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 의意

‘뜻 의意’라는 글자는 ‘소리 음音’과 ‘마음 심心’의 결합이다. 피리에서 나오는 소리를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지고, ‘말씀 언言’과 같은 글자였다고 알려지는 ‘소리 음音’이 ‘마음 심心’ 위에 앉았다. 옛사람들은 머리가 아닌 마음이 하는 것을 생각이라고 믿었으므로 마음의 소리는 ‘뜻, 의지, 의미, 생각, 헤아리다’ 이다. 나의 밖에 있는 대상을 보고 내가 한 생각, 대상이 나의 마음에 작용하며 불러일으킨 생각, 내가 보든 대상이 자신을 드러내어 나에게 비치든, 마음에 일어나는 소리와 맺히는 생각들이 ‘뜻 의意’이다.

‘소리 음音’에 ‘풍류 악樂’을 더해 ‘음악音樂’이 되면 마음의 소리가 가락을 통해 시간과 공간 속에 번진다. 음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악보’라는 약속 아래 같은 마음을 노래하는 인간의 또 다른 언어이다. 그래서 악보는 약속이고 언어이다. 세상 어디서나 그 악보에 따라서 같은 소리를 내고 같은 곡을 연주하도록 약속된 음악이라는 언어이다. 우리 인간은 남녀노소 누구나를 막론하고 하느님과 인간 간에 맺어진 약속을 따라 움직이도록 요청받는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마음이라는 악보에 양심이라는 음표와 지성이라는 박자를 당신 손가락으로 새겨 사람 수만큼의 멋진 인생 곡들을 연주하신다.

소리에 나의 가치관과 주관이 개입되어 정돈되면 ‘뜻 지志’가 된다. ‘뜻 의意’나 ‘뜻 지志’ 두 글자 모두 ‘마음 심心’을 기초로 한다. ‘지의志意’라고 하지 않고, ‘의意’가 먼저 오고 ‘지志’가 나중에 오는 것처럼 ‘의意’를 앞에 두어 ‘의지意志’라 한다. ‘회의會意’는 ‘모일 회會’를 더해 여러 생각을 모으는 것이다. ‘뜻 의意’에 ‘마음 심心’을 한 번 더 덧붙인 ‘억憶’이라는 글자는 통상 ‘기억하다’ 할 때의 ‘생각할 억憶’이 되면서 곱씹어 마음에 박히는 생각이다. ‘뜻 의意’에 ‘맛 미味’가 더해진 ‘의미意味’는 내가 새긴 것이거나 나에게 와서 스스로 새겨진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맛을 음미하듯이 혀끝으로 느끼는 인생의 뜻이고 값어치이다. 마음의 소리는 뜻이 되고, 뜻은 기억을 넘어 의미를 낳는다. 어쩌면 인간은 ‘의미’를 양식으로 삼아 생명을 연장한다.

의미를 찾으려는 욕구가 좌절될 때 인간은 절망한다. 단순한 욕구와 본능의 좌절이 아니고 실존적 공허에 휩싸일 때, 이를 ‘누제닉 노이로제noogenic neurosis’라 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유명한 빅토르 프랭클Viktor Emil Frankl(1905~1997년)의 말이다. 유다인으로서 다른 인간에 의해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속절없이 죽어가던 처절한 상황을 겪고, 이를 회상하면서 빅토르 프랭클은 「로고테라피」라는 독자적인 이론을 정리하는데, 그래도 살아야 했기에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 대신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빅토르 프랭클은 『한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는 있지만, 한 가지 자유는 빼앗아갈 수 없다. 바로 어떠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삶에 대한 태도만큼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더는 상황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도전을 받는다…수용소에서 누군가는 돼지였고 누군가는 성자였다. 돼지가 될 것인지 성자가 될 것인지 하는 것은 수용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결정이었다…』와 같은 체험을 내놓으며 인간 각자가 자기만이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창조가치),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체험가치),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시련에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태도가치) 행복해질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다 한다. 어쩌면 행복은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고 의미를 찾다 보면 덤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세상에는 (물론) 수많은 종류의 언어가 있지만, 의미가 없는 언어는 하나도 없습니다.”(1코린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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