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명령 명命

‘목숨/명령 명命’은 일반적으로 ‘입 구口’와 ‘하여금 령/영令’의 합자合字로 보면서, 왕이 사자使者의 입으로 뜻을 전한다는 뜻으로, 곧 임금이 명령을 내려 백성을 부린다는 뜻으로 쓰인다고 풀이한다. 그나저나 결국은 도긴개긴이겠지만, ‘목숨/명령 명命’을 조금 더 자세히 뜯어 보면 ‘삼합 집亼’ 더하기 ‘입 구口’ 더하기 ‘병부 절卩(=㔾)’이다. 우선 ‘삼합 집亼’은 세 변이 합해져 완벽한 도형인 삼각형을 만들 듯이 어떤 세 가지가 어울려 조화를 이루면서 절대성 비슷한 것을 내포하는 상태이고, ‘입 구口’는 입이라는 구멍에서 나오는 말이나 누군가를 통해서 전달되는 내용이며, ‘병부 절卩(=㔾)’은 어떤 이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보면 ‘목숨/명령 명命’은 내가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의 뜻을 고분고분하게 목숨을 바쳐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복종하여 답을 하는 것이므로 ‘목숨/명령 명命’은 ‘대답하다’, 명령에 부합하므로 ‘적합하다’, 절대권자의 뜻을 따라 상호 간의 뜻을 일치시키므로 뜻을 ‘모으다’  ‘합하다’의 의미로 나아간다.

‘명령’하면 우선 칸트Immanuel Kant(1724~1804년)를 통해서 ‘만약 행복해지려면…하라!’라는 소위 ‘가언명령假言命令’이 있고, 무조건적으로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정언명령定言命令=단언적斷言的 명령=무상無上의 명’이 있다고 배웠다. 거창하게 다가오는 칸트의 ‘명령’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목숨/명령 명命’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피하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마주치는 인연도 있고, 애써 피하다가도 우연이나 섭리처럼 다가와 같이 갈 수밖에 없는 인연도 있다. 하고 싶었으나 되지 않는 일이 있고,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그렇게 되는 일도 있다. 나는 생각지도 않고 무심히 지나친 말이었는데, 상대방에게는 인생을 바꾸는 상처가 되어 숙명이 되는 사연은 지나놓고 볼 때 너무 자주 있다. 때로는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고,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하며,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중독인지, 나의 치유와 내가 살기 위한 발버둥인지, 상대방에 대한 의무와 희생인지, 서로의 사랑인지, 내 삶에 지워진 몫인지…. 어쩌면 이런 것을 아우르는 것이 ‘목숨/명령 명命’일 것이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내 인생에 주어진 명줄을 생명生命 혹은 수명壽命(목숨 수壽)이라 하고, 나도 너도 어쩔 수 없는 우리보다 강한 힘의 부름을 소명召命이라 하며, 벌罰처럼 사명使命처럼 수행해야 하는 명령을 천명天命이라 하고, 그 천명에 도리를 쫓아 순응하는 것을 순명順命(순할 순順)이라 하며, 얽히고설킨 인연의 실타래를 운명運命(돌, 옮길 운)이라 하고, 그를 담담히 받아들여 그에 머무는 것을 숙명宿命(묵을 숙宿)이라 한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명령하시고 선포하시며 당신의 뜻을 끊임없이 요구하신다. 십계명으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나긴 방황, 그리고 마침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에 이르기까지, 우리말의 신약성경에서만 ‘명령’을 검색해도 74절에나 보인다. 그런데도 성경에서 인간에게 가장 분명하게 명령이 아닌 위안으로 다가오는 명령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두려워하지 마라” 이다. 연약한 인간은 ‘명命’ 앞에서, 더구나 하느님의 ‘명命’ 앞에서 하염없이 두렵기 때문이다.

늙을 노/로老=耂

‘늙을 노/로老’라는 글자는 ‘耂’라는 글자와 같은 글자이다. ‘늙을 노/로老’라는 글자가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두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부모님으로부터 얻은 신체의 부분이므로 함부로 자르지 못하고 길러야 했던 옛날에, 머리카락이나 수염, 눈썹 등이 길게 자란 노인이 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모습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얘기이다. ‘耂’는 털이 긴 노인의 모습이고, 지팡이 모양이 변해 현재의 ‘匕’ 모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毛+人+匕 라고 보기도 하는데, 이 역시 ‘털 모毛’와 ‘사람 인人’, 그리고 ‘비수 비匕(‘사람 인人’을 뒤집은 모양)’를 모두 합하여 머리털과 같은 털이 긴 사람을 뜻한다고 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혹자는 70세 정도의 나이는 먹어야 연로한 노인이므로 ‘老’를 숫자 7(七)과 10(十)을 담은 글자로 풀이하기도 하고, ‘늙을 노老’는 본디 ‘털 모毛’에 변화를 나타내는 ‘匕’(‘될 화化’에서 ‘사람 인人’을 떼어낸 것)을 붙여 만든 글자로서 즉 털이 흰 상태로 변화된 사람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늙을 노老’라는 글자와 ‘살필 고考’라는 글자의 자원字原이 같다고 하여 둘의 의미를 연결해서 나이를 많이 먹을수록 이것저것 살피고 생각이 많아진다는 식으로 풀기도 하고, 애들에게 그림으로 가르칠 때는 노인이 지팡이를 어깨에 걸치고 결가부좌를 하여 앉아 있는 모습 그대로 글자가 생겼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어떤 것이 정설이든 아니든, ‘늙을 노/로老’에는 길고 흰 털(머리털·눈썹·수염), 지팡이, 깊은 생각, 이런 것들이 담겨있는 글자임은 틀림이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글자를 볼 때마다 로댕Rodin(1840∼1917년)의 유명한 작품인 ‘생각하는 사람’을 떠올리니 글자가 그 모습 그대로인 것만 같다.

‘늙을 노/로老=耂’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글자들은 다양하고 많다. 잘 아는 ‘효도 효孝’ ‘생각할 고考’ ‘늙을 기耆’ ‘즐길 기嗜’ ‘사람 자者’ 등등이다. ‘효도 효孝’는 ‘아들(子)이 늙은(老) 어버이를 업고 있는 모습’으로, ‘효도하다’는 뜻이라 하고, ‘생각할 고考’는 ‘공교할 교巧’가 들어있어 ‘노인(耂)은 생각을 교묘하게(丂) 잘한다’ 하는 의미라 하며, ‘늙을 기耆’는 ‘가로 왈曰’이 더해져 점잖은 말씀의 어르신을 생각나게 한다 하고, 여기에 ‘입 구口’마저 더하면 ‘즐길 기嗜’가 되면서 입으로 먹는 것이든 말씀하시는 것이든 이를 즐기시는 어르신이라 할 수 있으며, ‘사람 자者’ 혹은 ‘놈 자者’라 하는 글자는 ‘가로 왈曰’과 함께 ‘이놈!’ 하시는 어르신이 연상된다 하겠다.

우리 말의 ‘늙다’는 ‘느리다’ ‘늦다’에서 온다. 시간이 오래 걸린 상태이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러 물건이 오래되면 ‘낡다’라고 표현하고, 사람이 오래되면 ‘늙다’로 표현한다. 어근은 같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늙다’의 반대말인 ‘젊다’는 형용사로서 성질이나 상태를 묘사하는 데 비해, ‘늙다’는 어떤 상황이 되어가는 과정이요 움직임의 진행이므로 동사이다. 중고등 시절에 곧잘 시험 문제로 기억에 남았던 내용이다.

이곳 미국 생활에서 한 가지 큰 소득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장차 나의 노년 시절을 매일 적나라한 현실로 마주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매일 나는 이곳 울타리 안에 있는 산 필립이라 이름 지어놓은 소위 은퇴한 수도자들 20여 명과 함께 살고, 매 끼니를 같이 한다. 가장 나이가 많은 분은 아흔다섯 살이시고, 전문 의료인이나 간병인의 24시간 보조를 받아야 하는 분들, 기계적인 보조 장치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분들, 혼자서 자기 생활을 진행할 수 있는 분들로 나뉘는데, 환갑이 넘었다지만 아직 젊고 싱싱한 나는 아무 기구나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거동이 자유로운 사람들 6명 중에서 세 번째로 젊다. 1년 남짓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두 번 초상을 치렀다. 그리고 평상시에도 찾아오는 이가 없지만, 장례식에도 찾아오는 이가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모두 주차장에 정차된 자동차처럼 시동이 걸린 상태에서 서로 마주 보며 누구의 연료가 언제 어떻게 떨어지는지를 말 없는 두려움 속에서 함께 지켜보는 일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어느 날 어떤 이유로든 예기치 않게 병원에 다녀오게 되면 어김없이 헤드폰을 하나씩 쓰고 돌아오는 것이 웬일인가 싶었는데, 그것이 귀가 들리지 않으므로 헤드폰에 조그만 마이크 장치를 해서 적어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라는 것을 나는 한참 지난 뒤에야 알았다. 노인들은 일반적으로 냄새가 난다. 내 몸을 내가 씻지 못할 상황이라는 한계 때문이고, 불편한 몸이어서 음식물을 자주 흘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씻는 것은 관두고라도 내 바지의 허리띠를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러야 하고 잠가야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참 고역이고 슬픈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노인들은 과거의 화려했던 흘러간 얘기들을 자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아직 기력이 있는 노인들의 이야기일 뿐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주로 오늘의 현실에 충실하다. 현실의 오늘 중에서도 특별히 식사는 대단히 중요하다. 음식이 담긴 접시들을 서로 돌릴 때마다 누구에게 먼저 어떤 음식을 돌려야 하는지, 보지 않는 것 같아도 예민하게 그것들을 서로 지켜본다. 음식 접시를 들고 옆에 갈 때마다 농담처럼 ‘이것 내가 다 먹어도 돼?’라고 물으시는 신부님의 말씀이 그저 농담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느낀다. 노인들은 에너지원인 음식이 곧 생명이라는 잠재의식을 갖는다. 노인들은 어리바리해서 동작이 느리고 이것인지 저것인지 구분을 잘 못 한다고 하지만 한 번 식탁에 오른 음식이 다시 변형되어 나왔는지 아닌지는 금방 알아서 새 음식만을 먹고 싶어 한다. 노인들은 어느 날 자기 혼자 걸을 수 없어서 지팡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손에 들려주는 지팡이를 한사코 거부하는 습성도 지녔다. 어떤 수사님이 한 두어 달 장기간 입원하시게 되어 입원 전날 저녁에 방으로 함께 가서 짐을 싸는 것을 도와드린 적이 있다. 병원에서는 환자복을 입을 것이므로 실제로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쓰레기 더미에서나 찾을 법한 낡아빠진 여행용 가방에 맨 먼저 내게 싸달라고 부탁한 짐은 다이얼로 주파수를 맞추는 작은 아날로그식 안테나 라디오였다. 사람들의 이야기와 세상 이야기가 끊어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수사님은 대략 3달 동안 병원에 계셨는데, 병실에 있는 전화로 거의 매일 저녁 시간에 맞추어 어김없이 우리 식당으로 전화를 해 오셨다. 당뇨가 아주 심한 수사님이셨는데도 당신 생일날 수사님은 생일 핑계를 대고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4번이나 드셨고, 누군가 홈 메이드로 치즈케이크를 가져왔다는 말에 주변에서 극구 만류하는 치즈케이크마저 기어이 드셨다. 아흔네 살 할아버지 신부님이 돌아가신 바로 다음 주 도착한 아흔다섯 할아버지 신부님은 계시던 곳에서 그저 어떤 곳인지 가서 둘러 보고만 오라는 말에 속아서 이곳으로 강제 이주를 하셨다. 그렇게 된 사연은 평생 애들하고만 살았던 살레시오회 신부님이시라 애들이 있는 학교에서 애들이 보고 싶어 자주 교실에 드나드는 사고 아닌 사고를 친 결과였다.

누구에게나 다가올 노인이고 노년이다. 노인이 품위 있는 노년을 보장받는 사회만이 건전한 사회라지만, 품위는 제쳐놓고 치매가 와서 처치 곤란하고 고약한 냄새가 풀풀 나는 나의 노년일지라도 되도록 주변에 부담 주지 않고, 하는 짓이 우스워 그저 가끔 웃음이라도 주변에 선물할 수 있는 나의 노년이었으면 좋겠다.

사랑 애愛=㤅=爱

‘사랑 애愛’라는 글자를 두고 쉽게 말해 ‘받을 수受’ 가운데에 ‘마음 심心’이 들어있으므로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사랑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고, 또 愛라는 글자를 위에서부터 풀어헤쳐 ‘손톱 조爪’ + ‘덮을 멱冖’ + ‘마음 심心’ + ‘천천히 걸을 쇠夊’의 합자로 풀이하면서 사랑에 빠져 넋이 나갈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린(爪) 사람(人→冖)이 가슴의 심장(心)이 강조된 채로 걸어가는(夊) 모습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조금 어색하다.

‘사랑 애愛’라는 글자는 원래 ‘사랑 애㤅(지금도 같은 음과 뜻으로 통용)’라는 글자가 먼저였거나 같은 글자였으며, 훗날 밑에 ‘천천히 걸을 쇠夊’를 붙여쓰기도 했다 한다. ‘사랑 애㤅:愛’라는 글자의 윗부분, 오늘날 글자의 ‘마음 심心’ 윗부분인 ‘목멜 기旡(없을 무)’는 밥상 앞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밥상 앞에서 목이 메도록 밥을 이미 먹고 관심이 없어 고개를 돌린 모습이지만(이를 가슴이 뻐근하게 명치 끝이 시리고 목이 메는 사랑의 속성이 담겼다고 풀기도 한다), ‘사랑 애愛’자에서는 고개를 다시 돌려 반대로 밥상을 바라보듯이 계속 관심으로 바라보는 모습이다. 거기에 ‘마음 심心’을 더하여 마음이 어느 쪽을 향하여 돌아서 있다는 뜻을 담는다. 밑에 붙이게 된 ‘뒤져 올 치, 뒤져 올 종夂’은 훗날 추가된 셈인데, 夊와 ‘멈출 지止’는 원래 같은 글자이다가 나중에 뜻이 갈라졌으므로 ‘사랑 애愛’의 夂 역시 ‘멈추다, 그치다’라는 뜻으로 보아서 일정한 대상에게 마음이 쏠려 머문 상태라 하겠다. 아니면 관심이 쏠려있는 어떤 이 앞에서 머뭇거리고 쭈뼛거리면서 이래저래 발걸음을 차마 떼지 못하는 상태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뻥긋하는 고전적인 사랑 타령일 뿐이고,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그런 사랑은 사랑도 아니고, 미치도록 누군가가 좋아서 그에게 깊숙이 다가가 그의 마음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피고 싶은 것이 사랑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어떤 이는 ‘기旡’라는 글자의 머리 부분이 ‘손톱 조爫’이고 발 부분이 ‘민갓머리冖’로 잘못 옮겨져 지금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고 하기도 하는가 하면, 고문古文에서는 심장(心)을 손에 들고 크게 벌린 입으로 사랑을 하소연하는 그림으로 이 글자를 풀이하기도 했다 한다.

다른 여타의 사랑에 관한 개념과 철학적 사유를 제외한 인간사의 범주에서만 볼 때(사실 그것이 가당키나 한지는 모르지만), ‘사랑 애愛’라는 글자에는 이처럼 누군가를 향한 관심과 마음, 그리고 그에게로 향하는 발걸음이 담겼다. 사랑을 두고 우리 말에서도 곧잘 ‘사랑(사랑하다)’와 ‘삶(살다)’ ‘사람’이 모두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다느니, 서양말인 영어의 love나 live도 철자 하나 차이일 뿐으로 똑같다느니 하는 말들을 한다. 이렇게 보면 사람이 사는 것 자체가 사랑이고,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한 인간 본연의 삶인지도 모른다.

누가 발명했는지 도무지 모를 사랑이라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밝혀 말하지만, 지고지순하고 애틋한 사랑만이 아니라, 부끄럽고 못된 사랑도 사랑이고, 저속하고 유치하게 보이거나 우습게 보이는 사랑도 사랑이며, 남몰래 평생을 가슴앓이하며 숨어서 한 사랑도 사랑이고, 평생을 눈물 흘리며 미워하는 것도 사랑이다. 나를 되찾게 하는 사랑도 있고, 나보다도 더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랑도 있으며, 평생 해로偕老하는 사랑도 있고, 위험한 사랑도 있다. 늘 새로운 사랑의 그 가치는 어느 것이 더하고 덜한 것이 결코 아니니, 위대한 사랑이 따로 있고 어리석은 사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 말고 다른 이의 사랑을 평가하거나 값을 매길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누구에게나 나만의 사랑이 있고, 나만의 사랑에 대한 이유와 사연, 그리고 정당성이 있으며, 누구에게나 사랑의 능력이 있다. 사랑은 그 어느 쪽에서 보더라도 항상 서로 닮아 똑같고 누구에게나 가치가 있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이라도 어떨 때 치수가 너무 작아서, 한 사람만을 위한 자리만이 있어서, 서로를 구속하고 옥죄는 속성을 지닌다. 그래서 사랑은 행복하면서도 아프고, 희열이면서도 슬픔이며, 설렘이면서 두려움이고, 벗어나고픈 질병이면서 앓고 싶은 질병이며, 지옥에 떨어트릴 수도 있고 천국에 들게도 한다. 사랑은 어쩌면 정확히 이러한 반반의 얼굴을 동시에 지닌다. 이렇게 이율 배반처럼 보이는 사랑은 모순 속에서 더욱 강해지고 아웅다웅 티격태격 속에서 보존되고 변형되어 아름다운 꽃과 보석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 길들지 않는 야성이 된다. 사랑은 통제하려 들고 가두려 할 때 튕겨 나가 서로에게 몹쓸 상처를 입히기까지 한다. 그래서 사랑은 서로를 껴안으려 하면서도 숨을 조른다. 사랑은 목이 메면서, 목 매인 채로 오래도록 걸어간다. 사랑은 결국 마음의 일이어서 글자 한가운데에 ‘마음 심心’을 품었다.

사이 간間

‘사이 간間’은 ‘문 문門’과 ‘날 일日’이라는 글자가 합해진 것이다. 門의 작은 틈 사이로 햇빛(日)이 비쳐 들어오는 것을 나타내면서, ‘사이’ ‘시간의 틈’ ‘동안’이라는 뜻으로 이쪽에서 저쪽까지의 사이를 말한다. 원래 이 글자는 문門 가운데에 ‘달 월月’을 쓰거나, ‘밖/바깥 외外’를 쓰기도 하였다. ‘달 월月’을 쓰게 되면 말 그대로 달빛이 문틈 사이로 비치는 것이고, ‘밖 외外’를 쓰면 밖으로부터 틈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나 달빛이겠다. 그런데 문門 속에 ‘달 월月’을 쓰면 ‘사이 간/한가할 한閒’이라 하면서 ‘한’으로 소리가 나기도 하므로 ‘사이 간間’과 구별하기 위하여 ‘나무 목木’을 사이에 넣어 여가나 조용하다는 뜻을 담아 ‘한가할 한閑’을 따로 쓴다. ‘한가할 한閑’은 ‘막을 한閑’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말이나 소와 같은 동물을 우리에 가두고 나무로 빗장을 질러 막아 마음이 놓이는 상황이다.

‘사이 간間’은 간격으로 보면 작은 틈새이고 시간(때/짬)으로 보면 잠깐이다. 잠깐이라는 뜻을 우리 말로 풀면 ‘어느덧’, 혹은 ‘덧없다’ 할 때의 ‘덧’이다. 그래서 ‘덧없다’는 ‘사이가 없다’ ‘동안이 없다’이고, 그래서 ‘항상 변한다’는 뜻으로, 흔히 ‘무상無常(없을 무, 항상 상)하다’라고도 쓴다. ‘인생무상人生無常’ 할 때의 그 무상無常이다.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잠깐일 뿐인 인생을 생각하면, 문득 ‘부질없다’. 부질없는 것은 뜻이 없고, 찰나이며, 덧없다. 나와 나, 나와 너, 그리고 나와 하늘까지 서로 간에 한순간 고개를 돌리면 이쪽저쪽이 갈리고 모든 것이 부질없다.

‘부질’은 ‘불질’에서 온다. 대장간에서는 불질로 쇠를 달구어 여러 가지 용도의 사물을 제작한다. 그 불질은 풀무로 바람을 일으켜서 한다. 불질을 여러 번 반복해서 두들겨야 제대로 된 쇠붙이가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 하면 쇠가 물러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풀무가 없어도 불질을 못 하므로 아무 결과를 볼 수 없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래서 ‘부질없다’는 헛수고이고 쓸데없는 공연한 행동이다.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을 예배한다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彿’을 감히 빌려 말하면, ‘도로徒努(헛수고, 보람없이 애만 쓴-부처님을 찾았으나 허사가 되고만)’가 되었든, ‘도로都盧(온통, 전부, 모두-모두가 부처님)’가 되었든, ‘도로아미타불’이다.

사람은 ‘사이 간間’을 살아 인간人間, 세간世間, 시간時間, 공간空間을 살고, 긴 세월을 돌아본다 해도 결국 인생은 눈 깜짝할 사이여서 일순간一瞬間(깜짝일 순)이다. 간간間間이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착각과 자신을 속이는 어리석음 속에 살지만, 만사는 나의 뜻과 무관한 것이니 스스로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고 방도가 없어서 하릴없다. 한낱 입김일 뿐(욥 7,7)이다. 그래도 대부분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인간이 순간을 넘어서 영원을 그릴 줄 알아서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혼자서 부질없고 하릴없어 허무하고 공허하다고 몇 번을 되뇌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하늘을 쳐다보고 영원 속의 나를 기도하는 것이리라!

새 추/높을 최隹

미국의 이곳저곳을 다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내가 사는 이곳 플로리다엔 유달리 새들이 많다. 우리 동요 속에서 그저 노래로만 알았던 부리가 긴 따오기를 비롯하여 독수리, 갈매기, 까마귀, 펠리칸, 솔개, 참새, 로빈, 물새, 여러 모양의 크고 작은 두루미들, 오리들, 이름 모를 다양한 새들이 헤아릴 수 없이 각양각색이다. 기후가 따뜻하고 호수가 많아서 물과 먹이가 풍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자로 새를 나타내는 글자들이 많지만, 흔히 우리가 아는 것은 ‘새 추隹’와 ‘새 조鳥’ 두 글자이다. 똑같은 새들이지만 꼬리 깃털이 짧고 긴 것으로 두 글자가 달라졌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고, 새들을 뜻하는 말에는 새, 특별히 매나 송골매의 모양에서 유래되었다는 ‘새 추隹’가 빈번하게 사용되는 듯하다. ‘새 추隹’를 ‘높을 최’라고도 하는 까닭은 새들이 높이 날기 때문이다. 여기에 높은 산을 뜻하는 ‘뫼 산山’을 올리면 ‘성씨姓氏 최崔’가 되니 정말이지 글자로만 보아서 성씨 중에서 높고 또 높은 성씨가 ‘최崔’임은 분명하다.

‘새 추隹’와 함께 만들어진 글자들은 참 많다. ‘입 구口’를 앞에 붙이면 ‘유일唯一(오직 그것 하나)’, ‘유물론唯物論(우주 만물의 실재를 오직 물질로 보는 입장)’ 할 때의 ‘오직 유唯’가 된다. 이는 하늘의 뜻을 전해주는 새가 날아와서 하는 말만이 중요하고 그것만 믿으면 된다는 뜻에서 ‘오직 유唯’이다. ‘새 추隹’ 앞에 ‘마음 심忄’을 더해서 만들어진 ‘생각할 유惟’는 ‘사유思惟하다’라고 할 때의 글자로서, 새가 물어다 준 하늘의 뜻을 곰곰이 생각한다는 뜻이 담겨있고, ‘손 수扌’를 더하면 새가 전해준 신의 뜻에 따라서 손으로 무엇인가를 밀 듯이 밀어붙인다는 의미로 추진推進, 추천推薦, 추산推算, 추측推測, 추대推戴, 추앙推仰과 같은 말을 할 때의 ‘밀 추, 밀 퇴/옮을 추推’가 된다. ‘쉬엄쉬엄 갈/걸어갈 착辶’을 더해 ‘나아갈 진進’이 되면, 새(隹)는 앞으로 날거나 걸을 수 있을 뿐 뒤로 날 수 없고 뒤로 걸을 수 없으므로 말 그대로 ‘나아갈 진進’이다. 류시화씨의 책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제목도 그런 뜻을 담았을 것이다. 전진만 있을 뿐 후진은 없는 비행기도 그래서 새를 닮았다. 새가 전해준 하늘의 뜻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들이 진행進行, 진전進展, 진보進步, 진입進入, 진출進出, 진척進陟, 촉진促進, 승진昇進, 매진邁進, 약진躍進, 증진增進…등이다.

‘새 추隹’ 앞에 ‘진흙/제비꽃/조금 근菫’이라는 조금 어려운 글자를 더하면 ‘어려울 난難’이 되는데, ‘진흙/제비꽃/조금 근菫’이라는 글자는 맨 밑의 ‘흙 토土’ 위에 사람을 묶어 올려놓은 형상이다. ‘흙 토土’라는 글자는 원래 불(火)의 상형이라고 보아서, 사람을 묶어 불 위에 올려놓고 오랜 가뭄과 같은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불사르고 굿하면서 인간사의 어려움을 새를 통해 하늘에 알리고자 하는 글자가 ‘어려울 난難’이다. 인간사는 쉬운 것이 없는 만큼 ‘어려울 난難’이 들어가는 말은 무수히 많다. 논란論難, 비난非難, 곤란困難, 재난災難, 험난險難, 힐난詰難, 고난苦難, 난제難題, 난민難民, 난이도難易度, 난해難解, 난국難局, 난치병難治病, 난관難關…등등이 그렇다. 모양으로 보아 ‘새 추隹’와 어우러져 만든 재미있는 글자도 있는데, 새(隹) 머리 부분에 두리번거리는 두 눈(吅)과 머리 위의 깃털 모습(艹)을 가진 황새의 모습을 본떠 만든 ‘황새 관雚’이라는 글자에 ‘볼 견見’을 붙여서 만든 ‘볼 관觀’이라는 글자는 황새처럼 고개를 높이 들고 여기저기 물속의 먹이를 관찰하듯이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을 말하고, 그저 ‘작을 소小’를 ‘새 추隹’ 위에 올리면 말 그대로 작은 새를 가리키는 ‘참새 작雀’이 된다.

구름이 낮 하늘의 무늬라면 별은 밤 하늘의 무늬이고, 새들은 그 어둠과 밝음의 사이를 노래한다. 새들이 유달리 새벽에 지저귀는 것은 이런 연유이다. 새들은 하늘의 소리를 간직하고 낮과 밤 사이, 하늘과 땅 사이, 신과 인간 사이를 오간다. 그래서 새를 새라고 하게 된 연유로 ‘하늘과 땅 사이’의 ‘사이’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새는 땅의 이야기를 하늘로, 그리고 하늘의 이야기를 땅에 전한다. 새들은 그래서 전령이다. 전령은 전하는 말이 혼자만의 말이 아니고 사실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대개 무리를 짓는다. 계절이 바뀌어 어김없이 다시 찾아오는 새들은 우리를 떠났다가 다시 찾아오는 조상들의 혼령이기도 하고, 마을에 세우는 솟대 위의 새들은 현세와 내세를 넘나드는 경계의 상징이기도 하며, 삼족오를 비롯한 많은 새가 민족과 부족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성경의 새는 창세기로부터 하느님께서 제 종류대로 창조하신 것들이요, 땅 위에서 번성하고 땅 위 하늘 궁창 아래를 날아다니라 명받았으며(창세 1,20-22), 정결한 새들 가운데서 골라 제단 위에서 번제물로 바쳐졌고(창세 8,20), 주님을 찬미하며(다니 3,80), 하늘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시고(마태 6,26), 길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씨들을 먹으며(마태 13,4), 하느님의 큰 잔치에 모여오라는 초대를 받는다.(묵시 19,17) 새들이 많은 곳에 사는 이들은 새들의 지저귐 속에 담긴 하늘의 소리를 자주 들어 행복하기도 하지만, 또한 매사에 너무 무디어져 있으므로 자주 하늘의 소리를 들어서 자신을 채근해야만 할 처지에 있기도 할 것이다.

가르칠 교敎

우리가 흔히 ‘교教’라고 아는 글자는 ‘가르칠 교敎’이다. 이는 생김새나 의미가 오묘하고 깊다. 풀어 헤쳐보면, ‘사귈 효/가로 그을 효爻’ 더하기 ‘아들 자子’ 더하기 ‘칠 복/글월 문攵’이라는 세 글자의 합이다. 그래서 이 셋의 생김새와 의미, 그리고 내력을 각각 따져보아야 한다.

‘사귈 효/가로 그을 효爻’는 나뭇가지 두 개가 가로 겹쳐 교차하는 모양이거나 악수하는 모양이다. 우리 역사 안에서 나무막대를 세로로 놓거나 가로로 놓아서 숫자를 표시하면서 사칙연산을 하거나 점을 치는 상황에서 사용하였다는 소위 ‘산가지’의 모양이다. 지금은 없어지다시피 한 성냥개비들의 놀이를 생각하면 쉽다. 그렇게 생긴 ‘사귈 효/가로 그을 효爻’는 ‘사귀다, 본받다(=效), 가로 긋다, 엇걸리다, 수효數爻, 육효六爻(=역易의 괘卦를 이룬 가로획)’ 등을 떠나 ‘변變하다, 흐리다, 지우다, 말소抹消하다’라는 뜻으로 나아가고, 나아가 악수하는 모습에서 ‘사귈 효’가 된다.

‘가르칠 교敎’에서 ‘사귈 효/가로 그을 효爻’ 밑에 있는 ‘아들 자子’는 원래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양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가로 그은 획을 땅으로 보면서 땅을 뚫고 나온 새싹이라느니, 혹은 가로 그은 획이 남성에게만 있는 두 개의 불알로 보아서 ‘아들 자’라느니, 껍질을 뜻하는 ‘ㄱ’과 새싹을 뜻하는 ‘十’이 결합하여 새싹을 품고 있는 씨앗이라는 의미를 새겨야 한다고도 한다. 어느 정도의 남성성과 어린 녀석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하겠다.

‘칠 복/글월 문攵’은 ‘복攴’과 같은 글자이다. 이 글자는 오른손을 나타내는 ‘또 우又’와 막대기나 무기를 나타내는 모양인 동시에 소리를 나타내는 ‘점 복卜’을 합하여 손에 막대기와 같은 것을 들고 북과 같은 것을 둥둥 때리고 쳐서 소리가 나게 하는 상황이다. 다리 달린 받침대 위에 북을 놓고 두들기는 형상이라 해도 의미는 같다. 이를 ‘(등)글월 문’이라고도 하는 것은, 등을 돌리고 있는 모양새인 ‘글월 문文’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렇게 부를 뿐이다.

이런 내용을 종합하여 ‘가르칠 교敎’를 보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 자식을 나뭇가지나 회초리로 치거나 때려서 가르쳐 배우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가 지녀온 ‘교육’이라는 패러다임을 인간이 덜되고 안 된 어린 것들을 억지로라도 훈육하고 만들어가는 전근대적인 교육과,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완성된 인간인 아이들 하나하나에 담긴 고유한 조물주의 섭리를 깨우치고 발견해나가는 근대적 교육으로 본다면, 스페인 자유교육의 선구자, 프란시스코 페레Francisco Ferrer(1859∽1909년)의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말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전자는 전근대적인 교육이다.

근대적인 교육의 흐름에서 ‘가르칠 교敎’를 글자를 써나가는 순서대로 차근차근 풀어서 『선생과 아이가 서로 사귀어 함께 손을 잡고 동행하는 것, 아이가 신이 나서 손을 들고 기뻐하는 것, 북을 치며 춤추듯이 음악과 리듬에 맞추어 선생과 아이가 함께 춤을 추는 것』이 ‘가르칠 교敎’이다.

이것이 근대적인 교육 패러다임이라 했지만, 사실 이것은 기원전 고대 유가儒家의 오경五經 중 ‘예기禮記’로부터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 하여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서로 돕는 것’이라 했던 오래된 미래였음이 분명하다. 사실 인간의 역사 자체가 하느님께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간 하느님의 역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몸소 피조물인 사람이 되시고 사람과 동고동락하신 역사가 아니던가 말이다.

소통할 소疏

‘소통할 소疏’의 원래 글자는 ‘벌릴/멀리할/트일 소踈’ 혹은 ‘성길 소疎’인데, 이를 잘못 썼다는 뜻에서 ‘踈=疎’의 ‘와자訛字’라고 한다. 이 글자들의 왼쪽에 붙어있는 것은 ‘발 족足’의 변형인 ‘발 소疋(발이 한 쌍이라는 의미에서 ′짝 필′이라 하기도 한다)’이다. ‘발 족足’은 장딴지 모양을 나타내는 ‘입 구口’ 모양과 발을 나타내는 ‘그칠 지止’자가 합쳐진 모양이다. ‘발 족足’에 ‘묶을/약속할 속束’을 붙여서 비로소 ‘소통할 소疏(踈=疎)’라는 글자를 만든 것이다. 무엇에 무엇을 묶어놓은 상태이지만 이 다리 저 다리 두 다리가 따로 놀 듯이 엉성하고 느슨하며 빠져나가기 쉽고 사이가 트여 성기게 묶어놓은 상태이다. 와자訛字이건 아니건 ‘흐를 유/류㐬’를 붙인 것도 의미가 있다. 물이 흐르듯이 술술 풀리고 통하는 것이라는 뜻의 ‘소통할 소疏’이니 말이다. ‘흐를 유/류㐬’는 아기가 태어나는 모양으로서 아기가 양수와 함께 ‘순풍’ 하고 순조롭게 흘러나옴을 뜻한다. 다소 비약이지만, 아기는 보통 머리부터 세상으로 나오는데, 그렇게 해서 마침내 발(足)까지 무사히 빠져나오면 원만하게 모든 것이 흐른다는 뜻에서 소통의 ‘소疏’가 되는 것일까?

‘소踈=疎(=疏)’라는 글자들에서 왼쪽에 붙은 ‘발 족足’을 뺀 ‘묶을/약속할 속束’은 말 그대로 무엇을 무엇에 합치거나 감고 동여서 꽁꽁 묶어놓은 상태로서 우리가 약속約束이라 할 때의 ‘속束’이다. 단단히 묶어야 할 ‘속束’이 ‘발 족足’과 만나면서 헐거워진 묶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안고 있는 ‘소통할 소疏’를 펼쳐놓고 보면 ‘발 족足(=발 소疋)’과 ‘흐를 유/류㐬’의 합자이다. 두 다리 사이로 물이 흘러가듯이 잘 흐르는 상태이기도 하고, 무언가 흐름을 방해하는 둑이나 담벼락과 같은 것을 발로 허물어뜨린다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자에 ‘소홀히 할 홀忽’을 붙이면 ‘소홀疏忽(=疎忽)’이 되어 데면데면하고 가볍거나 하찮게 여겨 관심關心을 두지 않는 상태이고, ‘밝을 명明’을 붙이면 ‘소명疏明’이 되어 판사 앞에서 당사자當事者의 입장을 변명하는 것이며, ‘열/평평하게 펼 개開’를 붙이면 ‘소개疏開’가 되어 밀집된 상태를 펼쳐 분산한다는 것이고, ‘엷을 박薄’을 붙이면 ‘소박疏薄’이 되어 남편이 아내를 박대하거나 아내를 아내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며, ‘멀 원遠’을 붙이면 ‘소원疏遠’이 되어 누군가와의 사이가 멀어지고 서먹서먹 해 지는 것이고, ‘청할 청請’을 붙이면 ‘소청疏請’이 되어 높은 분에게 무엇을 알려 청하는 것이며, ‘벗을 탈脫’을 붙이면 ‘소탈疏脫’이 되어 자잘한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수수하며 털털한 모습이고, ‘바깥 외外’를 붙이면 ‘소외疏外’가 되어 사이를 따돌려 멀어지는 것이며, ‘통할 통通’을 붙이면 ‘소통疏通’이 되어 너와 나의 마음이 통하여 가까워진 상태이다. 뒤에 붙이는 글자들 말고 앞에 붙이는 글자로 ‘날 생生’을 앞에 붙이면 ‘생소生疏’가 되어 어떤 사물이나 상태에 익숙하지 못하여 낯선 것이고, ‘윗 상上’을 앞에 붙이면 ‘상소上疏’가 되어 임금 등에게 올린 글을 말한다.

사연 많은 ‘소통할 소疏’라는 글자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이나 세상, 그리고 인간과 하느님 간의 흐름에 관계되는 글자이다. 거기에는 물 흐르는 곳에 두 다리로 서 있는 사람이 있고, 막힌 둑이 있으며, 태어나는 아기가 있고, 무엇인가를 매듭지어 묶은 묶음이 있으며, 복잡다단한 인간사가 담겨있다. 수천 년을 두고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밝히셨으나 소통이 안 되어 답답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을 때 그분은 요르단이라는 강물에 그렇게 당신을 드러내시고, 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늘과 땅 사이의 둑을 허무시고,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시며, 마침내 하늘의 소리가 인간에게 들리게 하셨다.(마태 3,13-17 참조)

말 물/먼지 털 몰勿

‘-을 하지 말라’는 금지, ‘아니다’라거나 ‘없다, 없애다’는 부정의 뜻이 담겨있는 글자가 ‘말 물勿’이다. 먼지를 터는 상황을 묘사할 때는 ‘몰’로 소리를 낸다. 따라서 분주奔走하게, 혹은 걱정스럽게 수선을 피우는 상황이기도 하다. 많이 쓰는 ‘물론이고 말고’ 할 때의 ‘물론勿論(논의의 여지가 없다)’이나 도나우 강변의 전설에서 이름 지어져 왕의 문장으로까지 사용되었다는 독일 이름 vergiss mich nicht(=Forget-me-not)를 옮길 때 말 그대로 옮겨 ‘물망초勿忘草(잊을 망忘, 말 물勿, 풀 초草)라고 할 때도 이 글자를 쓴다.

이 ‘물勿’이라는 글자의 모양이나 뜻의 풀이는 다양하다. 장대 끝에 펄럭이는 깃을 달아서 어느 특정 지역을 나타내거나 들어가지 말라는 경계의 표시라는 풀이, 장대 끝에 깃의 폭을 서로 다르게 조정하여 매달아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알린다는 풀이, 혹은 깃털이나 날개의 모습, 심지어는 목이 없는 동물의 모양이라는 풀이, 勹 부분을 ‘칼 도刀’의 변형 또는 쟁기의 모습으로 보고, 나머지 두 점은 칼에 잘려나간 부분이나 고기 같은 것을 자를 때 칼에 묻은 핏방울 혹은 쟁기질로 흙을 갈아엎을 때의 흙덩이 등이라는 풀이, 활줄이 진동하는 모습이라는 풀이 등등이 있다.

이 ‘물勿’이라는 글자 앞에 ‘쌀 미米’를 붙이면 ‘고운 가루 물粅’이 되고, 물을 뜻하는 ‘삼수변氵’을 붙이면 깊고 그윽하여 ‘아득할 물沕’이 되며, ‘뫼 산山’을 붙이면 ‘산 높을 물岉’이 되고, ‘입 구口’를 붙이면 발음이 약간 달라지면서 칼처럼 날카로운 입술을 가리키는 ‘입술 문吻’이 되며, ‘날 일日’을 옆이나 아래에 붙이면 ‘새벽 물/흘昒=曶’이 되고, ‘날 일日’을 위에 올려붙이면 ‘쉬울 이, 바꿀 역易’이라는 글자가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물勿’이라는 글자 위에 ‘대나무 죽竹’을 붙이면 제후를 봉할 때나 신하들이 임금 앞에 조아릴 때에 상아, 옥, 나무 등으로 만들어 손에 드는 홀을 뜻하는 ‘홀 홀笏’ 되고, ‘마음 심心’을 밑에 붙이면 ‘갑자기 홀忽’이 되어서 ‘마음(心)에 두지 않다(勿)’는 뜻이 되면서 ‘마음에 두지 않다→소홀疏忽히 하다→잊다→문득 (잊다)→갑자기’ 등의 뜻이 생긴다. 흔히 소홀히 대접한다는 ‘홀대忽待’ ‘소홀疏忽하다’ 또는 ‘홀연忽然히’ 할 때의 그 ‘홀’이다. 이 ‘갑자기 홀忽’ 옆에 ‘마음 심心(忄)’ 하나를 더 덧붙이면 ‘황홀할 홀惚’이라는 글자가 되면서 ‘황홀恍惚=慌惚(황홀할 황), 황홀경怳惚境(어슴프레할 황怳, 지경 경境-생각할 겨를이 없는 순간의 의미에서 마음을 빼앗겨 멍한 상태)’ 할 때의 글자가 되고, ‘물勿’에 ‘칼 도刂’를 붙이면 발음이 달라지면서 ‘목벨 문刎’자가 되어서 ‘칼(刂)로 목을 베다’는 뜻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라고 말하면서 목(頸)이 베이는(刎) 한이 있어도 마음이 변하지 않고 사귀는 친한 사이(交)임을 강조한다는 ‘문경지교刎頸之交’에서도 이 글자를 쓴다. ‘물勿’이라는 글자에 ‘소 우牛’를 붙이면 ‘물건 물物’이라는 글자가 되는데, 이는 ‘희생犧牲으로 사용하는, 부정한 것이 없는(勿) 깨끗한 소(牛)’라는 뜻이다. 이것이 발전하여 나중에 ‘물건物件(물건 건件)’이란 말이 된다. 『제물(祭物)은 ‘제사(祭祀)에 소용되는 음식물(飮食物)’. 생물(生物)은 ‘살아(生) 있는 물건(物)’, 무생물(無生物)은 ‘살아(生) 있지 않는(無) 물건(物)’ 동물(動物)은 ‘움직이는(動) 물건(物)’, 식물(植物)은 ‘땅에 심어져(植) 있는 물건(物)’이다.(박홍균의 원리한자)』 ‘물건 물物’에서 ‘물勿’을 얼룩무늬라고 풀기도 한다. 즉 소(牛) 중에서도 얼룩무늬(勿)가 들어간 좋은 ‘물건’인 소라는 뜻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글자들의 변신과 뜻을 더해가는 과정은 인간의 삶이다.

살다 보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고, 가지 말아야 할 곳도 있으며, 넘지 말아야 할 선線도 있다. 없애야 할 것도 있고, 먼지를 털 듯이 털어버려야 할 것이 있으며, 정말 뭔가가 아닌 것들도 있다. 이런 것들에 소홀하면 어느 날 홀연히 찾아와 여긴지도 모르고 저긴지도 모르게 하는 황홀경에 접하더라도 그것이 허상임을 눈치채지 못한다. 우리말 성경에서 “…하지 마라”를 담고 있는 구절을 검색하면 무려 266절이 뜬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한사코 못된 짓을 “하지 마라” 하신다. 하지 말아야 할 짓들을 하는 인간의 못된 짓은 사람과 만물이 애초에 하느님의 사랑에서 태어나 사랑받는 존재로 태어났음을 잊고, 상대방을, 서로를, 세상을, 심지어 하느님을 감히 ‘사용’하려 드는 데에 그 근본 뿌리가 있다. 달라이 라마taa-la’i bla-ma께서도 사람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고 물건은 사용하기 위해서 생겨났지만, 그것이 뒤바뀌면서 세상이 어지럽다 했다.(『People were created to be loved. Things were created to be used. The reason why the world is in chaos is because things are being loved and people are being used.(달라이 라마taa-la’i bla-ma)』

어지러울 련/연䜌

‘어지러울 련/연䜌’이라는 글자는 ‘말씀 언言’을 두고 양 옆에 ‘실 사糸’를 배치한 형태이다. ‘실 사糸’가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는 모양이라는 것 정도는 대개 안다. 그런데 ‘어지러울 련/연䜌’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가운데 들어있는 ‘말씀 언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글씨를 쓸 때에도 ‘말씀 언言’을 먼저 쓰고 왼쪽 ‘실 사糸’, 그리고 오른쪽 ‘실 사糸’를 차례로 쓴다.

‘말씀 언言’을 ‘매울 신辛’의 변형과 ‘입 구口’가 어우러진 것으로 본다든가(‘매울 신辛’은 손잡이가 있는 꼬챙이의 상형으로 보아서 입에서 나가는 말이 날카롭게 상대방에게 가서 꽂힌다든가 아니면 말을 잘못하면 매운 벌을 받게 된다든가 하는 식), 아래에서부터 입과 혀 그리고 ‘말’을 상징하는 가로획이 더해진 모양으로 본다든가(단순히 입과 혀의 상형으로 보기도 한다), 아니면 위로부터 머리·이마·눈썹·코 밑에 입이라는 형태로 본다든가(말은 곧 그 사람의 얼굴이라는), 아니면 다시 아래로부터 입에 물고 있는 소리 나는 나팔 같은 것으로 본다든가(말은 결국 소리이므로), 맨 밑의 ‘입 구口’를 통처럼 생긴 한글의 ‘ㅂ’ 모양으로 보고 그런 통에 담은 내용으로 본다든가(주술통과 같은 것에 담긴 주술 도구를 통해 전해진 신의 말 곧 신탁神託, 혹은 그러한 주술의 결과를 신과 인간·인간과 인간 이쪽저쪽을 실로 묶듯이 연결하거나 연결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풀기도 한다), 심지어는 맨 위의 점 하나는 하늘의 축복이고 그 밑을 ‘석 삼三’으로 본다든가(세 번 생각해야 하늘의 축복임을 알 수 있으므로), 머리(ㅗ)·둘(二)·입(口)으로 본다든가(머리의 생각과 입 둘이 만들어내는 것이 말이므로) 하는 등등의 여러 의미를 담은 풀이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러한 ‘말씀 언言’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 ‘실 사糸’를 붙이면, 실은 이어지는 것이므로 신과 인간 사이이든지, 인간과 인간 사이이든지, 아니면 세상과 인간 사이이든지 ‘어떤 말과 뜻이 이쪽저쪽에 연결되고 이어지기를 바라는 상황’을 뜻한다. 그런데도 이 글자가 ‘어지럽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은 왜 그러는지 이유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아마도 ‘실이 어지럽게 엉키면 풀기가 어렵듯이 말도 이쪽저쪽으로 얽히고설키면 풀기가 어려워서 어지럽다는 뜻이 담기지 않았을까? 또 ‘어지러울 련/연䜌’에는 ‘다스리다’라는 뜻도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렇게 실타래처럼 엉킨 인간사의 것들을 잘 풀어내어 다스린다는 뜻을 담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 볼 뿐이다. 아무튼, 이런 내력을 지닌 ‘어지러울 련/연䜌’이 다른 글자와 합해지면 다른 뜻을 가진 글자들이 아주 많이 생겨난다.

우선 ‘여자 여/녀女’를 밑에 붙이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아름다울 련/연孌’이 되고, ‘큰 대大’를 밑에 붙이면 아찔할 정도로 큰 것을 이루는 ‘이룰 련/연奱’이 되며, ‘마음 심心’을 밑에 붙이면 내 마음이 저쪽 마음에 가서 닿지 않으면 어찌할 것인가 애타면서 심란한 ‘사모할, 그리워할 련/연, 그릴 련/연戀’이 되고, ‘손 수手’를 밑에 붙이면 무엇엔가 걸려 넘어질 뻔하게 어지러워 손을 잡아주어야 할 정도의 ‘걸릴, 경련할 련/연攣’이 되며, 굽은 활 모양인 ‘활 궁弓’을 밑에 붙이면 어지럽게 구부러진 물길 같은 ‘굽을 만彎’이 되고, ‘벌레 충/훼虫’를 밑에 붙이면 나라를 어지럽히는 벌레 같은 이들인 ‘오랑캐 만蠻’이 되며, ‘칠 복攵’을 밑에 붙이면 어지럽게 정신 못 차리는 녀석을 몽둥이로 때려서라도 변화시키는 ‘변할 변變’이 되고, ‘아들 자子’를 밑에 붙이면 ‘말씀 언言’ 이쪽저쪽에 똑같은 ‘실 사糸’가 두 개 붙어있는 모양처럼 쌍둥이가 태어나 아찔하게 기쁜 ‘쌍둥이 련/연孿’이 된다.

인생을 살다 보면 환갑을 넘어서도 아직도 젊은 날의 ‘어지러운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어지러움은 희열이고 안타까움이며, 두근거림이고 아쉬움이다. 그런데도 ‘때’는 지나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면 문득 공허와 허망함이 남아 눈물이 난다. 그러다가 매섭게 추운 날 정신이 바짝 들 듯이 고개를 흔든다.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못내 저 밑바닥에 그래도 남겨놓아야만 할 것 같은 미련未練(아닐 미未, 익힐 련練)이 사람을 어지럽힌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은 상대방을 어지럽히고(참조. 아가 6,5), 죄악은 인간사의 질서를 어지럽히며(참조. 예레 5,25), 교활한 이들의 말은 거룩한 사람들의 정신을 어지럽힌다.(참조. 사도 15,24)

붓 율聿

‘붓 율聿’은 ‘붓 필筆’과 같은 글자이다. ‘붓 율聿’은 뭔가를 손에 똑바로 들고 무엇인가를 쓰거나 새기는 모양새이다. 처음부터 붓으로 글씨를 쓴 것이 아니라 뾰족한 것으로 개발새발 새기다가 부드러운 털을 모아 붓대에 고정시키면서 나중에 붓대의 재료인 ‘대나무 죽竹’을 위에 붙여 ‘붓 필筆’로도 쓰게 되었다. 그래서 세월 따라 ‘율’이 ‘필’로 바뀐 셈이다. ‘붓 율聿’은 ‘붓, 똑바로 세우다, 몸소, 펴다, 닦다, 마침내, 이에, 따르다’ 등등의 여러 뜻을 담는다.

‘붓 필筆’이 들어간 낱말들은 많다. ‘잡을 집’을 더하면 어떤 주제를 잡아 글을 쓰는 ‘집필執筆’이고, ‘따를 수’를 더하면 생각 따라 붓 따라 쓰는 ‘수필隨筆’이며, ‘대롱 통’을 더하면 필기구들을 넣어놓는 ‘필통筆筒’이고, ‘자취 적’을 더하면 써내려간 글의 솜씨나 모양인 ‘필적筆跡’이며, ‘힘 력’을 더하면 글의 힘이나 기운인 ‘필력筆力’이고, ‘베낄 사’를 더하면 무엇을 보고 베껴낸 ‘필사筆寫’이며, ‘기록할 기’를 더하면 받아 적는 ‘필기筆記’이다.

‘붓 율聿’ 앞에 ‘갈 행行’(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나 통하는 사거리)의 축약형인 ‘彳(조금 걸을 척)’을 붙이면 사방 어디서나 통한다는 뜻을 담은 ‘법(칙) 률/율律’이 되고, ‘붓 율聿’과 ‘날 일日’ 그리고 땅에 해당하는 ‘하나 일一’을 붙여 만들어진 ‘낮 주晝’라는 글자는 햇볕이 땅에 똑바로 내려쬐는 정오를 뜻하는 말이 되며, ‘붓 율聿’ 밑에 ‘입 구口’ ‘입 구口’ 가운데 한 점을 찍어 입에서 나오는 것을 뜻하게 되면 ‘글 서書’가 되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글로 옮긴다는 뜻이 되고, ‘붓 율聿’ 밑에 ‘밭 전田’ 그리고 그 ‘밭 전田’을 ‘하나 일一’로 둘러쌓으면 ‘그림 화畵’가 되어 밭에 금을 그어 경계를 짓는 것처럼 그리는 것이 되며, ‘붓 율聿’ ‘밭 전田’ ‘하나 일一’에 ‘칼 도刂’를 붙이면 ‘그을 획劃’이 되면서 구획하고 계획하며 나눈다는 뜻이 된다.

‘붓 율聿’은 본성적으로 붓이고 글씨이며 글이다. 중국은 서법書法, 일본은 서도書道, 한국은 서예書藝라고 부른다는 글씨와 글쓰기는 쓰는 사람에게 스스로의 품격이고 삶이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이고 배움, 그리고 깨우침이다.

그래서 일찍이 당唐나라에서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기준으로 관리를 등용했다 하고, 내 주제에 감히 알아 듣기는 고사하고 언급하기조차 삼가게 되는 김정희 선생(1786~1856년)께서는 벼루 10개가 닳아서 못쓰게 되도록, 천 개의 붓이 못쓰게 되도록 글을 썼으면서도 ‘必有文字香書卷氣필유문자향서권기’라며 반드시 내 안에 문자의 향기와 책의 기운이 가득해야만 그것이 넘쳐 써지는 것이 글이요, 만 권의 책이 내 안에 있어야 써지는 것이 글이며, 내 안에 청고고아淸高古雅(맑고 드높으며 예스럽고 우아하다)한 인품이 마련되어야만 써지는 것이 글이라 했다. 멀리 김정희 선생 말고 ‘처음처럼’이라는 소주병에 새겨져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사랑을 받았던 신영복 선생(1941~2016년)께서도 글씨는 ‘획劃’(그을 획), ‘자字’(글자 자), ‘행行’(갈 행), ‘연聯’(잇달 연/련), 그리고 흑과 백의 조화로 쓰는 것이며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환동還童’(돌아올 환, 아이 동)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경지의 말씀을 남기신다.(참조. 신영복, ‘담론’, 306-321쪽)

나를 다소 이상하고 의아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수소문을 하여서 여기 미국에서는 쉽게 살 수 없을 것 같은 잉크 한 병을 사왔다. 한국에서부터 챙겨온 만년필 4개를 위해서였다. 이제는 거의 컴퓨터의 자판기가 쓰는 것이 글자요 글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면서, 만년필과 잉크가 좋은 글과 글씨를 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만년필을 소중하게 챙기고 그 만년필에 잉크를 넣는 순간이 거룩한 의식이 되는 것을 고집하는 것은 그나마 글과 글씨에 대한 옛 어른들의 숭고함을 기리고 나 자신을 추스르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사람들이 가끔 나의 글도 글씨도 아닌 것들을 보면서 듣기 좋은 소리를 하고, 스스로 예전에는 보이는 것들에 대한 분석이나 주제 넘는 평을 하는 것에 익숙하다가 언젠가 부터 내 자신의 생활에 관한 것들에 대하여 쓰려고 한다고는 하지만, 많은 것들이 그저 공부하는 것들을 정리하고 기억해두기 위한 ‘학습노트’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성경은 단순한 기호나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으며 능력을 발휘하는 글씨이고 글이다. 하느님께서는 글씨를 새길 판을 손수 만드시고 그 판 위에 글씨를 새김으로써 당신의 백성과 사랑에 찬 긴 여정을 함께 하셨다.(참조. 탈출 32,16) 구약의 사제는 저주를 물 위에 쓰고 그 물을 마시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판별하였고(참조. 민수 5,23), 수많은 예언자들은 글을 써서 경고했으며(2역대 21,12 에즈 4,6.14 에스 1,22 이사 8,1 예레 29,1등등),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앞에서는 사람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자를 썼고(다니 5,5-25), 바오로 사도 역시 “내가 직접 이렇게 큰 글자로 여러분에게 씁니다.”(갈라 6,11) 하였다. 성경의 글과 글씨는 이렇게 하느님 사랑의 계약이고, 역사이며, 저주와 경고이고, 권고와 인간사의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