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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을 조操’

잡을 조

라는 글자는 로 소리가 난다. ‘울 소()’, 또는 떠들썩할 소()’이다. 나무 목() 위에 입 구()가 세 개나 올라앉아있다. 나무 위에 올라앉아 지저귀고 떠들어대는 입, 곧 주둥이들이 여러 개 있으니 나뭇가지 위에 앉아 떠드는 새들이다. 뜻을 나타내는 재방변(= = )을 붙이면 잡을 조가 된다. 떠드는 입들을 움켜잡고 장악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잡을 조라는 글자는 잡다, (손에)쥐다, 부리다, 다루다, 조종하다(操縱), 장악하다(掌握), 다가서다, 닥쳐오다, 단련하다(鍛鍊), 지조(志操), 절조(節操), 절개(節槪節介)의 뜻과 같은 다양함을 표시한다. 여기에 우리가 잘 아는 마음 심이라는 글자 하나를 붙여 흔히 쓰는 조심操心이라는 단어가 된다.

그런데 조심이라는 이 단어는 그렇게 단순한 말이 아니다. 마음을 다잡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의 시작이요 근본이며 궁극이라고 성현들이 일컬어왔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잡지 못하고 놓아버려 잃어버리는 것이 방심放心(놓을 방)’이다. 동서고금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주어져 원래부터 우리 안에 심겨져있는 것으로 모두가 방심하지 않고 잘 간추려야하며 키워내야 하고, 설령 잃었다가도 애써 다시 찾아야하는 의 씨앗은 양심良心이고 본심本心이다. 그렇게 마음 하나를 평생토록 흐트러짐이 없이 잘 구하여 얻었으면 이쪽저쪽이 없는 안심安心이다.

모든 시작은 역시 잡을 조’, 입단속으로부터 이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를 보십시오.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혀도 작은 지체에 지나지 않지만 큰일을 한다고 자랑합니다.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혀도 불입니다.”(야고 3,2-6) “를 다스릴 은총을 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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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6 20:15 2017/07/26 20:15

여덟 팔八(=깨트릴 팔捌)

여덟 팔(=깨트릴 팔)

여덟 팔은 참 오묘한 수이다. ‘여덟 팔은 양손을 앞으로 나란히 하여 엄지를 구부리고 볼 때에 손가락 여덟 개가 보이는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그래서 은 양쪽으로 나누어진 형세이고, 서로 구분해서 등지고 있는 상태를 표시해 '등지다', '분별하다'는 의미를 생성하며 깨트릴 팔과도 같은 글자가 된다.

을 거론하면서 맨 먼저 오묘한이라는 수식어가 생각난 것은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에게 거의 신비한숫자로 다가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아주 비근한 예로서 스파게티 가락을 끓는 물에 삶는 시간이 8분이고, 찬물에서 시작하여 달걀을 반숙으로 삶아내는 시간이 8분이며, 한 주제에 대한 인간의 주의집중 가능 시간이 8분이고, 신체의 균형을 위한 동작의 운동도 어느 부위든 8분이면 가능하며, 한 조직에서 진정한 성공을 위해 체계적이고 총괄적이며, 장기적으로 지속적인 구성원이 되는 이들이 8분의 1(제프리 페퍼Jeffrey Pfeffer 교수의 8분의 1 법칙)이라는 것만 보아도 충분하다. 이처럼 은 사물의 현상과 개인을 넘어 집단에 이르기까지 두루두루 이런저런 인연을 맺는다.

우리나라에 88올림픽이 있었으며, 2018 평창올림픽도 있다. 중국 사람들이 8이라는 수를 행운의 수로 여겨 가장 좋아하고, 예수님께서 8일째 되던 날 성전에서 봉헌되셨으며, 요즘은 영양 과다공급으로 그 리듬이 망가졌을 수도 있지만, 원래 사람은 생후 8개월에 유치乳齒가 나오고, 8세에 그 이를 잃으며, 16(2×8)에 사춘기로 접어든 이후 원기왕성하게 살다가 8×8 64세에 이르러 쇠약해지는 내리막길을 내려간다고 했다. 8은 육의 수이며 영의 수이기도 하고, 물질세계와 비물질세계의 경계와 균형을 이루는 수이며, 8이라는 글자의 어느 한 부분에 들어가 그 숫자를 그리다보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수이기도 하다. 그래서 8이라는 수를 옆으로 누여 로 표기하고 무한대를 가리킨다고 하는 것일까?

팔괘八卦가 있고, 팔선八仙도 있으며, 팔경八景이 있고, 사방팔방의 팔방八方도 있으며, 사주팔자四柱八字 할 때의 팔자八字가 있고, 유럽에서 세례당을 지을 때의 팔각八角이 있으며, 예수님께서 설파하신 진복팔단眞福八端의 팔단八端이 있고, 불교에서 말하는 생로병사生老病死 애별리고愛別離苦의 팔고八苦가 있다. 어디 그뿐인가, 팔정도八正道, 팔달八達, 팔등신八等身, 팔불출八不出, 팔삭동八朔童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인간사가 거의 어떤 형태로든 직·간접으로라도 8이라는 수에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뿐이 아니다. 사유四維, 곧 국가의 기본인 4가지 뼈대 예의염치禮義廉恥에 사덕四德인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더하면, 팔덕八德이 되어 국가의 운영 틀도 되고 인간 사회의 근본 틀이 되면서 유교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이루는 골격에까지 나아간다.

82의 배수로 이해하면 결국 이쪽저쪽의 논리 안에서 무궁무진한 고리들을 거론할 수가 있다. 과연 이렇게 여덟 팔이 세상사요 인간사라면, ‘여덟 팔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이를 그르치면 인간의 도리를 모르는 무뢰한無賴漢이요, 몰염치沒廉恥이며 파렴치破廉恥가 된다. 이를 우스개로 효제충신예의염(孝悌忠信禮義廉)에 일이삼사오육칠(一二三四五六七)’이라고 한다 했다. 이는 곧 무치망팔無恥忘八이다. 원래 앞 구절이 팔덕八德을 가리키는 효제충신예의염치인데, ‘가 없으니 무치無恥’(해석하자면 부끄러움을 모른다이다), 앞 구절에 잇대어 일이삼사오육칠이 아니라, ‘일이삼사오육칠팔인데, ‘이 없으므로 망팔忘八·亡八’(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 도리를 모르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종합하여 무치망팔無恥忘()이 된다. 그래서 왕팔단王八蛋’(중국말로 가장 심한 욕 중 하나라는 왕빠딴)이 되고 만다.

그래서 여덟 팔은 그 앞에서, 영원 앞에 앞으로 나란히를 하고 서있는 인간의 모습을 상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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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5 15:47 2017/04/25 15:47

볼 견/뵈올 현見

볼 견/뵈올 현

이라는 글자는 이나 으로 음이 나는 글자이다. ‘눈 목밑에 사람 인을 붙여 사람의 눈이 하는 일을 나타낸다. 나중에 이쪽으로부터 보는 것을 볼 시’, 저쪽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보이는 것을 볼 견으로 나누어 쓰면서 보다보이다가 갈린다.

눈 목이 들어가 보다라는 새김을 하는 글자들은 참 많다. 앞서 말한 볼 견볼 시말고도, ‘관찰하다할 때의 자세히 보는 볼 관’, ‘간주하다-눈 위 이마에 손을 얹고 멀리 보다할 때의 볼 간’, ‘눈을 똑바로 뜨고 보다할 때의 볼 정’, ‘노려보다할 때의 볼 고’, ‘쳐다보다할 때의 볼 천’, ‘좌고우면으로 알려져 곁눈질하다할 때의 곁눈질할 면’, ‘우러러보다, 바라보다할 때의 (바랄) (=‘쳐다볼 망과 통한다)’ 등등. 한자의 보다가 이렇게 여럿인 것처럼 서양 말에도 다양한 보다가 있다. see(보다), look(일부러 보다), gaze(오랫동안 보다), stare(빤히 보다), behold(바라보다), glare(째려보다, 쌍심지를 켜고 보다), peer(자세히 들여다보다), watch(뭔가 움직이는 것을 보다), view(작품을 감상하듯이 보다), peek(재빨리 훔쳐보다, 엿보다), peep(뚫어진 구멍 같은 것을 통해 몰래 보다) 등등. ‘보다를 묘사하는 말들은 이처럼 인간이 인식하는 가짓수나 사물의 현상,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만큼이나 많다.

눈만 뜨면 가만히 있어도 보이는 세상 것들은 하나같이 나를 좀 보아달라고 아우성을 치듯 내 눈을 잡아끌기에 여념이 없고, 끊임없이 나의 시선을 유혹한다. 이렇게 세상에는 볼 것 천지인데도 사람들은 막상 무엇인가를 마주 보는 데에 두렵다. 그런가 하면 깊게 보지 못한 나머지 신경질적으로 체험해보라 하고 만져보라 하고 느껴보라 하면서 다른 을 강요한다. 그러다가는 보고 싶다 보다 더욱 간절한 것은 침묵이다라는 말을 만들고 그에 취한다.

무엇인가를 유심히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경우(시이불견視而不見/시이불시視而不視)가 있는가 하면, 설령 보았어도 못 본 체하는 경우(시약불견視若不見)도 있다. 감추는 것은 더 잘 드러나고, 숨기는 것은 더 잘 드러난다. ‘막현호은莫見乎隱이다. 어쩌면 갑작스럽게 눈을 떠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도로 눈을 감고, 보지 않고 다녔던 그대로 가야만 제대로 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종종 어둡고 깜깜한 곳에서 안으로 살펴보아야(시호명명視乎冥冥) 한다. 그래야 보인다. 어두운 곳에서 보지 못하면 눈뜬장님이다.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대학大學》 〈정심장正心章, 수신修身)’이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혜안慧眼이며 영안靈眼이다. 그것이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옛사람이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유한준兪漢雋, 17321811, 당대의 수장가였던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이라는 사람의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에 붙인 발문의 부분)’이라 했다. ‘알면 참으로 사랑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본다했다. 알아야 사랑하고, 사랑해야 본다. 그런 의미라면 알아야만 보고 보인다.

요한복음은 와서 보라!”(요한 1,46) 하며 보라는 초대로 시작하고 마침내 “(가서) 보고 믿었다.”(요한 20,8) 하며 믿다라는 말로 끝난다. 성경에서, 특히 요한복음에서 보다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제자 필립보가 보게 해 주십시오하고 청했을 때 너는 믿지 않느냐?” 하고 반문하시며 믿어라하신다.(참조. 요한 1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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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2 20:41 2017/04/02 20:41

천사天使

천사天使

천사는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인간들에게 전하는 하느님의 사자使者이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며, 한편으로는 사람을 지켜주고, 희망을 주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진다. 성경은 천사에 대하여 구약부터 신약까지,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무려 354절을 두고 기술한다.

그런데 천사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수많은 조각가나 화가들이 묘사한 대로 그렇게 생겼을까? 천사는 정말 하얀 은백색의 눈부신 날개를 지녔을까? 남성일까 여성일까? 포동포동한 예쁜 어린이처럼 생겼을까? 아기 천사라면 백인 아이일까? 사랑스럽고 작고 귀여운 햄스터 같은 천사일까? 그렇게 다정다감하고 부드럽고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천사였다면 성경에서는 천사를 만난 이들이 천사를 부둥켜안고 고맙다는 말이라도 전하고, 술이라도 한잔 나누거나 밥이라도 같이 먹으며 다정한 우정을 나누는 장면이 왜 하나도 없는 것일까?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천사는 인간들을 만날 때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을 곧잘 서두에 꺼내는데(참조. 루카 1,13.30),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혹시 천사의 모습이 인간이 상상한 것과는 달리 무척 흉측하거나 무서운 모습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인간이 천사의 모습을 그렇게 황홀한 모습으로만 묘사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천사는 인간을 흔들고 만질 수 있어도 천사는 인간이 만질 수 없는 존재일까?(참조. 1열왕 19.5.7-8)

몹시 궁금하다. 그러나 하느님의 심부름을 하느라고 바쁜 천사는 밤낮으로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일을 하면서 적어도 피곤함에 찌들어 지쳐있는 걸레 같은 모습이고, 땀에 흠뻑 젖어 땀 냄새 펄펄 나는 꾀죄죄한 모습일 것이며, 세상의 온갖 시궁창을 다 다녀야 하는 바람에 엉망진창이 된 더럽고 지저분한 모습일 것이 틀림없다. 편안하고 좋은 자리만이 아니라 오히려 어렵고 힘든 자리에 전달해야 할 하느님의 뜻이 더 많이 있을 것이기에 더 그러할 것이다. 천사의 모습을 이렇게 상상하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지라도, 천사의 본분에 합당한 인간밀착형천사요 생계형천사라면 반드시 그러해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이렇게 알게 된 것이지만 실제 천사의 모습이 그러했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두고 천사를 이제껏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나의 일상 한 자락에 문득 더럽고 지저분하고 꾀죄죄한 깃털 같은 누군가의 흔적이 흘낏 보일 때 그것이 내 곁을 다녀간, 아니 내 곁에 있는 천사의 흔적은 아닐까?

* (이 글은 안드레아 슈바르츠Andrea Schwarz라고 하는 독일 여류 작가의 <‘엘리야와 함께 걷는 40’, 174-179, 바오로딸, 2014>에서 생각을 얻어 부분적으로 윤색, 가필, 재구성하여 나름대로 다시 쓴 글입니다.)

Posted by benji

2017/03/23 13:41 2017/03/23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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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유酉’ 낭설浪說

닭 유낭설浪說
(술병 유, 술 유, 닭 유, 열 번째 지지 유)

라는 글자는 음과 훈을 달 때에 닭 유라 하기도 하고, ‘술병 유술 유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 이 글자가 밑이 좁고 가는 술을 빚는 술 단지의 모양을 본떠 만든 글자이므로 후자가 먼저이다. 그런데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하는 십이간지十二干支의 표시 중에 열 번째인 닭이 에 해당하므로 술 유의 음을 빌어 닭 유라 하게 된 것이다. 이를 두고 후에 가차假借되어 열 번째 지지地支를 나타내게 되었다고 서술한다. 이러한 라는 글자는 닭 유보다는 원래의 의미인 술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훗날 물 수=, 를 더하여 (맥주麥酒, 청주淸酒, 탁주濁酒 같은 비교적 약한 술)’가 되거나 마디 촌를 더하여 진한 술 주(대표적인 예로 불사를 소를 더하여 소주燒酎)’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라는 부수部首의 활용은 술과 관련된 의미나 발효醱酵하여 만든 음식과 관련된 의미로 활용된다.

이렇듯 닭과 술이 전혀 관계가 없으므로 말하기 좋아하고 특히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닭과 술을 묶어 여러 의미를 연관시키려는 시도들을 하곤 한다. 이를테면, 닭이 잠자리에 들어가는 유시酉時(17:00-19:00)에는 반드시 술을 먹어야 한다든가, 유시에는 닭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으니 집에 일찍 일찍 들어가서 먹고 마시지 말아야 한다든가, ‘닭이 물을 넘기듯이 술을 먹어야 한다.’는 뜻이므로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하는 식으로 닭처럼 술을 마셔야 한다든가, 밤새도록 술을 먹다가도 닭이 울 새벽에는 술을 그만 마셔야 한다든가, 술을 아무리 마셨어도 닭이 우는 시간에는 거뜬하게 일어나야 한다든가, 일찍이 글자가 생길 때부터 중국인들은 치느님(치킨+하느님의 합성어 : 맥주와 가장 어울리는 안주는 닭이므로 이는 거의 하느님처럼 숭배해야 한다는)’을 직관으로 알았기에 닭과 술의 상관관계를 이미 간파했었느니 한다든가, 심지어는 영어로 술 종류 중 하나를 이르는 칵테일cocktail(cock + tail 꼬리)을 가지고 말을 붙여 여러 술을 섞은 다음 술을 섞기 위해 저을 때 수탉의 꼬리 깃털로 저었으므로 이를 cocktail이라 하게 되었다든가, 싸움닭을 흥분시키기 위해 빵과 술을 혼합하여 닭에게 먹인 cock-ale(에일 맥주)에서 cocktail이라는 말이 기원하였다든가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말들은 한마디로 전혀 근거 없는 헛소리요 낭설浪說일 뿐이다. 술 마시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술 마시고 하는 주정酒酊일뿐인 것이다.

대략 기원전 천 년쯤 전에 이미 잠언은 술은 빈정꾼, 독주는 소란꾼 그것에 취하는 자 모두 지혜롭지 못하다.”(잠언 20,1)라고 기록하면서 이를 내다보고 있었으니! ㅉㅉㅉ

Posted by benji

2017/03/16 08:46 2017/03/16 08:46

나무 목木

나무 목

나무 목이라는 글자는 나무가 땅 밑에 뿌리를 내리는 한편 대지를 뚫고 솟아오르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이다.

하느님께서는 낮과 밤, 그리고 물과 뭍을 가르신 다음 뭍에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창세 1,11) 하심으로써 땅 위에 맨 먼저 나무를 만드셨다. 그렇게 온갖 것을 지으시고 사람까지 만드신 다음에는 다시 낙원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창세 2,9) 그렇게 인간의 역사와 비극이 나무에서 시작한다. 동산의 나무 이야기는 나무로 만든 구유에서 태어나신 구세주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골고타 산의 십자가 처형 나무로 인간을 구원하시고 다시 한 번 새로운 역사를 지으신다.

나무는 이처럼 모든 것의 시작이다. 나무는 계절로는 봄이고, 인간의 다섯 가지 도리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으로는 이며, 사방四方의 방위로는 동쪽이고, 맹자님의 사단四端으로 보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며, 오륜五倫으로는 부자지간의 도리이고, 오장육부五臟六腑의 간이며, 맛으로는 신맛이고, 하루의 때로 보자면 새벽이다. 인간이 있기도 전부터 이미 있었던 나무는 할 말이 참 많겠지만 아무런 말이 없다.

제주에는 비자림榧子林이 있다. 군락을 형성한 나무들이 백 년씩은 쉽게 넘어, 많게는 천 년을 가까이 살았다는 왕나무들이 있다. 인간이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오랜 세월을 몸으로 살아낸 나무들은 존경스럽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베어진 나무의 그루터기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나무들은 나이테로 시간이 파도친 흔적들을 담아 아름답고 독특한 결을 만든다고 했지만, 몇 백 년을 족히 살았다는 나무의 나이테는 쉽게 보이지도 않고 헤아려지지도 않는다. 천 개의 나이테를 새기다가, 오래고 오랜 세월을 살다가, 나이테가 뭉그러지고 말았던 것일까? 땅 위의 나무가 천 년이라면 그 뿌리는 또 과연 몇 년이나 되는 것일까? 비로소 세월이라는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을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으깨지는 아픔 앞에서 사람들은 저절로 겸손해진다. 그 겸손은 혼자서 긴 세월을 살아냈다는 올곧음이어서가 아니라 순환으로, 섭리로, 생태로 그렇게 주변과 어우러질 수 있었던 까닭 때문일 것이다. 나무들은 속이 텅 빈 채 거죽만 남다시피 한 상태로도 여전히 살아간다. 사람들이 오래도록 속을 썩다보면 마음이 넓어지듯이 나무도 속이 썩다가 그렇게 속이 넓어지는 것일까?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숙명에 초연함일까?

천 년을 사는 동물은 없어도 천 년을 사는 나무는 있다. 오래 사는 나무들은 고급 가구가 되어 귀한 자리를 차지하는 비자 나무만이 아니다. 마을의 어르신 놀이터와 어린이들의 고향 추억이 되는 느티나무, 노란 가을 잎으로 우리들의 가을 낭만을 만들어 주면서도 오래 오래 살아 화석이 되기까지 고약한 냄새마저 아우르며 자신을 지켜내는 은행나무, 귀찮은 벌레들이 꼬이면서도 누구나의 자동차 안에 일정 기간 동승하는 향기의 열매를 지닌 모과나무,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임을 뽐내면서 껍질이 붉은 빛을 띠고 속살도 유달리 붉어 주목朱木이라는 이름을 자랑하는 주목, 왠지 옆에만 있어도 내 몸에 그 향이 벨 것 같고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향나무 연필이 되어 친구가 되어주는 기분 좋은 향나무, 한 그루에 백양나무와 버드나무, 느릅나무 등 세 종류의 나뭇잎이 달리기도 한다는 살아 천 년 죽어 서서 천 년 죽어 누워 천 년 도합 삼천년이라는, 주목보다 한 술 더 뜬 호양나무, ‘변하기 쉬운 사랑이라는 나무답지 않는 얄궂은 꽃말을 지닌 조록나무이처럼 나이 많은 나무들에는 사람이 담겨있다.

인생백년人生百年, 송수천년松壽千年, 학수만년鶴壽萬年’, 이것이 나무 심는 사람들의 마음이라 했다. 기껏 백년인 인생이 천년 가는 소나무를 심어 만년 사는 학을 불러들이는 마음이라 했다. 나는 나의 인생에 무엇을 심었고 무엇을 불러들이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 섭리가 없다면 과연 또 그 무엇이라도 심을 수 있는 것이기나 할까? 심기는 고사하고 심겨있던 것마저 파헤쳐 놓았던 것은 아닐까? 말 없는 나무 앞에서는 나도 말이 없어진다.

Posted by benji

2017/02/24 11:29 2017/02/24 11:29

잠(3)

(3)

인생이 일장춘몽一場春夢이고, 미처 밥 한 솥 다 끓여내지 못한 한단지몽邯鄲之夢이며, 한낱 나비의 꿈인지 꿈의 나비인지 모를 호접지몽胡蝶之夢일지라도, 일상이 눈물 젖은 탄식의 침상일지라도, 불면의 베개를 베고 누웠다 하더라도, 잠은 자야만 한다. 오늘도 자야하고 내일도 자야하며 관절의 마디들이 풀어질 때까지, 아니 그 너머까지 자야한다. 이 세상이 사업의 장소가 되어 시끄럽고 소란한 경제 성장의 소음 때문에 자는 법을 잃어가는 것이니 한 번이라도 인류가 숨을 돌리는 것을 본다면 기쁨일 것이라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의 말처럼 낮밤을 혼돈混沌 속에 몰아넣고 만 이 세상은 제대로 자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고대 의학이 빛과 공기 음료와 음식 운동과 휴식 잠과 깸 배설과 제거 영혼의 성향(감정과 욕망)이라는 6가지 조절시스템이 인간의 본성에 맞게 배열되어야 한다고 했으니, 고대 사람들도 알았던 그 상식대로 현대 사람들은 더 늦기 전에 잠과 깸을 조절해야 한다. “광야의 까마귀와 같아지고 폐허의 부엉이처럼 되었으며, 잠 못 이루어 지붕 위의 외로운 새처럼 된”(시편 102,7-8) 이들이 자야한다. 잠의 깊은 뜻을 깨우치며 제대로 자야 한다.

Posted by benji

2017/02/06 19:31 2017/02/06 19:31

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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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적어도 3분의 1은 자는 것이어서인지 배우자를 얻기 위해 하느님 앞에서 쏟아지는 깊은 잠이 들어야 했던 구약의 아담 이야기(참조. 창세 2,20-25)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유달리 자고 깸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예수께서는 다급하게, 여러 번,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깨어있으라 하셨다. 처절한 십자가 고통을 목전에 두고서 괴로워하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제발 좀 깨어 있어달라고,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느냐, 아직도 자고 있느냐 하고 거듭 채근하셨다. 그러나 스승의 최측근이었던 그들마저 잤다.(참조. 마태 26,36-46 ; 공관복음의 병행구) 그런가 하면 그 제자들이 훗날을 살아가기 위해 내내 추억과 기억의 원천, 희망의 샘이 되었던 주님의 영광을 흘깃 보게 된 타볼 산의 체험도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의 잠 속에서였다.(참조. 루카 9,32)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의 처절한 고통과 찬란한 영광을 잠 속에서 겪었다. 하늘 나라의 비밀을 캐묻던 지식인 니코데모에게도 만물이 잠자는 시간이 스승을 만나고 온갖 것과 우정을 나누며 자신을 낮추는 기회였다.(참조. 요한 3,1-21 : 니코데모와 예수의 만남) 그럼에도 잠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완덕을 추구하는 수도 생활의 거룩한 전례와 일상의 틈새에 잠입하여 제자들이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1)하는 스승의 말을 감히 흉내 내면서 틈만 나면 늦잠을 자게하고, 또한 자비로우신 하느님 앞에 있는 것 자체가 명상이요 묵상이라는 변명을 하게 한다. 그래서 잠은 너 게으름뱅이야, 언제까지 누워만 있으려느냐? 언제나 잠에서 깨어나려느냐? ‘조금만 더 자자. 조금만 더 눈을 붙이자. 손을 놓고 조금만 더 누워 있자!’ 하면 가난이 부랑자처럼, 빈곤이 무장한 군사처럼 너에게 들이닥친다.”(잠언 6,9-11) 하는 말씀대로 게으름이요 가난이다.

성 암브로시오(St. Ambrosius 340?~397)당신이야말로 만물을 내신 천주님, 밝은 빛으로 낮을 입히고, 포근한 잠으로 밤을 입히며, 하늘을 다스리시는 님, 늘어진 팔다리 쉬게 하사, 일할 힘 도로주시고, 지친 맘 일으키시니, 시름 찬 고달픔 풀어주시니.”라 잠으로 하느님을 노래했고,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relius Augustinus 354~430)깨었다가 잠이 들고, 잠이 들었다가 깨는 동안 나와 나 사이는 얼마나 엉뚱한 것이옵니까? 그런 때 나의 이성은 어디 있사옵니까? 생시에 이런 유혹을 물리치고, 그 현실 자체가 꾀이더라도 끄떡 않는 그 이성이? 두 눈과 함께 감겨집니까? 육체 감관과 함께 잠을 자는 것입니까?나의 소망을 잠재워주던 사랑 겨운 노래의 기억과 습성영혼이란 일찍부터 사랑을 위하여 생겨난 것. 기쁨에서 잠을 깨어 행동할 그 때부터 저 좋아하는 일체의 사물에로 움직여 가느니라.하며 불순한 자신의 가슴 치는 심경을 고백록에서 잠에 비유하여 기록하였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용서하는 일에 눈뜨지 못한 사람은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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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6 19:22 2017/02/06 19:22

잠(1)

(1)

사람은 누구나 대개 인생의 3분의 1 동안 잠잔다. 사람은 맨 처음에 잠으로 인생을 배우고 적응하느라 긴 시간 동안을 자고,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시시때때로 틈만 나면 자고 싶어 하며, 인생의 종장에 가서는 혼수상태로 자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하다가, 마침내 영원한 잠(영면永眠-길 영, 잠잘 면)에 들어간다. 하루만 놓고 보더라도 사람은 지나온 시간과 세상의 냄새를 뿜어내느라 씩씩거리고 코를 골면서 반드시 자야 한다. 어쩌면 인간은 너무나 약한 존재여서, 단 하루도 못 견디는 나약한 존재여서, 그렇게 뇌의 어리석음, ()의 분노, 허파()의 탐욕이라는 3을 잠으로 해독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물주는 인간의 오장육부五臟六腑를 쉬게 하시느라 낮을 빛으로 밤을 잠으로 섭리하셨는지 모른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잠잘 때에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셨고, 그분의 나라가 그렇게 사람들이 잘 때에 와 있었던 것이며, 인간이 잠들었을 때에 당신은 쉬지 않고 창조를 계속하시느라 아직까지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며 노심초사하시는지 모른다. 노인들이 잠이 없어진다고 말해도 잠의 총량에 있어서는 젊은 사람들과 대동소이하다. 잠자는 시간에 어쩔 수 없이 밤과 낮을 거꾸로 살아야만 하는 안타까운 인생을 사는 이들이 많고, 대개 밤이 될 때 무리지어 잠자리에 들며, 네가 서 있으면 나도 서 있고 네가 잠들면 나는 네 문 앞에서 잠들리라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잠자리에 든다 하더라도, 결국 잠은 혼자서만 자야 한다.

사람이 낯 동안에 눈물을 흘리고 마음이 몹시 무겁다가도 밤에 잠이 그를 사로잡는다면 그것은 참을 수 없는 불행이다. 아울러 눈을 떠서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내가 왜 눈을 떠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불행 중 불행이다. 잠은 일단 눈꺼풀로 감싸면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약이다. 잠은 눈꺼풀로 오기에 잠의 휘장인 눈꺼풀은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가장 무거운 무게이다. 잠은 인간만 자는 것이 아니다. 밤낮 눈을 뜨고 있다는 물고기도 자고, 겨울잠을 자는 동물뿐만이 아니라 모든 동물이 반드시 자야 하며, 식물도 밤에는 자야 하고 나아가 모든 잎을 떨구어 최대한 활동을 줄여 4四季 중 겨울 한 철을 자야만 한다. 만물이 잠잔다.

만물에게 잠은 욕망이다. 잠은 환상·망상·공상·상상幻妄空想이다. 잠은 먹고 마시는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잠잘 생각을 놓지 못하는 쾌락이다. 잠은 쉼이다. 그래도 잠은 천사를 만나 계시를 듣고, 우주의 영감을 얻으며, 나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을 구체화하는 때와 장소이다. 잠은 망각 연습이고 죽음의 연습이다. 동양이건 서양이건 혼수昏睡(어두울 혼, 잘 수), lethargy’라는 말의 뜻이 경이에 대한 응시이고, ‘망각과 잠을 가져오는 병이며, 또한 짙은 잊음이듯이 그것이 잠이다. 잠은 자야 하는 것이다. 잠들지 않은 새벽별의 소명이 되어 새벽 수탉처럼 운다고 해도 자칫하면 이웃의 잠을 깨우는 소란이 되듯 잠과 소음은 상극이다. 잠은 결코 보지 말아야 할 신랑 에로스의 얼굴을 보지 않는 신뢰이고, 동시에 의심이며 불행의 시작이다. 잠은 도둑들에게는 음모이며 기회이다. 큐피드의 화살이 떨어진 곳에서 돋아난 사랑에 취한 야생 비올라라고 부르는 화초의 꽃 즙을 잠자는 남자나 여자의 눈꺼풀에 떨어뜨리면, 잠을 깨는 순간 눈에 띄는 최초의 창조물을 미친 듯이 사랑하게 된다는 낭만처럼 잠은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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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6 19:17 2017/02/06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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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다

걷는다

거의 매일, 인근에 있는 보라매 공원을 중심으로 여기저기를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 동안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공원에는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걷는다.

사람들의 걸음을 보고 또 내 걸음을 보며 걷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가사의 첫 구절 때문에라도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네…』하던 백년설(白年雪 : 본명 이창민 1914~1980)씨의 오래된 노래 '나그네 설움'이 절로 떠오른다. 작사가로 알려진 고려성(高麗星 : 본명 조경환 1910~1956)씨와 함께 왜놈 경찰들의 모진 밤샘 취조 후에 광화문 거리를 바라보며 잃어버린 조국의 설움을 담아 담뱃갑에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거워를 적어 내려갔고, 이 슬픔을 후에 노래하게 되었다는 애절하고 숭고한 사연과는 거리가 멀게, 오늘 나는 일차적으로 건강을 염려해서, 나름대로 자기 관리를 위해서 걷는다.

걸음은 내가 식물이 아닌 동물이기에, 움직일 수 있기에 걷는다. 걸음은 동물을 두고 긴다라고 하니 내가 사람이기에 걷는다. 걸음은 내가 섬마섬마하며 맨 먼저 배운 몸동작이기에 걷는다. 걸음은 어느 날 약해져 누구의 도움을 받든 기구의 도움을 받든, 기어이 내가 혼자 힘으로만 가능한 것이기에 걷는다. 걸음은 이리도 저리도 내가 내 마음 먹은 대로 갈 수 있기에 걷는다. 그래도 걸음은 늘 내가 뜻한 대로만 가지지는 않는다는 안타까움이기에 걷는다. 걸음은 내가 결국 언젠가 가고야 말 고향이 있는 나그네요 순례자이기에 걷는다. 걸음은 내가 언젠가 한 걸음을 내딛어야만 하는 결단이기에 걷는다. 걸음은 나도 걷고 너도 걷는 이웃의 행렬이기에 내가 이웃의 하나가 되어 함께 걷는다. 걸음은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내가 새 길을 따르는 이들”(사도 9,2)이고 싶기에 걷는다. 걸음은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궁극으로 나를 향해 마주 오는 것들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이기에 걷는다. 걸음은 누구에게나 사는 날까지 간절한 희망이기에 걷는다.

도대체 언제까지, 몇 걸음이나 걸어야 인생은 다 걸어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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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6 10:51 2017/01/26 10:51

'지지' 타령


지지타령

어린 아기들이 뭔가 더럽거나 지저분한 것을 만지려고 할 때 그런 아기들을 향해 어른들이 지지야 지지!’ 한다. 이럴 때 쓰는 한자말의 글자는 아마도 그칠 지일까 싶다. ‘안 돼!’ 라든가, ‘멈춰!’라는 뜻일 것이니 말이다. ‘금지禁止폐지廢止니 할 때에도 이 글자가 들어간다. ‘그칠 지는 가만히 왼쪽 발을 내려다보면 금방 이해가 된다. 발목 아래 부분의 발의 모양을 본떠 만들어진 글자로서 , 멎다, 멈추다, 그치다, 머무르다, 억제하다등의 뜻을 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자 둘을 겹쳐 지지止止라고 하면 거기 그대로 멈추다’, 나아가 머무를 곳에 머무르다라는 뜻이 된다. 사람은 제가 머물러야 할 곳을 알아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을 때 품위를 유지한다. 언젠가 떠나야 할 이승의 삶이요 인생살이를 다시 돌아보게 하고, 인생의 매듭마다 내가 있을 자리를 돌아보게 하는,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하는 문구가 단지 공공 화장실의(여자 화장실에는 가보지 않았으니 알 길이 없으니), 적어도 남자들의 화장실 표어로만 정착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칠 지앞에 알 지를 붙여 지지知止라고 하면 의미는 조금 더 깊어지고 분명해진다. ‘멈출 것을 알다라는 뜻이 되어 자신의 분수에 지나치지 않게 그칠 줄을 아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지지止止하고 지지知止해야 한다. 머무를 곳에 머물러야 하고, 언제 그만 둘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까칠이 아니고 깔끔이요 정갈이다. 질척거리면 지저분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살고 싶다고 살지만, 사람이 자기 머무를 곳이나 분수를 안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경지境智의 경지境地이다. 어쩌면 인생은 죽을 때까지 이를 모르거나 가늠하려고 애쓰다가 끝나는지도 모른다. 봄날 제비가 지지배배시끄럽게 울어대는 것처럼, 라디오의 주파수가 맞지 않아 지지직거리는 것처럼, 그렇게 나도 나만의 지지止止지지知止를 노래하다 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공자님께서 제자 자로子路에게 지지위지지 부지위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안다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아는 것)-논어 위정爲政이라 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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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8 09:34 2016/12/28 09:34

선물膳物

선물膳物

연말이다. 선물과 기부의 계절이다. 영어로 선물이나 기부를 뜻하는 단어들은 대개 presentgift(애정이나 우정을 표시하기 위해 주는 것), donation(거저 주는 것), 그리고 bonus(규정 외에 덤으로 주는 것) 등이 있다. 이 중에 요즈음 같은 계절에 가장 많이 쓰는 donation이라는 어휘는 라틴어 ‘donare(주다)’에서 온다. 이를 우스개 소리로 우리 말 돈 내시오’, ‘더 내시오’, ‘다 내시오에서 왔다며 기부를 종용하는 경우들도 있지만, 원래는 라틴어 ‘donum(선물)’과 연관되어 있다. 흔히 쓰는 ‘pardon(par=모조리)’donation의 어근이 붙어 있어서 모조리 주다아낌없이 주다를 거쳐 용서하다라는 말에 가 닿는다. 원래 이는 인간의 어휘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모든 것을 다 내놓으시고 모든 것을 다 주셨으니 인생 그 자체가 선물인 것이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그처럼 서로 하느님과 같은 행위를 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라틴어로 은 자기 자신을 나눠주고 선물하는 것Bonum est diffusivum sui.’이라고 정의한다.

한자말에서 선물膳物’(뜻을 나타내는 육달월=, 와 음을 나타내는 선이 합하여 이루어짐)이란 낱말도 깊은 뜻이 있다. 이 말에서 선물의 을 이루는 착할 선을 추적해보면 동물 자와 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아 양처럼 순하고 온순하며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을 나타내어 착하다를 뜻한다고 본다. 또한 옛날 재판에는 양 비슷한 신성한 짐승을 썼으므로 신에게 맹세盟誓하고 한 재판이라고 하는 뜻을 담아 나중에 훌륭한 말훌륭함좋다의 뜻이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라는 글자와 사이에 풀 초를 모양 그대로 다리가 달려있는 풀밭 위의 제단으로 본다면 제단 위에 양을 올려놓고 하느님께 아뢰는 것을 쉽게 연상해 볼 수 있다. 하느님께 제물을 드려 기도하는 행위 말고 인간에게 선하고 좋은 일이 또 있을 수 없다. 아니면 이라는 글자의 가운데 가로지른 가로 획을 입술로, 두 점을 이(치아)로 보아 양고기를 입 안 가득 넣어주는 상형으로 보기도 한다. 옛날에는 소를 잡을 수 없어서 양고기가 잡아먹을 수 있는 가장 맛있는 고기였다고 볼 때에 양고기를 입에 넣어주는 것은 참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그 양을 인간에게 주신 분도 결국 하느님이시므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입에 고기를 먹여주신 것이 된다. 그것이 선이다. 이런 글자를 담고 있는 선물의 역시 고기 육에서 비롯된 육달월을 붙여 선물 선’, 혹은 반찬 선이 된다.  

서양 말이 되었건, 동양 말이 되었건 선물이나 기부하느님담고 있고, 또한 닮고 있다. 그래서 복음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3-4) 하면서 그 행위에 있어 겸손을 강조한다. 감히 하느님의 행위를 하는데 겸손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아울러 누군가에게 내가 선물하기 전에 반드시 하느님께로부터 내가 받은 선물과 은총에 대한 깊은 감사를 전제로 해야만 한다고 한다. 그런 의미로 선물의 영역에는 선행과 애덕, 좋은 일을 한다는 의식마저도 없어야 한다. 선물의 기본을 이루는 내 자신의 일부나 재화 자체가 지닌 이라는 속성 때문에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물이나 기부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자칫 를 강요하는 폭력일 수 있다. 누군가가 선물을 주면서 이 선물을 "반드시" 이러저러하게 사용해야만 한다고 강조할 때에 이는 이미 선물이 아니다. 어줍지 않게 잘못 하느님 흉내를 내는 그 누구이고 무엇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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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9 12:07 2016/12/19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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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십十, 세상 세世

열 십十,  세상 세世

가로 그은 한 획에 세로로 한 획을 더하면 열 ‘십十’이 된다. ‘열 십十’은 공손하게 절할 때처럼 두 손을 포갠 모양이기도 하고, 길게 된 줄에 한 매듭을 짓고 그 매듭이 가로로 커져서 생긴 모양이기도 하다. ‘열 십’은 십진법에서 더 나아갈 수 없는 완성의 숫자이다. 십년공부十年工夫, 십년지계十年之計, 십시일반十匙一飯, 십중팔구十中八九 등의 쉬운 한자성어 몇 개만 보아도 ‘십’의 존재감은 금방 짐작이 가능하다. 물론 성경의 십계명十誡命도 있고 십자가十字架가 있다. 그런가하면 후한後漢) 영제靈帝(재위 168~189년) 때의 내시들 사조직으로서 전횡을 일삼다가 결국 국가를 무너지게 하고 삼국지의 시대를 초래하고 말았던 ‘십상시十常侍’도 있다.

‘열 십’이 세 개 모여서 만들어진 글자가 ‘세상 세世’이다. 완성의 숫자 ‘열’이 세 개나 모였으니 그 의미는 자못 심장深藏하다. 하늘과 땅과 사람을 아우르는 ‘석 삼三’이 모두 들어있어서 세상을 이룬다.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대世代’ 또한 30년 쯤으로 구분이 된다. 아버지가 30의 두 배인 육십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비로소 준비기 30년과 실행기 30년을 살아 회갑回甲 인생으로 한 순배를 마치고, 그때쯤 아버지 다음 세대인 자손은 30이 되어 자신의 다음 세대이자 아버지에게는 차차세대次次世代가 되는 손주를 아버님 품에 안겨드림으로써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곧 부자손父子孫의 삼대三代가 완성된다. 예수님도 그래서 지상 생활을 30년 쯤 하신 뒤에 비로소 공생활公生活 30년을 3년으로 압축해서 사셨던 것일까?

공자님 말씀대로 회갑인 ‘이순耳順’을 넘어서면 준비기 30과 실행기 30년을 살아 비로소 ‘인생면허기’로서 마음 가는 대로 어디나 갈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70세의 ‘종심從心’, 80세의 ‘산수傘壽’를 거쳐 인생졸업장을 얘기할 수 있는 ‘졸수卒壽’에 이른다. ‘졸수’는 30의 3배수인 90이다. 공자도 당시 70이면 이미 장수측에 들었을 시기이고 70은 넘었으나 80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80 이후를 언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뒷사람들이 ‘산수’의 산傘이나 ‘졸수’의 졸卒 모두 여덟 팔八(산傘의 약어는 여덟 팔八 밑에 열 십十을 더하여 이루어진다) 밑에, 그리고 ‘아홉 구九’(졸卒의 약어는 아홉 구九 밑에 열 십十을 더하여 이루어진다) 밑에 ‘열 십十’을 받쳐서 불렀으니, 맨 처음으로 돌아가 ‘열 십十’이 다시금 그 무게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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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7 13:15 2016/11/27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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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言語

언어言語

    
언어言語말씀 언말씀 어이다. ‘한 글자만 있으면 말이고, ‘라는 글자가 붙으면 나와 상대방이 주고받는 말이 된다.  ‘말씀 언은 구조를 따질 때 매울 신이라는 글자에 입 구가 붙어 있다. ‘매울 신이 창이나 꼬챙이의 형상이고 보면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상대방에게 곧장 날아가거나 날카롭게 가서 꽂히는 것이 말이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조심해야 하는 것이 내 입에서 누군가에게로 나가는 말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언행일치言行一致를 강조하며 삼가 말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이라는 것은 입으로 하는 말(verbal)과 함께 몸짓·손짓·표정·상징으로 하는 말(non verbal)이 있다는 것을 부쩍 실감하게 되는 것이 요즈음이다.

여기 미국이라는 타국에서 참 괴이한 현실 하나를 목격한다. 이곳 주변에는 미국인 배우자를 만나 함께 살아가는, 소위 국제결혼을 해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제법 많다. 그분들을 보면서 맨 먼저 든 생각 중에 하나는 저렇게 부부로서 외국인을 만나 사는 사람들은, 특별히 미국인 남편을 만나 살아가는 한국인 부인들은, 고국을 떠나 남편 따라 여기 미국에까지 와서 살게 되었으니 영어를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잘 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나이 먹어 이곳에 살게 되므로 영어를 잘 못한다는 내 주제 파악이 밑바탕에 깔린 부러움의 대상으로서 그분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분들의 영어가 나보다 그리 썩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 심지어는 그렇게 영어가 유창하지도 않다는 생각마저 많이 든다. 그래서 하게 된 생각이 바로 사랑은 언어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짧지만 적어도 나의 관찰에 의하여 거의 확신을 가지고 단언컨대, 언어는 사랑에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요소가 분명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사랑에는  입으로 하는 말보다 비언어체계의 소통이 우선한다고 하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일까?

그렇다면, 어줍지 않은 생각일지라도 생각한대로 소박하게 진실하게 말하고, 말하는 대로 사는 몸짓을 보이는 것이 외국생활이고, 또 사랑인 것일까?

하기야 하느님께서도 예언자들을 통하여 수천 년을 두고 말씀하셨어도 얘기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신 나머지, 오죽했으면 직접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과 사는쪽을 택하셔야 했을 것인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 오셔서 말씀하실 때도, 조기 유학을 하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니 모국을 떠나 낯선 땅에서 외국어를 말씀하시듯 무척 어려우셨을 것이다. 그래서 매우, 아주 매-우 답답하셨을 것이다. 나이 육십이 되도록 내게 말씀하시고 계시지만 아직도 모든 것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나를 대하실 때는 정말 또 얼마나 속이 타실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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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7 11:00 2016/08/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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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표징, 프란치스코!

아름다운 표징, 프란치스코!


아름다운 표징, 프란치스코!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사악하고 절개가 없는 세대여서, 그런가 하면 하느님을 떠보고 시험하기 위해서, 그리고 불안에 떨면서 수상한 시절을 어찌할 바 몰라 두리번거리면서 하늘에 표징을 구한다. 이러한 인간들과 세대의 칭얼댐 앞에 하늘은 갓난아기의 표징밖에 없을 것이라 하고, 또한 큰 물고기 뱃속에 사흘 밤낮을 보낸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 한다. 하늘은 이적(異蹟)이 아닌 표징은 믿음으로만 보아지고 드러난다고 응답한다. 사람들은 표징을 보았다고 하면서도 표징을 보지 못하고, 결국 그것이 빵을 배불리 먹었던 결과임을 알아채지 못하는 우둔함 속에서 그날그날을 산다.

우리는 2014년 대한민국 뜨거운 여름 한 복판에서 아름다운 표징을 목격했다. 바로 가톨릭교회의 교종이신 프란치스코라는 표징이었다.

그분은 무엇보다도 ‘보편성’의 표징이었다. 불과 17만의 가톨릭 신자들을 초청해놓은 자리에 설마 100만이 모일까 싶었었는데, 과연 정말 100만이 모이는 것을 보았다. 그분께서 얘기하는 평화라는 가치는 가톨릭교회만의 것이 아니고 인류의 보편가치이며, 동서고금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통하는 인간의 가치였다는 것이 그렇게 드러났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진실한 눈빛과 몸짓이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평화라는 것이 단순하게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매일의 삶속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라는 것, 그 정의는 자기 목소리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만큼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의 척도로 측정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참을성 있는 대화만이 유일한 방책이라는 것, 이러한 것들이 모여 낳는 ‘보편성’, 그래서 과연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가치로서의 ‘가톨릭(catholic=보편적이라는 뜻을 지닌 낱말)’이어야 한다는 표징이었다.

그분은 또한 ‘가난’의 표징이었다. 인간이라는 것이 원래 존재론적으로 가난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분은 구체적으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눈길이 먼저 가는 그런 분이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먼저 교회가 가난하기를 역설하는 교회의 가난이었다. 기도해준답시고 사람들에게서 세금 걷듯이 헌금을 걷는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걸림돌일 뿐이라 했다. 다른 이들의 아픔과 상처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살을 파먹고 사는 사악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시며, 바야흐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소식보다 주식시장의 주가(株價)가 중요 뉴스가 되어버린 무관심의 세계화 앞에서 가난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가난이었고, 그런 세상에서 교회는 길거리에 세워진 야전병원이 되어서 상처받고 멍들고 부서진 사람들을 치유하는 치료소가 되어야 한다는 가난이었다. 그런 의미로 광화문 네거리 100만 명의 미사는 감히 길거리 미사의 원형이었고 우리가 본 가장 큰 기도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분의 가난이 부자들을 배척하고 단죄하는 가난은 아니었다. 상식 없는 부자들의 무지몽매함을 위해, 그러한 형제들의 가난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가난이었다. 그렇게 기도로 세상에 참여하는 기도의 가난이었다.

그분은 동시에 ‘공감’의 표징이었다. 그분을 처음 보았을 때 사람들은 모두 그분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 어떤 메시지를 남기시는가 하며 그분의 ‘입’에 주목했다. 그러다가 며칠이 가면서 사람들은 그분께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그분께서 다녀가신 뒤 뭐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보다는 남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갔다. 그분께서 만나는 사람들의 의미를 생각해갔다. 그분께서는 해결사가 아니었다. 아프고 어려우며 불쌍한 사람들,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서러운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과 함께 조용히 마음으로부터 눈빛을 교환하는 일이 전부였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많은 해결들의 본질이요 힘임을 알게 해주는 진정한 공감의 표징이었다.

보편성, 가난, 그리고 공감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한다. 우리를 다시 한 번 살게 한다.(2014년 8월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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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9 13:05 2014/08/19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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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세월호!

아, 세월호!


이럴 수는 없다 싶었다. 말도 안 된다 싶었다. 죽지 않을 수 있는 축복을 얻었음에도 늙어가지 않는 축복을 함께 청하지 못해, 오는 세월 속에 하염없이 늙어만 가는 잔인함을 언제까지고 살아야 하는, 그래서 시인의 말 그대로 ‘잔인한 4월’이었다. 아니다. 젊음을 유지하지 않아도 좋고, 어디 한 구석이 망가져도 좋으며, 속절없이 늙어만 갈지라도 살아만 있으면 된다는 바램 속에 거친 바다를 언제까지나 바라다보아야만 하는, 그래서 우리의 4월은 더더욱 잔인하였다. 봄바람이 스산하여 왠지 모르게 불안 불안한 채로 그렇게 가까스로 4월을 절반 갓 넘겼을 때, 그렇게 우리의 잔인한 4월은 몰아쳤다.

그날 아침, 10시 17분 아이의 마지막 말은 ‘기다리래!’ 라는 순진한 네 글자였다. 그렇게 아이들의 마지막 기다림을 어른들은 여지없이, 무참하게, 그리고 너무나도 잔인하게 무찔러버렸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순진함 앞에서 돈 되는 일이면 그 무엇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물질만능주의, 그 누구도 상관없이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 인간은 경험으로 생명의 영역을 확장해가는 동물이어서 수도 없이 많은 경험 속에 이제는 배웠을 법도 한데 그때그때 차곡차곡 교훈을 얻지 못하고 막연한 방관으로 지나쳐버렸던 임기응변과 무지몽매(無知蒙昧)함, 나 하나가 뭘 어떻게 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으니 동조하거나 포기하며 쌓아간, 그래서 우리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거대한 힘의 횡포요 사회적구조악이라는 올가미, 이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난장을 피웠다.

그리고 그 난장판에 오늘까지도 우리의 눈과 귀를 붙잡아두고 있는 언론도 너무했다. 아무리 언론이 근본적인 근원을 파헤치기보다 생태적으로 선정적이어야만 하고, 갈등의 양상과 과정을 강조하는 경향을 지녔으며, 해결이나 조정에 나서기보다 갈등을 조장하고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고는 하지만 언론도 줏대 없는 춤을 여지껏 계속 추어대고 있다.

아만다 리플리라는 신문기자가 그랬다. 눈앞에 다가온 엄청난 재앙 앞에 선 인간은 맨 먼저 ‘거부(denial)’ 한다고. 물에 잠겨 숨이 막히고 손가락 마디들이 부러지는 고통 속에서 우리 아이들도 거부하였을 것이고, 지금 남아있는 우리들도 결코 이건 우리들에게 닥친 위험이 아니라고 거부하고 부정(否定)하고 있다. 그러다가 인간은 또 찬찬히 생각하게 되는 ‘숙고(deliberation)’의 과정을 거친다 했다. 애들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타고 있는 배가 뒤집힌 것임을 생각했을 것이고, 이 상황에서 내가 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공포 속에 있으면서 소리를 질러대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눈이 짓무르게 바다만 바라보면서 남아 있는 우리도 울다가 웃다가, 소리를 지르다가 또 머리를 떨구고 땅만 쳐다보다가, 어찌해야 살아남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기자는 계속하여 마침내 인간은 ‘결정적 순간(decisive moment)’을 맞이한다고 했다. 우리 애들도 자신의 한계를 넘어가는 거대함 앞에서 공황 상태가 되거나 마비가 와서 꼼짝도 못하다가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맞았거나 아니면 버둥거리며 그 상황을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또 쓰다가, 그렇게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애들은 그렇게 죽어감으로 결정적인 상황을 맞이했지만, 죄 많은 우리는 살아남아, 물밖에 있어서, 오늘도 하늘에 떠 있는 해의 밝은 빛 아래에서 ‘그 다음’의 결정적인 순간을 맞는다. 우리도 뭔가를 결정해야 한다. 기자는 그 결정적 순간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오로지 그 결정을 몸에 배이게 하는 평상시의 훈련과 사회적 차원의 ‘교육’뿐이라고 했다.

우리도 남은 ‘세월’을 눈물만 흘리다가 말라비틀어져 애들처럼 죽어버릴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렇게 2014년 4월이 되어졌어야만 했던 원인 찾기, 나 아닌 너의 탓이었다고 변명하며 결국은 자신을 찔러대고 말, 탓하기를 넘어야 한다. 살아남은 비겁자요 방관자라는 죄책감 속에서, 정말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며, 그나마 몇 명이라도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구해진 자들로 대변되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그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이, 그나마 이 모든 일들의 증인으로 살아남아 주어 고맙다며 사과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앞으로는 우리들이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말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어야만 한다. 말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말하겠다고, 한 번만 더 믿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죽어간 이들이 짧은 세월 동안 이 땅에 남긴 삶의 흔적을 그들의 이름으로 계속 이어가야만 한다.(2014년 5월 청소년의 달 어버이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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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9 14:42 2014/05/0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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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론(將帥論)

장수론(將帥論)


현대 사회 안에서 ‘리더십’이나 ‘지도자의 자질론’을 이야기하려고 할 때에 이를 옛날 버전으로 이야기 해 본다면 ‘장수론’ 쯤에 해당이 될 것 같다. 그렇게 ‘장수’라고 할 때엔 무엇보다도 도원결의(桃園結義)에서 형제애를 맺음으로 시작되는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삼국의 혼란기에 수많은 장수들이 등장하여 싸움을 벌이게 되는 단초가 되는 장면에 서 있는 늠름한 사나이들의 의기투합이 멋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 세 의형제의 이미지가 선뜻 덕(德)·지(智)·용(勇)을 상기시키는 때문이다. 물론 세 의형제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배반함이 없이 그 의리를 서로 지켰다는 점에서는 모두 아름다운 인간 사회의 본(本)의 하나를 표상하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유비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다른 두 형제를 아우르는 덕스러운 자요, 관우는 문무가 겸비된 균형으로 이쪽저쪽을 가늠할 수 있는 슬기로운 자이며, 장비는 용맹과 기개로 불같은 추진력을 갖춘 자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소 억지를 더하여 감히 유비를 덕장(德將)의 표상, 관우를 지장(智將)의 표상, 장비를 용장(勇將)의 표상이라고 가정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소위 ‘장수론(將帥論)’은 시작할 명분을 일단 갖춘다.

현대 사회 안에서는 애초에 장수도 아닌 사람이 세월이 가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장수의 위치에 가 있어 소위 리더십을 발휘해야만 하는 운명적 상황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런 이들은 자기가 장수가 아니니 원만한 처세를 통해서 유용한 리더십을 갖춘 장수들을 기용해야만 하는 것인데, 그때에도 이하의 소위 ‘장수론’은 유용한 도구일 수 있다.

1. 덕장(德將) : 덕장의 자질은 성덕과 거룩함이다. 덕장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변을 편안하게 해 준다. 범접할 수 없는 권위와 위엄, 그리고 소박함으로 말 없는 중에도 주변을 압도한다. 배운 자나 못 배운 자, 남자가 되었건 여자가 되었건, 나이가 많던 적던, 마음이 모질지 못하여 자상한 배려로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다.

2. 지장(智將) : 지장의 자질은 전략과 기획력이다. 곧잘 성질이 더러우나 세속적으로는 성공한 사람에 해당이 되기도 한다. 자수성가(自手成家)의 표본일 경우가 많고 어떤 분야가 되었든 소위 ‘일가(一家)’를 이루어낸 사람들이겠고 사회를 발전시킨 사람들에 해당이 된다. 오늘날 사회의 많은 CEO 들은 덕이 출중한 사람들이라기보다 지략이 뛰어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3. 용장(勇將) : 용장의 자질은 기개와 의리이다. 설령 장렬한 전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공중분해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명분을 위해서는 끝까지 가야하는 사람들이다. 어떨 때는 결과적으로 실리를 취하지 못하면서 제 풀에 겨워 개죽음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기도 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에는 장수가 아니면서도 어찌어찌하다가 장수의 위치에 가 있는 사람, 결코 넘보아서도 안 되고 넘볼 이유가 없는 사람이면서도 장수의 위치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 그리고 자의가 되었든 타의가 되었든 이미 장수가 되어 자신의 소명을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장수가 아니면서도 장수의 위치에 가 있는 사람들의 운명은 답답하다. 자기가 그러한 자리에 가서는 안 될 사람이면서도 이미 여러 사람을 희생 시키는 자리에 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쩌다가 나이 들면 자연스럽게 가게 되는 ‘뽀대’나는 자리에 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개 지장이나 덕장으로 가장(假裝)하는 경우가 많다.

지장이 아니면서도 지장을 흉내 내는 사람들은 쥐뿔도 아는 것이 없고 알 수도 없는 자질을 갖추었으면서도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었기에 그때그때 의사결정을 해 주어야만 하는데,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괜히 부하를 향해 목에 핏대를 세우거나 목을 뻣뻣하게 세워 개폼을 잡는 무게로 장수인 척 하기 때문에 괜히 가까이 하기가 어렵다. 이들은 흔히 소위 사회의 성공한 사람들이 으레 지장이고 카리스마적인 사람임을 눈치로 짐작해서 알고 나서는, 그에 상응하는 외형적인 모습을 흉내 내는 것으로 소일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우매한 조직의 하부 구성원들은 ‘저 정도 자리에 가 있으니 이미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는 사람’임을 무의식중에라도 인정하고 감히 들이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또한 상례이다. 흔히 지장이 아니면서 지장을 흉내 내는 사람들은 줏대가 세다는 것으로 포장한 고집을 내세운다. 옹고집이고 똥고집이다. 그리고 재치 있는 농담과 익살, 해학인척 뽐내다가 ‘사오정’이 되기가 일쑤이거나 아니면 상대방의 기분을 아랑곳하지 않아서 상대방의 기분을 잡쳐놓고 마는 경우도 많다.

덕장이 아니면서도 덕장을 흉내 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저 일단 처세술에 능한 경우가 이에 해당하는데, 누구에게나 호탕하게 웃기를 좋아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가진 듯이 비쳐지며, 말이 잘 통하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아랫사람들과 회식 자리가 즐거운 사람들인데, 즐거워서 즐거운 것이 아니고 술을 마신다는 것과 무의식중에라도 ‘내가 거느리는 사람들’과 함께 해서 즐거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처세술은 보통으로 3개월, 적어도 6개월이 되지 않아 들통이 나고 만다. 아랫사람들이 말은 하지 않지만, 그가 가짜인 것을 은근히 알아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본인만이 처세를 잘 하고 있는 듯이 착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도자의 자질은 얄팍한 처세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용장이 아니면서 용장임을 흉내 내는 것은 가관(可觀)이다. 지장이 아니면서 지장인척 하는 경우나 덕장이 아니면서 덕장인척 하는 것은 그래도 겉으로 요란스럽지는 않은 경우가 많은데, 용장이 아니면서 용장을 흉내 내는 경우엔 떠들썩하고 입가에 게거품이 생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진짜 용기가 자신감과 긍지 내지는 자존감에서 비롯하는 것임에 비해 가짜 용기는 허황한 허세이고 뻥이며 뒤집어보면 교활하고 간사한 비겁함일 때가 많다. 이런 이들은 거칠거나 과장된 몸짓으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내뿜지만, 누군가가 막상 들이대면 내공이 가득한 든든함으로 저력을 과시하기보다는 가만히 꽁무니를 빼고 만다. 대부분 쉬운 말로 ‘아니면 말고!’라는 냉소나 ‘무조건 반대!’라는 치기(稚氣)로 자신의 용기 아닌 용기를 부려대기도 한다.

실제 장수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민과 고뇌는 보통으로 덕·지·용, 3가지를 한 몸에 고루 갖추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 않은 길, 곧 자기가 지니지 못한 자질을 넘보거나 그리워하는 것이다. 덕장은 지장의 현명함이나 용장의 화끈함을 그리워하고, 지장은 덕장의 원만함이나 용장의 배포를 그리워하며, 또 용장은 덕장의 형님스러움과 지장의 명민함을 그리워한다. 어설프게 장수가 되었다가 이쪽저쪽을 넘보거나 따라 해 보다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우로 남아 결국엔 실패한 장수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허다한 것이 사실이다. 일단 장수가 되었으면 장수로서의 나의 자질이 어느 쪽이고 어디까지가 내가 해 낼 수 있는 몫인지를 가늠해야 하고 어느 정도 쯤에서 만족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이것 또한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 것을 올바로 지적해 줄 수 있는 참모들이라도 곁에 둘 수 있는 장수는 참으로 행복하다. 자기가 장수가 아님을 올바로 직면하면서 장수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요령이라도 발휘하다보면, 그러한 과정 속에서 어느새 장수가 아니었던 자신을 스스로 장수로 만들어가는 체험을 하면서 장수가 되어가는 사람들도 있다.(2014년 4월 말, 쓰다가 다 쓰지 못하고 계속 써 나가고 있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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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2 15:41 2014/05/0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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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돌 두 개의 이야기

푸른 돌 두 개의 이야기



주먹 크기만 한 돌멩이 두 개가 있었다. 여느 돌멩이들 같았지만 나름 아주 다른 돌멩이들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 돌멩이들은 좌판과도 같은 커다란 수십 개의 판에 나뉘어 깔려있었던 크고 작은 수많은 다른 돌멩이들과 함께 어느 판 위에 놓여있었는데, 그 두 개의 돌멩이들은 단연 돋보이는 존재들이었다. 이는 그 돌멩이들이 가진 빛깔 때문이었다. 그들은 실로 말로 형언하기 힘들만큼 오묘한 푸른빛을 내는 돌멩이들이었다. 그들도 나름대로 자기들만이 내는 빛의 신비함을 알고 있었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눈만 뜨면 그저 다른 돌멩이들을 바라보면서 으스대기에 충분한, 또 그럴만한 그런 돌멩이들이었다. 두 돌멩이들은 서로 ‘분명 우리는 하늘의 자녀들이기에 하늘의 빛깔을 띠고 있는 게 틀림없어!’ 하는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끝도 없는 하늘의 이야기를 끝도 없는 상상 속에 그려보고, 그에 관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 주요 일과였다. 행여 다른 돌멩이들이 그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옆으로 다가올라치면, ‘어느 정도 거리를 좀 두시는 게 좋지 않을까? 우리는 여러분들과는 약간 다른 푸른 피를 가진 종족이니 말이야.’라고 말하면서 은근한 뻐김을 즐기는 것도 그들의 일상이었다.

어느 날 그들의 대화 주제가 장차 무엇이 되어 어떤 미래를 살게 될 것인가에 이르게 되었을 때였다. ‘분명 우리는 다른 여러 색깔과 찬란한 빛을 띠는 돌들과 함께 정교하게 다듬어져 지상의 모든 것들이 우러러보며 머리를 조아리게 되는 임금님의 왕관을 장식하게 되거나, 아니면 가장 찬란한 금으로 우리 몸을 둘러 치장하고 마침내 귀한 귀부인의 손가락에 끼워져 사랑받는 약속의 징표인 반지가 되거나 그와 같은 목걸이가 되어 있을 거야!’라는 것이 그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행복을 꿈꾸던 시간이 가고 있던 어느 날, 마침내 누군가가 커다란 상자에 여러 돌들과 함께 그 두 개의 푸른 돌들을 담았다. 푸른 두 개의 돌들은 다른 돌들과 함께 한 상자에 뒤엉키는 것이 못내 못마땅하였지만, 그저 잠시일 뿐이니 견딜만할 것이라고 자위하며 마침내 자기들이 꿈꾸던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끈끈한 접착제와 같은 시멘트 범벅이 된 어떤 손이 그 두 개의 돌들을 각각 집어 들더니 함께 쏠려왔던 수많은 돌들 사이에 처박아놓고 마는 것이었다. 어떻게 달리 손쓸 겨를도 없이 꼼짝없이 벽에 못 박히듯 그렇게 벽에 고정되어 버린 돌들은 순간의 놀라움에 놀랄 새도 없이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속절없이 가고 세월이 자기 길을 갔다. 두 돌멩이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처절한 상황의 날들이었다. 화가 치밀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무슨 수를 쓰든 그 상황을 피해 도망을 가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굳어버린 시멘트의 강도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두 돌들은 도망쳐 살 길을 찾아보자고 용기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고 또 노력했다.

어느 순간 그들 주변을 타고 내리던 미세한 한 줄기 물줄기에 말을 걸고 친해지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물줄기에게 벽과 자기들 사이를 흘러가 달라고 부탁을 하였고 그렇게 해서 그 지긋지긋한 벽채를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애원하였다. 그렇게 또 얼마간의 세월과 시간이 지나간 뒤에 두 돌멩이들은 어느 날엔가 스스로 조금씩 움직여질 수 있게 되는 것을 느꼈다. 안간힘을 쓰면서 두 돌멩이들이 여전히 탈출을 꿈꾸던 길고 긴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다. ‘뚝!’하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두 돌멩이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바닥에 떨어져 부딪히는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그저 ‘드디어 우리는 자유다!’라는 외침과 함께 자신들을 가두어두었던 벽을 치켜 올려다 보았다. 마침 둥근 보름달이 커다란 창문을 통해 벽을 비추고 있었다. 그 벽에는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이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온 벽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 모자이크가 수많은 형형색색의 다른 돌들과 함께 그려내고 있던 작품은 바로 온 세상의 창조주, 우주의 섭리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이었다. 그런데 푸른 돌들이 바라다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던 찬란한 모자이크가 어딘지 좀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모자이크가 그려내고 있는 예수님이 마치 눈이 먼 소경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왜 그렇지?’하며 되새겨보는 순간 푸른 돌들은 ‘아차!’ 싶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는 것도 순간 감지하였다. 영롱한 빛을 내던 두 돌멩이들 자신들이 바로 그 예수님의 두 눈동자였던 것이다.

수많은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 두 눈동자에 자기들의 눈을 맞추려고 시도했을 것이며 그 눈을 보고 꿈과 희망, 그리고 감사를 담아 기도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순간 두 돌멩이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릴 뿐이었다. 후회와 통회의 그 눈물 때문인지 어느 순간 두 돌멩이의 몸이 서서히 조각나고 부서지고 있었다. 그렇게 날이 밝았을 때 성당을 청소하는 이가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더니 온갖 먼지와 잡동사니들과 함께 부서진 두 돌멩이들도 쓰레받기에 쓸어 담아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다.(2013년11월6일 ‘살레시오 가족지’ 이태리어판 2013년 9월호 맨 마지막 쪽을 읽고 생각을 얻어 반은 번역하고 반은 나름대로 창작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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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6 15:35 2013/11/06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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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왕관

성모님의 왕관



옛날에 소년 하나가 자기의 미래를 만나러 길을 떠났다. 외로운 길이었고 어두운 숲을 가로질러 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온 하늘을 덮어버리기라도 하듯이 거대하고도 삐죽삐죽 기괴한 비늘로 덮여있는 모습의 괴물 하나가 소년 앞에 나타났다. 머리에 금으로 된 왕관을 쓴 용들의 우두머리였다. 흉악한 입을 쩍 벌리고 섰는데, 악취를 풍기며 불을 내뿜고 있었다. 용이 소리를 질렀다. ‘이 녀석, 잘 만났다. 내가 오늘은 너를 먹어 치워야 하겠다.’ 소년은 몹시 놀라며 간청하였다. ‘용들의 왕이시여! 잠깐만 저의 마지막 말이라도 한 마디 남길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소서. 저 하늘의 태양과 바람과 땅에게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자 용이 ‘좋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나 네가 그 말들을 마치면 내가 너를 먹어치우리라.’하며 그를 허락하였다. 소년은 하늘의 태양에게는 그 용을 불살라버리시라고, 바람에게는 그 용을 멀리 날려버리시라고, 그리고 땅에게는 그 용을 깊숙이 묻어버리시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소년의 간절한 청원에도 불구하고 해와 바람과 땅은 감히 용을 대적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소년은 엉엉 눈물을 흘리며 다시 한 번 용에게 ‘제가 죽기 전에 아주 잠깐만이라도 집에 돌아가 저의 어머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해주시라.’고 애원하였다. 이에 용은 화를 내며 ‘좋아. 그렇지만 서둘러라. 내 배가 슬슬 고파지거든.’하고 소년의 그 마지막 청을 들어주었다. 이에 소년은 고향으로 돌아가 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엄습해오는 두려움으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머니 역시 금방 아들의 걱정을 알아차렸다. ‘어머니,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네요. 머리에 금관을 쓴 용이 제가 가던 길을 가로막고서 저를 먹어치우겠다.’고 합니다. 제가 태양에게도, 바람에게도, 그리고 땅에게도 애원해보았지만 그 누구도 저를 구해주지는 못했습니다. 간신히 용이 저에게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전하고 돌아오라 하였습니다. 기어이 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용이 이곳에 쫓아와 우리 모든 식구들까지도 먹어치우고 말 것입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울면서 아들을 꼭 껴안은 채 ‘그렇다면 이 어미가 너와 함께 같이 가겠다.’ 하셨다.

아들과 함께 용 앞에 마주 선 어머니는 두려움도 없이 용감하게 ‘경애하올 용들의 왕이시여! 어찌하여 저희를 가로막고 서서 저희를 그렇게 대하시는 것입니까? 당신께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이 어린 소년을 어찌 먹어치우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부디 이 아이가 자기 길로 나아가 자기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왕들의 왕이시고 용들의 왕이신 분께서는 부디 젊은이의 앞길을 가로막지 말아주십시오. 이 아이가 당신께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임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태양도, 바람도, 그리고 땅마저도 당신을 거역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부디 이 젊은이가 자기 길을 가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태양이 이 젊은이를 따뜻하게 비춰주게 하시고, 바람에게는 이 젊은이의 이마에 솟은 땀을 가시게 하여주시며, 땅은 이 젊은이를 보호하게 하소서. 정 누군가를 먹어치우고자 하신다면 이 젊은이 대신에 저를 먹어치우십시오. 부디 제 아들 대신에 저를 먹어치우시고 얘는 제 길을 따라 가던 길을 계속 가도록 하여주십시오.’

용은 놀랐다. ‘내 귀가 그와 같은 말을 일찍이 들어본 바 없고 내 눈이 일찍이 이와 같은 일을 본 적이 없다. 오늘 내가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위대함을 배우게 되었구나.’하며, 용은 잠시 멈춰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랑은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에 용은 감동하여 자기 왕관을 벗어 그 어머니에게 내어주며 ‘너에게 이 왕관을 선물로 줄 것이니 너와 아들을 서로 묶어놓은 그 사랑을 증거 하도록 하여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도움이신 마리아’께서 머리에 왕관을 쓰시게 되었던 것이다.(2013년 5월호 이태리어판 ‘살레시오 가족지’ 마지막 페이지, 2013년5월25일)

Posted by benji

2013/05/27 05:52 2013/05/27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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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피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피자

토비아가 오라토리오에서 돌아오는 중에 피자 가게 앞 쇼 윈도우에서 멈춰 섰다. 그 앞에 멈추어 서서 토비아는 집에 영 돌아가기가 싫었다. 이미 지난 이틀 동안 집안의 식탁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빠는 화가 나서 마치 식탁 위의 가재도구들을 몽땅 부숴버리기라도 할 듯이 화가 나 있었고, 엄마는 엄마대로 충혈 된 눈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5살 박이 여동생 루치아 역시 겁먹은 눈동자를 이리 저리 굴리면서 엄마와 아빠 이쪽저쪽을 훔쳐보고만 있었다. 토비아만이 뭐라 중얼거리듯이 이리저리 말을 건넸지만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피자 가게 앞을 지나면서 가게 앞에 멈추어 서서 각각의 피자의 내용들을 선전하는 문구들을 읽어보고 있는 참이었다. 첫 번째로 눈에 띄는 피자는 ‘조화 調和 harmony’라고 부르는 피자였다. 토비아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카운터 넘어 늙수그레한 할아버지 주인장께서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안녕!”하고 인사를 해왔다. 토비아는 “저기 저 ‘조화’라고 하는 피자 한 판을 패밀리 사이즈로 오늘 저녁에 예약하고 싶어요.”라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토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알았다는 듯이 “좋아, 피자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밀가루와 몇 가지 기본적인 것들만 내가 준비할게. 넌 집에 돌아가서 제일 좋은 그릇을 준비해가지고 네가 생각할 때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고 여겨지는 것들만을 구해 오거라. 그 다음에 내가 맛있고 멋진 피자를 만들어주지.” 그렇게 할아버지와 몇 마디 말을 더 나눈 토비아는 달려서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가 보니 쏜살같이 집에 돌아온 토비아가 곧장 부엌으로 가서는 엄마가 아끼는 하늘 색 플라스틱 양동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토비아는 양동이에 코를 박고 뭐가 묻지나 않았는지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엄마에게 “엄마, 엄마. 여기 제가 들고 있는 양동이에 뽀뽀 한 번만 해 주실래요?” 다소 의아스러웠던 엄마는 별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양동이에 그냥 뽀뽀를 한 번 해 주었다. 그러자 토비아는 그 양동이를 들고 다시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그때부터 토비아는 자기가 구할 수 있는 온갖 좋은 것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밭에서 깨끗하고 신성한 노동의 결실인 채소를 구했고, 고운 숲속의 맑은 샘물을 구했으며, 해가 지는 하늘에서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붉은 노을의 빛깔을 구했고, 할머니로부터는 진실한 기도를 구했으며, 물론 할머니로부터 사랑스럽게 쓰다듬어주시는 손길도 구했고, 동생 루치아로부터는 예쁘고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그림자를 구했으며, 금붕어의 몸짓을 구했고, 사랑스러운 강아지의 재롱도 담았으며, 약간 피곤하지만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로 가끔 “좋아, 좋아!”하시는 아빠의 기분 좋은 한 마디도 담았다. 그렇게 숨이 차도록 좋은 것만을 담아 가득 채운, 이상하게 무거운 양동이를 들고 토비아는 피자 가게로 돌아왔다.

이 모든 재료들을 꼼꼼이 살펴보신 피자가게 주인장 할아버지께서는 “참 잘했다. 어디서 이 좋은 것들을 다 구했지? 그렇지만 꼭 필요한 한 가지가 빠졌구나.” 하셨다. “그게 뭔데요?” 하고 토비아가 묻자 “무척 단순한 것이지. 그건 바로 너의 멋진 미소 하나야.” 그 말을 들은 토비아는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자기가 떠온 고운 샘물을 바라보며 멋진 미소를 지었다. 그 모든 것들을 구하느라 숨 가쁘게 뛰어다녔던 순간들을 모두 한 순간에 담아내는 아주 멋진 뿌듯함의 미소였다. 주인장 할아버지께서는 모든 재료들을 당신이 준비한 도우 반죽 위에 부었다. 그리고는 반죽을 시작했는데, 정성스럽게 주무르고 홍두깨로 밀고 쳐대는 수십 수백 번의 동작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마침내 피자를 굽는 화덕에 넣었다. 아주 아주 맛있는 피자 익는 냄새가 순식간에 온 가게 안을 채웠다.

이렇게 피자를 완성한 토비아는 사람들이 길을 비켜주어야 할 만큼 큰 피자 박스에 피자를 담아 들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들어서면서, “엄마, 엄마. 식구들 저녁은 아무 것도 준비하실 필요가 없어요. 제가 피자를 준비해 왔거든요.”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만…” 뭔가 말을 하려던 엄마는 이윽고 맛있고 근사한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채우는 피자 박스를 보았다. 박스를 열고 피자를 보던 루치아는 손뼉을 치며 “와, 굉장한 피자네!”하고 연발 감탄을 해댔다. 뭔가 불만이 아직 가시지 않은 아빠도 식탁에 앉았다. 그러나 맛있는 냄새와 모양을 갖춘 피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이내 얼굴이 풀어지면서 미소를 머금었다. 이렇게 냄새가 훌륭하고 좋은 피자라면 맛은 더욱 더 훌륭하고 좋은 피자임에 틀림없다고 루치아가 가끔 말하던 그대로였다.

온 가족이 그렇게 웃고 떠들며 언제 다 먹었나 싶게 큰 피자를 다 해치우며 저녁을 마쳐갈 때였다. 아빠의 손이 자연스럽게 엄마의 어깨 위에 올라갔다. 그리고는 토비아와 루치아에게 “너희들, 이렇게 예쁜 엄마를 어디 다른 데서 본 적이 있니?” 하셨다. 토비아에게 다시없는 행복한 저녁이었다.

바로 오늘 저녁 식구들을 위해 하늘 색 빛깔을 띤 양동이를 들고 나서야겠다.(2013년 2월14일, '살레시오 가족' 지 이태리어 판 2013년 1월호 마지막 페이지)

Posted by benji

2013/02/14 12:29 2013/02/14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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