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할 변變

이곳 플로리다 여름 나라에도 나름 계절이 변한다. 9월 말이나 10월쯤 되면 사람들이 ‘지옥 끝, 천국 시작’이라고 부르는 좋은 시절에 들어간다. 신기하게도 이때만 나오는 과일들을 보면 실감한다. 반대로 천국이 끝나고 지옥처럼 더운 여름이 될 때면 ‘아, 또 그때가 왔구나!’ 싶다.

거의 같은 뜻으로 쓰는 것 같아도 계절이나 사물, 혹은 상황이나 사실이 A에서 B로,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것과 같은 내용을 ‘바뀌다’라고 하고, 한 내용 안에서 성질이나 모양, 상태 등이 달라지는 것을 ‘변하다’라고 한다. 이때 ‘변変’이라고 쓰는 ‘변할 변變’은 소릿값인 ‘어지러울 련/연䜌’과 뜻을 담은 ‘등글월 문攵=칠 복攴’의 조합이다. 두들겨서라도 어지럽게 뒤죽박죽이 되어있고 헝클어져 있는 무엇인가를 하게 해서 어지러운 심사나 상황을 바로잡아 달라지게 하는 것이다. 계절이 변화되는 시기는 그래서 마음을 정리하는 때이다. ‘변할 변變’이라는 글자를 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글자의 정 중앙에 ‘말씀 언言’의 ‘입 구口’가 자리하고 있으므로 정리된 마음으로 가지런히 정돈되면 절제된 입놀림으로 말이 나올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변할 변變’은 그래서 입으로 드러난다.

이렇든 저렇든 계절이 바뀌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여유와 기회를 갖는 것은 축복이다. 햇빛을 받아 지구라는 별의 얼굴이 바뀌는 것처럼 대기의 기온이 바뀌면서 호수의 얼굴도 바뀐다. 그러나 사람은 바뀌지 않고 달라진다. 변화한다. 사람이 바뀌면 사람들이 ‘죽을 때가 되었나!’ 한다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어서이다. 달라지고 변화한 사람이 어느 순간 계절이 바뀌는 것을 바라보면 슬프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오직 바라만보거나 느낄 수만 있는 인간의 때는 매우 슬프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나의 상처를 보여드리기 위해 변화되어야 한다. 현세적인 것은 영원한 것으로, 육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내 안에 갈라진 것은 하나로, 속된 것은 거룩한 것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은 원래 하느님께서 지으신 모습이므로 변하지 않는 존재여서 은총으로만 변화할 수 있다. 하느님만이 나의 의지, 사고, 몸, 내 존재 전체를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총을 기도한다. 기도로 이루어지는 변화는 고통을 수반하고 고통을 수반하는 변화만이 참된 변화이다. 어쩌면 고통의 극치인 죽음으로만 가능한 변화가 궁극의 변화이다.

인생살이 동안 나의 내면에서 어지러움을 몰아내야 한다고 아등바등하지만, 절대 나가지 않을 그것들을 내몰지 말고 변화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한 변화는 고요와 평온의 기도 자리에서만 가능하다. 신앙인들에게 진정한 변화는 성화聖化이다. 하느님께 맡기고 그분이 나를 변화시켜주시기를 청하여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하느님께 맡기는 것만 은총을 힘입어 변화할 것이다.

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선한 뜻을 담은 간절한 지향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설렘도 있어야 하며, 변화를 도모하는 차분한 실행계획이 있어야 하고, 변화를 이루어내는 요령도 있어야 하며, 변화를 향해 가는 내적인 힘이 있어야만 한다. 지향, 설렘, 실행계획, 요령, 힘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혼란스럽고, 불안하며, 내키지 않는 짜증이 앞서고, 좌절의 우울이 엄습하든지, 산만함으로 모든 것이 엉키고 만다.

프랭클린Franklin(1706~1790년)은 세상에는 절대 변하지 않는 사람과 변할 여지가 있는 사람, 그리고 변화하는 사람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바뀜과 변화가 다르고, 단순한 변화와 더 나은 쪽으로의 변화는 아주 다르다.

슬기로울/지혜 혜慧

‘슬기로울/지혜 혜慧’라는 글자는 위에서부터 차례로 모양을 살펴보면 땅에서 싹이 올라오는 모습의 상형인 ‘풀 초艸’ ‘또/손 우又’ ‘마음 心’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글자이다. 丰丰는 갈대나 싸리 같은 것을 한데 모아 묶은 형상이어서 이것이 ‘풀 초艸’이고, ‘또/손 우又’은 다섯 개의 손가락이 달린 손을 간략하게 서양의 포크나 삼지창처럼 표현하여 옆으로 눕혀놓은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살 별 수/세/혜彗’가 소릿값이 되어 뜻에 해당하는 ‘마음 심心’ 위에 올라앉아 있는 글자가 바로 ‘슬기로울/지혜 혜慧’이다. 그런데 ‘살 별 수/세/혜彗’에서 ‘살 별’, 혹은 ‘빗자루 별’, 혹은 ‘길쓸 별’ 등으로 불리는 별이 바로 ‘혜성彗星’이라 한다. 혜성이라는 별을 빗자루 별이나 길쓸 별로 불렀지만 이를 ‘살 별’이라고도 불렀다는 것은 왜 그런지 국립국어원은 어원이 불명확하다 한다. 아무튼, 길을 쓰는 데에 빗자루 자국이 있듯이 밤하늘에 시작은 별이지만, 빗자루처럼 생긴 긴 꼬리 자국을 끌며 운행하는 별이 혜성이다. 갈대나 싸리 같은 것을 묶어서 손에 들고 길이나 마당을 쓰는 것이 빗자루이고 그 모양을 본떠 ‘혜彗’가 만들어졌으므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슬기로울/지혜 혜慧’는 빗자루(彗)가 마음(心) 위에 올려져 있으므로 빗자루로 정갈하게 마음을 쓸어내어 정돈한다는 의미, 혹은 지혜는 마음공부를 바탕으로 우러나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 바른 앎, 깨달음, 현명, 통찰력, 총명, 슬기로움, 영리함이라는 뜻으로 혜안慧眼, 지혜智慧, 지혜知慧 하는 등의 말에 쓰인다.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 같지만, 지혜知慧(알 지)는 무엇이고 지혜智慧(슬기 지)는 무엇일까가 궁금해진다. 전자는 단순히 알고 깨우쳐서 헤아리는 슬기로움이고, 후자는 ‘날 일日’이 붙어 있으니 매일매일 알고 깨우치는 슬기로움인지, 아니면 매일매일의 수련으로 누적된 노숙한 슬기로움인지… 그러고 보면 후자인 지혜智慧가 지혜知慧보다는 애들 말로 조금 더 ‘있어’ 보인다. 이렇든 저렇든 ‘슬기로울/지혜 혜慧’는 빗자루도 빗자루이지만 ‘마음 심心’과 어우러져 만들어진 글자이므로 뜻이 깊다.

마음은 생각의 원천이고 감정의 발원지이며, 도덕적 결정이 내려지는 자리요 성품이 결정되는 자리로서 인간의 중심이고 나아가 우주의 기운을 만나는 텃밭이다. 그런데 그 마음은 내 안에 있는듯하다가도 자유분방하여 어느새 나의 밖에 있으니 붙잡고 있어야 하고, 나도 모르게 내가 놓아버리니 되찾아와야 하며, 원래 선하였을지라도 자칫 사악한 것들이 꾀어 비뚤어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니 정성을 다해 보살펴야 한다. 맹자께서 공자님의 말씀이라며 전해준 바에 따르면, 『공자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잘 가꾸고 조절하면 존속하지만, 버리고 방치하면 없어지고 만다. 출입에 일정한 때가 없으며 그것이 어디로 향할지도 잘 모르겠다.’ 이 공자님의 말씀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겠는가? 孔子 曰: ‘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김용옥, 맹자, 고자告子 상上, 6a-8)』 하셨다. 이것이 배움의 길이고 깨우침의 길이며 슬기로움이고 ‘지혜’이다. 그런데,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되지 않는 것이 있으며, 사악한 것들의 꼬드김은 교묘하여 인간의 마음을 속이기 쉬우니, 겸손하게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고 더하기 위해 무릎 꿇어 기도하며, 하느님 앞에서 매일 마음을 성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인은 “잠자리에서 죄를 꾸미고 좋지 않은 길에 서서 악을 물리치지 않는”(시편 36,5) 더러워지고 나쁜 마음을 끊임없이 경계하며,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시편 51,4)” 한다.

메/뫼 산山

‘메/뫼 산山’이라는 글자는 가운데 긴 획을 먼저 쓰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산봉우리 셋을 표현하는 3획으로 된 글자로서 부수로 쓰일 때 산이나 고개 등과 관련된 글자이다. 발음에 해당하는 ‘산’은 우리말이다. 공교롭게도 우리말 ‘산’을 표현하는 수화의 글자 모양새는 서양에서 가운데 있는 손가락을 세워 상대방을 모욕하는 욕설에 해당하는데, 이는 한자의 글자 모양을 그대로 본떴을 뿐이다. 그 ‘산’을 두고 오래된 우리말은 ‘묗’라 한다는데, 이것이 변해서 오늘날의 ‘메’가 된다. 산에 사는 돼지 ‘멧돼지(메+돼지=산돼지)’, 산에서 울려 되돌아오는 소리 ‘메아리’, 산이나 들에서 자라 거칠고 찰기가 없는 밀 ‘메밀’, 차조와 대비되는 좁쌀 ‘메조’ 하는 말들에서 보듯이 ‘산山’을 가리키는 ‘메’를 뜻으로 붙여 ‘메 산山’이라 하는데, 이를 ‘뫼’라 하기도 하는 것은 한자 부수로 일컬을 때 ‘메’가 잘못 굳어진 것이다.

‘山’이라는 한자는 생김새 그대로 보아서 봉우리 모양이지만, ‘불 화火’라는 글자의 오래된 형태와 서로 닮아있기 때문에 ‘산(山)’과 ‘불(火)’이 연관이 깊은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山’은 한자 부수로서 대단히 많은 글자를 만든다. 간단한 글자들 몇 개만을 예로 들어본다면, ‘언덕 구丘’와 함께 아주 큰 언덕인 ‘큰 산 악岳’이 되고, ‘돌 석石’과 함께 산에 있는 돌인 ‘바위 암岩=巖’을 만들며, 가장 뛰어나거나 으뜸을 뜻하는 ‘마루 종宗’과 함께 ‘높을 숭崇’을 만들고, ‘새 조鳥’와 함께 날개 달린 새만이 날아서 도달할 수 있는 바다 위의 산 ‘섬 도島’를 만들며, ‘재 회灰’와 함께 산에 묻혀 돌처럼 굳은 재를 가리키는 ‘석탄 탄炭’을 만들고, ‘사람 인人’과는 깊은 산 속에서 신비롭게 살아간다는 ‘신선 선仙’을 만든다.

‘山’이라 하면 무엇보다도 나의 머릿속엔 1977년 에베레스트(8,848m) 정상에 세계에서 56번째로 올라 우리나라를 정상에 오른 8번째 국가가 되게 해주었던 분, 380여 ㎞를 21일에 걸쳐 걷고 98개의 사다리를 놓으며 빙벽을 기어 세계 최고봉에 올라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다’는 말을 외친 빨간 색 등산복 차림의 고상돈(1948년~1979년) 님이 떠오른다. 귀국 후에는 국가적 경사를 두고 성대한 귀국 축하 카퍼레이드가 열렸고, 그의 직장이었던 전매청에서는 에베레스트 정복 기념 ‘거북선’이라는 담배를 만들기도 했으며, 기념 우표나 그의 사진을 담은 주택복권도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그의 동상도 있고 기념도로도 있으며 기념관도 있지만, 정작 31세의 젊은 그가 북미주 대륙의 가장 높은 산을 오르고 난 후, 끝내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던 디날리(일명 맥킨리) 산(6,194m)을 향해 출발했던 마을 탈키트나Talkeetna 산악인들의 묘소에는 ‘한국일보 재미 대한 산악연맹’이 마련한 기념 표석만이 자리하고 있다.

죠지 멜로리George Mallory(1886~1924년)는 『산이 그곳에 있어서 오른다. Because it’s there.』 했고, 찰즈 스니드 휴스턴Charles Snead Houston(1913~2009년)은 『우리 일상의 사소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순간, 본질적이 아닌 것들을 벗겨내기 위한 순간, 삶 자체의 핵심으로 내려가기 위한 순간…위대한 산 위에서 모든 목적이 정상 정복이라는 단 하나의 사실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 그것은 시도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산에 오른다. 우리는 산에 오르면서 성취보다도 더욱 위대한 어떤 것들을 발견한다. In answer to the question “Why climb mountains?” Houston concluded: “It is the chance to be for a moment free of the small concerns of our common lives, to strip off non-essentials, to come down to the core of life itself… On great mountains all purpose is concentrated on the single job at hand, yet the summit is but a token of success, and the attempt is worthy in itself. It is for these reasons that we climb, and in climbing find something greater than accomplishment.”』라고 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산 하나가 보이지 않고 뜨겁기만 한 플로리다에서는 높은 산들이 많고 춥게만 느껴지는 곳, 미국 내에서는 정반대인 곳의 알래스카가 그립다. 산은 높고, 두렵고, 가까운 듯싶어도 어느샌가 멀리서만 보인다.

성경에서 산은 모세가 불타는 떨기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 거룩한 땅에 서게 될 때 자신의 신발을 벗어야 했던 곳(탈출 3,1-5), 모세와 하느님께서 계약을 이룬 곳(탈출 24,1-11), 엘리야 예언자가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1열왕 19,11)는 말씀으로 죽다가 살아난 곳,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유혹하던 악마를 물리쳐야 했던 곳(마태 4,8-11), 대중 연설의 가르침을 베푼 곳(산상 설교 마태 5-7장), 당신 미래의 영광을 변모로 제자들에게 흘낏 보여주신 곳(마태 17,1-9), 밤새워 번민을 기도하시던 곳(마태 26,36-46),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했던 곳(마태 27,32-37) 이다.

어디에서나 산은 하느님의 자리이고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여서 인간사의 모든 것이 그대로 담겼다.

끊을 절切/絕=絶

무엇인가를 끊는다는 뜻으로 글자를 찾으면 맨 먼저 연상되는 것이 ‘칼 도刀’가 들어가 있는 ‘끊을 절切’이다. 소리에 해당하는 ‘일곱 칠七’과 뜻에 해당하는 ‘칼 도刀’가 합쳐져 이루어졌다는 ‘끊을 절切’은 ‘일곱 칠七’ 역시 칼질의 모양새이므로 칼날과 같은 것으로 무엇을 베어내고 잘라내어 동강을 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자는 또한 ‘온통/모두 체切’라고도 새겨서 ‘일체一切’와 ‘일절一切’이 어떤 경우에 쓰이는가 하고 시험문제에 자주 등장했던 말이기도 하다. 전자는 명사일 때 ‘모든 것, 온갖 사물’ 부사일 때 ‘통틀어서, 모두’라는 말이고, 후자는 부정적인 의미를 강조할 때 쓰는 부사로서 ‘아주, 도무지, 전혀, 결코’라는 말이라고 외웠던 기억이 있다.

그 ‘절切’이라는 글자가 더해 생긴 낱말 ‘친절親切’에서 도무지 ‘절切’이 붙은 이유를 몰라 아주 오랫동안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절切’은 중국어 문법상 절단한다는 뜻으로는 1성으로 발음하고, 가깝다는 뜻으로는 4성으로 발음하는 것이어서, ‘친절親切’ 할 때의 ‘절’은 4성으로서 친하고 가까우며 우호적이고 정성스럽다는 것을 뜻하여 친절이라 한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 뜻으로 ‘절실切實’(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이 긴요하고 다급하다) ‘간절懇切’(정성 간懇-무엇을 바라는 마음이 지성스럽다) ‘애절哀切’(애가 타도록 견디기 어려운 상황) ‘절박切迫’(닥칠 박迫-급한 상황이 가깝게 다가옴) 하는 말들도 가능하게 된다. ‘친절親切’의 ‘절切’을 알아내기는 ‘은행銀行(bank)’이라는 낱말에 왜 ‘갈 행/항렬 항行’이 붙어 있을까를 알아내는 것만큼 어려웠다.(*‘행/항行’에는 사고파는 곳이라는 뜻이 있다)

‘끊을 절切’은 칼과 같은 것으로 어떤 사물을 끊어내고 잘라낸다는 뜻이 강하지만, 하던 일을 멈추거나, 더는 하지 않는다, 사람의 인연이나 관계와 같은 것을 끊는다고 할 때는 이와 달리 ‘끊을 절絶(=絕)’이라는 글자를 쓴다. 이는 ‘가는 실 사糸’ ‘칼 도刀’ 그리고 ‘꼬리/바랄/땅이름 파巴’이거나 혹은 ‘알 란/난卵’의 오른쪽(병부 절卩)이 붙어있다고 보는 것인데, ‘사糸’ ‘도刀’는 당연히 연결된 상태를 끊는다는 점에서 ‘끊을 절絶(=絕)’이라는 글자 그대로라 할 것이다. 문제는 ‘파巴’나 ‘절卩’인데, 이는 두 글자 모두 사람이 꿇어앉아 있는 모양에서 온다. 이렇게 보면 ‘끊을 절絶(=絕)’은 무릎 꿇고 앉아 정성을 다해 무엇인가를 끊어낸다는 것이거나, 아니면 무릎을 꿇고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람으로써만 끊어지는 어떤 것이다. 사실 ‘파巴’라는 글자에는 ‘바라다’라는 뜻이 있기도 하다. 이런 글자들로 이루어진 ‘끊을 절絶(=絕)’은 뜻이 발전하여 ‘끊다, 끊어지다, 가로막다, 사이를 띄우다, 없애다, 멸망시키다, 건너다, 지나다, 뛰어나다, 빼어나다, 물이 마르다, 망하다, 숨이 그치다, 없다, 떨어지다, 결코, 몹시, 심히 등등’과 같은 다양한 뜻을 지닌다. 마치 우리 말에서 ‘끝내다’는 말이 ‘끝내준다’라는 말로 나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끊을 절絶(=絕)’과 함께 만들어지는 말들은 거절拒絶(막을 거), 단절斷絶(끊을 단), 사절謝絶(사례할 사), 근절根絶(뿌리 근), 의절義絶(옳을 의), 애절哀絶(슬플 애), 처절悽絶(슬퍼할 처), 절연絶緣(인연 연), 절교絶交(사귈 교), 절망絶望(바랄 망), 절명絶命(목숨 명), 절필絶筆(붓 필), 절경絶景(경치/볕 경), 절대絶對(대답할 대-상대할 것이 없음), 절색絶色(빛 색-더할 나위 없이 빼어난 미인), 절묘絶妙(묘할 묘), 절정絶頂(정수리/꼭대기 정), 절호絶好(좋을 호-더할 나위 없이 좋음), 절규絶叫(부르짖을 규), 절체절명絶體絶命(몸도 목숨도 다 되어 어쩔 수 없는 지경), 포복절도抱腹絶倒(배를 부여잡고 뒤집힐 정도로 몹시 웃음)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말들이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삶 안에서 온통 잘라내거나 베어버려야 할 것들이 있고, 단호하게 끊어야 할 것들도 있다는 것을 내심 잘 알고 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산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이고 유약함이다. “자기 잘못을 감추는 자는 성공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고백하고 끊어 버리는 이는 자비를 얻는다.”(잠언 28,13) 하는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것은 세월이 가면서 잘라내고 끊어내야 할 것들이 이미 여러 겹으로 꼬아져 질긴 실(糸)이 된 까닭일 것이다. 이를 끊으려면 무릎 꿇은 정성과 예리한 단호함으로 간절한 기도와 함께 끊어내야만 한다. 그러라고 나를 오늘 하루 더 살게 하시고, 어리석은 바보처럼 매번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시는 하느님은 그래서 참으로 인내의 하느님이시다.

나이, 해 년年

나는 먹은 기억이 별로 없는데 먹었다 하고, 해는 절로 가며, 나이는 스스로 든다. 아무리 동안童顔이라고 자위를 해도 나이와 해의 자발적自發的인 작동은 야금야금 어느새 내 안에 자리를 잡고 문득 친구들의 사진이라도 흘낏 볼라치면 결국 내가 저 모양새일 것이라는 생각에 섬뜩해진다.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매일 보는 자기 얼굴은 볼 줄 모르고 다른 이들의 얼굴을 보고서야 자신의 얼굴이 지닌 참모습을 가늠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나를 속일 수는 있어도 나이는 눈치 빠르고 영리해서 속일 수가 없다. 내세울 것이 없어서 나이 덕이나 입자고 해도 그것은 추레하다. 먹는 것도, 드는 것도, 하나둘 세는 것도 아닐 테지만, 과연 나이는 먹는 것인가, 드는 것인가, 세는 것인가?

年은 사람(人·인)이 볏단(禾·화)을 지고 가는 모습으로 수확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해 년마다 수확하는 곡식의 주기를 생각해서 365일 한 바퀴를 도는 한 해, 두 해 할 때의 ‘해’라는 뜻이 더해졌다. ‘년年’이라는 글자에 담겨있다는 ‘벼 화禾’는 ‘사람 인人’과 ‘천千’으로 짜여 있는데, 이 글자의 원래 모습은 곡물의 이삭이 늘어진 모양에서 왔다. 이때의 ‘천千’은 ‘많다’는 내용이다. ‘천千’을 두고는 ‘일천 천’이라 하기도 하고 ‘밭두둑 천’이라고도 한다. 이래저래 한 해를 돌면 또 한 번의 가득한 곡식의 수확을 얻는다는 뜻이 담겨있는 ‘나이, 해 년年이라는 글자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시간의 경과 속에서 별로 거두는 것이 없는 인간에게는 내심 썩 부담스러운 자격지심을 유발하는 글자임이 틀림없다.

‘연/년’이라는 글자를 넣어 만들어진 단어들은 무엇이 있을까 싶지만, 일상에서 곧잘 쓰는 연간年刊(책 펴낼 간) 연금年金 연내年內 연대年代(대신할 대) 연도年度(법도 도) 연두사年頭辭(말씀 사) 신년사新年辭 연례年例(법식 례) 연령年齡(나이 령) 연륜年輪(바퀴 륜) 연리年利(이로울 리) 연보年譜(계보 보) 연봉年俸(녹 봉) 연상年上(윗 상) 연세年歲(해 세) 연대기年代記(기록할 기) 연령층年齡層(층 층) 연하장年賀狀(하례 하, 형상 장) 등등 무수히 많다.

성경이 말하는 ‘나이, 해 년年’은 한결같이 하느님의 앞에 선 인간의 보잘것없는 지혜, 죄와 허물, 기품 등과 관련이 있다. 갖은 고생을 치른 욥을 변호하는 이는 “저는 ‘나이가 말을 하고 연륜이 지혜를 가르쳐야지.’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사람 안에 있는 영이, 전능하신 분의 입김이 사람을 깨우치는 것이더군요. 연만하다고 지혜로운 게 아니요 연로하다고 올바른 것을 깨닫는 게 아니랍니다.”(욥 32,7-9)라면서 욥을 두둔하고, 지혜로운 왕 솔로몬이 썼다고 알려지기도 하는 지혜서의 저자는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지혜서 4,8) 하며, 악한 이를 벌하는 소년 다니엘 예언자는 “악한 세월 속에 나이만 먹은 당신, 이제 지난날에 저지른 당신의 죄들이 드러났소.”(다니 13,52) 한다. 예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아 눈을 뜬 소경의 부모는 못된 바리사이들에게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요한 9,21) 하고, 바오로 사도는 “나이 많은 남자들은 절제할 줄 알고 기품이 있고 신중하며, 건실한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지녀야 합니다.”(티토 2,2) 한다.

나이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거둘만한 것이 있어야 먹었다 하고, 들었다 한다. 그래서 신체적인 나이는 먹었으되 정신 연령이 낮거나 주책스럽고, 아직은 싱싱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두고는 ‘나이가 아깝다’ 하고, ‘나잇값을 못 한다’ 한다.

비 우雨

새들이 낮게 나는가 싶더니 움직임이 뚝 그치고, 주변이 조용해지며, 장난꾸러기 다람쥐들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고, 멀리서 번개가 어렴풋이 번쩍이고, 손에 잡힐 듯 가까이 하늘 가득하던 하얀 구름이 슬슬 어두운 구름으로 덮여 어두워지며, 바람이 북쪽에서 불기 시작하다가 천둥이 잦아지며 소리가 가까워지면, 곧 비가 온다는 징조이다.

허리케인 시즌이 되어 며칠을 두고 1년에 내릴 비가 한꺼번에 오듯이 내릴 때 비로소 우기 시즌인지 알았던 것 같은데, 작년과 달리 금년에는 비가 잦다. 이것이 플로리다의 장마일까? 작년에 이러지는 않았으니 플로리다의 장마는 해거리를 하는 것일까? ‘장마’라는 단어가 한자 말인 줄 알고 찾았다가 16세기부터 ‘댱마’라고 쓰던 우리 말에서 기원하였다는 것을 알고 머쓱해진 적이 있다.

‘비 우雨’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의 모습을 그렸다. 이 글자를 부분으로 삼아서 만들어진 또 다른 글자들은 300개가 넘는다 하니, 가히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하는 땅 사람들의 삶과는 뗄 수 없는 글자이고, 때와 철에 따라서, 해야만 하는 일상과 연관되어 있다. 구름 운雲, 구름무늬 문雯, 눈 설雪, 번개 전電, 우레 뇌/뢰雷, 벼락 벽霹, 벼락 진震, 우박 박雹, 서리 상霜, 안개 무霧, 이슬 로露, 진눈깨비 영雵 같은 몇 개의 글자만을 보아도 글자들이 다양하고 그 안에 각각의 사연이 담겼다. ‘비 우雨’라는 글자와 함께 만들어진 비의 종류만 헤아려도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장마’ 때처럼 많이 내리는 비만 헤아려보더라도 매실이 누렇게 익을 무렵에 내리는 비라서 梅雨(매화나무 매), 오랫동안 내리는 비라서 久雨(오랠 구), 숲처럼 쏟아지는 비라서 霖雨(장마 림/임), 연이어 내리는 비라서 連雨(잇닿을 련/연), 온 뒤에 또 내리는 비라서 積雨(쌓일 적), 장마가 져 물의 수위가 높게 불어나게 하는 비라서 滈雨(장마 호), 호탕하게 내리퍼붓는 비라서 豪雨(호걸 호), 비의 강도나 수준이 비교 대상을 훨씬 넘는 비라서 凌雨(업신여길 능/릉), 무섭고 사납게 내리는 비라서 暴雨(사나울 폭) 등 다양한 말들이 있다.

이런 비들이 내리면 밖에 나갈 수 없어 방에 앉아 한참 창밖을 내다본다. 그러면 우산 파는 아들과 짚신 파는 두 아들을 두어 비가 오든 오지 않든 시름이 깊어간다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떠오르고, 천하의 불효 자식이 뒤늦게 뉘우쳐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이라도 지켜볼 양으로 물가에 어머니를 묻고 떠내려갈지도 모르는 어머니 때문에 비가 올 때마다 울어댄다던 청개구리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살랑거리는 아지랑이와 봄비가 얽혀 봄 강(春江)을 짠다 했지만, 여름철에 내리꽂는 장대비와 숨 가뿐 땅의 입김이 얽혀서는 왠지 모를 추억과 한숨이라는 삼베옷을 짓는다. 그래도 플로리다의 거칠고 야성적인 비는 금방이다. 언제이냐 싶게 맑은 하늘을 돌려주면서 후끈한 열기로 지겹던 비를 다시 그리워하게 한다. 보기 힘들다는 쌍무지개도 많고 여우가 시집가고 호랑이가 장가가는 날도 많다. 비는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 올 때 해 뜨는 것은 헤아리지 않으면서도, 비 올 때 해 뜨는 것을 두고는 이야기를 지었나 보다. 그렇게 해가 뜨면 하얀 구름은 하늘에 형형색색의 놀이를 다시 시작한다. 그렇게 금방 하늘 구름은 잡힐 듯 눈앞에 있는데, 푸른 풀밭은 멀리 끝 간 데가 없다. 그렇게 구름, 하늘, 해, 풀밭, 비와 함께 뜨거움이 지나간다.

성경에서 가장 오랜 비요 끔찍하고 무서운 비는 사십일을 두고 밤낮으로 내려 하느님 손수 지으신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려고 내린 비, “심연의 모든 샘구멍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내린 비, “물이 불어나, 온 하늘 아래 높은 산들을 모두 뒤덮은” 비, 그래서 “마른 땅 위에 살면서 코에 숨이 붙어 있는 것들이 모두 죽은”(참조. 창세 7장) 비이며 파라오의 못된 심보로 “우레와 우박”과 함께 내린 비이지만, 모세가 주님께 “손을 펼치자 더 이상 쏟아지지 않은 비”이며(참조. 탈출 9,13-35), 엘리야 예언자가 카르멜 산에서 참 하느님을 섬기지 않던 바알 예언자들을 혼내주던 비(참조. 1열왕 18장)이고, 삼년 육 개월 동안 내리지 않게 했던(참조. 야고 5,17) 비이다. 이래저래 성경의 비는 인간의 못된 행실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고 하느님의 권능이지만, 주님께 돌아설 때 멈추는 재앙이고 오히려 복이다. 하느님께서 “비가 내리도록 번개를 만드시고 당신의 곳간에서 바람을 꺼내시지만”(예레 10,13;51,16), 제 때에 내려주시는 비는 복이 된다.(참조. 에제 34,26)

다행 행幸

행복이 원하고 추구해서 되는지 모르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고 싶다 하며 행복을 추구하고, 현재의 자기 행복을 가늠하는 습성을 지닌다.

‘행복’이라는 말마디를 만드는 앞글자의 ‘행’은 괜히 기분 좋고 포근한 느낌을 주며 영어의 happy를 연상하게 하지만, 이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다행 행幸’이라는 글자를 쓴다. 이 ‘행幸’이라는 글자는 본래 신체의 일부를 묶고 가두어 꼼짝 못 하게 하는 형구의 모양에서 유래한다. 옛날에 죄수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목과 발목을 함께 채우는 칼이나 차꼬의 모양 같은 것이다. 글자를 옆으로 뉘어놓고 보아서 양쪽에 비녀처럼 생긴 빗장을 꽂아 고정하는 형태였다. 그렇게 죄인이 묶이고 감금되었는데, 그것을 풀어헤쳐 자유롭게 되니 ‘다행’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자에는 ‘운이 좋다’, ‘행운’, ‘축하할 만한 일’이라는 뜻이 담긴다. 어차피 ‘인생고人生苦’라는 거푸집에 꼼짝없이 묶여 사는 것이 인생이고 거기에서 풀려나는 길은 죽음밖에 없으므로 ‘행幸’은 죽음으로 가능한 것임을 이미 내포한 것일까?

이 글자는 ‘요절할/어릴 요夭’와 ‘거스를 역屰’이라는 두 글자가 합쳐진 것으로 보면서 ‘일찍 죽는 것(夭)을 거슬러(屰) 운 좋게 면했으니 다행’이라는 뜻으로 뜻밖의 행운이나 화를 면하다는 뜻으로 푸는 것이 일반적이다. 무엇인가를 운 좋게 모면한 상황을 놓고 ‘흙 토土’ 더하기 ‘여덟 팔八(→口)’ 더하기 ‘방패 간干’이라는 글자들이 합해졌다고 보아서 흙(土)이 갈라진(八→口) 곳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干) ‘다행이다’라는 뜻으로 풀기도 하지만, 조금 억지스럽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행幸’이라는 글자와 한 획의 차이밖에 없는 ‘신辛(매울 신辛)’이라는 글자와 함께 뜻을 풀기도 하는데, ‘신辛’이 살갗에 먹물을 집어넣어 문신을 새기는 꼬챙이나 침의 모양에서 유래되었고, 하늘의 뜻을 몸에 새기거나 하늘의 뜻을 어기면 벌을 받겠다는 주술적이고 신성한 의미를 담았으므로 거기에 한 획을 더해 하늘의 뜻으로 묶임에서 풀어짐을 표현하려 했다고 풀기도 한다. 이를 두고 한 획을 ‘한 일一’이라면서 ‘어떻게든 한 번 매운맛을 보면 뭔가를 깨우치게 되니 이는 다행’이라고까지 한다.

행복이라는 것이 과연 풀이할 수 있는지, 아니면 공식公式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세상 사람들은 ‘행복’을 여러 가지로 풀이한다. 행복지수를 얘기하거나 나라별로 세계 행복 보고서를 내놓아 그 나라의 국민 행복 순위를 매기기도 하고, 어불성설인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면 틀림없이 행복하다’는 논제를 내세워 행복을 두고 산출 공식을 논하려는 사람들도 많다. 기원전의 플라톤은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용모, 사람들이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한 사람은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연설하면 청중의 절반만 손뼉 치는 말솜씨 등이 행복의 조건이라 했고, 구글 검색창에 ‘행복공식’을 입력하면 1천 5백만 개가 넘는 결과물을 순식간에 제공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에요’, 혹은 ‘행복은 학력 순이에요’ 하며 행복을 학벌과 학력에 견주는가 하면,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하며 출생, 출발 배경과 처한 사회적 계층에 따라 행복이 좌우된다는 이론이 있고, 행복을 두고 빈부격차니 양극화니 하며 사회 구조 및 제도와 복지 정책에서 논하여 개천에서 용이 난다든지 그렇지 않는다든지 등을 따지려는 논조…등등, 어쩌면 지구상에는 인간 수만큼의 행복론이 있다. 행복은 인간의 기본 욕구이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의 목적이며 인생살이의 1순위 논제이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만족시키고 채워야만 행복하다고 하는가 하면, 만족시키고 채워야 할 욕구를 최소화해야만 행복하므로 ‘소유를 욕구로 나눈 값’이 행복이라 하는 이도 있으며, 인간은 무엇인가를 이루고 성취하며 실현해야만 행복하다는 주장도 있고, 그 어떤 성취도 없이 한없는 희생이나 고통 그리고 자기 소멸이어도 스스로 새기는 ‘의미’ 하나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하는 삶도 있으며, 심지어 오늘날에는 인간을 자율적인 존재라기보다 네트 워크로 얽힌 전자 알고리즘들의 관리와 인도를 받는 생화학적 기제들의 집합으로 보면서 인간이 행복할 때의 여러 상황을 데이터 분석하여 약물이나 자극을 투입하여서라도 유기물의 화학적인 반응 상황을 기술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행복이라 하기도 한다. 과연 행복은 무엇일까? ‘무엇’을 묻는 이 질문 자체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예수님의 공식적인 첫 번째 대중 연설은 “행복하여라!”로 시작하는 행복론(산상설교, 마태 5-7장)이었다. 그분께서 설파한 그리스도교의 행복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믿으며 살아 나의 삶과 현실에서 그분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궁극에 하느님 나라를 얻는 구원이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한 삶은 진리이신 하느님을 두고 기뻐함입니다.(성염 역, 고백록, 제10권 23.33)』 한다. “행복하여라, 그 길이 온전한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이들!”(시편 119,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힘 력/역力

이 글자는 팔에 힘을 주었을 때 근육이 불거진 모습이라고도 하고, ‘칼 도刀’의 변형으로 칼에서 나오는 힘을 뜻하게 되었다고도 하지만, 인간의 삶이 농경 사회로 전환되면서 동물이 끌기 전 사람들이 밭에서 힘들여 끌었을 쟁기나 가래의 모양이라는 것이 훨씬 더 근거 있는 얘기이다.

‘사내 남男’이 밭(田)에서 힘들여 쟁기질(力)하는 남자를 가리키고, 혼자서는 할 수 없어 여럿이 쟁기질을 해야 할 때를 가리켜 ‘힘 합할/합할 협劦’이라 하며, 그 글자 옆에 ‘밭 전田’과 ‘마음 심心’을 차례로 덧붙이면 힘들지만, 마음 맞춰 밭을 잘 가는 상황으로 보아서 ‘뜻 맞을 협勰’이라 하고, ‘합할 협劦’의 왼편에 많은 수의 상징인 ‘열 십十’을 놓아서는 많은 사람들이(‘열 십十’은 많다는 뜻) 힘에 힘, 그리고 힘을 더해 화합하여 힘든 일을 잘 해내므로 ‘화합할 협協’ 되며, 역시 왼편에 ‘작을 요幺’를 붙이면 작고 미숙하여 여린 힘밖에 없는 어린이를 지칭하는 ‘어릴 유幼’가 되고, ‘힘 력力’ 위에 ‘적을 소少’를 붙이면 ‘못할 렬/열劣’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뒤지는 상황이며, ‘갈 거去’를 왼편에 붙이면 억지로라도 힘으로 겁을 주고 밀어붙여 가게 하는 ‘위협할 겁劫’이 된다. ‘일할 노/로勞’는 ‘등불 형熒’의 변형으로 보아 등불까지 밝혀가며 열심히 일하는 것이 되고, ‘힘쓸 노/로努’는 ‘종 노/로奴’를 위에 붙여 노비나 종처럼 힘들여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이며, ‘장인 공工’을 왼편에 붙이면 힘들여 무엇인가 해내는 ‘공 공功’인데, 원래 ‘공工’이라는 글자가 황토를 다져 성이나 담을 쌓던 절굿공이 같은 모양에서 유래되었으므로 힘들여 일해야 하는 도구와 힘이 합쳐진 글자가 된다.

힘은 수고受苦(받을 수, 쓸 고)이고 애씀이다. ‘애쓰다, 애먹다, 애를 태우다, 애달프다’ 할 때의 ‘애’가 간(肝)이나 쓸개(膽)의 뜻을 지니고 있었기에 애간장이 녹는, 곧 간이 녹아내리는 슬픔이다.

『우리 문화에서도…‘힘’은 본래 좋은 것이 아니었다. 몸에 힘이 들어오는 것을 ‘힘 든다’고 하고, 몸 밖으로 힘이 나가는 것을 ‘힘 난다’고 한다. 힘이 들면 괴롭고 힘이 나면 즐겁다. ‘힘’은 사람이 일하는 사이에 슬그머니 몸 안에 들어와 고통을 주다가 쉬는 사이에 몸에서 나가는 귀신과 비슷한 존재였다. 힘은 사람에게 평생 붙어 있는 신체 또는 정신의 일부가 아니었고, 좋은 것도 아니었다. 몸에 힘 들이며 사는 삶이 고생이고, 힘 안 들이고 사는 삶이 호강이다.(전우용, 힘 숭배의 시대)』

어쩌면 ‘힘’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긍정 아닌 부정否定이었다. 힘이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의 죄로부터 빚어진 인간이 살아야만 하는 숙명, 곧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창세 3,17.19)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힘의 실체는 낙원을 버림이고, 주제넘게 목에 힘이 들어가 하느님께서 하지 말라던 것을 하는 인간의 교만이다. 그래서 힘의 실체는 악령이다. 힘의 실체는 허상이다. 힘의 실체는 죄다. 그런데도 어느덧 현 시대는 서로 힘을 강요하고, 어쩌면 힘만을 추구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한없이 힘없는 어린 아기가 되셔야만 했고, 무능무력하고 힘없는 이의 표상인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해야만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지러울 난/란亂

‘어지러울 난/란亂’이라는 글자는 그 생김새 못지않게 풀이도 어지럽고 복잡하다. 차근차근 획순에 따라 글자를 분해하면 ‘손톱 조爪(움켜잡다) + 작을 요幺(실타래) + 덮을 멱冖(물레) + 또 우又(손) + 새 을乙(칼날)’라고 풀어서 ‘물레에 실타래가 위아래로 엉켜있는 것을 칼로 끊어내고 가지런히 정리해야 하는 것과 같은 상황’ 정도로 새겨볼 수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어지러울 난/란亂’에 들어있는 우측의 ‘새 을乙’을 두고는 위에서 풀이한 것처럼 손으로 중간을 잡아 사용하는 위아래에 날이 있는 칼이라고 보기도 하고, 초목이 싹이 트려 할 때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라면서 그렇게 바르게 펴져야 하는 뜻을 담았다 하며, 어지러운 상태를 강조하기 위하여 굽은 선을 더 그어놓았다고도 한다. 대체로 ‘乚’을 ‘새 을乙’로 보는 것에는 일치하고, 이 글자를 제외한 왼쪽 부분이 엉켜있는 실타래를 양손으로 풀어내는 모양이라는 점에서도 의견들은 일치한다.

아무튼 ‘어지러울 난/란亂’은 복잡한 것이고, 어질러져 있는 것이며, 엉망진창(삼국지에서 유래된 진창陣倉에 있는 성城은 지금의 산시성 보계시에 위치)이고, 뒤죽박죽이며, 아수라장阿修羅場(불교 용어로 아수라阿修羅 왕이 제석천과 싸운 마당)이고, 무질서와 혼란이며, 나아가 조금 과장하면 난장亂場판(난장은 어지러운 과거시험장의 모습이거나 삼일장 오일장이 아닌 부정기적인 장터의 모습)이고, 개판(흔히 ‘개 견犬’을 써서 하는 개판이라는 말은 없다. 개판改板이라면 시름판에서 서로 이겼다 할 때 다시 판을 벌여 고쳐 바로잡는 것이고 개판開板이라면 피난민들을 위해 밥을 나눠주느라 밥뚜껑 여는 것)이며, 이어서 ‘흩어지다, 뒤섞이다, 어수선하다, 어지럽힌다’를 넘어서 이를 정리하고 다스린다는 뜻으로까지 나아간다. 중국이나 일본 사람들은 이 ‘어지러울 난/란亂’을 간단하게 ‘乱’이라고 쓰고, 중국 사람들은 아수라장이라 할 때 이를 ‘乱七八糟란칠팔조’라고 묘사한다 한다. 하필이면 ‘지게미 조糟’를 쓴 이유는 무엇인가 궁금해진다. 다 걸러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내팽개쳐진 찌꺼기의 모습일까, 찌꺼기와 술과 발효된 쌀밥이 엉클어진 모양새일까, 술 먹고 취하면 일곱 여덟을 구별 못 할 정도로 엉망진창이 된다는 뜻일까?

‘어지러울 난/란亂’과 함께 쓰는 말들은 난국亂局, 난류亂流, 난리亂離, 난무亂舞, 반란反亂, 피난避亂(이는 전쟁, 쿠테타, 무법천지, 폭력배 난동 등 인간들의 무차별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상황을 피하고자 함이고, ‘어려울 난難’을 써서 피난避難이라고 할 때는 인간의 힘으로 일어난 일이 아닌 해일 등 천재지변을 피하고자 함이다), 동란動亂, 전란戰亂, 혼란混亂(섞을 혼), 내란內亂, 대란大亂, 요란擾亂(흔들릴 요), 소란騷亂(떠들 소), 심란心亂…하는 여러 말들이 있다.

똑같은 뜻으로 찾아지는 ‘어지러울 련/연䜌’은 잠시 눈감고 마음을 다스려 시간이 흐르면 날아갈 어지러움이고, ‘어지러울 란/난亂’은 비를 들고 청소하듯이 깨끗하게 쓸어내야 할 어지러움일까?

원래 세상은 일목요연하게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인간이 교만하여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자기들의) 이름을 날리자!” 하는 바람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생각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느라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라고 했다.(창세 11,1-9 참조) 이런 성경 말씀, 그리고 ‘용이무례즉란勇而無禮則亂(용맹하되 예가 없으면 어지럽고 – 논어, 태백泰伯)’이나 ‘교언난덕巧言亂德(교묘하게 꾸미는 말은 덕을 어지럽히고 – 논어, 위령공衛靈公)’ 하는 기원 전 공자님의 말씀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간사의 뒤죽박죽과 현기증은 주제 파악에 아둔하고, 하늘과 도리를 모르는 인간의 교만과 예禮 없음에 그 뿌리를 두는 것이리라!

목숨/명령 명命

‘목숨/명령 명命’은 일반적으로 ‘입 구口’와 ‘하여금 령/영令’의 합자合字로 보면서, 왕이 사자使者의 입으로 뜻을 전한다는 뜻으로, 곧 임금이 명령을 내려 백성을 부린다는 뜻으로 쓰인다고 풀이한다. 그나저나 결국은 도긴개긴이겠지만, ‘목숨/명령 명命’을 조금 더 자세히 뜯어 보면 ‘삼합 집亼’ 더하기 ‘입 구口’ 더하기 ‘병부 절卩(=㔾)’이다. 우선 ‘삼합 집亼’은 세 변이 합해져 완벽한 도형인 삼각형을 만들 듯이 어떤 세 가지가 어울려 조화를 이루면서 절대성 비슷한 것을 내포하는 상태이고, ‘입 구口’는 입이라는 구멍에서 나오는 말이나 누군가를 통해서 전달되는 내용이며, ‘병부 절卩(=㔾)’은 어떤 이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보면 ‘목숨/명령 명命’은 내가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의 뜻을 고분고분하게 목숨을 바쳐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복종하여 답을 하는 것이므로 ‘목숨/명령 명命’은 ‘대답하다’, 명령에 부합하므로 ‘적합하다’, 절대권자의 뜻을 따라 상호 간의 뜻을 일치시키므로 뜻을 ‘모으다’  ‘합하다’의 의미로 나아간다.

‘명령’하면 우선 칸트Immanuel Kant(1724~1804년)를 통해서 ‘만약 행복해지려면…하라!’라는 소위 ‘가언명령假言命令’이 있고, 무조건적으로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정언명령定言命令=단언적斷言的 명령=무상無上의 명’이 있다고 배웠다. 거창하게 다가오는 칸트의 ‘명령’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목숨/명령 명命’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피하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마주치는 인연도 있고, 애써 피하다가도 우연이나 섭리처럼 다가와 같이 갈 수밖에 없는 인연도 있다. 하고 싶었으나 되지 않는 일이 있고,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그렇게 되는 일도 있다. 나는 생각지도 않고 무심히 지나친 말이었는데, 상대방에게는 인생을 바꾸는 상처가 되어 숙명이 되는 사연은 지나놓고 볼 때 너무 자주 있다. 때로는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고,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하며,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중독인지, 나의 치유와 내가 살기 위한 발버둥인지, 상대방에 대한 의무와 희생인지, 서로의 사랑인지, 내 삶에 지워진 몫인지…. 어쩌면 이런 것을 아우르는 것이 ‘목숨/명령 명命’일 것이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내 인생에 주어진 명줄을 생명生命 혹은 수명壽命(목숨 수壽)이라 하고, 나도 너도 어쩔 수 없는 우리보다 강한 힘의 부름을 소명召命이라 하며, 벌罰처럼 사명使命처럼 수행해야 하는 명령을 천명天命이라 하고, 그 천명에 도리를 쫓아 순응하는 것을 순명順命(순할 순順)이라 하며, 얽히고설킨 인연의 실타래를 운명運命(돌, 옮길 운)이라 하고, 그를 담담히 받아들여 그에 머무는 것을 숙명宿命(묵을 숙宿)이라 한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명령하시고 선포하시며 당신의 뜻을 끊임없이 요구하신다. 십계명으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나긴 방황, 그리고 마침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에 이르기까지, 우리말의 신약성경에서만 ‘명령’을 검색해도 74절에나 보인다. 그런데도 성경에서 인간에게 가장 분명하게 명령이 아닌 위안으로 다가오는 명령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두려워하지 마라” 이다. 연약한 인간은 ‘명命’ 앞에서, 더구나 하느님의 ‘명命’ 앞에서 하염없이 두렵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