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칠七

성경의 ‘일곱’을 추적하다가 일곱을 두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일곱의 매력에 빠진다.

기원전 2500년이나 3천 년쯤에 티베트에서 시작하여 히말라야산맥을 가로질러 지금의 파키스탄을 관통하는 인더스 강을 중심으로 인류 고대 문명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이 생겨나고 숫자라는 것들이 생겨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1961년~)는 자신의 잡학사전에서 숫자에 있는 곡선은 사랑을 나타내고 교차점은 선택의 기로를 나타내며 가로줄은 집착을 나타낸다고 풀이하면서 그중 ‘7’은 신의 후보생으로서 하늘에 매여 있음을 나타내는 가로줄이 있고, 아래쪽에는 곡선 대신 세로줄이 있는데, 이는 아래쪽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뜻이라 하고, 유럽 사람들이 이 숫자를 쓸 때 세로줄 한복판에 작은 가로획을 그어 쓰는데, 이때 생기는 교차점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시련을 겪어야 하는 단계를 표현한다는 것이니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세 가지 선으로 7을 풀이한 것은 그럴듯하다.

북반구 사람들의 밤하늘에 언제나 눈에 띄었던 북두칠성, 북두칠성 국자 모양의 끝과 그 전에 있는 별, 두 별의 사이를 똑바로 5배 정도 연장하면 북극성이 있는 자리이고 그 북극성을 바라보는 앞쪽이 북쪽이며 오른쪽이 동쪽이고 왼쪽은 서쪽, 등쪽은 남쪽이다. 북극성은 지구의 자전 축에 가까이 있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내가 올려다본 그 각이 그 지점의 위도이므로 길을 잃어도 언제 어디서나 찾아갈 수 있다고 했던 별이다. 북극성과 함께 북두칠성으로 일곱을 배웠고,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행성 순서를 ‘수금지화목토천해명’으로 부지런히 외워 육안으로 관측이 가능한 별은 일곱이라면서 일곱을 또 기억했다.(맨 나중의 ‘천해명-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은 18세기 이후 망원경이 발명되면서 발견된 별이고, 명왕성은 2005년부터 자기보다 더 큰 행성인 에리스에게 자리를 내주면서 둘 다 태양계에서 제외되어 왜소행성으로 분류되었다.)

그렇게 배운 일곱이라는 숫자는 오묘하고 신묘하다. 한 사람의 신원을 결정하는 얼굴이 일곱 개의 구멍으로 그 사람을 형성하고,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땅의 모든 것도 일곱으로 묶어 이해하려고 했다.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인 칠정七情(희喜‧노怒‧애哀‧락樂‧오惡‧욕欲‧애愛)으로부터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풀어보려는 시도까지(참조. 임석재, 일곱 번의 위기와 일곱 개의 자연-생태건축, 인물과 사상사, 2011년), 일곱은 거의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아우른다. 정육면체 주사위에서 마주 보는 면의 합은 7이고, 포유류의 목뼈가 일곱이며, 서양 음계도 일곱이고, 일주일도 일곱 날이며, 독일의 동화 <백설공주>에서 난쟁이도 일곱이고, 슬롯머신에서 잭폿이 터질 때도 숫자 7이 겹칠 때이며, 사서삼경의 <맹자孟子>도 7편이고, 인생에서 인간이 맞을 수 있는 최대의 복을 ‘일곱 개의 복(칠복七福)’이라 하며, 부처님께서도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깨우침을 설파하셨다 했고, 무지개의 색깔도 일곱이다.

‘일곱’을 두고 생명의 생성과 변화를 나타내는 시간의 주기로 풀어보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7이라는 주기가 여성과 깊이 관련되었다고 보아서 14살(2×7)에 초경이 시작되어 여성으로 거듭나며 49살(7×7)에 폐경이 된다고 보았는데, 이는 음의 원리를 지닌 달과 여성이 7의 4배수로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으니, 달이 보름달에서 이레 동안 일그러졌다가 다시 이레 동안 채워지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달의 주기와 여성의 생리주기가 일치하기 때문이었다.

혹자는 생김새를 두고 남녀 성기의 결합인 것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원래 한자로 ‘일곱’을 나타내는 ‘七’은 무엇인가에 칼집을 내는 상황을 ‘열 십十’ 같은 모양으로 그리다가 ‘열 십十’과 구별하기 위해 현재의 모습처럼 세로축의 끝을 구부려 만든 글자로 보는 것이 일반이다. 칼로 무엇을 내려치는 원뜻대로 ‘끊다’ ‘베다’ 혹은 ‘자르다’라는 뜻을 담아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고 하지만, 서양의 “일곱”은 흔히 ‘럭키 세븐lucky seven’이라 한다. 1을 7로 나누면 ‘142857’이라는 6개의 숫자로 된 순환마디가 끝없이 반복된다. 그래서 7에서 시작한 142857까지도 ‘이상한 수’ ‘신비의 수’ ‘신이 만든 숫자’ ‘놀라운 수’라는 이름으로 화제가 되기도 한다. 이 수에 2나 3, 4, 5, 6을 곱하면 원래 이 수를 구성하는 6개의 숫자가 자리만 바뀔 뿐 그대로 존재한다. 142857을 둘씩 끊어서 더하면 99(14+28+57=99)가 되고, 3자리씩 둘로 끊어서 더해도 999(142+857=999)라는 값이 된다. 그리고 142857에 7을 곱하면 999999(=142857+857142)가 된다. 142857을 제곱하면 ‘20408122449’라는 수가 나오는데, 이를 둘로 끊어서 더하면 원래의 수가 나온다. 즉 20408+122449=142857이다. 그 외에도 7과 142857의 사연은 계속 이어진다. 사실 이런 얘기들은 유한소수와 무한소수의 구별, 그리고 순환마디가 반복되는 순환소수의 법칙, 신기한 숫자들의 놀이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상징하는 3과(3은 신성수神聖數라고 하는데, 최초의 양수인 1과 최초의 음수인 2가 결합하여 생겨난 변화수로서 음양의 조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수이기 때문이다. 3은 짝수인 2처럼 둘로 갈라지지 않고 원수原數인 1의 신성함을 파괴하지 않은 채 변화하여 ‘완성된 하나’라는 상징을 지닌 수이다. 3에는 세상을 이루는 천‧지‧인이 담겼고, 시간의 과거‧현재‧미래가 모두 담겼다) 땅의 동서남북 사방四方을 상징하는 4가 더해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수, 우주의 수, 전체와 완전을 가리키는 수, 신비한 수, 마력이 깃든 수, 7보다 작은 어떤 수도 7을 나눌 수 없으므로 손상되지 않는 처녀 수, 자연이 기뻐하는 수, 십계명의 10과 성령칠은의 7을 합한 17이라는 수를 1부터 17까지 차례로 더했을 때 나오는 153이 되게 하는 수(참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일곱 제자와 만나실 때 그들이 잡도록 허락하신 물고기 수, 참조. 요한 21,11), 최후의 심판을 상징하는 일곱 봉인의 수(참조. 묵시 5장), 가장 완벽하고 거룩한 수, 신전의 일곱 계단과 일곱 문으로 표현되는 수, 십자가 위 예수님의 일곱 번의 말씀을 담은 수(조세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년-은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가상칠언”을 관현악곡, 현악 4중주곡, 오라토리오 편성으로 1786, 1787, 1796년에 각각 작곡), 7일을 3번 거듭하는 삼칠일(3‧7일)에 어미 닭이 품은 달걀이 병아리가 되고 굴 속에 있던 곰이 마침내 사람이 된 수(곰이 100일 만에 사람이 되었는지, 21일 만에 사람이 되었는지는 또 다른 논제이다), 끝이 없는 수…‘일곱’이다.

추할 추醜

어릿광대, 혹은 광대를 한자漢字로 뭐라 하는지 찾아보니 ‘소추小丑’라고 한다고 한다. 어리광을 연상하게 하는 ‘작을 소小’는 그럴듯하지만 ‘추할 추丑’가 그 말에 들어가 있는 것은 다소 의외였다. ‘丑’라는 글자는 ‘추할 추醜’를 간략하게 고친 간체자이다. 광대의 모습과 얼굴은 추하다기보다 슬프다는 생각이 앞섰는데 그래도 그 글자의 내력을 쫓다 보면 광대를 묘사하느라 그 글자를 사용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추할 추醜’는 술병을 형상화한 ‘닭 유酉’라는 글자(소리부)와 도깨비나 혼백魂魄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귀신 귀鬼’라는 글자(의미부)의 결합이다. ‘鬼’라는 글자는 무릎 꿇고 앉은 사람 위에 ‘밭 전田’이 올라가 있는 가분수假分數같은 모습으로서 뭔가 얼굴에 가면 같은 것을 쓰고 있는 모습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옛날 곰 가죽에 눈이 넷 달린 커다란 쇠 가면을 덮어쓴 방상시方相氏의 모습처럼 역병이나 재앙이 들었을 때 이를 몰아내는 사람의 모습에서 형상을 가져왔다.(하영삼, 한자 뿌리 읽기, 291회, 동아일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다. 『방상시方相氏는 중국의 신神으로, 곰의 가죽을 두르고 황금사목黃金四目의 가면을 착용하며 손에는 창과 방패를 든 형상을 말한다.…그 뜻은 ‘제멋대로인 얼굴을 한 사람’이며…무당으로 불리지는 않았지만…귀신을 쫓는 무당의 모습과 같다.(한국민속대백과사전)』

‘추할 추醜’는 추문醜聞, 추태醜態, 추행醜行과 같은 단어들에서 쓰인다. 얼핏 ‘추파’도 같은 글자를 쓸 것 같지만, 이때는 잔잔하게 햇빛에 반짝이며 예쁜 가을의 물결 ‘추파秋波’라고 쓴다. ‘추할 추醜’는 술병이 옆에 있어서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 가면을 쓴 모습, 귀신 같은 모습을 두루 담았다. 그래서 ‘못 생기다’나 ‘밉다’와 같이 용모가 아름답지 못한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광대라는 말은 원래의 이런 모습에서 진화하여 오늘날 익살과 우스꽝스러운 모습까지 담아 통용된다. 그러나 서양말은 재미있는 재능꾼인 클라운clown과 애처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삐에로pierrot를 구분하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 가면극이나 인형극, 줄타기나 판소리, 땅재주 등에서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던 직업적인 예능인을 광대라고 하면서 廣大로 표기했던 것은 한자 말이 아니라 한자에서 발음을 빌려와 그렇게 썼을 뿐이다.(국립국어원)

『이 세상을 한 판의 서커스 마당이라고 할 때 이 서커스 장에는 스타들도 있고 광대들도 있다. 이 서커스 판에서 중심은 당연히 명연기로 박수갈채를 받아내는 스타들임이 틀림없다. 반면에 광대들은 무대의 중심에 있지는 않다. 그들은 스타들 사이에 막간을 통해 등장하고 실수와 떠듬거리는 말 짓, 몸짓으로 우리를 몇 번이고 웃게 만들어 준다. 광대들은 스타들의 명연기 때문에 손에 땀을 쥐며 생겼던 긴장을 풀어 준다. 우리는 광대들을 만날 때 감탄이 아닌 공감으로, 놀라움이 아닌 이해로, 그리고 긴장이 아닌 웃음과 미소로 만난다.

사람들은 한때 저마다 스타가 되려는 열망을 가져 이를 시도하고 또 그 꿈을 가끔 이루기도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부분 삶은 스타와 광대로 나누어 볼 때 광대 쪽에 남는다. 스타이건 광대이건 한 살이라도 나이를 더 먹어가면서는 서로서로 공감, 이해, 웃음, 미소로 만나기를 희망하며 사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한때 자기 분야에서 나름대로 이름 날리는 스타였기에 스타였던 시절을 회상하며 산다고 하더라도 이는 자칫하면 우울증의 실마리가 될 뿐이다. 책으로 치자면 앞표지였던 시절보다 뒤표지에 가까워지는 나이, 내용 없는 기호에 불과한 듯한 일상의 날, 고상한 기품보다는 자칫 추해지기 쉬운 때에 원래 인생이 그런 쪽임을 알려주는 광대를 생각하면 혼자서도 웃을 수 있다.

광대는 인간사의 수많은 염려와 걱정, 긴장과 불안에 웃음과 미소를 요구하고 결국은 우리 모두 역시 광대라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광대가 광대를 발견한다. 세상에는 아름답고 유쾌한 광대들이 참 많다. 눈물로써 미소를 감추고 미소로써 눈물을 감추어야만 하는 광대들, 광대들은 종국에 민낯일 것을 빤히 알면서도 땀으로 범벅이 되거나 눈물이 나서 일그러지고 옅어지고 벗겨진 얼굴 위의 하얀 광대 칠을 굳이 벗겨내거나 지우려 애쓰지 말고 오히려 덧칠해야 한다면서 나를 부추긴다.(참조. 김건중, 어릿광대)』

다칠 상傷, 근심할 상慯

‘다칠 상傷’은 몸에 난 상처를, 그리고 ‘근심할 상慯’은 ‘마음 심忄’을 옆에 붙여 마음에 난 상처를 일컫는다. ‘상처’나 ‘다치다’라는 뜻을 표현하는 ‘다칠 상傷’이라는 글자를 풀어헤치면 ‘사람 인人’ 더하기 ‘화살 시矢’ 더하기 ‘볕 양昜’이다. ‘傷’의 오른쪽 위에 있는 모양새는 화살을 뜻하는 ‘矢’가 변형된 것이다. ‘쉬울 이’라고도 읽는 ‘볕 양昜’이라는 글자는 제단 위를 비추는 태양(日)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뜨거운 ‘볕’이나 ‘양지’라는 뜻이 있다. 대개는 ‘언덕 부阜’를 붙여 ‘볕 양陽’으로 쓴다. 그러니까, ‘다칠 상傷’은 화살에 맞아 다치고 열나서 뜨겁고 고통으로 화끈거리는 부위가 있는 사람이다. 화살에 맞아 다친 때 말고 칼에 맞아 다친 경우를 두고는 ‘칼 도刀’에 양쪽으로 피가 묻어 있는 형상을 그린 ‘다칠 창刅’이라는 글자를 쓴다. ‘다칠 창刅’을 ‘비롯할 창’이라고도 하는데, ‘창創’이라는 글자와 뜻이나 의미가 같다. ‘創’은 ‘곳집 창倉’과 ‘칼 도刀’의 결합이니 칼이나 연장을 사용하여 사냥해 온 동물 등을 놓아두는 창고라는 뜻으로부터 시작했다. ‘비롯하다’라는 뜻은 ‘처음 펴내다’ 할 때 ‘창간創刊’이라 하듯이 말 그대로 어떤 일에 ‘칼을 대다’라는 뜻이다.

사람은 살면서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어 앓는다. 죽어도 상처를 입지 않겠다고 아무리 다짐해도 그러다가는 자기가 만든 감옥에 갇히는 상처를 입는다. 내 주위를 내가 맴돌기만 하다가는 내가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결코 치유자일 수 없는 누군가의 시선에 내가 너무 의존하기만 하다가는 그 누군가가 마음대로 하도록 나를 너무 내주어서 나에게 상처를 입힌다. 결국 그런 상처는 그 사람이 내게 주는 상처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에게 덧씌운 굴레가 나에게 상처를 낸 것이다. 많은 경우에 상처를 치유한다고 애쓰면서 내가 나를 더욱 고립시키고, 아물지 않을 나의 상처를 침묵 속에서 핥기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인생에서 입은 상처는 대일밴드 하나로, 반창고 한쪽으로 가릴 수 없는 상처이게 마련이다. 내가 상처 입은 나를 보면서 짓는 웃음, 누군가가 다가오면서 짓는 웃음마저도 그 웃음에 묘한 자조와 조롱의 상처가 담겨 있을 때가 많다. 누군가가 미워질 때는 아마도 그가 나 모르는 사이에 나의 상처 부위를 찾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상처를 얘기하며 징징대고 상처 입은 눈으로 상처만을 보고 있으면 희망이 없고 장래가 암담하다.

현자가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다”(코헬 3,7)고 말해도 한번 찢어지고 벌어진 상처는 나의 분노가 드나드는 문이 되고, 볼 때마다 더욱 아리면서 좀체 아물지 않는다. 이럴 때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주문呪文을 담은 깊은 원망의 눈물이다. 상처는 부대끼며 ‘함께 산다’는 표시여서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살 때 생긴다. 인간끼리 상처를 낫게 하고자 하는 시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치유가 아니라 상처에 향유를 붓고 연고를 바르는 일이며 싸매는 일일 뿐이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도 아프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나만의 상처는 더욱 아프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상처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상처를 또 보게 한다. 아파도 사랑이면 괜찮다고 아무리 말해도 인생은 부질없어서, 인간은 항상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입히고 마는 존재여서, 사랑을 꿈꾸다가 그 사랑으로 상처를 입는다.

어쩌면 인간의 상처는 인간이 결코 가질 수 없고, 가질 수 있다고 해도 전혀 쉽지 않은 용서라는 천상의 명약으로만 치유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상처의 치유를 위한 인간의 노력은 상처와 반대되는 것만을 보고, 그것만을 얘기하려는 부단한 노력일 뿐이다.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1802~1885년)는 <레 미제라블>에서 『땅을 갈고 파헤치면 모든 땅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피우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라고 했다. 아름다운 꽃이 훗날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씨앗이나 열매가 더 먼 미래의 것이라면, 지금 나의 상처는 과거와 미래 사이 어딘가에서 훗날 누군가를 위해 진주를 영그는 과정일 뿐이다. 상처의 아픔은 그저 경고이고 생명으로 나아가라는 신호이며 아픔 다루기의 수련이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오직 치유를 위해서만 상처를 입히시고, 오직 생명을 위해서만 내리치신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말씀하시며 당신의 상처를 내어놓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자기의 상처로 들어와 나으라며 상처를 내보이신다. 예수님의 상처는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암시이고 비밀이다. 지상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마지막 기적들이 베드로가 휘두른 칼에 상처 입은 이의 치유였으며(루카 22,51), 십자가 위에서 자기 손에 상처를 내며 못을 박는 이들을 위한 기도(루카 23,34)였고, 함께 매달린 상처 입은 죄수 하나를 낙원에 들이신다는 선언(루카 23,43)이었으며, 만신창이 인간의 상처를 안고 영을 온전히 아버지께 맡기신다는 외침(루카 23,46)이었다. 본래부터 상처 난 인간은 그 무엇도 제힘으로 할 것이 없고, 예수님은 그저 자비하신 분이시니, 불쌍한 인간이 고쳐지기를, 내게도 어느 날 ‘다 나았다!’라고 큰소리로 선언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집 가家

‘집 가家’라는 글자는 지붕을 본뜬 ‘집 면宀’이라는 글자와 꿀꿀거리는 돼지를 세로 모습으로 그려 만든 ‘돼지 시豕’라는 글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집 안에 돼지를 함께 길러 식구처럼 살았던 중국의 집 구조나 과거 관습 때문에 생긴 글자이건, 한 집에 우글거리며 돼지처럼 함께 산다는 뜻을 담았건, ‘집 가家’는 아주 단순하게 말해 한 지붕 밑에서 살을 맞대고 살았거나 사는 가족을 가리킨다.

6남매 간의 가족 카톡방에 80도 한참 넘어 90을 바라보시는 나이인 1번인 누나가 추석 명절을 맞아 남매간에 추석을 잘 맞으라는 이모티콘 하나를 올리셨다. 문득 ‘가족’이 도대체 무엇이고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 앞서 한참 답을 올리지 못하다가 그래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일단 ‘가족 모두에게 기쁜 명절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고 올린다.

가족이란 이런 명절에 으레 남들이 하는 이모티콘이나 이미지 하나를 복사해서 안부를 묻는 것일까, 전화나 문자로 생각날 때 소식을 주고받는 것일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가끔 생각나고 서로 그립다는 느낌일까, 먼저 간 이들을 두고 뒤에 남은 이들이 울며불며 아웅다웅 함께 살았던 과거의 한때를 회상하는 것일까, 힘든 중에라도 누군가를 살게 하고 희생하게 하는 원동력일까, 외로움이 엄습할 때 생각나 먹먹해지는 가슴일까, 결국 인생은 혼자여서 외롭다가 마음속 괜한 원망으로 미워할 수라도 있는 대상일까, 한 어머니요 한 아버지로부터 같은 DNA를 물려받았다는 생각으로 체념하는 운명이요 숙명일까, 제도요 윤리이며 관습일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가족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무엇으로 서로를 가족이라 하는 것일까, 온갖 비난이나 수고를 감수하더라도 지켜내야만 한다는 강박일까, 수천수만 리 길을 달려서라도 만나야만 하는 인연일까, 나를 나답게 하는 배경일까, 서로 힘을 합쳐 지어야만 하는 집일까, 우주를 이루는 기본 세포일까?

살아남아 있는 가족 간은 내가 지금, 이 순간 응급실로 실려 간다고 할 때 가장 먼저 전화라도 할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일까? 그것도 멀리 떨어진 타국에서는 불가능할 터이니 나 같은 사제에게는 우선 여기 가까이 있어 내가 전화할 수도 있는 본당 신자들일까? 아니다. 한 이불 밑에는 아니더라도, 코를 골고 냄새나는 것이 지긋지긋해서 따로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더라도, 억지로라도 한 방에 자면서 위급할 때 나를 병원에 연락해주고 병원에 데려갈 배필配匹이요 인생의 반려伴侶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가족은 지금 한 지붕 밑에서 살며 서원誓願으로 연결된 형제들이겠지만, 나에게는 아마 그것도 아닐지 모른다. 수도자는 서로 독방을 쓰는 처지이니 설령 내 방에 있으면서 심장마비라도 오면 나 혼자 말도 못 하고 그저 손톱으로 마룻바닥을 긁으며 앓다가 죽고 말 것이니 말이다. 가족은 과연 무엇일까? 병원에 누워있을 때 남들보다는 더 자주, 한 번이라도 더 찾아 오갈 수 있는 사이일까, 먼저 간 이들의 무덤가에서 어쩌다가 드리는 묵주기도일까, 명절이면 같이 밥 먹는 식구일까? 생각이 많다. 너무 어린 나이에 출가出家하여 이제 와 새삼스러운 나의 사고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가족을 별로 얘기하지 않으셨다. 언젠가 가족들이 찾아왔다고 했을 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으며,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고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8-50) 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이요 당신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가족이라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가족보다 “이웃”과 타인을 더 많이 강조하셨다.

어쩌면 가족은 순전히 현재의 나만을 고려한 이기적인 발상에서 볼 때, 나와 한 공간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고, 내가 급할 때 전화라도 할 수 있는 이웃이며, 가까이 있어 달려와 나를 병원에라도 데려갈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렇지만, 『아마도 가족이란 안식처요 피난처, 안식과 따스함을 주려고 있는 것, 마음의 고향, 나를 불러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를 더 보여주는 것, 내가 어찌할 바 모를 때 나를 일깨워주는 기억, 누군가에게는 강철과도 같이 강한 것, 누군가에게는 삶의 한 방식, 누군가에게는 느낌, 어떤 이에게는 잡아야 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놓아야 하는 것, 전부이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 갈등과 고통으로 가득한 바다, 추운 바깥에 비겨 실내의 따뜻한 난로, 비 오는 날의 천둥, 내 기억의 모든 것, 아마도 어쩌면 사랑이다.(존 덴버John Denver가 1975년에 발표한 Rocky Mountain Christmas에 수록된 ‘Perhaps Love’라는 노래를 참조하여 서술함)』

암 암癌

‘암 암癌’이라는 글자는 사람이 병상에 기대어 드러누운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 ‘기댈 녁/역疒’이라고도 하고 ‘병질 엄疒’이라고도 하는 글자와 소릿값인 ‘바위 암嵒’이 더하여 이루어진 글자이다. ‘뫼 산山’을 위에 놓거나 아래에 놓아 만들어진 글자 ‘바위 암嵒’은 ‘바위 암嵓’과 뜻과 음이 같은 글자로서 생긴 모양 그대로 산 위나 산 아래에 있는 바윗덩어리들을 묘사했다. 그러고 보면 ‘바위 암岩’은 산 아래에 아예 직설적으로 ‘돌 석石’을 놓아 생긴 글자이다. 이렇든 저렇든 ‘암 암癌’은 사람 몸의 어딘가에 돌과 같은 덩어리가 덧붙여지게 된 상황이다.(참조. 김건중, ‘입 구口’, www.benjikim.com)

‘암’을 영어로 ‘cancer’라고 하는데, 그 연유를 찾아보니 저 유명한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BC 460~370년)가 종양의 형태를 묘사할 때 사용했던 ‘카르키노스καρκίνους’나 ‘카르키노마καρκίνωμα’라는 말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2천 년도 훨씬 더 넘는 세월 전에 그리스의 한 의사가 유방절제 수술을 하다가 악성 세포들의 말단 부분이 건강한 조직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현상을 발견하면서 게의 집게발을 연상하고 이런 악성 종양들을 그리스어로 “게”를 뜻하는 “카르키노마(karkinoma)”라고 명명했다고도 한다. 실제 ‘카르키노스’는 헤라클레스의 발뒤꿈치를 물었다가 밟혀 죽은 큰 게 모양의 그리스 신화 속 주인공이기도 하다니 예기치 않게 사람을 물어 병나게 하고 부풀어 오르게 하며 상처 나게 하는 못된 ‘암’의 이름으로는 제격이지 싶다. 하늘의 별자리인 ‘게자리’를 ‘Cancer Constellation’이라고 부를 때 영어 단어 ‘cancer’가 들어있는 것을 보면 이 모든 연관이 그럴듯하다. 그러니까 희랍어가 라틴어로 옮겨지면서 카르키노스는 ‘cancer’가 되었다.

양쪽 집게발을 지닌 게(카르키노스)의 사연은 이렇다. 제우스의 아내였던 헤라가 제우스의 외도로 태어난 헤라클레스에게 12가지의 어려운 과제를 냈고, 헤라클래스가 그것을 해결하려다가 머리가 아홉 개 달린 괴물 히드라의 목을 쳐내도 쳐내도 다시 두 개씩 생겨나므로 힘든 싸움을 하던 와중에 헤라가 히드라의 원군으로 보냈던 카르키노스가 헤라클래스의 발을 무는 데는 성공했으나 결국 그에게 밟혀 죽었으므로 이를 불쌍히 여겨 헤라가 하늘의 별자리가 되게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게자리는 어두운 별들로만 되어 잘 보이지도 않아 쓸쓸하게 남았다.

거의 매일, 아니 적어도 1주일에 한두 번은 만나는 나보다 한 두어 살 적은 친한 친구 신부님이 갑자기 암 선고를 받았다. 그 말을 들은 날 밤엔 밤새워 뒤척였다. 무섭고 겁나며 안쓰럽고 남 일 같지 않으며 두려워서였다. 어느 정도의 상황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암’이라는 한 글자 단어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위축되게 하는 것을 보면 암의 위력은 대단하다. 문득 잊고 살았던 나의 나이와 함께 나에게도 닥쳐올지 모른다는 육체적 암의 개연성은 암과 같은 아집과 사악한 욕망이라는 영혼의 암 덩어리들을 제거해주시도록 청하는 평상시 일상의 기도마저 머나먼 딴 나라의 일인 것처럼 일거에 나를 압도한다. 암담하다. 인간은 암담할수록 주님 안에 더욱 희망을 품게 된다는 말조차도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나도 서둘러 건강검진을 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인다. 이럴 때 인간은 무력을 느끼며 은총을 기도할 수밖에 없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신부님께 좀 더 건강한 삶을 허락해주시도록 청한다.

신부님께 뭔가 용기와 힘, 위로의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생각한다. 그런데 막막하다.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네며 살았다는 30년도 훨씬 더 넘는 사제의 생활이 고작 이런 것일까 싶어 부끄럽고 공허하다. 신부님과 밥을 먹으러 자주 가는 단골 식당이라 봉사하시는 아주머님께 누군가에게 용기와 힘, 위로의 말을 해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여쭤보았더니 ‘모든 게 잘 되어갈 것’이라 말해 달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그대가 하는 일이 모두 다 잘 되어 나가기를 빕니다. 또 그대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육신도 건강하기를 빕니다.”(3요한 1,2)라는 말씀을 몇 번이고 되뇐다. 히포크라테스가 『음식으로 못 고치는 병은 약으로도 못 고친다.(Leave your drugs in the chemist’s pot if you can cure the patient with food.)』라고 했다 한다. 2천 5백여 년 전 히포크라테스가 과연 그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신부님과 맛있는 것, 건강한 음식을 더 자주 먹어야겠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일상의 기쁨과 웃음이라는 선물을 더 자주 나눠야겠다.

성낼 분憤‧忿

‘분노’라는 말을 한자어로 찾으면 ‘성낼 분憤’을 써서 ‘분노憤怒’라고 하거나 같은 뜻을 가진 ‘분忿’이라는 글자를 써서 ‘분노忿怒’라고 쓴다. ‘분憤’이나 ‘분忿’은 전혀 다른 글자이지만, 뜻이 같으므로 서로 통용이 되는 ‘통자通字’이다. 우리말 사전에서도 ‘분노’를 검색하면 憤怒·忿怒라는 한자어를 나란히 기록해준다. ‘분노’는 속에서 화증火症이 치밀어오르는 것이고, 심하면 머리끝까지 끓어오르므로 비틀려 질질 나오듯 어느 순간 자아낼 수밖에 없고, 참다못해 버럭 성을 내며, 숨을 씩씩거리고 삭인다.

‘성낼 분憤’이라는 글자는 ‘마음 심心’자와 ‘클 분賁’이라는 글자가 결합하여 마음에 응어리진 것이 크게 분출하는 상황인데, ‘賁’이라는 글자는 커다란 북을 형상화하였다고 알려진다. 예전에 전쟁을 치르기 전에 북소리를 울려 병사들의 사기士氣를 극도로 끓어오르게 하는 상황을 뜻하는 ‘賁’자에 ‘心’자를 결합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마음 심心=忄, 㣺’과 소릿값인 ‘분分’을 합하여 만들어진 ‘성낼 분忿’은 그려진 모습이 훨씬 단순하다.

‘성낼 분憤‧忿’ 두 글자는 모두 ‘마음 심心’을 바탕으로 생겨난 글자이니 ‘분노’는 분명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누군가로부터 나 자신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거나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오해받는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누군가가 내 말이나 행동‧태도를 부분적으로 잘라서 이용한다고 생각하면 속상하다. 하지만, 삐져서 속앓이하다 간혹 앙심이 되는 것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마음에 품다가, 말로 표현하다가, 가혹한 비난과 비판의 행동으로까지 3단계로 표출된다.』 했던 ‘욱’하거나 ‘버럭’으로 터져 나오는 속상함도 세월이 가면서 무디어지다 못해 보이지 않게 미미해지고, 그것마저 횟수나 발생 주기가 뜸해지고 무디어지는 것을 보면, 그리고 나의 의사를 기껏해야 30% 정도나 묘사하고 살아야 하는 외국 생활에서는 체념 쪽으로 기우는 듯하기도 하다. 어느새 나와 나 자신의 의견이나 태도를 분리하는 법을 익힌 것이거나 처세나 요령이 늘었기 때문일까?

현대 사회는 우발적 범죄가 횡행하고 ‘분노 사회’가 된 지 오래며, ‘분노조절장애’라는 말이 흔한 말이 되면서 사람들은 그런 말 뒤에 숨어 분노를 처리한다. 분노의 다른 이름들인 화, 격분, 흥분, 충돌, 노여움, 울분, 분개, 분통, 짜증, 부아는 흔히 큰 소리나 불평불만, 욕설, 폭행이 되어서 타인을 파괴하기 위한 무질서로 표출될 때 주로 내가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대상에게로 향한다. 그러지 않을 때는 뒤에서 수동적 공격성인 은근한 어깃장이나 냉소가 되거나, 자학으로 자신을 못살게 굴기도 하면서 마침내 나를 해치고 타인을 해치는 죄가 된다. 그리고 내가 알든 모르든 큰 수치심을 동반한다.

분노는 가끔 음욕과 결합하든지 먹고 마시는 것과 결합하여 대체물을 통한 병적인 증상으로 나타나든지, 미적거림으로 변신해서 최선이 아닌 차선에 안주하게도 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오래 내재하여 만성적 분노로 자리 잡을 때가 있다. 누구나 분노가 없을 수는 없어서 살아 있는 것의 분출이라고도 하지만, 개인의 분노는 결국 폭력 사회를 조장한다. 물론 분노는 그 누구도 이뤄내지 못하는 예술의 경지를 이뤄내는 창조적 에너지와 자기방어를 위한 힘이 되어 생존의 동력이 되기도 하고, 공분公憤은 사회운동이 되어서 사회를 바꾸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 분노는 아예 병이 되고 장애가 된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걸 정도로 예기치 않게 파괴적 행위나 짜증으로 터져 나오는 간헐적 폭발 장애인 분노조절 장애가 있고, 누군가에게 당한 충격과 억울함이 굳어져 지속적 분노가 되고 예민해지거나 반대로 무관심해져서 일종의 불안 장애가 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도 있으며,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처럼 변덕스럽고 극단적이며 충동적인 경계성 인격 장애, 사이코패스가 되어 타인을 해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반 사회성 인격 장애로 나타난다. 심지어 신경계통을 손상하여 우울한 기분과 불면증, 식욕부진, 불안과 비관, 짜증, 감정기복 등의 증상을 계속 동반하면서 약을 먹게도 한다.(참조. 김인호, 그리스도인의 분노 다스리기, 경향잡지, 2018년 7월호, 17-19쪽)』

번지樊遲라는 제자가 공자님께 덕을 높이고 나쁜 마음을 닦아내며 미혹을 분별하고자 하면 어찌해야겠느냐고 여쭌다. 공자님께서는 물음 자체가 좋다 하시며 일은 먼저하고 대가는 뒤로하는 것이 덕을 높이는 것이고, 자신의 나쁜 점은 다스리고 타인의 나쁜 점은 공격하지 않는 것이 사특함을 다스리는 것이며, 한때의 분노로 자신을 잊고 부모에게까지 화가 미치도록 하는 것이 미혹됨이 아니겠는가 하셨다.(논어論語, 안연편顏淵編, 21)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식자들은 분노의 뿌리가 나를 지키려는 이기利己에 닿아있어서 어느 순간 타인을 향하여 뻗칠 때 한순간으로 모든 것을 망치게 되고 심지어 가까운 이들까지 피해를 보게 하니 자제와 인내라는 훈련으로, 그리고 이성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분노를 다스린다 하고, ‘식분熄忿(꺼질 식)’이라 하며, 『타오르는 불과 같으니, 참음으로써 꺼야 한다고 하고, 참으면 없어지고 고요하면 물러난다(忍則去, 靜則却) 한다.(빤또하, 칠극七克, 일조각, 1998년, 200쪽)』 곰곰이 그 뿌리와 원인이 무엇인지 헤아리고, 목구멍을 넘어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하며, 내가 나를 상하게 하고 있음을 간파해야 하는 것이 분노이다.

바오로 사도는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에페 4,26) 하고, 오래전 현자는 “분노에 더딘 이는 매우 슬기로운 사람이지만 성을 잘 내는 자는 제 미련함만 드러낸다.”(잠언 14,29) 한다.

매미 선蟬

숲길을 가는데 갑자기 몇 걸음 앞서 길바닥에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매미 한 마리가 막 허물을 벗고 나오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매미를 벌 같은 다른 곤충이 공격했나 싶어 유심히 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매미는 거푸집을 끌고 서둘러 응달의 숲으로 몸을 피한다. ‘한사코 옆에 붙어 뜨겁게 우는 사랑’ 같은 매미(참조. 안도현, 매미)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뜨겁도록 쨍쨍하게 햇볕이 내리쬐는 중에 시끄럽도록 떼거리로 울어대야 매미는 매미답다. 요란한 매미의 울음이 햇볕의 뜨거움을 더하는 중에 의외로 사람의 마음은 차분해지고 주변은 한가하다. 매미 소리는 나 홀로 이유도 없이 어딘가에 뚝 떨어져 멀리 와 있다는 착각 속에서 문득 나를 돌아보게 한다.

‘매미 선蟬’이라는 글자는 뜻을 나타내는 ‘벌레 충虫’과 소릿값인 ‘홑 단/오랑캐 이름 선單’이라는 글자로 이루어졌고, 매미울음은 ‘선성蟬聲’이라 한다. 매미를 두고 중국 진晉나라 때 육운陸雲(232~303년)이 다섯 가지 덕이 있다 하였다더니 정말 그런가? 그의 <한선부寒蟬賦>에서 지극한 덕을 갖춘 지덕지충至德之蟲인 매미는 머리에 선비의 관대冠帶(갓과 허리띠)를 상징하는 모습이 있어 문덕文德이 있고, 이슬을 먹고 사니(실제로는 수액이나 식물의 즙과 같은 것을 먹는다) 맑은 청덕淸德이 있으며, 곡식을 먹지 않으니 청렴의 염덕廉德이 있고, 둥지를 만들지 않으니 검소함의 검덕儉德이 있으며, 반드시 절기를 맞추어 우니 신덕信德이 있다고 했다 한다. 이렇게 매미가 갖춘 문(文), 청(淸), 염(廉), 검(儉), 신(信) 다섯 덕목을 본받으려 임금도 매미의 양 날개를 위로 향하게 형상화한 익선관翼蟬冠을 머리에 썼고, 조정의 신하들도 매미의 양 날개를 옆으로 향하게 한 관모官帽를 썼다 하였다.

자기 소리에 가장 잘 맞는 소리를 가늠하는 암컷을 위해 수컷만이 운다는 매미, 작게는 3년부터 많게는 17년 홀수 해로만 기다려 유충 생활을 마치고 세상에 나와 짧게 살다 간다는 매미, 지구상에 무려 3천 종이나 존재한다는 매미, 동시에 큰 무리를 지어 세상에 나와야만 그나마 다음 세대를 위해 후손을 남긴다는 매미, 주파수가 맞지 않은 엉터리 라디오 소리 같은 소리를 넘어 이제는 진공청소기의 소음이고 밤중에 쇠를 깎는 것 같은 소리를 낸다는 매미, 새들과 거미와 사마귀를 천적으로 둔다는 매미, 땅이 큰 미국에서는 주기매미(Periodical cicadas)라는 이름으로 1에이커(약 4047㎡)당 최대 150만 마리까지 나타날 수 있다는 매미…, 아스라한 우리나라에서도 지금 장마를 넘어 막바지 여름 매미의 계절이 오고 있을 것이다.

홀로 독獨

‘홀로 독獨’이라는 글자는 ‘혼자’나 ‘홀로’라는 뜻을 지닌 글자이다. 이 글자를 순서대로 펼쳐서 큰 개나 사슴을 가리키는 ‘개 견犭’ + ‘눈 목目’ + ‘쌀 포勹’ + ‘벌레 훼/충虫’의 조합이므로 개와 벌레가 서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외롭다는 뜻이라고 풀이한 것을 읽고 피식 웃었던 적이 있다. 떠돌이 개가 목욕을 안 해서 애벌레가 붙어 있다는 식이거나 마당의 개나 풀밭의 애벌레가 상관없이 사는 ‘홀로’ 사는 삶이라고 풀이하는 것과 비슷해서였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뜻과 소릿값으로 나눠보는 방식에 따라 개나 사슴을 뜻하는 ‘개 견犭(=犬)’이라는 글자와 ‘해바라기 벌레/애벌레/나라이름 촉蜀’의 결합으로 보면서 개(犬)는 무리를 지으면 싸우므로 홀로 떼어놓아야 한다거나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성질이 있으므로 그렇게 썼을 뿐 글자의 한 부분을 차지한 ‘애벌레/나라이름 촉蜀’은 그저 음을 나타낼 뿐이라고 하면 풀이는 되지만 썩 개운치가 않다.

그래서 ‘애벌레/나라이름 촉蜀’이라는 글자를 뜯어본다. 누에처럼 생긴 해바라기 벌레, 혹은 애벌레의 모양에서 왔다는 ‘촉蜀’이라는 글자는 몸의 모양(勹)에 머리를 상징하는 눈(目→罒)이 붙어 있는 모습이었고, 나중에 벌레라는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벌레 충(虫)자를 추가하였다 한다. 삼국지의 유비劉備가 세운 촉蜀이라는 나라에서 두우杜宇라는 왕이 호의를 베풀었다가 나라를 빼앗기고 억울하게 죽어 대궐이 보이는 서산에서 밤마다 울었다는 두견새,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歸蜀道(*촉나라로 돌아가는 길) 운다’라는 싯구가 되었던 바로 그 ‘촉’이다. 그렇게 ‘蜀’을 풀어봐도 원래의 ‘홀로 독獨’이 왜 ‘홀로’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는가는 깔끔하게 파악되지는 않는다. 사전에서도 『개는 무리지어 살지 않고 혼자서 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홀로’라는 뜻이 생겼으며, 이로부터 단독單獨, 고립孤立, 독특獨特하다 등의 뜻이 나왔다. 또 자식이 없거나 아내가 없는 사람의 지칭으로도 쓰였다.(하영삼, 한자 어원 사전, 196쪽)』할 뿐이다.

독獨은 독毒이라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생은 결국 홀로이다. 맹자孟子 때부터 ‘환과고독鰥寡孤獨(홀아비 환, 적을/과부 과, 외로울 고, 홀로 독)’이라 하여 늙고 아내가 없는 사람, 젊고 남편이 없는 사람, 어리고 부모가 없는 사람, 늙고 자식이 없는 사람을 어울려 보살피는 것이 정치라고 하였으므로 나의 기억 안에도 감히 혼자 사는 이가 없던 시대와 사회가 있었지만, 어느덧 독거노인獨居老人이니 고독사孤獨死라는 말은 보편화가 된 지 오래고, 함께 모여 살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시대가 되었으며, 그렇다고 혼자 살게 된 이들을 소위 사회의 안전망이라는 시스템이나 연금 혹은 재취업 기회로 보살펴야 하는 것이 후세에 부담을 안겨주는 일이 될 뿐이라 하기도 하고, 홀로 내팽개쳐진 삶은 잘못된 삶을 살았던 본인이 자초한 것이니 어찌할 수가 없다 하기까지도 한다. 나이 들어 품위 있는 삶을 누릴 권리는 어쩌면 나이 들기 전의 영악함이나 이기적인 대비만으로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주 목요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던 할아버지 신부님들이 계시는 양로원에 다녀올 때면 다소 우울한 기분이 오래 남는다. 세계에서 문명이 가장 발달한 선진국이라는 이곳 미국, 그중에서도 편안한 노후를 위해 은퇴한 이들을 위한 도시라는 이곳 탬파, 그래도 괜찮은 축에 속한다는 양로원의 먼지투성이 침대에 간신히 걸터앉아 30분 이상 걸려 홀로 일회용 기저귀 팬티를 갈아입고, 앞인지 뒤인지도 모르게 고무줄 바지를 한쪽으로 쏠리게 입고 난 뒤, 기진맥진해서 침대에 다시 누워 깊은 잠에 빠져 기약 없고 대책 없는 소모의 들숨 날숨으로 끊어질 숨의 순간을 마냥 기다린다는 것은, 그곳이 일터요 생업인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를 지켜보는 모든 이에게 참으로 잔인한 일이다.

오늘 1935년 생이신 폴이라는 신부님이 그렇게 누워있는 침대 곁 탁자에는 구정물 같은 탁한 물에 틀니가 담긴 플라스틱 컵, 얼룩투성이의 안경, 아직 사용하지 않은 흐트러진 몇 개의 기저귀 더미, 플라스틱 소변 통, 하나는 내게 주어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3개들이 작은 비스킷, 그리고 빛바랜 성모님의 상본 한 장이 놓여있었다. 간병인은 며칠 전 뉴욕에서 왔던 전임 원장이 목에 걸어주었다는 아주 예쁜 묵주는 누가 훔쳐 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이 글은 2019년 10월 탬파에 있을 때의 글이다. 폴 신부님은 이미 올해 2020년 초에 돌아가셨다.)

잎 엽, 땅 이름 섭, 책 접葉

‘(나뭇)잎 엽葉’은 ‘풀 초艹’ 더하기 ‘인간 세世’ 더하기 ‘나무 목木’으로 구성되었다. 한가운데 ‘세상/인간 세世’를 품고 있는 글자이다. 나뭇잎을 가리키는 葉보다 枼이라는 글자가 먼저 쓰였는데, 이 글자보다도 먼저 나뭇잎을 가리키는 글자는 ‘世’라는 글자였다. ‘世’라는 글자 자체가 나뭇가지에서 돋아나는 순이나 잎사귀를 본떠 만들어진 글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나뭇잎이 나고 지는 것은 곧 해가 바뀌는 것이어서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는 ‘생애’의 뜻으로 점점 발전되어 일생이나 세대라는 뜻으로까지 나아간다. 같은 글자이지만, 온전히 인간이나 일생, 생애를 뜻하는 글자로는 ‘인간/대 세卋’라는 글자로 구별하여 쓰기도 한다. 이 글자는 ‘열 십十’이 세 개 겹쳐진 의미로 대략 30년을 한 세대로 지칭하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世’가 본래 뜻인 나뭇잎을 잃을 수 있으므로 그 글자 밑에 ‘나무 목木’을 붙여 ‘나뭇잎 엽枼’을 만들었다가 그 글자 위에 ‘풀 초艹’까지 더해 오늘의 ‘나뭇잎 엽葉’이 되었다. 이는 보통으로 나뭇잎, 꽃잎, 잎처럼 얇은 종이 같은 것, 책의 쪽, 동전을 세는 단위 등으로 쓰이고 ‘중엽中葉’에서처럼 한 세대나 시기를 뜻하기도 한다.

잎은 놀이개다. 백 보나 떨어진 거리에서 쏜 화살의 과녁이 된 버들잎(백보천양百步穿楊)이 있고, 나뭇잎을 가르는 검劍이 있으며, 애들이 한 장 한 장 떼어내며 가위바위보를 할 수 있어서이다.

잎은 가리개다. 첫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렸던 무화과나무 잎, 비오는 날 머리를 가리는 연잎, 당唐나라의 양옥환楊玉環이 손으로 건드렸더니 당해낼 수 없는 미모 앞에 부끄러워 잎을 말아 올려 자신을 숨겼다는 함수화含羞花 때문이다.

잎은 치장이다. 여러 색의 꽃잎으로 즙을 짜 굳혀 만든 연지臙脂로 뺨에 홍분紅粉을 칠했다는 복숭아 꽃잎이 있고 즈려밟고 가시라는 꽃길이 있어서이다.

잎은 대비對比이다. 한 송이 붉은 꽃을 돋보이게 하는 푸른 잎들이 있으며(만록총중홍일점萬綠叢中紅一點), 한해살이풀이지만 푸른 물감의 원료가 되는 청출어람靑出於藍(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의 쪽잎 때문이다.

잎은 계략이다. 벌레가 좋아하는 꿀로 역모逆謀의 글을 써서 역사를 바꾸어가던 음모陰謀의 나뭇잎이 있어서이다.

잎은 낭만이다. 연서戀書와 시詩의 바탕으로 붉게 물든 감나무잎(시엽지枾葉紙)이 있고, 노란 은행잎으로 덮인 길을 가는 연인의 팔짱 낀 모습이 있어서 그렇고, 이른 아침 이슬 맺힌 풀잎이 있기 때문이다.

잎은 세월이다. 섬돌 앞에서 가을을 알리는 오동나무 잎(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이 있어서이다.

잎은 거름이요 순환이다. 온갖 것을 말없이 받아들여 쌓이고 쌓이다가 버무리고 뒤섞이며 밟히고 썩어 생명을 낳는 거룩함을 담았기 때문이다.

잎은 먹거리다. 온 세상 언제 어디라도 한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있어서 여름 맛을 주는 깻잎과 상춧잎과 고춧잎을 비롯해 가난한 시절 뒷동산에만 오르면 누구나 캘 수 있었던 백여덟 가지나 된다는 나물 잎들이 있어서이다.

잎은 한恨이다. 망망대해에서 한 잎의 좁은 배를 탄 좁쌀 같은 인생살이의 슬픈 일엽편주一葉片舟와 그 위의 술잔이 있고, 빈산 잎이 지고 비마저 부슬부슬(권필權韠·1569~1612년 : 공산목락우소소空山木落雨蕭蕭)대는 시가 있으며, ‘나뭇잎이 푸르대야 시어머니보다 더 푸르랴?’ 하던 민요가 있기 때문이다.

잎은 사유와 성찰이다. 꺾이고 구부러지며 잎새의 폭이 풍성하고 수척해지는 변화와 반복 속에서 마음을 속이지 않고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으로만 그릴 수 있고 결코 남의 눈을 속일 수 없다는 난초의 잎이 있어서이다.

잎은 향이다. 덖고 우려 즐기는 찻잎과 선禪이기 때문이다.

잎은 길이다. 9년 동안 좌선하신(면벽좌선面壁坐禪) 달마대사를 동쪽으로 모셔 온 갈댓잎(노엽달마蘆葉達磨), 그리고 그 달마대사께 향기로 움직이는 동쪽의 땅을 펼쳐준 다섯 장의 꽃잎(오엽분피진단개五葉芬披震旦開-震旦:동쪽의 땅)이 있으며, 비가 거센 4월 어느 날 작은 벚꽃잎들로 하얗게 뒤덮인 길이 있어서이다.

잎은 죽음이다. 다양한 색과 모양으로 유일하게 사람이 이승을 떠나는 장례식을 송별하면서 죽음의 신비처럼 많은 꽃잎으로 자신의 속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 국화꽃 잎이 있기 때문이다.

숲에 들었더니 헤아릴 수도 없는 모든 잎이 하나도 예외 없이 전부 각자 자기 자리를 잡았다. 햇빛은 잎을 헤치고 감히 들어올 수가 없어졌으며 잎들 사이로 간간이 바람과 더불어 즐거운 숨바꼭질을 할 뿐이다. 위로는 새들이 가지를 바꾸고, 밑으로는 다람쥐들이 부스럭거리느라 바쁘고, 저만치서는 사슴들이 가끔 경계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가만히 쳐다본다. 친구에게는 곧잘 모습을 보여준다던 갈색과 회색 여우는 야속하게도 좀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답답할/번민할 민悶

‘답답할/번민할 민悶’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글자가 생긴 그대로 빗장 지른 문 안에 갇힌 사람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마저 곤란해져 괴로워하고 말 그대로 답답해서 미칠 지경인 경우를 뜻하면서 ‘우매하다, 밀폐하다’의 뜻으로까지 나아간다. 문 안에서 안(내면)으로 고통받는 상황이다. 흔히 ‘번민煩悶, 고민苦悶’ 할 때 쓰는 글자이다.

covid19 때문에 사람들이 갇힌 지 한 달도 훨씬 넘었다. 답답해한다. 뉴욕 날씨도 좀체 도와줄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 비가 내리며 흐리고 바람마저 거센 채, 봄인 줄도 모르게, 그렇게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날이 반짝하고 햇빛이라도 비칠라치면 넓은 이곳에는 공원마저 닫혀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몰려온다. 마스크를 쓰고서도 사람들은 재잘거리고, 성장한 딸과 아빠는 연신 뛴다.

숨었던 다람쥐들이 이리저리 바쁘고, 그라운드 호그라는 녀석이 연신 이 굴에서 보였다가 저 굴에서 보이며, 사슴들은 태연하게 무리를 짓고, 하늘이나 나뭇가지에 있어야 할 새들도 풀밭 위를 종종거린다. 길 잃은 야생 칠면조 한 마리는 며칠 전부터 맨날 같은 곳에서 겁 없이 뒤뚱거리고, 현관 바깥쪽 높은 곳에서는 수백 수천의 꿀벌들이 윙윙거린다. 움직이는 것들이 부산스러운 가운데, 개나리와 목련 같은 몇몇 꽃은 이미 졌고, 나무들은 하나같이 조용히, 그러나 여지없이 연둣빛과 초록빛들을 점점 더 내밀어 보이면서 세를 과시한다. 사람들이 답답하니 그동안 사람들 탓에 답답했을 것들이 활발하다.

벌써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시작되면서 모처럼 화창한 5월 셋째 날, 그리고 일요일, 창밖의 새 소리는 바로 옆이고, 멀리 나는 비행기 소리도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