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깊고 단풍이 곱다


가을은 깊고 단풍이 곱다.


 


가을은 깊고 단풍이 곱다. 상큼한 아침, 이슬이 걸린 거미줄,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밟히는 낙엽들, 맑고 푸른 하늘, 따가우면서도 싫지 않은 햇볕, 산들거리는 바람, 색색의 옷을 입고 형언하기 어려운 향기를 머금은 꽃들, 저녁 먹고 차분해질 때쯤이면 촉촉이 젖은 소리로 울어대는 귀뚜라미와 풀벌레들, 문득 싸한 바람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하면서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챙겨야 할 것들을 챙기지 못한 듯 조바심을 일깨운다.


정말 일어나야만 되는가 하는 매일같이 계속되는 되물음 속에 눈을 떠 시작해야만 하는 하루, 광우병과 갈비통뼈의 두려움 속에서도 생존을 위해 먹어야만 된다고 국가적 협상을 벌여 획득한 핏빛 선명한 고기를 먹어야만 하는 하루, 그렇게 해서 찐 살을 빼야한다고 자동차로 달려 사방으로 갇힌 방에서 기계 위의 달음질연습으로 마감해야 하는 하루, 거친 바람에 이리저리 떠다니며 시달리다가 해질 녘에야 가까스로 길가 작은 풀밭 위에 내려앉아 숨 고르는 풀씨 같은 하루, 500원짜리 동전의 가치마저 의심스럽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신문들을 아침마다 받아들고 그것이라도 읽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 속에서 이를 탐독해야 하는 하루, 나의 욕구들을 완벽하게 보장해 주겠다며 피곤하리만치 덤벼드는 몇 초짜리 허위욕구창출로 범벅된 광고들의 숲에서 초연해보려 애쓰는 하루,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을 등에 지고 낑낑대며 걸었던 달팽이 같은 하루, 나의 아집과 편견의 껍데기 속으로 더욱 움츠려 들면서 안으로만 앓으며 살았던 거북이 같은 하루, 운명이고 숙명이려니 하는 혼잣말의 탄식 속에서 타인의 눈초리와 경쟁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무능을 자책하던 하루, 쓰레기의 바다일 수도 있는 모니터 앞에서 종일 뭔가 하는 척 했어야 했던 하루, 오고 갈 내용이 있어야만 필요할 전화통을 붙잡고 괜스레 설쳐댔던 하루, 별반 적을 것도 없는 수첩을 앞뒤로 이리저리 뒤적거리던 하루… 이렇게 하루를 되돌아 볼 수 있고 지난 계절을 되돌아볼 수 있음은 모두 가을 덕이다. 가을날의 하루는 외롭다. 자칫하면 허탈하고 허무해지기까지 한다. 모든 것이 그저 소용없고 부질없을 것만 같기도 하다. 외롭다는 것은 인생이 결국 혼자인 것임을 결코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깊이 파고드는 속성을 지닌 것이 바로 외로움인 탓이고, 지나간 여름이 하염없이 의미 없는 시간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지나간 여름 내내 너무나도 세상과 어울려 세속적으로 놀아났다는 반증인 것이며, 계절의 변화 속에 습관처럼 찾아 온 우울과 슬픔은 예년과 다름없이 해가 가는 줄도 모르게 생각 없이 살아오고 말았던 무감각하고 지루한 반복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계절의 변화는 진지하고 믿음직스러우며 성실한 몇 안 되는 친구요 스승들 중 하나이다. 어쩌면 그런 친구요 스승을 아름다운 우정과 예의로 만나는 것만으로도 내 인생의 보람은 그 할 바를 다 하는 것인지 모른다. 가을이 우리를 차분하게 하는 것은 괜스레 이유 없는 것이 아니니, 앞서 살았던 선인들은 이런 가을을 두고 낙엽 한 장이 떨어지며 긋는 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예술임을 알게 되고, 그렇게 져서 그렇게 썩어져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임을 깨우쳐야 한다고 일렀다. 가을의 한 가운데에 서서, 검불이요, 낙엽이며, 지푸라기 같은 인생일지라도 우리의 인생에는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공책에 적는다. 점점 짧아져가는 해가 안타깝다.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읽어야 할 글이 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며,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온갖 쓰레기 봉지들을 헤집고 설치면서 주변을 지저분하고 산만하게 만드는 쥐새끼들의 소일거리는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어이 찾아 올 밤의 어둠과, 어딘가에서 그 밤을 기다리며 느긋하게 낮잠이나 즐기고 있을 도둑고양이들에게 맡겨놓을 일이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조용히 감상하고 찬탄하는 것, 그 자연을 바라보며 겸손하게 자신과 나의 내면을 찬찬히 돌아보는 것, 그리고 그 자연을 넘어서 초자연을 기리며 명상하는 것, 그것만이 오늘의 내 존재 이유를 설명해 줄 그런 가을날이다.(2007년 10월 27일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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