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어린 애들이 학교에 다녀오자마자 이런저런 학원에 가야만 되는 불쌍하고 안타까운 현실을 두고 수도 없이 많은 부모님에게 물어보았다. 애들을 왜 그렇게 키워야만 되는 것이냐고. 그런 말 앞에서 부모님들은 이런 현실이 참으로 개탄스럽다고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그러한 세상에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그리고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자식만 바보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라고 결국 토로한다. 또 다른 얘기이다. 다 자란 애들이 성장하고 출가한 뒤에도 아직까지 애들 아닌 애들의 걱정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어떤 부모님들에게, 이젠 자기들 인생을 자기들이 살도록 내버려 두시고 제발 당신네 인생이나 잘 살 궁리하며 그동안 고생하여 모은 재산일랑은 애들에게 물려줄 생각도 하지 말고 편안하게 사시라 하면, 어찌 인생이 그렇게 되느냐 하시면서 자식 없이 사는 신부니까 우리 마음을 이해 못 할 거라고 말씀하시고, 마지막엔 이 세상에 믿을 것이 자식밖에 더 있겠느냐고 결국 말을 맺는다. 세상에서 믿을 것은 자식 말고 아무것도 없다는 두려움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두려움으로 우리 인생을 시작했고 평생을 그렇게 매일 매일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두려움의 힘과 세력이 온 세상을 꽉 채우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할 때가 많다. 내 안의 두려움이 있고, 내 주변의 두려움이 있다. 어떤 두려움은 이미 피부에 와 닿아 있고, 어떤 두려움은 아직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두려움은 빤히 내 눈앞에 와 드러나 있고, 어떤 두려움은 은밀하여 눈에 뜨이지 않게 숨어있다. 어떤 두려움은 나 자신 안에 있고, 어떤 두려움은 타인의 마음 안에 있다. 우리의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들이 어쩌면 온통 두려움에서 기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일정 부분 두려움과 이런저런 연관을 맺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때는 날 지배하고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 두려움인 것 같다. 두려움은 나를 화나게 하고, 흥분시키며, 거친 행동으로 내몰기도 한다. 때로는 절망과 실망에서 비롯된 두려움이 나를 의기소침하게 하고, 급기야는 죽음으로까지 나를 이끌어갈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두려움에 찬 아이들, 학생들, 환자들, 공무원들, 노동자들, 부모들 … 이렇게 두려움에 가득 차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두려움의 포로요 노예이다.

참으로 두려움의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요 두려움으로 가득한 세상인 것만 같다. 만일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만일 이것이 이렇게 안 되면 어떻게 하지? 이런 식의 걱정스러운 의문과 두려움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우리는 결국 “만일”과 “어떻게”의 포로들이고 노예인 셈이다. 개인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온통 두려움의 논리와 두려움의 힘에 지배당하고 있다.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 정치적인 대부분의 사안이 두려움으로 가득한 전제와 가설 아래 기득권, 영향력, 힘에 있어 유리한 고지를 먼저 차지하려는 술책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가 걱정이 앞서고, 신경질적이 되어가고, 급기야 생존을 위한 마지막 방책이라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서로 죽음과 파멸로 치닫게도 된다.

두려움과 설렘으로 시작했던 한 해를 마감하는 끝자락에 와 있다. 두려움의 끈을 끊어야 한다. 누군가가 두려움의 끈을 ‘먼저’ 끊기 시작해야 한다. 끊으려고 해야만 끊어지는 것이 두려움의 끈이다. 두려움의 끈을 끊고 내 안의 진정한 나를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고, 내 옆과 주변에 있는 타인을 위해서 사랑의 문을 열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발견한 나와 너를 넘어서, 조물주가 이 지구라는 별 위에 나와 너를 살게 한 의미들을 새기면서 영원의 문을 열어야 한다. 의미는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발견된다. 인생의 의미들은 순간의 각박함이 아닌 온 생애로, 온 삶으로만 답해지는 기나긴 숙제이다. 마음의 문, 사랑의 문, 그리고 영원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게을러서이든지, 이웃을 똑바로 보기 싫어서이든지, 각박한 세상살이에 너무 지치고 찌들어서이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