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리 아빠

지난 1984년의 일이다. 당시 나는 서울 영등포의 살레시오 근로청소년회관에서 사목 실습을 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려운 애들 60 여명과 같이 살던 시절이었다. 그해 12월 8일, 그러니까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이었고 우리 살레시오회의 사업 시작을 기념하는 날이었기에 목욕재계하고 온 집안 대청소하고 저녁에 은인들과 미사를 지내기 위해 그 준비로 정신이 없던 시간에 열 대여섯 된 아이들 두 명이 찾아왔다. 당시 매주 화요일이면 안양에 있는 소년 감별소에 나가 ‘좋은 말씀’을 한 마디씩 하고 오는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를 보고 알았으며, 고아원에서 살다가 탈출하여 감별소에 잡혀갔고, 3개월이 지나 나갈 곳이 마땅치 않아 찾아왔다는 아이들이었다. 축일에 찾아온 아이들이라 성모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흔쾌히 그들을 우리 기숙사에 살도록 해 주었다. 호적도 없는 그들의 호적을 만들고 목공 기술을 가르치고, 밤이면 야학으로 검정고시 공부도 시키면서 그렇게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나는 로마로 공부하러 떠나게 되었는데, 그래서 또다시 방황하게 된 그 아이들이 도망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얼마나 지난 뒤에야 난 알게 되었다. 그렇게 도망을 가서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급기야 어느 시골 디스코 텍이라는 곳에서 댄스 경연대회가 있는 것을 보고 응시했고, 등수 안에 들어서 춤추는 직업을 갖게 된 둘 중 하나였던 아이가 지금의 초리 아빠이다. 내가 로마에서 귀국한 지 몇 달이 지나 다시 나를 찾아온 그는 그렇게 지방이고 서울이고를 가리지 않고 소위 나이트 클럽의 무대에서 백 댄서 노릇을 하며 살았다. 그게 선뜻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아 내 딴에는 마음을 많이 조리기도 했었지만 초리 아빠는 지금 서른이 넘기까지 백댄서도 하고 10 여분 짜리 자기 쇼도 하면서 이 업소 저업소를 전전하며 괜찮게 살고 있다. 재작년에는 결혼식이라는 것도 했는데 그날은 여남은 명 하객 중에 내가 제일 소위 vip였던 그런 날이었고, 그 결혼식이라는 것도 어머니 아버지 주례까지도 업소의 사장님이나 아는 사람들을 들러리 세워 그야말로 순전히 결혼 사진을 찍기 위해 돈 들여 연출한 그런 쇼였을 뿐이었다. 지금도 결혼식 내내 신부는 보지 않고 행여 내가 어디 갈까 봐 두리번거리며 나만을 찾던 그를 난 잊지 못 한다.

초리라 이름한 딸 아기를 하나 낳았고 시흥에 조그만 아파트도 하나 샀다는 그 초리 아빠가 어젯밤 여느 때처럼 업소에 출근하면서 전화를 했다. ‘신부님, 저 아들 났어요. 이제 아들딸 세트가 되었어요. 조금 있으면 아파트도 좀 더 큰 걸로 옮겨요. 명절 잘 지내세요’하고.

난 그런 초리 아빠가 대견스럽다. 자랑스럽다. 그리고 멋있다. 결혼식 때 보고 아직도 못 보았는데, 이번 로마에 가기 전에는 꼭 만나야 될 것 같다.

초리 아빠에게 건투를 빈다.(200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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