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우雨

새들이 낮게 나는가 싶더니 움직임이 뚝 그치고, 주변이 조용해지며, 장난꾸러기 다람쥐들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고, 멀리서 번개가 어렴풋이 번쩍이고, 손에 잡힐 듯 가까이 하늘 가득하던 하얀 구름이 슬슬 어두운 구름으로 덮여 어두워지며, 바람이 북쪽에서 불기 시작하다가 천둥이 잦아지며 소리가 가까워지면, 곧 비가 온다는 징조이다.

허리케인 시즌이 되어 며칠을 두고 1년에 내릴 비가 한꺼번에 오듯이 내릴 때 비로소 우기 시즌인지 알았던 것 같은데, 작년과 달리 금년에는 비가 잦다. 이것이 플로리다의 장마일까? 작년에 이러지는 않았으니 플로리다의 장마는 해거리를 하는 것일까? ‘장마’라는 단어가 한자 말인 줄 알고 찾았다가 16세기부터 ‘댱마’라고 쓰던 우리 말에서 기원하였다는 것을 알고 머쓱해진 적이 있다.

‘비 우雨’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의 모습을 그렸다. 이 글자를 부분으로 삼아서 만들어진 또 다른 글자들은 300개가 넘는다 하니, 가히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하는 땅 사람들의 삶과는 뗄 수 없는 글자이고, 때와 철에 따라서, 해야만 하는 일상과 연관되어 있다. 구름 운雲, 구름무늬 문雯, 눈 설雪, 번개 전電, 우레 뇌/뢰雷, 벼락 벽霹, 벼락 진震, 우박 박雹, 서리 상霜, 안개 무霧, 이슬 로露, 진눈깨비 영雵 같은 몇 개의 글자만을 보아도 글자들이 다양하고 그 안에 각각의 사연이 담겼다. ‘비 우雨’라는 글자와 함께 만들어진 비의 종류만 헤아려도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장마’ 때처럼 많이 내리는 비만 헤아려보더라도 매실이 누렇게 익을 무렵에 내리는 비라서 梅雨(매화나무 매), 오랫동안 내리는 비라서 久雨(오랠 구), 숲처럼 쏟아지는 비라서 霖雨(장마 림/임), 연이어 내리는 비라서 連雨(잇닿을 련/연), 온 뒤에 또 내리는 비라서 積雨(쌓일 적), 장마가 져 물의 수위가 높게 불어나게 하는 비라서 滈雨(장마 호), 호탕하게 내리퍼붓는 비라서 豪雨(호걸 호), 비의 강도나 수준이 비교 대상을 훨씬 넘는 비라서 凌雨(업신여길 능/릉), 무섭고 사납게 내리는 비라서 暴雨(사나울 폭) 등 다양한 말들이 있다.

이런 비들이 내리면 밖에 나갈 수 없어 방에 앉아 한참 창밖을 내다본다. 그러면 우산 파는 아들과 짚신 파는 두 아들을 두어 비가 오든 오지 않든 시름이 깊어간다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떠오르고, 천하의 불효 자식이 뒤늦게 뉘우쳐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이라도 지켜볼 양으로 물가에 어머니를 묻고 떠내려갈지도 모르는 어머니 때문에 비가 올 때마다 울어댄다던 청개구리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살랑거리는 아지랑이와 봄비가 얽혀 봄 강(春江)을 짠다 했지만, 여름철에 내리꽂는 장대비와 숨 가뿐 땅의 입김이 얽혀서는 왠지 모를 추억과 한숨이라는 삼베옷을 짓는다. 그래도 플로리다의 거칠고 야성적인 비는 금방이다. 언제이냐 싶게 맑은 하늘을 돌려주면서 후끈한 열기로 지겹던 비를 다시 그리워하게 한다. 보기 힘들다는 쌍무지개도 많고 여우가 시집가고 호랑이가 장가가는 날도 많다. 비는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 올 때 해 뜨는 것은 헤아리지 않으면서도, 비 올 때 해 뜨는 것을 두고는 이야기를 지었나 보다. 그렇게 해가 뜨면 하얀 구름은 하늘에 형형색색의 놀이를 다시 시작한다. 그렇게 금방 하늘 구름은 잡힐 듯 눈앞에 있는데, 푸른 풀밭은 멀리 끝 간 데가 없다. 그렇게 구름, 하늘, 해, 풀밭, 비와 함께 뜨거움이 지나간다.

성경에서 가장 오랜 비요 끔찍하고 무서운 비는 사십일을 두고 밤낮으로 내려 하느님 손수 지으신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려고 내린 비, “심연의 모든 샘구멍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내린 비, “물이 불어나, 온 하늘 아래 높은 산들을 모두 뒤덮은” 비, 그래서 “마른 땅 위에 살면서 코에 숨이 붙어 있는 것들이 모두 죽은”(참조. 창세 7장) 비이며 파라오의 못된 심보로 “우레와 우박”과 함께 내린 비이지만, 모세가 주님께 “손을 펼치자 더 이상 쏟아지지 않은 비”이며(참조. 탈출 9,13-35), 엘리야 예언자가 카르멜 산에서 참 하느님을 섬기지 않던 바알 예언자들을 혼내주던 비(참조. 1열왕 18장)이고, 삼년 육 개월 동안 내리지 않게 했던(참조. 야고 5,17) 비이다. 이래저래 성경의 비는 인간의 못된 행실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고 하느님의 권능이지만, 주님께 돌아설 때 멈추는 재앙이고 오히려 복이다. 하느님께서 “비가 내리도록 번개를 만드시고 당신의 곳간에서 바람을 꺼내시지만”(예레 10,13;51,16), 제 때에 내려주시는 비는 복이 된다.(참조. 에제 34,26)

다행 행幸

행복이 원하고 추구해서 되는지 모르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고 싶다 하며 행복을 추구하고, 현재의 자기 행복을 가늠하는 습성을 지닌다.

‘행복’이라는 말마디를 만드는 앞글자의 ‘행’은 괜히 기분 좋고 포근한 느낌을 주며 영어의 happy를 연상하게 하지만, 이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다행 행幸’이라는 글자를 쓴다. 이 ‘행幸’이라는 글자는 본래 신체의 일부를 묶고 가두어 꼼짝 못 하게 하는 형구의 모양에서 유래한다. 옛날에 죄수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목과 발목을 함께 채우는 칼이나 차꼬의 모양 같은 것이다. 글자를 옆으로 뉘어놓고 보아서 양쪽에 비녀처럼 생긴 빗장을 꽂아 고정하는 형태였다. 그렇게 죄인이 묶이고 감금되었는데, 그것을 풀어헤쳐 자유롭게 되니 ‘다행’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자에는 ‘운이 좋다’, ‘행운’, ‘축하할 만한 일’이라는 뜻이 담긴다. 어차피 ‘인생고人生苦’라는 거푸집에 꼼짝없이 묶여 사는 것이 인생이고 거기에서 풀려나는 길은 죽음밖에 없으므로 ‘행幸’은 죽음으로 가능한 것임을 이미 내포한 것일까?

이 글자는 ‘요절할/어릴 요夭’와 ‘거스를 역屰’이라는 두 글자가 합쳐진 것으로 보면서 ‘일찍 죽는 것(夭)을 거슬러(屰) 운 좋게 면했으니 다행’이라는 뜻으로 뜻밖의 행운이나 화를 면하다는 뜻으로 푸는 것이 일반적이다. 무엇인가를 운 좋게 모면한 상황을 놓고 ‘흙 토土’ 더하기 ‘여덟 팔八(→口)’ 더하기 ‘방패 간干’이라는 글자들이 합해졌다고 보아서 흙(土)이 갈라진(八→口) 곳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干) ‘다행이다’라는 뜻으로 풀기도 하지만, 조금 억지스럽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행幸’이라는 글자와 한 획의 차이밖에 없는 ‘신辛(매울 신辛)’이라는 글자와 함께 뜻을 풀기도 하는데, ‘신辛’이 살갗에 먹물을 집어넣어 문신을 새기는 꼬챙이나 침의 모양에서 유래되었고, 하늘의 뜻을 몸에 새기거나 하늘의 뜻을 어기면 벌을 받겠다는 주술적이고 신성한 의미를 담았으므로 거기에 한 획을 더해 하늘의 뜻으로 묶임에서 풀어짐을 표현하려 했다고 풀기도 한다. 이를 두고 한 획을 ‘한 일一’이라면서 ‘어떻게든 한 번 매운맛을 보면 뭔가를 깨우치게 되니 이는 다행’이라고까지 한다.

행복이라는 것이 과연 풀이할 수 있는지, 아니면 공식公式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세상 사람들은 ‘행복’을 여러 가지로 풀이한다. 행복지수를 얘기하거나 나라별로 세계 행복 보고서를 내놓아 그 나라의 국민 행복 순위를 매기기도 하고, 어불성설인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면 틀림없이 행복하다’는 논제를 내세워 행복을 두고 산출 공식을 논하려는 사람들도 많다. 기원전의 플라톤은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용모, 사람들이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한 사람은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연설하면 청중의 절반만 손뼉 치는 말솜씨 등이 행복의 조건이라 했고, 구글 검색창에 ‘행복공식’을 입력하면 1천 5백만 개가 넘는 결과물을 순식간에 제공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에요’, 혹은 ‘행복은 학력 순이에요’ 하며 행복을 학벌과 학력에 견주는가 하면,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하며 출생, 출발 배경과 처한 사회적 계층에 따라 행복이 좌우된다는 이론이 있고, 행복을 두고 빈부격차니 양극화니 하며 사회 구조 및 제도와 복지 정책에서 논하여 개천에서 용이 난다든지 그렇지 않는다든지 등을 따지려는 논조…등등, 어쩌면 지구상에는 인간 수만큼의 행복론이 있다. 행복은 인간의 기본 욕구이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의 목적이며 인생살이의 1순위 논제이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만족시키고 채워야만 행복하다고 하는가 하면, 만족시키고 채워야 할 욕구를 최소화해야만 행복하므로 ‘소유를 욕구로 나눈 값’이 행복이라 하는 이도 있으며, 인간은 무엇인가를 이루고 성취하며 실현해야만 행복하다는 주장도 있고, 그 어떤 성취도 없이 한없는 희생이나 고통 그리고 자기 소멸이어도 스스로 새기는 ‘의미’ 하나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하는 삶도 있으며, 심지어 오늘날에는 인간을 자율적인 존재라기보다 네트 워크로 얽힌 전자 알고리즘들의 관리와 인도를 받는 생화학적 기제들의 집합으로 보면서 인간이 행복할 때의 여러 상황을 데이터 분석하여 약물이나 자극을 투입하여서라도 유기물의 화학적인 반응 상황을 기술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행복이라 하기도 한다. 과연 행복은 무엇일까? ‘무엇’을 묻는 이 질문 자체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예수님의 공식적인 첫 번째 대중 연설은 “행복하여라!”로 시작하는 행복론(산상설교, 마태 5-7장)이었다. 그분께서 설파한 그리스도교의 행복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믿으며 살아 나의 삶과 현실에서 그분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궁극에 하느님 나라를 얻는 구원이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한 삶은 진리이신 하느님을 두고 기뻐함입니다.(성염 역, 고백록, 제10권 23.33)』 한다. “행복하여라, 그 길이 온전한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이들!”(시편 119,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힘 력/역力

이 글자는 팔에 힘을 주었을 때 근육이 불거진 모습이라고도 하고, ‘칼 도刀’의 변형으로 칼에서 나오는 힘을 뜻하게 되었다고도 하지만, 인간의 삶이 농경 사회로 전환되면서 동물이 끌기 전 사람들이 밭에서 힘들여 끌었을 쟁기나 가래의 모양이라는 것이 훨씬 더 근거 있는 얘기이다.

‘사내 남男’이 밭(田)에서 힘들여 쟁기질(力)하는 남자를 가리키고, 혼자서는 할 수 없어 여럿이 쟁기질을 해야 할 때를 가리켜 ‘힘 합할/합할 협劦’이라 하며, 그 글자 옆에 ‘밭 전田’과 ‘마음 심心’을 차례로 덧붙이면 힘들지만, 마음 맞춰 밭을 잘 가는 상황으로 보아서 ‘뜻 맞을 협勰’이라 하고, ‘합할 협劦’의 왼편에 많은 수의 상징인 ‘열 십十’을 놓아서는 많은 사람들이(‘열 십十’은 많다는 뜻) 힘에 힘, 그리고 힘을 더해 화합하여 힘든 일을 잘 해내므로 ‘화합할 협協’ 되며, 역시 왼편에 ‘작을 요幺’를 붙이면 작고 미숙하여 여린 힘밖에 없는 어린이를 지칭하는 ‘어릴 유幼’가 되고, ‘힘 력力’ 위에 ‘적을 소少’를 붙이면 ‘못할 렬/열劣’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뒤지는 상황이며, ‘갈 거去’를 왼편에 붙이면 억지로라도 힘으로 겁을 주고 밀어붙여 가게 하는 ‘위협할 겁劫’이 된다. ‘일할 노/로勞’는 ‘등불 형熒’의 변형으로 보아 등불까지 밝혀가며 열심히 일하는 것이 되고, ‘힘쓸 노/로努’는 ‘종 노/로奴’를 위에 붙여 노비나 종처럼 힘들여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이며, ‘장인 공工’을 왼편에 붙이면 힘들여 무엇인가 해내는 ‘공 공功’인데, 원래 ‘공工’이라는 글자가 황토를 다져 성이나 담을 쌓던 절굿공이 같은 모양에서 유래되었으므로 힘들여 일해야 하는 도구와 힘이 합쳐진 글자가 된다.

힘은 수고受苦(받을 수, 쓸 고)이고 애씀이다. ‘애쓰다, 애먹다, 애를 태우다, 애달프다’ 할 때의 ‘애’가 간(肝)이나 쓸개(膽)의 뜻을 지니고 있었기에 애간장이 녹는, 곧 간이 녹아내리는 슬픔이다.

『우리 문화에서도…‘힘’은 본래 좋은 것이 아니었다. 몸에 힘이 들어오는 것을 ‘힘 든다’고 하고, 몸 밖으로 힘이 나가는 것을 ‘힘 난다’고 한다. 힘이 들면 괴롭고 힘이 나면 즐겁다. ‘힘’은 사람이 일하는 사이에 슬그머니 몸 안에 들어와 고통을 주다가 쉬는 사이에 몸에서 나가는 귀신과 비슷한 존재였다. 힘은 사람에게 평생 붙어 있는 신체 또는 정신의 일부가 아니었고, 좋은 것도 아니었다. 몸에 힘 들이며 사는 삶이 고생이고, 힘 안 들이고 사는 삶이 호강이다.(전우용, 힘 숭배의 시대)』

어쩌면 ‘힘’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긍정 아닌 부정否定이었다. 힘이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의 죄로부터 빚어진 인간이 살아야만 하는 숙명, 곧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창세 3,17.19)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힘의 실체는 낙원을 버림이고, 주제넘게 목에 힘이 들어가 하느님께서 하지 말라던 것을 하는 인간의 교만이다. 그래서 힘의 실체는 악령이다. 힘의 실체는 허상이다. 힘의 실체는 죄다. 그런데도 어느덧 현 시대는 서로 힘을 강요하고, 어쩌면 힘만을 추구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한없이 힘없는 어린 아기가 되셔야만 했고, 무능무력하고 힘없는 이의 표상인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해야만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지러울 난/란亂

‘어지러울 난/란亂’이라는 글자는 그 생김새 못지않게 풀이도 어지럽고 복잡하다. 차근차근 획순에 따라 글자를 분해하면 ‘손톱 조爪(움켜잡다) + 작을 요幺(실타래) + 덮을 멱冖(물레) + 또 우又(손) + 새 을乙(칼날)’라고 풀어서 ‘물레에 실타래가 위아래로 엉켜있는 것을 칼로 끊어내고 가지런히 정리해야 하는 것과 같은 상황’ 정도로 새겨볼 수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어지러울 난/란亂’에 들어있는 우측의 ‘새 을乙’을 두고는 위에서 풀이한 것처럼 손으로 중간을 잡아 사용하는 위아래에 날이 있는 칼이라고 보기도 하고, 초목이 싹이 트려 할 때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라면서 그렇게 바르게 펴져야 하는 뜻을 담았다 하며, 어지러운 상태를 강조하기 위하여 굽은 선을 더 그어놓았다고도 한다. 대체로 ‘乚’을 ‘새 을乙’로 보는 것에는 일치하고, 이 글자를 제외한 왼쪽 부분이 엉켜있는 실타래를 양손으로 풀어내는 모양이라는 점에서도 의견들은 일치한다.

아무튼 ‘어지러울 난/란亂’은 복잡한 것이고, 어질러져 있는 것이며, 엉망진창(삼국지에서 유래된 진창陣倉에 있는 성城은 지금의 산시성 보계시에 위치)이고, 뒤죽박죽이며, 아수라장阿修羅場(불교 용어로 아수라阿修羅 왕이 제석천과 싸운 마당)이고, 무질서와 혼란이며, 나아가 조금 과장하면 난장亂場판(난장은 어지러운 과거시험장의 모습이거나 삼일장 오일장이 아닌 부정기적인 장터의 모습)이고, 개판(흔히 ‘개 견犬’을 써서 하는 개판이라는 말은 없다. 개판改板이라면 시름판에서 서로 이겼다 할 때 다시 판을 벌여 고쳐 바로잡는 것이고 개판開板이라면 피난민들을 위해 밥을 나눠주느라 밥뚜껑 여는 것)이며, 이어서 ‘흩어지다, 뒤섞이다, 어수선하다, 어지럽힌다’를 넘어서 이를 정리하고 다스린다는 뜻으로까지 나아간다. 중국이나 일본 사람들은 이 ‘어지러울 난/란亂’을 간단하게 ‘乱’이라고 쓰고, 중국 사람들은 아수라장이라 할 때 이를 ‘乱七八糟란칠팔조’라고 묘사한다 한다. 하필이면 ‘지게미 조糟’를 쓴 이유는 무엇인가 궁금해진다. 다 걸러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내팽개쳐진 찌꺼기의 모습일까, 찌꺼기와 술과 발효된 쌀밥이 엉클어진 모양새일까, 술 먹고 취하면 일곱 여덟을 구별 못 할 정도로 엉망진창이 된다는 뜻일까?

‘어지러울 난/란亂’과 함께 쓰는 말들은 난국亂局, 난류亂流, 난리亂離, 난무亂舞, 반란反亂, 피난避亂(이는 전쟁, 쿠테타, 무법천지, 폭력배 난동 등 인간들의 무차별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상황을 피하고자 함이고, ‘어려울 난難’을 써서 피난避難이라고 할 때는 인간의 힘으로 일어난 일이 아닌 해일 등 천재지변을 피하고자 함이다), 동란動亂, 전란戰亂, 혼란混亂(섞을 혼), 내란內亂, 대란大亂, 요란擾亂(흔들릴 요), 소란騷亂(떠들 소), 심란心亂…하는 여러 말들이 있다.

똑같은 뜻으로 찾아지는 ‘어지러울 련/연䜌’은 잠시 눈감고 마음을 다스려 시간이 흐르면 날아갈 어지러움이고, ‘어지러울 란/난亂’은 비를 들고 청소하듯이 깨끗하게 쓸어내야 할 어지러움일까?

원래 세상은 일목요연하게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인간이 교만하여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자기들의) 이름을 날리자!” 하는 바람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생각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느라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라고 했다.(창세 11,1-9 참조) 이런 성경 말씀, 그리고 ‘용이무례즉란勇而無禮則亂(용맹하되 예가 없으면 어지럽고 – 논어, 태백泰伯)’이나 ‘교언난덕巧言亂德(교묘하게 꾸미는 말은 덕을 어지럽히고 – 논어, 위령공衛靈公)’ 하는 기원 전 공자님의 말씀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간사의 뒤죽박죽과 현기증은 주제 파악에 아둔하고, 하늘과 도리를 모르는 인간의 교만과 예禮 없음에 그 뿌리를 두는 것이리라!

목숨/명령 명命

‘목숨/명령 명命’은 일반적으로 ‘입 구口’와 ‘하여금 령/영令’의 합자合字로 보면서, 왕이 사자使者의 입으로 뜻을 전한다는 뜻으로, 곧 임금이 명령을 내려 백성을 부린다는 뜻으로 쓰인다고 풀이한다. 그나저나 결국은 도긴개긴이겠지만, ‘목숨/명령 명命’을 조금 더 자세히 뜯어 보면 ‘삼합 집亼’ 더하기 ‘입 구口’ 더하기 ‘병부 절卩(=㔾)’이다. 우선 ‘삼합 집亼’은 세 변이 합해져 완벽한 도형인 삼각형을 만들 듯이 어떤 세 가지가 어울려 조화를 이루면서 절대성 비슷한 것을 내포하는 상태이고, ‘입 구口’는 입이라는 구멍에서 나오는 말이나 누군가를 통해서 전달되는 내용이며, ‘병부 절卩(=㔾)’은 어떤 이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보면 ‘목숨/명령 명命’은 내가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의 뜻을 고분고분하게 목숨을 바쳐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복종하여 답을 하는 것이므로 ‘목숨/명령 명命’은 ‘대답하다’, 명령에 부합하므로 ‘적합하다’, 절대권자의 뜻을 따라 상호 간의 뜻을 일치시키므로 뜻을 ‘모으다’  ‘합하다’의 의미로 나아간다.

‘명령’하면 우선 칸트Immanuel Kant(1724~1804년)를 통해서 ‘만약 행복해지려면…하라!’라는 소위 ‘가언명령假言命令’이 있고, 무조건적으로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정언명령定言命令=단언적斷言的 명령=무상無上의 명’이 있다고 배웠다. 거창하게 다가오는 칸트의 ‘명령’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목숨/명령 명命’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피하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마주치는 인연도 있고, 애써 피하다가도 우연이나 섭리처럼 다가와 같이 갈 수밖에 없는 인연도 있다. 하고 싶었으나 되지 않는 일이 있고,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그렇게 되는 일도 있다. 나는 생각지도 않고 무심히 지나친 말이었는데, 상대방에게는 인생을 바꾸는 상처가 되어 숙명이 되는 사연은 지나놓고 볼 때 너무 자주 있다. 때로는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고,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하며,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중독인지, 나의 치유와 내가 살기 위한 발버둥인지, 상대방에 대한 의무와 희생인지, 서로의 사랑인지, 내 삶에 지워진 몫인지…. 어쩌면 이런 것을 아우르는 것이 ‘목숨/명령 명命’일 것이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내 인생에 주어진 명줄을 생명生命 혹은 수명壽命(목숨 수壽)이라 하고, 나도 너도 어쩔 수 없는 우리보다 강한 힘의 부름을 소명召命이라 하며, 벌罰처럼 사명使命처럼 수행해야 하는 명령을 천명天命이라 하고, 그 천명에 도리를 쫓아 순응하는 것을 순명順命(순할 순順)이라 하며, 얽히고설킨 인연의 실타래를 운명運命(돌, 옮길 운)이라 하고, 그를 담담히 받아들여 그에 머무는 것을 숙명宿命(묵을 숙宿)이라 한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명령하시고 선포하시며 당신의 뜻을 끊임없이 요구하신다. 십계명으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나긴 방황, 그리고 마침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에 이르기까지, 우리말의 신약성경에서만 ‘명령’을 검색해도 74절에나 보인다. 그런데도 성경에서 인간에게 가장 분명하게 명령이 아닌 위안으로 다가오는 명령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두려워하지 마라” 이다. 연약한 인간은 ‘명命’ 앞에서, 더구나 하느님의 ‘명命’ 앞에서 하염없이 두렵기 때문이다.

늙을 노/로老=耂

‘늙을 노/로老’라는 글자는 ‘耂’라는 글자와 같은 글자이다. ‘늙을 노/로老’라는 글자가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두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부모님으로부터 얻은 신체의 부분이므로 함부로 자르지 못하고 길러야 했던 옛날에, 머리카락이나 수염, 눈썹 등이 길게 자란 노인이 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모습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얘기이다. ‘耂’는 털이 긴 노인의 모습이고, 지팡이 모양이 변해 현재의 ‘匕’ 모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毛+人+匕 라고 보기도 하는데, 이 역시 ‘털 모毛’와 ‘사람 인人’, 그리고 ‘비수 비匕(‘사람 인人’을 뒤집은 모양)’를 모두 합하여 머리털과 같은 털이 긴 사람을 뜻한다고 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혹자는 70세 정도의 나이는 먹어야 연로한 노인이므로 ‘老’를 숫자 7(七)과 10(十)을 담은 글자로 풀이하기도 하고, ‘늙을 노老’는 본디 ‘털 모毛’에 변화를 나타내는 ‘匕’(‘될 화化’에서 ‘사람 인人’을 떼어낸 것)을 붙여 만든 글자로서 즉 털이 흰 상태로 변화된 사람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늙을 노老’라는 글자와 ‘살필 고考’라는 글자의 자원字原이 같다고 하여 둘의 의미를 연결해서 나이를 많이 먹을수록 이것저것 살피고 생각이 많아진다는 식으로 풀기도 하고, 애들에게 그림으로 가르칠 때는 노인이 지팡이를 어깨에 걸치고 결가부좌를 하여 앉아 있는 모습 그대로 글자가 생겼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어떤 것이 정설이든 아니든, ‘늙을 노/로老’에는 길고 흰 털(머리털·눈썹·수염), 지팡이, 깊은 생각, 이런 것들이 담겨있는 글자임은 틀림이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글자를 볼 때마다 로댕Rodin(1840∼1917년)의 유명한 작품인 ‘생각하는 사람’을 떠올리니 글자가 그 모습 그대로인 것만 같다.

‘늙을 노/로老=耂’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글자들은 다양하고 많다. 잘 아는 ‘효도 효孝’ ‘생각할 고考’ ‘늙을 기耆’ ‘즐길 기嗜’ ‘사람 자者’ 등등이다. ‘효도 효孝’는 ‘아들(子)이 늙은(老) 어버이를 업고 있는 모습’으로, ‘효도하다’는 뜻이라 하고, ‘생각할 고考’는 ‘공교할 교巧’가 들어있어 ‘노인(耂)은 생각을 교묘하게(丂) 잘한다’ 하는 의미라 하며, ‘늙을 기耆’는 ‘가로 왈曰’이 더해져 점잖은 말씀의 어르신을 생각나게 한다 하고, 여기에 ‘입 구口’마저 더하면 ‘즐길 기嗜’가 되면서 입으로 먹는 것이든 말씀하시는 것이든 이를 즐기시는 어르신이라 할 수 있으며, ‘사람 자者’ 혹은 ‘놈 자者’라 하는 글자는 ‘가로 왈曰’과 함께 ‘이놈!’ 하시는 어르신이 연상된다 하겠다.

우리 말의 ‘늙다’는 ‘느리다’ ‘늦다’에서 온다. 시간이 오래 걸린 상태이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러 물건이 오래되면 ‘낡다’라고 표현하고, 사람이 오래되면 ‘늙다’로 표현한다. 어근은 같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늙다’의 반대말인 ‘젊다’는 형용사로서 성질이나 상태를 묘사하는 데 비해, ‘늙다’는 어떤 상황이 되어가는 과정이요 움직임의 진행이므로 동사이다. 중고등 시절에 곧잘 시험 문제로 기억에 남았던 내용이다.

이곳 미국 생활에서 한 가지 큰 소득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장차 나의 노년 시절을 매일 적나라한 현실로 마주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매일 나는 이곳 울타리 안에 있는 산 필립이라 이름 지어놓은 소위 은퇴한 수도자들 20여 명과 함께 살고, 매 끼니를 같이 한다. 가장 나이가 많은 분은 아흔다섯 살이시고, 전문 의료인이나 간병인의 24시간 보조를 받아야 하는 분들, 기계적인 보조 장치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분들, 혼자서 자기 생활을 진행할 수 있는 분들로 나뉘는데, 환갑이 넘었다지만 아직 젊고 싱싱한 나는 아무 기구나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거동이 자유로운 사람들 6명 중에서 세 번째로 젊다. 1년 남짓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두 번 초상을 치렀다. 그리고 평상시에도 찾아오는 이가 없지만, 장례식에도 찾아오는 이가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모두 주차장에 정차된 자동차처럼 시동이 걸린 상태에서 서로 마주 보며 누구의 연료가 언제 어떻게 떨어지는지를 말 없는 두려움 속에서 함께 지켜보는 일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어느 날 어떤 이유로든 예기치 않게 병원에 다녀오게 되면 어김없이 헤드폰을 하나씩 쓰고 돌아오는 것이 웬일인가 싶었는데, 그것이 귀가 들리지 않으므로 헤드폰에 조그만 마이크 장치를 해서 적어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라는 것을 나는 한참 지난 뒤에야 알았다. 노인들은 일반적으로 냄새가 난다. 내 몸을 내가 씻지 못할 상황이라는 한계 때문이고, 불편한 몸이어서 음식물을 자주 흘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씻는 것은 관두고라도 내 바지의 허리띠를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러야 하고 잠가야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참 고역이고 슬픈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노인들은 과거의 화려했던 흘러간 얘기들을 자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아직 기력이 있는 노인들의 이야기일 뿐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주로 오늘의 현실에 충실하다. 현실의 오늘 중에서도 특별히 식사는 대단히 중요하다. 음식이 담긴 접시들을 서로 돌릴 때마다 누구에게 먼저 어떤 음식을 돌려야 하는지, 보지 않는 것 같아도 예민하게 그것들을 서로 지켜본다. 음식 접시를 들고 옆에 갈 때마다 농담처럼 ‘이것 내가 다 먹어도 돼?’라고 물으시는 신부님의 말씀이 그저 농담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느낀다. 노인들은 에너지원인 음식이 곧 생명이라는 잠재의식을 갖는다. 노인들은 어리바리해서 동작이 느리고 이것인지 저것인지 구분을 잘 못 한다고 하지만 한 번 식탁에 오른 음식이 다시 변형되어 나왔는지 아닌지는 금방 알아서 새 음식만을 먹고 싶어 한다. 노인들은 어느 날 자기 혼자 걸을 수 없어서 지팡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손에 들려주는 지팡이를 한사코 거부하는 습성도 지녔다. 어떤 수사님이 한 두어 달 장기간 입원하시게 되어 입원 전날 저녁에 방으로 함께 가서 짐을 싸는 것을 도와드린 적이 있다. 병원에서는 환자복을 입을 것이므로 실제로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쓰레기 더미에서나 찾을 법한 낡아빠진 여행용 가방에 맨 먼저 내게 싸달라고 부탁한 짐은 다이얼로 주파수를 맞추는 작은 아날로그식 안테나 라디오였다. 사람들의 이야기와 세상 이야기가 끊어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수사님은 대략 3달 동안 병원에 계셨는데, 병실에 있는 전화로 거의 매일 저녁 시간에 맞추어 어김없이 우리 식당으로 전화를 해 오셨다. 당뇨가 아주 심한 수사님이셨는데도 당신 생일날 수사님은 생일 핑계를 대고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4번이나 드셨고, 누군가 홈 메이드로 치즈케이크를 가져왔다는 말에 주변에서 극구 만류하는 치즈케이크마저 기어이 드셨다. 아흔네 살 할아버지 신부님이 돌아가신 바로 다음 주 도착한 아흔다섯 할아버지 신부님은 계시던 곳에서 그저 어떤 곳인지 가서 둘러 보고만 오라는 말에 속아서 이곳으로 강제 이주를 하셨다. 그렇게 된 사연은 평생 애들하고만 살았던 살레시오회 신부님이시라 애들이 있는 학교에서 애들이 보고 싶어 자주 교실에 드나드는 사고 아닌 사고를 친 결과였다.

누구에게나 다가올 노인이고 노년이다. 노인이 품위 있는 노년을 보장받는 사회만이 건전한 사회라지만, 품위는 제쳐놓고 치매가 와서 처치 곤란하고 고약한 냄새가 풀풀 나는 나의 노년일지라도 되도록 주변에 부담 주지 않고, 하는 짓이 우스워 그저 가끔 웃음이라도 주변에 선물할 수 있는 나의 노년이었으면 좋겠다.

사랑 애愛=㤅=爱

‘사랑 애愛’라는 글자를 두고 쉽게 말해 ‘받을 수受’ 가운데에 ‘마음 심心’이 들어있으므로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사랑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고, 또 愛라는 글자를 위에서부터 풀어헤쳐 ‘손톱 조爪’ + ‘덮을 멱冖’ + ‘마음 심心’ + ‘천천히 걸을 쇠夊’의 합자로 풀이하면서 사랑에 빠져 넋이 나갈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린(爪) 사람(人→冖)이 가슴의 심장(心)이 강조된 채로 걸어가는(夊) 모습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조금 어색하다.

‘사랑 애愛’라는 글자는 원래 ‘사랑 애㤅(지금도 같은 음과 뜻으로 통용)’라는 글자가 먼저였거나 같은 글자였으며, 훗날 밑에 ‘천천히 걸을 쇠夊’를 붙여쓰기도 했다 한다. ‘사랑 애㤅:愛’라는 글자의 윗부분, 오늘날 글자의 ‘마음 심心’ 윗부분인 ‘목멜 기旡(없을 무)’는 밥상 앞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밥상 앞에서 목이 메도록 밥을 이미 먹고 관심이 없어 고개를 돌린 모습이지만(이를 가슴이 뻐근하게 명치 끝이 시리고 목이 메는 사랑의 속성이 담겼다고 풀기도 한다), ‘사랑 애愛’자에서는 고개를 다시 돌려 반대로 밥상을 바라보듯이 계속 관심으로 바라보는 모습이다. 거기에 ‘마음 심心’을 더하여 마음이 어느 쪽을 향하여 돌아서 있다는 뜻을 담는다. 밑에 붙이게 된 ‘뒤져 올 치, 뒤져 올 종夂’은 훗날 추가된 셈인데, 夊와 ‘멈출 지止’는 원래 같은 글자이다가 나중에 뜻이 갈라졌으므로 ‘사랑 애愛’의 夂 역시 ‘멈추다, 그치다’라는 뜻으로 보아서 일정한 대상에게 마음이 쏠려 머문 상태라 하겠다. 아니면 관심이 쏠려있는 어떤 이 앞에서 머뭇거리고 쭈뼛거리면서 이래저래 발걸음을 차마 떼지 못하는 상태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뻥긋하는 고전적인 사랑 타령일 뿐이고,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그런 사랑은 사랑도 아니고, 미치도록 누군가가 좋아서 그에게 깊숙이 다가가 그의 마음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피고 싶은 것이 사랑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어떤 이는 ‘기旡’라는 글자의 머리 부분이 ‘손톱 조爫’이고 발 부분이 ‘민갓머리冖’로 잘못 옮겨져 지금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고 하기도 하는가 하면, 고문古文에서는 심장(心)을 손에 들고 크게 벌린 입으로 사랑을 하소연하는 그림으로 이 글자를 풀이하기도 했다 한다.

다른 여타의 사랑에 관한 개념과 철학적 사유를 제외한 인간사의 범주에서만 볼 때(사실 그것이 가당키나 한지는 모르지만), ‘사랑 애愛’라는 글자에는 이처럼 누군가를 향한 관심과 마음, 그리고 그에게로 향하는 발걸음이 담겼다. 사랑을 두고 우리 말에서도 곧잘 ‘사랑(사랑하다)’와 ‘삶(살다)’ ‘사람’이 모두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다느니, 서양말인 영어의 love나 live도 철자 하나 차이일 뿐으로 똑같다느니 하는 말들을 한다. 이렇게 보면 사람이 사는 것 자체가 사랑이고,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한 인간 본연의 삶인지도 모른다.

누가 발명했는지 도무지 모를 사랑이라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밝혀 말하지만, 지고지순하고 애틋한 사랑만이 아니라, 부끄럽고 못된 사랑도 사랑이고, 저속하고 유치하게 보이거나 우습게 보이는 사랑도 사랑이며, 남몰래 평생을 가슴앓이하며 숨어서 한 사랑도 사랑이고, 평생을 눈물 흘리며 미워하는 것도 사랑이다. 나를 되찾게 하는 사랑도 있고, 나보다도 더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랑도 있으며, 평생 해로偕老하는 사랑도 있고, 위험한 사랑도 있다. 늘 새로운 사랑의 그 가치는 어느 것이 더하고 덜한 것이 결코 아니니, 위대한 사랑이 따로 있고 어리석은 사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 말고 다른 이의 사랑을 평가하거나 값을 매길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누구에게나 나만의 사랑이 있고, 나만의 사랑에 대한 이유와 사연, 그리고 정당성이 있으며, 누구에게나 사랑의 능력이 있다. 사랑은 그 어느 쪽에서 보더라도 항상 서로 닮아 똑같고 누구에게나 가치가 있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이라도 어떨 때 치수가 너무 작아서, 한 사람만을 위한 자리만이 있어서, 서로를 구속하고 옥죄는 속성을 지닌다. 그래서 사랑은 행복하면서도 아프고, 희열이면서도 슬픔이며, 설렘이면서 두려움이고, 벗어나고픈 질병이면서 앓고 싶은 질병이며, 지옥에 떨어트릴 수도 있고 천국에 들게도 한다. 사랑은 어쩌면 정확히 이러한 반반의 얼굴을 동시에 지닌다. 이렇게 이율 배반처럼 보이는 사랑은 모순 속에서 더욱 강해지고 아웅다웅 티격태격 속에서 보존되고 변형되어 아름다운 꽃과 보석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 길들지 않는 야성이 된다. 사랑은 통제하려 들고 가두려 할 때 튕겨 나가 서로에게 몹쓸 상처를 입히기까지 한다. 그래서 사랑은 서로를 껴안으려 하면서도 숨을 조른다. 사랑은 목이 메면서, 목 매인 채로 오래도록 걸어간다. 사랑은 결국 마음의 일이어서 글자 한가운데에 ‘마음 심心’을 품었다.

사이 간間

‘사이 간間’은 ‘문 문門’과 ‘날 일日’이라는 글자가 합해진 것이다. 門의 작은 틈 사이로 햇빛(日)이 비쳐 들어오는 것을 나타내면서, ‘사이’ ‘시간의 틈’ ‘동안’이라는 뜻으로 이쪽에서 저쪽까지의 사이를 말한다. 원래 이 글자는 문門 가운데에 ‘달 월月’을 쓰거나, ‘밖/바깥 외外’를 쓰기도 하였다. ‘달 월月’을 쓰게 되면 말 그대로 달빛이 문틈 사이로 비치는 것이고, ‘밖 외外’를 쓰면 밖으로부터 틈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나 달빛이겠다. 그런데 문門 속에 ‘달 월月’을 쓰면 ‘사이 간/한가할 한閒’이라 하면서 ‘한’으로 소리가 나기도 하므로 ‘사이 간間’과 구별하기 위하여 ‘나무 목木’을 사이에 넣어 여가나 조용하다는 뜻을 담아 ‘한가할 한閑’을 따로 쓴다. ‘한가할 한閑’은 ‘막을 한閑’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말이나 소와 같은 동물을 우리에 가두고 나무로 빗장을 질러 막아 마음이 놓이는 상황이다.

‘사이 간間’은 간격으로 보면 작은 틈새이고 시간(때/짬)으로 보면 잠깐이다. 잠깐이라는 뜻을 우리 말로 풀면 ‘어느덧’, 혹은 ‘덧없다’ 할 때의 ‘덧’이다. 그래서 ‘덧없다’는 ‘사이가 없다’ ‘동안이 없다’이고, 그래서 ‘항상 변한다’는 뜻으로, 흔히 ‘무상無常(없을 무, 항상 상)하다’라고도 쓴다. ‘인생무상人生無常’ 할 때의 그 무상無常이다.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잠깐일 뿐인 인생을 생각하면, 문득 ‘부질없다’. 부질없는 것은 뜻이 없고, 찰나이며, 덧없다. 나와 나, 나와 너, 그리고 나와 하늘까지 서로 간에 한순간 고개를 돌리면 이쪽저쪽이 갈리고 모든 것이 부질없다.

‘부질’은 ‘불질’에서 온다. 대장간에서는 불질로 쇠를 달구어 여러 가지 용도의 사물을 제작한다. 그 불질은 풀무로 바람을 일으켜서 한다. 불질을 여러 번 반복해서 두들겨야 제대로 된 쇠붙이가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 하면 쇠가 물러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풀무가 없어도 불질을 못 하므로 아무 결과를 볼 수 없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래서 ‘부질없다’는 헛수고이고 쓸데없는 공연한 행동이다.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을 예배한다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彿’을 감히 빌려 말하면, ‘도로徒努(헛수고, 보람없이 애만 쓴-부처님을 찾았으나 허사가 되고만)’가 되었든, ‘도로都盧(온통, 전부, 모두-모두가 부처님)’가 되었든, ‘도로아미타불’이다.

사람은 ‘사이 간間’을 살아 인간人間, 세간世間, 시간時間, 공간空間을 살고, 긴 세월을 돌아본다 해도 결국 인생은 눈 깜짝할 사이여서 일순간一瞬間(깜짝일 순)이다. 간간間間이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착각과 자신을 속이는 어리석음 속에 살지만, 만사는 나의 뜻과 무관한 것이니 스스로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고 방도가 없어서 하릴없다. 한낱 입김일 뿐(욥 7,7)이다. 그래도 대부분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인간이 순간을 넘어서 영원을 그릴 줄 알아서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혼자서 부질없고 하릴없어 허무하고 공허하다고 몇 번을 되뇌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하늘을 쳐다보고 영원 속의 나를 기도하는 것이리라!

새 추/높을 최隹

미국의 이곳저곳을 다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내가 사는 이곳 플로리다엔 유달리 새들이 많다. 우리 동요 속에서 그저 노래로만 알았던 부리가 긴 따오기를 비롯하여 독수리, 갈매기, 까마귀, 펠리칸, 솔개, 참새, 로빈, 물새, 여러 모양의 크고 작은 두루미들, 오리들, 이름 모를 다양한 새들이 헤아릴 수 없이 각양각색이다. 기후가 따뜻하고 호수가 많아서 물과 먹이가 풍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자로 새를 나타내는 글자들이 많지만, 흔히 우리가 아는 것은 ‘새 추隹’와 ‘새 조鳥’ 두 글자이다. 똑같은 새들이지만 꼬리 깃털이 짧고 긴 것으로 두 글자가 달라졌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고, 새들을 뜻하는 말에는 새, 특별히 매나 송골매의 모양에서 유래되었다는 ‘새 추隹’가 빈번하게 사용되는 듯하다. ‘새 추隹’를 ‘높을 최’라고도 하는 까닭은 새들이 높이 날기 때문이다. 여기에 높은 산을 뜻하는 ‘뫼 산山’을 올리면 ‘성씨姓氏 최崔’가 되니 정말이지 글자로만 보아서 성씨 중에서 높고 또 높은 성씨가 ‘최崔’임은 분명하다.

‘새 추隹’와 함께 만들어진 글자들은 참 많다. ‘입 구口’를 앞에 붙이면 ‘유일唯一(오직 그것 하나)’, ‘유물론唯物論(우주 만물의 실재를 오직 물질로 보는 입장)’ 할 때의 ‘오직 유唯’가 된다. 이는 하늘의 뜻을 전해주는 새가 날아와서 하는 말만이 중요하고 그것만 믿으면 된다는 뜻에서 ‘오직 유唯’이다. ‘새 추隹’ 앞에 ‘마음 심忄’을 더해서 만들어진 ‘생각할 유惟’는 ‘사유思惟하다’라고 할 때의 글자로서, 새가 물어다 준 하늘의 뜻을 곰곰이 생각한다는 뜻이 담겨있고, ‘손 수扌’를 더하면 새가 전해준 신의 뜻에 따라서 손으로 무엇인가를 밀 듯이 밀어붙인다는 의미로 추진推進, 추천推薦, 추산推算, 추측推測, 추대推戴, 추앙推仰과 같은 말을 할 때의 ‘밀 추, 밀 퇴/옮을 추推’가 된다. ‘쉬엄쉬엄 갈/걸어갈 착辶’을 더해 ‘나아갈 진進’이 되면, 새(隹)는 앞으로 날거나 걸을 수 있을 뿐 뒤로 날 수 없고 뒤로 걸을 수 없으므로 말 그대로 ‘나아갈 진進’이다. 류시화씨의 책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제목도 그런 뜻을 담았을 것이다. 전진만 있을 뿐 후진은 없는 비행기도 그래서 새를 닮았다. 새가 전해준 하늘의 뜻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들이 진행進行, 진전進展, 진보進步, 진입進入, 진출進出, 진척進陟, 촉진促進, 승진昇進, 매진邁進, 약진躍進, 증진增進…등이다.

‘새 추隹’ 앞에 ‘진흙/제비꽃/조금 근菫’이라는 조금 어려운 글자를 더하면 ‘어려울 난難’이 되는데, ‘진흙/제비꽃/조금 근菫’이라는 글자는 맨 밑의 ‘흙 토土’ 위에 사람을 묶어 올려놓은 형상이다. ‘흙 토土’라는 글자는 원래 불(火)의 상형이라고 보아서, 사람을 묶어 불 위에 올려놓고 오랜 가뭄과 같은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불사르고 굿하면서 인간사의 어려움을 새를 통해 하늘에 알리고자 하는 글자가 ‘어려울 난難’이다. 인간사는 쉬운 것이 없는 만큼 ‘어려울 난難’이 들어가는 말은 무수히 많다. 논란論難, 비난非難, 곤란困難, 재난災難, 험난險難, 힐난詰難, 고난苦難, 난제難題, 난민難民, 난이도難易度, 난해難解, 난국難局, 난치병難治病, 난관難關…등등이 그렇다. 모양으로 보아 ‘새 추隹’와 어우러져 만든 재미있는 글자도 있는데, 새(隹) 머리 부분에 두리번거리는 두 눈(吅)과 머리 위의 깃털 모습(艹)을 가진 황새의 모습을 본떠 만든 ‘황새 관雚’이라는 글자에 ‘볼 견見’을 붙여서 만든 ‘볼 관觀’이라는 글자는 황새처럼 고개를 높이 들고 여기저기 물속의 먹이를 관찰하듯이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을 말하고, 그저 ‘작을 소小’를 ‘새 추隹’ 위에 올리면 말 그대로 작은 새를 가리키는 ‘참새 작雀’이 된다.

구름이 낮 하늘의 무늬라면 별은 밤 하늘의 무늬이고, 새들은 그 어둠과 밝음의 사이를 노래한다. 새들이 유달리 새벽에 지저귀는 것은 이런 연유이다. 새들은 하늘의 소리를 간직하고 낮과 밤 사이, 하늘과 땅 사이, 신과 인간 사이를 오간다. 그래서 새를 새라고 하게 된 연유로 ‘하늘과 땅 사이’의 ‘사이’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새는 땅의 이야기를 하늘로, 그리고 하늘의 이야기를 땅에 전한다. 새들은 그래서 전령이다. 전령은 전하는 말이 혼자만의 말이 아니고 사실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대개 무리를 짓는다. 계절이 바뀌어 어김없이 다시 찾아오는 새들은 우리를 떠났다가 다시 찾아오는 조상들의 혼령이기도 하고, 마을에 세우는 솟대 위의 새들은 현세와 내세를 넘나드는 경계의 상징이기도 하며, 삼족오를 비롯한 많은 새가 민족과 부족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성경의 새는 창세기로부터 하느님께서 제 종류대로 창조하신 것들이요, 땅 위에서 번성하고 땅 위 하늘 궁창 아래를 날아다니라 명받았으며(창세 1,20-22), 정결한 새들 가운데서 골라 제단 위에서 번제물로 바쳐졌고(창세 8,20), 주님을 찬미하며(다니 3,80), 하늘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시고(마태 6,26), 길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씨들을 먹으며(마태 13,4), 하느님의 큰 잔치에 모여오라는 초대를 받는다.(묵시 19,17) 새들이 많은 곳에 사는 이들은 새들의 지저귐 속에 담긴 하늘의 소리를 자주 들어 행복하기도 하지만, 또한 매사에 너무 무디어져 있으므로 자주 하늘의 소리를 들어서 자신을 채근해야만 할 처지에 있기도 할 것이다.

가르칠 교敎

우리가 흔히 ‘교教’라고 아는 글자는 ‘가르칠 교敎’이다. 이는 생김새나 의미가 오묘하고 깊다. 풀어 헤쳐보면, ‘사귈 효/가로 그을 효爻’ 더하기 ‘아들 자子’ 더하기 ‘칠 복/글월 문攵’이라는 세 글자의 합이다. 그래서 이 셋의 생김새와 의미, 그리고 내력을 각각 따져보아야 한다.

‘사귈 효/가로 그을 효爻’는 나뭇가지 두 개가 가로 겹쳐 교차하는 모양이거나 악수하는 모양이다. 우리 역사 안에서 나무막대를 세로로 놓거나 가로로 놓아서 숫자를 표시하면서 사칙연산을 하거나 점을 치는 상황에서 사용하였다는 소위 ‘산가지’의 모양이다. 지금은 없어지다시피 한 성냥개비들의 놀이를 생각하면 쉽다. 그렇게 생긴 ‘사귈 효/가로 그을 효爻’는 ‘사귀다, 본받다(=效), 가로 긋다, 엇걸리다, 수효數爻, 육효六爻(=역易의 괘卦를 이룬 가로획)’ 등을 떠나 ‘변變하다, 흐리다, 지우다, 말소抹消하다’라는 뜻으로 나아가고, 나아가 악수하는 모습에서 ‘사귈 효’가 된다.

‘가르칠 교敎’에서 ‘사귈 효/가로 그을 효爻’ 밑에 있는 ‘아들 자子’는 원래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양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가로 그은 획을 땅으로 보면서 땅을 뚫고 나온 새싹이라느니, 혹은 가로 그은 획이 남성에게만 있는 두 개의 불알로 보아서 ‘아들 자’라느니, 껍질을 뜻하는 ‘ㄱ’과 새싹을 뜻하는 ‘十’이 결합하여 새싹을 품고 있는 씨앗이라는 의미를 새겨야 한다고도 한다. 어느 정도의 남성성과 어린 녀석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하겠다.

‘칠 복/글월 문攵’은 ‘복攴’과 같은 글자이다. 이 글자는 오른손을 나타내는 ‘또 우又’와 막대기나 무기를 나타내는 모양인 동시에 소리를 나타내는 ‘점 복卜’을 합하여 손에 막대기와 같은 것을 들고 북과 같은 것을 둥둥 때리고 쳐서 소리가 나게 하는 상황이다. 다리 달린 받침대 위에 북을 놓고 두들기는 형상이라 해도 의미는 같다. 이를 ‘(등)글월 문’이라고도 하는 것은, 등을 돌리고 있는 모양새인 ‘글월 문文’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렇게 부를 뿐이다.

이런 내용을 종합하여 ‘가르칠 교敎’를 보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 자식을 나뭇가지나 회초리로 치거나 때려서 가르쳐 배우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가 지녀온 ‘교육’이라는 패러다임을 인간이 덜되고 안 된 어린 것들을 억지로라도 훈육하고 만들어가는 전근대적인 교육과,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완성된 인간인 아이들 하나하나에 담긴 고유한 조물주의 섭리를 깨우치고 발견해나가는 근대적 교육으로 본다면, 스페인 자유교육의 선구자, 프란시스코 페레Francisco Ferrer(1859∽1909년)의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말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전자는 전근대적인 교육이다.

근대적인 교육의 흐름에서 ‘가르칠 교敎’를 글자를 써나가는 순서대로 차근차근 풀어서 『선생과 아이가 서로 사귀어 함께 손을 잡고 동행하는 것, 아이가 신이 나서 손을 들고 기뻐하는 것, 북을 치며 춤추듯이 음악과 리듬에 맞추어 선생과 아이가 함께 춤을 추는 것』이 ‘가르칠 교敎’이다.

이것이 근대적인 교육 패러다임이라 했지만, 사실 이것은 기원전 고대 유가儒家의 오경五經 중 ‘예기禮記’로부터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 하여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서로 돕는 것’이라 했던 오래된 미래였음이 분명하다. 사실 인간의 역사 자체가 하느님께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간 하느님의 역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몸소 피조물인 사람이 되시고 사람과 동고동락하신 역사가 아니던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