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울 련/연䜌

‘어지러울 련/연䜌’이라는 글자는 ‘말씀 언言’을 두고 양 옆에 ‘실 사糸’를 배치한 형태이다. ‘실 사糸’가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는 모양이라는 것 정도는 대개 안다. 그런데 ‘어지러울 련/연䜌’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가운데 들어있는 ‘말씀 언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글씨를 쓸 때에도 ‘말씀 언言’을 먼저 쓰고 왼쪽 ‘실 사糸’, 그리고 오른쪽 ‘실 사糸’를 차례로 쓴다.

‘말씀 언言’을 ‘매울 신辛’의 변형과 ‘입 구口’가 어우러진 것으로 본다든가(‘매울 신辛’은 손잡이가 있는 꼬챙이의 상형으로 보아서 입에서 나가는 말이 날카롭게 상대방에게 가서 꽂힌다든가 아니면 말을 잘못하면 매운 벌을 받게 된다든가 하는 식), 아래에서부터 입과 혀 그리고 ‘말’을 상징하는 가로획이 더해진 모양으로 본다든가(단순히 입과 혀의 상형으로 보기도 한다), 아니면 위로부터 머리·이마·눈썹·코 밑에 입이라는 형태로 본다든가(말은 곧 그 사람의 얼굴이라는), 아니면 다시 아래로부터 입에 물고 있는 소리 나는 나팔 같은 것으로 본다든가(말은 결국 소리이므로), 맨 밑의 ‘입 구口’를 통처럼 생긴 한글의 ‘ㅂ’ 모양으로 보고 그런 통에 담은 내용으로 본다든가(주술통과 같은 것에 담긴 주술 도구를 통해 전해진 신의 말 곧 신탁神託, 혹은 그러한 주술의 결과를 신과 인간·인간과 인간 이쪽저쪽을 실로 묶듯이 연결하거나 연결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풀기도 한다), 심지어는 맨 위의 점 하나는 하늘의 축복이고 그 밑을 ‘석 삼三’으로 본다든가(세 번 생각해야 하늘의 축복임을 알 수 있으므로), 머리(ㅗ)·둘(二)·입(口)으로 본다든가(머리의 생각과 입 둘이 만들어내는 것이 말이므로) 하는 등등의 여러 의미를 담은 풀이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러한 ‘말씀 언言’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 ‘실 사糸’를 붙이면, 실은 이어지는 것이므로 신과 인간 사이이든지, 인간과 인간 사이이든지, 아니면 세상과 인간 사이이든지 ‘어떤 말과 뜻이 이쪽저쪽에 연결되고 이어지기를 바라는 상황’을 뜻한다. 그런데도 이 글자가 ‘어지럽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은 왜 그러는지 이유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아마도 ‘실이 어지럽게 엉키면 풀기가 어렵듯이 말도 이쪽저쪽으로 얽히고설키면 풀기가 어려워서 어지럽다는 뜻이 담기지 않았을까? 또 ‘어지러울 련/연䜌’에는 ‘다스리다’라는 뜻도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렇게 실타래처럼 엉킨 인간사의 것들을 잘 풀어내어 다스린다는 뜻을 담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 볼 뿐이다. 아무튼, 이런 내력을 지닌 ‘어지러울 련/연䜌’이 다른 글자와 합해지면 다른 뜻을 가진 글자들이 아주 많이 생겨난다.

우선 ‘여자 여/녀女’를 밑에 붙이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아름다울 련/연孌’이 되고, ‘큰 대大’를 밑에 붙이면 아찔할 정도로 큰 것을 이루는 ‘이룰 련/연奱’이 되며, ‘마음 심心’을 밑에 붙이면 내 마음이 저쪽 마음에 가서 닿지 않으면 어찌할 것인가 애타면서 심란한 ‘사모할, 그리워할 련/연, 그릴 련/연戀’이 되고, ‘손 수手’를 밑에 붙이면 무엇엔가 걸려 넘어질 뻔하게 어지러워 손을 잡아주어야 할 정도의 ‘걸릴, 경련할 련/연攣’이 되며, 굽은 활 모양인 ‘활 궁弓’을 밑에 붙이면 어지럽게 구부러진 물길 같은 ‘굽을 만彎’이 되고, ‘벌레 충/훼虫’를 밑에 붙이면 나라를 어지럽히는 벌레 같은 이들인 ‘오랑캐 만蠻’이 되며, ‘칠 복攵’을 밑에 붙이면 어지럽게 정신 못 차리는 녀석을 몽둥이로 때려서라도 변화시키는 ‘변할 변變’이 되고, ‘아들 자子’를 밑에 붙이면 ‘말씀 언言’ 이쪽저쪽에 똑같은 ‘실 사糸’가 두 개 붙어있는 모양처럼 쌍둥이가 태어나 아찔하게 기쁜 ‘쌍둥이 련/연孿’이 된다.

인생을 살다 보면 환갑을 넘어서도 아직도 젊은 날의 ‘어지러운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어지러움은 희열이고 안타까움이며, 두근거림이고 아쉬움이다. 그런데도 ‘때’는 지나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면 문득 공허와 허망함이 남아 눈물이 난다. 그러다가 매섭게 추운 날 정신이 바짝 들 듯이 고개를 흔든다.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못내 저 밑바닥에 그래도 남겨놓아야만 할 것 같은 미련未練(아닐 미未, 익힐 련練)이 사람을 어지럽힌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은 상대방을 어지럽히고(참조. 아가 6,5), 죄악은 인간사의 질서를 어지럽히며(참조. 예레 5,25), 교활한 이들의 말은 거룩한 사람들의 정신을 어지럽힌다.(참조. 사도 15,24)

붓 율聿

‘붓 율聿’은 ‘붓 필筆’과 같은 글자이다. ‘붓 율聿’은 뭔가를 손에 똑바로 들고 무엇인가를 쓰거나 새기는 모양새이다. 처음부터 붓으로 글씨를 쓴 것이 아니라 뾰족한 것으로 개발새발 새기다가 부드러운 털을 모아 붓대에 고정시키면서 나중에 붓대의 재료인 ‘대나무 죽竹’을 위에 붙여 ‘붓 필筆’로도 쓰게 되었다. 그래서 세월 따라 ‘율’이 ‘필’로 바뀐 셈이다. ‘붓 율聿’은 ‘붓, 똑바로 세우다, 몸소, 펴다, 닦다, 마침내, 이에, 따르다’ 등등의 여러 뜻을 담는다.

‘붓 필筆’이 들어간 낱말들은 많다. ‘잡을 집’을 더하면 어떤 주제를 잡아 글을 쓰는 ‘집필執筆’이고, ‘따를 수’를 더하면 생각 따라 붓 따라 쓰는 ‘수필隨筆’이며, ‘대롱 통’을 더하면 필기구들을 넣어놓는 ‘필통筆筒’이고, ‘자취 적’을 더하면 써내려간 글의 솜씨나 모양인 ‘필적筆跡’이며, ‘힘 력’을 더하면 글의 힘이나 기운인 ‘필력筆力’이고, ‘베낄 사’를 더하면 무엇을 보고 베껴낸 ‘필사筆寫’이며, ‘기록할 기’를 더하면 받아 적는 ‘필기筆記’이다.

‘붓 율聿’ 앞에 ‘갈 행行’(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나 통하는 사거리)의 축약형인 ‘彳(조금 걸을 척)’을 붙이면 사방 어디서나 통한다는 뜻을 담은 ‘법(칙) 률/율律’이 되고, ‘붓 율聿’과 ‘날 일日’ 그리고 땅에 해당하는 ‘하나 일一’을 붙여 만들어진 ‘낮 주晝’라는 글자는 햇볕이 땅에 똑바로 내려쬐는 정오를 뜻하는 말이 되며, ‘붓 율聿’ 밑에 ‘입 구口’ ‘입 구口’ 가운데 한 점을 찍어 입에서 나오는 것을 뜻하게 되면 ‘글 서書’가 되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글로 옮긴다는 뜻이 되고, ‘붓 율聿’ 밑에 ‘밭 전田’ 그리고 그 ‘밭 전田’을 ‘하나 일一’로 둘러쌓으면 ‘그림 화畵’가 되어 밭에 금을 그어 경계를 짓는 것처럼 그리는 것이 되며, ‘붓 율聿’ ‘밭 전田’ ‘하나 일一’에 ‘칼 도刂’를 붙이면 ‘그을 획劃’이 되면서 구획하고 계획하며 나눈다는 뜻이 된다.

‘붓 율聿’은 본성적으로 붓이고 글씨이며 글이다. 중국은 서법書法, 일본은 서도書道, 한국은 서예書藝라고 부른다는 글씨와 글쓰기는 쓰는 사람에게 스스로의 품격이고 삶이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이고 배움, 그리고 깨우침이다.

그래서 일찍이 당唐나라에서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기준으로 관리를 등용했다 하고, 내 주제에 감히 알아 듣기는 고사하고 언급하기조차 삼가게 되는 김정희 선생(1786~1856년)께서는 벼루 10개가 닳아서 못쓰게 되도록, 천 개의 붓이 못쓰게 되도록 글을 썼으면서도 ‘必有文字香書卷氣필유문자향서권기’라며 반드시 내 안에 문자의 향기와 책의 기운이 가득해야만 그것이 넘쳐 써지는 것이 글이요, 만 권의 책이 내 안에 있어야 써지는 것이 글이며, 내 안에 청고고아淸高古雅(맑고 드높으며 예스럽고 우아하다)한 인품이 마련되어야만 써지는 것이 글이라 했다. 멀리 김정희 선생 말고 ‘처음처럼’이라는 소주병에 새겨져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사랑을 받았던 신영복 선생(1941~2016년)께서도 글씨는 ‘획劃’(그을 획), ‘자字’(글자 자), ‘행行’(갈 행), ‘연聯’(잇달 연/련), 그리고 흑과 백의 조화로 쓰는 것이며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환동還童’(돌아올 환, 아이 동)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경지의 말씀을 남기신다.(참조. 신영복, ‘담론’, 306-321쪽)

나를 다소 이상하고 의아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수소문을 하여서 여기 미국에서는 쉽게 살 수 없을 것 같은 잉크 한 병을 사왔다. 한국에서부터 챙겨온 만년필 4개를 위해서였다. 이제는 거의 컴퓨터의 자판기가 쓰는 것이 글자요 글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면서, 만년필과 잉크가 좋은 글과 글씨를 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만년필을 소중하게 챙기고 그 만년필에 잉크를 넣는 순간이 거룩한 의식이 되는 것을 고집하는 것은 그나마 글과 글씨에 대한 옛 어른들의 숭고함을 기리고 나 자신을 추스르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사람들이 가끔 나의 글도 글씨도 아닌 것들을 보면서 듣기 좋은 소리를 하고, 스스로 예전에는 보이는 것들에 대한 분석이나 주제 넘는 평을 하는 것에 익숙하다가 언젠가 부터 내 자신의 생활에 관한 것들에 대하여 쓰려고 한다고는 하지만, 많은 것들이 그저 공부하는 것들을 정리하고 기억해두기 위한 ‘학습노트’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성경은 단순한 기호나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으며 능력을 발휘하는 글씨이고 글이다. 하느님께서는 글씨를 새길 판을 손수 만드시고 그 판 위에 글씨를 새김으로써 당신의 백성과 사랑에 찬 긴 여정을 함께 하셨다.(참조. 탈출 32,16) 구약의 사제는 저주를 물 위에 쓰고 그 물을 마시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판별하였고(참조. 민수 5,23), 수많은 예언자들은 글을 써서 경고했으며(2역대 21,12 에즈 4,6.14 에스 1,22 이사 8,1 예레 29,1등등),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앞에서는 사람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자를 썼고(다니 5,5-25), 바오로 사도 역시 “내가 직접 이렇게 큰 글자로 여러분에게 씁니다.”(갈라 6,11) 하였다. 성경의 글과 글씨는 이렇게 하느님 사랑의 계약이고, 역사이며, 저주와 경고이고, 권고와 인간사의 법이다.

술 취할 취醉

한자에 술에 취한 상태를 묘사하는 글자들은 많다. ‘주정酒酊’이라 할 때의 ‘술 취할 정酊’이 있고, 곤드레만드레 취한 상태인 ‘명정酩酊’에서 꽥꽥 나의 이름이나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대는 ‘술 취할 명酩’도 있으며, ‘질그릇 도匋’와 함께 술이 취해 사발이 깨지는 소리가 날 정도의 ‘술 취할 도醄’가 있고,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분위기가 훈훈하게 좋은 ‘술 취할 훈醺’도 있다.

‘취醉’라는 글자는 ‘취할 취’라고 하지만 같은 훈과 음으로 부르는 ‘취할 취取’라는 글자가 있어서 앞에 ‘술’자를 붙여 ‘술 취할 취’라고 하고, 이에 대비하여 ‘취할 취取’는 그 뜻을 받아서 통상 ‘가질 취’라고 한다.

‘술 취할 취醉’는 ‘술/술병/닭 유酉’와 ‘마칠 졸卒’의 합자이다.(‘마칠 졸卒’은 ‘옷 의衣’와 ‘열 십十’이 더해져서 옷에 표시가 되어 있는 병졸이어서 전장에서 결국 소모품으로서 ‘죽고 마치고 끝나고 마는’ 뜻을 가진 슬픈 글자이다.) 아무튼, 술병과 마침의 뜻을 지녀 ‘술 취할 취醉’라는 글자가 된 것이니 ‘술 취할 취醉’는 놓여있는 술을 다 마셔 취한 상태를 말한다. 있는 대로 다 마시면 그렇게 취하니 술 취하지 않으려면 다 마시지 말라는 경고의 뜻을 이미 담은 것일까?

술에 취한 사람을 ‘취한醉漢’이나 ‘취객醉客’이라 하고 술에 취해서 흥이 난 경우를 ‘취흥醉興’이라 하며, 술 취해서 살다가 결국 헛된 꿈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취생몽사醉生夢死’라 하고, 술 취한 얼굴은 ‘취안醉顔’이며, 술에 몹시 취한 것을 ‘대취大醉’라 하고, 술에 완전히 취한 것은 ‘만취滿醉’라 하며, 술에 취한 모습을 ‘취태醉態’라 하는데 ‘취태醉態’는 곧 ‘추할 추醜’로 변화되면서 ‘추태醜態’가 된다. 무엇엔가 술 취한 듯 마음이 쏠려있는 것을 ‘심취心醉’라 하고, 마음이 가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은 ‘뜻, 달릴, 재촉할 취趣’와 함께 ‘취향趣向’이지만, 술이 취해서 엉뚱하게 딴 곳에 가 있는 것은 ‘취향醉鄕’이라 하고, 술이 취해 있는 동안을 ‘취중醉中’이라 한다.

술은 기분 좋을 만큼만 마시자 하기도 하고, 술도 음식이고 심지어 약藥과도 같은 것이니 몸에 좋을 만큼만 마시자 하기도 한다. 술은 분명 인간사의 애환과 기쁨에 관련된 시詩나 노래와 연관이 있음이 틀림없다. 이백李白이 ‘술 한 말에 시가 백편(斗酒詩百篇)’이고 자칭 ‘술 취한 신선(自稱臣是酒中仙)’이라 했으며, 취음선생醉吟先生이라 불렸다는 백거이白居易는 술과 시, 그리고 거문고 세 친구를 얻었다고 노래했다지만, 이렇게 술이라도 먹어야만 드러나고 은유되는 것이 인간사이고 술을 떠나서는 진실한 노래가 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신神의 모습을 지녔으나 신이 아닌 인간의 마지막 임계점에 가닿을 수 있는 위험한 수단이라는 의미에서 술은 본성적으로 보통의 인간이 마셔서는 안 되는 신神들의 음료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일반 인간이 범접하여 마시면 자칫 인간의 한계를 넘어가기 때문에 얼굴이 평상시와 달리 붉어지고 비틀거리기도 하며 마치 인간이 만능의 신神이 된 양 호기를 부리기도 하고 마시지 말아야 할 것을 마셨으므로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느라 웩웩거리며 인간에게는 없는 꼬리를 흔들며 토해내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게 술은 패가망신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술은 대개 부정적인 이미지이다. 술을 경계하라 한다. “술 취한 자들아, 깨어나 울어라. 술꾼들아 너희 입에 들어가다 만 포도주를 생각하며 모두 울부짖어라.”(요엘서 1,5) “(그릇된 사제들과 예언자들) 이자들마저 포도주에 취해 휘청거리고 술에 취해 비틀거린다. 사제와 예언자가 술에 취해 휘청거리고 포도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술로 비틀거리고 환시 중에도 휘청거리며 판결을 내릴 때에도 비척거린다. 정녕 식탁마다 토한 것으로 그득하여 더럽지 않은 곳이 없다.”(이사 28,7-8) 한다.

맺을 결結

‘맺을 결, 상투 계結’라는 글자는 뜻을 나타내는 ‘실 사糸’와 음音을 나타내는 ‘길할 길吉’이 더하여 만들어진 글자이다. 우리가 흔히 ‘실 사糸’라고 하는 글자는 누에고치에서 가는 실을 뽑아내는 형상으로 ‘가는 실 멱’이라고도 부른다. ‘길할 길吉’은 ‘왕王’의 원형 격이고 그래서 왕이나 제사장의 도끼 모양인 ‘선비 사士’와 ‘입 구口’의 조합이니, 이 모두를 아우르면 『왕이나 제사장과 같은 지도자, 혹은 훌륭한 사람 등이 자기가 하는 말이나 축문, 혹은 신으로부터 받은 신탁神託을 자신의 상징인 도끼로 보증하면서 무엇인가 결실이 맺어지고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묶어지거나 맺어지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나아가 ‘다지다, 단단히 하다, 바로잡다, 막다’는 것까지 가리킨다.

그렇게 ‘맺을 결, 상투 계結’이 앞에 붙는 말로는 결과結果, 결국結局, 결혼結婚, 결합結合, 결말結末, 결실結實과 같은 말들이 수없이 많고, ‘결結’이 뒤에 붙어 만든 말들도 직결直結, 종결終結 타결妥結, 연결連結, 동결凍結, 단결團結처럼 수없이 많다.

‘결結’에 들어있는 ‘실 사/멱糸’은 ‘작을 요幺’(고치에서 갓 뽑아낸 실), ‘실 사絲’(실타래), ‘얽힐 구丩’(실 끝에 고를 내어 서로 연결시킨 모양) 등의 글자와 생김새가 같고 관련성을 지닌다. 가느다란 실의 모양인 ‘작을 요幺’에 나뭇가지 같은 것에 걸려있는 거미줄 같은 모양새를 더하면 ‘헛보일/허깨비/변할 환幻’이 되어서 환상幻想, 환상幻像, 환영幻影, 환각幻覺 같은 말을 할 때에 쓰는 말이 되고, ‘힘 력/역力’을 더하면 ‘어릴 유幼’가 되어서 유치원幼稚園, 유아幼兒, 유약幼弱(아직 어려서 힘이 없다) 같은 말을 할 때에 쓰는 말이 된다. 이 ‘작을 요幺’ 밑에 3줄기를 더해서 가는 실이 여러 가닥 꼬인 상태, 곧 ‘실 사/멱糸’가 되면 쓰임새는 더욱 다양해진다. 그 옆에 ‘미칠 급及’을 붙이면 ‘미칠 급級’이 되면서 실의 질을 따져 등급等級을 매기는 것을 뜻하고, ‘비단 백帛’을 붙여 ‘솜/이어질 면綿’이 되면서 목화나 목화로 만든 솜, ‘면밀綿密’하다 할 때처럼 자세仔細하고 빈틈이 없음을 뜻한다. 여기서 ‘실 사/멱糸’가 먼저 있었고 나중에 ‘솜/이어질 면綿’이 생긴 것을 두고 비단이 먼저 있었고 나중에 무명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하고, ‘실 사/멱糸’ 옆에 음을 나타내는 ‘성씨 씨氏’를 붙여 ‘종이 지紙’가 되는 것을 보면서는 천이 종이 대신 먼저였다가 나중에 종이가 생겨난 것도 알 수 있다 한다.

이렇게 글자들에는 뜻이 담겼고, 역사가 담겼으며, 인간의 삶이 담겼다. ‘맺을 결結’은 끊어진 것을 다시 잇는 것이기도 하고, 한 가닥 한 가닥 간추려 보기 좋게 정리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별히 끊어진 것이 다시 이어질 때에는 끊어져 이쪽과 저쪽이 어디에 얼마나 어떻게 떨어져 있는 지도 몰랐으므로, 애초에 맺어지기를 바랐던 그대로 다시 맺어지지는 못할지라도 매듭을 다시 묶느라고 사용된 부분만큼은 서로 간에 더 짧아지고 가까워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이 끊어졌다가 이어지는 것들에게 위로가 되지만, 끊어졌다가 맺어지는 과정은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하며 매듭이 맺어지느라 마음이 어수선하게 얽히기도 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인간과 계약을 ‘맺으면서’ 비로소 인간의 삶이 구원을 향한 발걸음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한 해를 마감할 무렵이면 누구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시 정리하고 추슬러서 끊어진 것들을 잇는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맺어지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진다.(참조. 마태 16,19;18,18)

고양이 묘猫

‘고양이 묘猫’의 본래 글자는 ‘묘貓’이다. 이 ‘묘貓’라는 글자는 ‘豸’와 ‘苗’가 더하여 만들어졌다. 앞의 글자인 ‘豸’는 ‘벌레 치, 해태 채/태豸’인데 이는 ‘삵 리貍’의 줄임 글자이다. ‘豸’는 왼쪽에 붙어 다른 글자와 함께 글자를 만들 때 ‘갖은돼지시변’이라 한다. ‘豸’라는 글자가 원래 ‘돼지 시豕’이고, 「훈에 ‘갖은’이 붙는 경우는 원래의 글자에서 더 많이 갖추었다, 즉 획수가 더 많다는 뜻으로 豸는 豕보다 획을 더 많이 갖추었다는 뜻(박홍균)」이라는 해설에 따라서 획이 더 많은 글자인 ‘豸’가 되었다는 것이다. ‘豸’라는 글자는 생김새에서 금방 짐작이 가듯이 맹수가 발을 모으고 등을 높이 세워 덤벼들려는 모양을 본뜬 것이다. 여기에 ‘싹 묘苗’를 붙여서 ‘고양이 묘猫’가 되었으니 ‘풀 초艹’ 더하기 ‘밭 전田’인 ‘싹 묘苗’의 내용까지 헤아리면 종합적으로 ‘고양이 묘猫’라는 글자는 ‘삵처럼 생긴 동물이 밭에서 나는 식물의 싹을 갉아먹으려는 쥐를 잡으려는 상황’을 담는 것이다.

뜻은 그렇다고 쳐도 ‘고양이 묘猫’라는 글자가 ‘싹 묘苗’의 발음으로 보아 우리가 ‘냐옹냐옹’이라 하는 것을 중국 사람들이 ‘miao miao’라고 들어서 그 울음소리와 ‘묘苗’의 발음이 비슷해서 그렇게 쓰게 되었다는 해설도 있다. 그래서 ‘입 구口’를 붙여 ‘고양이 우는 소리 묘喵’라 하는 글자도 있다.

고양이는 동서고금을 통해서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고 수많은 이야기들을 지어냈다. 우리는 고양이를 ‘냐옹이’라 부르기도 하고 ‘괭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나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냐옹이나 고양이의 준말인 괭이는 이해가 가지만 ‘나비’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칭호이다. 어원상으로 ‘나비’를 우랄 알타이어 계통의 언어에서 ‘무는 짐승’이라 했다는 정도가 맞을까? 고양이가 나비를 좋아하고 따라가며 뛰는 모습을 많이 보는 것에서, 혹은 동양화에서 나비와 고양이가 같이 그려지는 여러 경우들(예. 김홍도의 황묘농접도黃猫弄蝶圖)에서, 원숭이의 옛말인 ‘납(=잔나비, 잰나비)’에서 나무를 잘 타는 원숭이처럼 고양이도 나무를 잘 타는 것에서, 고려 때 우리나라에 찾아온 페르샤 상인들이 고양이를 가져와 왕에게 드리며 랍비의 수호물이라고 했던 것에서, 심지어는 고양이의 귀가 쫑긋해서 나비처럼 생긴 것에서…등등 여러 추측들이 있지만 추측일 뿐이다.

고양이는 동양화에서 ‘묘猫’의 발음이 70 노인을 뜻하는 한자 ‘어르신/늙은이 모耄’와 발음이 같아 장수하시라는 기원이 되며, 고대 이집트에서는 다산과 풍요의 여신이 되고,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에게는 왈츠의 멜로디와 리듬이 되고, 덩샤오핑(鄧小平)에게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 되며, 브로드웨이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는 뮤지컬이 되고, 인류의 역사 안에서는 기나긴 항해를 비롯하여 심지어 우주로까지 여행한 여행자가 되며, 일본의 가게들 앞에서는 손님과 복을 부르는 손짓이 된다.

내가 사는 수도원에도 밖에서 살다가 수도원 식구들이 된 고양이들 셋이 있다. 지토라는 노랑고양이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왕초이고, 차세대 주자로 노랑고양이를 가끔 놀리는 스모키라는 혼합색깔을 띤 녀석이 있는가 하면, 가끔 생각날 때만 집안에 들어오는 무명의 새카만 고양이가 있다. 나이가 지긋하고 거동이 여의치 않으신 할배들 모두 한결같이 고양이를 좋아하고 거부감을 갖지는 않는다. 고양이들은 집안 어디나 휘젓고 다니면서도 가야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아는 본능이 있고, 가끔 할아버지들 품에 올라가서 하루 종일 쓰다듬어 달라하기도 한다.

고양이는 눈, 귀, 입, 수염, 털, 꼬리, 입술, 발과 발톱, 온 몸을 이용하여 자기 의사를 표현할 줄 알아서 영악하다. 고양이는 사랑스럽고 비벼대며 사랑받으려고 애쓴다. 호기심이 많은 고양이는 하는 짓이 귀여워 사람들을 웃게 한다. 고양이는 수시로 제 몸을 정리정돈하며 귀찮은 흔적을 숨기려하므로 깔끔하고 새침데기이다. 고양이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자느라 대체로 조용하다. 자고나면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며 사람 흉내를 내고 긴 꼬리를 거의 수직으로 세워 놀아 달라 한다. 이렇게 고양이 나라에서는 고양이가 제일이고 고양이의 임무는 그저 노는 것이며 그 놀이는 쥐잡기나 자기 꼬리잡기 같은 것이겠지만, 인간이 고양이를 두고 오래전부터 터득한 보편적 교훈이요 명제라면 그것은 ‘쥐도 궁하면 고양이를 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원래는 ‘궁서설리窮鼠齧狸(狸삵 리)’를 바꿔서 썼다는 ‘궁서설묘窮鼠齧猫(窮궁할 궁, 鼠쥐 서, 齧깨물 설, 猫고양이 묘)’라는 말이 기원 전부터 있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어떤 때는 약자도 믿지 못할 강자가 되고, 패자도 이를 악문 승자가 되기도 한다. 그게 세상 이치이다. 그 누구라도 한편에서 일방적으로 다른 쪽을 너무 몰아세우지는 말아야 한다. 적당한 선에서 못 이기는 척 주저앉기도 해야 한다. 이기기만 하다가도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게 지기도 해야 한다.

인간사의 처세는 그런 것이지만,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설 때의 처세는 무조건 지기만 해야 한다.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 그리고 사람들을 끝까지 참고 또 참아주시는 인내의 하느님께는 다소 불경스러운 표현이지만, 하느님은 인간을 끝까지 몰아붙이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참조. 욥 19,22) 그분 앞에는 인간의 허술한 처세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야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앞에서는 그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하기만 해야 한다.

비/빗자루 추帚

『帚가 빗자루의 상형이라는 것은 허구고, 본래 새를 그린 글자가 조鳥-추隹-추帚로 점차 추상화가 진행돼 만들어진 형태다.(이재황의 한자 이야기, 고전문화 연구가, 2008.03.21, 프레시안 연재물에서)』라는 의견이 있지만, 대체로 ‘비/빗자루 추帚’는 집안을 청소하는 도구인 빗자루가 거꾸로 서 있는 형상이라 한다. 위쪽 ⺕ 부분이 물건을 쓸어내는 부분이고, 아래 巾 부분이 손잡이이며, 중간의 冖 부분은 끈으로 묶은 모양 또는 걸개라고 보는 것이다. 빗자루의 솔에 해당하는 글자 위의 ‘돼지 머리(고슴도치의 머리) 계彐’ 아래에 있는 ‘수건 건巾’ 그리고 함께 글자를 이루는 ‘멀 경冂(경계나 둘레)’의 합자로 보아서 ‘추帚’라는 글자를 그 모양 그대로, 그 뜻 그대로 어떤 일정 테두리 내를 빗자루로 쓸고 수건에 물 적셔 깨끗이 닦는 것이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추帚’라는 글자 앞에 ‘여자 녀/여女’를 붙인 ‘며느리/아내 부婦’라는 글자를 놓고 빗대어 여자는 시집 올 때에 빗자루를 가지고 와야 한다거나, 여자는 집안 마당이나 쓸고 청소나 하는 사람이라는 우스개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좀 남성편의주의를 담은 오해이지 싶다. ‘추帚’라는 글자가 쓸고 닦아 치장하고 깨끗하게 하여 고운 상태의 의미를 담는다면 ‘부婦’라는 글자는 ‘가장 곱고 예쁜 여자가 나의 아내’라는 뜻도 되는 것이다.

원래 ‘비/빗자루 추帚’가 여성의 전용물이었던 것은 아마도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집안 청소를 하는 여인이 아니라, 정치·종교·민족이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고대의 제례의식을 앞두고 신에게 바치는 제단을 깨끗이 청소하는 신성한 물건인 작은 빗자루에 술을 묻혀 쓸고 털어서 신이 보기에 향기로운 제단을 장식하고 꾸미는 신성한 직무의 여인이라면 얘기는 아주 달라진다. 그렇다고 집안을 청소하는 것이 제단을 청소하는 것보다 하찮은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빗자루라면 뜰이나 마당을 쓰는 큰 대빗자루를 연상하게 마련이지만, 작은 공간을 쓰는 빗자루도 빗자루이다. 그래서 帚와 같은 음과 뜻을 갖는 같은 글자들로서 菷, 箒를 쓰기도 한다. 앞 글자는 풀을 묶어 만든 빗자루여서 ‘풀 초艹’를 올렸고, 뒤 글자는 싸릿대 같은 것으로 만든 빗자루여서 ‘대 죽竹’을 올렸을 뿐이다. ‘비/빗자루 추帚’ 앞에 ‘손 수扌’를 붙이면 ‘청소淸掃(맑을 청, 쓸 소)하다’ 할 때의 ‘쓸 소掃’가 된다.

괜히,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마음이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무의식중에 내면의 불안이 외양의 나를 어수선하게 만든 것이다. 이럴 때는 왜 그러는가를 수십 번 되물어보다가 그마저 안 되겠다 싶으면 몇 평 안 되는 방을 이리 저리 청소한다. 먼지도 닦아보고 마시던 찻잔도 닦아보고, 책상도 닦아본다. 조그만 방에서는 진공청소기가 너무 요란해서 겁난다. 그래서 먼지들이 날리지 않게 조심스레 쓴다. 인간만이 부질없고 쓸데없는 쓰레기를 생산하고 축적하는 습성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빗자루로 대표되는 ‘청소’는 사람을 차분하게 한다.

옛날 우리 집엔 닳고 닳아서 어디에도 쓸 수 없는 빗자루이지만 곱게 보관했다가 겨울이 오기 전 문풍지와 같은 것을 붙일 때 풀을 바르는 빗자루로 쓰고 물에 빨아 다시 보관하던 몽당 빗자루가 있었다. 曹操(조조)의 아들 曹丕(조비)라는 이가 썼다는 ‘家有敝帚가유폐추 享之千金향지천금’이라는 말이 있다. ‘폐추敝帚(해질/닳아질 폐)’는 말 그대로 닳아빠진 몽당 빗자루이니 이를 천금으로 여긴다는 듯이다. 조비는 문인들의 조예를 두고 에둘러 비판하며 말했지만, 어찌 되었든 원래 아무 것도 아닌 빗자루를 가지고 지상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처럼 생각한다는 말도 되고, 거꾸로 남들이 아무리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해도 내게는 애지중지 천금과도 같은 것이라는 말도 된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옛사람들이 ‘혜성彗星’이라는 별을 두고 ‘빗자루별’이라 했다는 내용이다. 『삼국유사 제26대 왕 진평왕眞平王(재위 579∼633년) 때 승려 융천사融天師가 지은 향가 ‘혜성가融天師彗星歌條’에서는 혜성을 ‘길쓸별’로 묘사한다. 길다란 꼬리를 늘인 혜성의 모습을 길을 쓰는 빗자루로 본 것이다. 혜성의 한자어 ‘혜彗’도 빗자루를 뜻한다. 그러니 동양에서는 혜성을 ‘빗자루 별’로 본 셈이다. 서양에서도 혜성 중에서 특히 빗자루 모양의 것을 ‘빗자루 별broom star’로 부르기도 한다.…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빠른 것은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빗자루별’이다. 그러니 헛간에 있는 빗자루에 마법을 걸어 타고 날아다닌다면, 그것은 바로 혜성을 타고 날아다니는 셈이다. 그 정도 빠르기는 되어야…손오공은 근두운筋斗雲을 타고 단숨에 108,000리를 난다고 하는데, 단숨을 1초라고 하면 1초에 42,400킬로미터, 즉 지구 한 바퀴를 돌고도 남는 속도이다.(정창운·이정모, 해리포터 사이언스)』

해리포터를 비롯해 서양 동화에서 마귀할멈이나 요술 할머니는 일반적으로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난다. 애들은 빗자루 타고 놀기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오래 전부터 빗자루를 타고 골을 넣는 퀴디치Quidditch라는 게임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팀을 꾸렸으며 월드컵 대회까지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마귀할멈이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것을 두고 빗자루는 양陽(막대기)과 음陰(솔)의 조화와 균형이니, 아니면 빵을 만들던 여인들이 호밀에 기생하여 생긴 맥각麥角 균 어딘가에서 일종의 환각 작용을 하는 요소들을 발견하였고, 이를 연고로 만들어 사타구니나 겨드랑이 같은 예민한 부분의 피부를 통해 흡수하느라 빗자루 손잡이에 그 연고를 묻혀 흡수하던 것이라든지 하는 여러 설명들이 있지만(참고. ‘Why do witches ride brooms’라는 주제로 Google 검색한 내용), 아무튼 빗자루는 청소나 제단 장식을 떠나 놀이이고 환상이며 재미이다.

그러나 성서의 빗자루는 엄마의 맴매처럼 무섭다. “나는 또 그곳을 고슴도치의 차지로, 물웅덩이로 만들고 그곳을 멸망의 빗자루로 쓸어버리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이사 14,23)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 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시편 90,5) “나는 모든 것을 땅 위에서 말끔히 쓸어버리리라. 주님의 말씀이다.”(스바 1,2) 하는 말들이 있기 때문이다.

넘어질 도倒

‘넘어질 도倒’라는 글자는 ‘사람 인亻’ ‘이를 지至’ ‘칼 도刂’라는 세 글자가 합하여져 있다. ‘사람 인’과 ‘칼 도’는 익히 짐작이 간다. 문제는 가운데에 있는 ‘이를 지至’이다. ‘이를 지至’라는 글자는 맨 밑의 한 획을 땅이라고 볼 때에 그 땅에 내려꽂히는 화살의 모습이거나 새가 땅을 향하여 내려앉는 모양이라 하여 ‘이르다, 다다르다’를 뜻하면서 어딘가에 다다라 마침내 뭔가 상황을 연출하게 되므로 ‘영향’을 미치거나 ‘지극’한 경우, ‘힘쓰다’는 내용이 된다. 심지어甚至於(무엇인가가 심하게 처지를 악화하는 경우), 지독至毒(하다-정도가 심하여 죽음에 이르는 독과 같다), 지천至賤(에 깔려있다-매우 많거나 더할 나위 없이 천박한), 지성至誠(이면 감천)과 같은 말을 쓸 때 모두 이 ‘이를 지至’를 쓴다.

이와 같은 ‘이를/다다를 지至’를 바탕으로 ‘넘어질 도倒’를 종합적으로 보자면 사람이 칼이나 화살에 맞아 거꾸러져 땅에 다다른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된다. 똑바로 서 있어야 할 사람이 고꾸라져 있거나 뒤집어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넘어질 도倒’는 ‘욕할 매罵’를 더해 ‘매도罵倒’가 되면 누군가에게 몹시 욕을 해서 상대방이 넘어지게 하려는 것이고, ‘누를 압壓’을 더해 ‘압도壓倒’가 되면 누군가를 눌러서 넘어뜨리는 것이며, ‘칠/두드릴 타打’를 더해 ‘타도打倒’가 되면 누군가를 두들겨 패서 땅에 엎어지게 만드는 것이고, ‘군사 졸卒’(졸은 전선의 맨 앞에서 갑자기 끝나는 존재여서 ‘갑자기’라는 뜻도 지님)을 더해 ‘졸도卒倒’가 되면 갑자기 넘어져 정신을 잃는 것이며, 오른 쪽에 ‘머리 혈頁(머리 수首의 옛글자)’을 지닌 ‘꼭대기 전顚’을 더해 ‘전도顚倒’가 되면 머리가 발이 되고 발이 머리가 되는 상황처럼 엎어지고 넘어지는 것이 된다. 이 말은 우리가 흔히 ‘주객전도主客顚倒’라는 말에서 쓰는 바로 그 말이다. 이러한 ‘넘어질 도倒’를 앞에 놓고 뒤에 ‘두다/둘 치置’를 붙이면 ‘도치倒置’가 되면서 말을 거꾸로 두는 거꾸로 말이 되고, ‘섞이다, 어지러워지다, 등지다’는 뜻을 지닌 ‘섞일 착錯’을 붙이면 ‘도착倒錯’이 되어 이것저것이 뒤죽박죽 어긋난 상황이 되면서 흔히 ‘성도착性倒錯’ 할 때에 쓰는 그런 말이 되며, ‘낳을 산産’을 붙이면 ‘도산倒産’, 곧 개인이나 기업이 올바르지 않게 뒤집어져 재산을 잃고 망하고 파산하는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나뒹굴었던 것이 한 20년은 되었을까? 어젯밤 오랫만에 넘어졌다. 밤길에 엎어졌다. 심하게 뒤집어졌다. 깜깜함 속에서 아픔을 한참 참아냈다. 아픔 속에서도 웃다보면 훨씬 통증이 완화되는 효과가 있다는 말이 떠올랐고, 그 순간엔 그것밖에 할 것이 없어서 어설프게 웃어댔다. 어쩌면 혼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방에 올라와보니 팔꿈치니 무릎 관절이니 서너 곳 피가 흘렀다. 빈센트 반 고흐의 ‘꽃게’ 그림이 생각났다. 4살 아래 동생에게서 평생 신세만 지고 살아야 했던 빈센트가 그렸던 그림,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걸려있다는 그림, 거의 생애 말기쯤에 그렸을 것으로 기억되는 그림이었다. 빈센트의 꽃게 그림을 아마도 15년쯤 전에나 사진으로 처음 보았을 것이다. 그때에 ‘엎어져 버둥거리는 게는 자신이고 올바르게 서 있는 게는 동생 테오일까? 빈센트는 형제를 이렇게 그리고 싶었던 것일까? 빈센트는 자신이 엎어져있어서 곧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내다본 것일까?…등등’ 오랫동안 마음 아프게 그 그림을 보았던 생각들이 났다.

빈센트에게는 그것이 마지막 즈음이었을지 모르지만, 바오로 사도가 “우리는 모두 땅에 엎어졌습니다.”(사도 26,14) 했을 때, 그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시작이었다. “의인은 일곱 번 쓰러져도 일어나지만 악인은 불행 속으로 넘어진다.”(잠언 24,16) 했다. 부디 불행 속으로 넘어지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글월 문文

‘문文’을 얘기할 때 통상 ‘글월 문文’이라고 하지만, ‘등 글월문’이라 하기도 한다. 글자의 생김새가 등을 돌린 듯이 보이는 ‘글월 문’이라는 뜻이다. ‘글월 문文’을 획수나 모양이 비슷하여 ‘몽둥이 수殳’나 ‘칠 복攵’과 같은 글자로 보기도 하지만, 역사나 내력을 가진 글자로서 자기 고유의 뜻을 지니고 수많은 세월을 살았던 글자, 신발 치수를 가리키는 말이나 사람들 성姓의 하나인 것을 떠나서라도 수십 가지의 뜻을 지니는 글자, 그럼에도 일반적으로는 ‘문장文章’이라는 뜻과 함께 ‘무武’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학문學問ㆍ학예學藝ㆍ문학文學ㆍ예술藝術 등을 이르는 글자가 바로 ‘글월 문文’이다. 500년 쯤 전인 1446년의 훈민정음 언해본에 ‘글월’을 ‘글왈’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 ‘글왈’과 근접한 말로 ‘글발(=적어놓은 글-표준국어 대사전)’이라는 말이 있다니 ‘문文’이라는 글자를 두고 ‘글월’ 문이라 한 것은 이래저래 흔히 ‘말발이 세다’할 때처럼 ‘글발이 그럴 듯하다’는 뜻을 담아 ‘아름답고 수려한 글’을 뜻하고자 했던 것일까?

‘글월 문文’이라는 글자는 상형문자이다. 혹자는 양팔과 두 다리를 활짝 벌리고 서 있는 사람의 모양을 본뜬 ‘큰 대大’의 다리부분이 양쪽으로 꼬아져 양반다리하고 앉아서 공부하는 모양이라 하기도 하지만, 원래는 사람의 가슴 부위에 문신으로 무늬를 새긴 모습이다. 고대에는 종교적 의식과 아이가 성인이 되어 부족사회의 성원에 가입하기 위한 통과의례로서 신체에 문신을 넣든가, (혹은 시체를 신성하게 치장하는 의식으로서 문신을 새기든가) 그림물감으로 장식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 ‘문文’이다.

그렇게 문신→무늬→글자→문장→학문→문화文化→문명… 이런 식으로 뜻이 발전하였다. ‘문장文章’이란 단어에 나오는 ‘글 장章’이라는 글자도 문신을 새기는 침(매울 신辛)과 문신의 모양(이를 조早)이 들어 있는 글자이다. 영어로 tattoo인 ‘문신文身’이라 할 때도 ‘몸 신身’에 ‘글월 문文’을 붙인다. ‘무늬 문紋’은 ‘실 사糸(=실)’를 옆에 붙여서 실로 짜는 옷감이나 천에 문신을 새기듯 무늬 새긴 것을 뜻한다. ‘어지러울 문紊’자도 ‘무늬 문紋’과 마찬가지로 ‘실 사糸’와 ‘글월 문文’이 합해진 글자이긴 하지만, ‘실 사糸’ 위에 ‘문文’을 올려붙여 ‘실(糸)로 짠 무늬(文)가 어지럽다’는 뜻을 담는다. 그래서 ‘문란紊亂’ 하면, ‘어지럽고(紊) 어지럽다(어지러울 난/란亂)’는 뜻이다. ‘흩어질 산散’을 붙여 ‘산문散文’이 되면 ‘정돈되지 않고 흩어진(散) 글(文)’로, 일정한 형식이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문장으로 소설이나 수필 등의 글이 되고, ‘운 운韻’을 붙여 ‘운문韻文’이 되면 ‘운율(韻)이 있는 글(文)’로, 보통 시詩의 형식으로 지은 글이다.

가슴에 새긴 무늬처럼 소박하더라도 가슴으로 쓰는 글이 좋은 글이라 했다. 가슴으로 새겨서 쓰는 글은 다른 사람의 가슴에도 자국을 남기는 글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때, 글을 쓰다보면 보아주는 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 글을 내가 왜 이렇게 쓰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1915~1968년) 같은 이는 글쓰기만이 침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거룩함에 이르는 자신의 길임을 알아서 썼다고 하지만, 나 같은 이에게는 아마도 너무도 부끄러운 내 마음 속을 그 누구에게도 열어 보일 용기가 없어서, 그래도 살아있어서, 개발새발 무늬를 새겨가듯이 끄적거리는 것일 게다. 그러다가 얼핏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어떤 문장, 어떤 단어들에 살짝살짝 자기의 속마음을 담아 흔적을 남기는, 아마 남모르는 고백일 것이다. 그래서 쓸 것이다.

일찍이 모세는 하느님의 마음을 돌 판에 새겼다.(참조. 탈출 34,28)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것을 몸소 돌 판에 “써서 주셨다”(신명 4,13;10,4)고 표현한다. 내가 과연 내 마음에,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에 새기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아니 어쩌면 내 인생 안에 하느님께서 새겨 주신 무늬를 어떻게 보존하고, 어떻게 내보여야 하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이미 뭉그러져버린 그 무늬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잠잠할 묵默

‘잠잠할 묵默’은 ‘묵黙’과 같은 글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음音을 나타내는 ‘검을 흑黑’과 ‘개 견犬’이 합하여 이루어진다. 개(개 견犬)가 소리를 지르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인데, 어둔 밤(검을 흑黑)에 검정색 개가 가만히 있는 것을 상상하면 대충 이해가 간다. 그래서 생겨난 ‘잠잠할/묵묵할 묵默’은 어떤 이가 말을 하지 않는 상황이다.

‘묵默’이라는 글자의 부분인 ‘검을 흑黑’은 사람이 서 있고 그 얼굴과 온 몸에 검게 칠한 상황이다. 칠은 숯이나 검댕이로 한다. 곧 얼굴과 온 몸에 숯으로 칠하는 것인데, 이는 죄인을 벌하는 형벌의 일종이다. 그렇게 생겨난 검정색의 의미는 ‘나쁘다, 저녁, 은밀한’의 뜻으로까지 나아간다. 글씨를 쓰기 위해 숯검정과 흙으로 만든 ‘먹 묵墨’이라는 글자도 ‘검을 흑黑’ 밑에 ‘흙 토土’를 붙여 그렇게 생겨났다. ‘검을 흑黑’에 ‘입 구口’를 붙이면 ‘입을 다물다’는 뜻이 되어 ‘잠잠할 묵默’과 거의 같은 ‘고요할 묵嘿’이 된다. 그래서 ‘묵默’은 ‘묵嘿’이다.

인류의 역사 안에서 소위 수도修道 정진하는 이에게 가장 중요한 글자 하나를 꼽으라면 그것은 ‘묵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이 ‘묵默’과 조합하여 만들어진 침묵沈默, 묵인默認, 묵념默念, 묵도默禱, 묵묵默默, 묵상默想, 묵묵부답黙黙不答, 묵살默殺 같은 말들은 무게감을 지닌다.

성철性徹(1912년~1993년) 큰 스님께서도 당나라 때의 승려 영가현각永嘉玄覺 대사大師(637/665~713년)의 시편으로 알려진 「증도가證道歌」를 해설하실 때에 ‘말씀 설說’과 ‘고요할 묵默’으로 선禪의 오묘한 경지에 관한 가르침을 주셨다. ‘말 없을 때 말을 하고 말을 할 때 말 없음이여默時說說時默(묵시설설시묵)’ 하신다. ‘묵이 곧 설이고 설이 곧 묵이라’ 하신다. 『…적적한 가운데 광명이 있고 광명이 있는 가운데 적적함이 있어서 말과 묵이 완전히 통하는 것…그리하여 죽음 가운데 삶이 있고 삶 가운데 죽음이 있는 것과 같이, 움직임 가운데 머무름이 있고 머무는 가운데 움직임이 있어서 움직임이 머무름이고 머무름이 움직임이며, 진(眞)이 곧 가(假)요 가(假)가 곧 진(眞)…이와 같이 모든 양변이 원유무애圓融無愛하고 융통자재融通自在한 것을 표현하여 ‘묵묵할 때 말하고 말할 때 묵묵하다’고 한 것이니, 이것은 전체에 다 통하는 것…』이라 하신다.

‘묵默’은 말이 없어도 백 마디 천 마디 말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고, 백 마디 천 마디 말이 있어도 조용함이다. 너와 나에게 모두 넉넉한 웃음이다.

그리스도교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음”(요한 1,14)을 믿는다. 성경이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코헬 3,7)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들어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함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묵默’은 ‘들음’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이다. 그래서 생명이 있는 사람이고자 함이다. ‘묵默’이라는 글자 하나에 이렇게 죽음도 있고 생명도 있다.

기쁠/기뻐할 흔欣

‘기쁘거나 반가워 기분이 좋다’는 것을 묘사할 때에 ‘흔연欣然하다’ 하고, ‘흔연스레’라고 하면 ‘기쁘거나 반가워 기분이 좋은 듯하여’라는 뜻이 된다. ‘기꺼운 마음으로 누군가를 잘 대접’하는 것을 ‘흔연대접欣然待接’이라 하고, ‘기쁘고 유쾌함’을 일컬어 ‘흔쾌欣快’라고 한다. 그래서 ‘흔희欣喜’는 ‘환희歡喜’와 같은 말이고, ‘흔감欣感’은 ‘기쁘게 여기어 감동함’을 표현하고, ‘흔희작약欣喜雀躍’은 ‘몹시 좋아서 뛰며 기뻐하는 것’이며, ‘흔흔欣欣하다’는 ‘매우 기쁘고 만족스럽다’는 말이 된다. 참고로, 이 말은 ‘훈훈薰薰(항초 훈)하다’라는 말과는 다른 말이다.

어떤 이는 이러한 말들의 앞머리인 ‘기쁠/기뻐할 흔欣’이라는 글자를 빙자해서 우리말의 ‘흔들다, 흔들대다, 흔들리다’라는 말들이 ‘기쁠 흔’과 어깨가 들썩거리는 상태를 묘사하는 ‘들썩이다’에서 파생되었다고도 하지만 이는 억측이다. 국립국어원에 의하면 ‘흔들다’는 순우리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기쁠/기뻐할 흔欣’이라는 글자는 ‘도끼 근斤’이라는 글자와 ‘하품 흠欠’이라는 글자가 더해져서 이루어진다. ‘도끼 근斤’은 오른 쪽으로 90도를 돌려놓고 볼 때에 도끼의 머리(가로 획)와 도끼의 자루(세로 획)가 나무를 내려치는 모습이다. 그렇게 도끼로 나무를 내려치면 나무가 갈라지고 틈새가 벌어지거나 뻐개진다. 기뻐서 크게 웃을 때에도 입이 크게 벌어져 웃는다. 옆에 붙어 있는 ‘하품 흠欠’ 역시 사람 위에 입을 크게 벌린 모습을 얹어 놓았다. 하품은 하지 않으려고 해도 절로 입이 벌려 하는 큰 호흡이다. 그래서 ‘기쁠/기뻐할 흔欣’은 마음이 무척 들떠서 나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려 웃는 상태이다. 틈새가 벌어지는 ‘도끼 근斤’ 쪽에 좀 더 무게를 두어서 ‘(실실 웃으며) 쪼개다’는 말이 나왔을까?

몇 달 전 언젠가 구순 잔치를 지내신 어르신께서 지난 한 달여 동안 몰라보게 웃음을 잃으시고 체중이 빠져나가는 듯하였다. 모셔다 좋아하시는 우거지 갈비탕을 대접해드리면서 억지로라도 자꾸 웃으시라고 했다. ‘그 동안 살만큼 살아서 좋은 꼴 많이 봤으니 괜찮다. 새로 오신 신부님께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 하셨다. 마음이 아팠다.

인생을 살다 보면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나는 때가 있고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나는 때가 있지만, 슬퍼도, 울고 싶어도, 억지로라도 웃어야 복이 온다. 그래야 죽지 않고 산다.

‘기쁠/기뻐할 흔欣’과 음과 뜻이 같은 글자들로서 ‘기뻐할 흔忻’은 ‘마음 심忄’과 합하여 마음이 기쁜 것이고, ‘기뻐할 흔訢’은 ‘말씀 언言’을 붙여 너에게서 나오고 나에게서 나가는 말이 기쁜 것이며, ‘화끈거릴 흔炘’은 ‘불 화火’를 더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기쁜 것이고, ‘기쁠 흔盺’은 ‘눈 목目’과 어울려 눈에 한가득 웃음이 가득하여 눈웃음치며 기뻐하는 것이다.

창세기의 사라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90이 된 나이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가져다주셨구나. 이 소식을 듣는 이마다 나한테 기쁘게 웃어 주겠지.”(창세 21,6)하고 말했지만, 지혜로운 자는 “어리석은 자의 웃음은 솥 밑에서 타는 가시나무 소리 같으니 이 또한 허무이다.”(코헬 7,6) 하고, “미련한 자들의 말은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그들의 웃음소리는 방탕한 죄악에서 나온다.”(집회 27,13) 하였다. 세상에는 비웃음도 많고 코웃음도 많으며 떠보고 속이는 웃음 또한 많지만, 올바르게 살아서 “우리 입은 웃음으로, 우리 혀는 환성으로 가득하였네.”(시편 126,2)하며 웃는 이들에게는 웃음이 끊일 날이 없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그 날에 천사는 “기뻐하여라!”(루카 1,28) 하는 말로 그 소식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