끙끙거릴, 읊조릴 신呻


작년 말 잠시 귀국하여 건강검진차 1년 반 만에 병원에 갔었다. 아무리 건강을 위해 병원에 간다고 하더라도 병원에 가는 길은 유쾌하지 않다. 40이 넘어서면서부터 나의 체질상 필요하다 하여 ‘대장 내시경’이라는 것을 반드시 하는데, 이는 아주아주 괴로운 과정이다. 맛이 별로인 약물과 함께 물을 적어도 4리터 마셔야 한다는 강박은 거의 고문 수준이고 두려움의 극치이다. 그런데 그때에는 달랐다. 약물을 연구하시는 분들의 노고에 존경을 드렸다. 맛도 그런대로 괜찮아진 약물과 함께 그저 맥주 한 잔 마시는 정도로만 해결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키 재고 몸무게 재는 것으로 해 질 녘에 시작한 짧은 병원 생활의 고통은 잔뜩 기대했던 장 청결제가 아니라 의외의 곳에서 왔다. 6명이 누워있는 병실이었는데, 밤새도록 끊이지 않는 나의 앞자리에 계시는 86세 할아버지의 괴로운 신음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이야 다인실의 당연함이니 그렇다 치지만, 그를 견디지 못하는 옆자리의 마흔 댓 먹은 젊은이의 상스러운 욕설과 예의 없음, 그리고 할아버지의 간병인이 그 젊은이의 외침에 응답하듯 할아버지에게 큰 소리로 ‘제발 좀 그만하세요! 저 사람이 소리 지르잖아요!’ 하는 100번도 넘는 후렴, 그렇게 완벽한 3박자로 밤을 꼬박 새우는 과정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신음呻吟’은 ‘끙끙거릴 신呻’과 ‘읊을 음, 입 다물 금吟’이라는 글자로 이루어졌다. 몹시 앓거나 힘에 겨운 일에 부대껴서 반복해서 입으로 내거나 입 다물고 속으로 앓는 소리를 묘사하는 글자들이어서 두 글자 모두 옆에 ‘입 구口’가 붙어있고, 두 글자 모두 끙끙거리거나 웅얼거리고 노래나 시詩 등을 읊조리는 상황을 묘사한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와 소릿값인 ‘거듭할, 펼 신申’이 합하여 이루어진 ‘끙끙거릴, 읊조릴 신呻’에서 ‘거듭할, 펼 신申’은 번개가 번쩍거리며 하늘에서 땅까지 사방으로 이어지는 모양에서 ‘펴다, 늘이다, 연장하다, 이어지다’라는 의미를 지니다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르는 것이므로 ‘알리다, 말하다, 타이르다, 거듭하다, 되풀이하다, 말하다, 경계하다’라는 의미로까지 나아간다. 이렇게 ‘끙끙거릴, 읊조릴 신呻’이라는 글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입을 통해 밖으로 터져 나오거나 속으로 되새기는 고통의 소리이다. ‘읊을 음, 입 다물 금吟’의 소릿값인 ‘이제 금今’ 역시 ‘금仐’이라는 글자의 원래 글자로서 세월이 흐르고 쌓여(合) 지금에 이르렀다는 뜻이 합하여 ‘지금, 이제’를 뜻하는 것이고 보면 ‘신음呻吟’에는 지금에 이른 인간의 오랜 세월과 울음이 담겼다.

할아버지의 신음 같은 그런 소리를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올빼미 우는 소리에 비유했다. 『올빼미 우는 소리를 가까이 들으면 자연의 소리 가운데 가장 우울한 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자연의 여신이 죽어가는 인간의 신음을 올빼미 소리에 형식화시켜서 자신의 합창단 가운데 영구히 집어넣은 것 같다. 그것은 모든 희망을 버린 한 가련한 인간의 혼이 지옥의 어두운 골짜기를 들어서면서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인데 거기에 인간의 흐느낌이 가미된 소리인 것이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Walden’)』

세상에 자기 존재를 알리느라 커다란 기쁨의 울음으로 태어난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신음하며 생을 마감한다. 어떤 이는 신음으로 자기의 살을 비집고 나오는 생명을 낳고, 어떤 이는 신음으로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을 증명하며 죽어가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숨어서 통곡과 신음으로 눈물짓기를 그치지 않으면서 평생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거나 하늘만 바라보기도 한다. 그럴 때 그런 신음 자리는 어둠 속이고 혼자만의 외로운 곳이며 눈물마저 말라버린 자리이다.

하느님 품을 떠난 인간은 본성적으로 “저는 쇠약해지고 더없이 으스러져 끙끙 앓는 제 심장에서 신음 소리 흘러나옵니다.”(시편 38,9) 한다. 그러나 신음하는 이들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어 인간은 희망을 품는다. “가련한 이들에 대한 핍박과 가난한 이들의 신음 때문에 이제 내가 일어서리라. 주님께서 이르신다. ‘그가 갈망하는 대로 나 그를 구원으로 이끌리라.’”(시편 12,6)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3 thoughts on “끙끙거릴, 읊조릴 신呻”

  1. 구도자로서 살아가는 동안
    혼자 외로운 곳에서 눈물마저 말라버린 신음의 자리가 되지 않기를 _()_
    이 세상에서는 절망 가운데 있을 지라도
    주님께 희망을 두는 거룩한 삶 되기를 _()_

    신부님, 언제나 영육 강건하시길 빕니다. _()_

    1. 결국 사람은 외로움, 괴로움, 혹은 분노 등에서 비롯될 수 있는, 즉 자신을 힘들게 하는 감정을 겉으로던 속으로던 적극적으로 그리고 진실되게 표현 (신음) 해야만, 하느님의 구원을 통해 희망을 가질 수 있다란 생각이 듭니다. 아래에 쓰신 글, 거짓 가, 하고도 같은 맥락이 아닌지 란 저의 아주 부족한 소견을 적어봅니다.

  2. 상대의 아픔을 어찌 감히 다 안다고 하겠습니까? 노환으로 입원하고 계신 어르신의 간병을 하다보면 그 아픔이 얼마만큼인지 알아서가 아니라 신음속에서도 삶의 집착을 하고 있는 끊어질듯 말듯한 생명줄에 매달리는 인간의 모습속에서 죄된 영혼의 몸부림이 느껴져 마음이 많이 아파왔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자만했던 자신에게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대할때 십자가상의 피흘리심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이 먼저 생각나지 않고 인간적인 한계에 이끌려 절망하게 되는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끌보다 못한 내 영혼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높이 찬양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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