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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學習

학습學習

 어제 내 발로 걸어서 스스로 자원하여 안과에 다녀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늦깎이 학습에 여념이 없다가 눈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아서였다.

 학습배울 익힐 이다. 사람들이 배울 학을 풀 때는 위에서부터 양손, 그 양손으로 잡고 있는 내용, 책상, 아이 이런 조합을 떠올려보면서 아이가 책상에 앉아 두 손으로 책을 잡거나 혹은 손으로 숫자나 매듭을 익히는 형상, 혹은 학교 건물에 있는 X자 형의 나무, 가로그을 효를 떠올려 해석하기, 아니면 부모나 주변 어른이 두 손으로 아이의 머리 위에 값진 보물을 올려주는 모습 등으로 이해하려 한다

 익힐 습은 역시 위로부터 날개를 뜻하는 깃 우흰 백의 조합으로 보는데, ‘깃 우야 날개 짓을 익힌다는 것으로 금방 이해가 가지만 문제는 흰 백이다. 이를 스스로 자에서 한 획이 빠진 것으로 보거나, ‘날 일에 점이 하나 붙은 것으로 보거나, 또는 그대로 흰 백으로 보기도 한다. ‘스스로 자의 변형으로 보면 스스로 익힌다는 뜻이 되고, ‘날 일의 변형이라면 날 밝을 때 햇빛 아래서 땀 흘려 열심히 익힌다는 뜻이고, ‘흰 백그대로 본다면 원래 그 글자가 쌀 톨의 형상에서 왔으므로 갈고 갈아서 하얀 한 톨의 쌀알을 얻을 때까지 갖은 수고를 아끼지 않는 과정이 된다.

학습은 그래서 이런저런 뜻을 담아 노력하여 값진 것을 얻고 배우는 과정이다.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하시면서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루카 6,40) 하셨다. 그래서 우리의 학습은 머리, 마음, 손으로 익혀 내 몸에 붙이는 그런 공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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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2 09:41 2016/06/02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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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자리

밥 자리

누구나 밥이나 한 번 먹자할 때에
서로 관계를 확인하고 안심한다.

예수님의 공생활도
거의 밥 자리의 연속이었다.
오죽 했으면 그런 상황이 못마땅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먹보요 술꾼”(마태 11,19 루카 7,34)이라며
비아냥거리기까지 했을까?

밥 자리를 가리키는 한자말이
회식會食이다.
그때 쓰는 모일 회
시루 같은 것이 포개져 있는 형상의
에 뚜껑을 덮은 꼴이다.
뚜껑 달린 그릇에 이것저것 넣고
끓이거나 조리하는 모양이다.

회식은 그래서 스스럼없이
이런 저런 얘기들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자리이다.
관계의 불편부당을
끓여내는 자리이다.
그렇게 친구가 되는 자리이다.

친구를 뜻하는 서양말 company
cum(함께) + panis()이라는 라틴말에서 기원한다.

고달픈 인생살이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
밥 자리를 자주 고안해내야 한다.

박사보다 밥사,
석사보다 식사라는 말이
팍팍한 우리 인생을
가끔은 생기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밥맛 떨어지게 하는 이들과
어쩔 수 없이 먹어야하는 밥 말고,
밥 맛 나게 하는 이들과는
밥을 같이 자주 먹어야 한다.

몸무게 걱정을 하는 부담이 다소 있더라도
우리가 몸 때문에 사는 것은 아닐 진대
그리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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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1 10:10 2016/04/2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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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부르심

두 번 부르심

구약성경에는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고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두 번 거듭 부르시는 특이한 이야기들이 있다. (물론 전해지는 이야기의 맥락에서는 부름의 횟수가 관건이 아닌 것은 자명하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를 만났을 때였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야, 모세야!”(탈출 3,4) 하고 두 번 부르시며 모세에게 거룩한 땅에서 신발을 벗으라고 요청하신다.

아브라함이 마지막 시험을 치를 때도 그랬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던 부르심을 받고, 모리야 산정에서 눈물을 삼키며 이사악을 묶어 칼로 내려치려 할 때에,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시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세 22,11) 하고 두 번 부르시며 이사악을 살려내신다.

스승 엘리의 시대를 마감하고 마지막 판관이 되어 살았으며 이스라엘 역사에 최초의 임금 사울을 축성하여 왕정을 시작하도록 하였던 사무엘의 소년 시절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소년 사무엘을 사무엘아, 사무엘아!”(1사무 3,10) 하고 두 번 부르신다.

어떤 의미에서 봉헌생활을 하는 이들도
하느님께서 두 번 부르시는 부르심을 산다
.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땅에 들어서기 위해
모세처럼 두 번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다
.

우리는 눈물을 삼키며 산에 올라 가장 마음 아픈 결정적 봉헌을 하라고
아브라함처럼 두 번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다
.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역할과 이름을 지워버리더라도
끝까지 성실하게 소임을 다하기 위해
소년 사무엘처럼 두 번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다
.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생으로 한 번 부르셨기에 세상을 만났고,
교회로 또 한 번 부르셨기에 하느님의 백성을 만났던 사람들이다.
백성을 구하고,
그러기 위해 산을 올라야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이름을 지워야 하는 소명을 사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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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6 09:55 2016/03/2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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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인내忍耐

하느님의 인내忍耐

 

한자 말 참을 의 구성은 칼날 과 마음 으로 짜여 있다. 에 점을 하나 찍어 예리한 칼이 되는 칼날 밑에 마음 이 있으니 예리한 칼날로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을 견뎌내는 형상이다.

견딜 는 말이을 와 마디 으로 구성되었다. 말이을 라는 글자는 본래 턱에 난 수염 모양인데, 본뜻인 수염보다는 말을 이어주는 어조사로서 널리 쓰이면서 말이을 가 되었으니, 원래는 수염이다. 그리고 은 단독으로 쓰일 때는 마디촌수’ ‘마음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며 다른 부수와 합해질 때는 주로 손의 용도로 쓰인다. 따라서 의 전체적인 의미는 남성들의 권위와 자존自尊의 상징이기도 한 수염()을 손을 이용해 뽑아()내는 형별을 견디어내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수염을 뽑히는 아픔과 굴욕, 모욕을 참고 견디어내는 형상인 것이다.

기원전 745695년 사이에 무려 50년간이나 활동한 것으로 알려지는 위대한 예언자 이사야는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이사 50,5-9) 라는 구절을 남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다시 흐른 후에,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 그대로 갖은 모욕과 아픔,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요한 19,34)는 성경 구절에서 보듯이 실제 창으로 심장을 찔리는 고통까지도 받으면서, 십자가 형을 받고 돌아가시기까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주 인간적인 표현으로 다시 더 어떻게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그저 인내의 사랑이었다.

그렇게 견디신 하느님께서 오늘도 다시 한 번 나를 참아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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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3 12:13 2016/03/2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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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섭리攝理

하느님의 섭리攝理

제임스 맥키라는 사람이 신의 섭리는 우연을 모의謀議한 것이라 표현한 적이 있다.

영이 맑은 사람들은 우연과 우연 속에서 필연을 경험하고, 하느님의 섭리를 느낄 때가 많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삶 안에 우연처럼 필연을 엮어놓으시고 사람들과 수수께끼 놀이를 하고 싶어 하시는지도 모른다.

 

섭리攝理라는 한자 말의 은 당길 이라 하는데, 가 옆에 붙어있고 귀 라는 글자가 셋이나 붙어 만들어진 말로서, 귀를 잡아당겨 두 귀 말고도 속뜻을 알아듣는 귀까지 합하여 귀가 셋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을 묘사한다. ‘는 다스릴, 옥을 갈 자이며 옥돌을 갈고 닦아 나오는 옥돌무늬 이자이다.

귀를 쫑긋하고 세워서, 그리고 두 귀 말고 속뜻을 간파하는 귀까지 더해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을 알아들어야 하며, 옥돌을 열심히 갈고 닦아야 빛나는 무늬를 담은 보석을 바라보게 되듯이, 그렇게 일상사 안에 담긴 섭리의 무늬들을 발견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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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2 09:29 2016/03/2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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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손가락

하느님의 손가락

아론이 땅의 먼지로 모기들을 만들었을 때, 그에 대적하던 파라오의 요술사들도 그렇게 하려 하였으나 하지 못한 뒤에, 요술사들은 아론의 일이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신 일”(탈출 8,15)이라 변명한다.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신 일은 아무도 대적하거나 흉내 낼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와 말씀을 나누신 다음 당신 손가락으로 쓰신, 돌로 된 두 증언판을 그에게 주셨다.”(탈출 31,18) 하느님의 손가락이 써 주신 글은 지울 수 없는 계명판이다.

사람들은 가끔 하느님 손가락의 작품들”(시편 8,4)을 찬양할 생각을 잊고, “자기들 손가락으로 만든 것에 경배합니다.”(이사 2,8) 한 것처럼, 자기들 손가락이 만든 것을 우상으로 삼기도 하면서 자기들 손가락을 금은으로 치장한다. 벨사차르라는 임금이 하느님의 성전에서 약탈해온 금 기물들로 먹고 마시며 방탕할 때 사람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을 쓰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다고(다니 5,1-12) 한 것처럼, 심지어 하느님의 것을 조롱하다가 깜짝 놀란다.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실 때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신다.”(마르 7,3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듣게 하시고 제대로 말하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 손가락으로 사람들의 귀를 막으시어 세상의 소음들을 듣지 못하게 하시고, 자신의 깊은 내면에 들리는 음성만을 들으라 하시며, 자신이 잃었던 것들과 아픔, 그리고 상처와 먼저 화해하라 하신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낫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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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1 16:15 2016/03/21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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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양의 다리를 부러트리는 목자

길 잃은 양의 다리를 부러트리는 목자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2-14)

모든 만물이 그렇듯 기질상 태어날 때부터 천방지축이고 자꾸만 길을 이탈하는 양도 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이런 양을 만나게 될 때, 그런 양의 다리를 기술적으로 부러트리고 다리가 나을 때까지 안고 다닌다 한다. 그러면 이내 양이 길이 들고 목자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어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아듣는 양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이 혹시 하느님께서 나를 길들이시려고 나의 다리를 부러트리신 순간은 아닌지, 내가 길을 잃었던 양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는 하느님께서 끝까지 나를 잃지 않으시려는 은총의 순간이고, 또 하느님께서 나를 안고 다니시는 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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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0 10:08 2016/03/20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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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자리

믿음의 자리

미국의 예수회 신부로서 시인이자 평화운동가로 알려진 대니얼 베리건Daniel Berrigan믿음이란 머리에도, 마음에도 없으며, 엉덩이가 있는 곳에 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머리의 지성이나 이성적인 사고 안에도 아니고, 그렇다고 느낌과 감정이 오가는 마음에도 아니며, 그들을 넘어선 무엇인가가 나를 사로잡아 나를 아직까지 믿음의 삶을 지키며 지금 이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살게 하는 것이니, 바로 그 엉덩이에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 하자면, 머리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지라도, 마음에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행위를 해야만 하는 당위를 절절하게 느끼고 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를 지금 이 자리에 붙들어두고 있는 무엇, 그리고 내가 지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그 자리와 그 자리에서 하고 있는 일과 행동 안에서, 내가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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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8 10:15 2016/03/1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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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기원

거룩한 기원

우리 인생과 세상살이 동안 주변에서 만나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먹고, 살며, 사랑하는 것들을 그것들이 지닌 본래의 고유한 기원과 연결 짓는 것이 중요하다.

먹는 것이 단순한 음식이나 영양의 섭취가 아니고,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그저 처세요 살아가는 요령이 아니며, 사람들이 만나 사랑하는 것은 그저 외롭지 않기 위한 방편들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이 거룩한 의례요 종교행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

먹든, 공부를 하든, 걷든, 운동하든, 일터에서 노동을 하든, 운전을 하든, 사람을 만나든, 일을 하든, 잠자리에 들든그 무엇을 하더라도 그 전에 기도를 한다. 모든 행위를 그 행위의 거룩한 기원에 연관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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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7 09:17 2016/03/1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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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노래

시와 노래

어떤 현상과 사물을 적절한 어휘로
설명하고 규정할 줄 아는 것은 거룩한 일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인과 음악가는 그렇게 사람을 살린다.

시인이 영감을 잃어
어딘가에 꼭 맞는 말을 떠올리지 못하게 될 때,
멜로디와 가사, 리듬과 화음들이
도무지 시대와 주변에 맞지 않고 엉뚱한 것들이 될 때,
지금 우리의 말들이 지나왔던 언젠가와 연결될 수 없을 때,
우리는 방황하고 혼돈 속에 살며 어지럽다가
마침내 죽는다.

스치듯 떠올리거나 읽게 된 한 마디 말에,
어디선가 들려온 한 가락 곡조에,
우리는 인생을 다시 살만한 것이라고 느끼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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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6 20:41 2016/03/16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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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신 하느님

말씀이신 하느님

들꽃을 찍는 사진작가가 들꽃 앞에서 예쁘다, 사랑스럽다, 곱다라는 마음과 말을 오랫동안 건네면 마침내 들꽃이 자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여주는 순간이 온다고 했다.

스위스의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라는 신학자이자 추기경은 어머니가 아이를 보고 오랫동안 웃으면, 아이도 웃기 시작할 것이다. 어머니가 아기의 내면에 있는 사랑을 깨웠고, 아기의 인식도 깨운 셈이라고 한 적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작가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아이가 자라면서 인간의 의식을 지니게 되는 것은 큰 파도가 이는 심해에서 (의식을)이끌어내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달렸다.’고 했다.

스승보다는 제자로서 더 유명했던 이, 그 자신이 미국의 작가, 교육자이자 사회주의 운동가라기보다는 시각과 청각의 중복 장애를 안고 태어났던 이로서 더 알려진 이, 그녀는 헬렌 애덤스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8이다. 그녀가 여덟 살일 때 만나 그녀를 어둠과 혼돈 속에서 이끌어내고 자유와 사고, 감정, 자기표현과 사랑의 가능성을 지니도록 이끌어주었던 이는 애니 설리반(1866~1936)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오랜 인내로 어머니처럼 헬렌에게 말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들꽃의 고움을 드러내게 하듯이,
아이의 미소를 캐내듯이,
아기가 인간임을 알아가도록
자상한 목소리를 수도 없이 반복하듯이,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혼돈에서
사랑의 문장과 편지를 그려내듯이,
그렇게 하느님께서도 우리 인간에게
오랜 인내로 말을 가르치셨고,
지금도 가르치시고 계신다.

그것은 오로지
말씀이신 당신께서
이미 우리 안에 살고 계심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이 복잡다단한 세상살이 안에서
나를 어떻게 드러내야 하고 표현해야 하는가를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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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4 15:09 2016/03/14 15:09

현대 봉헌 생활의 내적인 위기

현대 봉헌생활의 내적인 위기

세상에는, 특별히 가톨릭교회 안에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자신을 이웃과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약속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삶을 살고 싶은 사람도 없고, 실제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그 삶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이 세계적으로 매년 3천명을 넘는다. 왜 그럴까?

첫째는 봉헌생활에 대한 스스로의 정체성과 신원의식의 약화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각기 다른 봉헌생활 형태 안에 담긴 은사(카리스마)에 따라 살아가야할 자신의 신원과 소임에 대해 깊이 공부하지 않아서이다. 지성적인 약화이다. 봉헌 생활자들은 자기가 사는 은사에 따른 자극을 양식으로 산다.

둘째는 봉헌생활을 하는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에서 그저 매일 매일 단순하게 기능적으로 일을 수행하며 생활하기 때문이다. 이는 봉헌 생활자들의 봉헌된 삶이 진정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을지라도, 이를 바라보는 국외자들에게 감동과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봉헌생활은 단순 기능을 수행하는 직업이 아니다.

셋째는 현대 사회를 위한 새로운 생활과 활동모델을 찾지 못하는 방황 때문이다. 수천, 혹은 수백 년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과거의 생활양식과 구조를 버렸으되 새로운 구조를 찾지 못하였거나, 쇄신을 해야 한다면서도 그저 과감한 단절을 이루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는 형국이다.

오늘을 사는 봉헌생활은 어렵고 힘들다. 수많은 유혹이 닥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러하셨듯이 봉헌 생활자들에게도 확신을 주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 1,8)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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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2 11:25 2016/03/12 11:25

헌신, 투신하지 못하는 이유

헌신, 투신하지 못하는 이유

사람들은 선택과 선택의 연속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선택은 선택을 제외한 다른 것들의 배제요 포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선택을 하고나서도 욕심이 많아서 배제하고 포기한 것들에게로 자꾸 눈길을 주며 호시탐탐 넘어다본다. 뿐만 아니다.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무엇인가를 선택하고도 자기가 선택한 것들에 대한 선택의 의미와 그 선택이 주는 의미의 크기를 실감하거나 가늠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오해, 곡해, 왜곡, 변명, 합리화, 거짓말을 통해 자기를 괴롭히고 이웃을 괴롭히며 화를 낸다. 이렇게 본성과 이성, 그리고 감성이 어그러지면서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것들에 투신하지 못하고 헌신하지 못하게 된다.

탐진치貪瞋痴3이 바로 이것들이다.

선택한 만큼만 원해야 하고,
선택한 것의 뜻을 가늠해야 하며,
선택한 것에 솔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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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0 23:53 2016/03/10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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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나르드 향유

값비싼 나르드 향유

예수님 생애에 일대 스캔들이라 할 사건 하나가 일어난다. 어떤 머리 긴 여자 하나가 예수님께 와서 공공연하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값비싼 향유를 통째로 부어 예수님 발을 닦아드리고, 울면서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 발을 닦아드렸다. 당연히 사람들은 이를 불쾌하게 여겼고 입방아를 찧어댔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를 개의치 않으신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사랑으로 준비한 행위였다고 말씀하신다.(참조. 마르 14,3-9 마태 26,6-13 요한 12,1-8)

인간은 사랑을 돈으로 계산하려는 속성을 지녔다. 그러나 사랑은 산술과 손익의 논리를 뛰어넘는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사랑에 큰 돈을 썼다하더라도, 아무리 비싼 향유라 할지라도, 그것들보다 사랑의 크기는 더 크다. ‘사랑하지 않고 죽거나,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채 죽는 것이 진정한 비극이라던 죤 포웰 신부의 말이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현재를 사랑하지 않고 죽는 것보다는 화끈하게 사랑하고 죽을 것, 사랑으로 준비한 죽음일 것, 삶으로 준비한 죽음이 될 것, 이런 것이 혼신을 다해 세상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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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9 16:05 2016/03/0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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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의

사회 정의

사회 정의는 소위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어떻게 사회를 이루고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들은 누구일까?

표준어보다는 사투리를 거칠게 쓰는 사람들, 맵시 있게 차려입지 못하고 구질구질하고 덕지덕지하게 몸을 가린 사람들, 곱게 차려입고 주일에 교회나 성당에 가지 못하고 불안과 초조로 안달이 나서 점집이나 삼신 할매를 먼저 찾는 사람들, 작품이나 예술이 아닌 먹고 살기 위해 장바닥에 내다 팔 투박한 생활도구들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 거창한 문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하며 막걸리 한 잔과 자기만족에 취하는 사람들, 명품보다는 시장이나 리어카 표를 걸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인간으로 여겨지기보다는 인력시장의 수요공급이나 인적자원으로 분류되는 사람들, 얼굴이 아니라 몸뚱이와 손발만을 가진 사람들, 이름이 아니라 숫자로 매겨지는 사람들, 주요일간지의 1면 스타가 아닌 지방신문의 가십 란이나 강력사건의 주인공으로나 등장하는 사람들, 하찮은 사람들, 어디 한 군데 돈을 받을 곳은 없고 줄 곳만 있는 사람들, 그날그날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 ‘장애우라고 부르며 친구가 되자고 외치는 사람들에게서 정작 그러한 배려아닌 배려를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라고 수급대상이니 보호대상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 맨날 맨날 아픈 곳이 너무 많아 약봉지를 달고 사는 사람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 어려움 중에 있는 가정들, 버려진 아이들, 모든 미래가 차단된 젊은이들, 병자들과 버려진 노인들, 재물로 배부르지만 마음은 비어있는 부자들, 신적인 것에 목말라하며 삶의 의미를 찾는 남녀 인간들

사회정의라는 것이 뭐 그리 거창한 것일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개인 간의 갈등과 번민들이 고스란히 이웃과 사회의 번민이요 갈등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마하트마라 불렸던 간디가 말한 대로, 『①원칙 없는 정치 노동이 없는 부도덕이 없는 상업 양심이 없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종교(모한다스 K. 간디Mohandas K.Gandhi)라는 것이 모두 허구요 거짓이며 사기라는 사실은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거짓을 조금치라도 줄이려는 시도들이 바로 사회정의이다.

 

 

 

Posted by benji

2016/03/07 20:24 2016/03/0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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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가지 화살표

3가지 화살표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만, 우리가 가고 싶은 길로만, 편한 길로만, 그렇게 골고타를 오르려 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야 할 길을 가리키는 신호등의 화살표와 깜박이 같은 기본 신호들은 다음 3가지이다.

1) ‘환대라는 화살표 : 대단히 어려운 U-턴을 요구하는 화살표이다. 그러나 마음의 길에서는 어김없이 직진 신호를 내리는 명령어요 십자가이다. 형제를 선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 형제가 들고 있는 모든 짐 가방들과 함께, 우리들의 이기심이라는 세관을 빠져나가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그런 짐들을 포함해서까지, 그의 여권 그대로 그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름 없이, 배경 없이, 그럴듯한 인상 없이는 이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속성을 지녔기에 어려운 화살표이다. 바로 내 앞에, 내 집 앞에 살고 있는 그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말 그대로 무척 불편한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는(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인간이 원래 그러한 것이겠지만) 애매모호한 것들을 배척하며, 유별난 자기들만의 이름을 지니고, 자기들만의 구체적인 얼굴을 지니며, 자기들만의 살과 피에 맞는 사람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는 종교이다.

2) ‘화해라는 화살표 : 길이 끊어지는 곳에 이르러 우리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곳에 육교나 구름다리, 혹은 지하도와 같은 것을 놓으라는 화살표이다. 나 자신을 자동적으로 멈칫하게 만드는 그런 자리에 표시되는 화살표이다. 내게 적대감을 발산하는 나의 원수들 앞에서 나는 멈추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멈추어 섰더라도 나의 신경에 거슬리는 형제자매들이 그저 그냥 그대로 지나갈 수 있도록 내가 알아서 지하도를 건너라는 표시이다. 어떤 때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먹을 불끈 쥐게 하고, 이를 악물게 하며, 말을 못하게 숨이 막히게 하는, 그런 자리에 등장하는 표시이다. 내 나름대로 세심하게 이리저리 재고 분류하여 만든 관계들의 유형대로 고정시킨 범주 안에서만 돕기로 한 이웃을 넘어가라는 표시이다. 우리들이 올라야 하는 용서의 계단 앞에서 덜커덕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는 실존의 우마차, 그 엔진을 시험해야 한다.

3) ‘일치라는 화살표 : 예수님께서 가셨던 것처럼 골고타로 오르는 행렬 속에서 발견되는 화살표이다. 혼자서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기도하고 싸우며 함께 고통을 참아내며 가는 길에 있는 화살표이다. 나 혼자만의 외로운 오르막길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려 가는 길에서 만나는 화살표이다. 정말 모두 함께 잘 나아가기 위해 원칙과 규정들이 있고 계획들이 있으며 정확한 표시들이 있는 길에 있는 표시이다. 저마다 모든 이들의 입장이 있어서 내가 그들 하나하나의 아래에 서야만 할 필요가 있다는 그런 표시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치라는 천은 찢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번 찢어지고 나면 다시 깁기 위해서 오랜 인내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Don Tonino Bello

Posted by benji

2016/03/04 13:42 2016/03/04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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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예언자

 

다른 복음사가들이 제자들의 부르심을 예수님 공생활의 첫 장면으로 삼는 것에 비겨 루카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의 장면을 고향 나자렛의 회당으로 기술한다. 여기에는 루카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루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위해 일단 당신이 살았던 나자렛이라는 곳으로 가신다. 그리고 회당에 들어가 예언서를 받아들고 한 대목을 읽으신 다음, 예언이 지금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음을 장엄하게 선포하시고, 원래 참예언자이시므로 굳이 예언자가 되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 예언자가 되신다. 그 뒤 놀라움과 찬탄으로 주시하던 군중들은 이내 화가 잔뜩 나서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가로질러 총총히 당신의 갈 길을 가시고, 이어 변두리 갈릴래아로 향하신다.(참조. 루카 4,16-30 마태 13,54-58 마르 6,1-6)

이처럼 루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모두는 어렵고 힘들더라도 예언자의 길을 가야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예언자는 주변을 깨운다.예언자는 자신이 속해 살아가는 역사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해석하는 능력을 하느님에게서 받는다. 예언자는 밤을 지새우며 여명이 밝아오는 때를 아는 파수꾼과 같다.(이사 21,11-12 참조) 예언자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의 형제자매인 사람들도 알아본다. 예언자는 식별의 능력이 있고 죄악과 불의를 고발할 줄 안다. 예언자는 어디에도 매여 있지 않은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하느님 이외에 그 누구도 주인으로 여겨 응답해서도 안 되며, 하느님 이외에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예언자는 으레 가난한 이들과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선다. 하느님께서 친히 그들 편이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엘리야와 요나처럼 예언자도 종종 달아나려는 유혹, 예언자의 임무에서 벗어나려는 유혹을 받는다. 이는 예언자의 의무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며, 때로는 지치고 눈앞의 결과가 실망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언자는 결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그러하셨듯이 자기에게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 1,8)(교황 프란치스코, ‘봉헌생활의 해를 맞이하여 모든 봉헌 생활자들에게 보내는 교서’, 2015) 하며 확신을 주시는 것을 기억하고, 이를 마음에 새겨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가 예언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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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3 10:39 2016/03/03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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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감사

어떤 행동이 악에 대항하고 선을 도모하는 일인지 아닌지는
그 행위의 성격이 감사라는 특성을 지녔는지 아닌지로 식별할 수 있다.

뭔가를 가시적인 성공 없이도 견뎌내려면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만 한다.

감사는 치유에서 비롯되고, 분노는 상처에서 비롯된다.
감사는 나눔의 추구이고 분노는 소유의 추구이다.

그런 의미로 감사는 아픔을 안고서도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는 과정이다.

감사하는 삶은 누군가와 공감하고 눈빛만으로도 연민을 나눈다.

속박이 아닌 자유, 집착이 아닌 해방, 그런 것이 감사에서 우러나는 내용들이다.

우리 모든 행위의 원천이 감사일 때,
우리가 누군가에게 뭘 준다는 것은 오히려 받는 것이 되고,
우리가 사목하는 소위 그 사목대상자라는 이들이 거꾸로 우리를 사목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보살피고 돌보아 주는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우리 자신이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이고,
우리가 도와주는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우리가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감사 안에서는 이처럼 우리의 의도와는 거꾸로 모든 것에 본말本末이 전도된다.

성화聖化와 성덕의 척도는 감사이다.
성인聖人의 동기부여는 감사에서 비롯된다.
성인聖人은 주어지는 것을 받아서 감사하는 사람이다.

감사하지 않으면 선물을 선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감사하지 않으면 선물을 우리 것인 양 착각한다.
감사하지 않으면 그래서 취하려든다. 움켜쥐려 한다.
그것이 죄의 시작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있으면서
생명과 배필, 그리고 동산에 감사하지 못하고 취하려 들 때에 죄가 시작한다.
곧 이어 부끄러움과 핑계, 벌과 고통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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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2 16:33 2016/03/02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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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축복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고자 하셨을 때에, 하늘에서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 3,17 마르 1,11 루카 3,22)이라는 말씀이 들렸다고 공관복음은 공통으로 전한다. 예수님께 이 말씀이 들렸던 것은 같은 말씀이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지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방황하며 허덕이는 것은 축복이 부족해서이다. 말썽꾸러기 아이들이 많아지는 것만 보아도 그것은 그 아이들이 충분한 축복을 받지 못해서이다.

우리는 우리들이 축복받은 존재임을 알고
주변을 축복해야 한다.

축복은 먼저 보는 것이다. 나를 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눈길을 내가 느끼면서, 주변을 그렇게 보는 것이다. 먼 발치에서 눈이라도 마주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까치발을 딛고 애가 타듯이 그렇게 하느님을 바라보며, 또 그렇게 나의 축복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있음을 알고, 하느님의 눈길로 그들을 보아야 한다. 눈으로 보고, 지성과 이성으로 보며, 눈으로 보아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축복은 말해 주는 것이다. ‘축복하다라는 라틴말 ‘benedicere’bene(=good)+dicere(=to speak) 이다. 곧 누군가에게 좋게 말해주고, 좋은 말을 해 주는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온 마음으로, 진심으로, 내가 먼저 해 주어야 한다.

축복은 희생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내 생명을 내어놓고, 내가 죽어주는 것이고, 내 마음이 먼저 소리 없이 괴롭고 아픈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주님께서 보시고 아시면 그만이라는 믿음으로 뭔가 주변에 빠진 것을 조용히 채워놓는 것이다.

말썽꾸러기 아이들을 자꾸 쓰다듬어주면서,
나의 축복이 부족하여
네가 지금 그러한 것이라 하면서,
계속 축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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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1 16:36 2016/03/01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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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동행

춤추는 동행

롤 모델, 멘토, 소울 메이트, 영적 지도자, 안내자, 조언자, 수호천사, 보디 가드, 친구, 동무童舞, 반려伴侶, 사제동행師弟同行, 교학상장敎學相長, 동지, 도반道伴, 스승과 제자, 주인과 종, 아버지와 아들? 뭐라 하든 어차피 동행이고 동반이다.

길든 짧든 인생을 돌아보면,
내가 위기의 순간에 두려움이나 불만이 아닌 든든한 믿음으로 대처하게 해준 동행
별로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꼭 필요했기에 내 인생에 끼어든 동행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함께 기도하고, 가르치면서 날이 갈수록
나를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해준 동행
내 인생의 모든 잠재적 가능성을 충만하게 열 수 있도록 부추겨준 동행
성령께서 닿지 않으시는 곳이 없고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듯이
그렇게 내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내게 와 닿아 나에게 힘을 주는 동행
얼핏 순간의 짧은 한 마디 말로도 내가 기도할 수 있게 해 준 동행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준 동행들이 있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도 그 여정 자체가 동행이요 동반이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든 관계 자체가 모두 동행이요 동반이다. 인연이든 악연이든, 부부간이든, 부모와 자식이든, 이웃과 친구들이든, 동행 아닌 것이 없다. 많은 성인聖人들과 성현聖賢들도 조물주나 하느님과의 동행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형태로든 영적인 혈연으로까지 불릴 만큼 대단하고 놀라운 누군가와의 동행동반의 삶을 살았다. 이들에게 동행동반하나의 제도이며 환경이자 인생의 학교였다.(성 요한 바오로 2, ‘전 세계의 젊은이들에게Parati Semper[Dilecti Amici]’, 1985) 인간들은 이렇게 어떤 형태로든 동행동반을 산다.

내가 누군가의 동행과 동반으로 지금 여기까지 왔고, 그래서 내가 다시 한 번 누군가를 동행하고 동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누구도 동행할 수 없다. 그런 의미로 누군가를 동행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먼저 나를 동행해주도록 자신을 내맡기고 청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마디 자체로 동행이나 동반은 누군가와 함께 어떤 목적지에 같은 지향으로 가 닿는 과정을 뜻한다. 곧 이는 내적인 관계가 미리 내포되어 있는 개념이다. 누군가의 옆에서 함께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장애들을 피하면서 같은 길을 가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누군가가 앞서서도 안 되고 누군가가 뒤따르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함께 가는 길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들만의 고유한 길이다.

동행이라 할 때는 일반적으로 어깨동무를 하고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앞으로 전진하는 것과 같은 직선적인 개념이 연상된다. 그러나 인생이 꼭 그렇게 앞으로나 뒤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 볼 때에 전후좌우前後左右 종횡무진縱橫無盡을 연상할 수 있는 춤추는 동행이라는 개념이 훨씬 더 역동적인 개념이랄 수 있다. 굳이 저 끝에 있어 가 닿아야 하는 어떤 목표점을 상정하지 않고도 누군가와 함께 흥에 겨워 춤을 추듯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한 판을 어우러지는 것 자체가 목표점이요 도달점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춤추는 동행은 훨씬 풍요로운 개념이고 역동적인 개념이다. ‘춤추는 동행은 같이 춤을 추는 사람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그의 호흡을 느끼고 적당한 공간을 확보한 상태에서 서로의 발자취를 존중할 때에만 우아하고 아름다운 춤이 된다.

 

Posted by benji

2016/02/28 11:41 2016/02/28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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