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나이의 후배 하나가


한참 나이의 후배 하나가


 아직 채 50도 되지 않은 한참 나이의 후배 하나가 저 세상으로 갔다. 의사이기까지 한 후배였는데 자기 몸에 그렇게 몹쓸 암 덩어리가 온 몸을 잠식해 오는 동안에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한 채 정말이지 어이없게도 그렇게 가고 말았다. 안타까웠다. 정말 인생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허무한 것인가 하는 회의가 엄습해 왔다. 암이라는 병은 정말 지독한 녀석이고 대단한 녀석임에 틀림없다. 살아있는 모든 세포를 마지막 하나까지 깡그리 다 먹어치운 다음에야, 그것도 환자의 의식을 최후의 순간까지 또렷하게 유지시켜가면서 그렇게 자기도 죽어가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후배를 마지막 만난 것은 죽기 5일 전이었다. 이미 몸에는 복수가 차올라와 배가 풍선만 하여 졌으며, 간간이 복수를 빼 낼 때에는 복수에 피까지 섞여 나오는 상황이었고, 눈에는 황달이 역력했으며, 몸은 거의 가죽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의식은 모든 부분에서 뚜렷했고 서로 농담까지 주고받을 정도였으므로(그때 후배는 어머니께서 오실 것이라며 누나가 매만져 주는 대로 머리도 빗었고, 심지어 얼굴에 팩을 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배의 부고를 접하는 순간 ‘아니 벌써?’ 하는 내심 의외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그렇지! 사실 그때 몸의 상태로 봐서는…’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사람은 아무리 영특하다고 해도 자기 죽음을 예감하지는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본인이 의사였으므로 수도 없이 죽어가는 환자들의 마지막 단계가 어떨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학습하였을 터임에도, 본인의 몸에 다가온 그 상황은 필연적으로 나에게만은 예외라고 생각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아니면 너무 영리한 친구였으므로 본인은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을 주변에는 애써 숨기려 했던 것이었을까?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작은 체험들을 바탕으로 보면 인간은 자기 죽음의 순간을 결코 예감하거나 예견하지 못한다. 적어도 나에게만은 예외일 것 같다는 착각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죽음을 맞이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몇 년 전 어떤 선배 하나가 돌아가시기 전 불과 몇 시간 전에 둘이서만 한 병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때에도 그랬다. 서로 속엣말을 주고받을만한 처지였으므로 둘이서만 있는 자리에서 아주 가쁜 숨을 몰아쉬고 신음을 하고 있던 그 선배에게 내가 물었다. ‘죽을 것 같아?’ 엄청난 양의 진통제로 간신히 숨과 신음을 내뱉고 있던 위암의 그 선배도 그런 나의 질문에 똑똑하고 분명한 어조로 ‘아직,… 아니야.’ 라고 두 번에 끊어서 대답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도 ‘조금은 시간이 남았나보다’ 생각하고 잠깐 외출을 했었고 선배는 야속하게도 그 시간 동안에 운명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다소의 예외는 있다 하더라도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애써 외면하려는 부정 속에서, 아니면 전혀 실감하지 못한 채로 죽어간다. 실로 삶과 죽음의 이쪽저쪽이 순간이고 찰나인데 그것도 짐작 못하는 우둔한 만물의 영장이 바로 인간이다. 아니 인간의 우둔함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결코 깨우치지 못하는 죽음의 신비이다. 인간들은 평생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 종말이 가져다주는 증세들을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고 서술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의 죽음만큼은 예견할 수 없는 존재가 틀림없기에 죽음의 문제는 정말 신비이고 아이러니이다.


 문득, 두려움이 엄습한다. 나에게도 닥칠 죽음의 그 순간에 나도 그렇게 죽어갈 것이 뻔 하기에, 아직까지도 차일피일 미루면서 하느님 앞에 갈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내 자신의 후생이 걱정스럽고 두렵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우화대로 동굴의 위에서는 맹수가 으르렁거리고, 아래에서는 또 다른 맹수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다급한 상황에 간신히 중간의 나무에 매달려서 팔의 힘은 빠져 가는데, 그 와중에 낮과 밤이라는 흰 쥐와 검은 쥐가 나무를 갉아먹어 들어오는 다급하다못해 처절한 상황에서조차도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나뭇잎에 흘러내리는 꿀을 핥으려고 혀를 내밀고 눈을 돌린다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라 했던가? 마지막 날을 위해 정갈하게 준비하고 떠날 수 있는 인생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고 자위하면서, 그러니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어거지 아닌 어거지를 쓰는 심정으로 오늘 하루를 또 넘긴다. 잠은 죽음의 연습이라는데, 나는 그 죽음을 다시 한 번 연습해 보겠다고 또 잠자리에 든다.(2010년1월17일)

“한참 나이의 후배 하나가”에 대한 2개의 생각

  1. 신부님! 이규수 베드로입니다. 오래간만에 신부님 블로그에 들어왔습니다. 이태석 신부님께서는 저랑 나이가 똑같으시더군요. 저번 죽음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신부님이 쓰신 수단의 한센병 환자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한 번 뵙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최근 저도 친한 친구를 하늘에 보내고 마음이 울적해 있습니다만, 신부님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죽음을 새로운 희망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마음가짐을 되내어봅니다. 누워계시는 이태석 신부님의 얼굴을 뒤늦게나마 뵈었을 때, 죽음이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길이기에 인간의 미약함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긍정적이고 건강한 마음자세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바라보는 지혜를 길러 나가야겠습니다. 소피아가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에 수시합격했습니다. 신부님의 강복 효험 때문이겠지요. ㅋㅋ. 조만간 한 번 뵙겠습니다.

  2. 고도원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마흔다섯 살 이상의 남자들은

    마흔다섯 살 이상의 남자들은
    근심과 좌절로 질병을 얻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남자들의 좌절감은 여자들과 다르게 나타난다.
    여자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여자들은 운다.) 음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남자들은
    파괴적인 행동(술이나 마약 등)으로
    자신들의 감정을 덮는 경우가 많다.

    – 게일 쉬히의《남자의 인생 지도》중에서 –

    * 어찌 마흔다섯 이상의 남자들에게만 국한되겠습니까.
    그게 어찌 남자 여자가 구분되는 말이겠습니까.
    숨겨진 근심과 좌절은 만병의 근원입니다.
    울거나 음식으로 풀려고 하지 마십시오.
    술이나 마약은 더더욱 아닙니다.
    숲으로 산으로 들로 나가
    자연과 벗하십시오.
    길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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