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긴 좋다

 

지금 난 뿌듯하다. 잠이 안 올 정도로 무척 뿌듯하다. 그리고 양 엄지 손 가락에 물집이 잡혀 신경이 몹시 쓰이고 있다. 이른 새벽부터 왠 헛소리인고 하니 내가 나이 마흔 다섯을 넘어 드디어 오디오 세트를 한 벌 장만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인켈로 말이다.




사실 오래 전부터 그럴 듯한 오디오 세트가 하나 갖고싶었다. 친구 신부들의 사제관에 가 보거나 하면 그럴 듯하게 자리잡고 있는 오디오 세트가 내심 좀 부러웠던 것도 사실이었고. 그렇다고 목숨 걸만큼 부러웠던 것은 아니고. 여하튼 내가 그 동안 사무실에서 음악을 듣고 싶을 때 썼던 것은 카셋트에 스테레오 구닥다리 앰프를 연결해서 듣는 수준이었다. 그 앰프도 언젠가 조카 녀석 집에 갔을 때 질부가 시집올 때 장만했던 것인데, 엄청 오래되어 살림폈다고 새 것으로 바꾸면서 아파트 베란다 먼지구석에 쳐박아 놓았길래 내가 보고는 스테레오 앰프와 스피커만 주어 와 내 조그만 카세트에 연결해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집집마다 결혼할 때 어지간하면 장만해서 놓아두고 묵혀두는 불쌍한 오디오들이 참 많기도 하긴 할거라 싶다. 우리 가난한 시절에는 대청마루 앞에 걸린 괘종시계로부터 라디오, 흑백 TV에 칼러TV, 비디오와 오디오에 이어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사용하지도 않고 또 사용하더라도 지극히 제한적으로밖에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갖추어야 하기에 갖춘다고 하면서 사재논 것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그랬던 시절이 있었고 아마 지금도 그런 시절이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이 번에 장만하게된 나의 오디오도 나를 잘 아시고 아끼시는 어떤 분께서 이사가시면서 자리 차지하는 것이 좀 불편하셨든지 선물해 주신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을 아니하셨는지-그 분에게는 미안해 하실까 봐 비밀이지만-십 몇 만원의 AS 비용이 들어야만 작동을 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사실 그 비용 때문에 망설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먼지를 좀 닦아주시려고 그랬는지 뭘로 닦으셨던 모양인데 그게 문제였다. 찐득이처럼 뭐가 늘어붙어 알콜로도 닦아보고 아세톤으로도 닦아보고 컴퓨터 닦는 리퀴드로도 닦아보고 벼라별 짓을 다 해도 벗겨지지가 않았다. 더구나 리모트 콘트롤러는 늘상 사용하는 것 일텐데 그 녀석에는 집중적으로 뭐가 늘어붙어 최종적으로는 결국 철물점에 있는사포를 가져다가 문질러 대고서야 끝을 맺었다. 여하튼 좀 볼품이 없긴 없지만 지금은 적어도 찐득거리지 않고 모든 작동이 원만한 소위 리모콘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내 양 엄지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오디오의 찐득이와 씨름하면서 내내 내 마음 속에 되뇌이던 말 하나는 ‘결국 또 하나의 부질없음은 아닌가, 내 삶이라는 것이 소위 편리와 편의를 위해 있는 주변의 것들을 상당 부분 절제하고 이탈해 버릴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인데…’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은 이런저런 음악을 폼나고 기분 좋게 들어볼 수 있어서 일단 좋긴 좋다. (200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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