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루/누淚

‘눈물 루/누淚’라는 글자는 모양(形)과 소리(聲)가 합쳐져 만들어진 형성문자이다. ‘물 수, 삼수 변(氵=水, 氺, 물)’의 의미 부분과 ‘어그러질 려/여戾(→루)’라는 발음 부분이 더해져 만들어졌다. 눈에서 나오거나 괸 물이어서 눈물이니 ‘삼수 변’까지는 그렇다쳐도 ‘어그러질 려/여戾’는 좀 풀어보아야 한다.

‘어그러질 려/여/태, 돌릴 렬/열戾’는 ‘집/지게 호戶’라는 글자와 누구나 잘 아는 ‘개 견犬’이 합해진 글자이다. (흔히 쓰는 단어 중에 ‘돌아올 반返과 어그러질 려戾’를 써서 ‘반려返戾’라고 하면 ‘되돌려 보내지다’가 된다.) ‘집 戶’는 문의 반쪽이어서 구멍, 출입구, 방이라는 뜻으로부터 ‘도울 호護’와 음音이 같으므로 입구를 수호守護하는 것으로 막다, 지키다, 주관하다는 뜻으로까지 나아간다. ‘개 견犬’은 개가 짖는 입 모양을 강조하여 개의 옆모습을 그린 글자라고 하는 것은 쉽다. 그런데 어그러진다는 것과 개가 무슨 상관인가 싶다. 그래서 그 개가 문 밑으로 억지로 기어 나오다가 문이 비틀리고 어그러져서 어그러짐의 뜻을 지녔다고 풀기도 하지만, 문 앞에서 쪼그리고 있던 개가 집 앞에 불청객이 나타나면 맹렬하게 계속 짖는 상황으로 보아서, ‘어그러질 려戾’는 ‘안정하다, 이르다, 사납다, 맹렬하다’의 뜻을 지니게 되었고, 낯설고 의심스러운 사람에게 개가 짖는 모양에서 ‘죄, 허물, 법’의 의미까지로 나아간다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이런 내용을 전제하고 ‘눈물 루淚’를 보면 개가 계속해서 짖는 것처럼 계속 이어지는 것을 의미하고 ‘삼 수氵’와 결합하면서 마음의 문인 눈이 어그러져 눈물이 계속해서 흐르는 모양을 나타낸다. 더불어 물이 빠르게 흐르는 것이나 촛농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어그러질 려戾’에 ‘삼 수氵’대신에 ‘마음 심忄’을 더하면 ‘서러워 할 려悷’가 된다. ‘서러워 할 려悷’는 눈물이 하염없이 계속 흐를 정도로 마음이 어그러져 슬퍼하는 것이다. ‘입 구口’를 더하면 ‘울 려/여唳’가 된다. 입으로 엉엉 소리 내어 우는 것이다.

조그만 종잇조각만 보여도 누군가의 이름을 그적거리고, 그 이름만을 적어도 눈물이 터져 나오는 아픔이 있다. 그렇게 눈물이 소리 없이 한참을 흐르고 나면 그래도 죽지 못해 다음 순간을 마주할 수 있게 되는 슬픔이 있다. 그렇게 눈물은 아픔과 슬픔에 연결되어 있다. 동물들과 비교해서 사람들은 울면서 자주 눈물을 흘리고, 앓으면서 아프고, 슬퍼하면서 슬프다. 그러나 내가 괴롭고 답답한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것은 누군가를 슬프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특별한 사랑을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랑은 바다를 보면 바다여서 눈물이 나고, 산을 보면 산이어서 눈물이 나며, 하늘을 보면 하늘이어서 눈물이 난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어서 눈물이 나고, 꽃이 피면 꽃이어서 눈물이 나며, 별이 뜨면 별이어서 눈물이 난다. 눈물이라는 것이 비참한 인간이 품위를 지니는 마지막 방도이기 때문일까? 슬픔과 신음의 눈물은 고운 이의 볼을 녹아내리게 한다. 이럴 때의 눈물은 울어서는 안 된다는 울음과 울기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두 울음이 부둥켜안고 우는 울음이다.

눈물은 소금 맛이다. 눈물이 땅에 떨어질 때에는 이름 없는 작은 풀꽃이라도 한 송이씩 그 자리에 피어나기를 기도하기도 해 보지만 이내 그런 소박한 바램마저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몰아치면서 쓸쓸해진다. 눈물은 늘 바람을 동반하고 비를 친구한다. 그럴 때 눈물은 스스로 노랫말이 된다. 눈물로써만 씻을 수 있는 죄들이 있지만, 눈물로도 씻어지지 않는 죄들이 있다. 눈물을 흘려서 뉘우쳐야 하는 자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거저 레테를 건너고 생수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깨트림이다. 그래서 자신의 눈물로써 항상 미소를 감추고 자신의 미소로써 항상 눈물을 감추어야 하는, 아직 이 땅의 광대들은 얼굴 위의 흰 칠을 매일 덧칠한다.

기억記憶

사람마다 기억의 저장고에서 꺼내는 것들이 어쩜 그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도대체 ‘기억記憶’은 무엇일까?

‘기억’의 ‘기’는 ‘기록할 기記’이다. ‘기록할 기記’는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과 음을 나타내는 ‘몸 기己’가 합하여 생긴 글자이다. ‘말씀 언言’은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서 ‘매울 신辛’이라는 글자 밑에 ‘입 구口’가 붙어 있는 형상이므로, ‘매울 신辛’이 창이나 꼬챙이의 형상이고 보면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상대방에게 곧장 날아가거나 날카롭게 가서 꽂히는 것이다. 그리고 ‘몸 기己’는 사람이 꿇어앉거나 몸을 굽히고 있는 형상, 혹은 구불구불한 끈 같은 것이다.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말씀 언’과 ‘몸 기’를 합해서 함께 정리하면, ‘기록할 기記’는 사람들 입에서 나가 상대방을 찔러대고 아프게 한 말들, 얽히고설킨 인간사의 굽어지고 산만한 것들, 뒤섞인 것들을 꿇어앉아 가지런히 적고 펴서 정리하는 것이라는 뜻을 담는다.

나의 기억을 적었다고 해도 그것은 너의 기억과 전혀 딴 소리가 되기도 한다. 인생사에서는 왕왕 나의 소중한 기억들이 상대방에게 다 다른 말로 적혀있을 때가 많다. 그리고 세월이 아주 많이 흐른 다음에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그 기억의 다른 끝을 발견할 때는 놀란다. 내가 가늠할 수 없었던 섭리의 오묘함, 기어이 나에게 와 닿아야만 했던 그때 그 일의 끝이 여기란 말인가 하게 될 때는 말이 없어질 수밖에 없다. 과거·현재·미래라는 구분으로, 연월일, 시분초로 끊임없이 쪼개지고 결국은 소멸되어 ‘시간’이라는 것이 본성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기억이라는 것이 현재의 찰나요 순간일 뿐이라 하더라도, 그럴 땐 그저 눈물이 난다. 말을 해버리면 그나마 아주 조금이라도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너와 나의 인연이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내내 해오다가, 너무 미워서 내 마음 속에 혼자 기억해놓기로 했던 것들을 막상 말해놓고 나면 그래서 후회가 된다.

‘기억’에서 뒷 글자인 ‘생각할 억憶’은 뜻을 나타내는 심방변(忄=心, 㣺 마음, 심장)과 음을 나타내는 ‘뜻 의/기억할 억意’이 합쳐진 글자이다. ‘의/억意’이라는 글자는 또 ‘소리 음音’과 ‘마음 심心’의 합자이니 마음에 있는 것이 소리되어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의/억意’을 만드는 윗부분 ‘소리 음音’은 ‘말씀 언言’의 ‘입 구口’ 속에 ‘하나 일一’을 더한 모양으로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 노래 부르거나 외우거나 하는 소리에 곡조를 붙인 것이다.

언言, 음音, 의/억意은 말, 소리, 뜻으로 점점 발전한 모양새다. 이는 모두 주술 통 같은 모양에서 나온 글자들이라 하기도 하여 주술사들이 주술 통에 뭔가를 넣고 흔들어대면서 나는 소리를 바탕으로 생겨났다 한다. 사람들은 주술을 통해 깨우친 신의 뜻을 헤아려 생각하고 마음에 담고 말하며, 소리 내고, 뜻을 새긴다.

목구멍 속에서 나는 소리, 뚜렷한 말이 되지 않는 음성이 ‘기억할 억’이 되어 마음에 단단히 눌러 새겨진다. 마음에 눌러 쓰는 것이 ‘억憶’이다. 그래서 memory이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에게 눌러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과 영혼의 기억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느님에게까지 도달하는 여정을 ‘기억’이라 한다.

달 월月

조카들 중에 기상천외한 발상과 억측으로 나를 대경실색大驚失色하게 하고 포복절도抱腹絶倒하게 하는 녀석이 하나 있다. 그렇다고 어린 나이는 아니고 아마 50쯤은 다 먹어갈 나이임이 분명하다. 언젠가 ‘구름 운雲’에 대한 글을 썼더니, ‘운수대통’과 ‘안전운전’으로 댓글을 달기도 하고, ‘입 구口’에 대해 쓴 글을 보고는 ‘구관명관’ ‘구사일생’으로 댓글을 달아 나를 웃게 만든다. 그래서 ‘구관명관 구사일생, 절묘하다 아연실색’이라고 말도 안 되는 4언 절구를 읊어줬다.

낮에 밝은 것은 해(날 일日)이고 밤에 밝은 것은 달(달 월月)이다. 그래서 달은 ‘밝다’는 뜻을 지녔다. 아울러 우리말의 ‘달’이 ‘ᄃᆞᆯ’에서 왔으므로 높은 것, 넓은 것, 큰 것이라는 뜻을 담는다. 해는 이지러짐이 없이 항상 둥근 모양이므로 둥근 모양 가운데 점을 찍어 ‘날 일日’이 되었지만, 달은 매번 기울고 차는 것을 반복하여 초승달이나 반달 모양이 되므로 글자 아래를 터놓고 가운데에 점 두 개를 찍어 ‘달 월月’이 되었다. 이런 달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진 글자 중에 ‘달 월月’의 옛 글자인 ‘저녁 석夕’도 있다. 저녁이 되면 달이 반쯤 뜨기 때문에 ‘달 월月’에서 점을 하나만 찍어 만들었다. ‘고기 육肉’의 간략형과 ‘달 월月’이라는 글자가 똑같은 글자이긴 하지만, 약간 다르다. 많은 경우에 글자의 왼쪽이나 아래에 붙으면 ‘고기 육肉’의 간략형이 붙어서 글자를 만든 것이고(예. 간肝, 항문 항肛, 복부 두肚, 기를 육育, 안주 효肴…), 오른 쪽에 붙어서 글자를 만들면 ‘달 월月’이 붙어서 글자를 만든 것(예. 밝을 랑朗, 아침 조朝, 바랄 망望…)이다.

속인에게 달은 외로움이고 눈물이며 멀리 있어 가 닿을 수 없는 곳이지만, 시인詩人에게 달은 벗님이고 놀이이며 나와 하나 되는 상징으로 누구나 가 닿는 곳이다. 세속의 달은 항상 동경이고 그리움이며 한恨이지만, 성경의 달은 항상 찬미의 도구이고 징조의 표징이며 조물주를 섬기는 시간이다. 달은 내 옆에도 뜨고 멀리도 뜨며 내 안에도 뜬다. 달은 싸늘했다가 부드러웠다가 나를 축축하게 젖게도 한다.

달은 이래저래 바라보는 인간에게 ‘생각’이다. 그래서 너나 나를 가늠하기 한참 전 집회서의 저자 벤 시라크는 “내게는 아직 할 말이 많으니 보름달처럼 온갖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집회 39,12) 한다.

미안未安

‘나무 목木’이라는 글자가 땅 밑에 세 가닥으로 뻗어나간 뿌리 모양과 땅 위로 솟아오른 줄기나 가지의 모양이라는 것쯤은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도 안다. 그 ‘나무 목木’의 땅 위로 솟아오른 줄기에 어린 가지 하나를 걸쳐 놓으면 ‘아닐, 혹은 끝 미未’가 된다. 아직 튼튼한 가지가 되지 않았고 가지 끝에 돋아난 또 다른 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어린 가지를 자르는 모양을 더해 놓으면 자른 나뭇가지의 중심이 붉다 해서 ‘붉을 주朱’가 되고, ‘나무 목木’에서 땅 밑에 단단히 박은 세 가닥 뿌리에 가로로 한 획을 그어놓으면 뿌리를 강조하는 것이 되면서 나무만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이라는 뜻을 담은 ‘근본 본本’이라는 글자가 된다.

‘미未’라는 글자는 나무 끝의 가느다란 작은 가지의 모양에서부터 나와서 ‘분명하지 않다’ ‘희미한 모양’ ‘아직…하지 않다’, 그리고 아직은 되지 않았으니 장차 될 것임을 암시하여 미래未來라는 뜻으로까지 나아간다. 말 그대로 ‘미래未來’는 ‘올 래來’와 함께 아직은 아니지만 장차 다가올 시점이고, ‘미완未完’은 ‘완전할 완完’과 함께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며, ‘미망인未亡人’은 ‘망할, 없을 망亡’과 함께 배우자인 남편과 더불어 죽어야 하지만 아직 죽지 못한 사람이라고 남편 잃은 여인이 누군가에게 자신을 낮춰 하는 말이 되고, ‘미구未久’는 ‘오랠 구久’와 함께 그리 오래지 아니함을 말하고, ‘미안未安’은 ‘편안할 안安’과 함께 누군가를 괴롭혀서 내가 편안하지 아니함을 말한다. 처세로 그저 한 마디 하고 넘어가자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내가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얘기하는 것은 ‘내가 너를 괴롭혀서 내가 편안하지 않으니 나를 편안하게 해 주세요!’라는 뜻이어서, 상대방의 너그러움과 용서를 받으려고 청하고 사정하는 것이다. ‘미안未安’을 이루는 ‘편안할 안安’은 ‘집 면宀’과 ‘여자 여女’로 이루어진 말이므로 ‘집에 여자가 있으면 모든 것이 평안하다’는 식으로 풀이를 하지만 다소 옹색하다. 오히려 ‘집 면宀’을 사당이나 신전과 같은 집으로 보면, 그 안에서 신의 뜻을 찾으려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풀어서, 그렇게 기도하고 신의 뜻을 찾다보면 편안해 진다는 의미로 새기는 것이 유용할 듯하다. ‘편안할 안安’은 그래서 ‘편안하다, (신의 뜻을 알고)즐거움에 빠지다, 어찌, 이에(이에, 그래서 내, 노 젓는 소리 애乃), 어디에, 안으로, 속으로’ 등등의 뜻을 지니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미안’은 누군가를 두고 내 마음을 헤아려 신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다.

에릭 시갈Erich Sigal(1937~2010년)의 소설을 두고 만들어져 겨울이면 항상 생각나게 하는 1970년의 영화 Love Story는 “사랑은 미안하다 말하는 게 아냐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라는 명대사를 가르쳐주었지만, 그렇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너의 불편한 마음을 알고도 남는다는 뜻을 가르쳐주기 전에, ‘미안하다’는 말에 인색한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부자는 불의를 저지르고도 큰소리를 치지만 가난한 이는 불의를 당하고도 사과해야 한다.”(집회 13,3)고 했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자기 불쌍한 줄을 알면 알수록 사람들에게도 미안한 것들이 너무 많아져서 미안해하지만, 자기 가련함을 모르면 모를수록 미안해하고 말 것도 없어서 뻔뻔해지고 거들먹거리며 큰 소리를 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미안해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가련히 여기시도록 하는 기도이다.

입 구口

‘입 구口’는 본래 구멍의 형상이다. 그러나 한문에서 ‘입 구口’가 글자의 부분을 차지할 때에는 입이나 구멍만의 뜻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물건 품品’처럼 물건이 쌓여있는 모양이기도 하고, ‘따로따로, 각각 각各(뒤져올, 머뭇거릴 치夂 더하기 입 구口)’처럼 앞 사람과 뒷사람 말이 서로 다르다는 뜻으로 「각각」을 뜻하기도 하고, ‘돌 석石’처럼 바위에서 떼어낸 돌이 생긴 형체를 나타내기도 하고, ‘합할 합合’처럼 셋이 딱 들어맞는 ‘삼합 집亼(뚜껑)’과 ‘입 구口(본체)’를 더하여 말에 말을 맞춰 대답하거나 이것에 저것을 더하여 모으거나 만나고 합하거나 맞추는 상황을 묘사하기도 한다. 현대 사회의 두려움이 되어있는 ‘암 암癌’은 ‘입 구口’가 세 개나 들어있는 글자로서 병상에 드러누운 모양인 ‘병질 엄疒’과 산 위의 돌덩이들 모양인 ‘바위 암嵒’이 더해 만들어진 글자이다. 딱딱한 암 덩어리를 지고 병상에 누운 분들을 생각하면 일리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간혹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이 먹고, 먹고, 또 먹어 산처럼 쌓였다가 결국 병상에 드러누운 모습이라 하기도 하지만, 이는 우스개로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사실 우스개로 이야기하는 것도 온당치 않다), 암에 걸려 고생하시는 모든 분들이 마치 뭔가를 많이 먹어 암에 걸린 것처럼 표현하는 경솔하고 죄송한 풀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원래 구멍을 뜻했던 ‘입 구口’를 두고 한자의 다른 생성과정 말고, 다른 글자들과 더해져 뜻을 만드는 회의문자會意文字가 되는 것만 생각해도 글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해진다. 간단한 예로 ‘이름 명名’은 ‘저녁 석夕’과 ‘입 구口’가 더하여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면 입으로 이름을 불러 서로를 분간하는 것이 되고, ‘화할 화和’는 ‘벼(쌀) 화禾’에 ‘입 구口’를 더하여 쌀로 만든 밥을 모두 함께 먹으니 화목하다는 것이 되고, ‘알 지知’는 ‘화살 시矢’와 ‘입 구口’가 더하여 무엇을 안다는 것이 화살이 과녁을 맞히듯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일컫는 것이 되며, 이 ‘알 지知’에 ‘날 일日’을 더하면 알고 있는 것들이 날이 가고 또 가면 지혜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지혜 지智’가 된다는 식이다.

사람의 얼굴에는 가장 중요한 구멍인 입이 있다. 코도 있고 귀도 있는데 얼굴에서 가장 ‘중요한’ 구멍이라 하는 것은 최악의 경우 코나 귀가 없어도 살 수는 있지만 입이 없으면 아예 살 수 없고, 입이라는 구멍이 인간에게는 가장 큰 구멍이기 때문이다. 입은 수많은 세월 동안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서 기능적으로 인간사의 수많은 일을 감당한다. 생물의 입은 맨 먼저 아가미처럼 그저 들어온 것을 걸러 흡수하는 기능만을 하다가 턱이 생기고 돌기나 이빨이 생겨나면서 잡고 붙들 수 있는 먹이들이 생겨났고, 점점 씹거나 갈아먹을 수 있는 입으로 발달하면서 이것저것을 먹을 수 있는 입이 되어갔다. 물론 이빨은 각각의 생물이나 동물들이 처한 상황에 맞게 다양한 위치나 모양, 그리고 개수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사람에게는 공격용 송곳니나 앞니 대신에 딱딱한 것까지도 먹을 수 있도록 어금니들이 발달했으니, 굳이 진화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람의 구멍인 입은 이렇게 글자만큼이나 발달했고, 또한 대단히 특화된 구멍이 되어왔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입이라는 구멍으로 확인하려 하면서 인생을 시작한다.(구강기) 그 입은 살아가면서 혀나 치아와 함께 소리를 내어 140여 가지 음을 만들어내고, 말하고, 기도하고, 먹어서 생명 유지를 위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감정과 애정의 표현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표정과 속내를 관리하고, 숨쉬고, 음식물을 씹어 소화되게 하고, 맛을 보고, 물어뜯어 무엇인가를 풀어 헤치거나 공격하고, 남을 해치는 말과 욕설을 뱉는 죄의 분출구가 되는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을 한다. 단순한 구멍이었던 인간의 입은 이제 인간의 삶과 문화 전체를 관장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인간의 입은 정말 위대하다.

그러나 입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입은 한 개이면서도 열 마디 말을 열 번 한다.’ 라든가, ‘뚫린 입(구멍)으로 말이나 바로 하라.’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조심’이나 ‘경계’와 관련된 격언이나 관용구 내지는 속담으로 끊임없이 견제를 받는다. 언젠가 입만 동동 떠서 입만 살아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둔한 자의 입은 그를 파멸시키고 입술은 그를 옭아맨다.”(잠언 18,7) 하였으니, “주님, 제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제 입술의 문을 지켜 주소서.”(시편 141,3)

벌레 충蟲

‘벌레 충蟲’이라는 글자는 ‘벌레 충/훼虫’가 여러 마리가 모여 있는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이다. 벌레들이 대개 군집하여 사는 까닭이다. ‘충蟲’이라는 글자를 쉽게 쓰거나 간단하게 쓸 때에 ‘벌레 충/훼虫’라는 글자 하나만 쓰기도 한다. 벌레를 뜻하는 ‘虫’이라는 글자는 공교롭게도 몸 굵기에 비해 머리가 큰 뱀의 형상에서 따왔다. 아직 정교하게 분류체계를 갖지 못했던 고대 중국에서 짐승이나 물고기, 새를 제외한 모든 동물을 벌레라고 칭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만들어진 뱀을 뜻하는 ‘뱀 사蛇’라는 글자에도 ‘벌레 충虫’이 붙어있다.

옛날 중국에서는 땅 위의 것들을 아예 다섯 가지 벌레로 분류했다는 기록도 있다. 포유류 짐승처럼 털이 있는 모충(毛蟲), 새처럼 깃이 있는 우충(羽蟲), 거북이처럼 딱지가 있는 개충(介蟲=갑충甲蟲), 물고기처럼 비늘이 있는 인충(鱗蟲), 그리고 사람처럼 맨 몸이 드러나는 나충(裸蟲)이다. 인간은 벌거벗은 벌레 ‘나충’에 속한다.

무릇 ‘虫’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모든 글자가 위에서 말한 넓은 의미의 벌레와 관련된다. 별 상관이 없을 듯이 보이는 ‘바람 풍風’조차도 벌레(虫)가 바람에 날려 다니며, 돛(凡)도 바람을 받아 움직이다는 말에서 형성되었다 한다. 혹자는 태풍 같은 큰 바람이 지나간 다음에 병충(蟲)이 많이 번식한다는 뜻을 더하여 ‘바람’을 뜻하는 ‘바람 풍風’이라는 글자가 되었다고 풀기도 한다. 심지어 ‘무지개 홍虹’조차도 무지개를 거대한 뱀이나 용으로 보아서 그렇게 ‘벌레 충虫’을 붙여 썼다 한다. 그래서 어떤 이가 하느님의 네일 아트(손톱장식)이라고 표현한 바 있는 낭만적인 무지개다리도 ‘홍교虹橋’라고 쓴다.

내가 거주하는 이곳 건물은 1938년도 건물이다. 오래된 건물인 까닭인지는 몰라도 바퀴벌레와 개미, 특별히 설탕 개미라 부르는 아주 조그만 개미들이 어디든지 있다. 그 녀석들은 약을 뿌리고 전문가를 부르며 별 짓을 다 해도 며칠만 지나면 어김없이 다시 등장한다. 핵 전쟁이 훑고 지나더라도 틀림없이 살아남을 녀석들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바퀴벌레는 한자로 ‘바퀴벌레 장蟑’과 ‘메뚜기 마螞’를 써서 ‘장마蟑螞’라 한다. 그리고 개미는 ‘사마귀 랑/낭螂’과 ‘개미 의蟻’를 써서 ‘낭의螂蟻’라 한다. 하나같이 4글자 모두 ‘벌레 충虫’을 달고 있는 벌레들이다.

자고 있는 동안에 베개나 얼굴 위에 뭔가가 기어 다니고 있다든가, 괜히 몸 어느 곳에 무엇인가가 살금살금 거린다는 착각을 하거나 괜스레 귓속이 간지러운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달고 살아야한다든가, 어느 순간 내가 마신 컵의 입이 닿는 가장자리를 어떤 녀석이 기어 다니고 있다든가, 바닥에 엎어져 버둥거리고 있는 메뚜기 같은 녀석을 맨발로 밟는 상상을 하는 것 등등은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동생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 사도마저 죽이려던 헤로데가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었다.”(사도 12,23)하는 것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벌레는 무섭다. 어느 나라에서는 바퀴벌레 튀김을 먹는다고도 하지만, “네 발로 걸으며 날개가 달린 모든 벌레 가운데, 발 위로 다리가 있어 땅에서 뛸 수 있는 것은 먹어도 된다.”(레위기 11,21)는 말씀에 따라 메뚜기와는 달리 분명히 납작하게 생긴 바퀴벌레는 성서적으로 보아 결코 먹을 음식이 아니다.

“벌레 같은 사람 구더기 같은 인생”(욥기 25,6)이라는 욥의 한탄을 떠올려 보고, “인간이 죽으면 길짐승과 들짐승과 벌레들 차지가 된다.”(집회 10,11)는 말씀을 떠올려본다 하더라도, 우선 여기 이곳에서 어찌 이들과 공존 공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진정 크나큰 고민이다.

구름 운雲

‘구름 운雲’이라는 글자는 원래 ‘이를 운云’이라고 훈을 매기는 글자에서 온다. 이 ‘이를 운云’은 ‘구름 운云’이라고 하던 글자를 빌려서 ‘말하다(왈曰)’는 뜻으로 쓰면서 ‘이를 운云’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본래의 뜻을 잃어가는 글자 ‘云’ 위에 ‘비 우雨’를 올려서 원래의 뜻을 찾아주려고 한 것이 현재의 ‘구름 운雲’이다. 현대 일본의 마지막 석학이라 알려지는 시라카와 시즈카(1910~2006년)에 의하면 허공을 떠도는 구름(雲)에는 용(龍) 모습을 한 정령이 있는데, 구름 기운이 감도는 아래에 용이 꼬리를 말고 있는 형태를 나타낸다고 풀이한다. 조각구름, 양털구름, 새털구름…하는 구름들이 아니라 뭉게구름을 멀리서 보면 쉽게 이런 해석이 짐작 간다.

구름은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늘, 바람, 땅이 어우러져 연출하는 드라마요 메시지다.

이곳 플로리다 여름에는 유달리 뭉게구름이 많다. 하늘 이곳저곳에 구름들이 신기하게 각양각색 모양을 짓고 흐트러뜨리고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새카만 먹구름, 비구름을 갑자기 만들어 순식간에 폭우같은 비를 뿌려대며, 도대체 언제까지 하늘에 무심하려느냐 하고 호통치듯 천둥 번개를 요란하게 곁들인다. 그렇게 자기 담은 양을 모조리 쏟아낸 다음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해를 쨍쨍 내리 비춘다. 그리고 바람과 함께 하늘의 구름놀이인지 구름의 하늘놀이인지 모를 놀이를 다시 시작한다.

성경에서 ‘구름’은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을 알리는 표시이거나 하느님의 힘이 펼쳐지는 상징이다. 그러나 “폭풍과 회오리바람은 그분께서 다니시는 길이며 구름은 그분 발밑에 이는 먼지다.”(나훔 1,3) 하듯이 뭉게구름은 가끔이고 뭉게구름 뒤에 펼쳐지는 짙은 먹구름이나, 비구름, 토네이도 같은 구름기둥이 많다. 땅 위의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보십시오. 당신보다 높이 떠 있는 구름을 쳐다보십시오.”(욥 35,5)하는 말씀처럼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늘을 보고 사는 사람들은 언젠가 “구름을 타고 오는”(마태 24,30;26,64 마르 13,26;14,62 루카 21,27) 그날과 그분을 꿈꾼다.

재잘거릴 첩喋

‘첩喋’이라는 글자가 재미있다. ‘입 구口’가 붙어있음에서 짐작 가듯이 입으로 무엇인가를 재잘거리는 상황을 묘사한다. 때에 따라서는 ‘쪼아 먹을 잡’이라고도 한다. ‘입 구口’가 붙어 그런 뜻이 있는가보다 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새기기 위해서는 그 오른 쪽에 붙어있는 ‘나뭇잎 엽枼’도 살펴보아야 한다.

‘뽕나무 상’이라고도 하는 ‘나뭇잎 엽枼’은 ‘枽’과 같은 글자인데 ‘나무 목木’ 위에 ‘세상 세世’가 올라앉아 있다. 이쯤 되면 ‘아, 나무 위에 주둥이들이 올라앉아 재잘거리는 것’이구나 하고 상상하지만 문제는 왜 하필 ‘세상 세世’가 올라앉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마련이다. 재잘거리기를 좋아하고 쓸 데 없는 말로 떠들기를 좋아하는 세상이 마치 나무 위에 올라앉아 지저귀고 짹짹거리는 새들 같아서 그런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 세世’는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잎사귀들을 본떠서 만든 상형글자로서, 원래 ‘세世’는 잎이라는 의미였으며, 나뭇가지에 나뭇잎이 떨어지면 새 나뭇잎이 나는 모습을 세대가 교체되는 것으로 연상하여 나중에 ‘세대’라는 의미도 갖추게 되었다 한다. 허나 원래는 나무 목 위에서 잎이 나불대는 모양으로 만들어진 글자인 셈이다. ‘나뭇잎 엽枼’은 나중에 좀 더 구체적으로 ‘풀 초艹’를 머리에 얹어 ‘잎 엽葉’이라는 글자로 잎의 의미를 대체하게 되었다.

이런 내력을 가진 ‘나뭇잎 엽枼’에 앞에서 말한 대로 ‘입 구口’를 붙이면 ‘재잘거릴 첩喋’이 되고, ‘말씀 언言’을 붙이면 함부로 말하고 몰래 일러바치는 ‘고자질 할 첩諜’이 되며, ‘조각 편, 절반 반片’을 붙이면 ‘편지 첩牒’이 되고, ‘눈 목目’을 붙이면 바로보지 못하고 ‘눈을 감을 첩䁋’이 된다.

한참 더운 여름이다. 곧 지나가리라 하는 기대로 견디는 여름이지만, 아직도 하늘을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따끈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나뭇잎들은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반짝거리면서 잎사귀마다 자기 얘기를 나불대는 것 같고, 가지 사이사이마다 새들이 찾아들어 짹짹거리며 바쁘다. 그래서 ‘재잘거릴 첩喋’이 떠올랐지만, 이내 “사람들은 자기가 지껄인 쓸데없는 말을 심판 날에 해명해야 할 것이다.”(마태 12,36)하는 말이 떠올라 주춤해진다.

기댈 녁疒

‘녁疒’이라는 글자는 오늘날 단독 글자로는 쓰이지 않고 부수로만 쓰이는 글자로서 병들어 침상에 누워있는 환자의 모습에서 왔다. 그래서 ‘병들어 기댈 녁/역, 병들어 기댈 상’으로 소리 값을 가진다. 모양새를 오른쪽으로 90도 돌려놓고(⤿) 보면 다리 달린 침상에 사람을 눕히는 모습이다. 한자에 ‘녁疒’이 들어가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마음과 몸의 크고 작은 질병(疾病)과 관련 있는 글자가 된다.

갓 스무 살 먹은 윤형이라는 아이를 만났다. 일종의 희귀병으로 담낭 옆에 염증이 생기는 병을 앓고 있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수술을 여러 번 했던 아이이다. 하필이면 내일 아침 일찍 6시에 집을 나서서 8시 반부터 수술에 들어가야 하는 아이였다. 윤형은 벌써 몇 번의 수술 경험이 있었고 다음날 수술을 위해서 이미 속을 비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함께 대화하고 기도하는 중에, 윤형은 애써 태연한 척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윤형의 두려움이 담긴 눈을 보고 말았다. 그 눈은 오래 내 마음에 남아 나를 사로잡았다. 하느님께서 귀한 생명을 주셨으면 계획하신 바 있었을 것이고, 이렇게 어린 나이에 고통을 받게 하시는 것도 틀림없이 섭리의 뜻이 있었을 것이지만, 윤형의 두려움 담긴 눈을 마주하면서, 용기를 내라 하고 그 고통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얘기하던 나의 말은 내 스스로가 생각해도 공허하게 들렸다. 문득 언젠가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가 되셨던 어머니께서 아픈 어린이를 두고 ‘인생 살만큼 산 저를 대신 더 아프게 하시고, 저 어린 것은 아프지 말게 하소서!’하고 기도하시던 모습이 생각났다. 무심코 넘겼던 그 말씀의 무게와 진실성이 그저 빈 말이 아니었음을 윤형의 엄마나 아빠보다 내가 더 먹은 나이가 되어서야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인간은 먼 세월이 지나서야 깨우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침상에 기대고 누울 녘에나 깨우치는 ‘어리석을 치癡/痴’가 되지는 말아야 할 텐데 하는 조바심이 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