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을 방放

집시들의 최초 출신지는 보통 인도로 알려진다. 하지만 영국에서 집시들이 이집트에서 온 것으로 잘못 알고 이집시안(Egyptian, 이집트사람)이라 했다가, 나중에 이 말의 머리와 꼬리가 잘려 나가면서 집시gipcy가 됐다고도 한다. 유럽인들은 집시를 보헤미안Bohemian이라고도 부르면서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아서 자유로운 존재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속어로 집시들을 ‘징가리Zingari’라고 일컫는데, 그와 관련된 말의 역사는 유럽 이곳저곳에서 오래되었고, 그 뜻은 다양하면서도 공통으로 ‘untouchable’을 담는다. 집시를 ‘보헤미안’이라고도 부르는 까닭은 『보헤미안의 어원은 프랑스어 보엠Bohême으로,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 유랑 민족인 집시가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 15세기경부터 프랑스인이 집시를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된다. (이 말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회의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방랑자,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예술가·문학가·배우·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실리주의와 교양 없는 속물근성의 대명사를 지칭하는 필리스틴Philistine에 대조되는 말로도 쓰였다.…이 말은 집시처럼 방랑하는 방랑자vagabond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위키백과)』에서 대충 짐작이 가능하다.

집시, 유랑민, 보헤미안, 방랑자, 징가리Zingari 등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글자는 다소 부분적이지만 아마도 ‘놓을 방放’일 것이다. 放이라는 글자가 ‘놓다’, ‘내쫓다’, ‘그만두다’라는 뜻을 가졌기 때문이다. 放은 ‘모 방方’과 ‘칠 복攵’이라는 글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方이라는 글자는 자원이 분명하지 않지만, 소의 등에 물리는 쟁기를 그린 것이라고 보아서 ‘방위’나 ‘방향’이라는 뜻을 갖는다고 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이렇게 ‘나아가다’라는 뜻을 가진 方에 攵을 결합하면서 몽둥이로 내쳐서 보낸다는 뜻을 표현하고 나쁜 사람을 멀리 쫓아내는 상황까지 담았다 하니 집시를 표현하기에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집시라는 말은 ‘놓을 방放’처럼 부정적인 뜻에서 출발하여 오늘날에 이르러 낭만적이고 자유분방함, 그리고 예술적인 기질이나 적극적인 열정과 독특함이라는 긍정적인 뜻으로까지 진화한다. 그래서인지 ‘집시’는 어느새 많은 이의 동경이 된다.

‘놓을 방放’에 반대되는 글자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나처럼 수도원에 갇혀(?) 사는 사람은 ‘놓을 방放’에 반대되는 삶을 살기로 결정돼 있기 때문이다. 원래 가톨릭교회의 오랜 전통에서 수도자의 삶은 ‘정주定住’에 대한 갈망이다. 구약 만남의 천막으로부터 시작하여 회당과 성전, 교회와 수도원, 심지어는 ‘봉쇄封鎖’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붙여도 그럴듯하고(예. 봉쇄수도원), 또 사람의 은밀한 깊은 곳에 당신 거처를 마련하신다는 하느님은 항상 내면을 즐겨하시고 흔들림 없이 고정된 삶을 즐겨하신다. ‘놓을 방放’의 반대편을 생각하면서 글자의 생김새 때문인지 자꾸 사방이 둘러쳐진(에워쌀 위囗) 곳에 사람(사람 인人)이 들어서 있는 ‘가둘 수囚’가 더 생각나는 것은 오지랖일까? 어려서부터 수도원에 살았던 나는 ‘유목遊牧(놀 유遊·칠 목牧, 노마드nomad)’을 미화하고, ‘정할 정定’과 ‘가둘 수囚’의 저편 ‘놓을 방放’을 그리워하면서, 가지도 못할 길이요 가서도 안 되는 길을 꿈꾸고 거짓말하며 살았던 것이 틀림없고, 어쩌면 나이 든 지금도 여전하다.

사랑 애愛(2)

광고판에서 ‘사랑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관련 사이트를 홍보하는 내용을 보았다. 과연 사랑을 찾기가 그렇게 쉬울까? 영국의 시인 오든W. H. Auden(1907~1973년)의 <장례식 블루스Funeral Blues>를 찾아 다시 읽었다. 시인은 『…그는 나의 북쪽이고 나의 남쪽, 동쪽이고 서쪽…나의 일하는 평일이고 일요일의 휴식…나의 정오이며 나의 자정, 나의 대화이며 나의 노래였다. 사랑이 영원한 줄 알았는데, 내가 틀렸다.…이제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으니까.』 하였었다. 가위의 이쪽저쪽 날과 같은 사랑과 죽음, 아니 사랑과 생명의 무게를 단다면 어느 쪽이 더 무거울까?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사랑이 맨 나중까지 남는다는 말은 무엇일까? 사랑이 깊은 만큼 그 사랑을 배반할 수 없다는 말은 진실일까?

무엇이 사랑인지 사랑에 대한 진실은 분명하지 않지만, 찾아야만 하고,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며, 시도해보아야만 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사랑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체험이다. 사랑은 가련한 우리 인생살이에서 어쩌면 구원과 만족을 피부로 느끼는 유일한 체험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사랑을 찾고 기다리며 갈망한다. 행여 어떤 사랑의 조짐이라도 보이면 그 사랑이 어서 피어나고 자라나기를 열망하면서 우리의 모든 관심은 온통 거기에 쏠린다. 영원하기를 바라며, 거부를 당하더라도 끝까지 가고 싶은 것이 사랑이며, 죽음마저도 이기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지만 실제 우리 인간이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사랑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많은 모순을 담는다. 사랑에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도 담겼다. 어려움, 갈등, 위선, 배반, 막연할지라도 이미 이별과 죽음까지 내다본다. 그런 까닭으로 아픔이 없는 사랑이 없고 자신을 잃는 과정이 없는 사랑은 없다. 고통, 모순과 이율배반의 슬픔, 살아내야만 하는 부적절한 현실을 겪어가면서 우리는 우리가 사랑의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는지 의심하기도 한다. 인간끼리 과연 진정한 사랑을 할 수는 있는 것일까, 서로 하나가 되는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는 있는 것일까, 스스럼없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서로를 더해서 더욱 아름답고 더욱 인간다워지는 사랑, 인격적으로 서로를 대하고 존중하는 그런 사랑이 과연 있을까? 사랑은 고집스럽다. 모험이다. 나의 생명을 너의 생명에 덧대어 네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사랑을 아는 자만이 누군가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에는, 특별히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는, 불가능을 뛰어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 항상 같이 있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을 생각하며 같은 세상을 함께 느끼면서 누리고 싶어 하는 것들이 따라붙는다. 나 자신이 아닌 분명한 타자인 그와 나 사이에 그 어떤 거리도 용납하지 않으려 든다. 그래서 사랑에 필요한 것은 내면의 치열한 싸움과 절제이다.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욕망과 함께 상대방에게 나를 덧씌우려는 욕구가 강한 사랑의 때엔 더욱 그렇다. 그러다가도 진정한 사랑은 거의 불가능하리라는 어려움이 몰아친다. 사랑하는 만큼 구속하고 구속받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사랑하면 할수록 갈망하게 되고, 갈망하면 할수록 상대방을 소유할 때까지 나를 덧씌우고 싶어 한다.

우리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고, 사랑으로 엮어진 존재이며, 사랑을 구걸하는 존재로서 모순 속에 사랑을 산다. 우리는 사랑이 필요하지만, 사랑은 자유도 필요하다. 약간의 사랑을 위해 우리는 기꺼이 우리 자신을 팔아넘기는 매춘을 감행하기도 하고,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상대방의 주위에 울타리를 둘러치기도 하며, 배반의 아픔을 겪지 않으려 상대방에게 폭력을 불사하기도 하고, 상대방이 진정 나를 받아들이려는지, 그와 나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의 방식과 동기, 그의 선함과 악함이 무엇인지를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막무가내가 되기도 한다. 사랑과 자유가 결합하는 것, 상대방의 자유에 온전히 동의하는 것, 다른 사람이 나와 같으면서도 같을 수 없으며 다름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일까? 나 혼자만 사랑하더라도 사랑이면 그냥 그대로 충분한 것일까?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나의 사랑으로 변화되기를 거부하더라도 사랑은 지속될 수 있는 것일까? 참사랑이라면 그럴 것이다. 사랑은 사랑으로 충분하며, 결코 보상을 바라지 않고, 무상과 자유 안에 있으며, 언제 어디서라도 시간과 공간의 장애를 뛰어넘기 때문이다. 『진실한 사랑은 “사랑해!”를 아무리 반복해도 지루할 줄 모른다.(풀톤 쉰Fulton Sheen 추기경, 1895~1979년)』

사랑 이야기를 담은 솔로몬의 아름다운 노래요 비유인 아가서는 “내 영혼이 사랑하는 이, 나의 애인, 나의 연인,…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나의 누이 나의 신부…가장 아름다운 이…나의 비둘기…서두르셔요…서둘러 오셔요.”(아가 1,7.9.14;3,2;5,1;6,1.9;8,14) 한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가짐, 소유가 없는 충만한 가난이시다. 오직 사랑이실 뿐이어서 인간을 향한 절대적 의존이시다. 내려다보시는 법이 없고 자기를 지우시기에 완전한 겸손이시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의 은유인 인간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 해도 온 생애가 필요할지 모른다.(프랑수아 바리용François Varillon, 1905~1978년, 흔들리지 않는 신앙Joie de Croire-Joie de vivre, 심민화 옮김, 생활성서, 2000년, 47-55쪽 참조)』

눈물 루淚

‘눈물 루淚’라는 글자는 ‘눈물, 촛농, 울다’라는 뜻을 담은 글자이다. ‘물 수氵’가 의미부이고 ‘어그러질 려戾’가 소리부이다. 글자를 좀 더 풀어헤치면 ‘물 수氵’+ ‘집/지게 호戶’+‘개 견犬’이다. ‘지게’나 ‘출입구’라는 뜻을 가진 ‘집 호戶’라는 글자는 외닫이 문, 문의 반쪽을 그렸다. 이렇게 풀어헤친 대로 외우기 쉽게 뜻을 풀면 개가 문 안에 갇혀 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며 우는 셈이다. ‘눈물 루淚’라는 글자를 간결하게 ‘물 수氵’와 ‘눈 목目’을 더하여 ‘눈물 루泪’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움의 눈물, 혼자만의 눈물, 가슴을 쥐어뜯는 눈물, 뉘우침으로 기워 갚는 눈물, 회개의 눈물, 말라서 깊은 자국이 된 눈물, 안으로만 번지는 눈물, 훗날의 약속을 기약하는 눈물, 웃음의 시간을 넘어 눈물의 시간에 흐르는 눈물,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나를 내가 괴롭히는 눈물, 승자의 눈물, 패자의 눈물, 눈물로 미소를 감추고 미소로 눈물을 감추는 광대의 눈물, 참고 또 참아서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눈물, 비겁과 무기가 되는 눈물, 꾸밈과 가식이 없는 해방의 눈물, 결코 이름을 가져본 적이 없는 민중의 눈물, 하나가 되는 공감의 눈물, 삶과 죽음이라는 두 개의 울음이 울려대는 눈물, 땅과 하늘이 함께 우는 눈물, 비가 되어 흘리는 하늘의 눈물, 하느님의 눈물, 우주 만물의 눈물, 거룩한 성사의 눈물, 치유의 눈물, 시편과 찬미가를 따라 흐르는 눈물, 베갯잇을 적시는 눈물, 달콤한 눈물, 은총의 눈물…

눈물은 저마다의 이름과 목소리를 가졌다. 눈물은 신비한 언어이다. 앙투안 생 텍쥐페리Antoine Saint-Exupéry(1900~1944년)가 어린 왕자를 통해서 『눈물의 땅은 그렇게도 신비스러운 곳!』이라고 했던 말처럼 기쁠 때건 슬플 때건, 사람이 울고 세상이 울며 만물이 운다. 눈물은 영혼을 달래주는 말이고 누군가와 소통하는 비언어적인 언어이다. 때로는 나를 보아달라는 표현이고, 때로는 나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은유이며, 고독 속에서 나 자신에게 말하는 마음의 속삭임이다. 눈물은 항상 웅변이다. 눈물은 우리 신체의 감각 훈련을 통해 다른 이 앞에서 내가 그와 함께 이루는 예술이다.

우리는 ‘안구건조증’이라는 병을 앓는 시대를 산다. 어떨 때는 울 줄도 모르고, 우는 이를 바보스럽다고 경멸하거나 조롱하기도 하며, 마음이 굳어져 ‘완고(스클레로카르디아, σκληροκαρδία, sklerokardía, 참조. 마태 19,8 마르 10,5;16,14 신명 10,16)’하게 살아간다. 눈이 먼 사람도 우는 것을 알고, 프랑스의 철학자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1930~2004년)가 주도면밀하게 설파한 것처럼 눈은 오직 보는 것만을 위한 신체의 기관이라기보다 오히려 울기 위한 기관이다. 소수의 몇몇만이 알겠지만, 그리스도교의 오래된 전통에는 눈물의 은총을 얻기 위한 기도도 있다. 강렬한 내면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마음, 가엾은 마음, 자비로 충만한 마음이 있는 곳에 눈물이 있고, 교만과 거만, 그리고 자기만 생각하는 자기애(필라우티아, ϕιλαυτία, philautia)라는 병에 걸린 곳에는 눈물이 없다는 것을 안다.

때로 눈물은 우리 안의 내밀한 곳, 내가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곳에서도 터져 나온다. 빛이 없는 깊은 심연, 우리 자신이 절대 원하지 않는 지옥의 영역에서도 눈물은 솟는다. 그때 눈물은 깊은 상처가 쏟아내는 시詩이며 나를 씻어내리는 정화이다.

우는 자여, 그대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니…!

짝 반伴

흔히 배우자를 가리키거나 나를 이루는데 필요한 다른 한편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반려伴侶(짝 반伴·짝 려侶)’라는 말이 있다. 배우자를 인생의 반려라고 할 때나, 애완동물을 일컬어 반려동물이라 할 때 이 말을 사용한다. 짝을 이루어야만 완전체가 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짝 반伴’이라는 글자는 ‘사람 인人’이라는 글자와 ‘반 반半’이라는 글자의 결합이다. ‘반 반半’이라는 글자는 ‘소 우牛’와 ‘여덟 팔八’의 결합이어서 소를 반으로 가른 모습을 그린 것으로 ‘절반’이라는 뜻이 있다. 이 글자를 이용하여 함께 길을 가는 사람을 두고 ‘도반道伴’이라 하고, 함께 어우러져 무엇인가 같은 것을 도모하는 상황을 두고 ‘동반同伴’이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동반’을 말할 때는 ‘반伴’ 대신 ‘함께 갈 반㚘’이라는 글자가 먼저 쓰였었다. ‘함께 갈 반㚘’은 ‘짝 반伴’과 다른 글자이지만 통자通字이기도 하다. ‘함께 갈 반㚘’은 ‘지아비 부夫’라는 글자가 두 개 합쳐진 글자로서 이 글자에는 두 사람이 손이라도 잡고 가듯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 담겼다. 이렇게 함께 같은 길을 가면 ‘동행同行’이라 하고, 뜻이 같은 사람끼리는 서로를 ‘동지同志’라고 부르며, 늘 친하게 어울리며 짝이 되는 편을 두고는 우리말로 ‘동무’라고 부른다.

내가 결코 되어보지 못하고 나 자신이 변변치 못한 주제라서 아주 제한된 건너편의 얘기이며, 다소 부정적일 듯한 관찰이고, 몇 가지의 관찰에 불과하며, 절반은커녕 반의반도 되지 못할 이야기이지만, 롤-모델, 멘토, 소울-메이트, 안내자, 조언자, 수호천사, 보디가드, 친구, 동지, 도반道伴, 동행자, 동반자…그 누구든 우리가 서로 이루는 ‘짝 반伴’은 어떤 때 실로 놀랍다.

아주 일상적인 얘기를 하다가 생각지도 못한 아주 뜻밖의 상황으로 반전을 일으키며 전혀 다른 이야기로 비약한다. 무엇인가를 물으면 그것을 묘한 논리로 되물으며 사람을 엄청나게 당황하게 한다. 아기자기할 것도, 그렇다고 낭만이랄 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긴다. 무엇인가를 기념하는 데 서로 날짜가 안 맞아 당겨서든 미뤄서든 합의하여 기념했으면 그만일 텐데 꼭 그날 그 순간이 중요하다고 고집하여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상상 못 할 재주를 부린다. 국 하다가 밥하고, 밥하다가 반찬 하며, 반찬 하다 문자 하고, 문자 하다가 드라마 보고, 드라마 보다가 빨래도 하는 이 모든 것이 동시에 가능한 기적 같은 멀티-태스킹이 된다. 일에 열중하다 보면 그 일에 몰두하게 마련이어서 그 일만 생각하고 하루해가 지날 수도 있는데, 종일 다른 생각은 왜 하지 않았느냐고 다그치면서 짜증이 나게 한다.

여행 중에 밥을 먹는 것은 그저 자동차 기름 넣듯이 샌드위치로 때워도 되련만, 또 잠은 다음 날의 여행을 위해 그저 저렴하게 씻고 잠만 자면 되련만, 밥은 반드시 분위기 있는 곳에서 식탁보 깔고 냅킨 두르며 먹어야 하고, 잠은 로비가 높은 호텔에서만 자야 한다고 고집하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비합리성을 진지하게 발휘한다. 더워서 못 살겠는데, 추워서 못 살겠다 한다. 저마다 위대한 사랑을 꿈꾸는데 정작 위대한 사랑은 전혀 아닌,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대한 사랑으로, 지극 정성으로 한다. 어느 날 기분이 무척 좋다가 이유를 가늠할 길이 없고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는 예측 불가의 기분으로 다운이 되어 주변을 긴장시킨다. 기억과 상상을 혼동하면서도 자기 기억을 고집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 기억이 바르다고 동의하게 하는 억지를 부린다. 스치듯이 암시된 불순을 귀신같이 잡아내는 직관력으로 두려움을 자아낸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로 둘러대도 자기 위안과 자기 미화 속에 안심하고 안주하는 어리석음을 즐긴다. 이미 지긋한 지어미이고 지아비인데도 10대 소년 소녀나 된 것처럼, 또 다른 사랑을 꿈꾸며 비밀을 간직하려 든다.……

약간의 거짓과 불순, 약간의 타협과 비겁함, 약간의 긴장과 불안, 약간의 허세와 뻥, 약간의 기쁨과 불만, 약간의 양보와 자기기만, 약간의 허기짐과 배부름, 약간의 외면과 밀당, 약간의 취기와 비틀거림 속에서 그렇게 날들이 가고 우리는 인생을 함께 산다. 사람은 누구나 나 안의 나를 너에게서 발견하게 마련이고, 존재의 예민함이 맞닿는 곳에서 서로 동질감과 자기애를 느끼게 마련이며, 언제 어디서고 찾으려고만 하면 찾을 수 있는 그 thin-places가 오로지 너와 나만의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그렇게 우리는 웃픈 ‘짝 반伴’의 한쪽을 산다.

무지개 홍虹

인터넷도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척박한 아프리카 땅에서 사는 수녀님께서 무지개 사진을 보내주시면서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무지개를 ‘성모님의 허리띠’라 한다고 알려 주셨다.

‘벌레 충/훼虫’이라는 글자와 ‘장인 공工’이라는 글자로 이루어진 ‘무지개 홍虹’이라는 글자는 『형성문자로서 ‘벌레 충/훼虫’이 의미부고 ‘장인 공工’이 소리부인데, 갑골문에서는 두 마리의 용(虫)이 물을 내뿜어 ‘무지개’를 만드는 모습을 그렸는데, 이후 지금처럼 형성구조로 바뀌었다.(하영삼, 한자어원사전, 935쪽)』 먼 옛날 사람들은 하늘의 용龍이 기교한 재주를 부려 무지개를 만든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순수 우리 말이라고 알려지는 ‘무지개’의 어원은 세종 때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등장하는 ‘므지게’였다고 하는데, 물(므)을 뿌려 나타나는 둥근 문(지게·지게 호戶, 문·출입구)인 셈이다. 이탈리아 말로 무지개를 아르코발레니arcobaleni라 하든가 아르코 이리스arco iris라 하는데, 이는 모두 arco(둥글다는 뜻, 아치형)라는 말을 담고 있고, baleno가 번쩍이는 빛이나 색과 같은 것이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iris의 이름이기도 한 이리스라는 말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어(ἶρις)에서 꼬거나 엮은 실이나 줄, 혹은 선이나 띠를 의미하므로 충분히 짐작이 가는 무지개 형상이다. 영어 역시 레인보우(rainbow)는 비(rain)가 온 뒤에 활(bow)처럼 둥근 형상을 무지개라 하고, 프랑스어에서 아르캉시엘(arc-en-ciel)이라 하는 것 역시 하늘(ciel)에 나타난 아치(arc)이다.

『알쏭달쏭 무지개 고운 무지개 선녀들이 건너간 오색 다린가 누나하고 나하고 둥둥 떠올라 고운 다리 그 다리 건너봤으면』 하는 홍난파 작곡, 박희각 작사의 동요 ‘무지개’처럼 우리는 무지개를 타고 하늘 나라의 선녀가 지상계에 목욕하러 내려온다는 옛이야기나 하늘과의 연결에 무지개가 있고, 구름을 보아 비가 올지 말지를 예상하던 운점雲占처럼 무지개를 보고는 홍수가 있을지 없을지를 점치는 홍점虹占이 있었다고도 하는데, 북유럽과 같은 곳에서는 무지개가 끝나는 곳에 보물이 숨겨있다는 이야기나 행운이 함께 있었다.

‘월화수목금토’ 일곱 행성이나 ‘도레미파솔라시도’ 일곱 음계처럼 어린 시절 ‘빨주노초파남보’를 외어야 했던 무지개의 일곱 색깔 분류는 영국의 아이작 뉴턴Isaac Newton(1642~1727년)이 실험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지만,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무지개의 색깔을 ‘오색’이라 표현하고 미국에서는 여섯, 아프리카에서는 둘, 멕시코 원주민 사이에서는 다섯 가지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207색까지도 구분할 수 있다고 하니 얼핏 비슷비슷하면서도 휘황찬란하면서 어느 색을 골라야 할지를 구분할 수 없어 오래 망설여야 하는 수십 가지 색깔의 파스텔 앞에 있는 어린이처럼 무지개는 어느 사람에게나 항상 설레임이다.(*6가지 색인 성性소수자들을 위한 깃발과 이에 반발해 무지개를 돌려달라는 항변에 관한 논란은 접어둔다.)

그래도 성경의 무지개는 인간을 살리고자 섭리하셨던 노아의 방주를 떠올리게 하는 하느님과 땅 사이에 맺었던 계약의 표징이고(창세 9,13-16) 지극히 높으신 분의 손길이 하늘을 가로질러 펼쳐 놓으신 것이며(집회 43,11-12), 그분의 성전을 비추는 빛이고(집회 50,7), 사방으로 뻗은 주님 광채의 모습(에제 1,28)이며, 그분의 어좌와 천사의 머리에 둘러있는(묵시 4,3;10,1) 빛깔이다. 무지개는 가톨릭, 특별히 정교회를 중심으로 구세주를 품으시어 인간 구원의 방주가 되신 ‘성모님의 허리띠’와 분명 관련이 있다. 성모님의 허리띠는 『성모님께서 낙타털로 지으신 허리띠로 알려진다. 성모님의 승천을 볼 수 없었던 토마스 사도에게 3일 뒤에야 전해져 예루살렘에 오래 보관하다 5세기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진 내력을 지녔다가, 현재의 이스탄불 블라쉐르네Blachernae에 있는 성모 마리아 성당Church of St. Mary에 보관하였다. 나중에 이를 요한 6세John VI Kantakouzenos(1347~1355년)라는 황제가 아토스Athos 산에 있는 바토페디의 거룩하고도 위대한 수도원Holy Great Monastery of Vatopedi에 기증하여 보관하였는데, 레오 6세Leo VI(886~912년) 황제의 황후 조에Zoe가 성모님의 허리띠 덕에 기적적 치유를 얻은 뒤 감사하는 뜻으로 금실로 장식하기도 했다. 성모님의 허리띠를 기념하는 축일은 12세기 마누엘 1세Manuel I Komninos(1143~1180년) 황제 때 8월 31일로 정교회의 공식 전례력에 삽입되었다.(출처. Wikipedia)』

간밤의 뉴스는 아프카니스탄의 지난 20년 소용돌이에서 희생된 수많은 생명의 의미와 인간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하고,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맞아도 너무 맞다 싶은 아이티의 강진이라는 슬픈 소식을 전한다. 여름 끝자락 소나기에 이어 무지개가 자주 보이는 시절에 ‘성모님의 허리띠’가 사람들의 슬픔을 어루만져 주시고, 단단히 잡아주시기를 빈다.

꿈 몽夢

시험지에 답을 써야 했다. 여럿이 같이 있는 시험장이었는데, 각양각색의 무더기로 놓여있는 종이 중에서 자기가 원하는 시험지를 가져와 서술형 답을 쓰는 시험이었다. 다소 미적거리다가 내가 종이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는 내가 좋아하는 양면 백지가 모두 사라지고 여러 종류의 이면지만 잔뜩 있었다. 답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알고 있었고 대충 어떤 순서로 답을 쓸 것이라고 계산까지 하면서 마땅한 종이를 찾기 위해 이면지들을 뒤적거리는 중에 안타깝게도 내가 원하는 그런 종이는 찾기가 어려웠다. 어떤 것은 색깔이 누렇고, 어떤 것은 한쪽이 찢어져 있고, 또 이것은 이미 어떤 것이 쓰여 있고 저것은 너무 크기가 작았다. 마침내 아주 깨끗하고 다른 종이보다는 약간 길쭉한 형태여서 마음에 드는 이면지를 찾았다. 두 장을 추켜들고 가져와 답을 쓰려는데 이미 머릿속에 생각했던 답의 골격 중에 두 번째 것만 생각날 뿐 첫 대목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내심 영리한 나로서는 곧 생각이 나겠지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내려고 조바심을 내다가 마감 시간이 임박했다. 알고 있는 답을 써보지도 못하게 된 상황이 안타까웠고, 이렇게 시험이 끝나고 마는가 하는 속상함 속에서 그만 잠이 깼다. 꿈이었다.

때로는 ‘맹’이라 발음하면서 ‘캄캄하다’를 뜻하기도 하는 ‘꿈 몽夢’이라는 글자를 풀어헤치면 ‘풀 초艹’(눈꺼풀) + ‘눈 목罒’(눈) + ‘덮을 멱冖’(덮다) + ‘저녁 석夕’(밤)이다. 글자의 생긴 모습 그대로를 기억하기 쉽게 하느라 『침대에 누워 잠을 자다 악몽을 꾸어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뜨고 머리털이 비쭉 솟은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조선일보, 생활한자, 2007년 11월)』이라 하지만, 『‘저녁 석夕’이 의미부이고 생략된 모습을 지닌 ‘어두울 몽瞢’이 소리부(하영삼, 한자어원사전, 297쪽)』이다. 이 글자는 원래 침상(爿)에 누워있는 사람(人)의 모습에서 눈(目)이나 눈꺼풀(눈썹 미眉)을 강조하여 그린 것으로부터 연유되었다. 혹자는 침상에 누운 사람이 손으로 눈을 가린 모습이라 하기도 한다. 중국의 간체자는 ‘저녁 석夕’ 위에 ‘수풀 림林’을 두어 ‘몽梦’이라 한다는데, 이는 어두운 숲속 낭만을 담았기 때문이라 한다.

현몽現夢(예지몽豫知夢), 계시몽啓示夢, 길몽吉夢, 흉몽凶夢, 태몽胎夢, 허몽虛夢, 자각몽自覺夢, 백일몽白日夢, 비몽사몽非夢似夢, 여진여몽如眞如夢, 일장춘몽一場春夢, 동상이몽同床異夢, 동상각몽同床各夢, 호접지몽胡蝶之夢, 삼도지몽三刀之夢, 나부지몽羅浮之夢, 남가일몽南柯一夢, 무산지몽巫山之夢 등등 꿈의 종류도 많고 관련 고사성어도 많다. 꿈은 젊은이들에게 희망이고 낭만이며 쫓는 것이지만, ‘꿈 몽夢’이라는 글자는 세월 깊은 옛 한자 문화권에서 여러 사자성어나 고사를 통해서 많은 경우에 부질없음과 무상無常의 내력을 지녔다.

꿈은 아직 오지 않은 미지이며 미래이고 확신이며 원하는 이 누구나 눈을 감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무상의 영역이다. 꿈은 사람들이 모두 같은 꿈을 꾸는 것은 아니면서도 대개 살 맛이 나는 장밋빛 낭만이지만, 가시들이 무성한 가시밭길이기도 하다. 현실, 지식, 역사를 넘어가면서 나를 열정으로 채근하는 꿈은 힘이 있다. 그렇지만 때때로 꿈은 나를 그 안에 가두어 소진하는 위험한 자위행위이다. 꿈은 좁쌀밥 한 공기가 다 익지도 않을 찰나이며 구름이 일었다 사라지는 것처럼 허상이고 부질없는 한바탕이자 망망대해에서 알맹이 없는 껍질로, 떠 있다고 할 것도 없는 떠 있음이다. 하느님 편에서야 잠든 인간을 위해서도 쉴 새 없이 창조하시는 ‘세 번 거룩하신 분’의 깨어 있음이고, 인간 편에서는 꿈에라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욕망이요, 또한 꿈에라도 더럽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꿈은 앞뒤가 들어맞지 않아서 사람들이 정신착란이라고 말하더라도, 간절한 소망과 한 짝이 되어 우주의 섭리를 따라 꿈일 것만 같았던 꿈에 다가가는 듯한 착각 아닌 착각 속에서 점차 현실이 되어 나를 강화하는 신화이고 이유이며 자유이고 용기이다.

꿈의 비슷한 말은 소망이나 열정이지만 반대말은 두려움이다. 간절한 소망과 한 짝이 되었더라도 꼭 이뤄야만 한다는 두려움이 소망을 압도할 때는 이미 꿈이 아니다. 거꾸로 소망이 두려움을 압도하면 평범한 사람은 비범한 사람이 된다. 꿈이라는 선택과 결정 앞에서 두려움과 망설임은 핑곗거리와 희생양을 찾느라 두리번거린다. 꿈은 어차피 성취와 와해 사이를 오가는 리듬이다. 화려한 성취에서 오는 숨 가쁜 떨림은 하루하루가 새롭지만, 고통과 체념, 비겁함으로 치장된 와해는 우울이다. 그래도 사람은 늘 자기 미화를 찾아내는 재주가 있어서 울지 않고 참지 않으며 슬픔을 즐길 줄도 아는 교훈을 얻었다.

꿈은 말과 기호와 시간이 어우러지는 유희이며, 꿈꾼 것들과 꿈도 꿔보지 못한 것들 사이의 간극이고, 길 떠난 사람에게 바람이라도 전해주기를 바라는 편지이며, 어쩌면 실현과 좌절 사이에서 좌절 쪽에 추가 쏠려있는 저울이고, 꿈인지 아닌지를 모르는 미지未知이다. 꿈은 아픔을 회피하면서도 아픔을 즐기는 불장난이기에 운명의 올가미이자 함정이며 슬프고 아픈 순간을 넘어가는 방식이고, 어느 순간 되돌아갈 수 없는 심연을 건너버린 후회이며 다른 이의 강요와 압박이기도 하지만, 결국 혼자만의 결정이고 책임이다.

꿈은 꾸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과의 차이이고, 무엇이 되려는 시도가 아니라 이미 무엇으로 사는 것이며, 꿈이었을까 싶은 날에 돌아보며 쏟아내는 말이지만, 결국 꿈 밖으로 돌아가 버린 대부분 사람의 일상이다. 그럴 때 꿈은 차마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것들을 혼자 즐기는 놀이이고, 나의 꿈에 우주의 음모가 협력하는 과정이며, 꿈에 대한 나의 믿음이 사라질 때, 그리고 섭리가 나를 다른 길로 인도할 때만 비현실이다.

꿈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고, 모든 사랑 이야기처럼 하나의 사랑이 사라질 때 다른 사랑이 찾아오는 것이며, 무슨 꿈인지도 모르며 살기보다도 나를 잃는 아픔을 무릅쓰고자 하는 것이고, 이쪽과 저쪽을 넘어 사랑만이 남을 때이며, 참 다루기가 어렵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으며 해명할 수가 없다.

꿈은 낯선 나라에서도 모국어로만 꾸어지는 것이며, 밤의 언어이고, 결코 멈출 수 없는 것이며, 시간이 없다 하고 삶이 모험임을 포기할 때, 안주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때에 비로소 죽고, 꿈이 죽으면 결국 나도 썩어간다. 꿈속에서도 깨어 있을 때의 기억으로 숨이 쉬어지듯이 죽은 사람도 그에 대한 기억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 꿈이고, 내 안의 이상들이 시들어버리고 날개가 꺾일 때 마음 둘 곳이 없어 하는 방황이며, 매일 밤 세상의 소음과 이미지의 유혹들에 방해받는 연약함이고, 몸과 감정과 영혼과 함께 보살펴야만 산다.

꿈은 늘, 평생 온 세상을 싸돌아다니면서나 살고 싶은 욕망이고, 아파트의 밝은 전등 아래에서보다는 산사의 촛불 아래에서 훨씬 더 친숙한 것이며, 나의 꿈에 수많은 사람을 따라 죽게 할 수도 있어서 내가 우는 것이고, 생산하는 사람이 목숨을 바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숙명이며, 달콤한 것이면서도 씁쓸한 것이다. 꿈은 내 앞에 펼쳐진 한없는 바다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보는 것이며, 낭만과 이상을 소비와 일회성으로 대체하려는 악마의 장난이고,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몹시 위험한 것이다.

꿈은 엄마 아빠가 읽어주는 동화 속에 그렇게 잠들고 성장하는 어린아이이고, 정말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을 찾아 의지와 역량을 훈련하는 과정이며, 몇 년을 두고 누군가를 찾으려는 갈망이지만, 막상 찾았을 때의 실망이거나 다른 누군가를 다시 찾으려는 시도이고, 도달할 때 내가 애초에 찾으려던 것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를 알게 되는 자각이며, 엄마를 잊을 때쯤에야 찾아지는 현실이고, 끝 간 데가 없는 끊임없는 변종이다.

외로울 고孤

텃밭에 오이를 비롯하여 여러 열매가 달리는 계절이다. ‘외로울 고孤’는 ‘아들 자子’와 ‘오이 과瓜’의 결합이다. ‘아들 자子’야 워낙 익히 아는 글자이므로 사족이 필요 없다. ‘오이 과瓜’는 양쪽 덩굴손과 덩굴손 사이에 덩그러니 맺은 오이의 모습을 그렸다. 오이나 참외, 호박이나 박과 같이 마디 하나에 열매 하나를 맺는 수많은 덩굴 식물이 있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오이를 글자 이름으로 삼아 ‘오이 과瓜’라고 한다. 글자의 모양도 그러려니와 혼자는 기어오르고 설 수 없어서, 덩굴손으로 무엇인가를 감고 의지하는 식물이라 글자의 뜻을 새기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고아孤兒’라는 말에는 의지할 부모 없이 혼자 살아야 하는 외로운 아이와 오이 열매를 모습으로 담고, 글자 각각에 아이가 담겨 두 번 슬픈 말이다.

외로움은 이유 없이 나를 흔들어대는 공허함이다. 외로움은 차茶가 식는 줄 모르는 멍때림이다. 외로움은 짝짓지 못하는 상실과 부재, 분리이다. 외로움은 네가 아는 것과 내가 아는 것의 차이이다. 외로움은 어차피 혼자라는 자위이다. 외로움은 ‘이유 없이’라는 말의 되풀이이다. 외로움은 멀쩡하게 있다가도 불현듯 찾아오는 손님이다. 외로움은 어느새 저만치서 빤히 쳐다보는 바스락거림이다.

외로움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변덕이다. 외로움은 습관처럼 뒤적이는 책장이다. 외로움은 견주어 생각나는 박탈감이다. 외로움은 억울함으로 가중되는 냉랭함이다. 외로움은 나만 그렇다는 서러움과 섭섭함이다. 외로움은 상처받지 않으려고 웅크린 살쾡이이다. 외로움은 너의 외로움과는 다른 나만의 것이다. 외로움은 보이는 것들마다 붙이는 이름표이다. 외로움은 새 한 마리, 소나무 한 그루, 달, 쪽배, 깃대, 종소리이다.

외로움은 내 몸을 힘들게 하는 위협이요 질병이다. 외로움은 우울과 도피, 중독이다. 외로움은 의미 없음에서 의미를 만들려는 아등바등함이다. 외로움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눈물이다. 외로움은 무엇인가에 나를 미치게 하는 동력이다. 외로움은 누구, 무엇에나 있는 본질이다. 외로움은 어느 날 언제냐 싶게 숨는 재주꾼이다. 외로움은 견디는 아픔이 아니라 우주와 하나 되어 살아내는 삶이다.

뜻 의意

‘뜻 의意’라는 글자는 ‘소리 음音’과 ‘마음 심心’의 결합이다. 피리에서 나오는 소리를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지고, ‘말씀 언言’과 같은 글자였다고 알려지는 ‘소리 음音’이 ‘마음 심心’ 위에 앉았다. 옛사람들은 머리가 아닌 마음이 하는 것을 생각이라고 믿었으므로 마음의 소리는 ‘뜻, 의지, 의미, 생각, 헤아리다’ 이다. 나의 밖에 있는 대상을 보고 내가 한 생각, 대상이 나의 마음에 작용하며 불러일으킨 생각, 내가 보든 대상이 자신을 드러내어 나에게 비치든, 마음에 일어나는 소리와 맺히는 생각들이 ‘뜻 의意’이다.

‘소리 음音’에 ‘풍류 악樂’을 더해 ‘음악音樂’이 되면 마음의 소리가 가락을 통해 시간과 공간 속에 번진다. 음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악보’라는 약속 아래 같은 마음을 노래하는 인간의 또 다른 언어이다. 그래서 악보는 약속이고 언어이다. 세상 어디서나 그 악보에 따라서 같은 소리를 내고 같은 곡을 연주하도록 약속된 음악이라는 언어이다. 우리 인간은 남녀노소 누구나를 막론하고 하느님과 인간 간에 맺어진 약속을 따라 움직이도록 요청받는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마음이라는 악보에 양심이라는 음표와 지성이라는 박자를 당신 손가락으로 새겨 사람 수만큼의 멋진 인생 곡들을 연주하신다.

소리에 나의 가치관과 주관이 개입되어 정돈되면 ‘뜻 지志’가 된다. ‘뜻 의意’나 ‘뜻 지志’ 두 글자 모두 ‘마음 심心’을 기초로 한다. ‘지의志意’라고 하지 않고, ‘의意’가 먼저 오고 ‘지志’가 나중에 오는 것처럼 ‘의意’를 앞에 두어 ‘의지意志’라 한다. ‘회의會意’는 ‘모일 회會’를 더해 여러 생각을 모으는 것이다. ‘뜻 의意’에 ‘마음 심心’을 한 번 더 덧붙인 ‘억憶’이라는 글자는 통상 ‘기억하다’ 할 때의 ‘생각할 억憶’이 되면서 곱씹어 마음에 박히는 생각이다. ‘뜻 의意’에 ‘맛 미味’가 더해진 ‘의미意味’는 내가 새긴 것이거나 나에게 와서 스스로 새겨진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맛을 음미하듯이 혀끝으로 느끼는 인생의 뜻이고 값어치이다. 마음의 소리는 뜻이 되고, 뜻은 기억을 넘어 의미를 낳는다. 어쩌면 인간은 ‘의미’를 양식으로 삼아 생명을 연장한다.

의미를 찾으려는 욕구가 좌절될 때 인간은 절망한다. 단순한 욕구와 본능의 좌절이 아니고 실존적 공허에 휩싸일 때, 이를 ‘누제닉 노이로제noogenic neurosis’라 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유명한 빅토르 프랭클Viktor Emil Frankl(1905~1997년)의 말이다. 유다인으로서 다른 인간에 의해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속절없이 죽어가던 처절한 상황을 겪고, 이를 회상하면서 빅토르 프랭클은 「로고테라피」라는 독자적인 이론을 정리하는데, 그래도 살아야 했기에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 대신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빅토르 프랭클은 『한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는 있지만, 한 가지 자유는 빼앗아갈 수 없다. 바로 어떠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삶에 대한 태도만큼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더는 상황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도전을 받는다…수용소에서 누군가는 돼지였고 누군가는 성자였다. 돼지가 될 것인지 성자가 될 것인지 하는 것은 수용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결정이었다…』와 같은 체험을 내놓으며 인간 각자가 자기만이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창조가치),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체험가치),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시련에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태도가치) 행복해질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다 한다. 어쩌면 행복은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고 의미를 찾다 보면 덤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세상에는 (물론) 수많은 종류의 언어가 있지만, 의미가 없는 언어는 하나도 없습니다.”(1코린 14,10)

병 병病

‘병 질疾’이라고 하는 글자는 ‘병 병病’이라는 글자와 뜻이 같은 것 같아도 약간 다르게 쓰인다. 병상에서 팔을 늘어뜨리고 기댄 모양을 본뜬 ‘병들어 기댈 녁/역疒’에 ‘화살 시矢’가 들어간 ‘병 질疾’은 화살을 맞아 상처를 입은 사람이 끙끙거리고 있는 모습으로 비교적 가볍거나 전염성이 있는, 그러나 비교적 빠른 쾌유가 가능한 병에 쓰이는 글자이고, ‘병들어 기댈 녁/역疒’에 ‘남녘/셋째 천간 병丙’이 더해진 ‘병 병病’은 좀 더 심각한 병으로 만성적으로 몸져누운 경우를 뜻한다고 한다. 두 글자를 합하여 곧잘 질병疾病이라는 단어를 쓴다. 빨리 달리는 상황을 묘사하는 ‘질주疾走’라는 말에도 ‘병 질疾’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병 질疾’은 ‘병 병病’에 비해 위중하지 않은 것이 사실인 듯하다.

‘병 병病’은 ‘병들어 기댈 녁/역疒’과 ‘남녘 병/셋째 천간 병丙’이라는 글자의 합자이다. ‘남녘 병/셋째 천간 병丙’에 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물고기 꼬리 모양에서 생긴 글자라는 말도 있고, 제사상처럼 물건을 위에 놓고 옮기는 소위 포터 모양의 기물이라고도 한다. 또는 이를 대문이나 입구를 넘어 관문 같은 모양에서 시작하여 멀리 떨어진 곳을 뜻하는 ‘멀 경冂’이라는 글자 안에 ‘불 화火’라는 글자가 들어있는 모양이라고 풀기도 한다. 음을 빌어 ‘셋째 천간天干’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다소 생소한데, ‘천간天干’은 날짜나 하늘을 구분하여 소위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이야기할 때, 쉽게 말해 갑甲, 을乙, 병丙, 정丁… 할 때의 병丙이다.

얼마 전 노래 한 곡을 들었다. 이적(1974년~)이라는 싱어송라이터로 알려진 분이 작사와 작곡을 했다는 ‘꽃병’이다. 노랫말은 『생각나나요. 아주 오래전 그대 내게 줬던 꽃병 흐드러지게 핀 검붉은 장미를 가득 꽃은 꽃병. 우리 맘이 꽃으로 피어난다면 바로 너겠구나. 온종일 턱을 괴고 바라보게 한 그대 닮은 꽃병. 시절은 흘러가고 꽃은 시들어지고 나와 그대가 함께였다는 게 아스라이 흐려져도 어느 모퉁이라도 어느 꽃을 보아도 나의 맘은 깊게 아려오네요. 그대가 준 꽃병. 우리 맘이 꽃으로 피어난다면 바로 너겠구나. 온종일 턱을 괴고 바라보게 한 그대 닮은 꽃병. 시절은 흘러가고 꽃은 시들어지고 나와 그대가 함께였다는 게 아스라이 흐려져도 어느 모퉁이라도 어느 꽃을 보아도 나의 맘은 깊게 아려오네요. 그대가 준 꽃병 생각나나요, 아주 오래전 그대.』이다. 양희은(1952년~)씨가 부른 노래라는데, 나는 이무진(2000년~)이라는 젊은이가 부른 노래로 최근에 곱게, 감명 깊게 들었다.

노래 제목 ‘꽃병’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꽃 甁’이다. 꽃을 꽂는 甁(병 병)이고 ‘꽃 화花’를 쓰는 화병花甁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꽃병 같은 시절이 있다. 이렇게도 찍고 싶고 저렇게도 찍고 싶은 사진 같은 시절이다. 온종일 턱을 괴고 바라보게 한 시절과 함께 시절이 흘러가고 꽃이 시들어진 꽃병을 바라보는 일은 자칫 병病이 된다. 화병花甁을 바라보다 가슴에 멍울이 지는 화병火病이 된다. 그러면 큰일이다.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아야 하고 병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다닐/갈 행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오가는 네거리 길의 형상에서 왔다고 알려지는 ‘다닐/갈 행行’이라는 글자는 ‘행’이나 ‘항’으로 발음한다. 인생길을 가리키는 ‘행로行路’, 사람이 살아간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긴 ‘행장行狀’, 은밀하게 다니는 ‘암행暗行’ 등에서는 ‘행’으로 발음하고, 친족들의 서열인 ‘항렬行列’이나 다른 이의 형제를 높여 부르는 ‘안항雁行’, 군대의 행렬 대오를 가리키는 ‘항오行伍’ 같은 말에서는 ‘항’으로 발음한다. 한편, 서양식 가게인 ‘양행洋行’, 푸줏간을 가리키는 ‘육행肉行’, 약방을 가리키는 ‘약행藥行’. 금은방을 가리키는 ‘금은행金銀行’, 돈 가게인 ‘은행銀行’ 등에서 보는 ‘행行’은 ‘길’이나 ‘가다’라는 뜻이라기보다 가게나 상점, 회사이다.

이렇게 ‘다닐/갈 행行’은 네거리의 모습으로부터 길, 길을 함께 가는 사람들, 사람들이 붐비는 곳, 사람들이 모여 재주를 뽐내는 곳 등과 관련된 내용을 두루 지칭한다. 길 위에 있는 사람의 다리나 발의 형상은 ‘발 족足’이요 ‘발 지止’이다. 그래서 ‘行·足·止’ 이런 글자들이나 글자의 부분이 포함된 한자는 대개 길이나 걷는 동작과 관련된 글자들이면서 사람 발자취요 인간이 걸어가는 삶의 모습이다.

‘길 로路’는 사람의 발(足)이 마침내 다다르는 입구(各=뒤쳐져 올 치夂 + 입 구口)이고, ‘쉬엄쉬엄 갈 착辵’은 ‘조금 걸을 척彳’과 ‘발 지止’가 합쳐져 길(彳)을 가는(止) 모양새이다. 이 글자는 나중에 다른 글자들과 결합할 때 ‘辶’이라는 형태가 되면서 ‘통달할 달達’과 같은 글자를 표시하는데, ‘達’은 원래 ‘큰 대大’와 ‘彳’이 담겨 사람(大)이 다니는(彳) ‘큰길’이 되면서 사통팔달四通八達과 같은 경우에 쓰인다. 여기서 ‘통할 통通’은 속이 텅 빈 종이나 대롱(길 용/대롱 동甬)처럼 곧게 뻗은 길이다. ‘지하수 경巠’이라는 글자를 담은 ‘좁은 길, 소로 경逕’은 작고 좁은 길이다. ‘볼/의심하여 살필 구瞿’라는 글자를 行이라는 글자 가운데에 담으면 ‘갈림길, 네거리 구衢’로서 이쪽저쪽을 살피며 어느 길로 가야 할지를 망설이는 장면이다.

‘곧을 직直’은 사방으로 난 길(彳)에서 눈(目)을 들어 똑바로(뚫을 곤丨) 본다는 뜻이고, 지팡이를 짚은 사람이 길에서 두리번거리며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주저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는 ‘의심할 의疑’는 갈 길을 잃고 머뭇거리면서 의심하는 경우이며, 장애물障碍物과 같은 단어에 쓰는 ‘거리낄 애礙’는 돌(石)에 길이 막혀 갈 곳을 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疑) 모습이다. ‘걸을 지㢟’와 한 획 차이가 있는 ‘끌/늘일 연延’ 등에는 ‘길게 걸을 인廴’과 길(彳)과 발(止)이 담기면서 머나먼 길을 가는 모습을 상징화했으며, 물길(川)을 따라 이동하며 가는(辵) 모습인 ‘돌 순巡’은 시찰이나 경계 따위를 위해 돌아본다는 것이고, ‘돌아올 반返’이나 ‘돌아올 회回’는 모두 가던 길을 되돌아오는 것이다. ‘보낼 송送’은 원래 두 손(두 손으로 받들 공廾)으로 불(火)을 든 모습에 辵(쉬엄쉬엄 갈 착)이 더해져 밤에 횃불을 밝히며 사람을 보내는 모습이다. 이에 비해 ‘거스를 역逆’은 사람을 맞이함을 말했는데, 거꾸로 선 사람(屰·거스를 역)으로 사람이 밖에서 들어옴을 그렸다. ‘돌아올 반返’이나 ‘돌아올 회迴’도 모두 가던 길을 되돌아(反·반, 回·회)옴을 말한다.

‘길 도道’라는 글자는 ‘쉬엄쉬엄 갈 착辶’에 ‘머리 수首’를 더해서 만들어졌다. 동물의 머리처럼 큰 눈(目)과 눈 위 이마에 달린 뿔을 그린 것으로 알려지는 ‘머리 수首’는 머리이므로 우두머리라는 뜻 외에도 자라나고 떨어져 나가고 다시 자라나는 뿔 때문에 ‘길 도道’가 될 때 자연의 순환이자 운행(辵)의 법이요 인간의 길이요 순리라는 뜻까지 더해 철학적 의미를 담는다. ‘길 도道’에 손을 뜻하는 ‘마디 촌寸’을 더하면 이런 길(道)을 가도록 잡아(寸) 이끄는 ‘이끌 도導’이다.

설마 그 뜻을 알까 싶은 아홉 살 어린이 김태연이 최근 부른 ‘바람길’의 ‘끝이 없는 길, 걷다가 울다가 서러워서 웃는다’는 길(신유진 작사), 故 최인호 작가의 ‘길 없는 길’, 그리고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며 말씀과 치유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을 향하여 끝까지 올라가야만 했던 ‘예수님의 길’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생 자체가, 그리고 세상사 자체가 길이듯이 성경은 온통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죽음을 바라보는 나이에 정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고, 애지중지 얻었던 늘그막의 기쁨인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만 했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길, 형 에사우를 피해 도망가다가 하느님의 땅에 이르고 하느님과 밤새 씨름했던 야곱의 길, 사막을 지나다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을 만나 자기 신발을 벗어야 했고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약속의 땅까지 40년을 걸었던 모세의 길, 여왕 이제벨을 피해 도망가다 지쳐 죽기를 청하였으나 천사의 빵을 먹고 호렙산에 이르러 조용하고 부드러운 바람 소리 가운데 하느님을 만난 예언자 엘리야의 길, 하느님의 명령을 피해 도망가다 도망가다 큰 물고기 뱃속에까지 들어갔어도 절대 도망갈 수 없었던 예언자 요나의 길….

별빛 하나에 의지해서 오랫동안 걸어야 했던 동방박사들의 길, 표징을 만나러 사촌 엘리사벳을 찾아 산길을 홀로 걸어야 했던 성모 마리아의 길, 목숨을 걸고 이집트로 피난을 하여야 했으며 매년 예루살렘 순례길에 나서야 했던 성가정의 길, 예수님을 만나 생명을 얻고 용서를 얻으려고 찾아왔던 백인대장과 니코데모의 길, 두려움에 도망치며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보고 걷다가 빵을 나눌 적에야 예수님을 알아보고 돌아갔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길,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반쯤 죽었으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덕에 목숨을 다시 얻었던 어떤 사람의 길, 이른 새벽에 부활하신 주님을 뵙자고 반신반의하며 무덤으로 내달리던 막달레나와 베드로, 그리고 요한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