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고 죄송스러워

 

비가 엄청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57명의 사망자 혹은 실종자가 생겼다 한다.


길을 가던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감전되어 죽어버리기도 하고


곤히 잠자던 식구들이 죽어버리기도 했다.


주차장에 세워두었던 자동차들이 떠내려 가버렸고


어제 까지 있던 집과 보금자리가 없어져 버렸다.


이럴 때면 나는, 혹은 내가 아는 누구는


그런 경우가 없고 안 당했다는 안도감이 생길 때까지


2-3 일은 괜히 불안하다.




대통령이 재해대책 본부를 찾아가서 대책이 미흡했다고


말씀하셨다하고, 사람들이 밤새 국철 선로를 점거하고서는


수문 관리 아니하고 잠만 자던 공무원 때문에 피해가 커졌으니


보상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며 농성을 했다하고,


많은 사람들이 오갈 데 없이 그렇게


어찌 살까를 생각하며 울고들 있다 한다.


마음이 아프다.




조금 있으면 우리는 언론사에서 수재의연금을 모금하고,


구호품이나 성금이 현장에 빨리 도착하지 못한다는 늑장행정의 보도를
또 한 두어 차례 들을 것이고,


정치인들이 수해 현장 방문하는 기사를 만날 것이고,


수방대책 어쩌고저쩌고 보고서니 뭐니 만들 것이고.


그렇게 올 여름이 또 갈 것이고,


그리고 내년 여름에 또 그렇게 똑 같은 북새통을 쳐댈 것이다.




우리도 몇 백년을 두고 이곳 떼우고 저곳 떼우면서


그렇게 살다보면 수해가 없는 날도 있지 않겠냐고


애써 자위를 해 보지만


그럼에도 로마가, 파리가 물에 잠겨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해마다 죽고 운다는 그런 기사가 없는


몇 천 년의 고도들이 부럽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제헌절을 맞는다.


쉰 세 돌이면 어지간히 고쳐서 괜찮은 법이기도 하겠건만


그래도 이 나라에 법이 있는지 가끔은 회의에 빠지게 만드는


그런 와중에서 우리는 법의 날을 지낸다.


멀리 가장 오래된 법의 역사를 지녔으면서도


법률 조항이 가장 적은 나라 영국이 부럽다.


불문율과 관습율이 훨씬 더 많이 사람들의 삶에


자리 잡고 있는 그런 나라가 부럽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자꾸자꾸


다른 나라를 부러운 시선으로 엿보는


사대주의가 강한 사람인가 보다.




내가 괜찮은 이 나라의 지도자급 인사라도 된다면


나는 오늘 같은 날 태극기 앞에 자리 잡고 앉아서


법의 정신 운운하며 애국가 부를 제헌절 기념식에


설사 초대를 받았더라도


국가와 민족 앞에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법대로 살지 못하는 나와 우리의 생활이 민망스러워,


결코 가지는 못할 것이고


그 자리에는 더더욱 앉아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유명인사가 되지 못했고


올 제헌절 기념식에도 초청을 못 받았나 보다. (200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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