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이상한 일

 

참으로 이상한 일




로마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 넘어간다. 발령대기라는 한가한 백수의 신세이면서도 뭐가 그리 정신이 없는지 시간이 후딱 가 버린다. 그 동안 시간 내서 병원에 종합검진 차 들렸더니 작년의 못된 심뽀를 아직도 고치지 못한 탓이었는지 이번에는 대장이라는 곳에서 얄궂은 혹을 세 개나 떼어내야 한다길래 미련없이 떼어 내어버리고 왔다. 그것도 수술이라고 미음 먹다가 죽 먹다가 밥 먹게 되는 그런 과정까지는 그렇다치고 대장이라는 곳을 후비기 위해 앞뒤로 속을 철저히 비워낸 뒤에 뒤로 터진 바지 아닌 바지를 입고 원초적인 자세로 두 남정네에게 나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내 맡겨야 되는 비참한 지경을 겪어야만 되는 것이 그리 유쾌한 체험이 아니었던 것은 사실이다. 다시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으련만 어쩔 수 없이 정기적으로 그런 이상한 짓을 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겸손해 지라는 은총의 기회인가 싶다. A-썩어질!




그건 그렇다치고 지방 선거니 월드컵이니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날들이 어제의 경기로 48년만의 숙원이라는 16강도 달성하고 이젠 대충 가닥이 잡혀가나 싶다. 나 역시 요즈음 월드컵 보는 재미로 더더욱 시간이 빨리 가고 있는데 월드컵 개막이후 시종일관 나의 머릿속에 한 가지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다. 바로 이른 바 붉은 악마 몇 천 명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우리 월드컵 응원부대이다. 월드컵이 다가오는데 도대체 신문의 머리기사가 왜 야구여야 되느냐고 항변하던 히딩크 감독의 말이 엊그제이고 경기장이니 뭐니 이렇게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어떻게 국제적인 행사를 치를 것이냐고 걱정하던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더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온 국민이 월드컵이라는 주문이나 최면에라도 걸린 듯, 전 국민의 훌리건화, 전 사원의 붉은 악마화만이 살길인 듯, 나라도 난리이고 일반 직장들까지도 난리 법석이다. 내 나이 이렇게 먹도록 그 어느 나라에서도 이런 현상은 보고 듣지 못했던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요 경이롭기까지 한 일이다. 도대체 무엇이, 또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왜 그렇게 단시일 내에 이런 모습들을 빚어내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상식과 순리는 분명 아니라고 느껴진다. 궁금하다. 두고두고 이유를 연구해야만 될 것 같은 사회현상인 것 같다.




세상살이 각박하게 살다가 ‘에라’하고 이런 경우에 월드컵이라도 빌미삼아 그 동안 못 지르고 살았던 소리를 냅다 질러대면서 이 기회에 스트레스라도 풀고 한이라도 풀자는 것일까? 아니면 지방 선거니 대선, 지겹고도 지겨운 게이트니 뭐니 하는 것들은 우리끼리 적당히 해 먹을테니 당신들은 축구나 보면서 그런대로 재미있게 살아가시라고 매스컴을 동원하여 머리좋은 정치가들이 배려하고 조작해 낸 고도의 술수요, 농간일까? 아니면 어렸을 때 국기에 대한 맹세를 배우면서부터 가슴 속 밑바닥에, 머릿통 속에 누군가가 쇄뇌시켜 놓은 ‘애국애족’에 대한 교육의 결실일까? 아니면 월드컵을 취재하러 온 외국기자들이 놀라고 또 놀라는 바대로 좋게 보면 정열이요, 나쁘게 말하면 군중심리에 편승한 냄비요 양재기 근성이라는 민족성의 발로일까? 아니면 우리는 롱다리 너네들이 하는 그까짓 축구쯤을 숏다리로도 거뜬히 해 낼 수 있다는 잠재의식적인 열등감의 오기어린 허세요, 뻗침일까? 스트레스 해소가 아니고 정치가들의 농간도 아니며, 애국애족에 대한 교육의 결과가 아니고 민족적 자아정체성에 대한 이유도 아니며, 열등감의 오기나 허세마저 아니라면 도대체 그 무엇이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을 졸지에 빨간색을 입게 하고, 길거리에 뛰쳐나오게 했으며, 장대비가 쏟아지는 광화문 네거리에 몇 시간이고를 꼼짝않고 서 있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200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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