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털 귀마개

 

34년만의 이상기온이란다. 추울 땐 추워야 한다는 농민들의 걱정이 대선의 와중에 얼핏 들려온다. 이곳에 8월 15일자로 왔으니 벌써 100일을 넘기고 넉 달째를 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저런 이유에서 이곳에 온 뒤로 ‘A-썩어질’ 난에 글을 통 쓰지 못했다. 새로운 일에서 오는 부담감에서였는지 두려움에서였는지 아니면 게으름 때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날씨 탓 정도로 넘어가 버릴까?




이곳에 오면서 ‘내 자리의 사람이 바뀐 줄 모르게 바뀌어야겠다’는 것이 조그만 결심이었다면 결심이랄 수 있었다. 더불어 전임지에서 마음 깊이 느껴야 했던 사목자로서의 부족했던 부분을 인간적인 힘으로써나 능력 내지는 처세로써가 아니고 은총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는 기도가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실천사항으로 우리 살레시오회의 전통에 맞추어 매일 아침저녁으로 등 하교시에 교문 앞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기를 시작했었다.




첫 출근 뒷날부터 지금까지 부득이한 사정이 없는 한 매일 이를 실천했다. 곧 바로 가을이 오고가면서 겨울이 되고 몹시 추웠다. 속으로는 떨면서도 애써 미소지으면서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수고했어요’를 백화점 아가씨나 엘리베이터 걸처럼 계속했다. 속으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야’하는 자문과 ‘괜한 짓’이거나 ‘그저 해 보는 짓’은 아닌가하고 회의가 드는 날도 있었다. 뿐만 아니고 학생들이나 직원들이 행여 나를 너무 만만하게 대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는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매일 꾸준히 지성을 다했다. 마음의 인사야말로 모든 관계의 시작이라고 굳게 믿은 까닭이었다. 이렇게 오늘 아침까지 아침 40분 저녁 40분간씩 인사를 했다.




반응도 가지가지였다. 교장이 이른 아침부터 교문에 서서 먼저 인사하는 바람에 몸둘 바를 몰라하는 사람, 어떻게 응답할 지를 몰라 몸을 꼬거나 걸음걸이가 이상해지는 사람, 행여 지각생 잡는 선도부원이나 만나듯이 얼굴 빨개져서 눈 마주친 다음부터 괜히 뛰는 사람, 외면하고 지나가는 사람, 고개 숙이는 것이 싫은 탓인지 높은 양반이 아랫사람 격려하듯 변함 없는 표정으로 손 한 번 들다가 말고 가는 사람, 마스크나 모자에 안경 그리고 귀에 꽂은 리시버까지 벗고 인사하는 사람, 호주머니 속에 따뜻한 캔 커피를 담아와서 부끄럽게 내밀고 가는 사람, 아예 보온병에 따뜻한 것을 담아 잊어버릴만하면 한 번씩 갖다 주는 사람, 추운데 왜 나와있느냐고 호통치듯이 매일 똑 같은 말을 똑 같은 어조로 정확히 그리고 지루하게 반복하는 사람, 마주칠까 두려워 뒤로 소리 없이 살짝 지나가 버리려고 애쓰는듯한 사람, 옆 사람과 이야기하느라고 못 보았다는 식을 매일 되풀이하는 사람, 일부러 코앞에까지 다가와 씩 웃고 가는 사람, 유달리 내 구두만을 유심히 쳐다보는 듯한 사람 등등 이루 다 말 할 수가 없다. 그 중에 한 사람, 인사의 과정 자체를 거부하는 듯이 어쩔 줄 몰라하는 남자직원 하나가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 그 직원이 처음으로 다소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날씨가 많이 풀렸네요.’하고 지나간다.




그래서 난 오늘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난 오늘 재래 시장에 나가 검정색 토끼털 귀마개를 2천 원씩이나 주고 하나 샀다. 내일부터는 날이 엄청 추워져서 귀마개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모든 사람들이 아침부터 키득거리며 나의 인사를 즐기게 될 것이고 농부들도 겨울농사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0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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