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學習

학습學習

 어제 내 발로 걸어서 스스로 자원하여 안과에 다녀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늦깎이 학습에 여념이 없다가 눈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아서였다.

 학습배울 익힐 이다. 사람들이 배울 학을 풀 때는 위에서부터 양손, 그 양손으로 잡고 있는 내용, 책상, 아이 이런 조합을 떠올려보면서 아이가 책상에 앉아 두 손으로 책을 잡거나 혹은 손으로 숫자나 매듭을 익히는 형상, 혹은 학교 건물에 있는 X자 형의 나무, 가로그을 효를 떠올려 해석하기, 아니면 부모나 주변 어른이 두 손으로 아이의 머리 위에 값진 보물을 올려주는 모습 등으로 이해하려 한다

 익힐 습은 역시 위로부터 날개를 뜻하는 깃 우흰 백의 조합으로 보는데, ‘깃 우야 날개 짓을 익힌다는 것으로 금방 이해가 가지만 문제는 흰 백이다. 이를 스스로 자에서 한 획이 빠진 것으로 보거나, ‘날 일에 점이 하나 붙은 것으로 보거나, 또는 그대로 흰 백으로 보기도 한다. ‘스스로 자의 변형으로 보면 스스로 익힌다는 뜻이 되고, ‘날 일의 변형이라면 날 밝을 때 햇빛 아래서 땀 흘려 열심히 익힌다는 뜻이고, ‘흰 백그대로 본다면 원래 그 글자가 쌀 톨의 형상에서 왔으므로 갈고 갈아서 하얀 한 톨의 쌀알을 얻을 때까지 갖은 수고를 아끼지 않는 과정이 된다.

학습은 그래서 이런저런 뜻을 담아 노력하여 값진 것을 얻고 배우는 과정이다.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하시면서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루카 6,40) 하셨다. 그래서 우리의 학습은 머리, 마음, 손으로 익혀 내 몸에 붙이는 그런 공부이다.

밥 자리

밥 자리

누구나 밥이나 한 번 먹자할 때에
서로 관계를 확인하고 안심한다.

예수님의 공생활도
거의 밥 자리의 연속이었다.
오죽 했으면 그런 상황이 못마땅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먹보요 술꾼”(마태 11,19 루카 7,34)이라며
비아냥거리기까지 했을까?

밥 자리를 가리키는 한자말이
회식會食이다.
그때 쓰는 모일 회
시루 같은 것이 포개져 있는 형상의
에 뚜껑을 덮은 꼴이다.
뚜껑 달린 그릇에 이것저것 넣고
끓이거나 조리하는 모양이다.

회식은 그래서 스스럼없이
이런 저런 얘기들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자리이다.
관계의 불편부당을
끓여내는 자리이다.
그렇게 친구가 되는 자리이다.

친구를 뜻하는 서양말 company
cum(함께) + panis()이라는 라틴말에서 기원한다.

고달픈 인생살이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
밥 자리를 자주 고안해내야 한다.

박사보다 밥사,
석사보다 식사라는 말이
팍팍한 우리 인생을
가끔은 생기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밥맛 떨어지게 하는 이들과
어쩔 수 없이 먹어야하는 밥 말고,
밥 맛 나게 하는 이들과는
밥을 같이 자주 먹어야 한다.

몸무게 걱정을 하는 부담이 다소 있더라도
우리가 몸 때문에 사는 것은 아닐 진대
그리 해야 한다.

 

 

두 번 부르심

두 번 부르심

구약성경에는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고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두 번 거듭 부르시는 특이한 이야기들이 있다. (물론 전해지는 이야기의 맥락에서는 부름의 횟수가 관건이 아닌 것은 자명하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를 만났을 때였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야, 모세야!”(탈출 3,4) 하고 두 번 부르시며 모세에게 거룩한 땅에서 신발을 벗으라고 요청하신다.

아브라함이 마지막 시험을 치를 때도 그랬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던 부르심을 받고, 모리야 산정에서 눈물을 삼키며 이사악을 묶어 칼로 내려치려 할 때에,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시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세 22,11) 하고 두 번 부르시며 이사악을 살려내신다.

스승 엘리의 시대를 마감하고 마지막 판관이 되어 살았으며 이스라엘 역사에 최초의 임금 사울을 축성하여 왕정을 시작하도록 하였던 사무엘의 소년 시절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소년 사무엘을 사무엘아, 사무엘아!”(1사무 3,10) 하고 두 번 부르신다.

어떤 의미에서 봉헌생활을 하는 이들도
하느님께서 두 번 부르시는 부르심을 산다
.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땅에 들어서기 위해
모세처럼 두 번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다
.

우리는 눈물을 삼키며 산에 올라 가장 마음 아픈 결정적 봉헌을 하라고
아브라함처럼 두 번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다
.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역할과 이름을 지워버리더라도
끝까지 성실하게 소임을 다하기 위해
소년 사무엘처럼 두 번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다
.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생으로 한 번 부르셨기에 세상을 만났고,
교회로 또 한 번 부르셨기에 하느님의 백성을 만났던 사람들이다.
백성을 구하고,
그러기 위해 산을 올라야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이름을 지워야 하는 소명을 사는 존재들이다.

 

 

하느님의 인내忍耐

하느님의 인내忍耐

 

한자 말 참을 의 구성은 칼날 과 마음 으로 짜여 있다. 에 점을 하나 찍어 예리한 칼이 되는 칼날 밑에 마음 이 있으니 예리한 칼날로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을 견뎌내는 형상이다.

견딜 는 말이을 와 마디 으로 구성되었다. 말이을 라는 글자는 본래 턱에 난 수염 모양인데, 본뜻인 수염보다는 말을 이어주는 어조사로서 널리 쓰이면서 말이을 가 되었으니, 원래는 수염이다. 그리고 은 단독으로 쓰일 때는 마디촌수’ ‘마음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며 다른 부수와 합해질 때는 주로 손의 용도로 쓰인다. 따라서 의 전체적인 의미는 남성들의 권위와 자존自尊의 상징이기도 한 수염()을 손을 이용해 뽑아()내는 형별을 견디어내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수염을 뽑히는 아픔과 굴욕, 모욕을 참고 견디어내는 형상인 것이다.

기원전 745695년 사이에 무려 50년간이나 활동한 것으로 알려지는 위대한 예언자 이사야는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이사 50,5-9) 라는 구절을 남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다시 흐른 후에,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 그대로 갖은 모욕과 아픔,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요한 19,34)는 성경 구절에서 보듯이 실제 창으로 심장을 찔리는 고통까지도 받으면서, 십자가 형을 받고 돌아가시기까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주 인간적인 표현으로 다시 더 어떻게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그저 인내의 사랑이었다.

그렇게 견디신 하느님께서 오늘도 다시 한 번 나를 참아주신다.

하느님의 섭리攝理

하느님의 섭리攝理

제임스 맥키라는 사람이 신의 섭리는 우연을 모의謀議한 것이라 표현한 적이 있다.

영이 맑은 사람들은 우연과 우연 속에서 필연을 경험하고, 하느님의 섭리를 느낄 때가 많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삶 안에 우연처럼 필연을 엮어놓으시고 사람들과 수수께끼 놀이를 하고 싶어 하시는지도 모른다.

 

섭리攝理라는 한자 말의 은 당길 이라 하는데, 가 옆에 붙어있고 귀 라는 글자가 셋이나 붙어 만들어진 말로서, 귀를 잡아당겨 두 귀 말고도 속뜻을 알아듣는 귀까지 합하여 귀가 셋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을 묘사한다. ‘는 다스릴, 옥을 갈 자이며 옥돌을 갈고 닦아 나오는 옥돌무늬 이자이다.

귀를 쫑긋하고 세워서, 그리고 두 귀 말고 속뜻을 간파하는 귀까지 더해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을 알아들어야 하며, 옥돌을 열심히 갈고 닦아야 빛나는 무늬를 담은 보석을 바라보게 되듯이, 그렇게 일상사 안에 담긴 섭리의 무늬들을 발견해내야 한다.

 

하느님의 손가락

하느님의 손가락

아론이 땅의 먼지로 모기들을 만들었을 때, 그에 대적하던 파라오의 요술사들도 그렇게 하려 하였으나 하지 못한 뒤에, 요술사들은 아론의 일이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신 일”(탈출 8,15)이라 변명한다.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신 일은 아무도 대적하거나 흉내 낼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와 말씀을 나누신 다음 당신 손가락으로 쓰신, 돌로 된 두 증언판을 그에게 주셨다.”(탈출 31,18) 하느님의 손가락이 써 주신 글은 지울 수 없는 계명판이다.

사람들은 가끔 하느님 손가락의 작품들”(시편 8,4)을 찬양할 생각을 잊고, “자기들 손가락으로 만든 것에 경배합니다.”(이사 2,8) 한 것처럼, 자기들 손가락이 만든 것을 우상으로 삼기도 하면서 자기들 손가락을 금은으로 치장한다. 벨사차르라는 임금이 하느님의 성전에서 약탈해온 금 기물들로 먹고 마시며 방탕할 때 사람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을 쓰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다고(다니 5,1-12) 한 것처럼, 심지어 하느님의 것을 조롱하다가 깜짝 놀란다.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실 때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신다.”(마르 7,3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듣게 하시고 제대로 말하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 손가락으로 사람들의 귀를 막으시어 세상의 소음들을 듣지 못하게 하시고, 자신의 깊은 내면에 들리는 음성만을 들으라 하시며, 자신이 잃었던 것들과 아픔, 그리고 상처와 먼저 화해하라 하신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낫게 하신다.

 

길 잃은 양의 다리를 부러트리는 목자

길 잃은 양의 다리를 부러트리는 목자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2-14)

모든 만물이 그렇듯 기질상 태어날 때부터 천방지축이고 자꾸만 길을 이탈하는 양도 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이런 양을 만나게 될 때, 그런 양의 다리를 기술적으로 부러트리고 다리가 나을 때까지 안고 다닌다 한다. 그러면 이내 양이 길이 들고 목자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어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아듣는 양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이 혹시 하느님께서 나를 길들이시려고 나의 다리를 부러트리신 순간은 아닌지, 내가 길을 잃었던 양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는 하느님께서 끝까지 나를 잃지 않으시려는 은총의 순간이고, 또 하느님께서 나를 안고 다니시는 시간들이다.

 

믿음의 자리

믿음의 자리

미국의 예수회 신부로서 시인이자 평화운동가로 알려진 대니얼 베리건Daniel Berrigan믿음이란 머리에도, 마음에도 없으며, 엉덩이가 있는 곳에 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머리의 지성이나 이성적인 사고 안에도 아니고, 그렇다고 느낌과 감정이 오가는 마음에도 아니며, 그들을 넘어선 무엇인가가 나를 사로잡아 나를 아직까지 믿음의 삶을 지키며 지금 이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살게 하는 것이니, 바로 그 엉덩이에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 하자면, 머리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지라도, 마음에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행위를 해야만 하는 당위를 절절하게 느끼고 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를 지금 이 자리에 붙들어두고 있는 무엇, 그리고 내가 지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그 자리와 그 자리에서 하고 있는 일과 행동 안에서, 내가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는 것일 것이다.

거룩한 기원

거룩한 기원

우리 인생과 세상살이 동안 주변에서 만나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먹고, 살며, 사랑하는 것들을 그것들이 지닌 본래의 고유한 기원과 연결 짓는 것이 중요하다.

먹는 것이 단순한 음식이나 영양의 섭취가 아니고,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그저 처세요 살아가는 요령이 아니며, 사람들이 만나 사랑하는 것은 그저 외롭지 않기 위한 방편들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이 거룩한 의례요 종교행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

먹든, 공부를 하든, 걷든, 운동하든, 일터에서 노동을 하든, 운전을 하든, 사람을 만나든, 일을 하든, 잠자리에 들든그 무엇을 하더라도 그 전에 기도를 한다. 모든 행위를 그 행위의 거룩한 기원에 연관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시와 노래

시와 노래

어떤 현상과 사물을 적절한 어휘로
설명하고 규정할 줄 아는 것은 거룩한 일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인과 음악가는 그렇게 사람을 살린다.

시인이 영감을 잃어
어딘가에 꼭 맞는 말을 떠올리지 못하게 될 때,
멜로디와 가사, 리듬과 화음들이
도무지 시대와 주변에 맞지 않고 엉뚱한 것들이 될 때,
지금 우리의 말들이 지나왔던 언젠가와 연결될 수 없을 때,
우리는 방황하고 혼돈 속에 살며 어지럽다가
마침내 죽는다.

스치듯 떠올리거나 읽게 된 한 마디 말에,
어디선가 들려온 한 가락 곡조에,
우리는 인생을 다시 살만한 것이라고 느끼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