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묘猫

‘고양이 묘猫’의 본래 글자는 ‘묘貓’이다. 이 ‘묘貓’라는 글자는 ‘豸’와 ‘苗’가 더하여 만들어졌다. 앞의 글자인 ‘豸’는 ‘벌레 치, 해태 채/태豸’인데 이는 ‘삵 리貍’의 줄임 글자이다. ‘豸’는 왼쪽에 붙어 다른 글자와 함께 글자를 만들 때 ‘갖은돼지시변’이라 한다. ‘豸’라는 글자가 원래 ‘돼지 시豕’이고, 「훈에 ‘갖은’이 붙는 경우는 원래의 글자에서 더 많이 갖추었다, 즉 획수가 더 많다는 뜻으로 豸는 豕보다 획을 더 많이 갖추었다는 뜻(박홍균)」이라는 해설에 따라서 획이 더 많은 글자인 ‘豸’가 되었다는 것이다. ‘豸’라는 글자는 생김새에서 금방 짐작이 가듯이 맹수가 발을 모으고 등을 높이 세워 덤벼들려는 모양을 본뜬 것이다. 여기에 ‘싹 묘苗’를 붙여서 ‘고양이 묘猫’가 되었으니 ‘풀 초艹’ 더하기 ‘밭 전田’인 ‘싹 묘苗’의 내용까지 헤아리면 종합적으로 ‘고양이 묘猫’라는 글자는 ‘삵처럼 생긴 동물이 밭에서 나는 식물의 싹을 갉아먹으려는 쥐를 잡으려는 상황’을 담는 것이다.

뜻은 그렇다고 쳐도 ‘고양이 묘猫’라는 글자가 ‘싹 묘苗’의 발음으로 보아 우리가 ‘냐옹냐옹’이라 하는 것을 중국 사람들이 ‘miao miao’라고 들어서 그 울음소리와 ‘묘苗’의 발음이 비슷해서 그렇게 쓰게 되었다는 해설도 있다. 그래서 ‘입 구口’를 붙여 ‘고양이 우는 소리 묘喵’라 하는 글자도 있다.

고양이는 동서고금을 통해서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고 수많은 이야기들을 지어냈다. 우리는 고양이를 ‘냐옹이’라 부르기도 하고 ‘괭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나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냐옹이나 고양이의 준말인 괭이는 이해가 가지만 ‘나비’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칭호이다. 어원상으로 ‘나비’를 우랄 알타이어 계통의 언어에서 ‘무는 짐승’이라 했다는 정도가 맞을까? 고양이가 나비를 좋아하고 따라가며 뛰는 모습을 많이 보는 것에서, 혹은 동양화에서 나비와 고양이가 같이 그려지는 여러 경우들(예. 김홍도의 황묘농접도黃猫弄蝶圖)에서, 원숭이의 옛말인 ‘납(=잔나비, 잰나비)’에서 나무를 잘 타는 원숭이처럼 고양이도 나무를 잘 타는 것에서, 고려 때 우리나라에 찾아온 페르샤 상인들이 고양이를 가져와 왕에게 드리며 랍비의 수호물이라고 했던 것에서, 심지어는 고양이의 귀가 쫑긋해서 나비처럼 생긴 것에서…등등 여러 추측들이 있지만 추측일 뿐이다.

고양이는 동양화에서 ‘묘猫’의 발음이 70 노인을 뜻하는 한자 ‘어르신/늙은이 모耄’와 발음이 같아 장수하시라는 기원이 되며, 고대 이집트에서는 다산과 풍요의 여신이 되고,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에게는 왈츠의 멜로디와 리듬이 되고, 덩샤오핑(鄧小平)에게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 되며, 브로드웨이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는 뮤지컬이 되고, 인류의 역사 안에서는 기나긴 항해를 비롯하여 심지어 우주로까지 여행한 여행자가 되며, 일본의 가게들 앞에서는 손님과 복을 부르는 손짓이 된다.

내가 사는 수도원에도 밖에서 살다가 수도원 식구들이 된 고양이들 셋이 있다. 지토라는 노랑고양이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왕초이고, 차세대 주자로 노랑고양이를 가끔 놀리는 스모키라는 혼합색깔을 띤 녀석이 있는가 하면, 가끔 생각날 때만 집안에 들어오는 무명의 새카만 고양이가 있다. 나이가 지긋하고 거동이 여의치 않으신 할배들 모두 한결같이 고양이를 좋아하고 거부감을 갖지는 않는다. 고양이들은 집안 어디나 휘젓고 다니면서도 가야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아는 본능이 있고, 가끔 할아버지들 품에 올라가서 하루 종일 쓰다듬어 달라하기도 한다.

고양이는 눈, 귀, 입, 수염, 털, 꼬리, 입술, 발과 발톱, 온 몸을 이용하여 자기 의사를 표현할 줄 알아서 영악하다. 고양이는 사랑스럽고 비벼대며 사랑받으려고 애쓴다. 호기심이 많은 고양이는 하는 짓이 귀여워 사람들을 웃게 한다. 고양이는 수시로 제 몸을 정리정돈하며 귀찮은 흔적을 숨기려하므로 깔끔하고 새침데기이다. 고양이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자느라 대체로 조용하다. 자고나면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며 사람 흉내를 내고 긴 꼬리를 거의 수직으로 세워 놀아 달라 한다. 이렇게 고양이 나라에서는 고양이가 제일이고 고양이의 임무는 그저 노는 것이며 그 놀이는 쥐잡기나 자기 꼬리잡기 같은 것이겠지만, 인간이 고양이를 두고 오래전부터 터득한 보편적 교훈이요 명제라면 그것은 ‘쥐도 궁하면 고양이를 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원래는 ‘궁서설리窮鼠齧狸(狸삵 리)’를 바꿔서 썼다는 ‘궁서설묘窮鼠齧猫(窮궁할 궁, 鼠쥐 서, 齧깨물 설, 猫고양이 묘)’라는 말이 기원 전부터 있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어떤 때는 약자도 믿지 못할 강자가 되고, 패자도 이를 악문 승자가 되기도 한다. 그게 세상 이치이다. 그 누구라도 한편에서 일방적으로 다른 쪽을 너무 몰아세우지는 말아야 한다. 적당한 선에서 못 이기는 척 주저앉기도 해야 한다. 이기기만 하다가도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게 지기도 해야 한다.

인간사의 처세는 그런 것이지만,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설 때의 처세는 무조건 지기만 해야 한다.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 그리고 사람들을 끝까지 참고 또 참아주시는 인내의 하느님께는 다소 불경스러운 표현이지만, 하느님은 인간을 끝까지 몰아붙이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참조. 욥 19,22) 그분 앞에는 인간의 허술한 처세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야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앞에서는 그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하기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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