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


죽음 앞에서


신자 수가 몇 천이 넘는 성당에 살다보면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돌아가시는 분을 자주 만나야 하는 경우이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얘기하고 알고 지내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을 때는 인간적으로 무척 어렵다. 얼마 전에는 그렇게도 무덥고 변덕스러운 날씨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줄초상이 났다. 주간의 셋째날인 수요일이 채 가기도 전에 무려 다섯 번째 부음을 접했다. 돌아가신 분을 위해 다섯 번의 장례식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죽음 앞에서는 우선 인간이 하염없이 무력하고 인생이 허망할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많아서 소위 호상이면 뭐하고 호상이 아니면 뭣할까 싶고, 그 인생이 어떠한 내용의 삶을 살았든 남은 자의 몫일 뿐인 후일담도 그저 얼마간이면 지나갈 일일 텐데 그것이 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싶다. 인생은 애초에 홀로 출발했고 홀로 마감지어야 하는 철저한 혼자임이 틀림없다. 살았어도 또 죽었어도 그것이 순간이고 백지 한 장의 두께만큼도 아닌 이쪽저쪽일 뿐이다.


생사는 백짓장의 이쪽저쪽일 뿐


나의 죽음도 금방일 것만 같아서 잠자리에 누울 때 혹시 내일 아침 일어나지 못할 상황에 대비해 정갈하고 바른 모습으로라도 누워야 되는 것은 아닌가 싶고, 침실의 구석구석을 정리라도 해 놓아야 할 것 같은 강박증이 엄습하는가 하면, 외출을 해야 할 때에도 한 순간의 실수가 모든 것을 가름하지나 않을까 싶어 나가기가 겁나고, ‘운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채우며 조바심이 스치기도 한다.


죽음을 가까이 자주 목격하며 피부로 느껴 살아가라고 하느님께서 나를 이런 자리에 보내셨다 싶어 감사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 감사에 버금가는 정돈된 삶의 모습이지 못한 채 머리로 알고 피부로 느끼면서도 해야 할 바들을 은근히 미뤄놓고 못 본 척 외면하며 살아가려는 내면의 끈질긴 나태의 속성이 어찌 그리 질긴가 하며 놀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나는 괜찮을 거야’ 혹은 ‘오늘은, 아직은…’ 하며 속삭여 오는 악마의 힘이 훨씬 더 강한 것인지, 죽음의 두려움을 애써 잊으려는 삶의 외면인지, 생명의 활력이 너무 강하여 감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내 생명 안에 파고들지 못하는 것인지?


죽음 앞에서는 문득 그 죽음을 맞이하는 의례들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인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주검을 어떤 절차와 방식으로 모셔야 하고 우리들이 무슨 색깔의 옷을 입어야 하는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고 심지어는 얼마 동안 울어야 하는지까지 나름대로 규칙과 방식을 갖는다.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는 정해진 틀이 없이는 결코 그 죽음을 맞이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고고학에서는 유물, 유적, 유골을 놓고 인간의 흔적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마지막 기준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고유한 습성이나 의례, 규칙성 같은 것이 보이는지 아닌지로 한다고 했던가?


죽음 앞에서는 뒤늦은 후회와 고인에 대한 미안함이 범벅된 고인과 나와의 인연으로 엮였던 수많은 기억들이 눈물 속에 지나간다. 또한 ‘법 없이도 살 만한 사람들이 항상 안타깝게도 먼저 간다’는 것이 죽음 앞에 선 남아있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심정이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먼저 가는 타인의 죽음 앞에서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에는 모든 것이 그저 사랑이 된다. 이런 기억들이 고인과 함께 미운 정 고운 정 들어가며 애틋하게 살아왔던 소위 ‘사랑’이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사랑의 실체는 기억일까?


삶의 마디마디 영면을 준비하자


 혼수상태에서 한없이 잠만 자다가 이승을 이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는 죽음이 연습이요, 훈련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개 하루의 3분의 1을 잠으로 보내면서 영원한 수면을 연습하고, 죽음이 임박해서는 잠자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한다.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수면에 빠진다. 잠의 연습처럼 삶의 마디와 매듭들을 의미 있게 지나도록 부단히 연습하다보면 죽음의 통과의례가 조금은 더 쉽고 의미 있어지는 것일까?(2009년 8월1일 경향신문)

“죽음 앞에서”에 대한 4개의 생각

  1. 존경하올 신부님!!!

    죽음에 관한 신부님의 글 잘 보았습니다.
    좀 더 사랑하면서 매 순간을 살아야 계다고 자신에게 말해봅니다.
    ‘모든 것을 지나가고 사랑만이 남는다’ 라는 대 데레사 성녀의 말씀이 떠 오르네요

    현재 마주한 사람을 좀 더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것 ….
    존재의 고유함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 …
    하느님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듯 나도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사랑하는 것 그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시리라 봅니다.

    그리하면 죽음이 그리 두렵지도 않은 오히려 주님 만날 그날을 기다리게 될까요? 신부님!!!

    평화를 빕니다.

  2. 죽음을 코앞에 두고 살아가고 계신 병드신 부모님이시지만 힘든 걸음을 지팡이에 의지하며 꼿꼿이 맞서서 지역사회에 일어나는 부당함과 싸우시고 계시는 모습을 보면서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시는 살아계신 삶에 대한 존귀함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도 역시 사과나무를 심고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역시 여전히 씩씩하게 잘 살아가시고 계신 모습에 찬사를 보내드립니다. 어느 순간에 있었었나 하는 그런 어렴풋한 기억들이 자신의 삶의 많은 부분들을 통제하기도 하고 또는 나아가게 되기도 하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발 오래사십시요. 건강하세요.

    일산아지메 드림

  3. 신부님 홈페지에 처음 방문했습니다..
    구로3동 신자입니다만 신부님과의 대화는 없었지요..
    오늘 신부님 글을 읽고 ..
    죽음이란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앞에서도 당당할수있게..
    후회도,, 아쉬움도 없는 삶을 살아야겠지요…
    좋은글 감사히 읽고 가슴에 담아갑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4. 신자는 아닙니다만 신부님 글 잘 었습니다. 삶이 죽음의 연습라고 하셨던가요?
    백번 올으신 말씀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신이아니기때문에 누구나 죽죠
    조금 먼저가고 조금늦게 갈분이죠 그걸 인간들이 모르는거 같아요 그래서 죽음이
    슬프고 미안하고 그렇겠죠 하지만 본인도 죽음을 맞이 할것이라는걸 모르고있죠
    백년도 살기 힘든인생 아둥바둥 살기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행복해
    질수 있는 길로 주행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보다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이
    어디있을까요 죽을때 눈을 감으면서 웃음을 띄우고 정말 열심히 최선을다해서
    예쁘고 행복하게 살았어 울지마 난 행복했어 아름다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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