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볼리, 포석정, 그리고 무주구천동

 

띠볼리, 포석정, 그리고 무주구천동




밀라노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 조카 녀석이 찾아왔다. 몇 년 만에 만나는 반가운 만남에 서로 기뻐하면서, 궁리 끝에 자가용 없이도 갈 수 있는 로마 근교의 띠볼리라는 곳에 소풍을 하기로 하고 나섰다. 띠볼리라면 로마에서 1시간여 떨어진 곳의 아담한 마을이다. 호수를 만들고 별도의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와 자연 수압을 이용해 각양각색의 분수를 만들어 놓은 빌라데스테라는 분수별장이 유명한 곳이다. 헤아려보니 17년여 만에 다시 들리는 곳이었다. 전철타고 시외버스타고 오랜 만에 찾아간 띠볼리는 문득 옛날 처음으로 이곳에 들렸던 때의 낭만과 감동을 다시 부추기고 있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발길을 돌리고 눈길을 돌리는 곳마다 색다른 분수의 모습과 물보라에 크고 작게 어우러지던 무지개들, 그리고 굽이굽이 흐르다가 떨어지고 솟구쳐 오르면서 조잘조잘 엮어내던 물소리가 엮어내던 이야기들. 이런 것이 띠볼리에 대한 기억이었다. 연인과 딱 한 번이라도 들렸으면 오래도록 서로 그 날을 기념해도 좋을 그런 곳이 바로 띠볼리였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찾은 띠볼리는 한 마디로 아니 갔으면 나았을 뻔 했다. 더 이상의 낭만도 분수도, 더구나 무지개와 물의 이야기가 없었다. 보수를 한답시고 여기저기 칸막이를 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1천여 개에 이른다는 분수들 중 가동이 되는 분수는 100여개도 되질 못하는듯 싶었다. 분수의 갯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화단 한 쪽에 이리저리 엉클어진 고무 호스와 말라비틀어진 프리지아, 그리고 고개가 떨구어진 가여운 겹동백이 빛바램을 부끄러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철저히 망가져 버릴 수 있을까 싶은 의아심 속에 그래도 신기하다고 좋아하는 조카 앞에서 내색을 감추느라 자꾸만 조카와 저만큼 떨어져서 걸었다. 왜 그렇게 되어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복구의 기술력이 문제인 것일까, 지금도 받고 있는 상당한 액수의 입장료가 그 동안 누군가에게 유용되고 횡령된 것일까, 아니면 망가지면 망가진 대로 그것을 유물이라 얘기해도 괜찮다는 이태리식의 역사요 자존심일까?




벼라 별 상상 속에 내식대로의 논리를 꿰어 맞추어보면서, 16세기의 띠볼리 분수별장이 술 한 잔이 돌아 올 때마다 시 한 수를 읊었다는 풍류어린 8세기의 포석정 가락과는 어떻게 다른 지를 정리해 보면서, 또 9천의 불(佛)제자 이야기와 굽이를 이룬 심산유곡 70리길 무주구천동을 머리 속에 애써 그려보면서, 그렇게 로마로 돌아오는 길은 상당히 지루한 채로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밤늦게 돌아온 나만의 침실에는 문득 야당의 반정부 데모로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1백만 명이 몰려다녔다는 오늘 낮의 그 아수라장을 뚫고 띠볼리까지 갔었던 피곤함만이 몰려왔다. 라디오는 내일에 있을 ‘평화를 위한 제 8차 로마 국제 마라톤 대회’를 알리느라 요란하다. 내일 로마는 모든 길이 봉쇄되고 대중교통수단이 다시 한 번 마비되어버릴 것이 분명하다. 내일은 마음 고쳐먹고 조용히 잠이나 자야겠다. 다가오는 4월 5일인지 8일인지 이태리 전체가 멈추고 말 것이라고 총파업을 예고하던 버스 안의 벽보가 머리를 스친다.(2002.3.23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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