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을 존, 술 그릇 준尊/물건 품品

‘높을 존, 술 그릇 준尊’ 이라는 글자는 술병 혹은 술독(酋)을 두 손(寸)에 공손히 받들고 바친다는 데서 존경의 뜻을 나타내어 「높이다」를 뜻한다. 이 글자는 술을 신에게 바치다→삼가 섬기다→존경을 높이 드린다는 것을 나타낸다. 품위品位라고 할 때의 ‘품品’은 ‘입 구口’ 세 개가 모여 쌓인 기물이나 물건의 아가리들의 모습이다. 기물이라는 것이 애초에 제사 등을 드릴 때 쓰는 용기이거나 용품이고 보면 굳이 해설하지 않아도 그 글자의 뜻이 짐작된다. 그렇게 보면 ‘존엄’이나 ‘품위’는 모두 인간이 하느님을 알아서 섬기는 상황과 연결되는 글자들이다.

나는 이곳 수도원의 한편에 있는 산 필립이라는 소위 양로원에서 미제美製로 세끼 밥을 먹는다. 그곳 식당에는 10명이 앉는 식탁이 두 개 있다. 나도 10명 중 한 명으로 한 식탁에 앉는데 내가 앉는 식탁에서는 내가 유일한 외국인이고 60이 한참 넘었어도 내 나이가 제일 어리다. 작년 봄에는 나의 오른쪽에 앉으셨던 마이클이라는 신부님이 돌아가셔서 그분의 장례미사를 지냈다. 나의 옆에서 가끔 농담도 주고받고, 애들이 날갯짓하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하듯 내가 말없이 오른팔로 옆의 신부님을 툭툭 건드리면 신부님도 왼팔로 나를 툭툭거리며 응답을 해주시던 분이다. 신부님은 전동 휠체어를 타거나 걷기까지 하시며 여기저기를 다니시거나 햇볕에 화상을 입을 정도로 정신없이 한참을 주무시기도 하면서 잘 지내시다가 이른 봄 어떤 날 거짓말처럼 병원으로 가셨고, 투석해야 한다는 의사들의 결정을 거부하여 10여 일 만에 선종하셨다.

올해 들어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나의 왼편에 앉아계시던 폴이라는 신부님이 병원으로 가셨다. 기력이 쇠하셨고 약간의 치매기까지 겹친 상황이었다. 매일 저녁 식사 때마다 포도주 반 잔에 물을 타서 드시고 치아가 좋지 않아서 씹는 것은 못 잡수시므로 모든 것을 죽처럼, 그리고 수프처럼 국물에 말아 드시기를 좋아하시던 분이다. 아니 좋아하셨다기보다 그렇게밖에 드실 수 없었던 분이다. 가끔 좋은 고기가 나올 때면 나 스스로 애가 타서 아주 잘게 썰어달라고 주방에 일부러 부탁해서 드리고, 드셔보시라 하면 한참을 애쓰다가도 결국 못 잡수셨던 분이다.

함께 계시던 할아버지들이 병원으로 가시면 응당 찾아가 뵙는 것이 도리인 줄 알지만, 썩 내키지 않는다. 이미 이곳에서도 현재로 보았던 나의 미래를 또 다른 모습으로 마주친다는 것이 두렵고 싫어서일 것이다. 폴 신부님께서 병원에 계시다가 요양원으로 옮기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저 생각만으로 요양원에 계시는 신부님을 가서 뵈어야지 하다가 그렇게 날이 하루 이틀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엊그제 본당의 한 자매가 신부님을 뵈러 다녀왔다고 했다. 자매님에게 전화해서 근황을 상세히 여쭤보았다. 얘기 중에 가진 옷이 하나도 없어서 그저 기저귀만 채워서 눕혀 놓은 것을 보고 허겁지겁 고무줄 달린 바지 같은 것을 사고 옷가지를 좀 사서 이름표 달아 입혀드리고 왔다고 했다. 요양원의 특성상 빨래를 공동으로 해서 이름표가 없는 옷은 주인 없는 옷이 되므로 그런 시설에 가게 되면 양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류에 이름표를 새기는 것이 필수이다. 온도 조절이 잘 되고 문제가 없을 것이므로 옷을 벗고 계셨어도 생존에 지장은 없었겠지만, 관리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그저 기저귀만을 채워서 눕혀 놓았다는 말을 듣고는 공허했고 왠지 모를 눈물이 핑 돌았다. 옷이 없으면 그 누구라도 옷을 가져오라고 연고자에게 전화 한 통 해주기가 어려운 미국의 시스템이라는 것과 개인주의, 그리고 가족 없고 마누라 없이 사는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새삼 품위와 존엄은 어디서 생겨나고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왜 인간은 그렇게 있으면 안 되는가 하는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었다.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거창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들은 제쳐놓고 그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타인에 의해서 그렇게 처리(?)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적어도 초자본주의 사회인 이곳 미국에서 인간의 품위는 그렇게밖에 유지될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의 품위와 존엄, 그리고 고귀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니 어떻게 지켜지는 것일까?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 의복일까? 생명이 붙어 있다는 사실일까? 생김새나 외모일까? 명료한 의식이 없을지라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행위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는 도덕적 기준에 입각한 습관으로 몸에 익혀진 행동의 반응일까? 하느님을 알아 모신다는, 아니 의식이 멀쩡했을 때 하느님을 알아 모셨다는 경력일까? 타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면서 나의 자율성을 확보해야 하는 동물이 인간이라 했는데, 그 자율성이 상실된 상황에서 자율성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이고 품위나 존엄성과는 관계가 있을까? 이런 의문들은 한낱 무엇으로 존중받는가가 아니라 왜 존중해야 하는가를 따져야 하는 건너편 남은 자들의 의문일 뿐일까? 실체적 개념들이 아니라 신·인간·자연이라는 관계의 맥락 안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존엄성을 근거 지어야 한다는 말은 과연 어떤 말일까?

생각은 많았지만, 답은 없었다. 그저 지금 의식이라는 것이 말짱할 때 내게도 닥칠 그런 상황에 대하여 글로라도 뭔가를 써 놓아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틈날 때마다 가진 옷들에 이름표라도 새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하느님께서는…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하여 그렇게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지어져 존엄하다 하였다. 온갖 시련을 겪느라 존엄이나 품위는 고사하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고통의 인간 욥이 주님 앞에서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욥 40,4) 할 때, “폭풍 속에서” 말씀을 이으신 주님께서 “존귀와 엄위로 꾸미고 존엄과 영화로 옷을 입어 보아라.”(욥 40,10) 하시므로, 욥은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 42, 5-6) 하며 고백한다. 바오로 사도 역시 “다만 모든 일이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합니다.”(1코린 14,40)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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