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의 연보

 

열정, 연민 그리고 끊임없는 갈망


-“제 멋대로의 열정보다도 오히려 오직 약간의 예지를 갖는 것, 그 외에는 불필요하다”(여동생에게 보낸 편지-1890년 2월20일-에서)


-보통사람들을 위해, 보통 사람들을 주제로, 보통 사람의 눈으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했고, 평생 그 서약을 지키면서 해가 떠서 질 때까지 그림만 그리던 사람. 바보 같은 투신.


-어떤 전통이나 규율에도 얽매이지 않던 자유야말로 빈센트의 삶과 예술.


-가난한 사람들과의 공감, 연민. 맨 발로 떠나야 했던 보리나주. 어우러진 삶에 대한 간절한 바램.




시작


1853년 3월 30일 벨기에와의 국경지대인 네덜란드 남쪽 브라반트Brabant지방의 그루트 준데르트Groot-Zundert출생.(고흐 출생 꼭 1년 전 태어났던 형의 죽음, 그리고 똑 같은 이름을 가져야 했던 고호-어머니의 죽은 아들에 대한 아픔과 새로운 아들에 대한 희망의 교차 속에서. 같은 이름과 출생일을 지니고 대리 인생을 살아야 했던 고흐). 사망한 첫 아들 빈센트-빈센트 반 고흐-여동생 안나-남동생 테오-여동생 엘리사벳-여동생 윌헬미나-남동생 코르넬리우스 순으로 총 7남매 중 실질적인 맏이. 부친은 캘빈교의 목사. 3명의 숙부는 모두 화상


1857년 5월 1일 동생 테오 출생


1864년 1863년 3년제 초등학교 졸업 후 부근 도시 틸버그 중학 기숙학교에 입학, 2학년 중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익힘


1869년 7월 16세의 나이로 중학교 중퇴 후 1년 반 정도의 공백기를 거쳐 숙부인 센트Cent 가 일하고 있는 헤이그의 화랑에 취직


1872년 여름 동생과의 편지 시작(빈센트가 동생에게 쓴 편지는 668통이 남아있다.) 당시  동생은 기숙학교에서 학업 중.


1873년 5월 런던 지점으로 승진하여 전근, 동생 테오와의 편지 본격적인 시작. 동생도 브뤼셀 지점 화랑에 취직. 6월 하숙집 주인 딸 외제니Eugenie Loyer에게 청혼,  그리고 거절. 낙담.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이요 아픔이라고 생각하기 시작. 절망과  고립. 12월 크리스마스에 집에 갔을 때 방문 걸어 잠그고 줄담배와 낙서, 그리고 소묘. 여동생 안나와 함께 런던 행. 독서.


1874년 8월 하숙집을 옮김. 누이 동생도 직장 찾아 이동.


1874년 10월-12월 파리로 전근.


1875년 1월 런던 다시 근무.


1875년 1월 20일 밀레 사망. 밀레 사망 후 1월과 6월에 밀레의 소묘와 파스텔화의 경매에서 빈센트는 직접 밀레의 작품들을 접할 기회를 가졌고 이는 충격이었다. “나는 내가  서 있는 곳이 성스러운 땅이기에 신을 벗어야 한다고 느꼈다.(1875년 6월 29일)” 이때부터 빈센트는 밀레 작품의 판화들을 자신의 방에 걸어두고 신앙의 대상처럼 존중하고 밀레를 스승으로 여기기 시작했다.(1875년 7월 6일) 그러나 빈센트는 이미 밀레를 접했었다. “바로 그거다. 밀레의 그림 ‘만종’ 너무나 훌륭하다. 그것은 詩다.(1874년 1월)”


1875년 5월 15일 파리 본점으로 다시 전임. 성경, 하이네, 키츠, 롱펠로우, 엘리오트 등에 심취. 점원 및 손님들과 자주 싸움. 성서 탐독 시작.






소명을 찾아서


1876년 4월 1일 파리지점에서 파면 후 파리를 떠남. 4월 16일 런던 도착. 5월 말까지 영국 남동부의 람스게이트Ramsgate 초등학교에서 숙식만 제공되는 무급교사로 기초  프랑스어, 산수 선생으로 취직. 새로운 희망. 그러나 수업료 징수 등에 주로 종사. 이미 결혼한 외제니 발견. 챨스 디킨즈의 고장에서 가난의 발견. 동시에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 발견. 6월 중순 성직에 관한 문의에 이어 7-12월 존스Thomas Slade Jones 라는 목사를 만나 그가 운영하는 초등학교 선생으로 일함. 존스 목사의 교회에서 설교보조로서 설교하기도 함(특별히 시편 119장 19절에 관하여). 선생이나 목사가 되는 일이 여의치 않음에 따라 12월 성탄 때 네덜란드 귀국 결심.


1877년 1-4월 숙부의 소개로 도르트레히트Dordrecht 라는 도시의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함. 5월 9일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신학교 입학 공부 시작(당시24세). 15개월 동안 숙부의 집에서 기거하며 희랍어, 라틴어, 수학 등을 공부. 숙부의 딸인 코르넬리아 아드리아나Cornelia Adriana, 일명 케이를 만남. 당시 그녀는 고호보다 7살 연상.


      *“신의 말을 씨뿌리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는  밭에서 씨뿌리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루하루는 충분할 정도로 악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지는 수많은 싹을 낳으리라. 우리는 언제까지라도 서로 돕고 살자. 형제애를 추구하며 살자.(1877년 4월 23일. cf:마태 13,2-9. 18-23 마르 4,13-20 루까 8,4-15 요한12,24)”


1877년 6월 12일 첫 번째 소묘. “사막에서의 엘리야 예언자처럼 내면에서 솟구쳐 오르는 무엇”


1878년 7월 암스테르담 대학 신학부 입학시험에 실패하고 신학공부 포기, 전도사 양성 학교에서 전도사가 되기 위한 수련 시작. “그 어떤 어려움도, 근심거리나 장애물도 없는 상태로 자신을 방치해서는 안 돼. 너무 쉽게 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해. 교양 있는  계층에 속해있고 훌륭한 지인들이 많고 또 가장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 해도 로빈슨 크루소 같은 자연인의 본성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어야 해. 그것이 없다면 자신을 지탱해 줄 수 있는 뿌리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영혼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를 수 있도록 해야 해.(1878년 4월 3일)”


1879년 1월 프랑스와의 접경지대에 있는 탄광촌 보리나주Bornage에 월 50프랑 6개월 근무라는 조건으로 전도사직에 임명. 당시 보리나주는 3만 명의 광부, 2천 명의 여성 노동자, 2천 5백 명의 14세 이하 소년 노동자가 있던 곳. 가난의 발견. 동생의 첫 번째 송금 50프랑. 아버지의 생활보조비 중단. 근엄한 성직자라기보다는 온 몸으로 하나가 되고 싶어 했던 빈센트와의 괴리로 결국 7월 전도사직에서 파면. 해임 후 브뤼셀까지 걸어가 복직을 부탁했으나 빈센트의 데생들을 본 목사는 목사보다 화가가 되라고 충고. “예술, 그것은 자연에 인간이 더해진 것. … 자연, 현실, 진실, 거기에서 예술가는 감정과 해석, 개성을 끄집어내고 표현하며, 분출시키고, 뒤섞으며, 해방시키고, 빛나게 한다.(1879년 6월)”


1879년 10월 15일 동생에게 편지 쓴 뒤로 1880년 7월의 긴 편지에 이르기까지 편지 중단(7월의 편지에서 동생 테오가 보낸 최초의 50프랑에 대한 언급과 새장에 갇힌 새와도 같은 자신의 심경 토로). 교회의 허락 없이 계속 탄광촌에서 헌신. 소묘. 독서.


1880년 1월 동생에게 편지로 살아날 길은 화가가 되는 길밖에 없다 함. 8월 전도사 포기하고 화가로서 출발. 렘브란트(1606-1669)와 밀레(1814-1875)의 작품 모사(10월- ‘만종’ ‘삽질하는 남자들’ 등).


1880년 10월 보리나주 떠나 브뤼셀로 감. 데생 독학.




내가 사는 길, 나의 구원인 예술


1881년 4월 중순 독학으로 소묘에 열중하던 브뤼셀을 떠나 아버지 집인 에텐으로 귀향. 유화 최초 제작. 다시 만난 케이에게, 이미 8살 된 아들이 있고 과부가 되어있는 그녀에게 청혼, 그리고 실연. 아버지와의 극심한 불화. “내 마음 안에 끔직한 전쟁이 시작됐다.”고 동생에게 편지. 암스테르담으로 올라간 케이에게 계속 열렬한 편지. 급거 예고 없이 상경하여 “그녀가 나타날 때 까지” 촛불에 손을 넣어 화상을 입게 됨. “거대한 공허함만이 내 안에 남게 되었다.” 손에 입은 화상은 “참 삶(true life)”을 찾는 고흐를 가로 막아선 악마의 장난의 표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놈이라는 자격지심이 시작. “외제니도, Kee도, 아버지도, 친척들도 모두 날 버리고 이제 하느님을 위해 내 몫은 그림만이 남았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께서는 왜 날 버리시는가? 신은 없다.(1882년 5월 14일)” 고호가 미쳤다는 소문.


      12월에 에텐을 떠나 헤이그로 가서 사촌 매형 안톤 모베에게서 그림 공부 시작. 가족과의 결별. 두통과 치통 시작. 동생에게 병원비를 위해 송금 요청. 모베와의 사이에서도 모베가 소개하는 젊은 화가그룹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모베의 그림 가르치는 스타일이 전통적인 그림 연습이라는 점에서 불만. 급기야 석고상을 깨서 던져버리는 사건까지 발생.


1882년 1월 Clasina Maria Hoornik 일명 시엔이라 부르는 3살 위 창녀, 알콜 중독,  성병질환자, 5살 된 아기가 있었고 또 임신 중이었던 여성과 동거. “그 어떤 남자라도 이렇게 했을 것.” 첫 번째 중요한 작품이 되는 시엔을 모델로 한 소묘 “슬픔”. 3월 시엔 아들 출산. 안톤 모베와 결별. “너는 나에게 돈을 줄 수는 있어도 아내와  아이를 줄 수는 없다.”고 테오에게 편지. 시엔과의 동거는 고흐가 뭔가 결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즉 홀로서기의 시작이다. 선생도 지도도 없이 독학과 독습으로 땅을 일구는 농부처럼 그림을 그려 나간다. 적은 돈, 적은 힘일지라도 온통 독서와 그림에 쏟아 붓는다. “끓어오르는 내면의 불길, 어떻게 분출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나는 억지로 그 불길을 다잡고 있다.” 6월 성병 치료차 3주간 입원. “진실에 도달하려면 열심히, 오랫동안 일해야 해. 그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정말 힘들게 얻어내려 하는 필생의 목표인 것이야. 하지만 너무 높은 곳은 바라보지 않겠어. … 그러나 내가 그리는 대상들과 풍경 속에서 우수에 젖은 감상보다는 비극적인 고통을 표현하려 해. 그래서 결국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고 이렇게 말해주었으면 해. ‘이 남자는 뭔가 강렬하게 느끼고 있구나. 매우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야.’   이렇게 거친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내 진심을 생각해서 말이다.(1882년 7월)” “그린다는 것은 영원에 다가서는 것이다. 영혼의 상태를 표현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색채에는 조화와 대립의 비밀이 담겨있다. 어떨 땐 고분고분하게 도와주기도 하고, 또 어떨 땐 혼란에 빠트리기도 한다.(1882년 9-10월)” “이제 왜 화가가 행복해 질 수 없는지, 들어보렴. 화가는 절망과 우울 때문에 숨이 막히고 계속해서 인내심을 소진시켜야 해. 화가에게는 휴식이 허락되지 않으며, 수많은 결점과 실수, 특히 이러한 것들을 이겨낼 수 있을지 확실치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을 써야 해. 그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고 자신의 힘을 새롭게 하여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한 노력이야. 이것만도 어려운데 여기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더해지지.(1882년 11월)” 이 해에 출간된 상시에의 밀레 전기 탐독.


1883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 무력한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해. … 탐구를 계속해 나가다보면 스스로 이런 열정의 흔적과 시행착오를 발견하게 돼. 그것은 사람들이 바라는 평온함과 거리가 멀지. 평온하게 살고 싶다면 이런 삶은 버겁게 느껴질 것이야. 이 탐구는 소화불량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 동요, 불안, 과도한 흥분상태에 빠지게 해. 또 마치 여름 폭풍우를 맞는 것처럼 숨도 막혀.(1883년 2월 8일)” “이렇게 무지렁이처럼 살고 있다.(1883년 7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몇 년 안에 어떤 일이라도 해내야 한다는 것이지. 지나치게 서두를 필요는 없어. 그렇게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야. 조용하고 평탄하게, 규칙적으로. … 내 그림은 어떤 경향에 맞추려고 그린 게 아니라 인간 본연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야. 그러므로 그림만이 내 유일한 목표란다.“  9월 시엔과 별거. 헤이그를 떠나 드렌테Drenthe(북네덜란드의 농촌과 전원)로 이동. 12월 누에넨Nuenen의 아버지 집 귀향. 창고에 아틀리에를 꾸밈. 그림과 독서에 열중. 이는 가족과 다시 볼 수 있는 자존심을 회복한 것.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 동생인 너만이 예외란다.(1883년 10월)” “너만 빼고 모두가 날 버렸다.(1883년 12월)” “나는 개처럼 살기로 했어. 그러니 언제나 한 마리 개로 남을 것이야. 나는 가난할 테고, 그림을 계속 그릴 것이며, 한 사람의 인간, 자연인이 될 것이야. 자연에 등을 돌린 인간, 끊임없이 어떤 지위나 걱정하며 자연에서 멀리 떨어진 인간은-오!-결국 뭐가 희고 뭐가 검은지 분간조차 못하게 될 것이야. 이런 이들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들과 정반대 편에 서 있어.(1883년 말)”


1884년 10세 연상, 곧 41세인 시골 여자 마르호트(Margot Begeman)와 열애. 여자 측 집안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결혼 실패. 여자는 자살 시도.


1885년 3월 26일 아버지 갑작스레 사망(아버지와는 갈등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아무튼 아버지의 사망은 고흐를 도울 사람이 이제는 동생밖에 남지 않았음을 의미. “겨울은 눈 속에 깊이 파묻히고, 가을은 낙엽 속에 파묻히고, 여름은 뜨거운 보리 속에 파묻히고,  봄은 풀 속에 파묻히는 것이야말로 ‘좋은’ 것이야. 여름은 머리 위 하늘과 함께, 겨울은 난로 곁에서, 풀 베는 남자들이나 농가의 처녀들과 함께 있는 것은 정말 ‘좋은’ 것이야.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리라고 느끼는 것은 좋은 것이야.(1885년 6월 중순)” 11월 27일 안트웨르펜Antwerpen로 가서(이는 네덜란드를 영원히 떠나는 것이 된다.) 아틀리에 마련. 루벤스와 만나 대담한 윤곽선과 원색을 사용하는 일본 판화를 처음 접촉하여 매료됨. 가난한 일상.


1884-1885년 누에넨 시기에 적어도 280점 이상의 소묘, 수채화, 유화. 특히 1884년 1-4월 사이에만 180점 이상의 그림(이중 상당수는 잃어버림) 이 시기의 가장 큰 대작은 1885년 4-5월의 “감자먹는 사람들” 고호는 이 작품을 두고 “나는 이 그림을 살았고 호흡했다”고 묘사. “나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다. 따라서 그 그림은 ‘손으로 하는 노동’을 말하고 있고, 그들이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임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우리들 문명화된 인간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법이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따라서 누구나 다 갑자기 이 그림을 좋아해주기 바란다든가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 이 그림이야말로 진정한 농민화라는 것을 인정받게 되리라. … 농민을 소박한 모습 그대로 그리는 편이, 농민에게 진부한 매력을 부여하여 그리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얻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귀부인 같은 사람보다도 농민의 딸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먼지  투성이이고 발기발기 기운 흔적 투성이인 푸른 치마를 입은 농민의 딸이. … 이런 그림은 도시인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리라. … 농민의 생활을 그린다는 것은 진지한 일이다. 예술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진실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그림들 그리고자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 자신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다.(1885년 4월 30일)” “지금 그리고 있는 색은 ‘물론 껍질을 벗기지 않은 더러운 감자색’ 그대로이다. 나는 이를 그리면서 ‘밀레의 농민들은 씨뿌리기를 하고 있는 그곳 흙에서 그려지고 있다’는 말이 정말 옳다고 생각한다.(1885년 5월 초)” 이 시기의 작품 소재들은 감자, 열매, 새 둥지 등과 같은 생명과 자연 질서의 상징들을 그리는 한편 또한 노동자들을 소재로 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한 편으로 조용하고도 차분한 성서와의 삶을 살았기도 한 시기이며, 네덜란드의 삶을 끝마쳐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소용돌이-파리


1886년 1월 안트웨르펜 예술학원 입학. 데생반으로 옮기라는 학원장의 지시로 데생을 하던 중 미로의 비너스를 엉덩이가 큰 시골 여인의 나체를 연상시키는 그림으로 그렸고, 이를 선생이 찢자 “여자에게는 엉덩이와 아이를 키울 자궁이 있다”고 분개. 한 달만에 끝난 학원 생활. 어쩔 수 없이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 (자신의 자화상 그리기는 단순한 자기 모습 묘사가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탐색, 분석 성찰의 통로. 동시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두려움, 고뇌, 자기 과장, 가난, 고립감, 공격성의 복합. 유명한 화가이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지친 모습, 또한 “인간의 진실을 말하는 유일한 수단인 자화상 그리기”). 신경과민과 같은 성격 등장. 2월 28일 급거 테오가 근무하고 있던 파리 행(10년 만에 찾아 온 파리). 테오의 아파트에서 같이 지냄. 밝은 색으로 전환. 6월 코르몽의 아틀리에에 들어감. 여기서 로트렉과 만남. 루브르 박물관 가끔 방문. 르노아르, 모네, 시슬리, 드가, 고갱 등.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 아방가르드. 앙데팡당…빈센트는 그럼에도 바르비종의 전원풍경에 더 매료되고 들라크로아, 밀레, 루소, 디아스, 몬티첼로 등에 더 심취. “인상파 화가들에게서 색을 발견했다는 것은 큰 수확.” 11월 고갱과 처음으로 조우. 연말에 “낡은 구두”


       *(‘이 구두라는 도구의 밖으로 드러난 내부의 어두운 틈으로부터 들일을 하러 나선이의 힘겨운 발걸음이 엿보이고, 이 구두라는 도구의 실팍한 무게 속에는, 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 사이를 거친 바람 속에서 끈질기게 느릿느릿 걸어가는 발걸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구두 가죽 표면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로움이 깃들어 있다. 구두창 밑에는 해 저물 녘 들길의 정적이 깃들어 있다. 이 구두라는 도구 가운데서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이 일렁이고, 또 말없이 대지가 선사하는 무르익은 곡식이 손짓하며, 겨울 들판의 황량한 휴한지 가운데서 대지는 설명할 길 없는 거부의 몸짓을 전한다. 이 구두라는 도구에는 그저 먹고 살기 위한 생활의 걱정, 고난을 다시 극복한 뒤의 말없는 기쁨, 임박한 출산에 따른 초조함 그리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 느끼는 전율이 스며들어있다.’-마르틴 하이데거, 오병남 역, ‘예술 작품의 근원’, 경문사) 


 1887년 2-3월 카페 탕부랭에서 일본 판화전. 색채는 밝아지고 양식도 변화. 봄에 에밀 베르나르와 그림여행. 8-9월 해바라기 그리기 시작(고흐의 상징이자 태양의 상징, 태양과 노란 색에 미쳐버린 화가인 고흐?). 코르몽의 화실, 탕기 영감의 화랑에 출입(이는 자유와 해방?-가난한 사람들에게로 향한 자신의 봉사와 고통이 부족하다고 울던 이가 몇 년 만에 유럽에서 가장 시끄럽고 난잡한 술집에 앉아 신을 저주하는 사람들과 밤새도록 어울리던 시기, 압생트에 취한 시기.) 11-12월 앙크탕, 로트레크, 코닝, 기요맹, 베르나르 등의 그룹전시회.


       *이 해에 피사로, 드가, 쇠라, 시냑, 고갱등과 만나 인상파 영향, 점묘파기법. 빈센트 특유의 짧고 예리한 선이 정열적으로 소용돌이치는 강렬한 터치. 파리 체재 중에  200점이 넘는 초상화 및 자화상, 정물화, 풍경 등을 제작. 그럼에도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가까이 지내던 동생의 초상화는 하나도 없다는 점. 또한 일본 판화의 영향으로 소재보다도 색채나 구도에 치중하여 서민을 위한 그림이 되어가는 과정.




프로방스에 미쳐서


1888년 2월 20일 로트렉의 조언으로 아를 여행, 결국 파리를 떠나 아를의 레스토랑 칼레르에 정착. 아를은 마르세유 옆 동네이자 그가 존경하던 몬티첼리의 집이 있는 곳. 3월 화가들의 공동체 입안. 3월 22일-5월 3일 앙데팡당 전에 출품. 5월 라 마르티느가의 작은 노란 집을 15프랑에 임대 계약. 5월 30일-6월 3일, 6월 10-20일 남부 및 지중해 생트 마리드라메르 해안으로 그림여행. 7월 우체부 조셉 루랭과 친구가 됨. 9월 16일 노란 집 완전 이사. 이 1888년은 ‘밤의 카페’ ‘밤의 카페 테라스’를 비롯 여러 점의 밤 풍경화 제작한 시기. 9월 초상화를 교환하자면서 고갱에게 자기 자화상을 보냄. 이는 고갱이 아를에 오는데 하나의 결정적인 계기(?) 아를에서만 46점의 초상화(6점의 자화상 포함) 제작. “인간이야말로 모든 것의 뿌리이다. 인간의 얼굴이야말로 내 안에 있는 최고의 것, 가장 진지한 것의 표출이 된다.” 8-9월 공허하고 지친 삶,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 9월에 “론강 너머 별이 빛나는 밤”(“죽어서 묻혀버린 화가들은 그 뒷 세대에게 자기 작품으로 말을 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 별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지도 위에 시골과 도시를 가리키는 검은 점에 의해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간단히 꿈을 꾸게 된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점들이 어떻게 프랑스 지도의 검은 점보다도 도달하기 어려운 것일까? 어떤 도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기차를 타야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는 것처럼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에 닿을 수 없다. 증기선이나 합승마차, 철도 등이 지상의 운송수단이라면 콜레라, 담결석, 결핵, 암 등은 천상의 운송수단일지 모른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것은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1888년 7월)” “고갱을 환영하기 위해 해바라기만으로 장식했다.” 역시 같은 달 9월에 제작한  자기의 침실 그림에 의자 두 개와 한 침대에 베개도 나란히 두 개를 놓은 고흐. 10월 23일 고갱이 아를에 도착(고갱은 아를도 또 노란집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에밀 베르나르에게 쓴다. 한편 고갱은 고흐의 그림 작업에 기억과 상상력에 의존하여 불완전한 현실을 수정하는 그림과 마음에 떠오르는 인상을 담도록 훈수.) 11월 “붉은 포도밭” 12월 초에 고갱이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는 고흐”를 제작. 이에 대해 고흐는 “나긴 나지만 약간 미쳐있는 나.” 라고 평. 11월 20일 “고호의 의자” “고갱의 의자” 제작. 12월 고갱과 함께 브라야 소장전 보기 위해 몽펠리에 여행. 그러나 고갱은 빈센트가 자신이 숭배하는 라파엘이나 앵그르, 드가를 높이 평가하지 않고 밀레나 도비니, 그리고 루소를 숭배한다는 것에 의견 차이로 불화. 중순 고갱이 떠나기로 결정. 고갱이 자는 침대 발치에 물끄러미 서있던 고흐, 바에서 술(압생트라는 술) 마시다가 자신의 얼굴에 술을 쏟아버리던 고흐. 급거 바의 사건이 있던 날 고갱은 호텔에서 자겠다고 나감. 훗날 고흐가 고갱을 위협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고갱의 표현대로라면 ‘노려보았다.’ 12월 23일 귀의 일부를 잘라 가비 혹은 라헬이라 불리는 술집 여자에게 전달(첫 번째 발작). 다음 날 아침 피범벅이 된 고흐를 그의 침대에서 발견하여 병원 이송, 고갱은 체포되었다가 즉시 석방 후 파리 행. 다음 날 동생 테오 200km 거리인 파리로부터 급거 도착. 며칠 뒤 고흐에게 남은 건 오직 ‘공책과 스케치, 펜싱 마스크와 장갑들을 보내달라’는 고갱의 메모.




열정, 그리고 또 열정


1889년 1월 7일 퇴원. 2월 7일-17일 ‘음식에 독이 들었다’는 환청, 울기, 식음 전폐 등으로 가정부와 주민들의 신고(‘미친 빨강머리’)에 의해 재입원(두 번째 발작).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토해낼 수 없었던 열정. 4월 17일 동생 테오 네덜란드에서 조안나와 결혼. 5월 8일 노란 집을 폐쇄(1888년 2월 20일부터 1889년 5월 이때까지 1년 두 달 반에 유화 190점을 그렸다.-밀레의 작품들 다수 집중적으로 모사)하고 살레 목사의 도움으로 생 레미에 있는 생 폴 드 모졸 정신병원에 스스로 입원. (5월 8일부터 이듬해 5월 16일까지 꼬박 1년 동안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 빈센트는 정신병원이라는 폐쇄 공간에서 그림을 위한 치열한 내면의 투쟁. 총 28점의 유화를 모사-밀레 20점, 브르통, 도레, 도미에 각 1점, 렘브란트 1점, 들라크루아 3점).


      *“어떤 사람이 베토벤을 연주한다면, 그는 자기 특유의 해석을 가미하리라. 음악의 경우, 특히 가곡의 경우, 작곡가를 해석하는 것은 그것으로 가치 있는 일이고, 반드시 작곡가만이 자기 작품을 연주하는 것은 아니야. 여하튼 나로서는 특히 지금 병들어 있으므로 무엇인가 나 자신에게 위안이 되는 것을 그리고자 하고 있어. 나는 모티브로 삼기 위해, 들라크루아나 밀레의 흑백 작품, 혹은 그들의 흑백 모사 복제를 눈앞에 두고 있어. 그리고 그것들을 즉흥적으로 색채로 그린다. 물론 모든 것이 나의 창작은 아니고, 그들의 유화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작업을 한다. 그러나 기억이란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감정 속에 있는 색채의 막연한 협화음이라고 할 수 있지. 그것이야말로 바로 나의 해석이야.(1889년 9월 19일)”


      7월 아를 방문 후 환청, 환각으로 그림물감을 짜 먹는 등 자살 시도(세 번째 발작). 이후 증세는 9월에 가서야 진정됨. 8월 앙데팡당 전에 “아이리스”와 “별이 빛나는 론 강변의 밤” 출품. 9-10월 “피에타” “라자로의 부활(그리스도를 영원한 태양으로 대치)”등을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고 다시 그림. 싸이프러스(고호의 마음에서 횃불처럼 타오르던 그 열정의 상징이요 죽음의 전조?) 등이 등장. 12월 그림물감, 혹은 등유를 먹으려는 등(네 번째 발작).


1890년 1월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가 잡지에 빈센트에 대한 평론(살아생전에 유일무이한 평론-이에 대해 고흐는 “고맙지만 나는 2류이니 더 이상 쓰지 말아달라.-1890년 4월 29-30일의 편지-”고 응답) 실음. 2월1일 조안나 아기 출산. 1-2월 브뤼셀 레벵 전시회에 6점 출품. 1월 (다섯 번째 발작) 1주일 만에 회복. 2월 22일 (여섯 번째 발작) “지누 부인의 초상”을 들고 아를에 갔다가 발작. 2개월간 지속. 3월 앙데팡당 전에 출품. 브뤼셀 20인 전에 출품 했던 “붉은 포도밭”이 400프랑에 팔림(생애 동안 팔린 유일한 작품). 5월 17일 동생을 만나기 위해 생 레미를 떠나 파리에 도착하여 동생과 조카와 함께 이틀을 지냄.(1888년 2월에 아를로 떠난 뒤 3년 만에 다시 만난 파리.) 이때 탕기, 로트레크, 피사로, 기요맹 등이 테오 집을 방문하여 해후. 5월 21일 오베르를 방문, 의사 가세트와 친교. 6월 8일 제수인 조안나와 아기가 오베르를 방문하여 가세트의 집에서 점심. 이 때 동생은 형편이 나아지면서 전업가능성과 네덜란드 이주 계획이 진행되던 차. 7월 6일(일요일) 파리 방문-며칠 더 동생과 지내려 했으나 당일 저녁 오베르로 귀향. 파리에서는 로트렉 등과 재회. 오베르로 돌아와 “까마귀가 있는 밀밭” “오베르의 교회” 등을 제작. 1890년은 “북프랑스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방대한 연작을  제작한 시기이고, “까마귀가 나는 보리밭” “오베르의 교회” 등 초가집, 초상화, 보리밭 등 80점이 넘는 유화를 제작한 시기.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 내가 나를 죽인다.”       


1890년 7월 27일 취중에 성벽 근처의 밀밭에서 권총 자살 기도. 의사 가세트에게 동생 테오의 연락처를 가르쳐 주지 않던 고흐.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사망. “인생의 고통은 살아있는 그 자체”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8-9월 베르나르의 도움으로 테오의 아파트에서 유작전 개최. 10월 테오 정신병 발작으로 네덜란드 이송


1891년 1월 25일 테오 요독증과 정신병으로 사망. 23년 뒤인 1914년 네덜란드의 우트레히트에서 이장하여 고흐와 오베르에 합장.


1906년 어머니 사망


1909년 가세트 박사 고흐 죽음의 비밀 안고 사망.


1925년 테오 사망 후 재혼하여 미국 이민으로 살던 조안나(1년 반밖에 함께 살지 못했던 남편 테오, 그리고 단 5일밖에 만나지 못했던 형부 빈센트-고흐의 편지를 편집하고 번역하거나 작품들을 관리하고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오늘 날의 고흐가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덕이다.-그녀는 1901년 화가와 재혼하였다.) 사망. 당시는 빈센트의 서간집이 3분의 2정도 영역이 완료되었던 시기였다.


1978년 테오와 조안나의 아들인 빈센트 빌헬름 반 고흐(고호가 그토록 거부했던 고호의 이름을 딴 고흐의 조카) 사망.

Don Mclean 의 빈센트

*이 노래가 빈센트를 두고 부른 노래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또 그 가사가 빈센트의 일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번역되거나
 혹은 이해 될 수 없어서,
 이렇게라도 올려놓고자 하는 것입니다.
 원래는 돈 맥클린의 노래였으나
 여기서는 음질 등을 고려하여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음성으로 올려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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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ry, starry night


    -Don Mclean-




Starry, starry night                                     


별들이 반짝이는 밤.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ay


파란색과 회색으로 칠을 해 가며.




Look out on a summer’s day


With eyes that know the darkness in my soul…


내 마음 한 켠에 어두운 그림자


어느 여름 더운 날, 그 날을 보네.




Shadows on the hills


Sketch the trees and the daffodils


언덕 위의 그림자, 나무와 수선화의 스케치.




Catch the breeze and the winter chills


In colors on the snowy linen land.


산들거리는 미풍, 뺨에 스치는 매서운 겨울바람,


솜이불 같은 눈 덮인 들판.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이제는 알아요. 당신이 말하려고 했던 그것을.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얼마나 괴로웠던 나날이었는지,


또 얼마나 자유롭고 싶었었는지.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았기에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사연들.




Perhaps they’ll listen now.


아마도 이제는 듣고 있겠지요.




Starry, starry night


별들이 반짝이는 밤


Flaming flowers that brightly blaze


Swirling clouds in violet haze


불꽃처럼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꽃들,


보랏빛 아지랑이, 구름의 소용돌이.




Reflect in Vincent’s eyes of china blue


빈센트의 영롱한 초록 눈동자에 어리네.




Colors changing hue


형형색색 가지가지 빛과 색깔들.




Morning fields of amber grain


Weathered faces lined in pain


Are beneath the artist’s loving hand


누렇게 물든 아침들판,


고통으로 주름져간 그의 얼굴.


사랑스러운 그의 손길이 어루만지고.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이제는 알아요. 당신이 말하려 했던 그것을.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얼마나 괴로웠던 나날이었는지,


또 얼마나 자유롭고 싶었었는지.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았기에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사연들.




Perhaps they’ll listen now.


아마도 이제는 듣고 있겠지요.


For they could not love you


But still, your love was true


그 누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어도


당신의 사랑은 진실했었죠.




And when no hope was left inside


On that starry, starry night


You took your life as lovers often do–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되던 바로 그날,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그러듯


그렇게 당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죠.




But I could’ve told you, Vincent::


This world was never meant


For one as beautiful as you.


하지만 빈센트, 당신같이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이런 세상이 도무지 맞지 않았던 것을.




Starry, Starry night


별이 반짝이는 밤.




Portraits hung in empty halls


Frameless heads on nameless walls


텅 빈 홀에 걸려있는 초상화,


이름 없는 벽 위에 액자도 없이 걸려있는 그 모습.




With eyes that watch the world and can’t forget


Like the strangers that you’ve met


그저 세상을 바라보고만 있는


낯선 이방인의 눈길




The ragged men in ragged clothes


The silver thorn, a bloody rose


초라한 모습


핏빛 장미, 은빛 가시.




Lie crushed and broken on the virgin snow.


순백의 눈밭에 뭉게지고 부서지면서.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이제는 알아요. 당신이 말하려 했던 그것을.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얼마나 괴로웠던 나날이었는지,


또 얼마나 자유롭고 싶었었는지.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ening still–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았기에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사연들.




Perhaps they never will.


아마도 영원히 듣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사연.

빈센트 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라야만 했던 이유는?

 *빈센트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종합하여
  빈센트가 자신의 귀를 잘라야만 했던 이유들이나 그 가능성을
  집대성 해 봅니다. 한 2년 쯤 전에 네이버 지식 in 에 집필하였던 내용으로서
  그곳에서도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1888년 12월 23일 밤

반 고호가 자신의 귀를 잘라야만 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날 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일까?



1.사랑하던 여인과의 관계에서?


-너무도 사랑했던 그녀에게 줄 것이 없어 고민하다가


 아침마다 자신에게 아름다운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들려주는


 귀라도 잘라서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좋아하던 그녀가 볼품없이 생긴 고흐의 얼굴 중에서


 그나마 잘 생긴 부분은 귀라고 했기 때문에.


-사랑했던 그녀가 자기를 사랑한다면 귀를 선물해 달라고 했기 때문에.


-투우사가 소와의 싸움에서 이긴 뒤, 그 소의 귀를 잘라


 사랑하는 여인이나 아름다운 여인에게 바치는 풍습을 생각하고


 소가 아닌 자신의 귀를 잘라 그녀에게 주고 싶었기 때문에.


 (고흐의 일생에 고흐와 개인적인 관계로 등장하는 여인은 다섯이다.


 첫째는 영국에서 로이어 부인 집에 하숙하여 살 때 그 부인의 딸이었던


 열아홉 살 바기 외제니 우르술라였다. 당시 고호는 스무 살이었다.


 고흐가 그녀에게 청혼했는데, 이미 숨겨 둔 약혼자가 있다고 응답했던 여자.



 둘째는 1881년-고흐 나이 28세 때- 만났던 큰 아버지 스트리커라는 목사의 딸 케이.


 남편과 사별한 처지에서 고흐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던 여인,


 고흐와 만날 때는 이미 8살된 아들이 있던 그녀,


 끈질긴 구애와 편지들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었고,


 이에 암스텔담으로 찾아갔을 때 목사님을 통해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는 쪽지만으로 응답을 건넸고


 이에 고흐가 석유 램프 속에 자신의 손을 넣으며


 ‘제 손이 이 뜨거움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간만큼 이라도’ 만날 수 있기를 갈망했고,


 또 그녀가 나타나지 않으면 손 뿐 아니라 온 몸을 태워버리겠다고 했음에도


 끝내 화상만을 입고 돌아서야 했던 여인.



 셋째는 매춘부였고 이름은 크리스틴 클라지나 마리아 후르닉,


 고흐는 그녀를 시엔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고흐가 그녀를 만났을 때 이미 3살이나 연상이었고


 다섯 살 난 딸이 있었으며 또 임신 중이기도 했다.


 알콜 중독에 성병을 앓던 여인.


 그럼에도 고호의 모델이 되어주었고, 위로가 되어 주었으며,


 생리적 욕구의 해결사이기도 했던 여인.


 고흐는 두 아기의 엄마이기도 했던 그녀와 한 동안 동거하였다.


 고흐는 그녀에게서 성병을 옮아 한 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생 테오를 비롯한 주변의 압박과 입 하나라도 줄여야 할 현실적인 가난,


 그리고 그녀의 게으르고 문란한 생활,


 돈 문제로 그녀의 동생이 고흐에게 폭행을 가하는 등


 여러 가지가 겹친 복합적인 이유로 끝내는 그녀를 버려야만 했었다.




그리고 넷째 여자는 누에넨에서 만난 이웃 섬유공장 주인의 딸이었던 마호르트.


고흐보다 10살이나 많은 41세의 노처녀였다.


고흐의 집에서나 고호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마호르트의 가족의 반대로


마호르트가 정신 불안을 얻게 되었고 이에 곤란한 입장이 되었던 처지.


결국 그녀가 자살 소동을 부렸고 이에 대한 온갖 비난이 고호에게 쏟아져


비극으로 막을 내려버린 사랑 아닌 사랑.


다섯 째는 술집여자 라셸-라헬이라 발음하는 것이 더 낫다. 사실 같은 이름이다.


이 라헬이라는 이름에 관하여는 마태오 복음 2장 18절의


‘자식 잃고 슬피우는 라헬’이라는 귀절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1888년 12월 23일 밤 11시 30분경


고흐가 ‘조심해서 다루라’ 하면서 귀를 잘라 건네주었던


라마르틴 광장의 술집 여자였고 창녀였다.)



2.잠시 함께 살던 고갱과의 관계에서?


-고갱과 말다툼을 하다가 고갱에게 심한 말을 들었고


 그런 말을 들은 자신의 귀가 저주스럽다고 여겼기에.


-고갱이 다툼 끝에 집을 떠나자 그 고갱을 죽이고 싶도록 미웠는데


 떠나버린 고갱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생각 끝에 자신의 분을 못 이겨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아를이라는 곳에


 여러 화가들을 초대했으나 이에 고갱만이 응답하여 같이 지내게 되었고,


 얼마가 흐른 뒤 고갱과의 다툼 끝에 고갱마저 떠나려 하는 것을 듣고


 자기의 진심을 너무도 몰라준다는 심정을 결국 자해로 표현해 낸 것.


-고갱이 다툼 끝에 자기를 피하고 계속 만나주지 않으니까 화가 나서.


-고갱과 다투었고, 그로 인해 고갱이 떠나겠다고 하자


 또 다시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을 남겨주게 될


 고갱과의 이별이 두려웠고 그 이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고갱과의 다툼 끝에 고갱을 면도칼로 죽이려고 덤볐으나


 이에 실패하고 분함을 참을 길 없어서.


-사실 고흐 자신이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 것이 아니다.


 고갱과의 싸움 끝에 고갱이 옆에 있던 펜싱 검을 들어 자른 것이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고갱이 떠나버린 뒤 자신의 물건을 보내 달라고 했을 때,


 펜싱 검만이 없고 마스크와 장갑이 있었는데 이는 고갱이 자신의 행실을 은폐하기위해


 사고 직후 펜싱 검을 챙겨 떠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3.그림을 그리다가?


-자화상을 그리던 중


 자신의 귀가 잘 안 보이고 그림으로서 잘 포착이 되질 않아서.


-자화상을 그리던 중 귀 부분이 이상하다는 고갱의 지적에


 귀 부분을 계속 고쳐도 잘 되지 않았고, 이에 실제 귀를 잘라 그림과 맞춰 보느라고.



4.병적인 이유로?


-귀 울림증을 오래도록 앓던 중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흐는 알콜 의존증이 있었다.


 압생트(absinthe)라는 독한 술을 즐겨 마셨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고흐는 술에 취해 일시적인 환각 상태에서 귀를 잘랐다.



5.심리적인 이유에서?


-추락을 두려워하는 비행기 조종사가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길 중에 하나가


 그 비행기를 스스로 추락시켜 버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처럼,


 처절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야 말 것 같은 자신의 추락이 두려워


 스스로 자신을 추락시켜 버리기 위해.


-그림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으나 끝내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그림,


 그리고 동생에게 계속 생활비를 받아 연명해가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뭔가 색다른 돌파구를 마련하고픈 결심과 심정의 표출로서.



6.성서적인 근거에서?


-일찌기 목사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고,
  전도사로도 활약했던 고호의 과거를 볼 때


  고흐가 성서를 익히 주지하고 있었음은 자명하다.


  고흐는 비탄과 고독의 게쎄마니 동산에서


  어느 날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무리들 중 하나인 말코스의 귀를


  제자인 베드로가 칼로 내리쳐 잘라 버렸으나


  이를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셨음을 상기했고


  (참조.요한18,10 마태26,52 마르14,47 루까22,51),


  자신의 비참하고 외로운 처지가 예수님과 같다고 여겼고


  이를 구해 주실 분은 진정 예수님뿐이라고 생각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