘예수님의 길’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생 자체가, 그리고 세상사 자체가 길이듯이 성경은 온통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죽음을 바라보는 나이에 정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고, 애지중지 얻었던 늘그막의 기쁨인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만 했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길, 형 에사우를 피해 도망가다가 하느님의 땅에 이르고 하느님과 밤새 씨름했던 야곱의 길, 사막을 지나다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을 만나 자기 신발을 벗어야 했고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약속의 땅까지 40년을 걸었던 모세의 길, 여왕 이제벨을 피해 도망가다 지쳐 죽기를 청하였으나 천사의 빵을 먹고 호렙산에 이르러 조용하고 부드러운 바람 소리 가운데 하느님을 만난 예언자 엘리야의 길, 하느님의 명령을 피해 도망가다 도망가다 큰 물고기 뱃속에까지 들어갔어도 절대 도망갈 수 없었던 예언자 요나의 길….

별빛 하나에 의지해서 오랫동안 걸어야 했던 동방박사들의 길, 표징을 만나러 사촌 엘리사벳을 찾아 산길을 홀로 걸어야 했던 성모 마리아의 길, 목숨을 걸고 이집트로 피난을 하여야 했으며 매년 예루살렘 순례길에 나서야 했던 성가정의 길, 예수님을 만나 생명을 얻고 용서를 얻으려고 찾아왔던 백인대장과 니코데모의 길, 두려움에 도망치며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보고 걷다가 빵을 나눌 적에야 예수님을 알아보고 돌아갔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길,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반쯤 죽었으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덕에 목숨을 다시 얻었던 어떤 사람의 길, 이른 새벽에 부활하신 주님을 뵙자고 반신반의하며 무덤으로 내달리던 막달레나와 베드로, 그리고 요한의 길….

용서할 서恕

논어 위령공衛靈公 편 스물세 번째 단락에서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스승 공자에게 평생 행할 바에 관해 묻는다. 이에 공자는 ‘용서容恕’라는 단어에서 ‘용서할 서恕’ 글자 하나를 제시한다. 공자에 의하면 ‘용서’는 연마해야 할 덕이고 수련의 과정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해오는 제자 베드로 앞에서 ‘용서’를 두고 말씀하시면서 실천도 실천이지만,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 18,21-35)를 더해서 타인의 용서에 앞서 나 자신이 용서받은 자라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하신다.

그리스도교인의 용서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갚을 길 없는 은혜를 입었으며, 그 은혜에 합당한 자가 아니므로 첫걸음은 ‘자기 고발’(self-accusation, 교황 프란치스코)이 먼저이고, 그렇게 고백함으로써 자기 죄의 어두움을 보아 빛으로 나아가는 존재라는 인식(토마스 아퀴나스)에 근거한다.

용서의 첫발이 자기 고발에 있음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지혜이다. 용서는 내가 은총과 자비를 받은 이라는 생각 때문에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용서는 자기 죄를 먼저 고백하면서 하느님 편에 서고, 자기 죄의 어두움을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용서는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않아서 해야 하는 기도. 용서는 하느님의 용서를 배우고 그 힘으로 해야 하는 걸음마. 용서는 용서의 실천으로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실 유일한 길을 찾음. 용서는 다른 이를 통해서 보는 하느님의 얼굴이자 싫은 사람을 통해서 보는 하느님의 얼굴. 용서는 눈물 나는 나의 억울함을 주님께서는 알아주실 것이라는 믿음. 용서는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준 그 사람도 하느님의 자녀임을 아는 것. 용서는 밉고 싫은 사람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하느님께서 불쌍한 그 사람도 사랑하실 것을 알아가는 과정.

용서는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 준 사람들, 심지어 원수와도 하나가 되게 하는 힘. 용서는 너도 하느님을 향하여, 나도 하느님을 향하여, 위로 올라가면서 너와 내가 하느님 안에서 점점 하나가 되는 것. 용서는 내 마음의 합리화와 이기적인 변명을 어느 날 조건도 없이, 이유도 없이, 일거에 그냥 놓아버리는 것. 용서는 나에게 주어진 싫고 또 싫은 그 소명과 굴레 안에서 눈물을 삼켜가면서라도 성화시켜나가는 어려운 발걸음. 용서는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그만두어버리는 것. 용서는 아픈 과거를 잊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용서할 수 있어서 함께 살기로 작정하는 것.

용서는 내가 절망하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는 힘. 용서는 울음과 슬픔 속에서도 감사와 미소로 돌아오는 은총. 용서는 내게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인내와 희생. 용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창조. 용서는 치유의 성사요 매일의 성체성사. 용서는 십자가상 주님의 마지막 말씀. 용서는 나에게 잘못한 이를 내가 용서한다는 주님의 기도. 용서는 ‘네가 용서했으니 너도 용서받아라’ 하시는 음성. 용서는 용서하겠다고 작정하면서 문득 돌아보는 수많은 나의 허물들. 용서는 내가 여기서 풀어야 천상에서도 풀리는 매듭. 용서는 성령의 은총. 용서는 주님의 능력이 일으키는 내 마음의 변화. 용서는 누군가를 용서하면서 내가 얻는 하느님의 힘. 용서는 절대 쉽지 않은 하느님 행위라는 예술.

용서해야 한다고 믿으면서 그러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하는 사람들, 용서해야 한다고 믿되 이는 하느님께서 나를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희망’은 전자에서 후자로 이동할 수 있는가이다.

순례자pilgrim

‘순례자’를 지칭하는 영어 단어 ‘pilgrim’이라는 말은 라틴어 ‘페레그리누스(peregrinus)’라는 단어에 기원을 둔다. 이 말은 ‘페르per'(=through) + ‘아게르ager'(=field, country, land)로서 외국인, 낯선 이, 혹은 여행자나 일시 거주자 등을 일컬을 때 사용한다. 대중 라틴어에서는 히브리말의 ‘gur'(גּוּר=sojourner, <거주자)나 그리스말의 ‘parepidemos'(παρεπίδημος=temporary resident, <일시 거주자)를 ‘peregrinus’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이 말은 4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리스도교 안에서 ‘거룩한 장소’를 방문하는 소위 ‘성지순례자’라는 뜻을 더했고, 나아가 종교적인 목적의 여행자까지도 포괄적으로 아우르게 된다.

『순례자는 집과 고향과 조국을 떠나 걷는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걸음은 예수 그리스도 따름을 더한다. 따름은 ‘떠남’, ‘길 위에 있음’, ‘이방인’, ‘목적지를 향함’이다.

‘떠남’은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떠남이고, 인연을 떠남이며, 과거의 나로부터 떠남이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떠남이며, 지나가 버릴 것으로부터 떠남이고, 기억으로부터 떠남이며, 알려진 것들로부터 떠남이고, 내가 지었던 말의 집으로부터 떠남이어서 침묵이자 의식적인 고독이며, 인정·반응·평가를 떠남이고, 걸음에 나를 맡김이다.

‘길 위에 있음’은 떠돌이요 방랑이다. 머리 둘 곳이 없음을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며, 내가 걸어서 나에게 다가오고 마주 오는 것을 맞으려는 희망이고, 땅의 거처가 아닌 하늘의 거처를 꿈꾸는 기대이며, 계속 걸어 깨끗해지는 정화이고, 내 몸이 땅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단조로움의 반복으로 찾는 고요이며, 걸음마다 거듭 달라지는 나의 변모이고, 걸을 때마다 내 앞을 질러나가 뻗는 요원함이다.

‘이방인’은 여럿으로 지어진 공동체 안에서도 혼자로 남고, 죄와 이기주의의 땅을 벗어나 덕의 땅으로 들어가며, 종국에 도달할 고향을 노래함이다.

‘목적지를 향함’은 내가 밟는 발밑의 땅이 밟을 때마다 점점 사라지는 것을 아는 것이고, 점점 뚜렷이 보는 것이며, 이유·의미·목적이 분명해지는 것이고,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음이다.(참조. 안셀름 그륀, 길 위에서Auf Dem Wege, 분도, 2020, 22-50쪽)』

무리 배輩

오랜만에 한강을 건넌다. 새들이 무리를 지어 날며 계절이 바뀌는 천기天氣를 알린다. 새들이 무리를 짓는 것은 ‘모일 집集’이다. 나무 위(나무 목木)에 새(새 추隹)가 올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땅에서 올라오는 것들의 표상인 나무 위에 새들이 앉고 거기에 둥지를 튼다. 그러나 새들은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는 하늘의 전령이고 징조의 표상이어서 날개를 지니며, 꼭 알려야 하는 소리일지라도 혼자인 소리가 너무 외로운 독백일 뿐이고 힘이 없어서, 함께 모여 무리를 짓는다. 떼지어서 모이는 새들은 ‘새 떼지어 모일 잡雥’으로 쓴다.

인간이 끼리끼리 모이는 것은 ‘무리 배輩’이다. ‘아닐 비非’와 ‘수레 거/차車’라는 글자가 모였다. 非로 구성된 글자들은 ‘나란하다’와 ‘어긋나다, 아니다(위배)’의 두 가지 뜻인데, ‘무리 배輩’에서는 새의 양 날개가 나란히 펼쳐지듯 ‘나란하다’이다. 그래서 ‘무리 배輩’는 양쪽으로 나란히(非) 줄지어 선 수레(車)의 대열이다. 전차를 나란히 세워 떼지어 출정(出征)하는 무리, 동지, 같은 편이다. 새의 무리는 소식을 알리지만, 글자대로라면 사람의 무리는 이처럼 공격성을 담았다.

후배後輩는 뒷세대이고, 선배先輩는 앞세대이며, 연배年輩는 또래이다. 모리배謀利輩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사람이나 무리이고, 간상배奸商輩는 간사한 방법으로 이익을 보려는 장사치의 무리이다. 불량배不良輩도 있고 폭력배暴力輩도 있으며, 정상배政商輩라는 말도 있으니 ‘무리 배輩’에는 긍정보다 부정이 더 많은 듯하다. ‘무리 도徒’라는 글자도 있는데, 이는 ‘조금 걸을 척彳’과 ‘달릴 주走’라는 글자가 결합해서 만들어졌다. 이 글자는 원래 뜻을 나타내는 ‘조금 걸을 척彳’과 ‘발 지止’가 합해진 ‘쉬엄쉬엄 갈 착辵(=辶)’에 ‘흙 토土’가 더해진 글자로 흙먼지 쓰며 걸어간다는 뜻을 담았다. 그렇게 ‘무리 도徒’ 역시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 무리이고 같은 뜻을 가진 한패이다. 같은 길을 가며 함께 도를 닦는 좋은 벗은 ‘도반道伴’이라 하지 ‘도반徒伴’이라 하지는 않는다.

사람 무리를 가리킬 때 ‘무리 중衆’을 쓰기도 한다. 이 글자는 본래 眾으로 썼는데, 간결하게 众으로 쓰기도 했다. 眾이라는 글자는 원래 ‘날 일日’ 밑에 사람(人)이 셋이어서 뙤약볕 아래에서 무리 지어 힘든 일을 하는 ‘노예’들이었는데, 日이 ‘눈 목目’으로 바뀌면서 누군가의 눈 아래 감시당하는 노예들이 되었다. 그렇게 인간의 무리는 감시의 눈 아래 호구지책으로 땀 흘리는 대중大衆이다. ‘임금 君’과 ‘양 양羊’을 더해 임금이 지팡이로 명령하며 양 떼를 치는 모습으로 ‘무리 群’이라는 글자도 있으니 이래저래 인간의 무리는 대개 감시하는 눈과 호령하는 지팡이 아래 시달리는 피지배 민중民衆이다. 역사와 시간 속에서 피지배를 견딜 수 없어서, 민중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하늘의 소명을 빙자하며 무리를 짓는 정당政黨도 있다. 이때 ‘무리 당黨’은 ‘검을 흑黑’이 의미부이고 그 위에 올라앉은 ‘오히려 상尙’이 소리부인데, ‘검을 흑黑’은 신선하지 못하고 썩은 것이므로 ‘무리 당黨’에는 애초에 정의正義가 아닌,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무리 짓고 편을 갈라 썩은 무리라는 뜻이 담겼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가 많고, 하류의 무리가 천지이며, 곡학아세曲學阿世의 무리, 몹쓸 사람의 무리가 많다. 참새나 제비 같은 작은 무리가 봉황 같은 큰 무리의 뜻을 알 리 없고, 마르고 굳어지는 죽음의 무리가 부드럽고 연한 생명의 무리에 견줄 바도 못 된다. 하느님은 한 분이신데, 사람들은 살기 위해 무리를 짓는다고 하면서 대개는 지배하기 위해 물거품이 될 무리를 짓는다. 그리스도인은 “의인의 무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시편 14,5)을 주님으로 모시면서 “죄인들의 무리에 끼는 것”(집회 7,16)을 경계하며, “나를 거슬러 둘러선 수많은 무리 앞에서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시편 3,7) 하고, “불경스러운 자들의 무리는…씨가 마르고 뇌물을 좋아하는 자들의 천막은 불이 집어삼켜 버린다네.”(욥기 15,34) 하며, “방자한 자들의 무리를 땅에서 뽑아 버리시고 불의한 자들의 왕 홀을 부러뜨리실 때까지”(집회 35,23)를 기도하고, “기억하소서, 당신께서 애초부터 마련하시어 당신 소유의 지파로 구원하신 무리를, 당신 거처로 삼으신 시온 산을!”(시편 74,2) 하며 기도한다.

부를 소召

‘부를 소召’라는 글자는 ‘칼 도刀’와 ‘입 구口’의 합자合字이다. 누구를 소리 내어 부르거나 불러들이는 것을 뜻한다. 입 위에 칼이 있으므로 이것이 ‘부르다’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여기에 쓰인 ‘칼 도刀’는 ‘비수 비匕’라는 글자의 변형으로 본다. ‘비수 비匕’라는 글자를 두고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개 사람이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선 모양새라고 보기도 하고, 숟가락이라는 뜻이나 모양새라고도 하면서 숟가락이나 사람이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그래서 ‘비수匕首’라고 하면 숟가락처럼 짧고 날카로운 단도이고, ‘匕’라는 글자가 한자의 부분으로 쓰일 때는 대부분이 사람과 관계된 의미를 지닌다.

이들을 바탕으로 ‘부를 소召’를 다시 보면 항아리와 같은 용기의 아가리를 통해 안에 담긴 내용물을 숟가락 같은 것으로 떠내는 모습이거나, 수저에 담긴 음식을 입에 가져다 대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부를 소召’에는 이처럼 누군가를 부르거나 불러들여 술이나 음식을 대접하고자 한다는 뜻이 담겼다. 이 ‘부를 소召’라는 글자의 왼쪽에 ‘손 수手(=扌)’라는 글자가 더해지면, 손짓하여 불러들인다는 뜻의 ‘부를 초招’가 되면서 우리가 누군가를 초대招待하다(불러 대접하다) 할 때의 ‘招’라는 글자가 된다. 굳이 구분하면, 말로 부르는 것은 ‘召’이고 손으로 부르는 것은 ‘招’라 할 수 있다.

예수님과 만난 첫 제자는 나이 들어 소명의 첫 순간을 회상하면서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9)라며 강렬했던 그 사랑의 순간을 한 문장으로 기록한다.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고, 그때부터 소명召命인 줄 알고 살았지만 어쩌면 나 좋아서 살았다.

우거질 망莽/茻

‘우거질 망莽’이라는 글자는 ‘풀 초艹(艸)’ 더하기 ‘개 견犬’ 더하기 ‘두 손으로 받들 공廾’이라는 글자로 되어 있다. 원래는 ‘우거질 망茻’이라는 글자 한가운데에 ‘개 견犬’을 그려 넣어 숲이 우거진 곳에서 사냥개가 뛰어다니는 상황을 묘사했다가 ‘개 견犬’이 빠진 채 ‘우거질 망茻’이라는 글자가 되거나, 세월이 가면서 위에 있는 ‘풀 초艸’는 ‘艹’로 간소해지고, 아래에 있는 ‘풀 초艸’가 ‘두 손으로 받들 공廾’으로 변하여 오늘날의 ‘우거질 망莽’이 되었다. 풀이 우거지면 ‘우거질 망莽’이고, 나무가 우거지면 ‘수풀 림林’이나 ‘나무 빽빽할 삼森’이다. ‘답답할 울/울창할 울鬱’이라는 조금 복잡한 글자도 있는데 이 글자는 ‘근심할 우憂’와 함께 뭔가가 막히고 답답한 ‘우울憂鬱’을 표현한다.

겨울이어도 끝없는 풀밭이 있고 나무가 우거져 빽빽한 이곳 Bear Mountain 자락의 수도원 숲에는 사슴도 많고 다람쥐도 천지이며, 라쿤도 있고 여우도 있지만 ‘우거질 망莽’이라는 글자에 있는 개는 없다. 입구에는 ‘No Pets’라는 팻말까지 붙여 아예 출입을 금한다. 시도 때도 없이 몇백 마리씩 떼거리로 날아와 풀밭을 망치는 거위들을 쫓느라고 누군가 나무판자로 개의 모습을 자르고 색까지 칠해서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한 마리 개가 풀밭 가에 꽂혀있었는데, 철 따라 날아오는 거위들도 세월이 가면서 그 가짜 개의 정체를 파악하고 말아서 그것마저 누군가가 얼마 전 치웠다.

사방이 고요하고 겨울 숲은 한가하며 풀밭은 넓다. 문득 숲 한가운데에 혼자 있다가 괜히 웃는다. 멀리 노을은 곱고 차분하다. 바람은 차갑고, 굳이 돌아볼 것도 없는 만사는 부질없다. 한참 전에 밀어놓은 한쪽의 잔설은 아직도 저만큼 있다.

노래 요謠

‘노래 요謠’라는 글자는 ‘말씀 언言’, 소릿값이면서 ‘천천히 흐르다’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 ‘질그릇 요䍃’로 이루어져 말을 천천히 늘여서 노래한다는 뜻으로 ‘풍문’이나 ‘소문’의 뜻까지 담았다고 했다. 그런데 노래나 말이므로 ‘말씀 언言’이 붙어있는 것은 그럴듯한데, ‘질그릇 요䍃’라는 글자가 붙어있는 연유가 궁금하다. ‘질그릇 요䍃’는 질그릇을 나타내는 회의 글자로 ‘고기 육肉’의 변형 + ‘장군 부缶’로서 이때 ‘장군 부缶’는 진흙으로 빚어 만든 액체를 담는 질그릇이나 항아리, 화로처럼 생긴 그릇이나 악기류를 말한다고 했으니, 악기와 노래가 연관된 것일까?

그런데 글자의 해설은 다른 내용을 전한다. ‘노래 요謠’라는 글자에서 ‘질그릇 요䍃’가 붙은 까닭은 『질그릇을 빚는 모양새이고, 질그릇 같은 것을 빚으면서 반주 없이 혼자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의 뜻을 담기(하영삼, 한자어원사전, 579쪽)』 위한 것이라 하거나, ‘요䍃’라는 글자 자체가 질그릇과는 상관없이 『여우의 생김새를 그려놓아 ‘노래 요謠’는 전체적으로 여우가 말하는 모습을 나타내면서 ‘여우의 말’이라는 뜻으로 표현했다(네이버 한자사전)』 하기도 한다. 예부터 여우는 교활하고 재주나 꾀가 많으며 사람을 홀리는 동물로 알려져 여우가 하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에서 소문이고 풍문이라면 후자가 그럴듯하다. 그래서 ‘노래 요謠’는 노래나 가요歌謠, 소문, 풍문, 헐뜯음 같은 뜻을 담았다는 것이다. ‘질그릇 요䍃’는 질그릇 빚는 노랫가락일까, 여우일까?

‘동요童謠’라는 말도 그렇고, ‘서동薯童’이라는 어릴 적 이름을 가졌던 백제 무왕武王(580~641년)이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는 ‘서동요薯童謠’에도 ‘노래 요謠’가 있다. 여우 얘기를 하면 금방 ‘요사스럽다’ ‘요망스럽다’ 할 때가 생각나지만, 이때는 ‘노래 요謠’가 아닌 ‘요사할 요妖’를 쓴다. ‘노래 요謠’는 여러 곳에서 떠도는 말, 곧 ‘소문所聞’을 한자어로 옮겨 ‘요언謠言’이라 할 때 사용한다. 요언謠言은 영어로 ‘루머rumor’이며, 요샛말로는 ‘가짜 뉴스’이다. 가짜 뉴스는 영어 fake news의 번역이겠지만, 오보misinformation, 허위정보disinformation, 날조뉴스made-up news를 아우른다. 가짜 뉴스는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인터넷의 조작된 클릭 수를 이용하여 주류를 이루고 진실이 아닌 진실이 된다. 못된 이들은 끊임없이 못된 일을 궁리하며 교묘한 조작을 연구한다.

로마 신화에서 소문의 여신은 ‘파마Fama’이고 영어의 ‘fame(평판, 풍문)’이 여기에서 나온다. 파마는 수천 개의 창문과 통로가 있는 집에 살고, 모든 것이 내려다보이며 세상에서 하는 소리가 다 들리는 곳에 살며, 집은 메아리가 잘되도록 놋쇠로 짓고, 문은 항상 열려 있다고 했다.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기원전 70~19년)는 파마의 온몸이 솜털로 덮여있으며 그 솜털마다 반짝이는 혀와 눈, 입과 귀가 달린 괴물로서 움직일수록 강해지고 이동할수록 힘을 얻는다고 했다. 소문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생각보다 멀리 가고, 생각보다 훨씬 큰일이 될 수 있으며, 못된 소문일 때는 사람까지 잡는다.

누구나 체험하는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엄청나게 큰일마저 헛소문과 뜬소문이 되면서 더욱 기승을 부리고, 개인사만이 아니라 나랏일에 이르기까지 그럴듯한 음모론이 되어 사회 전체를 더욱 불안하게 하며, 심지어 폭동을 일으키게도 한다. 소문은 아주 조그만 것에서 시작하다가 너도나도 공유하기 쉬운 단순 형태가 되고, 더하기만 하는 산수처럼 눈덩이가 되며, 어떤 단어나 숫자 같은 정교함의 예와 구호, 부분 팩트fact로 전체를 그럴듯하게 압도하고, 개인의 선호와 사고를 공유하는 신념 집단을 탄생시키면서 진화해간다.

버선목이라 뒤집어 보이지도 못하고, 설령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무시하는 게 보통 사람들의 상책이지만, 그래도 ‘요언謠言’ 앞에 선 현대인은 가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이래저래 몹시 피곤하고 답답하다. 거짓 증언과 거짓 고소, 그리고 거짓 맹세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그 역사가 길지만, 그래도 “거만한 눈과 거짓말하는 혀 무고한 피를 흘리는 손”(잠언 6,17)을 두고 “하느님께서 듣지 않으신다 함은, 전능하신 분께서 보지 않으신다 함은 거짓”(욥기 35,13)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