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未安

‘나무 목木’이라는 글자가 땅 밑에 세 가닥으로 뻗어나간 뿌리 모양과 땅 위로 솟아오른 줄기나 가지의 모양이라는 것쯤은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도 안다. 그 ‘나무 목木’의 땅 위로 솟아오른 줄기에 어린 가지 하나를 걸쳐 놓으면 ‘아닐, 혹은 끝 미未’가 된다. 아직 튼튼한 가지가 되지 않았고 가지 끝에 돋아난 또 다른 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어린 가지를 자르는 모양을 더해 놓으면 자른 나뭇가지의 중심이 붉다 해서 ‘붉을 주朱’가 되고, ‘나무 목木’에서 땅 밑에 단단히 박은 세 가닥 뿌리에 가로로 한 획을 그어놓으면 뿌리를 강조하는 것이 되면서 나무만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이라는 뜻을 담은 ‘근본 본本’이라는 글자가 된다.

‘미未’라는 글자는 나무 끝의 가느다란 작은 가지의 모양에서부터 나와 ‘분명하지 않다’ ‘희미한 모양’ ‘아직…하지 않다’, 그리고 아직은 되지 않았으니 장차 될 것임을 암시하여 미래未來라는 뜻으로까지 나아간다. 말 그대로 ‘미래未來’는 ‘올 래來’와 함께 아직은 아니지만 장차 다가올 시점이고, ‘미완未完’은 ‘완전할 완完’과 함께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며, ‘미망인未亡人’은 ‘망할, 없을 망亡’과 함께 배우자인 남편과 더불어 죽어야 하지만 아직 죽지 못한 사람이라고 남편 잃은 사람 여인이 누군가에게 자신을 낮춰 말하는 것이 되고, ‘미구未久’는 ‘오랠 구久’와 함께 그리 오래지 아니함을 말하고, ‘미안未安’은 ‘편안할 안安’과 함께 누군가를 괴롭혀서 내가 편안하지 아니함을 말한다. 처세로 그저 한 마디 하고 넘어가자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내가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얘기하는 것은 ‘내가 너를 괴롭혀서 내가 편안하지 않으니 나를 편안하게 해 주세요!’라는 뜻이어서, 상대방의 너그러움과 용서를 받으려고 청하고 사정하는 것이다. ‘미안未安’을 이루는 ‘편안할 안安’은 ‘집 면宀’과 ‘여자 여女’로 이루어진 말이므로 ‘집에 여자가 있으면 모든 것이 평안하다’는 식으로 풀이를 하지만 다소 옹색하다. 오히려 ‘집 면宀’을 사당이나 신전과 같은 집으로 보면, 그 안에서 신의 뜻을 찾으려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풀어서, 그렇게 기도하고 신의 뜻을 찾다보면 편안해 진다는 의미로 새기는 것이 유용할 듯하다. ‘편안할 안安’은 그래서 ‘편안하다, (신의 뜻을 알고)즐거움에 빠지다, 어찌, 이에(이에, 그래서 내, 노 젓는 소리 애乃), 어디에, 안으로, 속으로’ 등등의 뜻을 지니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미안’은 누군가를 두고 내 마음을 헤아려 신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다.

에릭 시갈Erich Sigal(1937~2010년)의 소설을 두고 만들어져 겨울이면 항상 생각나게 하는 1970년의 영화 Love Story는 “사랑은 미안하다 말하는 게 아냐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라는 명대사를 가르쳐주었지만, 그렇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너의 불편한 마음을 알고도 남는다는 뜻을 가르쳐주기 전에, ‘미안하다’는 말에 인색한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부자는 불의를 저지르고도 큰소리를 치지만 가난한 이는 불의를 당하고도 사과해야 한다.”(집회 13,3)고 했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자기 불쌍한 줄을 알면 알수록 사람들에게도 미안한 것들이 너무 많아져서 미안해하지만, 자기 가련함을 모르면 모를수록 미안해하고 말 것도 없어서 뻔뻔해지고 거들먹거리며 큰 소리를 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미안해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가련히 여기시도록 하는 기도이다.

입 구口

‘입 구口’는 본래 구멍의 형상이다. 그러나 한문에서 ‘입 구口’가 글자의 부분을 차지할 때에는 입이나 구멍만의 뜻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물건 품品’처럼 물건이 쌓여있는 모양이기도 하고, ‘따로따로, 각각 각各(뒤져올, 머뭇거릴 치夂 더하기 입 구口)’처럼 앞 사람과 뒷사람 말이 서로 다르다는 뜻으로 「각각」을 뜻하기도 하고, ‘돌 석石’처럼 바위에서 떼어낸 돌이 생긴 형체를 나타내기도 하고, ‘합할 합合’처럼 셋이 딱 들어맞는 ‘삼합 집亼(뚜껑)’과 ‘입 구口(본체)’를 더하여 말에 말을 맞춰 대답하거나 이것에 저것을 더하여 모으거나 만나고 합하거나 맞추는 상황을 묘사하기도 한다. 현대 사회의 두려움이 되어있는 ‘암 암癌’은 ‘입 구口’가 세 개나 들어있는 글자로서 병상에 드러누운 모양인 ‘병질 엄疒’과 산 위의 돌덩이들 모양인 ‘바위 암嵒’이 더해 만들어진 글자이다. 딱딱한 암 덩어리를 지고 병상에 누운 분들을 생각하면 일리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간혹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이 먹고, 먹고, 또 먹어 산처럼 쌓였다가 결국 병상에 드러누운 모습이라 하기도 하지만, 이는 우스개로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사실 우스개로 이야기하는 것도 온당치 않다), 암에 걸려 고생하시는 모든 분들이 마치 뭔가를 많이 먹어 암에 걸린 것처럼 표현하는 경솔하고 죄송한 풀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원래 구멍을 뜻했던 ‘입 구口’를 두고 한자의 다른 생성과정 말고, 다른 글자들과 더해져 뜻을 만드는 회의문자會意文字가 되는 것만 생각해도 글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해진다. 간단한 예로 ‘이름 명名’은 ‘저녁 석夕’과 ‘입 구口’가 더하여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면 입으로 이름을 불러 서로를 분간하는 것이 되고, ‘화할 화和’는 ‘벼(쌀) 화禾’에 ‘입 구口’를 더하여 쌀로 만든 밥을 모두 함께 먹으니 화목하다는 것이 되고, ‘알 지知’는 ‘화살 시矢’와 ‘입 구口’가 더하여 무엇을 안다는 것이 화살이 과녁을 맞히듯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일컫는 것이 되며, 이 ‘알 지知’에 ‘날 일日’을 더하면 알고 있는 것들이 날이 가고 또 가면 지혜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지혜 지智’가 된다는 식이다.

사람의 얼굴에는 가장 중요한 구멍인 입이 있다. 코도 있고 귀도 있는데 얼굴에서 가장 ‘중요한’ 구멍이라 하는 것은 최악의 경우 코나 귀가 없어도 살 수는 있지만 입이 없으면 아예 살 수 없고, 입이라는 구멍이 인간에게는 가장 큰 구멍이기 때문이다. 입은 수많은 세월 동안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서 기능적으로 인간사의 수많은 일을 감당한다. 생물의 입은 맨 먼저 아가미처럼 그저 들어온 것을 걸러 흡수하는 기능만을 하다가 턱이 생기고 돌기나 이빨이 생겨나면서 잡고 붙들 수 있는 먹이들이 생겨났고, 점점 씹거나 갈아먹을 수 있는 입으로 발달하면서 이것저것을 먹을 수 있는 입이 되어갔다. 물론 이빨은 각각의 생물이나 동물들이 처한 상황에 맞게 다양한 위치나 모양, 그리고 개수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사람에게는 공격용 송곳니나 앞니 대신에 딱딱한 것까지도 먹을 수 있도록 어금니들이 발달했으니, 굳이 진화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람의 구멍인 입은 이렇게 글자만큼이나 발달했고, 또한 대단히 특화된 구멍이 되어왔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입이라는 구멍으로 확인하려 하면서 인생을 시작한다.(구강기) 그 입은 살아가면서 혀나 치아와 함께 소리를 내어 140여 가지 음을 만들어내고, 말하고, 기도하고, 먹어서 생명 유지를 위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감정과 애정의 표현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표정과 속내를 관리하고, 숨쉬고, 음식물을 씹어 소화되게 하고, 맛을 보고, 물어뜯어 무엇인가를 풀어 헤치거나 공격하고, 남을 해치는 말과 욕설을 뱉는 죄의 분출구가 되는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을 한다. 단순한 구멍이었던 인간의 입은 이제 인간의 삶과 문화 전체를 관장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인간의 입은 정말 위대하다.

그러나 입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입은 한 개이면서도 열 마디 말을 열 번 한다.’ 라든가, ‘뚫린 입(구멍)으로 말이나 바로 하라.’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조심’이나 ‘경계’와 관련된 격언이나 관용구 내지는 속담으로 끊임없이 견제를 받는다. 언젠가 입만 동동 떠서 입만 살아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둔한 자의 입은 그를 파멸시키고 입술은 그를 옭아맨다.”(잠언 18,7) 하였으니, “주님, 제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제 입술의 문을 지켜 주소서.”(시편 141,3)

벌레 충蟲

‘벌레 충蟲’이라는 글자는 ‘벌레 충/훼虫’가 여러 마리가 모여 있는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이다. 벌레들이 대개 군집하여 사는 까닭이다. ‘충蟲’이라는 글자를 쉽게 쓰거나 간단하게 쓸 때에 ‘벌레 충/훼虫’라는 글자 하나만 쓰기도 한다. 벌레를 뜻하는 ‘虫’이라는 글자는 공교롭게도 몸 굵기에 비해 머리가 큰 뱀의 형상에서 따왔다. 아직 정교하게 분류체계를 갖지 못했던 고대 중국에서 짐승이나 물고기, 새를 제외한 모든 동물을 벌레라고 칭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만들어진 뱀을 뜻하는 ‘뱀 사蛇’라는 글자에도 ‘벌레 충虫’이 붙어있다.

옛날 중국에서는 땅 위의 것들을 아예 다섯 가지 벌레로 분류했다는 기록도 있다. 포유류 짐승처럼 털이 있는 모충(毛蟲), 새처럼 깃이 있는 우충(羽蟲), 거북이처럼 딱지가 있는 개충(介蟲=갑충甲蟲), 물고기처럼 비늘이 있는 인충(鱗蟲), 그리고 사람처럼 맨 몸이 드러나는 나충(裸蟲)이다. 인간은 벌거벗은 벌레 ‘나충’에 속한다.

무릇 ‘虫’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모든 글자가 위에서 말한 넓은 의미의 벌레와 관련된다. 별 상관이 없을 듯이 보이는 ‘바람 풍風’조차도 벌레(虫)가 바람에 날려 다니며, 돛(凡)도 바람을 받아 움직이다는 말에서 형성되었다 한다. 혹자는 태풍 같은 큰 바람이 지나간 다음에 병충(蟲)이 많이 번식한다는 뜻을 더하여 ‘바람’을 뜻하는 ‘바람 풍風’이라는 글자가 되었다고 풀기도 한다. 심지어 ‘무지개 홍虹’조차도 무지개를 거대한 뱀이나 용으로 보아서 그렇게 ‘벌레 충虫’을 붙여 썼다 한다. 그래서 어떤 이가 하느님의 네일 아트(손톱장식)이라고 표현한 바 있는 낭만적인 무지개다리도 ‘홍교虹橋’라고 쓴다.

내가 거주하는 이곳 건물은 1938년도 건물이다. 오래된 건물인 까닭인지는 몰라도 바퀴벌레와 개미, 특별히 설탕 개미라 부르는 아주 조그만 개미들이 어디든지 있다. 그 녀석들은 약을 뿌리고 전문가를 부르며 별 짓을 다 해도 며칠만 지나면 어김없이 다시 등장한다. 핵 전쟁이 훑고 지나더라도 틀림없이 살아남을 녀석들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바퀴벌레는 한자로 ‘바퀴벌레 장蟑’과 ‘메뚜기 마螞’를 써서 ‘장마蟑螞’라 한다. 그리고 개미는 ‘사마귀 랑/낭螂’과 ‘개미 의蟻’를 써서 ‘낭의螂蟻’라 한다. 하나같이 4글자 모두 ‘벌레 충虫’을 달고 있는 벌레들이다.

자고 있는 동안에 베개나 얼굴 위에 뭔가가 기어 다니고 있다든가, 괜히 몸 어느 곳에 무엇인가가 살금살금 거린다는 착각을 하거나 괜스레 귓속이 간지러운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달고 살아야한다든가, 어느 순간 내가 마신 컵의 입이 닿는 가장자리를 어떤 녀석이 기어 다니고 있다든가, 바닥에 엎어져 버둥거리고 있는 메뚜기 같은 녀석을 맨발로 밟는 상상을 하는 것 등등은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동생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 사도마저 죽이려던 헤로데가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었다.”(사도 12,23)하는 것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벌레는 무섭다. 어느 나라에서는 바퀴벌레 튀김을 먹는다고도 하지만, “네 발로 걸으며 날개가 달린 모든 벌레 가운데, 발 위로 다리가 있어 땅에서 뛸 수 있는 것은 먹어도 된다.”(레위기 11,21)는 말씀에 따라 메뚜기와는 달리 분명히 납작하게 생긴 바퀴벌레는 성서적으로 보아 결코 먹을 음식이 아니다.

“벌레 같은 사람 구더기 같은 인생”(욥기 25,6)이라는 욥의 한탄을 떠올려 보고, “인간이 죽으면 길짐승과 들짐승과 벌레들 차지가 된다.”(집회 10,11)는 말씀을 떠올려본다 하더라도, 우선 여기 이곳에서 어찌 이들과 공존 공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진정 크나큰 고민이다.

구름 운雲

‘구름 운雲’이라는 글자는 원래 ‘이를 운云’이라고 훈을 매기는 글자에서 온다. 이 ‘이를 운云’은 ‘구름 운云’이라고 하던 글자를 빌려서 ‘말하다(왈曰)’는 뜻으로 쓰면서 ‘이를 운云’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본래의 뜻을 잃어가는 글자 ‘云’ 위에 ‘비 우雨’를 올려서 원래의 뜻을 찾아주려고 한 것이 현재의 ‘구름 운雲’이다. 현대 일본의 마지막 석학이라 알려지는 시라카와 시즈카(1910~2006년)에 의하면 허공을 떠도는 구름(雲)에는 용(龍) 모습을 한 정령이 있는데, 구름 기운이 감도는 아래에 용이 꼬리를 말고 있는 형태를 나타낸다고 풀이한다. 조각구름, 양털구름, 새털구름…하는 구름들이 아니라 뭉게구름을 멀리서 보면 쉽게 이런 해석이 짐작 간다.

구름은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늘, 바람, 땅이 어우러져 연출하는 드라마요 메시지다.

이곳 플로리다 여름에는 유달리 뭉게구름이 많다. 하늘 이곳저곳에 구름들이 신기하게 각양각색 모양을 짓고 흐트러뜨리고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새카만 먹구름, 비구름을 갑자기 만들어 순식간에 폭우같은 비를 뿌려대며, 도대체 언제까지 하늘에 무심하려느냐 하고 호통치듯 천둥 번개를 요란하게 곁들인다. 그렇게 자기 담은 양을 모조리 쏟아낸 다음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해를 쨍쨍 내리 비춘다. 그리고 바람과 함께 하늘의 구름놀이인지 구름의 하늘놀이인지 모를 놀이를 다시 시작한다.

성경에서 ‘구름’은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을 알리는 표시이거나 하느님의 힘이 펼쳐지는 상징이다. 그러나 “폭풍과 회오리바람은 그분께서 다니시는 길이며 구름은 그분 발밑에 이는 먼지다.”(나훔 1,3) 하듯이 뭉게구름은 가끔이고 뭉게구름 뒤에 펼쳐지는 짙은 먹구름이나, 비구름, 토네이도 같은 구름기둥이 많다. 땅 위의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보십시오. 당신보다 높이 떠 있는 구름을 쳐다보십시오.”(욥 35,5)하는 말씀처럼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늘을 보고 사는 사람들은 언젠가 “구름을 타고 오는”(마태 24,30;26,64 마르 13,26;14,62 루카 21,27) 그날과 그분을 꿈꾼다.

재잘거릴 첩喋

‘첩喋’이라는 글자가 재미있다. ‘입 구口’가 붙어있음에서 짐작 가듯이 입으로 무엇인가를 재잘거리는 상황을 묘사한다. 때에 따라서는 ‘쪼아 먹을 잡’이라고도 한다. ‘입 구口’가 붙어 그런 뜻이 있는가보다 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새기기 위해서는 그 오른 쪽에 붙어있는 ‘나뭇잎 엽枼’도 살펴보아야 한다.

‘뽕나무 상’이라고도 하는 ‘나뭇잎 엽枼’은 ‘枽’과 같은 글자인데 ‘나무 목木’ 위에 ‘세상 세世’가 올라앉아 있다. 이쯤 되면 ‘아, 나무 위에 주둥이들이 올라앉아 재잘거리는 것’이구나 하고 상상하지만 문제는 왜 하필 ‘세상 세世’가 올라앉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마련이다. 재잘거리기를 좋아하고 쓸 데 없는 말로 떠들기를 좋아하는 세상이 마치 나무 위에 올라앉아 지저귀고 짹짹거리는 새들 같아서 그런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 세世’는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잎사귀들을 본떠서 만든 상형글자로서, 원래 ‘세世’는 잎이라는 의미였으며, 나뭇가지에 나뭇잎이 떨어지면 새 나뭇잎이 나는 모습을 세대가 교체되는 것으로 연상하여 나중에 ‘세대’라는 의미도 갖추게 되었다 한다. 허나 원래는 나무 목 위에서 잎이 나불대는 모양으로 만들어진 글자인 셈이다. ‘나뭇잎 엽枼’은 나중에 좀 더 구체적으로 ‘풀 초艹’를 머리에 얹어 ‘잎 엽葉’이라는 글자로 잎의 의미를 대체하게 되었다.

이런 내력을 가진 ‘나뭇잎 엽枼’에 앞에서 말한 대로 ‘입 구口’를 붙이면 ‘재잘거릴 첩喋’이 되고, ‘말씀 언言’을 붙이면 함부로 말하고 몰래 일러바치는 ‘고자질 할 첩諜’이 되며, ‘조각 편, 절반 반片’을 붙이면 ‘편지 첩牒’이 되고, ‘눈 목目’을 붙이면 바로보지 못하고 ‘눈을 감을 첩䁋’이 된다.

한참 더운 여름이다. 곧 지나가리라 하는 기대로 견디는 여름이지만, 아직도 하늘을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따끈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나뭇잎들은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반짝거리면서 잎사귀마다 자기 얘기를 나불대는 것 같고, 가지 사이사이마다 새들이 찾아들어 짹짹거리며 바쁘다. 그래서 ‘재잘거릴 첩喋’이 떠올랐지만, 이내 “사람들은 자기가 지껄인 쓸데없는 말을 심판 날에 해명해야 할 것이다.”(마태 12,36)하는 말이 떠올라 주춤해진다.

기댈 녁疒

‘녁疒’이라는 글자는 오늘날 단독 글자로는 쓰이지 않고 부수로만 쓰이는 글자로서 병들어 침상에 누워있는 환자의 모습에서 왔다. 그래서 ‘병들어 기댈 녁/역, 병들어 기댈 상’으로 소리 값을 가진다. 모양새를 오른쪽으로 90도 돌려놓고(⤿) 보면 다리 달린 침상에 사람을 눕히는 모습이다. 한자에 ‘녁疒’이 들어가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마음과 몸의 크고 작은 질병(疾病)과 관련 있는 글자가 된다.

갓 스무 살 먹은 윤형이라는 아이를 만났다. 일종의 희귀병으로 담낭 옆에 염증이 생기는 병을 앓고 있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수술을 여러 번 했던 아이이다. 하필이면 내일 아침 일찍 6시에 집을 나서서 8시 반부터 수술에 들어가야 하는 아이였다. 윤형은 벌써 몇 번의 수술 경험이 있었고 다음날 수술을 위해서 이미 속을 비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함께 대화하고 기도하는 중에, 윤형은 애써 태연한 척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윤형의 두려움이 담긴 눈을 보고 말았다. 그 눈은 오래 내 마음에 남아 나를 사로잡았다. 하느님께서 귀한 생명을 주셨으면 계획하신 바 있었을 것이고, 이렇게 어린 나이에 고통을 받게 하시는 것도 틀림없이 섭리의 뜻이 있었을 것이지만, 윤형의 두려움 담긴 눈을 마주하면서, 용기를 내라 하고 그 고통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얘기하던 나의 말은 내 스스로가 생각해도 공허하게 들렸다. 문득 언젠가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가 되셨던 어머니께서 아픈 어린이를 두고 ‘인생 살만큼 산 저를 대신 더 아프게 하시고, 저 어린 것은 아프지 말게 하소서!’하고 기도하시던 모습이 생각났다. 무심코 넘겼던 그 말씀의 무게와 진실성이 그저 빈 말이 아니었음을 윤형의 엄마나 아빠보다 내가 더 먹은 나이가 되어서야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인간은 먼 세월이 지나서야 깨우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침상에 기대고 누울 녘에나 깨우치는 ‘어리석을 치癡/痴’가 되지는 말아야 할 텐데 하는 조바심이 인다.

‘잡을 조操’

喿라는 글자는 ‘소’나 ‘조’로 소리가 난다. ‘울 소(조)’, 또는 ‘떠들썩할 소(조)’이다. 나무 목(木) 위에 입 구(口)가 세 개나 올라앉아있다. 나무 위에 올라앉아 지저귀고 떠들어대는 입, 곧 주둥이들이 여러 개 있으니 나뭇가지 위에 앉아 떠드는 새들이다. 뜻을 나타내는 재방변(扌= 手 = 손)을 붙이면 ‘잡을 조操’가 된다. 떠드는 입들을 움켜잡고 장악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잡을 조’라는 글자는 잡다, (손에)쥐다, 부리다, 다루다, 조종하다(操縱), 장악하다(掌握), 다가서다, 닥쳐오다, 단련하다(鍛鍊), 지조(志操), 절조(節操), 절개(節槪ㆍ節介)의 뜻과 같은 다양함을 표시한다. 여기에 우리가 잘 아는 ‘마음 심心’이라는 글자 하나를 붙여 흔히 쓰는 ‘조심操心’이라는 단어가 된다.

그런데 ‘조심’이라는 이 단어는 그렇게 단순한 말이 아니다. 이 ‘마음’을 다잡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의 시작이요 근본이며 궁극이라고 성현들이 일컬어왔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잡지 못하고 놓아버려 잃어버리는 것이 ‘방심放心(놓을 방)’이다. 동서고금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주어져 원래부터 우리 안에 심겨져있는 것으로 모두가 방심하지 않고 잘 간추려야하며 키워내야 하고, 설령 잃었다가도 애써 다시 찾아야하는 ‘선善’의 씨앗은 ‘양심良心’이고 ‘본심本心’이다. 그렇게 마음 하나를 평생토록 흐트러짐이 없이 잘 구하여 얻었으면 이쪽저쪽이 없는 ‘안심安心’이다.

모든 시작은 역시 ‘잡을 조操’, 입단속으로부터 이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를 보십시오.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혀도 작은 지체에 지나지 않지만 큰일을 한다고 자랑합니다.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혀도 불입니다.”(야고 3,2-6) “혀”를 다스릴 은총을 청해야 한다.

여덟 팔八(=깨트릴 팔捌)

여덟 팔(=깨트릴 팔)

여덟 팔은 참 오묘한 수이다. ‘여덟 팔은 양손을 앞으로 나란히 하여 엄지를 구부리고 볼 때에 손가락 여덟 개가 보이는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그래서 은 양쪽으로 나누어진 형세이고, 서로 구분해서 등지고 있는 상태를 표시해 등지다‘, ‘분별하다는 의미를 생성하며 깨트릴 팔과도 같은 글자가 된다.

을 거론하면서 맨 먼저 오묘한이라는 수식어가 생각난 것은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에게 거의 신비한숫자로 다가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아주 비근한 예로서 스파게티 가락을 끓는 물에 삶는 시간이 8분이고, 찬물에서 시작하여 달걀을 반숙으로 삶아내는 시간이 8분이며, 한 주제에 대한 인간의 주의집중 가능 시간이 8분이고, 신체의 균형을 위한 동작의 운동도 어느 부위든 8분이면 가능하며, 한 조직에서 진정한 성공을 위해 체계적이고 총괄적이며, 장기적으로 지속적인 구성원이 되는 이들이 8분의 1(제프리 페퍼Jeffrey Pfeffer 교수의 8분의 1 법칙)이라는 것만 보아도 충분하다. 이처럼 은 사물의 현상과 개인을 넘어 집단에 이르기까지 두루두루 이런저런 인연을 맺는다.

우리나라에 88올림픽이 있었으며, 2018 평창올림픽도 있다. 중국 사람들이 8이라는 수를 행운의 수로 여겨 가장 좋아하고, 예수님께서 8일째 되던 날 성전에서 봉헌되셨으며, 요즘은 영양 과다공급으로 그 리듬이 망가졌을 수도 있지만, 원래 사람은 생후 8개월에 유치乳齒가 나오고, 8세에 그 이를 잃으며, 16(2×8)에 사춘기로 접어든 이후 원기왕성하게 살다가 8×8 64세에 이르러 쇠약해지는 내리막길을 내려간다고 했다. 8은 육의 수이며 영의 수이기도 하고, 물질세계와 비물질세계의 경계와 균형을 이루는 수이며, 8이라는 글자의 어느 한 부분에 들어가 그 숫자를 그리다보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수이기도 하다. 그래서 8이라는 수를 옆으로 누여 로 표기하고 무한대를 가리킨다고 하는 것일까?

팔괘八卦가 있고, 팔선八仙도 있으며, 팔경八景이 있고, 사방팔방의 팔방八方도 있으며, 사주팔자四柱八字 할 때의 팔자八字가 있고, 유럽에서 세례당을 지을 때의 팔각八角이 있으며, 예수님께서 설파하신 진복팔단眞福八端의 팔단八端이 있고, 불교에서 말하는 생로병사生老病死 애별리고愛別離苦의 팔고八苦가 있다. 어디 그뿐인가, 팔정도八正道, 팔달八達, 팔등신八等身, 팔불출八不出, 팔삭동八朔童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인간사가 거의 어떤 형태로든 직·간접으로라도 8이라는 수에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뿐이 아니다. 사유四維, 곧 국가의 기본인 4가지 뼈대 예의염치禮義廉恥에 사덕四德인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더하면, 팔덕八德이 되어 국가의 운영 틀도 되고 인간 사회의 근본 틀이 되면서 유교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이루는 골격에까지 나아간다.

82의 배수로 이해하면 결국 이쪽저쪽의 논리 안에서 무궁무진한 고리들을 거론할 수가 있다. 과연 이렇게 여덟 팔이 세상사요 인간사라면, ‘여덟 팔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이를 그르치면 인간의 도리를 모르는 무뢰한無賴漢이요, 몰염치沒廉恥이며 파렴치破廉恥가 된다. 이를 우스개로 효제충신예의염(孝悌忠信禮義廉)에 일이삼사오육칠(一二三四五六七)’이라고 한다 했다. 이는 곧 무치망팔無恥忘八이다. 원래 앞 구절이 팔덕八德을 가리키는 효제충신예의염치인데, ‘가 없으니 무치無恥’(해석하자면 부끄러움을 모른다이다), 앞 구절에 잇대어 일이삼사오육칠이 아니라, ‘일이삼사오육칠팔인데, ‘이 없으므로 망팔忘八·亡八’(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 도리를 모르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종합하여 무치망팔無恥忘()이 된다. 그래서 왕팔단王八蛋’(중국말로 가장 심한 욕 중 하나라는 왕빠딴)이 되고 만다.

그래서 여덟 팔은 그 앞에서, 영원 앞에 앞으로 나란히를 하고 서있는 인간의 모습을 상기하게 한다.

볼 견/뵈올 현見

볼 견/뵈올 현

이라는 글자는 이나 으로 음이 나는 글자이다. ‘눈 목밑에 사람 인을 붙여 사람의 눈이 하는 일을 나타낸다. 나중에 이쪽으로부터 보는 것을 볼 시’, 저쪽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보이는 것을 볼 견으로 나누어 쓰면서 보다보이다가 갈린다.

눈 목이 들어가 보다라는 새김을 하는 글자들은 참 많다. 앞서 말한 볼 견볼 시말고도, ‘관찰하다할 때의 자세히 보는 볼 관’, ‘간주하다눈 위 이마에 손을 얹고 멀리 보다할 때의 볼 간’, ‘눈을 똑바로 뜨고 보다할 때의 볼 정’, ‘노려보다할 때의 볼 고’, ‘쳐다보다할 때의 볼 천’, ‘좌고우면으로 알려져 곁눈질하다할 때의 곁눈질할 면’, ‘우러러보다, 바라보다할 때의 (바랄) (=‘쳐다볼 망과 통한다)’ 등등. 한자의 보다가 이렇게 여럿인 것처럼 서양 말에도 다양한 보다가 있다. see(보다), look(일부러 보다), gaze(오랫동안 보다), stare(빤히 보다), behold(바라보다), glare(째려보다, 쌍심지를 켜고 보다), peer(자세히 들여다보다), watch(뭔가 움직이는 것을 보다), view(작품을 감상하듯이 보다), peek(재빨리 훔쳐보다, 엿보다), peep(뚫어진 구멍 같은 것을 통해 몰래 보다) 등등. ‘보다를 묘사하는 말들은 이처럼 인간이 인식하는 가짓수나 사물의 현상,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만큼이나 많다.

눈만 뜨면 가만히 있어도 보이는 세상 것들은 하나같이 나를 좀 보아달라고 아우성을 치듯 내 눈을 잡아끌기에 여념이 없고, 끊임없이 나의 시선을 유혹한다. 이렇게 세상에는 볼 것 천지인데도 사람들은 막상 무엇인가를 마주 보는 데에 두렵다. 그런가 하면 깊게 보지 못한 나머지 신경질적으로 체험해보라 하고 만져보라 하고 느껴보라 하면서 다른 을 강요한다. 그러다가는 보고 싶다 보다 더욱 간절한 것은 침묵이다라는 말을 만들고 그에 취한다.

무엇인가를 유심히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경우(시이불견視而不見/시이불시視而不視)가 있는가 하면, 설령 보았어도 못 본 체하는 경우(시약불견視若不見)도 있다. 감추는 것은 더 잘 드러나고, 숨기는 것은 더 잘 드러난다. ‘막현호은莫見乎隱이다. 어쩌면 갑작스럽게 눈을 떠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도로 눈을 감고, 보지 않고 다녔던 그대로 가야만 제대로 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종종 어둡고 깜깜한 곳에서 안으로 살펴보아야(시호명명視乎冥冥) 한다. 그래야 보인다. 어두운 곳에서 보지 못하면 눈뜬장님이다.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대학大學》 〈정심장正心章, 수신修身)’이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혜안慧眼이며 영안靈眼이다. 그것이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옛사람이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유한준兪漢雋, 17321811, 당대의 수장가였던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이라는 사람의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에 붙인 발문의 부분)’이라 했다. ‘알면 참으로 사랑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본다했다. 알아야 사랑하고, 사랑해야 본다. 그런 의미라면 알아야만 보고 보인다.

요한복음은 와서 보라!”(요한 1,46) 하며 보라는 초대로 시작하고 마침내 “(가서) 보고 믿었다.”(요한 20,8) 하며 믿다라는 말로 끝난다. 성경에서, 특히 요한복음에서 보다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제자 필립보가 보게 해 주십시오하고 청했을 때 너는 믿지 않느냐?” 하고 반문하시며 믿어라하신다.(참조. 요한 14,6-11)

천사天使

천사天使

천사는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인간들에게 전하는 하느님의 사자使者이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며, 한편으로는 사람을 지켜주고, 희망을 주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진다. 성경은 천사에 대하여 구약부터 신약까지,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무려 354절을 두고 기술한다.

그런데 천사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수많은 조각가나 화가들이 묘사한 대로 그렇게 생겼을까? 천사는 정말 하얀 은백색의 눈부신 날개를 지녔을까? 남성일까 여성일까? 포동포동한 예쁜 어린이처럼 생겼을까? 아기 천사라면 백인 아이일까? 사랑스럽고 작고 귀여운 햄스터 같은 천사일까? 그렇게 다정다감하고 부드럽고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천사였다면 성경에서는 천사를 만난 이들이 천사를 부둥켜안고 고맙다는 말이라도 전하고, 술이라도 한잔 나누거나 밥이라도 같이 먹으며 다정한 우정을 나누는 장면이 왜 하나도 없는 것일까?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천사는 인간들을 만날 때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을 곧잘 서두에 꺼내는데(참조. 루카 1,13.30),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혹시 천사의 모습이 인간이 상상한 것과는 달리 무척 흉측하거나 무서운 모습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인간이 천사의 모습을 그렇게 황홀한 모습으로만 묘사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천사는 인간을 흔들고 만질 수 있어도 천사는 인간이 만질 수 없는 존재일까?(참조. 1열왕 19.5.7-8)

몹시 궁금하다. 그러나 하느님의 심부름을 하느라고 바쁜 천사는 밤낮으로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일을 하면서 적어도 피곤함에 찌들어 지쳐있는 걸레 같은 모습이고, 땀에 흠뻑 젖어 땀 냄새 펄펄 나는 꾀죄죄한 모습일 것이며, 세상의 온갖 시궁창을 다 다녀야 하는 바람에 엉망진창이 된 더럽고 지저분한 모습일 것이 틀림없다. 편안하고 좋은 자리만이 아니라 오히려 어렵고 힘든 자리에 전달해야 할 하느님의 뜻이 더 많이 있을 것이기에 더 그러할 것이다. 천사의 모습을 이렇게 상상하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지라도, 천사의 본분에 합당한 인간밀착형천사요 생계형천사라면 반드시 그러해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이렇게 알게 된 것이지만 실제 천사의 모습이 그러했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두고 천사를 이제껏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나의 일상 한 자락에 문득 더럽고 지저분하고 꾀죄죄한 깃털 같은 누군가의 흔적이 흘낏 보일 때 그것이 내 곁을 다녀간, 아니 내 곁에 있는 천사의 흔적은 아닐까?

* (이 글은 안드레아 슈바르츠Andrea Schwarz라고 하는 독일 여류 작가의 <‘엘리야와 함께 걷는 40’, 174-179, 바오로딸, 2014>에서 생각을 얻어 부분적으로 윤색, 가필, 재구성하여 나름대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