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 뜰 격隔

‘사이 뜰 격隔’은 왼쪽에 붙어서 언덕이라는 뜻을 지닌 ‘언덕 부阝=阜’와 소릿값인 ‘막을 격鬲’이 합쳐진 글자이다. 너와 나 사이를 가로막는 언덕이나 장벽으로 갈라지고 나뉘어 가로막힌 상황이다. 그런데 ‘막을 격鬲’ 역시 항아리 같은 것을 올려놓고 밑에서 불을 지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상황을 묘사한 글자이니 이로 미루어 ‘사이 뜰 격隔’은 언덕과 언덕, 혹은 큰 언덕인 산과 산 사이의 공간이고 떨어져 있음이며 막힘이고, 경계를 넘어 멀리하다 보니 서로가 달리 바뀌어 가는 상황이다. ‘사이 뜰 격隔’에는 ‘칠, 부딪칠 격擊’이라는 뜻도 담겼다.

‘칠, 부딪칠 격擊’은 ‘손 수手’라는 하단부 위에 ‘수레 끌 수軗’라는 글자가 올라앉아 있다. ‘수레 끌 수軗’는 ‘수레 차車’와 ‘창 수殳’의 결합이니 수레 위에서 손에 창을 들고 상대방을 공격하고 친다는 뜻이다. 결국 ‘칠, 부딪칠 격擊’은 수레바퀴 같은 것이 돌면서 무엇인가에 부딪혀 큰 소리를 내는 상황이나 손으로 무엇을 가격하는 것을 넘어 수레 위에서 누군가를 공격하는 모양새다.

COVID-19라는 바이러스가 인간을 공격해왔고 급기야 하늘, 땅, 사람들 사이가 떨어졌으며(隔), 전자현미경으로나 보아야 보이는 작은 바이러스들이 온 세상을 내려친다(擊). 격리隔離(lockdown, isolation)요 격추擊墜(shutdown)이다. 누구나 난생처음 맞아보는 이변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별의 인사마저도 못한 채 서로 생을 달리해야만 했고, 아픈 이들을 돌보는 이들은 사투死鬪를 벌여야 하며, 서로는 두려움의 시선으로 살피고 움츠린다. 경험의 축적으로 살아가는 인간 사회는 사례가 없고 유례가 없어 당황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일상과 서로의 소중함을 발견하기 시작하고, 손으로는 닿지 못해도 마음으로 닿아야 하는 것들과 만지지는 못해도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를 새기며, 숨 가쁘게 급하기만 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우리가 그렇게 위대하다고 자부했었으나 그렇게도 작은 것 앞에서 속수무책일 만큼 연약함을 절감하며,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던 황갈색 이산화탄소로 뒤덮인 하늘이 푸른 빛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목격한다.(황색빛 하늘도 죽인 코로나···중국 대기가 파랗게 변했다-중앙일보, 2020.03.01. 참조)

하늘의 경고이자 숨 고르기이고, 땅의 쉼이며, 사람들이 기도하는 시간이다. 새들은 여전히 다시 울고, 꽃들은 다시 피기 시작하며, 봄이 다시 오고 있다. 낙엽이 수북한 숲속에 제멋에 살다가 요정의 구애를 아랑곳하지 않았던 수선화 몇 송이가 피었다.

“마리안 쉬라인(오늘 오후)”

소리, 그늘 음音

‘소리, 그늘 음音’은 원래 ‘말씀 언言’과 같은 글자에서 출발한다. ‘소리’와 ‘말’을 따로 구별하지 않다가 이를 서로 구별하기 위해서 ‘말씀 언言’의 ‘입 구口’에 ‘하나 일一’을 더함으로써 ‘말씀(말)’과 구별되는 ‘소리’를 나타낸다. 소리(音)와 구별되는 ‘말씀 언言’은 ‘매울 신辛’과 ‘입 구口’가 더해져 만들어진 글자인데, ‘매울 신辛’이 손잡이가 달린 쇠꼬챙이처럼 끝이 뾰족한 것을 가리키므로 얼굴의 구멍인 입(口)에서 나가 누군가 상대방에게 꽂히는 매서운(辛) 말이라고 풀이하기도 하는데, 대개는 입에 물고 부는 나팔과도 같은 악기를 그렸거나 입에서 퍼져나가는 말 자체의 형상을 묘사했다고 한다. 잔소리, 군소리, 흰소리(터무니없이 떠벌리는 말), 헛소리, 말 같은 소리에서처럼 소리와 말이 동의어로 쓰일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의 생각이 입을 통해 조직적으로 전해지는 말이나 말씀은 言이라 하고, 사람의 입을 통해 그저 나오는 소리나 그 밖 삼라만상의 소리를 통칭하여 音이라 할 것이다.

소리는 분명 말보다 먼저였다. 사람도 울음소리로 인생을 시작하여 점차 말을 하기 시작하니 말이다. 그리고 말 다음에 말이 기호가 된 글이었을 것이다. 소리는 땅의 소리, 하늘의 소리, 그리고 사람의 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가 어우러져 빛이 되고 어둠이 되며, 있는 것들의 꼴이 되고, 서로에게 기억과 존재 이유가 된다.

땅의 소리는 꽃과 새싹의 소리, 폭포와 불, 그리고 하늘을 맞는 땅의 소리, 계절과 얼굴을 바꾸는 소리, 땅에 인연을 맺어 발 디디고 기는 것들의 움직임이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은 주인 노릇을 하느라 사람이 아프게 한 땅의 신음이다. 하늘의 소리는 바람과 구름,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는 새의 소리이며 징조와 신호를 내는 예언이고 계시이다. 사람의 소리는 목소리와 기록, 체험과 기억의 맥박, 마음과 영혼의 울림과 탄식, 곡哭이며 노래와 찬미, 피리와 수금, 비파와 꽹과리, 북鼓처럼 하늘 모양을 본떠 만든 것들의 소리, 스스로 목소리를 지닌 인간의 눈물, 때로는 인간 자신조차 모르는 이야기이다.

새소리가 바뀌었다. 계절이 바뀌었다는 소리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여기저기 초록 잎과 개나리가 내미는 노란 끝의 소리, 창밖으로 보이는 큰 나뭇가지에 붉은 봉오리들의 소리가 맺혔으며, 사슴들은 느긋하다.

수도 없이 소리 내어 외웠을 작은 기도문 하나를 영어로 프린트해서 지갑에 담았다. 『Hail, Holy Queen, Mother of Mercy, our life, our sweetness, and our hope! To you do we cry, poor banished children of Eve; to you do we send up our sighs, mourning and weeping in this vale of tears. Turn, then, most gracious advocate, your eyes of mercy toward us; and after this our exile, show unto us the blessed fruit of your womb, Jesus. O clement, O loving, O sweet Virgin Mary! (여왕이시며 사랑이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 당신 우러러 하와의 그 자손들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나이다. 슬픔의 골짜기에서,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여, 불쌍한 우리 인자로운 눈으로 굽어보소서. 귀양살이 끝날 그때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를 뵙게 하소서.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

독 독毒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계가 두려움을 갖고 많은 이가 신음하며 몸살을 앓고 목숨을 잃는다. 바이러스라는 말의 근원을 쫓아 올라가면서 바이러스(virus)와 세균(bacterium, germ)의 차이를 공부한다. 세균보다는 크기가 아주 작고 늦게 발견되었으며, 살아있는 생물체인 숙주宿主, 곧 호스트가 있어야만 활동할 수 있는 생명과 물질 사이에 존재하는 바이러스는 라틴어에서 ‘끈적끈적한 액체류 같은 독毒slimy liquid, poison’을 뜻하는데 한자 말로는 ‘병독病毒’이라 옮긴다. 반면 독립된 세포로 이루어진 생물인 ‘세균細菌’에서 ‘버섯 균菌’이라는 글자는 ‘풀 초艹’와 ‘곳집 균囷’의 합자인데, ‘벼 화禾’를 가운데 품고 수확한 벼를 보관하던 창고(囗)를 그린 ‘곳집’이어서 곰팡이가 잘 자라던 습한 장소이고, 艹는 그곳에서 자라던 ‘버섯(곰팡이)’이다. 세균은 공기 중이나 사람의 몸속 어디서나 먹이가 있는 곳에서 증식한다. 인체에 위협을 가하는 바이러스는 항바이러스제로 치료하고, 세균류는 항생제로 치료한다.

바이러스는 결국 독毒이다. 그런데 그 ‘독 독毒’이라는 글자는 ‘어미 모母’를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어미 모母’라는 글자를 약간 옆으로 돌려볼 때 이는 ‘여자 여女’라는 글자에 젖을 물려 아기를 양육하는 어미 가슴을 두 개의 점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여자 여女’를 바탕으로 하는 글자에서 사물이나 사람에게 해가 되는 독을 가리키는 글자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의외이다. ‘어미 母’라는 글자 위에 ‘사람 인人’을 올리면 ‘매양 매每’가 되면서 날마다 젖을 물려야 하는 어머니, 혹은 매번 어머니로부터 젖을 먹어야 하는 아기로 ‘늘’이나 ‘마다’라는 뜻을 담지만, ‘어미 母’ 위의 ‘사람 인人’이 통상 여성들이 머리에 꽂는 비녀이니 비녀가 둘이 될 때면 ‘음란할 애毐’, 셋 이상 여럿이면 ‘독 독毒’이 된다. 사전도 『‘독 독毒’은 설이 분분하나 ‘음란할 애毐’에 가로획이 하나 더해짐이 분명하다. 머리에 비녀를 여럿 꽂아 화려하게 장식한 여인(母)에서부터 ‘농염하다’는 뜻을 그렸고, 그러한 여자는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독’같은 존재라는 뜻에서 ‘독’의 의미가 나왔다. 비녀를 꽂지 않은 모습이면 母이고, 하나를 꽂은 모습이면 ‘매양 매每’이며, 여럿 꽂은 모습이 毒으로 표현되었다. 설문해자에서는 ‘떡잎 날 철屮’과 ‘음란할 애毐’로 구성되어 독초를 말한다고 했다.(하영삼, 한자 어원 사전)』라고 풀이한다.

비녀가 셋 이상이어서 독이 되는 ‘팜 파탈femme fatale’이든, 어둠에서 번식한 음란의 싹이든, ‘독毒’은 일단 무섭고 두렵다. 인간에게 중독이고 치명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셀 수 없는 인간의 생각이 탐욕(貪慾), 분노(진‧瞋), 어리석음(치‧癡)이라는 3독三毒이 묻은 가시들 같아서 인간을 윤회시키는 전염병의 원균原菌들이라 했다.

그렇지만 독버섯이 그렇듯 독초는 그 아름다움에 비해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약藥’과 ‘독毒’을 함께 지닌 여린 품종이기도 하다. 백신도 미량의 독을 미리 주입해서 면역을 자가생성하자고 하는 원리가 아니던가? 독초는 사람들이 독초라고 규정했을 뿐이지 독초 자신이 스스로 칭한 것은 아니다. 자신은 그저 풀이다. ‘독초’는 인간의 논리이다. 그렇듯 꽃밭에 숨은 독사, 낙원의 뱀이 지녔을 독에는 호기심과 상상, 두려움과 진귀함, 섬뜩함과 놀라움, 징그러움과 아름다움, 쓰디쓴 것과 달콤함, 욕심과 기쁨, 격정과 쾌락, 죄와 탐스러움, 미움과 사랑, 죽음과 삶이 함께 담겼다.

어수선한 요즘이다. 생각이 상상되고 상상이 환상, 망상을 넘어 살상殺傷이 된다. 사람과 세상사가 본래 정중동靜中動이며 동중정動中靜이다. 정신없이 살다가 정신 차려야 할 순간이다. 해독解毒의 때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지혜 1,14) 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8) 하셨다.

바람 풍風

‘바람 풍風’은 원래 ‘봉새 봉鳳’과 같이 쓰여서 ‘무릇 범凡’과 ‘벌레 충‧훼虫’, 혹은 ‘새 조鳥’의 합자로 본다. 돛단배의 돛을 그린 ‘범凡’은 바람 없이 갈 수 없는 바람 그 자체이고, 옛 중국에서는 곤충이나 새가 모두 ‘벌레 충‧훼虫’에 속할 수 있었으므로 그렇게 썼을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바람이 불면 벌레가 생긴다는 생각(풍동충생風動蟲生)으로 ‘벌레 충‧훼虫’이 더해졌다고 하기도 하고, ‘새 조鳥’를 썼던 것은 봉새의 날갯짓으로 바람이 생긴다고 생각하여 그랬을 것이라 한다.

여덟 방위를 갈랐듯이 바람은 사방팔방에서 분다. 그렇게 부는 바람은 풍전등화風前燈火나 풍비박산風飛雹散처럼 형상이고, 미풍양속美風良俗이나 풍기문란風紀紊亂, 위풍당당威風堂堂처럼 풍습이나 풍속을 넘어 풍모나 풍채이며, 풍문風聞이나 풍설風說처럼 먼 곳에서 날아와 작은 틈새라도 어김없이 파고드는 속성이고, 풍경風景, 풍물風物, 풍광風光처럼 멋진 것이다. 바람은 농경사회에서 작풍作風을 관장하는 신이어서 ‘태풍 태颱’가 되면 크게(台·대, 臺의 속자) 부는 강한 바람이고, ‘폭풍 표飆’가 되면 사나운 개 여럿이 달려들 듯(猋·개 달리는 모양 표) 휘몰아치는 폭풍이며, ‘회오리 바람 표飄’가 되면 불꽃이 튀어 가볍게 솟아오르듯(票·표) 하늘로 솟아오르는 ‘회오리바람’이다.

비가시적인 실체인 바람은 사람들이 보고 싶고 손에 잡아보고 싶은 꿈이고, 새들이 높은 곳에서 활공滑空할 때 모든 것을 벗어나 유유자적하는 놀이이며, 연鳶(솔개 연)이 될 때 너와 나를 넘어 가면이고 하늘에 그리는 그림이자 환상이다. 바람은 나는 것들로 자신을 드러낸다. 바람은 아무도 볼 수 없지만, 누구나 볼 수 있게 자신만만하여 초당 몇 미터를 가는지로 자신의 힘과 방향을 과시하고, 골짜기에서 꼭대기를 향하여 가다가 꼭대기에서 골짜기로, 물에서 뭍으로 가다가 뭍에서 물로 가면서 종횡무진縱橫無盡이다. 새·곤충·꽃가루·종자 ·구름을 날리면서 바람은 제 할 일을 하는 우주의 숨과 기운이다. 바람은 모든 것을 씻은 듯이 날려버리는 찰나요 허무와 불안이어서 저돌적이고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풍요의 숨결이고 성스러운 정신이며 인간이 노래로 듣고 싶어 하는 가락이다.

밤새 어디서 어떻게 부는지도 모르게 큰소리를 치며 두려울 만큼 바람이 강하고 무섭게 불었다. 숲에는 나뭇가지들이 수북이 떨어져 내렸고, 다람쥐와 사슴들은 일제히 숨었다. 두 마리의 새들만이 높이 난다. 도토리들이 지천이라 다람쥐가 겨울 대비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따뜻하다더니 기온도 큰 폭으로 떨어지고 급기야 저녁나절에는 백 퍼센트의 확률로 눈이 내린다고 한다.

주님께서 엘리야와 만나실 때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1열왕 19,11-12)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에게 예수님은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8) 하신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 때, 너와 나 사이에 하늘 바람이 불면, 우리는 날고 영에서 태어난다.

옮길 반搬

‘이사를 가다/하다’라는 것을 한자말로 표기하면 ‘옮길 반搬’이라는 글자를 써서 ‘반가搬家’라고 한다니 말 그대로 집을 바꾸는 것이고 옮기는 것이다.

이때 사용하는 ‘옮길 반搬’은 손을 뜻하는 재방변(扌=手)과 소릿값인 ‘돌, 옮길 반般’이 합하여 손으로 옮기는 행위를 나타낸다. ‘반般’이라는 글자는 배를 뜻하는 ‘배 주舟’와 나무 막대기를 뜻하는 ‘막대기 수殳’가 합해져 있고, 또한 배가 돌아다니거나 나르고 옮긴다는 뜻도 있으므로 옛날 사람들이 노를 젓는 배로 이사를 해서 그런 글자가 생겼나 하고 상상해 본다. ‘반般’을 실제 ‘손으로 잡고 배를 돌린다’는 뜻으로 풀기도 한다.(하영삼) 그런데 ‘반般’이라는 글자를 두고 한참 거슬러 올라가 갑골문에서는 이 글자를 이루는 ‘주舟’가 밥그릇이고 ‘수殳’는 손에 든 숟가락이라 한다고 한다. ‘그릇 명皿’을 붙여서 ‘쟁반’이나 ‘받침’이라는 뜻을 지닌 ‘소반 반盤’이 ‘반般’이라는 글자의 전신이었고, 밥 먹는 일과 같은 일상적인 것을 가리킬 때 ‘일반一般’이라 한다는 것을 보면 ‘반般’은 밥그릇이나 숟가락과 분명 깊은 관련이 있기도 할 것이다. 한편에서는 ‘소반 반盤’을 배처럼 바닥이 평평한 그릇이라 하기도 한다. ‘옮길 반搬’에는 이래저래 손, 배, 밥그릇과 숟가락 등이 엉클어져 있다.

불가의 스님들은 이동 시에 발우鉢盂(바리때 발, 사발 우)가 필수품이었다고 하지만, 적어도 오늘날 가톨릭의 수도자만큼은 이동할 때 밥그릇이나 숟가락을 가지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고, 소임 따라 옮겨간 집에 있는 밥그릇과 숟가락으로 다른 밥을 먹는 과정이 되므로, 그들의 이사는 단순하게 말해서 밥그릇과 숟가락 바꾸기 정도일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32개월이 채 못 되는 플로리다의 생활에서 뉴욕으로 배가 아닌 비행기를 타고 이주해왔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여름 나라에서 갑자기 영하의 나라로 왔다. 어린 시절부터 수도원에 살았고, 수도 없이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녔지만, 아직도 가장 싫은 일 중의 하나는 보따리 싸는 일이다. 몇 날 며칠을 한숨 쉬며 바라만 보다가 날짜가 목에 차서 이민 가방 한 개와 라면 상자 크기의 상자를 몇 개 구해서 꾸겨 넣었다. 주로 여름옷뿐이었으므로 이민 가방 하나에 옷은 모두 넣고도 공간이 남았다. 문제는 상자였다. 남은 소지품은 책 몇 권과 잡동사니까지 두 개의 박스면 충분했다. 우선 한 개에 책들을 모두 넣고 꼼꼼하게 테이프로 포장을 했지만, 그것을 들어 옮기려다 보니 허리를 상할 것 같았고, 배달하시는 분에게까지 큰 누가 될 것이라는 염려가 생겼다. 어쩔 수 없이 상자를 다시 풀어헤쳐서 다섯 개의 상자에 분배하여 넣고, 문방구에서 파는 packing nuts로 빈 곳을 메꾸고 포장하여 우체국에서 발송하는 것으로 이사는 끝났다.

휑한 침실에서 마지막 잠을 자려다 문득 열여섯 소년 시절 포근한 가을 어느 일요일 오후, 양쪽에 책이나 도시락을 넣고 가운데는 잡동사니를 넣었던 책가방 하나와 큰 보자기에 이불 하나를 싸서 수도원으로 가던 날을 생각했다. 다른 소임지로 이동할 무렵이면 항상 떠오르는 집을 떠나던 내 인생 첫 이사의 기억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이삿짐을 꾸리던 날로부터 팔십 줄에 앉은 아브라함이 길을 떠나던 날,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 자고 일어나면 다시 짐을 꾸려야 했던 몇십 년의 날들,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진할 수 있도록 그들 앞에 서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 속에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그들을 비추어 주셨다.”(탈출 13,21-22) 하던 날들…평생 이동과 이주를 매듭과 계기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일 것이기도 하지만, 이번 이사 후에 나는 몇 번이나 짐 보따리를 또 싸야만 하는 것일까?

높을 존, 술 그릇 준尊/물건 품品

‘높을 존, 술 그릇 준尊’ 이라는 글자는 술병 혹은 술독(酋)을 두 손(寸)에 공손히 받들고 바친다는 데서 존경의 뜻을 나타내어 「높이다」를 뜻한다. 이 글자는 술을 신에게 바치다→삼가 섬기다→존경을 높이 드린다는 것을 나타낸다. 품위品位라고 할 때의 ‘품品’은 ‘입 구口’ 세 개가 모여 쌓인 기물이나 물건의 아가리들의 모습이다. 기물이라는 것이 애초에 제사 등을 드릴 때 쓰는 용기이거나 용품이고 보면 굳이 해설하지 않아도 그 글자의 뜻이 짐작된다. 그렇게 보면 ‘존엄’이나 ‘품위’는 모두 인간이 하느님을 알아서 섬기는 상황과 연결되는 글자들이다.

나는 이곳 수도원의 한편에 있는 산 필립이라는 소위 양로원에서 미제美製로 세끼 밥을 먹는다. 그곳 식당에는 10명이 앉는 식탁이 두 개 있다. 나도 10명 중 한 명으로 한 식탁에 앉는데 내가 앉는 식탁에서는 내가 유일한 외국인이고 60이 한참 넘었어도 내 나이가 제일 어리다. 작년 봄에는 나의 오른쪽에 앉으셨던 마이클이라는 신부님이 돌아가셔서 그분의 장례미사를 지냈다. 나의 옆에서 가끔 농담도 주고받고, 애들이 날갯짓하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하듯 내가 말없이 오른팔로 옆의 신부님을 툭툭 건드리면 신부님도 왼팔로 나를 툭툭거리며 응답을 해주시던 분이다. 신부님은 전동 휠체어를 타거나 걷기까지 하시며 여기저기를 다니시거나 햇볕에 화상을 입을 정도로 정신없이 한참을 주무시기도 하면서 잘 지내시다가 이른 봄 어떤 날 거짓말처럼 병원으로 가셨고, 투석해야 한다는 의사들의 결정을 거부하여 10여 일 만에 선종하셨다.

올해 들어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나의 왼편에 앉아계시던 폴이라는 신부님이 병원으로 가셨다. 기력이 쇠하셨고 약간의 치매기까지 겹친 상황이었다. 매일 저녁 식사 때마다 포도주 반 잔에 물을 타서 드시고 치아가 좋지 않아서 씹는 것은 못 잡수시므로 모든 것을 죽처럼, 그리고 수프처럼 국물에 말아 드시기를 좋아하시던 분이다. 아니 좋아하셨다기보다 그렇게밖에 드실 수 없었던 분이다. 가끔 좋은 고기가 나올 때면 나 스스로 애가 타서 아주 잘게 썰어달라고 주방에 일부러 부탁해서 드리고, 드셔보시라 하면 한참을 애쓰다가도 결국 못 잡수셨던 분이다.

함께 계시던 할아버지들이 병원으로 가시면 응당 찾아가 뵙는 것이 도리인 줄 알지만, 썩 내키지 않는다. 이미 이곳에서도 현재로 보았던 나의 미래를 또 다른 모습으로 마주친다는 것이 두렵고 싫어서일 것이다. 폴 신부님께서 병원에 계시다가 요양원으로 옮기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저 생각만으로 요양원에 계시는 신부님을 가서 뵈어야지 하다가 그렇게 날이 하루 이틀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엊그제 본당의 한 자매가 신부님을 뵈러 다녀왔다고 했다. 자매님에게 전화해서 근황을 상세히 여쭤보았다. 얘기 중에 가진 옷이 하나도 없어서 그저 기저귀만 채워서 눕혀 놓은 것을 보고 허겁지겁 고무줄 달린 바지 같은 것을 사고 옷가지를 좀 사서 이름표 달아 입혀드리고 왔다고 했다. 요양원의 특성상 빨래를 공동으로 해서 이름표가 없는 옷은 주인 없는 옷이 되므로 그런 시설에 가게 되면 양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류에 이름표를 새기는 것이 필수이다. 온도 조절이 잘 되고 문제가 없을 것이므로 옷을 벗고 계셨어도 생존에 지장은 없었겠지만, 관리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그저 기저귀만을 채워서 눕혀 놓았다는 말을 듣고는 공허했고 왠지 모를 눈물이 핑 돌았다. 옷이 없으면 그 누구라도 옷을 가져오라고 연고자에게 전화 한 통 해주기가 어려운 미국의 시스템이라는 것과 개인주의, 그리고 가족 없고 마누라 없이 사는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새삼 품위와 존엄은 어디서 생겨나고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왜 인간은 그렇게 있으면 안 되는가 하는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었다.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거창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들은 제쳐놓고 그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타인에 의해서 그렇게 처리(?)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적어도 초자본주의 사회인 이곳 미국에서 인간의 품위는 그렇게밖에 유지될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의 품위와 존엄, 그리고 고귀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니 어떻게 지켜지는 것일까?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 의복일까? 생명이 붙어 있다는 사실일까? 생김새나 외모일까? 명료한 의식이 없을지라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행위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는 도덕적 기준에 입각한 습관으로 몸에 익혀진 행동의 반응일까? 하느님을 알아 모신다는, 아니 의식이 멀쩡했을 때 하느님을 알아 모셨다는 경력일까? 타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면서 나의 자율성을 확보해야 하는 동물이 인간이라 했는데, 그 자율성이 상실된 상황에서 자율성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이고 품위나 존엄성과는 관계가 있을까? 이런 의문들은 한낱 무엇으로 존중받는가가 아니라 왜 존중해야 하는가를 따져야 하는 건너편 남은 자들의 의문일 뿐일까? 실체적 개념들이 아니라 신·인간·자연이라는 관계의 맥락 안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존엄성을 근거 지어야 한다는 말은 과연 어떤 말일까?

생각은 많았지만, 답은 없었다. 그저 지금 의식이라는 것이 말짱할 때 내게도 닥칠 그런 상황에 대하여 글로라도 뭔가를 써 놓아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틈날 때마다 가진 옷들에 이름표라도 새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하느님께서는…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하여 그렇게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지어져 존엄하다 하였다. 온갖 시련을 겪느라 존엄이나 품위는 고사하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고통의 인간 욥이 주님 앞에서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욥 40,4) 할 때, “폭풍 속에서” 말씀을 이으신 주님께서 “존귀와 엄위로 꾸미고 존엄과 영화로 옷을 입어 보아라.”(욥 40,10) 하시므로, 욥은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 42, 5-6) 하며 고백한다. 바오로 사도 역시 “다만 모든 일이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합니다.”(1코린 14,40) 한다.

부끄러울 치恥

부끄럽다는 뜻이 붙어 있어서 부정적이거나 삼가야 할 글자처럼 느껴지지만 원래 ‘부끄러울 치恥’는 사람의 바른 본성을 나타내는 긍정적인 글자이다. ‘부끄러울 치恥’는 ‘귀 이耳’와 ‘마음 심心’이 합해져 만들어진 형성문자로서 귀로 드러난 마음의 상태, 곧 붉은 혈액의 엔진인 심장(마음)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이나 내적 감정의 흔들림이 귀에 전달되어 홍조로 귀가 붉어진 모습이다. 다른 말로 하면 속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어서 겉과 속이 같은 상태이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고, 겉과 속이 달라서 속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낯 두껍게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을 후안무치厚顔無恥(두터울 후厚, 낯 안顔, 없을 무無, 부끄러울 치恥)라 한다. 나중에 이 글자는 모욕이나 창피를 입어서도 낯이나 귀가 붉어지므로 ‘체면을 구기다’나 ‘창피를 당하다’라는 뜻으로 발전한다. ‘부끄러울 치恥’가 사람의 본성을 나타내는 글자인 것은 웃음이나 울음과 달리 속마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홍조를 시늉할 수 없다는 것만 보아도 자명하다. 속에서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는데 일부러 귀나 얼굴을 붉히는 홍조를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귀가 아닌 얼굴에 홍조가 드러나거나, 마땅히 드러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그리는 데는 ‘뻔뻔스러울 전, 부끄러워할 면靦’이라는 글자가 따로 있다.

‘부끄러울 치恥’는 중국 춘추시대 제齊 나라의 사상가요 정치가이자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관중(管仲 ?~BC 645년)이 지은 관자管子의 ‘목민편牧民篇’에서 개인의 속과 겉이 아닌 예禮·의義·염廉·치恥라는 4가지 국가 경영의 기본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부끄러울 치恥’는 곧잘 ‘음식을 올릴/바칠, 부끄러울 수羞’라는 글자와 함께 어울려 ‘수치羞恥’라는 말로 쓰이는데, 이때의 ‘수羞’라는 글자 또한 그렇게 가벼운 글자가 아니다. ‘수羞’라는 글자는 ‘양 양羊’과 ‘손 우又’가 합해져서 신神에게 맛있고 좋은 고기로 부끄럽지만 정성스럽게 제사를 올려바치는 상황, 곧 신 앞에 선 인간의 왜소함과 부끄러움을 묘사한다. 이러한 기원을 가진 ‘수羞’라는 글자는 맹자의 공손추公孫丑에서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진 사람으로 비유되어, 사람이 되기 위한 네 기본 중 하나가 된다. 『무측은지심 비인야無惻隱之心 非人也, 무수오지심 비인야無羞惡之心 非人也, 무사양지심 비인야無辭讓之心 非人也, 무시비지심 비인야無是非之心 非人也.(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上)』에서 맹자는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악함을 미워하는 수오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 하면서 ‘부끄러움’을 유학儒學과 성선설性善說의 한 축으로 삼는다.

애틋한 부끄러움과 뻔뻔한 부끄러움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다리는 시간은 조바심의 긴장을 낳고, 긴장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무엇인가의 두려움이 되다가, 그 두려움으로 서로의 사랑을 표현하면서는 조심스럽고 서툴러 부끄러워진다. 그와 같은 것이 애틋한 순수함의 부끄러움이라면, 반대로 “죄로 이끄는 부끄러움도 있고 영광과 은총인 부끄러움도 있다.”(집회 4,21)는 말처럼 떨쳐버려야 할, 죄로 이끄는 부끄러움도 있다. 낯이 두꺼워져서 낯빛이 하나도 변하지 않는 태연함을 수련하여 뻔뻔스럽게 살아도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것이고, 남몰래 혼자 얼굴을 붉히더라도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이다. 굳이 하느님 앞에 나서지 않아도 스스로 느끼고 아는 것이 부끄러움이고, 다른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소위 ‘진실’ 역시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굳이 맹자孟子를 모셔오지 않아도 인간은 부끄러워할 줄 알아서 비로소 인간이다.

베드로 사도는 하늘과 땅, 그리고 어둠 외에는 아무도 몰랐던 부끄러움으로 아침이 되자 사랑하는 분의 말이 생각나 “슬피 울었다.”(마태 26,75) 하느님 앞에 알몸으로 있어도 부끄럽지 않았던 낙원의 인간이(창세 2,25 참조) 죄의 인간으로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엄정함과 자비로, 두려움과 부끄러움 두 가닥으로 꼬인 채찍을 들어 저를 거듭 내리치시는 중(고백록, 제8권 11.25)』이라고 고백한 대로 하느님의 엄정함과 자비의 채찍, 인간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이라는 채찍, 각각 두 줄로 꼬인 두 개의 채찍을 경험한다. 그래도 신앙은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에 넘치고 너희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 34,6) 하는 말로 자신을 추스르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한다.

끙끙거릴, 읊조릴 신呻


작년 말 잠시 귀국하여 건강검진차 1년 반 만에 병원에 갔었다. 아무리 건강을 위해 병원에 간다고 하더라도 병원에 가는 길은 유쾌하지 않다. 40이 넘어서면서부터 나의 체질상 필요하다 하여 ‘대장 내시경’이라는 것을 반드시 하는데, 이는 아주아주 괴로운 과정이다. 맛이 별로인 약물과 함께 물을 적어도 4리터 마셔야 한다는 강박은 거의 고문 수준이고 두려움의 극치이다. 그런데 그때에는 달랐다. 약물을 연구하시는 분들의 노고에 존경을 드렸다. 맛도 그런대로 괜찮아진 약물과 함께 그저 맥주 한 잔 마시는 정도로만 해결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키 재고 몸무게 재는 것으로 해 질 녘에 시작한 짧은 병원 생활의 고통은 잔뜩 기대했던 장 청결제가 아니라 의외의 곳에서 왔다. 6명이 누워있는 병실이었는데, 밤새도록 끊이지 않는 나의 앞자리에 계시는 86세 할아버지의 괴로운 신음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이야 다인실의 당연함이니 그렇다 치지만, 그를 견디지 못하는 옆자리의 마흔 댓 먹은 젊은이의 상스러운 욕설과 예의 없음, 그리고 할아버지의 간병인이 그 젊은이의 외침에 응답하듯 할아버지에게 큰 소리로 ‘제발 좀 그만하세요! 저 사람이 소리 지르잖아요!’ 하는 100번도 넘는 후렴, 그렇게 완벽한 3박자로 밤을 꼬박 새우는 과정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신음呻吟’은 ‘끙끙거릴 신呻’과 ‘읊을 음, 입 다물 금吟’이라는 글자로 이루어졌다. 몹시 앓거나 힘에 겨운 일에 부대껴서 반복해서 입으로 내거나 입 다물고 속으로 앓는 소리를 묘사하는 글자들이어서 두 글자 모두 옆에 ‘입 구口’가 붙어있고, 두 글자 모두 끙끙거리거나 웅얼거리고 노래나 시詩 등을 읊조리는 상황을 묘사한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와 소릿값인 ‘거듭할, 펼 신申’이 합하여 이루어진 ‘끙끙거릴, 읊조릴 신呻’에서 ‘거듭할, 펼 신申’은 번개가 번쩍거리며 하늘에서 땅까지 사방으로 이어지는 모양에서 ‘펴다, 늘이다, 연장하다, 이어지다’라는 의미를 지니다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르는 것이므로 ‘알리다, 말하다, 타이르다, 거듭하다, 되풀이하다, 말하다, 경계하다’라는 의미로까지 나아간다. 이렇게 ‘끙끙거릴, 읊조릴 신呻’이라는 글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입을 통해 밖으로 터져 나오거나 속으로 되새기는 고통의 소리이다. ‘읊을 음, 입 다물 금吟’의 소릿값인 ‘이제 금今’ 역시 ‘금仐’이라는 글자의 원래 글자로서 세월이 흐르고 쌓여(合) 지금에 이르렀다는 뜻이 합하여 ‘지금, 이제’를 뜻하는 것이고 보면 ‘신음呻吟’에는 지금에 이른 인간의 오랜 세월과 울음이 담겼다.

할아버지의 신음 같은 그런 소리를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올빼미 우는 소리에 비유했다. 『올빼미 우는 소리를 가까이 들으면 자연의 소리 가운데 가장 우울한 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자연의 여신이 죽어가는 인간의 신음을 올빼미 소리에 형식화시켜서 자신의 합창단 가운데 영구히 집어넣은 것 같다. 그것은 모든 희망을 버린 한 가련한 인간의 혼이 지옥의 어두운 골짜기를 들어서면서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인데 거기에 인간의 흐느낌이 가미된 소리인 것이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Walden’)』

세상에 자기 존재를 알리느라 커다란 기쁨의 울음으로 태어난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신음하며 생을 마감한다. 어떤 이는 신음으로 자기의 살을 비집고 나오는 생명을 낳고, 어떤 이는 신음으로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을 증명하며 죽어가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숨어서 통곡과 신음으로 눈물짓기를 그치지 않으면서 평생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거나 하늘만 바라보기도 한다. 그럴 때 그런 신음 자리는 어둠 속이고 혼자만의 외로운 곳이며 눈물마저 말라버린 자리이다.

하느님 품을 떠난 인간은 본성적으로 “저는 쇠약해지고 더없이 으스러져 끙끙 앓는 제 심장에서 신음 소리 흘러나옵니다.”(시편 38,9) 한다. 그러나 신음하는 이들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어 인간은 희망을 품는다. “가련한 이들에 대한 핍박과 가난한 이들의 신음 때문에 이제 내가 일어서리라. 주님께서 이르신다. ‘그가 갈망하는 대로 나 그를 구원으로 이끌리라.’”(시편 12,6)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거짓 가假

‘거짓 가假’라는 글자는 ‘거짓 가’, ‘멀 하’, ‘(어느 목적지에)이를 격’이라는 뜻과 소리를 지닌다. 가면假面, 가장假裝, 가상假像, 가정假定, 가령假令 등에 쓰이는 이 글자의 구성은 ‘사람 인人’과 ‘빌릴 가叚’가 합해져 이루어진다. 이를 풀이하려면 ‘사람 人’이야 더 말할 나위 없이 익히 아는 글자이고, 문제는 ‘빌릴 가叚’가 관건이다. 어떤 이는 이 ‘빌릴 가叚’를 놓고 농부가 자신의 농기구를 가지고 땅 주인에게 가서 땅을 빌리는 것을 나타낸 회의 글자이므로 농부가 이러저러한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꾸며낸’ 계획으로 땅을 ‘빌리는’ 상황이라 하고, 사람(人)이 말을 꾸며내는(叚) 것이 어느 정도 ‘거짓’을 담고, 남에게 빌리는 것이므로 제 것이 아니고 ‘임시, 잠시’ 남의 것을 ‘빌리다’는 뜻이 되었다고 풀이한다. 또 어떤 이는 ‘빌릴 가叚’를 가죽(尸) 털(二) 연장(그) 손(又)으로 분해하면서 사람들이 동물의 가죽 같은 것을 뒤집어쓰기 위해 동물로부터 가죽과 털을 빌려 손과 연장으로 다듬고 있는 모습이라면서 털과 가죽으로 꾸미기 위함이고 꾸몄기 때문에 가짜라는 뜻을 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설득력 있는 풀이는 ‘빌릴 가叚’를 ‘층계 단段’의 속자俗字로 보면서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암벽등반처럼 언덕에 발판을 내어 손으로 잡고 한 칸씩 오르는 모양을 묘사한 것이라는 풀이이다. 그래서 이 글자가 붙게 되면 ‘오르다’, ‘타다’, ‘먼 곳에 가다’라는 뜻이 있고, 또 손을 빌리는 데서 임시나 거짓의 뜻이 있다 한다. 사전의 풀이도 『회의 문자로서 왼쪽은 벼랑을, 오른쪽은 두 손을 그려, 두 손을 이용하여 벼랑을 기어오르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부터 ‘빌다’, ‘의지하다’의 뜻이 나와…‘사람 인人’을 더한 ‘거짓 가假’가 나왔고, ‘빌다’, ‘가짜’ 등의 뜻으로 분화했다.(하영삼, 한자어원사전)』 한다.

거짓은 가짜이다. 파멜라 메이어Pamela Meyer라는 미국의 유명한 ‘거짓’ 연구자는 인간의 거짓말은 인생의 초기인 아기 때부터 시작해서 점점 그 빈도와 내용이 강해진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거짓말을 어떻게 식별해 낼 수 있는가를 설파한다. 거짓으로 울다 멈추면서 누가 오는지를 살펴 다시 우는 아기, 웃음으로 속내를 감추는 아기, 어른들이 얘기하는 ‘뻥’을 익혀가는 두 살배기 아이, 본격적인 거짓말쟁이가 되는 다섯 살짜리, 천연덕스럽게 거짓으로 자신을 숨기는 아홉 살, 어머니와의 5번의 대화 중 1번은 거짓말을 하는 스무 살 전후, 사회생활에 뛰어들어 한 가정의 가장이 될 때쯤에는 스팸메일, 가짜 인터넷 친구, 가짜 뉴스, 자기 취향대로 꾸며내 여론을 조작하는 매체, 부당한 개인정보 취득과 판매, 다단계, 전화 금융사기, 각종 ‘속임수’라는 전염병…등에 휩싸여서 어떤 작가가 일컬은 대로 ‘거짓말 이후’의 사회에 들어서서 내 인생의 대본을 내가 쓰지 못하고 남이 써 준 대본대로 살아간다. 어쩌면 인류가 발명한 ‘학교’라는 시스템은 남이 쓴 대본을 살아가도록 서로 속고 속이면서 사람들을 훈련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게 사실이라면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문맹률이 낮고 교육 수준이 높은 한국 사회는 그에 비례해서 거짓의 수준도 세계적이 아닐까?

내가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비장하고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들도 어쩌면 자기 자신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위로를 얻으려고 나의 고통을 이용하는 것일 수 있고, 연인들이 밀어를 속삭이는 자리의 조명이 어두워야 하는 것은 상상력이 마음껏 활개를 쳐 환상을 이룰 수 있게 하기 위함일 수 있으며, 상품의 판매원이 상품의 좋은 면만을 소개하고 약점은 감추듯이 심지어 복음을 전한다는 이들마저도 환영받고 싶어서 십자가의 고통이 아니라 낙원만을 역설할 수도 있다.

인간의 인생 자체가 그렇고 역사 역시 끊임없는 거짓과 진실의 뒤죽박죽이고 대결 국면인데도 유달리 현대에 거짓이 극성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쩌면 영상의 시대요 미디어 시대이기 때문이다. 눈을 통해 정신을 기만하기 위한 온갖 영상매체는 본성적으로 거짓으로 치장하고 거짓을 창작하면서 진짜 불행을 외면하고 가짜 행복을 추구하도록 부추긴다. 대중매체를 바탕으로 손쉬운 정보의 범람에 편승하는 익명성의 비겁이 횡행하면서는 거짓이 더 많은 세상이 되기도 한다. 고요한 호수 위의 달과 하늘의 달이 둘이어도 달은 하나이듯이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결코 홀로 있는 법이 없는 거짓의 하수인들은 무리를 지어 사람들을 흔들어놓는다. 그럴 때 우리는 내심 거짓인 줄 알면서도 오만가지 방식으로 거짓희망을 품고, 그래도 거짓보다는 참이 많아서 아직 인생은 살만하다는 신념이 강하게 흔들리며, 속임수와 거짓이 가장 건전한 진실로 존중을 받고 진실이 거짓으로 여겨질 때는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할 때 느끼는 행복 같은 것에 너도 취하고 나도 취한다. 그러다가 문득 약효가 떨어지는 순간이 오면 절망이 엄습한다.

세상에는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꾸며내는 작가들이 많고 지푸라기로 굴비를 엮듯이 이것저것을 엮어내는 사람들이 참 많다. 거짓은 누군가의 입 밖으로 나오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힘이 없지만, 다른 누군가가 그 거짓을 믿는 데에 동의함으로써 그 힘이 생겨나는데, 그 힘이 강해져서 거짓이 참이 될 때는 그 거짓의 독침으로 간혹 누군가가 죽기도 한다. 그러나 거짓이 아무리 강한 척해도 정말 강하지는 않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이 세상에 홍수범람을 알리는 수위 계측기 대신에 거짓 계측기나 진실 계측기를 달아보자고 하면서 『우리는 평생 몸에 맞지도 않는, 숙명적인 외투 아래 눌려 숨이 막힐 듯 살아갑니다.…물론 외투 중에서 가장 얇은 외투는 의도적인 거짓말이나 속임수입니다. 그 외투의 천은 얄팍하고 다 닳아 있습니다. 그런 외투는 촘촘히 짜여 있지 않고 엉성하게 되어있습니다. 실이 교차하는 부분에서 거짓이 끼어들 틈이 생깁니다. 그러나 진실은 씨실을 채워 넣어 튼튼한 옷감을 만듭니다.(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Letters To A Spiritual Seeker)』 한다.

신앙은 온 땅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온전히 믿으면서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차가운 눈과 뜨거운 불이 공존하기 어렵듯이 하느님의 사랑 앞에 인간과 세상의 거짓이 성공할 수 없다는 믿음이다. 성경은 “거만한 눈과 거짓말하는 혀 무고한 피를 흘리는 손”(잠언 6,17)을 가진 인간의 거짓이 하느님의 사랑 앞에 설 자리가 없음을 밝히는 말씀이다. 인간이 “거짓말을 거듭하면 끝이 좋지 않다.”(집회 7,13) 하느님을 잊고 거짓을 의지하는 이들은 “불행하여라, 거짓의 끈으로 죄를 끌어당기고 수레의 줄을 당기듯 죄악을 끌어당기는 자들!”(이사 5,18)이다. 그러나 신앙인은 “행복하여라, 주님께 신뢰를 두며 오만한 자들과 거짓된 변절자들에게 돌아서지 않는 사람!”(시편 40,5)이고자 한다.

개구리 와蛙

늘 더운 여름이지만 요 며칠 비가 내린다. 무덥지만 그래도 견딜만하게 선선해진 저녁나절, 적어도 강한 햇빛은 없는 시간으로 한낮의 걷는 시간을 바꾸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개구리가 없어진 지 오래된 듯 잊어버리고 살았던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었다. 해묵은 논쟁도 떠올랐다. 피부로도 호흡하는 양서류의 특성상 촉촉이 젖어 있어야 할 개구리의 피부가 농약 같은 화학물질에 노출되면서 개구리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고 개탄하는 생태론자들의 걱정과 생태만 얘기하다 죄다 굶어 죽는다며 인간의 생존권을 거론하는 개발론자들의 논란에 단골로 등장하는 주인공 도롱뇽과 개구리가 생각났다.

‘개구리 와蛙’라는 글자에 관해 『‘벌레 충虫’이 의미부이고 ‘홀 규圭’가 소리부로, 양서류 동물인 개구리를 말하는데, 임신한 것처럼 불룩한 배 때문에 ‘음란하다’, ‘외설스럽다’ 등의 뜻도 나왔다. 달리 虫 대신에 ‘맹꽁이 맹黽’을 쓴 ‘개구리 와䵷’로 쓰기도 한다.(하영삼, 한자 어원사전, 571쪽)』 라고 사전은 설명하지만, 임신이나 불룩한 배가 음란이나 외설의 표상은 아닐 것이고 간단한 설명이라 설명이 썩 개운치가 않다.

동심童心의 개구리헤엄(와영蛙泳)을 맨 먼저 떠올리게 하는 개구리는 ‘표본실의 청개구리’처럼 동물 해부 실험의 주된 대상이고, 뒷다리 튀김으로 인간의 간식거리이거나 다른 포식자의 먹이이며, ‘솥 안의 개구리The Frog In the Kettle’라는 영어 표현대로라면 찬 물에서 시작해서 점점 뜨거운 물이 되어갈 때 상황을 의식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멍청이이고, 사람들이 서투르거나 괜스레 떠들썩한 것을 여름날 개구리의 울음과 매미의 요란한 울부짖음에 빗대어 ‘와명선조蛙鳴蟬噪蛙(개구리 와, 울 명, 매미 선, 떠들썩할 조)’라고 조롱하고 개구리 울음소리를 ‘와명蛙鳴’이니 ‘와성蛙聲’이라 할 때 그저 소음이나 발생시키는 생물이며, ‘정저지와井底之蛙’, 곧 우물 안 개구리라 하면 개구리는 제가 보는 것만 보는 어리석음의 대명사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정저지와井底之蛙’ 할 때 말 그대로 풀면 底라는 글자가 밑이고 바닥을 뜻하는 것이니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우물 밑 개구리’인데 왜 ‘우물 안 개구리’라고 했을까 하는 쓸데없는 의문이 든다. 뭍이나 물을 양쪽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사는 양서류兩棲類인 개구리가 우물 안의 밑바닥에서 올려다본 하늘을 상상하고 만들어진 말이었을까? 겉과 속이 다르고 안과 밖이 다르며 쉽게 말해 이쪽저쪽을 경계지어 넘나들 수 있는 공간의 개념이 ‘안’이고, 일정한 내부의 공간이나 내면을 ‘속’이라 한다면 개구리는 분명 ‘우물 속 개구리’가 아니라 ‘우물 안 개구리’다.

개구리는 이규보李奎報(1168∼1241년) 선생으로부터 유래되어 오늘날까지도 뇌물이나 부정한 청탁을 위한 상납을 빗댄 ‘와이로’의 근원이 되었다는 『蛙利鷺 唯我無蛙 人生之恨(와이로 유아무와 인생지한)-백로에게 이로운 개구리, 나에게만 없으니 인생의 한』이라는 구절에서 한낱 뇌물로 바쳐진 희생양이다. 꾀꼬리와 까마귀의 노래 시합에서 심판을 맡았던 백로에게 노래 연습도 하지 않은 까마귀가 백로가 좋아하는 개구리를 잡아다 바쳐 꾀꼬리를 이겼다는 이야기이다. 출중한 실력에도 남들처럼 뇌물을 바치지 못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이규보 선생의 신세 한탄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모두 압도하는 개구리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면서 울어댄다는 비 오는 날의 갸륵한(?) 청개구리이다. 그리움과 슬픔을 알아가는 것이 나이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마다 처지에 따라 기구한 사연도 있게 마련이지만, 그 청개구리가 삼 사십 대의 젊은 청개구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굳이 따라붙는 것은 설령 그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겉으로는 눈물을 줄줄 흘릴지라도 속으로는 아직 자기의 그릇됨과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진정으로 깨우쳐 슬피 울지 못할 것으로 가늠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환갑이 넘고 칠순이 넘어 자기 죽음이 서서히 다가올 무렵에나 비로소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를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울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