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닐/갈 행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오가는 네거리 길의 형상에서 왔다고 알려지는 ‘다닐/갈 행行’이라는 글자는 ‘행’이나 ‘항’으로 발음한다. 인생길을 가리키는 ‘행로行路’, 사람이 살아간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긴 ‘행장行狀’, 은밀하게 다니는 ‘암행暗行’ 등에서는 ‘행’으로 발음하고, 친족들의 서열인 ‘항렬行列’이나 다른 이의 형제를 높여 부르는 ‘안항雁行’, 군대의 행렬 대오를 가리키는 ‘항오行伍’ 같은 말에서는 ‘항’으로 발음한다. 한편, 서양식 가게인 ‘양행洋行’, 푸줏간을 가리키는 ‘육행肉行’, 약방을 가리키는 ‘약행藥行’. 금은방을 가리키는 ‘금은행金銀行’, 돈 가게인 ‘은행銀行’ 등에서 보는 ‘행行’은 ‘길’이나 ‘가다’라는 뜻이라기보다 가게나 상점, 회사이다.

이렇게 ‘다닐/갈 행行’은 네거리의 모습으로부터 길, 길을 함께 가는 사람들, 사람들이 붐비는 곳, 사람들이 모여 재주를 뽐내는 곳 등과 관련된 내용을 두루 지칭한다. 길 위에 있는 사람의 다리나 발의 형상은 ‘발 족足’이요 ‘발 지止’이다. 그래서 ‘行·足·止’ 이런 글자들이나 글자의 부분이 포함된 한자는 대개 길이나 걷는 동작과 관련된 글자들이면서 사람 발자취요 인간이 걸어가는 삶의 모습이다.

‘길 로路’는 사람의 발(足)이 마침내 다다르는 입구(各=뒤쳐져 올 치夂 + 입 구口)이고, ‘쉬엄쉬엄 갈 착辵’은 ‘조금 걸을 척彳’과 ‘발 지止’가 합쳐져 길(彳)을 가는(止) 모양새이다. 이 글자는 나중에 다른 글자들과 결합할 때 ‘辶’이라는 형태가 되면서 ‘통달할 달達’과 같은 글자를 표시하는데, ‘達’은 원래 ‘큰 대大’와 ‘彳’이 담겨 사람(大)이 다니는(彳) ‘큰길’이 되면서 사통팔달四通八達과 같은 경우에 쓰인다. 여기서 ‘통할 통通’은 속이 텅 빈 종이나 대롱(길 용/대롱 동甬)처럼 곧게 뻗은 길이다. ‘지하수 경巠’이라는 글자를 담은 ‘좁은 길, 소로 경逕’은 작고 좁은 길이다. ‘볼/의심하여 살필 구瞿’라는 글자를 行이라는 글자 가운데에 담으면 ‘갈림길, 네거리 구衢’로서 이쪽저쪽을 살피며 어느 길로 가야 할지를 망설이는 장면이다.

‘곧을 직直’은 사방으로 난 길(彳)에서 눈(目)을 들어 똑바로(뚫을 곤丨) 본다는 뜻이고, 지팡이를 짚은 사람이 길에서 두리번거리며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주저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는 ‘의심할 의疑’는 갈 길을 잃고 머뭇거리면서 의심하는 경우이며, 장애물障碍物과 같은 단어에 쓰는 ‘거리낄 애礙’는 돌(石)에 길이 막혀 갈 곳을 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疑) 모습이다. ‘걸을 지㢟’와 한 획 차이가 있는 ‘끌/늘일 연延’ 등에는 ‘길게 걸을 인廴’과 길(彳)과 발(止)이 담기면서 머나먼 길을 가는 모습을 상징화했으며, 물길(川)을 따라 이동하며 가는(辵) 모습인 ‘돌 순巡’은 시찰이나 경계 따위를 위해 돌아본다는 것이고, ‘돌아올 반返’이나 ‘돌아올 회回’는 모두 가던 길을 되돌아오는 것이다. ‘보낼 송送’은 원래 두 손(두 손으로 받들 공廾)으로 불(火)을 든 모습에 辵(쉬엄쉬엄 갈 착)이 더해져 밤에 횃불을 밝히며 사람을 보내는 모습이다. 이에 비해 ‘거스를 역逆’은 사람을 맞이함을 말했는데, 거꾸로 선 사람(屰·거스를 역)으로 사람이 밖에서 들어옴을 그렸다. ‘돌아올 반返’이나 ‘돌아올 회迴’도 모두 가던 길을 되돌아(反·반, 回·회)옴을 말한다.

‘길 도道’라는 글자는 ‘쉬엄쉬엄 갈 착辶’에 ‘머리 수首’를 더해서 만들어졌다. 동물의 머리처럼 큰 눈(目)과 눈 위 이마에 달린 뿔을 그린 것으로 알려지는 ‘머리 수首’는 머리이므로 우두머리라는 뜻 외에도 자라나고 떨어져 나가고 다시 자라나는 뿔 때문에 ‘길 도道’가 될 때 자연의 순환이자 운행(辵)의 법이요 인간의 길이요 순리라는 뜻까지 더해 철학적 의미를 담는다. ‘길 도道’에 손을 뜻하는 ‘마디 촌寸’을 더하면 이런 길(道)을 가도록 잡아(寸) 이끄는 ‘이끌 도導’이다.

설마 그 뜻을 알까 싶은 아홉 살 어린이 김태연이 최근 부른 ‘바람길’의 ‘끝이 없는 길, 걷다가 울다가 서러워서 웃는다’는 길(신유진 작사), 故 최인호 작가의 ‘길 없는 길’, 그리고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며 말씀과 치유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을 향하여 끝까지 올라가야만 했던 ‘예수님의 길’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생 자체가, 그리고 세상사 자체가 길이듯이 성경은 온통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죽음을 바라보는 나이에 정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고, 애지중지 얻었던 늘그막의 기쁨인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만 했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길, 형 에사우를 피해 도망가다가 하느님의 땅에 이르고 하느님과 밤새 씨름했던 야곱의 길, 사막을 지나다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을 만나 자기 신발을 벗어야 했고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약속의 땅까지 40년을 걸었던 모세의 길, 여왕 이제벨을 피해 도망가다 지쳐 죽기를 청하였으나 천사의 빵을 먹고 호렙산에 이르러 조용하고 부드러운 바람 소리 가운데 하느님을 만난 예언자 엘리야의 길, 하느님의 명령을 피해 도망가다 도망가다 큰 물고기 뱃속에까지 들어갔어도 절대 도망갈 수 없었던 예언자 요나의 길….

별빛 하나에 의지해서 오랫동안 걸어야 했던 동방박사들의 길, 표징을 만나러 사촌 엘리사벳을 찾아 산길을 홀로 걸어야 했던 성모 마리아의 길, 목숨을 걸고 이집트로 피난을 하여야 했으며 매년 예루살렘 순례길에 나서야 했던 성가정의 길, 예수님을 만나 생명을 얻고 용서를 얻으려고 찾아왔던 백인대장과 니코데모의 길, 두려움에 도망치며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보고 걷다가 빵을 나눌 적에야 예수님을 알아보고 돌아갔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길,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반쯤 죽었으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덕에 목숨을 다시 얻었던 어떤 사람의 길, 이른 새벽에 부활하신 주님을 뵙자고 반신반의하며 무덤으로 내달리던 막달레나와 베드로, 그리고 요한의 길….

용서할 서恕

논어 위령공衛靈公 편 스물세 번째 단락에서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스승 공자에게 평생 행할 바에 관해 묻는다. 이에 공자는 ‘용서容恕’라는 단어에서 ‘용서할 서恕’ 글자 하나를 제시한다. 공자에 의하면 ‘용서’는 연마해야 할 덕이고 수련의 과정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해오는 제자 베드로 앞에서 ‘용서’를 두고 말씀하시면서 실천도 실천이지만,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 18,21-35)를 더해서 타인의 용서에 앞서 나 자신이 용서받은 자라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하신다.

그리스도교인의 용서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갚을 길 없는 은혜를 입었으며, 그 은혜에 합당한 자가 아니므로 첫걸음은 ‘자기 고발’(self-accusation, 교황 프란치스코)이 먼저이고, 그렇게 고백함으로써 자기 죄의 어두움을 보아 빛으로 나아가는 존재라는 인식(토마스 아퀴나스)에 근거한다.

용서의 첫발이 자기 고발에 있음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지혜이다. 용서는 내가 은총과 자비를 받은 이라는 생각 때문에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용서는 자기 죄를 먼저 고백하면서 하느님 편에 서고, 자기 죄의 어두움을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용서는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않아서 해야 하는 기도. 용서는 하느님의 용서를 배우고 그 힘으로 해야 하는 걸음마. 용서는 용서의 실천으로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실 유일한 길을 찾음. 용서는 다른 이를 통해서 보는 하느님의 얼굴이자 싫은 사람을 통해서 보는 하느님의 얼굴. 용서는 눈물 나는 나의 억울함을 주님께서는 알아주실 것이라는 믿음. 용서는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준 그 사람도 하느님의 자녀임을 아는 것. 용서는 밉고 싫은 사람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하느님께서 불쌍한 그 사람도 사랑하실 것을 알아가는 과정.

용서는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 준 사람들, 심지어 원수와도 하나가 되게 하는 힘. 용서는 너도 하느님을 향하여, 나도 하느님을 향하여, 위로 올라가면서 너와 내가 하느님 안에서 점점 하나가 되는 것. 용서는 내 마음의 합리화와 이기적인 변명을 어느 날 조건도 없이, 이유도 없이, 일거에 그냥 놓아버리는 것. 용서는 나에게 주어진 싫고 또 싫은 그 소명과 굴레 안에서 눈물을 삼켜가면서라도 성화시켜나가는 어려운 발걸음. 용서는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그만두어버리는 것. 용서는 아픈 과거를 잊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용서할 수 있어서 함께 살기로 작정하는 것.

용서는 내가 절망하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는 힘. 용서는 울음과 슬픔 속에서도 감사와 미소로 돌아오는 은총. 용서는 내게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인내와 희생. 용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창조. 용서는 치유의 성사요 매일의 성체성사. 용서는 십자가상 주님의 마지막 말씀. 용서는 나에게 잘못한 이를 내가 용서한다는 주님의 기도. 용서는 ‘네가 용서했으니 너도 용서받아라’ 하시는 음성. 용서는 용서하겠다고 작정하면서 문득 돌아보는 수많은 나의 허물들. 용서는 내가 여기서 풀어야 천상에서도 풀리는 매듭. 용서는 성령의 은총. 용서는 주님의 능력이 일으키는 내 마음의 변화. 용서는 누군가를 용서하면서 내가 얻는 하느님의 힘. 용서는 절대 쉽지 않은 하느님 행위라는 예술.

용서해야 한다고 믿으면서 그러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하는 사람들, 용서해야 한다고 믿되 이는 하느님께서 나를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희망’은 전자에서 후자로 이동할 수 있는가이다.

순례자pilgrim

‘순례자’를 지칭하는 영어 단어 ‘pilgrim’이라는 말은 라틴어 ‘페레그리누스(peregrinus)’라는 단어에 기원을 둔다. 이 말은 ‘페르per'(=through) + ‘아게르ager'(=field, country, land)로서 외국인, 낯선 이, 혹은 여행자나 일시 거주자 등을 일컬을 때 사용한다. 대중 라틴어에서는 히브리말의 ‘gur'(גּוּר=sojourner, <거주자)나 그리스말의 ‘parepidemos'(παρεπίδημος=temporary resident, <일시 거주자)를 ‘peregrinus’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이 말은 4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리스도교 안에서 ‘거룩한 장소’를 방문하는 소위 ‘성지순례자’라는 뜻을 더했고, 나아가 종교적인 목적의 여행자까지도 포괄적으로 아우르게 된다.

『순례자는 집과 고향과 조국을 떠나 걷는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걸음은 예수 그리스도 따름을 더한다. 따름은 ‘떠남’, ‘길 위에 있음’, ‘이방인’, ‘목적지를 향함’이다.

‘떠남’은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떠남이고, 인연을 떠남이며, 과거의 나로부터 떠남이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떠남이며, 지나가 버릴 것으로부터 떠남이고, 기억으로부터 떠남이며, 알려진 것들로부터 떠남이고, 내가 지었던 말의 집으로부터 떠남이어서 침묵이자 의식적인 고독이며, 인정·반응·평가를 떠남이고, 걸음에 나를 맡김이다.

‘길 위에 있음’은 떠돌이요 방랑이다. 머리 둘 곳이 없음을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며, 내가 걸어서 나에게 다가오고 마주 오는 것을 맞으려는 희망이고, 땅의 거처가 아닌 하늘의 거처를 꿈꾸는 기대이며, 계속 걸어 깨끗해지는 정화이고, 내 몸이 땅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단조로움의 반복으로 찾는 고요이며, 걸음마다 거듭 달라지는 나의 변모이고, 걸을 때마다 내 앞을 질러나가 뻗는 요원함이다.

‘이방인’은 여럿으로 지어진 공동체 안에서도 혼자로 남고, 죄와 이기주의의 땅을 벗어나 덕의 땅으로 들어가며, 종국에 도달할 고향을 노래함이다.

‘목적지를 향함’은 내가 밟는 발밑의 땅이 밟을 때마다 점점 사라지는 것을 아는 것이고, 점점 뚜렷이 보는 것이며, 이유·의미·목적이 분명해지는 것이고,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음이다.(참조. 안셀름 그륀, 길 위에서Auf Dem Wege, 분도, 2020, 22-50쪽)』

무리 배輩

오랜만에 한강을 건넌다. 새들이 무리를 지어 날며 계절이 바뀌는 천기天氣를 알린다. 새들이 무리를 짓는 것은 ‘모일 집集’이다. 나무 위(나무 목木)에 새(새 추隹)가 올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땅에서 올라오는 것들의 표상인 나무 위에 새들이 앉고 거기에 둥지를 튼다. 그러나 새들은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는 하늘의 전령이고 징조의 표상이어서 날개를 지니며, 꼭 알려야 하는 소리일지라도 혼자인 소리가 너무 외로운 독백일 뿐이고 힘이 없어서, 함께 모여 무리를 짓는다. 떼지어서 모이는 새들은 ‘새 떼지어 모일 잡雥’으로 쓴다.

인간이 끼리끼리 모이는 것은 ‘무리 배輩’이다. ‘아닐 비非’와 ‘수레 거/차車’라는 글자가 모였다. 非로 구성된 글자들은 ‘나란하다’와 ‘어긋나다, 아니다(위배)’의 두 가지 뜻인데, ‘무리 배輩’에서는 새의 양 날개가 나란히 펼쳐지듯 ‘나란하다’이다. 그래서 ‘무리 배輩’는 양쪽으로 나란히(非) 줄지어 선 수레(車)의 대열이다. 전차를 나란히 세워 떼지어 출정(出征)하는 무리, 동지, 같은 편이다. 새의 무리는 소식을 알리지만, 글자대로라면 사람의 무리는 이처럼 공격성을 담았다.

후배後輩는 뒷세대이고, 선배先輩는 앞세대이며, 연배年輩는 또래이다. 모리배謀利輩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사람이나 무리이고, 간상배奸商輩는 간사한 방법으로 이익을 보려는 장사치의 무리이다. 불량배不良輩도 있고 폭력배暴力輩도 있으며, 정상배政商輩라는 말도 있으니 ‘무리 배輩’에는 긍정보다 부정이 더 많은 듯하다. ‘무리 도徒’라는 글자도 있는데, 이는 ‘조금 걸을 척彳’과 ‘달릴 주走’라는 글자가 결합해서 만들어졌다. 이 글자는 원래 뜻을 나타내는 ‘조금 걸을 척彳’과 ‘발 지止’가 합해진 ‘쉬엄쉬엄 갈 착辵(=辶)’에 ‘흙 토土’가 더해진 글자로 흙먼지 쓰며 걸어간다는 뜻을 담았다. 그렇게 ‘무리 도徒’ 역시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 무리이고 같은 뜻을 가진 한패이다. 같은 길을 가며 함께 도를 닦는 좋은 벗은 ‘도반道伴’이라 하지 ‘도반徒伴’이라 하지는 않는다.

사람 무리를 가리킬 때 ‘무리 중衆’을 쓰기도 한다. 이 글자는 본래 眾으로 썼는데, 간결하게 众으로 쓰기도 했다. 眾이라는 글자는 원래 ‘날 일日’ 밑에 사람(人)이 셋이어서 뙤약볕 아래에서 무리 지어 힘든 일을 하는 ‘노예’들이었는데, 日이 ‘눈 목目’으로 바뀌면서 누군가의 눈 아래 감시당하는 노예들이 되었다. 그렇게 인간의 무리는 감시의 눈 아래 호구지책으로 땀 흘리는 대중大衆이다. ‘임금 君’과 ‘양 양羊’을 더해 임금이 지팡이로 명령하며 양 떼를 치는 모습으로 ‘무리 群’이라는 글자도 있으니 이래저래 인간의 무리는 대개 감시하는 눈과 호령하는 지팡이 아래 시달리는 피지배 민중民衆이다. 역사와 시간 속에서 피지배를 견딜 수 없어서, 민중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하늘의 소명을 빙자하며 무리를 짓는 정당政黨도 있다. 이때 ‘무리 당黨’은 ‘검을 흑黑’이 의미부이고 그 위에 올라앉은 ‘오히려 상尙’이 소리부인데, ‘검을 흑黑’은 신선하지 못하고 썩은 것이므로 ‘무리 당黨’에는 애초에 정의正義가 아닌,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무리 짓고 편을 갈라 썩은 무리라는 뜻이 담겼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가 많고, 하류의 무리가 천지이며, 곡학아세曲學阿世의 무리, 몹쓸 사람의 무리가 많다. 참새나 제비 같은 작은 무리가 봉황 같은 큰 무리의 뜻을 알 리 없고, 마르고 굳어지는 죽음의 무리가 부드럽고 연한 생명의 무리에 견줄 바도 못 된다. 하느님은 한 분이신데, 사람들은 살기 위해 무리를 짓는다고 하면서 대개는 지배하기 위해 물거품이 될 무리를 짓는다. 그리스도인은 “의인의 무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시편 14,5)을 주님으로 모시면서 “죄인들의 무리에 끼는 것”(집회 7,16)을 경계하며, “나를 거슬러 둘러선 수많은 무리 앞에서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시편 3,7) 하고, “불경스러운 자들의 무리는…씨가 마르고 뇌물을 좋아하는 자들의 천막은 불이 집어삼켜 버린다네.”(욥기 15,34) 하며, “방자한 자들의 무리를 땅에서 뽑아 버리시고 불의한 자들의 왕 홀을 부러뜨리실 때까지”(집회 35,23)를 기도하고, “기억하소서, 당신께서 애초부터 마련하시어 당신 소유의 지파로 구원하신 무리를, 당신 거처로 삼으신 시온 산을!”(시편 74,2) 하며 기도한다.

부를 소召

‘부를 소召’라는 글자는 ‘칼 도刀’와 ‘입 구口’의 합자合字이다. 누구를 소리 내어 부르거나 불러들이는 것을 뜻한다. 입 위에 칼이 있으므로 이것이 ‘부르다’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여기에 쓰인 ‘칼 도刀’는 ‘비수 비匕’라는 글자의 변형으로 본다. ‘비수 비匕’라는 글자를 두고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개 사람이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선 모양새라고 보기도 하고, 숟가락이라는 뜻이나 모양새라고도 하면서 숟가락이나 사람이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그래서 ‘비수匕首’라고 하면 숟가락처럼 짧고 날카로운 단도이고, ‘匕’라는 글자가 한자의 부분으로 쓰일 때는 대부분이 사람과 관계된 의미를 지닌다.

이들을 바탕으로 ‘부를 소召’를 다시 보면 항아리와 같은 용기의 아가리를 통해 안에 담긴 내용물을 숟가락 같은 것으로 떠내는 모습이거나, 수저에 담긴 음식을 입에 가져다 대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부를 소召’에는 이처럼 누군가를 부르거나 불러들여 술이나 음식을 대접하고자 한다는 뜻이 담겼다. 이 ‘부를 소召’라는 글자의 왼쪽에 ‘손 수手(=扌)’라는 글자가 더해지면, 손짓하여 불러들인다는 뜻의 ‘부를 초招’가 되면서 우리가 누군가를 초대招待하다(불러 대접하다) 할 때의 ‘招’라는 글자가 된다. 굳이 구분하면, 말로 부르는 것은 ‘召’이고 손으로 부르는 것은 ‘招’라 할 수 있다.

예수님과 만난 첫 제자는 나이 들어 소명의 첫 순간을 회상하면서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9)라며 강렬했던 그 사랑의 순간을 한 문장으로 기록한다.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고, 그때부터 소명召命인 줄 알고 살았지만 어쩌면 나 좋아서 살았다.

우거질 망莽/茻

‘우거질 망莽’이라는 글자는 ‘풀 초艹(艸)’ 더하기 ‘개 견犬’ 더하기 ‘두 손으로 받들 공廾’이라는 글자로 되어 있다. 원래는 ‘우거질 망茻’이라는 글자 한가운데에 ‘개 견犬’을 그려 넣어 숲이 우거진 곳에서 사냥개가 뛰어다니는 상황을 묘사했다가 ‘개 견犬’이 빠진 채 ‘우거질 망茻’이라는 글자가 되거나, 세월이 가면서 위에 있는 ‘풀 초艸’는 ‘艹’로 간소해지고, 아래에 있는 ‘풀 초艸’가 ‘두 손으로 받들 공廾’으로 변하여 오늘날의 ‘우거질 망莽’이 되었다. 풀이 우거지면 ‘우거질 망莽’이고, 나무가 우거지면 ‘수풀 림林’이나 ‘나무 빽빽할 삼森’이다. ‘답답할 울/울창할 울鬱’이라는 조금 복잡한 글자도 있는데 이 글자는 ‘근심할 우憂’와 함께 뭔가가 막히고 답답한 ‘우울憂鬱’을 표현한다.

겨울이어도 끝없는 풀밭이 있고 나무가 우거져 빽빽한 이곳 Bear Mountain 자락의 수도원 숲에는 사슴도 많고 다람쥐도 천지이며, 라쿤도 있고 여우도 있지만 ‘우거질 망莽’이라는 글자에 있는 개는 없다. 입구에는 ‘No Pets’라는 팻말까지 붙여 아예 출입을 금한다. 시도 때도 없이 몇백 마리씩 떼거리로 날아와 풀밭을 망치는 거위들을 쫓느라고 누군가 나무판자로 개의 모습을 자르고 색까지 칠해서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한 마리 개가 풀밭 가에 꽂혀있었는데, 철 따라 날아오는 거위들도 세월이 가면서 그 가짜 개의 정체를 파악하고 말아서 그것마저 누군가가 얼마 전 치웠다.

사방이 고요하고 겨울 숲은 한가하며 풀밭은 넓다. 문득 숲 한가운데에 혼자 있다가 괜히 웃는다. 멀리 노을은 곱고 차분하다. 바람은 차갑고, 굳이 돌아볼 것도 없는 만사는 부질없다. 한참 전에 밀어놓은 한쪽의 잔설은 아직도 저만큼 있다.

노래 요謠

‘노래 요謠’라는 글자는 ‘말씀 언言’, 소릿값이면서 ‘천천히 흐르다’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 ‘질그릇 요䍃’로 이루어져 말을 천천히 늘여서 노래한다는 뜻으로 ‘풍문’이나 ‘소문’의 뜻까지 담았다고 했다. 그런데 노래나 말이므로 ‘말씀 언言’이 붙어있는 것은 그럴듯한데, ‘질그릇 요䍃’라는 글자가 붙어있는 연유가 궁금하다. ‘질그릇 요䍃’는 질그릇을 나타내는 회의 글자로 ‘고기 육肉’의 변형 + ‘장군 부缶’로서 이때 ‘장군 부缶’는 진흙으로 빚어 만든 액체를 담는 질그릇이나 항아리, 화로처럼 생긴 그릇이나 악기류를 말한다고 했으니, 악기와 노래가 연관된 것일까?

그런데 글자의 해설은 다른 내용을 전한다. ‘노래 요謠’라는 글자에서 ‘질그릇 요䍃’가 붙은 까닭은 『질그릇을 빚는 모양새이고, 질그릇 같은 것을 빚으면서 반주 없이 혼자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의 뜻을 담기(하영삼, 한자어원사전, 579쪽)』 위한 것이라 하거나, ‘요䍃’라는 글자 자체가 질그릇과는 상관없이 『여우의 생김새를 그려놓아 ‘노래 요謠’는 전체적으로 여우가 말하는 모습을 나타내면서 ‘여우의 말’이라는 뜻으로 표현했다(네이버 한자사전)』 하기도 한다. 예부터 여우는 교활하고 재주나 꾀가 많으며 사람을 홀리는 동물로 알려져 여우가 하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에서 소문이고 풍문이라면 후자가 그럴듯하다. 그래서 ‘노래 요謠’는 노래나 가요歌謠, 소문, 풍문, 헐뜯음 같은 뜻을 담았다는 것이다. ‘질그릇 요䍃’는 질그릇 빚는 노랫가락일까, 여우일까?

‘동요童謠’라는 말도 그렇고, ‘서동薯童’이라는 어릴 적 이름을 가졌던 백제 무왕武王(580~641년)이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는 ‘서동요薯童謠’에도 ‘노래 요謠’가 있다. 여우 얘기를 하면 금방 ‘요사스럽다’ ‘요망스럽다’ 할 때가 생각나지만, 이때는 ‘노래 요謠’가 아닌 ‘요사할 요妖’를 쓴다. ‘노래 요謠’는 여러 곳에서 떠도는 말, 곧 ‘소문所聞’을 한자어로 옮겨 ‘요언謠言’이라 할 때 사용한다. 요언謠言은 영어로 ‘루머rumor’이며, 요샛말로는 ‘가짜 뉴스’이다. 가짜 뉴스는 영어 fake news의 번역이겠지만, 오보misinformation, 허위정보disinformation, 날조뉴스made-up news를 아우른다. 가짜 뉴스는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인터넷의 조작된 클릭 수를 이용하여 주류를 이루고 진실이 아닌 진실이 된다. 못된 이들은 끊임없이 못된 일을 궁리하며 교묘한 조작을 연구한다.

로마 신화에서 소문의 여신은 ‘파마Fama’이고 영어의 ‘fame(평판, 풍문)’이 여기에서 나온다. 파마는 수천 개의 창문과 통로가 있는 집에 살고, 모든 것이 내려다보이며 세상에서 하는 소리가 다 들리는 곳에 살며, 집은 메아리가 잘되도록 놋쇠로 짓고, 문은 항상 열려 있다고 했다.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기원전 70~19년)는 파마의 온몸이 솜털로 덮여있으며 그 솜털마다 반짝이는 혀와 눈, 입과 귀가 달린 괴물로서 움직일수록 강해지고 이동할수록 힘을 얻는다고 했다. 소문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생각보다 멀리 가고, 생각보다 훨씬 큰일이 될 수 있으며, 못된 소문일 때는 사람까지 잡는다.

누구나 체험하는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엄청나게 큰일마저 헛소문과 뜬소문이 되면서 더욱 기승을 부리고, 개인사만이 아니라 나랏일에 이르기까지 그럴듯한 음모론이 되어 사회 전체를 더욱 불안하게 하며, 심지어 폭동을 일으키게도 한다. 소문은 아주 조그만 것에서 시작하다가 너도나도 공유하기 쉬운 단순 형태가 되고, 더하기만 하는 산수처럼 눈덩이가 되며, 어떤 단어나 숫자 같은 정교함의 예와 구호, 부분 팩트fact로 전체를 그럴듯하게 압도하고, 개인의 선호와 사고를 공유하는 신념 집단을 탄생시키면서 진화해간다.

버선목이라 뒤집어 보이지도 못하고, 설령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무시하는 게 보통 사람들의 상책이지만, 그래도 ‘요언謠言’ 앞에 선 현대인은 가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이래저래 몹시 피곤하고 답답하다. 거짓 증언과 거짓 고소, 그리고 거짓 맹세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그 역사가 길지만, 그래도 “거만한 눈과 거짓말하는 혀 무고한 피를 흘리는 손”(잠언 6,17)을 두고 “하느님께서 듣지 않으신다 함은, 전능하신 분께서 보지 않으신다 함은 거짓”(욥기 35,13)이다.

일곱 칠七

성경의 ‘일곱’을 추적하다가 일곱을 두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일곱의 매력에 빠진다.

기원전 2500년이나 3천 년쯤에 티베트에서 시작하여 히말라야산맥을 가로질러 지금의 파키스탄을 관통하는 인더스 강을 중심으로 인류 고대 문명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이 생겨나고 숫자라는 것들이 생겨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1961년~)는 자신의 잡학사전에서 숫자에 있는 곡선은 사랑을 나타내고 교차점은 선택의 기로를 나타내며 가로줄은 집착을 나타낸다고 풀이하면서 그중 ‘7’은 신의 후보생으로서 하늘에 매여 있음을 나타내는 가로줄이 있고, 아래쪽에는 곡선 대신 세로줄이 있는데, 이는 아래쪽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뜻이라 하고, 유럽 사람들이 이 숫자를 쓸 때 세로줄 한복판에 작은 가로획을 그어 쓰는데, 이때 생기는 교차점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시련을 겪어야 하는 단계를 표현한다는 것이니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세 가지 선으로 7을 풀이한 것은 그럴듯하다.

북반구 사람들의 밤하늘에 언제나 눈에 띄었던 북두칠성, 북두칠성 국자 모양의 끝과 그 전에 있는 별, 두 별의 사이를 똑바로 5배 정도 연장하면 북극성이 있는 자리이고 그 북극성을 바라보는 앞쪽이 북쪽이며 오른쪽이 동쪽이고 왼쪽은 서쪽, 등쪽은 남쪽이다. 북극성은 지구의 자전 축에 가까이 있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내가 올려다본 그 각이 그 지점의 위도이므로 길을 잃어도 언제 어디서나 찾아갈 수 있다고 했던 별이다. 북극성과 함께 북두칠성으로 일곱을 배웠고,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행성 순서를 ‘수금지화목토천해명’으로 부지런히 외워 육안으로 관측이 가능한 별은 일곱이라면서 일곱을 또 기억했다.(맨 나중의 ‘천해명-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은 18세기 이후 망원경이 발명되면서 발견된 별이고, 명왕성은 2005년부터 자기보다 더 큰 행성인 에리스에게 자리를 내주면서 둘 다 태양계에서 제외되어 왜소행성으로 분류되었다.)

그렇게 배운 일곱이라는 숫자는 오묘하고 신묘하다. 한 사람의 신원을 결정하는 얼굴이 일곱 개의 구멍으로 그 사람을 형성하고,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땅의 모든 것도 일곱으로 묶어 이해하려고 했다.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인 칠정七情(희喜‧노怒‧애哀‧락樂‧오惡‧욕欲‧애愛)으로부터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풀어보려는 시도까지(참조. 임석재, 일곱 번의 위기와 일곱 개의 자연-생태건축, 인물과 사상사, 2011년), 일곱은 거의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아우른다. 정육면체 주사위에서 마주 보는 면의 합은 7이고, 포유류의 목뼈가 일곱이며, 서양 음계도 일곱이고, 일주일도 일곱 날이며, 독일의 동화 <백설공주>에서 난쟁이도 일곱이고, 슬롯머신에서 잭폿이 터질 때도 숫자 7이 겹칠 때이며, 사서삼경의 <맹자孟子>도 7편이고, 인생에서 인간이 맞을 수 있는 최대의 복을 ‘일곱 개의 복(칠복七福)’이라 하며, 부처님께서도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깨우침을 설파하셨다 했고, 무지개의 색깔도 일곱이다.

‘일곱’을 두고 생명의 생성과 변화를 나타내는 시간의 주기로 풀어보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7이라는 주기가 여성과 깊이 관련되었다고 보아서 14살(2×7)에 초경이 시작되어 여성으로 거듭나며 49살(7×7)에 폐경이 된다고 보았는데, 이는 음의 원리를 지닌 달과 여성이 7의 4배수로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으니, 달이 보름달에서 이레 동안 일그러졌다가 다시 이레 동안 채워지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달의 주기와 여성의 생리주기가 일치하기 때문이었다.

혹자는 생김새를 두고 남녀 성기의 결합인 것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원래 한자로 ‘일곱’을 나타내는 ‘七’은 무엇인가에 칼집을 내는 상황을 ‘열 십十’ 같은 모양으로 그리다가 ‘열 십十’과 구별하기 위해 현재의 모습처럼 세로축의 끝을 구부려 만든 글자로 보는 것이 일반이다. 칼로 무엇을 내려치는 원뜻대로 ‘끊다’ ‘베다’ 혹은 ‘자르다’라는 뜻을 담아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고 하지만, 서양의 “일곱”은 흔히 ‘럭키 세븐lucky seven’이라 한다. 1을 7로 나누면 ‘142857’이라는 6개의 숫자로 된 순환마디가 끝없이 반복된다. 그래서 7에서 시작한 142857까지도 ‘이상한 수’ ‘신비의 수’ ‘신이 만든 숫자’ ‘놀라운 수’라는 이름으로 화제가 되기도 한다. 이 수에 2나 3, 4, 5, 6을 곱하면 원래 이 수를 구성하는 6개의 숫자가 자리만 바뀔 뿐 그대로 존재한다. 142857을 둘씩 끊어서 더하면 99(14+28+57=99)가 되고, 3자리씩 둘로 끊어서 더해도 999(142+857=999)라는 값이 된다. 그리고 142857에 7을 곱하면 999999(=142857+857142)가 된다. 142857을 제곱하면 ‘20408122449’라는 수가 나오는데, 이를 둘로 끊어서 더하면 원래의 수가 나온다. 즉 20408+122449=142857이다. 그 외에도 7과 142857의 사연은 계속 이어진다. 사실 이런 얘기들은 유한소수와 무한소수의 구별, 그리고 순환마디가 반복되는 순환소수의 법칙, 신기한 숫자들의 놀이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상징하는 3과(3은 신성수神聖數라고 하는데, 최초의 양수인 1과 최초의 음수인 2가 결합하여 생겨난 변화수로서 음양의 조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수이기 때문이다. 3은 짝수인 2처럼 둘로 갈라지지 않고 원수原數인 1의 신성함을 파괴하지 않은 채 변화하여 ‘완성된 하나’라는 상징을 지닌 수이다. 3에는 세상을 이루는 천‧지‧인이 담겼고, 시간의 과거‧현재‧미래가 모두 담겼다) 땅의 동서남북 사방四方을 상징하는 4가 더해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수, 우주의 수, 전체와 완전을 가리키는 수, 신비한 수, 마력이 깃든 수, 7보다 작은 어떤 수도 7을 나눌 수 없으므로 손상되지 않는 처녀 수, 자연이 기뻐하는 수, 십계명의 10과 성령칠은의 7을 합한 17이라는 수를 1부터 17까지 차례로 더했을 때 나오는 153이 되게 하는 수(참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일곱 제자와 만나실 때 그들이 잡도록 허락하신 물고기 수, 참조. 요한 21,11), 최후의 심판을 상징하는 일곱 봉인의 수(참조. 묵시 5장), 가장 완벽하고 거룩한 수, 신전의 일곱 계단과 일곱 문으로 표현되는 수, 십자가 위 예수님의 일곱 번의 말씀을 담은 수(조세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년-은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가상칠언”을 관현악곡, 현악 4중주곡, 오라토리오 편성으로 1786, 1787, 1796년에 각각 작곡), 7일을 3번 거듭하는 삼칠일(3‧7일)에 어미 닭이 품은 달걀이 병아리가 되고 굴 속에 있던 곰이 마침내 사람이 된 수(곰이 100일 만에 사람이 되었는지, 21일 만에 사람이 되었는지는 또 다른 논제이다), 끝이 없는 수…‘일곱’이다.

추할 추醜

어릿광대, 혹은 광대를 한자漢字로 뭐라 하는지 찾아보니 ‘소추小丑’라고 한다고 한다. 어리광을 연상하게 하는 ‘작을 소小’는 그럴듯하지만 ‘추할 추丑’가 그 말에 들어가 있는 것은 다소 의외였다. ‘丑’라는 글자는 ‘추할 추醜’를 간략하게 고친 간체자이다. 광대의 모습과 얼굴은 추하다기보다 슬프다는 생각이 앞섰는데 그래도 그 글자의 내력을 쫓다 보면 광대를 묘사하느라 그 글자를 사용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추할 추醜’는 술병을 형상화한 ‘닭 유酉’라는 글자(소리부)와 도깨비나 혼백魂魄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귀신 귀鬼’라는 글자(의미부)의 결합이다. ‘鬼’라는 글자는 무릎 꿇고 앉은 사람 위에 ‘밭 전田’이 올라가 있는 가분수假分數같은 모습으로서 뭔가 얼굴에 가면 같은 것을 쓰고 있는 모습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옛날 곰 가죽에 눈이 넷 달린 커다란 쇠 가면을 덮어쓴 방상시方相氏의 모습처럼 역병이나 재앙이 들었을 때 이를 몰아내는 사람의 모습에서 형상을 가져왔다.(하영삼, 한자 뿌리 읽기, 291회, 동아일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다. 『방상시方相氏는 중국의 신神으로, 곰의 가죽을 두르고 황금사목黃金四目의 가면을 착용하며 손에는 창과 방패를 든 형상을 말한다.…그 뜻은 ‘제멋대로인 얼굴을 한 사람’이며…무당으로 불리지는 않았지만…귀신을 쫓는 무당의 모습과 같다.(한국민속대백과사전)』

‘추할 추醜’는 추문醜聞, 추태醜態, 추행醜行과 같은 단어들에서 쓰인다. 얼핏 ‘추파’도 같은 글자를 쓸 것 같지만, 이때는 잔잔하게 햇빛에 반짝이며 예쁜 가을의 물결 ‘추파秋波’라고 쓴다. ‘추할 추醜’는 술병이 옆에 있어서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 가면을 쓴 모습, 귀신 같은 모습을 두루 담았다. 그래서 ‘못 생기다’나 ‘밉다’와 같이 용모가 아름답지 못한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광대라는 말은 원래의 이런 모습에서 진화하여 오늘날 익살과 우스꽝스러운 모습까지 담아 통용된다. 그러나 서양말은 재미있는 재능꾼인 클라운clown과 애처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삐에로pierrot를 구분하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 가면극이나 인형극, 줄타기나 판소리, 땅재주 등에서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던 직업적인 예능인을 광대라고 하면서 廣大로 표기했던 것은 한자 말이 아니라 한자에서 발음을 빌려와 그렇게 썼을 뿐이다.(국립국어원)

『이 세상을 한 판의 서커스 마당이라고 할 때 이 서커스 장에는 스타들도 있고 광대들도 있다. 이 서커스 판에서 중심은 당연히 명연기로 박수갈채를 받아내는 스타들임이 틀림없다. 반면에 광대들은 무대의 중심에 있지는 않다. 그들은 스타들 사이에 막간을 통해 등장하고 실수와 떠듬거리는 말 짓, 몸짓으로 우리를 몇 번이고 웃게 만들어 준다. 광대들은 스타들의 명연기 때문에 손에 땀을 쥐며 생겼던 긴장을 풀어 준다. 우리는 광대들을 만날 때 감탄이 아닌 공감으로, 놀라움이 아닌 이해로, 그리고 긴장이 아닌 웃음과 미소로 만난다.

사람들은 한때 저마다 스타가 되려는 열망을 가져 이를 시도하고 또 그 꿈을 가끔 이루기도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부분 삶은 스타와 광대로 나누어 볼 때 광대 쪽에 남는다. 스타이건 광대이건 한 살이라도 나이를 더 먹어가면서는 서로서로 공감, 이해, 웃음, 미소로 만나기를 희망하며 사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한때 자기 분야에서 나름대로 이름 날리는 스타였기에 스타였던 시절을 회상하며 산다고 하더라도 이는 자칫하면 우울증의 실마리가 될 뿐이다. 책으로 치자면 앞표지였던 시절보다 뒤표지에 가까워지는 나이, 내용 없는 기호에 불과한 듯한 일상의 날, 고상한 기품보다는 자칫 추해지기 쉬운 때에 원래 인생이 그런 쪽임을 알려주는 광대를 생각하면 혼자서도 웃을 수 있다.

광대는 인간사의 수많은 염려와 걱정, 긴장과 불안에 웃음과 미소를 요구하고 결국은 우리 모두 역시 광대라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광대가 광대를 발견한다. 세상에는 아름답고 유쾌한 광대들이 참 많다. 눈물로써 미소를 감추고 미소로써 눈물을 감추어야만 하는 광대들, 광대들은 종국에 민낯일 것을 빤히 알면서도 땀으로 범벅이 되거나 눈물이 나서 일그러지고 옅어지고 벗겨진 얼굴 위의 하얀 광대 칠을 굳이 벗겨내거나 지우려 애쓰지 말고 오히려 덧칠해야 한다면서 나를 부추긴다.(참조. 김건중, 어릿광대)』

다칠 상傷, 근심할 상慯

‘다칠 상傷’은 몸에 난 상처를, 그리고 ‘근심할 상慯’은 ‘마음 심忄’을 옆에 붙여 마음에 난 상처를 일컫는다. ‘상처’나 ‘다치다’라는 뜻을 표현하는 ‘다칠 상傷’이라는 글자를 풀어헤치면 ‘사람 인人’ 더하기 ‘화살 시矢’ 더하기 ‘볕 양昜’이다. ‘傷’의 오른쪽 위에 있는 모양새는 화살을 뜻하는 ‘矢’가 변형된 것이다. ‘쉬울 이’라고도 읽는 ‘볕 양昜’이라는 글자는 제단 위를 비추는 태양(日)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뜨거운 ‘볕’이나 ‘양지’라는 뜻이 있다. 대개는 ‘언덕 부阜’를 붙여 ‘볕 양陽’으로 쓴다. 그러니까, ‘다칠 상傷’은 화살에 맞아 다치고 열나서 뜨겁고 고통으로 화끈거리는 부위가 있는 사람이다. 화살에 맞아 다친 때 말고 칼에 맞아 다친 경우를 두고는 ‘칼 도刀’에 양쪽으로 피가 묻어 있는 형상을 그린 ‘다칠 창刅’이라는 글자를 쓴다. ‘다칠 창刅’을 ‘비롯할 창’이라고도 하는데, ‘창創’이라는 글자와 뜻이나 의미가 같다. ‘創’은 ‘곳집 창倉’과 ‘칼 도刀’의 결합이니 칼이나 연장을 사용하여 사냥해 온 동물 등을 놓아두는 창고라는 뜻으로부터 시작했다. ‘비롯하다’라는 뜻은 ‘처음 펴내다’ 할 때 ‘창간創刊’이라 하듯이 말 그대로 어떤 일에 ‘칼을 대다’라는 뜻이다.

사람은 살면서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어 앓는다. 죽어도 상처를 입지 않겠다고 아무리 다짐해도 그러다가는 자기가 만든 감옥에 갇히는 상처를 입는다. 내 주위를 내가 맴돌기만 하다가는 내가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결코 치유자일 수 없는 누군가의 시선에 내가 너무 의존하기만 하다가는 그 누군가가 마음대로 하도록 나를 너무 내주어서 나에게 상처를 입힌다. 결국 그런 상처는 그 사람이 내게 주는 상처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에게 덧씌운 굴레가 나에게 상처를 낸 것이다. 많은 경우에 상처를 치유한다고 애쓰면서 내가 나를 더욱 고립시키고, 아물지 않을 나의 상처를 침묵 속에서 핥기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인생에서 입은 상처는 대일밴드 하나로, 반창고 한쪽으로 가릴 수 없는 상처이게 마련이다. 내가 상처 입은 나를 보면서 짓는 웃음, 누군가가 다가오면서 짓는 웃음마저도 그 웃음에 묘한 자조와 조롱의 상처가 담겨 있을 때가 많다. 누군가가 미워질 때는 아마도 그가 나 모르는 사이에 나의 상처 부위를 찾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상처를 얘기하며 징징대고 상처 입은 눈으로 상처만을 보고 있으면 희망이 없고 장래가 암담하다.

현자가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다”(코헬 3,7)고 말해도 한번 찢어지고 벌어진 상처는 나의 분노가 드나드는 문이 되고, 볼 때마다 더욱 아리면서 좀체 아물지 않는다. 이럴 때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주문呪文을 담은 깊은 원망의 눈물이다. 상처는 부대끼며 ‘함께 산다’는 표시여서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살 때 생긴다. 인간끼리 상처를 낫게 하고자 하는 시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치유가 아니라 상처에 향유를 붓고 연고를 바르는 일이며 싸매는 일일 뿐이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도 아프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나만의 상처는 더욱 아프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상처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상처를 또 보게 한다. 아파도 사랑이면 괜찮다고 아무리 말해도 인생은 부질없어서, 인간은 항상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입히고 마는 존재여서, 사랑을 꿈꾸다가 그 사랑으로 상처를 입는다.

어쩌면 인간의 상처는 인간이 결코 가질 수 없고, 가질 수 있다고 해도 전혀 쉽지 않은 용서라는 천상의 명약으로만 치유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상처의 치유를 위한 인간의 노력은 상처와 반대되는 것만을 보고, 그것만을 얘기하려는 부단한 노력일 뿐이다.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1802~1885년)는 <레 미제라블>에서 『땅을 갈고 파헤치면 모든 땅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피우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라고 했다. 아름다운 꽃이 훗날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씨앗이나 열매가 더 먼 미래의 것이라면, 지금 나의 상처는 과거와 미래 사이 어딘가에서 훗날 누군가를 위해 진주를 영그는 과정일 뿐이다. 상처의 아픔은 그저 경고이고 생명으로 나아가라는 신호이며 아픔 다루기의 수련이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오직 치유를 위해서만 상처를 입히시고, 오직 생명을 위해서만 내리치신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말씀하시며 당신의 상처를 내어놓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자기의 상처로 들어와 나으라며 상처를 내보이신다. 예수님의 상처는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암시이고 비밀이다. 지상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마지막 기적들이 베드로가 휘두른 칼에 상처 입은 이의 치유였으며(루카 22,51), 십자가 위에서 자기 손에 상처를 내며 못을 박는 이들을 위한 기도(루카 23,34)였고, 함께 매달린 상처 입은 죄수 하나를 낙원에 들이신다는 선언(루카 23,43)이었으며, 만신창이 인간의 상처를 안고 영을 온전히 아버지께 맡기신다는 외침(루카 23,46)이었다. 본래부터 상처 난 인간은 그 무엇도 제힘으로 할 것이 없고, 예수님은 그저 자비하신 분이시니, 불쌍한 인간이 고쳐지기를, 내게도 어느 날 ‘다 나았다!’라고 큰소리로 선언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