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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팔八(=깨트릴 팔捌)

여덟 팔(=깨트릴 팔)

여덟 팔은 참 오묘한 수이다. ‘여덟 팔은 양손을 앞으로 나란히 하여 엄지를 구부리고 볼 때에 손가락 여덟 개가 보이는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그래서 은 양쪽으로 나누어진 형세이고, 서로 구분해서 등지고 있는 상태를 표시해 '등지다', '분별하다'는 의미를 생성하며 깨트릴 팔과도 같은 글자가 된다.

을 거론하면서 맨 먼저 오묘한이라는 수식어가 생각난 것은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에게 거의 신비한숫자로 다가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아주 비근한 예로서 스파게티 가락을 끓는 물에 삶는 시간이 8분이고, 찬물에서 시작하여 달걀을 반숙으로 삶아내는 시간이 8분이며, 한 주제에 대한 인간의 주의집중 가능 시간이 8분이고, 신체의 균형을 위한 동작의 운동도 어느 부위든 8분이면 가능하며, 한 조직에서 진정한 성공을 위해 체계적이고 총괄적이며, 장기적으로 지속적인 구성원이 되는 이들이 8분의 1(제프리 페퍼Jeffrey Pfeffer 교수의 8분의 1 법칙)이라는 것만 보아도 충분하다. 이처럼 은 사물의 현상과 개인을 넘어 집단에 이르기까지 두루두루 이런저런 인연을 맺는다.

우리나라에 88올림픽이 있었으며, 2018 평창올림픽도 있다. 중국 사람들이 8이라는 수를 행운의 수로 여겨 가장 좋아하고, 예수님께서 8일째 되던 날 성전에서 봉헌되셨으며, 요즘은 영양 과다공급으로 그 리듬이 망가졌을 수도 있지만, 원래 사람은 생후 8개월에 유치乳齒가 나오고, 8세에 그 이를 잃으며, 16(2×8)에 사춘기로 접어든 이후 원기왕성하게 살다가 8×8 64세에 이르러 쇠약해지는 내리막길을 내려간다고 했다. 8은 육의 수이며 영의 수이기도 하고, 물질세계와 비물질세계의 경계와 균형을 이루는 수이며, 8이라는 글자의 어느 한 부분에 들어가 그 숫자를 그리다보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수이기도 하다. 그래서 8이라는 수를 옆으로 누여 로 표기하고 무한대를 가리킨다고 하는 것일까?

팔괘八卦가 있고, 팔선八仙도 있으며, 팔경八景이 있고, 사방팔방의 팔방八方도 있으며, 사주팔자四柱八字 할 때의 팔자八字가 있고, 유럽에서 세례당을 지을 때의 팔각八角이 있으며, 예수님께서 설파하신 진복팔단眞福八端의 팔단八端이 있고, 불교에서 말하는 생로병사生老病死 애별리고愛別離苦의 팔고八苦가 있다. 어디 그뿐인가, 팔정도八正道, 팔달八達, 팔등신八等身, 팔불출八不出, 팔삭동八朔童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인간사가 거의 어떤 형태로든 직·간접으로라도 8이라는 수에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뿐이 아니다. 사유四維, 곧 국가의 기본인 4가지 뼈대 예의염치禮義廉恥에 사덕四德인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더하면, 팔덕八德이 되어 국가의 운영 틀도 되고 인간 사회의 근본 틀이 되면서 유교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이루는 골격에까지 나아간다.

82의 배수로 이해하면 결국 이쪽저쪽의 논리 안에서 무궁무진한 고리들을 거론할 수가 있다. 과연 이렇게 여덟 팔이 세상사요 인간사라면, ‘여덟 팔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이를 그르치면 인간의 도리를 모르는 무뢰한無賴漢이요, 몰염치沒廉恥이며 파렴치破廉恥가 된다. 이를 우스개로 효제충신예의염(孝悌忠信禮義廉)에 일이삼사오육칠(一二三四五六七)’이라고 한다 했다. 이는 곧 무치망팔無恥忘八이다. 원래 앞 구절이 팔덕八德을 가리키는 효제충신예의염치인데, ‘가 없으니 무치無恥’(해석하자면 부끄러움을 모른다이다), 앞 구절에 잇대어 일이삼사오육칠이 아니라, ‘일이삼사오육칠팔인데, ‘이 없으므로 망팔忘八·亡八’(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 도리를 모르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종합하여 무치망팔無恥忘()이 된다. 그래서 왕팔단王八蛋’(중국말로 가장 심한 욕 중 하나라는 왕빠딴)이 되고 만다.

그래서 여덟 팔은 그 앞에서, 영원 앞에 앞으로 나란히를 하고 서있는 인간의 모습을 상기하게 한다.

Posted by benji

2017/04/25 15:47 2017/04/25 15:47

볼 견/뵈올 현見

볼 견/뵈올 현

이라는 글자는 이나 으로 음이 나는 글자이다. ‘눈 목밑에 사람 인을 붙여 사람의 눈이 하는 일을 나타낸다. 나중에 이쪽으로부터 보는 것을 볼 시’, 저쪽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보이는 것을 볼 견으로 나누어 쓰면서 보다보이다가 갈린다.

눈 목이 들어가 보다라는 새김을 하는 글자들은 참 많다. 앞서 말한 볼 견볼 시말고도, ‘관찰하다할 때의 자세히 보는 볼 관’, ‘간주하다-눈 위 이마에 손을 얹고 멀리 보다할 때의 볼 간’, ‘눈을 똑바로 뜨고 보다할 때의 볼 정’, ‘노려보다할 때의 볼 고’, ‘쳐다보다할 때의 볼 천’, ‘좌고우면으로 알려져 곁눈질하다할 때의 곁눈질할 면’, ‘우러러보다, 바라보다할 때의 (바랄) (=‘쳐다볼 망과 통한다)’ 등등. 한자의 보다가 이렇게 여럿인 것처럼 서양 말에도 다양한 보다가 있다. see(보다), look(일부러 보다), gaze(오랫동안 보다), stare(빤히 보다), behold(바라보다), glare(째려보다, 쌍심지를 켜고 보다), peer(자세히 들여다보다), watch(뭔가 움직이는 것을 보다), view(작품을 감상하듯이 보다), peek(재빨리 훔쳐보다, 엿보다), peep(뚫어진 구멍 같은 것을 통해 몰래 보다) 등등. ‘보다를 묘사하는 말들은 이처럼 인간이 인식하는 가짓수나 사물의 현상,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만큼이나 많다.

눈만 뜨면 가만히 있어도 보이는 세상 것들은 하나같이 나를 좀 보아달라고 아우성을 치듯 내 눈을 잡아끌기에 여념이 없고, 끊임없이 나의 시선을 유혹한다. 이렇게 세상에는 볼 것 천지인데도 사람들은 막상 무엇인가를 마주 보는 데에 두렵다. 그런가 하면 깊게 보지 못한 나머지 신경질적으로 체험해보라 하고 만져보라 하고 느껴보라 하면서 다른 을 강요한다. 그러다가는 보고 싶다 보다 더욱 간절한 것은 침묵이다라는 말을 만들고 그에 취한다.

무엇인가를 유심히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경우(시이불견視而不見/시이불시視而不視)가 있는가 하면, 설령 보았어도 못 본 체하는 경우(시약불견視若不見)도 있다. 감추는 것은 더 잘 드러나고, 숨기는 것은 더 잘 드러난다. ‘막현호은莫見乎隱이다. 어쩌면 갑작스럽게 눈을 떠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도로 눈을 감고, 보지 않고 다녔던 그대로 가야만 제대로 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종종 어둡고 깜깜한 곳에서 안으로 살펴보아야(시호명명視乎冥冥) 한다. 그래야 보인다. 어두운 곳에서 보지 못하면 눈뜬장님이다.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대학大學》 〈정심장正心章, 수신修身)’이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혜안慧眼이며 영안靈眼이다. 그것이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옛사람이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유한준兪漢雋, 17321811, 당대의 수장가였던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이라는 사람의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에 붙인 발문의 부분)’이라 했다. ‘알면 참으로 사랑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본다했다. 알아야 사랑하고, 사랑해야 본다. 그런 의미라면 알아야만 보고 보인다.

요한복음은 와서 보라!”(요한 1,46) 하며 보라는 초대로 시작하고 마침내 “(가서) 보고 믿었다.”(요한 20,8) 하며 믿다라는 말로 끝난다. 성경에서, 특히 요한복음에서 보다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제자 필립보가 보게 해 주십시오하고 청했을 때 너는 믿지 않느냐?” 하고 반문하시며 믿어라하신다.(참조. 요한 1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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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2 20:41 2017/04/02 20:41

천사天使

천사天使

천사는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인간들에게 전하는 하느님의 사자使者이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며, 한편으로는 사람을 지켜주고, 희망을 주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진다. 성경은 천사에 대하여 구약부터 신약까지,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무려 354절을 두고 기술한다.

그런데 천사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수많은 조각가나 화가들이 묘사한 대로 그렇게 생겼을까? 천사는 정말 하얀 은백색의 눈부신 날개를 지녔을까? 남성일까 여성일까? 포동포동한 예쁜 어린이처럼 생겼을까? 아기 천사라면 백인 아이일까? 사랑스럽고 작고 귀여운 햄스터 같은 천사일까? 그렇게 다정다감하고 부드럽고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천사였다면 성경에서는 천사를 만난 이들이 천사를 부둥켜안고 고맙다는 말이라도 전하고, 술이라도 한잔 나누거나 밥이라도 같이 먹으며 다정한 우정을 나누는 장면이 왜 하나도 없는 것일까?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천사는 인간들을 만날 때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을 곧잘 서두에 꺼내는데(참조. 루카 1,13.30),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혹시 천사의 모습이 인간이 상상한 것과는 달리 무척 흉측하거나 무서운 모습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인간이 천사의 모습을 그렇게 황홀한 모습으로만 묘사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천사는 인간을 흔들고 만질 수 있어도 천사는 인간이 만질 수 없는 존재일까?(참조. 1열왕 19.5.7-8)

몹시 궁금하다. 그러나 하느님의 심부름을 하느라고 바쁜 천사는 밤낮으로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일을 하면서 적어도 피곤함에 찌들어 지쳐있는 걸레 같은 모습이고, 땀에 흠뻑 젖어 땀 냄새 펄펄 나는 꾀죄죄한 모습일 것이며, 세상의 온갖 시궁창을 다 다녀야 하는 바람에 엉망진창이 된 더럽고 지저분한 모습일 것이 틀림없다. 편안하고 좋은 자리만이 아니라 오히려 어렵고 힘든 자리에 전달해야 할 하느님의 뜻이 더 많이 있을 것이기에 더 그러할 것이다. 천사의 모습을 이렇게 상상하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지라도, 천사의 본분에 합당한 인간밀착형천사요 생계형천사라면 반드시 그러해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이렇게 알게 된 것이지만 실제 천사의 모습이 그러했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두고 천사를 이제껏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나의 일상 한 자락에 문득 더럽고 지저분하고 꾀죄죄한 깃털 같은 누군가의 흔적이 흘낏 보일 때 그것이 내 곁을 다녀간, 아니 내 곁에 있는 천사의 흔적은 아닐까?

* (이 글은 안드레아 슈바르츠Andrea Schwarz라고 하는 독일 여류 작가의 <‘엘리야와 함께 걷는 40’, 174-179, 바오로딸, 2014>에서 생각을 얻어 부분적으로 윤색, 가필, 재구성하여 나름대로 다시 쓴 글입니다.)

Posted by benji

2017/03/23 13:41 2017/03/23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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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유酉’ 낭설浪說

닭 유낭설浪說
(술병 유, 술 유, 닭 유, 열 번째 지지 유)

라는 글자는 음과 훈을 달 때에 닭 유라 하기도 하고, ‘술병 유술 유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 이 글자가 밑이 좁고 가는 술을 빚는 술 단지의 모양을 본떠 만든 글자이므로 후자가 먼저이다. 그런데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하는 십이간지十二干支의 표시 중에 열 번째인 닭이 에 해당하므로 술 유의 음을 빌어 닭 유라 하게 된 것이다. 이를 두고 후에 가차假借되어 열 번째 지지地支를 나타내게 되었다고 서술한다. 이러한 라는 글자는 닭 유보다는 원래의 의미인 술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훗날 물 수=, 를 더하여 (맥주麥酒, 청주淸酒, 탁주濁酒 같은 비교적 약한 술)’가 되거나 마디 촌를 더하여 진한 술 주(대표적인 예로 불사를 소를 더하여 소주燒酎)’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라는 부수部首의 활용은 술과 관련된 의미나 발효醱酵하여 만든 음식과 관련된 의미로 활용된다.

이렇듯 닭과 술이 전혀 관계가 없으므로 말하기 좋아하고 특히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닭과 술을 묶어 여러 의미를 연관시키려는 시도들을 하곤 한다. 이를테면, 닭이 잠자리에 들어가는 유시酉時(17:00-19:00)에는 반드시 술을 먹어야 한다든가, 유시에는 닭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으니 집에 일찍 일찍 들어가서 먹고 마시지 말아야 한다든가, ‘닭이 물을 넘기듯이 술을 먹어야 한다.’는 뜻이므로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하는 식으로 닭처럼 술을 마셔야 한다든가, 밤새도록 술을 먹다가도 닭이 울 새벽에는 술을 그만 마셔야 한다든가, 술을 아무리 마셨어도 닭이 우는 시간에는 거뜬하게 일어나야 한다든가, 일찍이 글자가 생길 때부터 중국인들은 치느님(치킨+하느님의 합성어 : 맥주와 가장 어울리는 안주는 닭이므로 이는 거의 하느님처럼 숭배해야 한다는)’을 직관으로 알았기에 닭과 술의 상관관계를 이미 간파했었느니 한다든가, 심지어는 영어로 술 종류 중 하나를 이르는 칵테일cocktail(cock + tail 꼬리)을 가지고 말을 붙여 여러 술을 섞은 다음 술을 섞기 위해 저을 때 수탉의 꼬리 깃털로 저었으므로 이를 cocktail이라 하게 되었다든가, 싸움닭을 흥분시키기 위해 빵과 술을 혼합하여 닭에게 먹인 cock-ale(에일 맥주)에서 cocktail이라는 말이 기원하였다든가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말들은 한마디로 전혀 근거 없는 헛소리요 낭설浪說일 뿐이다. 술 마시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술 마시고 하는 주정酒酊일뿐인 것이다.

대략 기원전 천 년쯤 전에 이미 잠언은 술은 빈정꾼, 독주는 소란꾼 그것에 취하는 자 모두 지혜롭지 못하다.”(잠언 20,1)라고 기록하면서 이를 내다보고 있었으니! ㅉ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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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6 08:46 2017/03/16 08:46

나무 목木

나무 목

나무 목이라는 글자는 나무가 땅 밑에 뿌리를 내리는 한편 대지를 뚫고 솟아오르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이다.

하느님께서는 낮과 밤, 그리고 물과 뭍을 가르신 다음 뭍에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창세 1,11) 하심으로써 땅 위에 맨 먼저 나무를 만드셨다. 그렇게 온갖 것을 지으시고 사람까지 만드신 다음에는 다시 낙원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창세 2,9) 그렇게 인간의 역사와 비극이 나무에서 시작한다. 동산의 나무 이야기는 나무로 만든 구유에서 태어나신 구세주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골고타 산의 십자가 처형 나무로 인간을 구원하시고 다시 한 번 새로운 역사를 지으신다.

나무는 이처럼 모든 것의 시작이다. 나무는 계절로는 봄이고, 인간의 다섯 가지 도리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으로는 이며, 사방四方의 방위로는 동쪽이고, 맹자님의 사단四端으로 보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며, 오륜五倫으로는 부자지간의 도리이고, 오장육부五臟六腑의 간이며, 맛으로는 신맛이고, 하루의 때로 보자면 새벽이다. 인간이 있기도 전부터 이미 있었던 나무는 할 말이 참 많겠지만 아무런 말이 없다.

제주에는 비자림榧子林이 있다. 군락을 형성한 나무들이 백 년씩은 쉽게 넘어, 많게는 천 년을 가까이 살았다는 왕나무들이 있다. 인간이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오랜 세월을 몸으로 살아낸 나무들은 존경스럽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베어진 나무의 그루터기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나무들은 나이테로 시간이 파도친 흔적들을 담아 아름답고 독특한 결을 만든다고 했지만, 몇 백 년을 족히 살았다는 나무의 나이테는 쉽게 보이지도 않고 헤아려지지도 않는다. 천 개의 나이테를 새기다가, 오래고 오랜 세월을 살다가, 나이테가 뭉그러지고 말았던 것일까? 땅 위의 나무가 천 년이라면 그 뿌리는 또 과연 몇 년이나 되는 것일까? 비로소 세월이라는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을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으깨지는 아픔 앞에서 사람들은 저절로 겸손해진다. 그 겸손은 혼자서 긴 세월을 살아냈다는 올곧음이어서가 아니라 순환으로, 섭리로, 생태로 그렇게 주변과 어우러질 수 있었던 까닭 때문일 것이다. 나무들은 속이 텅 빈 채 거죽만 남다시피 한 상태로도 여전히 살아간다. 사람들이 오래도록 속을 썩다보면 마음이 넓어지듯이 나무도 속이 썩다가 그렇게 속이 넓어지는 것일까?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숙명에 초연함일까?

천 년을 사는 동물은 없어도 천 년을 사는 나무는 있다. 오래 사는 나무들은 고급 가구가 되어 귀한 자리를 차지하는 비자 나무만이 아니다. 마을의 어르신 놀이터와 어린이들의 고향 추억이 되는 느티나무, 노란 가을 잎으로 우리들의 가을 낭만을 만들어 주면서도 오래 오래 살아 화석이 되기까지 고약한 냄새마저 아우르며 자신을 지켜내는 은행나무, 귀찮은 벌레들이 꼬이면서도 누구나의 자동차 안에 일정 기간 동승하는 향기의 열매를 지닌 모과나무,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임을 뽐내면서 껍질이 붉은 빛을 띠고 속살도 유달리 붉어 주목朱木이라는 이름을 자랑하는 주목, 왠지 옆에만 있어도 내 몸에 그 향이 벨 것 같고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향나무 연필이 되어 친구가 되어주는 기분 좋은 향나무, 한 그루에 백양나무와 버드나무, 느릅나무 등 세 종류의 나뭇잎이 달리기도 한다는 살아 천 년 죽어 서서 천 년 죽어 누워 천 년 도합 삼천년이라는, 주목보다 한 술 더 뜬 호양나무, ‘변하기 쉬운 사랑이라는 나무답지 않는 얄궂은 꽃말을 지닌 조록나무이처럼 나이 많은 나무들에는 사람이 담겨있다.

인생백년人生百年, 송수천년松壽千年, 학수만년鶴壽萬年’, 이것이 나무 심는 사람들의 마음이라 했다. 기껏 백년인 인생이 천년 가는 소나무를 심어 만년 사는 학을 불러들이는 마음이라 했다. 나는 나의 인생에 무엇을 심었고 무엇을 불러들이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 섭리가 없다면 과연 또 그 무엇이라도 심을 수 있는 것이기나 할까? 심기는 고사하고 심겨있던 것마저 파헤쳐 놓았던 것은 아닐까? 말 없는 나무 앞에서는 나도 말이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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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4 11:29 2017/02/24 11:29

잠(3)

(3)

인생이 일장춘몽一場春夢이고, 미처 밥 한 솥 다 끓여내지 못한 한단지몽邯鄲之夢이며, 한낱 나비의 꿈인지 꿈의 나비인지 모를 호접지몽胡蝶之夢일지라도, 일상이 눈물 젖은 탄식의 침상일지라도, 불면의 베개를 베고 누웠다 하더라도, 잠은 자야만 한다. 오늘도 자야하고 내일도 자야하며 관절의 마디들이 풀어질 때까지, 아니 그 너머까지 자야한다. 이 세상이 사업의 장소가 되어 시끄럽고 소란한 경제 성장의 소음 때문에 자는 법을 잃어가는 것이니 한 번이라도 인류가 숨을 돌리는 것을 본다면 기쁨일 것이라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의 말처럼 낮밤을 혼돈混沌 속에 몰아넣고 만 이 세상은 제대로 자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고대 의학이 빛과 공기 음료와 음식 운동과 휴식 잠과 깸 배설과 제거 영혼의 성향(감정과 욕망)이라는 6가지 조절시스템이 인간의 본성에 맞게 배열되어야 한다고 했으니, 고대 사람들도 알았던 그 상식대로 현대 사람들은 더 늦기 전에 잠과 깸을 조절해야 한다. “광야의 까마귀와 같아지고 폐허의 부엉이처럼 되었으며, 잠 못 이루어 지붕 위의 외로운 새처럼 된”(시편 102,7-8) 이들이 자야한다. 잠의 깊은 뜻을 깨우치며 제대로 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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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6 19:31 2017/02/06 19:31

잠(2)

(2)

인생이 적어도 3분의 1은 자는 것이어서인지 배우자를 얻기 위해 하느님 앞에서 쏟아지는 깊은 잠이 들어야 했던 구약의 아담 이야기(참조. 창세 2,20-25)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유달리 자고 깸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예수께서는 다급하게, 여러 번,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깨어있으라 하셨다. 처절한 십자가 고통을 목전에 두고서 괴로워하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제발 좀 깨어 있어달라고,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느냐, 아직도 자고 있느냐 하고 거듭 채근하셨다. 그러나 스승의 최측근이었던 그들마저 잤다.(참조. 마태 26,36-46 ; 공관복음의 병행구) 그런가 하면 그 제자들이 훗날을 살아가기 위해 내내 추억과 기억의 원천, 희망의 샘이 되었던 주님의 영광을 흘깃 보게 된 타볼 산의 체험도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의 잠 속에서였다.(참조. 루카 9,32)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의 처절한 고통과 찬란한 영광을 잠 속에서 겪었다. 하늘 나라의 비밀을 캐묻던 지식인 니코데모에게도 만물이 잠자는 시간이 스승을 만나고 온갖 것과 우정을 나누며 자신을 낮추는 기회였다.(참조. 요한 3,1-21 : 니코데모와 예수의 만남) 그럼에도 잠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완덕을 추구하는 수도 생활의 거룩한 전례와 일상의 틈새에 잠입하여 제자들이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1)하는 스승의 말을 감히 흉내 내면서 틈만 나면 늦잠을 자게하고, 또한 자비로우신 하느님 앞에 있는 것 자체가 명상이요 묵상이라는 변명을 하게 한다. 그래서 잠은 너 게으름뱅이야, 언제까지 누워만 있으려느냐? 언제나 잠에서 깨어나려느냐? ‘조금만 더 자자. 조금만 더 눈을 붙이자. 손을 놓고 조금만 더 누워 있자!’ 하면 가난이 부랑자처럼, 빈곤이 무장한 군사처럼 너에게 들이닥친다.”(잠언 6,9-11) 하는 말씀대로 게으름이요 가난이다.

성 암브로시오(St. Ambrosius 340?~397)당신이야말로 만물을 내신 천주님, 밝은 빛으로 낮을 입히고, 포근한 잠으로 밤을 입히며, 하늘을 다스리시는 님, 늘어진 팔다리 쉬게 하사, 일할 힘 도로주시고, 지친 맘 일으키시니, 시름 찬 고달픔 풀어주시니.”라 잠으로 하느님을 노래했고,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relius Augustinus 354~430)깨었다가 잠이 들고, 잠이 들었다가 깨는 동안 나와 나 사이는 얼마나 엉뚱한 것이옵니까? 그런 때 나의 이성은 어디 있사옵니까? 생시에 이런 유혹을 물리치고, 그 현실 자체가 꾀이더라도 끄떡 않는 그 이성이? 두 눈과 함께 감겨집니까? 육체 감관과 함께 잠을 자는 것입니까?나의 소망을 잠재워주던 사랑 겨운 노래의 기억과 습성영혼이란 일찍부터 사랑을 위하여 생겨난 것. 기쁨에서 잠을 깨어 행동할 그 때부터 저 좋아하는 일체의 사물에로 움직여 가느니라.하며 불순한 자신의 가슴 치는 심경을 고백록에서 잠에 비유하여 기록하였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용서하는 일에 눈뜨지 못한 사람은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것이라고 경고했다.

Posted by benji

2017/02/06 19:22 2017/02/06 19:22

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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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대개 인생의 3분의 1 동안 잠잔다. 사람은 맨 처음에 잠으로 인생을 배우고 적응하느라 긴 시간 동안을 자고,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시시때때로 틈만 나면 자고 싶어 하며, 인생의 종장에 가서는 혼수상태로 자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하다가, 마침내 영원한 잠(영면永眠-길 영, 잠잘 면)에 들어간다. 하루만 놓고 보더라도 사람은 지나온 시간과 세상의 냄새를 뿜어내느라 씩씩거리고 코를 골면서 반드시 자야 한다. 어쩌면 인간은 너무나 약한 존재여서, 단 하루도 못 견디는 나약한 존재여서, 그렇게 뇌의 어리석음, ()의 분노, 허파()의 탐욕이라는 3을 잠으로 해독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물주는 인간의 오장육부五臟六腑를 쉬게 하시느라 낮을 빛으로 밤을 잠으로 섭리하셨는지 모른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잠잘 때에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셨고, 그분의 나라가 그렇게 사람들이 잘 때에 와 있었던 것이며, 인간이 잠들었을 때에 당신은 쉬지 않고 창조를 계속하시느라 아직까지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며 노심초사하시는지 모른다. 노인들이 잠이 없어진다고 말해도 잠의 총량에 있어서는 젊은 사람들과 대동소이하다. 잠자는 시간에 어쩔 수 없이 밤과 낮을 거꾸로 살아야만 하는 안타까운 인생을 사는 이들이 많고, 대개 밤이 될 때 무리지어 잠자리에 들며, 네가 서 있으면 나도 서 있고 네가 잠들면 나는 네 문 앞에서 잠들리라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잠자리에 든다 하더라도, 결국 잠은 혼자서만 자야 한다.

사람이 낯 동안에 눈물을 흘리고 마음이 몹시 무겁다가도 밤에 잠이 그를 사로잡는다면 그것은 참을 수 없는 불행이다. 아울러 눈을 떠서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내가 왜 눈을 떠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불행 중 불행이다. 잠은 일단 눈꺼풀로 감싸면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약이다. 잠은 눈꺼풀로 오기에 잠의 휘장인 눈꺼풀은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가장 무거운 무게이다. 잠은 인간만 자는 것이 아니다. 밤낮 눈을 뜨고 있다는 물고기도 자고, 겨울잠을 자는 동물뿐만이 아니라 모든 동물이 반드시 자야 하며, 식물도 밤에는 자야 하고 나아가 모든 잎을 떨구어 최대한 활동을 줄여 4四季 중 겨울 한 철을 자야만 한다. 만물이 잠잔다.

만물에게 잠은 욕망이다. 잠은 환상·망상·공상·상상幻妄空想이다. 잠은 먹고 마시는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잠잘 생각을 놓지 못하는 쾌락이다. 잠은 쉼이다. 그래도 잠은 천사를 만나 계시를 듣고, 우주의 영감을 얻으며, 나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을 구체화하는 때와 장소이다. 잠은 망각 연습이고 죽음의 연습이다. 동양이건 서양이건 혼수昏睡(어두울 혼, 잘 수), lethargy’라는 말의 뜻이 경이에 대한 응시이고, ‘망각과 잠을 가져오는 병이며, 또한 짙은 잊음이듯이 그것이 잠이다. 잠은 자야 하는 것이다. 잠들지 않은 새벽별의 소명이 되어 새벽 수탉처럼 운다고 해도 자칫하면 이웃의 잠을 깨우는 소란이 되듯 잠과 소음은 상극이다. 잠은 결코 보지 말아야 할 신랑 에로스의 얼굴을 보지 않는 신뢰이고, 동시에 의심이며 불행의 시작이다. 잠은 도둑들에게는 음모이며 기회이다. 큐피드의 화살이 떨어진 곳에서 돋아난 사랑에 취한 야생 비올라라고 부르는 화초의 꽃 즙을 잠자는 남자나 여자의 눈꺼풀에 떨어뜨리면, 잠을 깨는 순간 눈에 띄는 최초의 창조물을 미친 듯이 사랑하게 된다는 낭만처럼 잠은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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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6 19:17 2017/02/06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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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다

걷는다

거의 매일, 인근에 있는 보라매 공원을 중심으로 여기저기를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 동안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공원에는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걷는다.

사람들의 걸음을 보고 또 내 걸음을 보며 걷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가사의 첫 구절 때문에라도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네…』하던 백년설(白年雪 : 본명 이창민 1914~1980)씨의 오래된 노래 '나그네 설움'이 절로 떠오른다. 작사가로 알려진 고려성(高麗星 : 본명 조경환 1910~1956)씨와 함께 왜놈 경찰들의 모진 밤샘 취조 후에 광화문 거리를 바라보며 잃어버린 조국의 설움을 담아 담뱃갑에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거워를 적어 내려갔고, 이 슬픔을 후에 노래하게 되었다는 애절하고 숭고한 사연과는 거리가 멀게, 오늘 나는 일차적으로 건강을 염려해서, 나름대로 자기 관리를 위해서 걷는다.

걸음은 내가 식물이 아닌 동물이기에, 움직일 수 있기에 걷는다. 걸음은 동물을 두고 긴다라고 하니 내가 사람이기에 걷는다. 걸음은 내가 섬마섬마하며 맨 먼저 배운 몸동작이기에 걷는다. 걸음은 어느 날 약해져 누구의 도움을 받든 기구의 도움을 받든, 기어이 내가 혼자 힘으로만 가능한 것이기에 걷는다. 걸음은 이리도 저리도 내가 내 마음 먹은 대로 갈 수 있기에 걷는다. 그래도 걸음은 늘 내가 뜻한 대로만 가지지는 않는다는 안타까움이기에 걷는다. 걸음은 내가 결국 언젠가 가고야 말 고향이 있는 나그네요 순례자이기에 걷는다. 걸음은 내가 언젠가 한 걸음을 내딛어야만 하는 결단이기에 걷는다. 걸음은 나도 걷고 너도 걷는 이웃의 행렬이기에 내가 이웃의 하나가 되어 함께 걷는다. 걸음은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내가 새 길을 따르는 이들”(사도 9,2)이고 싶기에 걷는다. 걸음은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궁극으로 나를 향해 마주 오는 것들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이기에 걷는다. 걸음은 누구에게나 사는 날까지 간절한 희망이기에 걷는다.

도대체 언제까지, 몇 걸음이나 걸어야 인생은 다 걸어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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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6 10:51 2017/01/26 10:51

'지지' 타령


지지타령

어린 아기들이 뭔가 더럽거나 지저분한 것을 만지려고 할 때 그런 아기들을 향해 어른들이 지지야 지지!’ 한다. 이럴 때 쓰는 한자말의 글자는 아마도 그칠 지일까 싶다. ‘안 돼!’ 라든가, ‘멈춰!’라는 뜻일 것이니 말이다. ‘금지禁止폐지廢止니 할 때에도 이 글자가 들어간다. ‘그칠 지는 가만히 왼쪽 발을 내려다보면 금방 이해가 된다. 발목 아래 부분의 발의 모양을 본떠 만들어진 글자로서 , 멎다, 멈추다, 그치다, 머무르다, 억제하다등의 뜻을 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자 둘을 겹쳐 지지止止라고 하면 거기 그대로 멈추다’, 나아가 머무를 곳에 머무르다라는 뜻이 된다. 사람은 제가 머물러야 할 곳을 알아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을 때 품위를 유지한다. 언젠가 떠나야 할 이승의 삶이요 인생살이를 다시 돌아보게 하고, 인생의 매듭마다 내가 있을 자리를 돌아보게 하는,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하는 문구가 단지 공공 화장실의(여자 화장실에는 가보지 않았으니 알 길이 없으니), 적어도 남자들의 화장실 표어로만 정착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칠 지앞에 알 지를 붙여 지지知止라고 하면 의미는 조금 더 깊어지고 분명해진다. ‘멈출 것을 알다라는 뜻이 되어 자신의 분수에 지나치지 않게 그칠 줄을 아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지지止止하고 지지知止해야 한다. 머무를 곳에 머물러야 하고, 언제 그만 둘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까칠이 아니고 깔끔이요 정갈이다. 질척거리면 지저분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살고 싶다고 살지만, 사람이 자기 머무를 곳이나 분수를 안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경지境智의 경지境地이다. 어쩌면 인생은 죽을 때까지 이를 모르거나 가늠하려고 애쓰다가 끝나는지도 모른다. 봄날 제비가 지지배배시끄럽게 울어대는 것처럼, 라디오의 주파수가 맞지 않아 지지직거리는 것처럼, 그렇게 나도 나만의 지지止止지지知止를 노래하다 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공자님께서 제자 자로子路에게 지지위지지 부지위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안다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아는 것)-논어 위정爲政이라 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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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8 09:34 2016/12/28 09:34

선물膳物

선물膳物

연말이다. 선물과 기부의 계절이다. 영어로 선물이나 기부를 뜻하는 단어들은 대개 presentgift(애정이나 우정을 표시하기 위해 주는 것), donation(거저 주는 것), 그리고 bonus(규정 외에 덤으로 주는 것) 등이 있다. 이 중에 요즈음 같은 계절에 가장 많이 쓰는 donation이라는 어휘는 라틴어 ‘donare(주다)’에서 온다. 이를 우스개 소리로 우리 말 돈 내시오’, ‘더 내시오’, ‘다 내시오에서 왔다며 기부를 종용하는 경우들도 있지만, 원래는 라틴어 ‘donum(선물)’과 연관되어 있다. 흔히 쓰는 ‘pardon(par=모조리)’donation의 어근이 붙어 있어서 모조리 주다아낌없이 주다를 거쳐 용서하다라는 말에 가 닿는다. 원래 이는 인간의 어휘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모든 것을 다 내놓으시고 모든 것을 다 주셨으니 인생 그 자체가 선물인 것이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그처럼 서로 하느님과 같은 행위를 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라틴어로 은 자기 자신을 나눠주고 선물하는 것Bonum est diffusivum sui.’이라고 정의한다.

한자말에서 선물膳物’(뜻을 나타내는 육달월=, 와 음을 나타내는 선이 합하여 이루어짐)이란 낱말도 깊은 뜻이 있다. 이 말에서 선물의 을 이루는 착할 선을 추적해보면 동물 자와 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아 양처럼 순하고 온순하며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을 나타내어 착하다를 뜻한다고 본다. 또한 옛날 재판에는 양 비슷한 신성한 짐승을 썼으므로 신에게 맹세盟誓하고 한 재판이라고 하는 뜻을 담아 나중에 훌륭한 말훌륭함좋다의 뜻이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라는 글자와 사이에 풀 초를 모양 그대로 다리가 달려있는 풀밭 위의 제단으로 본다면 제단 위에 양을 올려놓고 하느님께 아뢰는 것을 쉽게 연상해 볼 수 있다. 하느님께 제물을 드려 기도하는 행위 말고 인간에게 선하고 좋은 일이 또 있을 수 없다. 아니면 이라는 글자의 가운데 가로지른 가로 획을 입술로, 두 점을 이(치아)로 보아 양고기를 입 안 가득 넣어주는 상형으로 보기도 한다. 옛날에는 소를 잡을 수 없어서 양고기가 잡아먹을 수 있는 가장 맛있는 고기였다고 볼 때에 양고기를 입에 넣어주는 것은 참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그 양을 인간에게 주신 분도 결국 하느님이시므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입에 고기를 먹여주신 것이 된다. 그것이 선이다. 이런 글자를 담고 있는 선물의 역시 고기 육에서 비롯된 육달월을 붙여 선물 선’, 혹은 반찬 선이 된다.  

서양 말이 되었건, 동양 말이 되었건 선물이나 기부하느님담고 있고, 또한 닮고 있다. 그래서 복음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3-4) 하면서 그 행위에 있어 겸손을 강조한다. 감히 하느님의 행위를 하는데 겸손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아울러 누군가에게 내가 선물하기 전에 반드시 하느님께로부터 내가 받은 선물과 은총에 대한 깊은 감사를 전제로 해야만 한다고 한다. 그런 의미로 선물의 영역에는 선행과 애덕, 좋은 일을 한다는 의식마저도 없어야 한다. 선물의 기본을 이루는 내 자신의 일부나 재화 자체가 지닌 이라는 속성 때문에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물이나 기부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자칫 를 강요하는 폭력일 수 있다. 누군가가 선물을 주면서 이 선물을 "반드시" 이러저러하게 사용해야만 한다고 강조할 때에 이는 이미 선물이 아니다. 어줍지 않게 잘못 하느님 흉내를 내는 그 누구이고 무엇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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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9 12:07 2016/12/19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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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십十, 세상 세世

열 십十,  세상 세世

가로 그은 한 획에 세로로 한 획을 더하면 열 ‘십十’이 된다. ‘열 십十’은 공손하게 절할 때처럼 두 손을 포갠 모양이기도 하고, 길게 된 줄에 한 매듭을 짓고 그 매듭이 가로로 커져서 생긴 모양이기도 하다. ‘열 십’은 십진법에서 더 나아갈 수 없는 완성의 숫자이다. 십년공부十年工夫, 십년지계十年之計, 십시일반十匙一飯, 십중팔구十中八九 등의 쉬운 한자성어 몇 개만 보아도 ‘십’의 존재감은 금방 짐작이 가능하다. 물론 성경의 십계명十誡命도 있고 십자가十字架가 있다. 그런가하면 후한後漢) 영제靈帝(재위 168~189년) 때의 내시들 사조직으로서 전횡을 일삼다가 결국 국가를 무너지게 하고 삼국지의 시대를 초래하고 말았던 ‘십상시十常侍’도 있다.

‘열 십’이 세 개 모여서 만들어진 글자가 ‘세상 세世’이다. 완성의 숫자 ‘열’이 세 개나 모였으니 그 의미는 자못 심장深藏하다. 하늘과 땅과 사람을 아우르는 ‘석 삼三’이 모두 들어있어서 세상을 이룬다.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대世代’ 또한 30년 쯤으로 구분이 된다. 아버지가 30의 두 배인 육십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비로소 준비기 30년과 실행기 30년을 살아 회갑回甲 인생으로 한 순배를 마치고, 그때쯤 아버지 다음 세대인 자손은 30이 되어 자신의 다음 세대이자 아버지에게는 차차세대次次世代가 되는 손주를 아버님 품에 안겨드림으로써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곧 부자손父子孫의 삼대三代가 완성된다. 예수님도 그래서 지상 생활을 30년 쯤 하신 뒤에 비로소 공생활公生活 30년을 3년으로 압축해서 사셨던 것일까?

공자님 말씀대로 회갑인 ‘이순耳順’을 넘어서면 준비기 30과 실행기 30년을 살아 비로소 ‘인생면허기’로서 마음 가는 대로 어디나 갈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70세의 ‘종심從心’, 80세의 ‘산수傘壽’를 거쳐 인생졸업장을 얘기할 수 있는 ‘졸수卒壽’에 이른다. ‘졸수’는 30의 3배수인 90이다. 공자도 당시 70이면 이미 장수측에 들었을 시기이고 70은 넘었으나 80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80 이후를 언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뒷사람들이 ‘산수’의 산傘이나 ‘졸수’의 졸卒 모두 여덟 팔八(산傘의 약어는 여덟 팔八 밑에 열 십十을 더하여 이루어진다) 밑에, 그리고 ‘아홉 구九’(졸卒의 약어는 아홉 구九 밑에 열 십十을 더하여 이루어진다) 밑에 ‘열 십十’을 받쳐서 불렀으니, 맨 처음으로 돌아가 ‘열 십十’이 다시금 그 무게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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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7 13:15 2016/11/27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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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言語

언어言語

    
언어言語말씀 언말씀 어이다. ‘한 글자만 있으면 말이고, ‘라는 글자가 붙으면 나와 상대방이 주고받는 말이 된다.  ‘말씀 언은 구조를 따질 때 매울 신이라는 글자에 입 구가 붙어 있다. ‘매울 신이 창이나 꼬챙이의 형상이고 보면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상대방에게 곧장 날아가거나 날카롭게 가서 꽂히는 것이 말이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조심해야 하는 것이 내 입에서 누군가에게로 나가는 말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언행일치言行一致를 강조하며 삼가 말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이라는 것은 입으로 하는 말(verbal)과 함께 몸짓·손짓·표정·상징으로 하는 말(non verbal)이 있다는 것을 부쩍 실감하게 되는 것이 요즈음이다.

여기 미국이라는 타국에서 참 괴이한 현실 하나를 목격한다. 이곳 주변에는 미국인 배우자를 만나 함께 살아가는, 소위 국제결혼을 해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제법 많다. 그분들을 보면서 맨 먼저 든 생각 중에 하나는 저렇게 부부로서 외국인을 만나 사는 사람들은, 특별히 미국인 남편을 만나 살아가는 한국인 부인들은, 고국을 떠나 남편 따라 여기 미국에까지 와서 살게 되었으니 영어를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잘 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나이 먹어 이곳에 살게 되므로 영어를 잘 못한다는 내 주제 파악이 밑바탕에 깔린 부러움의 대상으로서 그분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분들의 영어가 나보다 그리 썩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 심지어는 그렇게 영어가 유창하지도 않다는 생각마저 많이 든다. 그래서 하게 된 생각이 바로 사랑은 언어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짧지만 적어도 나의 관찰에 의하여 거의 확신을 가지고 단언컨대, 언어는 사랑에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요소가 분명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사랑에는  입으로 하는 말보다 비언어체계의 소통이 우선한다고 하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일까?

그렇다면, 어줍지 않은 생각일지라도 생각한대로 소박하게 진실하게 말하고, 말하는 대로 사는 몸짓을 보이는 것이 외국생활이고, 또 사랑인 것일까?

하기야 하느님께서도 예언자들을 통하여 수천 년을 두고 말씀하셨어도 얘기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신 나머지, 오죽했으면 직접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과 사는쪽을 택하셔야 했을 것인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 오셔서 말씀하실 때도, 조기 유학을 하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니 모국을 떠나 낯선 땅에서 외국어를 말씀하시듯 무척 어려우셨을 것이다. 그래서 매우, 아주 매-우 답답하셨을 것이다. 나이 육십이 되도록 내게 말씀하시고 계시지만 아직도 모든 것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나를 대하실 때는 정말 또 얼마나 속이 타실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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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7 11:00 2016/08/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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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學習

학습學習

 어제 내 발로 걸어서 스스로 자원하여 안과에 다녀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늦깎이 학습에 여념이 없다가 눈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아서였다.

 학습배울 익힐 이다. 사람들이 배울 학을 풀 때는 위에서부터 양손, 그 양손으로 잡고 있는 내용, 책상, 아이 이런 조합을 떠올려보면서 아이가 책상에 앉아 두 손으로 책을 잡거나 혹은 손으로 숫자나 매듭을 익히는 형상, 혹은 학교 건물에 있는 X자 형의 나무, 가로그을 효를 떠올려 해석하기, 아니면 부모나 주변 어른이 두 손으로 아이의 머리 위에 값진 보물을 올려주는 모습 등으로 이해하려 한다

 익힐 습은 역시 위로부터 날개를 뜻하는 깃 우흰 백의 조합으로 보는데, ‘깃 우야 날개 짓을 익힌다는 것으로 금방 이해가 가지만 문제는 흰 백이다. 이를 스스로 자에서 한 획이 빠진 것으로 보거나, ‘날 일에 점이 하나 붙은 것으로 보거나, 또는 그대로 흰 백으로 보기도 한다. ‘스스로 자의 변형으로 보면 스스로 익힌다는 뜻이 되고, ‘날 일의 변형이라면 날 밝을 때 햇빛 아래서 땀 흘려 열심히 익힌다는 뜻이고, ‘흰 백그대로 본다면 원래 그 글자가 쌀 톨의 형상에서 왔으므로 갈고 갈아서 하얀 한 톨의 쌀알을 얻을 때까지 갖은 수고를 아끼지 않는 과정이 된다.

학습은 그래서 이런저런 뜻을 담아 노력하여 값진 것을 얻고 배우는 과정이다.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하시면서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루카 6,40) 하셨다. 그래서 우리의 학습은 머리, 마음, 손으로 익혀 내 몸에 붙이는 그런 공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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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2 09:41 2016/06/02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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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자리

밥 자리

누구나 밥이나 한 번 먹자할 때에
서로 관계를 확인하고 안심한다.

예수님의 공생활도
거의 밥 자리의 연속이었다.
오죽 했으면 그런 상황이 못마땅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먹보요 술꾼”(마태 11,19 루카 7,34)이라며
비아냥거리기까지 했을까?

밥 자리를 가리키는 한자말이
회식會食이다.
그때 쓰는 모일 회
시루 같은 것이 포개져 있는 형상의
에 뚜껑을 덮은 꼴이다.
뚜껑 달린 그릇에 이것저것 넣고
끓이거나 조리하는 모양이다.

회식은 그래서 스스럼없이
이런 저런 얘기들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자리이다.
관계의 불편부당을
끓여내는 자리이다.
그렇게 친구가 되는 자리이다.

친구를 뜻하는 서양말 company
cum(함께) + panis()이라는 라틴말에서 기원한다.

고달픈 인생살이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
밥 자리를 자주 고안해내야 한다.

박사보다 밥사,
석사보다 식사라는 말이
팍팍한 우리 인생을
가끔은 생기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밥맛 떨어지게 하는 이들과
어쩔 수 없이 먹어야하는 밥 말고,
밥 맛 나게 하는 이들과는
밥을 같이 자주 먹어야 한다.

몸무게 걱정을 하는 부담이 다소 있더라도
우리가 몸 때문에 사는 것은 아닐 진대
그리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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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1 10:10 2016/04/2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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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부르심

두 번 부르심

구약성경에는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고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두 번 거듭 부르시는 특이한 이야기들이 있다. (물론 전해지는 이야기의 맥락에서는 부름의 횟수가 관건이 아닌 것은 자명하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를 만났을 때였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야, 모세야!”(탈출 3,4) 하고 두 번 부르시며 모세에게 거룩한 땅에서 신발을 벗으라고 요청하신다.

아브라함이 마지막 시험을 치를 때도 그랬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던 부르심을 받고, 모리야 산정에서 눈물을 삼키며 이사악을 묶어 칼로 내려치려 할 때에,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시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세 22,11) 하고 두 번 부르시며 이사악을 살려내신다.

스승 엘리의 시대를 마감하고 마지막 판관이 되어 살았으며 이스라엘 역사에 최초의 임금 사울을 축성하여 왕정을 시작하도록 하였던 사무엘의 소년 시절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소년 사무엘을 사무엘아, 사무엘아!”(1사무 3,10) 하고 두 번 부르신다.

어떤 의미에서 봉헌생활을 하는 이들도
하느님께서 두 번 부르시는 부르심을 산다
.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땅에 들어서기 위해
모세처럼 두 번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다
.

우리는 눈물을 삼키며 산에 올라 가장 마음 아픈 결정적 봉헌을 하라고
아브라함처럼 두 번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다
.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역할과 이름을 지워버리더라도
끝까지 성실하게 소임을 다하기 위해
소년 사무엘처럼 두 번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다
.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생으로 한 번 부르셨기에 세상을 만났고,
교회로 또 한 번 부르셨기에 하느님의 백성을 만났던 사람들이다.
백성을 구하고,
그러기 위해 산을 올라야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이름을 지워야 하는 소명을 사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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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6 09:55 2016/03/2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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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인내忍耐

하느님의 인내忍耐

 

한자 말 참을 의 구성은 칼날 과 마음 으로 짜여 있다. 에 점을 하나 찍어 예리한 칼이 되는 칼날 밑에 마음 이 있으니 예리한 칼날로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을 견뎌내는 형상이다.

견딜 는 말이을 와 마디 으로 구성되었다. 말이을 라는 글자는 본래 턱에 난 수염 모양인데, 본뜻인 수염보다는 말을 이어주는 어조사로서 널리 쓰이면서 말이을 가 되었으니, 원래는 수염이다. 그리고 은 단독으로 쓰일 때는 마디촌수’ ‘마음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며 다른 부수와 합해질 때는 주로 손의 용도로 쓰인다. 따라서 의 전체적인 의미는 남성들의 권위와 자존自尊의 상징이기도 한 수염()을 손을 이용해 뽑아()내는 형별을 견디어내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수염을 뽑히는 아픔과 굴욕, 모욕을 참고 견디어내는 형상인 것이다.

기원전 745695년 사이에 무려 50년간이나 활동한 것으로 알려지는 위대한 예언자 이사야는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이사 50,5-9) 라는 구절을 남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다시 흐른 후에,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 그대로 갖은 모욕과 아픔,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요한 19,34)는 성경 구절에서 보듯이 실제 창으로 심장을 찔리는 고통까지도 받으면서, 십자가 형을 받고 돌아가시기까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주 인간적인 표현으로 다시 더 어떻게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그저 인내의 사랑이었다.

그렇게 견디신 하느님께서 오늘도 다시 한 번 나를 참아주신다.

Posted by benji

2016/03/23 12:13 2016/03/2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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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섭리攝理

하느님의 섭리攝理

제임스 맥키라는 사람이 신의 섭리는 우연을 모의謀議한 것이라 표현한 적이 있다.

영이 맑은 사람들은 우연과 우연 속에서 필연을 경험하고, 하느님의 섭리를 느낄 때가 많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삶 안에 우연처럼 필연을 엮어놓으시고 사람들과 수수께끼 놀이를 하고 싶어 하시는지도 모른다.

 

섭리攝理라는 한자 말의 은 당길 이라 하는데, 가 옆에 붙어있고 귀 라는 글자가 셋이나 붙어 만들어진 말로서, 귀를 잡아당겨 두 귀 말고도 속뜻을 알아듣는 귀까지 합하여 귀가 셋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을 묘사한다. ‘는 다스릴, 옥을 갈 자이며 옥돌을 갈고 닦아 나오는 옥돌무늬 이자이다.

귀를 쫑긋하고 세워서, 그리고 두 귀 말고 속뜻을 간파하는 귀까지 더해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을 알아들어야 하며, 옥돌을 열심히 갈고 닦아야 빛나는 무늬를 담은 보석을 바라보게 되듯이, 그렇게 일상사 안에 담긴 섭리의 무늬들을 발견해내야 한다.

 

Posted by benji

2016/03/22 09:29 2016/03/2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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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손가락

하느님의 손가락

아론이 땅의 먼지로 모기들을 만들었을 때, 그에 대적하던 파라오의 요술사들도 그렇게 하려 하였으나 하지 못한 뒤에, 요술사들은 아론의 일이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신 일”(탈출 8,15)이라 변명한다.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신 일은 아무도 대적하거나 흉내 낼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와 말씀을 나누신 다음 당신 손가락으로 쓰신, 돌로 된 두 증언판을 그에게 주셨다.”(탈출 31,18) 하느님의 손가락이 써 주신 글은 지울 수 없는 계명판이다.

사람들은 가끔 하느님 손가락의 작품들”(시편 8,4)을 찬양할 생각을 잊고, “자기들 손가락으로 만든 것에 경배합니다.”(이사 2,8) 한 것처럼, 자기들 손가락이 만든 것을 우상으로 삼기도 하면서 자기들 손가락을 금은으로 치장한다. 벨사차르라는 임금이 하느님의 성전에서 약탈해온 금 기물들로 먹고 마시며 방탕할 때 사람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을 쓰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다고(다니 5,1-12) 한 것처럼, 심지어 하느님의 것을 조롱하다가 깜짝 놀란다.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실 때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신다.”(마르 7,3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듣게 하시고 제대로 말하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 손가락으로 사람들의 귀를 막으시어 세상의 소음들을 듣지 못하게 하시고, 자신의 깊은 내면에 들리는 음성만을 들으라 하시며, 자신이 잃었던 것들과 아픔, 그리고 상처와 먼저 화해하라 하신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낫게 하신다.

 

Posted by benji

2016/03/21 16:15 2016/03/21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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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양의 다리를 부러트리는 목자

길 잃은 양의 다리를 부러트리는 목자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2-14)

모든 만물이 그렇듯 기질상 태어날 때부터 천방지축이고 자꾸만 길을 이탈하는 양도 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이런 양을 만나게 될 때, 그런 양의 다리를 기술적으로 부러트리고 다리가 나을 때까지 안고 다닌다 한다. 그러면 이내 양이 길이 들고 목자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어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아듣는 양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이 혹시 하느님께서 나를 길들이시려고 나의 다리를 부러트리신 순간은 아닌지, 내가 길을 잃었던 양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는 하느님께서 끝까지 나를 잃지 않으시려는 은총의 순간이고, 또 하느님께서 나를 안고 다니시는 시간들이다.

 

Posted by benji

2016/03/20 10:08 2016/03/20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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