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헨리 나웬 신부(2)

 

   이렇게 난 헨리 나웬 신부님을 처음 알게 되었고, 그리고 그때부터 그분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모으고 무조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지금 세어보니 나의 책꽂이에는 그분의 책만 한 50여권이 된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뭘 하시는 분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채 그저 신부님이라는 것 밖에, 그리고 아주 쉬운 영어와 간결한 영성논리로 책을 쓰시는 분이라는 것만 아는 채로 그분을 만나던 시절이 5년 쯤 지나고, 그분과의 만남을 깊게 한 사건은 그러니까 1990년 말로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89년 가을 나는 첫 서원 때부터 소원이었던 선교사로서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눈물과 아쉬움 속에, 그럼에도 장한 모습으로 열렬한 환송을 받으면서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광대 쪽이어야 할 자신의 신분을 잠시 잊어버렸던 젊은 날 스타 쪽의 착각 속의 선택이었기에 1년이 채 못 된 1990년 말 내 딴에는 떠날 때보다 훨씬 더 큰 용기를 내어 다시 한국으로 되짚어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떠날 때의 결심과 환송이 그렇게 큰 것이었다고 한다면, 돌아올 때의 착잡함과 썰렁함은 훨씬 더 큰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처절함이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한국에 돌아와서 갈팡질팡 마음을 잡지 못하고 지내던 그 무렵 어느 날, 전남 순천에 살고 있던 누나네 집에 무슨 일인가 볼 일이 있어서 가던 날이었다. 출발 직전 미국 신부님이신 권선호 신부님을 만난 자리에서 권신부님께선 아직 당신도 읽지는 않았노라 하시면서 책 한 권을 빼 주셨다. 무심코 받아든 책은 다시 한 번 공교롭게도 헨리 나웬 신부님의 “In the name of Jesus(주님의 이름으로)”였다. 순천에 가기위해 여수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위에서 읽기 시작했던 81쪽 짜리 작은 책은 다시 한 번 나를 미치게 하고 말았다. 순천 누이 집에서의 모든 일을 제쳐놓고 2층 방에 올라가 새벽까지 그 책을 단숨에 다 읽어 버렸다. 그리고는 그 책이 주는 감동으로 벅차오르는 흥분 속에서 책의 앞장을 뜯어 다짜고짜로 그 책의 출판사인 뉴욕의 Crossroad 출판사로 저자에게 전해 달라는 겉봉과 함께 편지를 썼다. 편지의 내용은 대충 “너무나도 큰 감동을 주었던 당신 책들에 감사를 드립니다. 몇 년 전부터 책으로만 당신을 만나왔던 애독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그 귀한 소명으로 은총과 축복 속에 계속하여 열매 맺는 삶이되시길 기도드립니다.”는 것이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계속)



코엘류

 *당분간 파울로 코엘류의 작품들에서 밑줄을 그을만하거나

   기억해두고 싶은 귀절들을 연재합니다.

1408. 그걸 ‘은혜의 섭리’라고 부르지. 바로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거야. 그런 행운이 따르는 건 자네의 삶이 자네가 자아의 신화를 이루며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일세.



1409.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한 번 실수를 하면 매일 그 실수에 눌려 살아야 한단 말이야.



1410. 기회가 가까이 오면 우리는 그걸 이용해야 합니다. 기회가 우리를 도우려 할 때 우리도 기회를 도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은혜의 섭리라고도 하고  ‘초심자의 행운’이라고도 합니다.

내가 만난 헨리 나웬 신부

 

내가 만난 헨리 나웬 신부




<로마의 어릿광대>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85년, 그러니까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외국 땅, 이태리의 로마에 도착했을 때였다. 때는 6월이었기에 이미 학교의 기숙사는 텅 비어 있었고 나는 10월 학기의 입학을 위하여 아무도 없는 캠퍼스에서 정말이지 엉덩이에 솟은 땀띠가 짓물러 터지도록 앉아 인내롭게 이태리 말을 공부해야만 했던 때였다. 그런 정신없는 와중에 있던 내가 우스꽝스럽게라도 보였던지 뽈 반루펠렌 이라는 벨기에 국적의 한 친구가 뒤늦게 여름방학 휴가를 떠나면서 “Clowning in Rome(로마의 어릿광대)” 라는 영어로 된 책 한권을 선물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책이 그 저자인 헨리 나웬 신부님과 내가 만난 첫 번째 만남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국내에 이봉우 신부님께서 번역하셨던 “상처 입은 치유자” 라는 책이 이미 있었다. 어찌 되었건 나는 “로마의 어릿광대” 라는 책의 제목에 나의 처지를 견주면서 그 제목 때문에 읽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말을 배운답시고, 또 공부를 한답시고 그런 꼬락서니를 하고 있던 내 상황이 마치 광대짓 같이 여겨진 때문이었다. 제목 때문에 펼친 책이었지만 서문의 둘째 페이지 ‘광대’부분을 읽으면서 난 곧장 이 책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 대목의 내용은 이랬다.


   


   “서서히 나는 이곳 로마에 맹수들, 조련사들, 신기한 묘기로 우리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수많은 곡예사들, 그리고 실제적이고도 진실된 얘깃거리를 전해주는 어릿광대들이 어우러져 거대한 서커스가 한 판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광대들이 무대의 중심에 있지는 않는다. 그들은 스타들 사이에서 막간을 이용하여 등장하고  실수와 떠듬거리는 말 짓으로 우리가 경탄해마지않았던 대스타들의 명연기 때문에 생겼던 긴장 후에 우리를 몇 번이고 웃게 만들어준다. 광대들은 어딘가 이상하다. 그들이 하려고 하는 것에 성공하지도 못하고, 어딘가 서툴고, 균형을 잡지 못하는가 하면 어설프기 짝이 없다. 허나 그들은 우리 편이다. 우린 광대들을 대할 때 경탄이 아닌 공감으로, 놀라움이 아닌 이해로, 그리고 긴장이 아닌 웃음과 미소로 만난다. 우리는 그들이 뭐 하나라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고 곧잘 의구심을 가져보기도 한다. 광대들은 어쩌면 우리의  모습과도 같이 보인다. 광대들은 우리 모두가 인간적인 연약함을 지고 있음을 서로 공감하게 하고, 그래서 눈물과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렇다. 이 세상이 한판 서커스 장이라고 한다면 그 서커스 장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스타 쪽일 것인가, 광대 쪽일 것인가? 우리의 주님께서 대스타이시고, 또 대스타이셔야 하는 분이라면 우리는 틀림없이 광대 쪽이다.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명연기에 감탄하고 환호하며 긴장하고, 그 뒤를 따라가는 우리 어줍지 않은 신앙인들의 몸놀림에는 그저 공감으로, 이해로, 웃음과 미소로 우리를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고 살아가야 할 바인 것이다.
(계속)

Don Mclean 의 빈센트

*이 노래가 빈센트를 두고 부른 노래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또 그 가사가 빈센트의 일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번역되거나
 혹은 이해 될 수 없어서,
 이렇게라도 올려놓고자 하는 것입니다.
 원래는 돈 맥클린의 노래였으나
 여기서는 음질 등을 고려하여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음성으로 올려놓습니다.

1362861833.mp3 

Starry, starry night


    -Don Mclean-




Starry, starry night                                     


별들이 반짝이는 밤.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ay


파란색과 회색으로 칠을 해 가며.




Look out on a summer’s day


With eyes that know the darkness in my soul…


내 마음 한 켠에 어두운 그림자


어느 여름 더운 날, 그 날을 보네.




Shadows on the hills


Sketch the trees and the daffodils


언덕 위의 그림자, 나무와 수선화의 스케치.




Catch the breeze and the winter chills


In colors on the snowy linen land.


산들거리는 미풍, 뺨에 스치는 매서운 겨울바람,


솜이불 같은 눈 덮인 들판.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이제는 알아요. 당신이 말하려고 했던 그것을.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얼마나 괴로웠던 나날이었는지,


또 얼마나 자유롭고 싶었었는지.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았기에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사연들.




Perhaps they’ll listen now.


아마도 이제는 듣고 있겠지요.




Starry, starry night


별들이 반짝이는 밤


Flaming flowers that brightly blaze


Swirling clouds in violet haze


불꽃처럼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꽃들,


보랏빛 아지랑이, 구름의 소용돌이.




Reflect in Vincent’s eyes of china blue


빈센트의 영롱한 초록 눈동자에 어리네.




Colors changing hue


형형색색 가지가지 빛과 색깔들.




Morning fields of amber grain


Weathered faces lined in pain


Are beneath the artist’s loving hand


누렇게 물든 아침들판,


고통으로 주름져간 그의 얼굴.


사랑스러운 그의 손길이 어루만지고.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이제는 알아요. 당신이 말하려 했던 그것을.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얼마나 괴로웠던 나날이었는지,


또 얼마나 자유롭고 싶었었는지.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았기에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사연들.




Perhaps they’ll listen now.


아마도 이제는 듣고 있겠지요.


For they could not love you


But still, your love was true


그 누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어도


당신의 사랑은 진실했었죠.




And when no hope was left inside


On that starry, starry night


You took your life as lovers often do–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되던 바로 그날,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그러듯


그렇게 당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죠.




But I could’ve told you, Vincent::


This world was never meant


For one as beautiful as you.


하지만 빈센트, 당신같이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이런 세상이 도무지 맞지 않았던 것을.




Starry, Starry night


별이 반짝이는 밤.




Portraits hung in empty halls


Frameless heads on nameless walls


텅 빈 홀에 걸려있는 초상화,


이름 없는 벽 위에 액자도 없이 걸려있는 그 모습.




With eyes that watch the world and can’t forget


Like the strangers that you’ve met


그저 세상을 바라보고만 있는


낯선 이방인의 눈길




The ragged men in ragged clothes


The silver thorn, a bloody rose


초라한 모습


핏빛 장미, 은빛 가시.




Lie crushed and broken on the virgin snow.


순백의 눈밭에 뭉게지고 부서지면서.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이제는 알아요. 당신이 말하려 했던 그것을.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얼마나 괴로웠던 나날이었는지,


또 얼마나 자유롭고 싶었었는지.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ening still–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았기에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사연들.




Perhaps they never will.


아마도 영원히 듣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사연.

빈센트 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라야만 했던 이유는?

 *빈센트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종합하여
  빈센트가 자신의 귀를 잘라야만 했던 이유들이나 그 가능성을
  집대성 해 봅니다. 한 2년 쯤 전에 네이버 지식 in 에 집필하였던 내용으로서
  그곳에서도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1888년 12월 23일 밤

반 고호가 자신의 귀를 잘라야만 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날 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일까?



1.사랑하던 여인과의 관계에서?


-너무도 사랑했던 그녀에게 줄 것이 없어 고민하다가


 아침마다 자신에게 아름다운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들려주는


 귀라도 잘라서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좋아하던 그녀가 볼품없이 생긴 고흐의 얼굴 중에서


 그나마 잘 생긴 부분은 귀라고 했기 때문에.


-사랑했던 그녀가 자기를 사랑한다면 귀를 선물해 달라고 했기 때문에.


-투우사가 소와의 싸움에서 이긴 뒤, 그 소의 귀를 잘라


 사랑하는 여인이나 아름다운 여인에게 바치는 풍습을 생각하고


 소가 아닌 자신의 귀를 잘라 그녀에게 주고 싶었기 때문에.


 (고흐의 일생에 고흐와 개인적인 관계로 등장하는 여인은 다섯이다.


 첫째는 영국에서 로이어 부인 집에 하숙하여 살 때 그 부인의 딸이었던


 열아홉 살 바기 외제니 우르술라였다. 당시 고호는 스무 살이었다.


 고흐가 그녀에게 청혼했는데, 이미 숨겨 둔 약혼자가 있다고 응답했던 여자.



 둘째는 1881년-고흐 나이 28세 때- 만났던 큰 아버지 스트리커라는 목사의 딸 케이.


 남편과 사별한 처지에서 고흐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던 여인,


 고흐와 만날 때는 이미 8살된 아들이 있던 그녀,


 끈질긴 구애와 편지들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었고,


 이에 암스텔담으로 찾아갔을 때 목사님을 통해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는 쪽지만으로 응답을 건넸고


 이에 고흐가 석유 램프 속에 자신의 손을 넣으며


 ‘제 손이 이 뜨거움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간만큼 이라도’ 만날 수 있기를 갈망했고,


 또 그녀가 나타나지 않으면 손 뿐 아니라 온 몸을 태워버리겠다고 했음에도


 끝내 화상만을 입고 돌아서야 했던 여인.



 셋째는 매춘부였고 이름은 크리스틴 클라지나 마리아 후르닉,


 고흐는 그녀를 시엔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고흐가 그녀를 만났을 때 이미 3살이나 연상이었고


 다섯 살 난 딸이 있었으며 또 임신 중이기도 했다.


 알콜 중독에 성병을 앓던 여인.


 그럼에도 고호의 모델이 되어주었고, 위로가 되어 주었으며,


 생리적 욕구의 해결사이기도 했던 여인.


 고흐는 두 아기의 엄마이기도 했던 그녀와 한 동안 동거하였다.


 고흐는 그녀에게서 성병을 옮아 한 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생 테오를 비롯한 주변의 압박과 입 하나라도 줄여야 할 현실적인 가난,


 그리고 그녀의 게으르고 문란한 생활,


 돈 문제로 그녀의 동생이 고흐에게 폭행을 가하는 등


 여러 가지가 겹친 복합적인 이유로 끝내는 그녀를 버려야만 했었다.




그리고 넷째 여자는 누에넨에서 만난 이웃 섬유공장 주인의 딸이었던 마호르트.


고흐보다 10살이나 많은 41세의 노처녀였다.


고흐의 집에서나 고호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마호르트의 가족의 반대로


마호르트가 정신 불안을 얻게 되었고 이에 곤란한 입장이 되었던 처지.


결국 그녀가 자살 소동을 부렸고 이에 대한 온갖 비난이 고호에게 쏟아져


비극으로 막을 내려버린 사랑 아닌 사랑.


다섯 째는 술집여자 라셸-라헬이라 발음하는 것이 더 낫다. 사실 같은 이름이다.


이 라헬이라는 이름에 관하여는 마태오 복음 2장 18절의


‘자식 잃고 슬피우는 라헬’이라는 귀절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1888년 12월 23일 밤 11시 30분경


고흐가 ‘조심해서 다루라’ 하면서 귀를 잘라 건네주었던


라마르틴 광장의 술집 여자였고 창녀였다.)



2.잠시 함께 살던 고갱과의 관계에서?


-고갱과 말다툼을 하다가 고갱에게 심한 말을 들었고


 그런 말을 들은 자신의 귀가 저주스럽다고 여겼기에.


-고갱이 다툼 끝에 집을 떠나자 그 고갱을 죽이고 싶도록 미웠는데


 떠나버린 고갱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생각 끝에 자신의 분을 못 이겨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아를이라는 곳에


 여러 화가들을 초대했으나 이에 고갱만이 응답하여 같이 지내게 되었고,


 얼마가 흐른 뒤 고갱과의 다툼 끝에 고갱마저 떠나려 하는 것을 듣고


 자기의 진심을 너무도 몰라준다는 심정을 결국 자해로 표현해 낸 것.


-고갱이 다툼 끝에 자기를 피하고 계속 만나주지 않으니까 화가 나서.


-고갱과 다투었고, 그로 인해 고갱이 떠나겠다고 하자


 또 다시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을 남겨주게 될


 고갱과의 이별이 두려웠고 그 이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고갱과의 다툼 끝에 고갱을 면도칼로 죽이려고 덤볐으나


 이에 실패하고 분함을 참을 길 없어서.


-사실 고흐 자신이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 것이 아니다.


 고갱과의 싸움 끝에 고갱이 옆에 있던 펜싱 검을 들어 자른 것이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고갱이 떠나버린 뒤 자신의 물건을 보내 달라고 했을 때,


 펜싱 검만이 없고 마스크와 장갑이 있었는데 이는 고갱이 자신의 행실을 은폐하기위해


 사고 직후 펜싱 검을 챙겨 떠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3.그림을 그리다가?


-자화상을 그리던 중


 자신의 귀가 잘 안 보이고 그림으로서 잘 포착이 되질 않아서.


-자화상을 그리던 중 귀 부분이 이상하다는 고갱의 지적에


 귀 부분을 계속 고쳐도 잘 되지 않았고, 이에 실제 귀를 잘라 그림과 맞춰 보느라고.



4.병적인 이유로?


-귀 울림증을 오래도록 앓던 중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흐는 알콜 의존증이 있었다.


 압생트(absinthe)라는 독한 술을 즐겨 마셨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고흐는 술에 취해 일시적인 환각 상태에서 귀를 잘랐다.



5.심리적인 이유에서?


-추락을 두려워하는 비행기 조종사가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길 중에 하나가


 그 비행기를 스스로 추락시켜 버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처럼,


 처절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야 말 것 같은 자신의 추락이 두려워


 스스로 자신을 추락시켜 버리기 위해.


-그림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으나 끝내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그림,


 그리고 동생에게 계속 생활비를 받아 연명해가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뭔가 색다른 돌파구를 마련하고픈 결심과 심정의 표출로서.



6.성서적인 근거에서?


-일찌기 목사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고,
  전도사로도 활약했던 고호의 과거를 볼 때


  고흐가 성서를 익히 주지하고 있었음은 자명하다.


  고흐는 비탄과 고독의 게쎄마니 동산에서


  어느 날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무리들 중 하나인 말코스의 귀를


  제자인 베드로가 칼로 내리쳐 잘라 버렸으나


  이를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셨음을 상기했고


  (참조.요한18,10 마태26,52 마르14,47 루까22,51),


  자신의 비참하고 외로운 처지가 예수님과 같다고 여겼고


  이를 구해 주실 분은 진정 예수님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이쪽과 저쪽

 

이쪽과 저쪽


   사회가 건전하게 발달하게 되면 모양새로 보아 마름모꼴이 되는 것이고, 우리 사회는 그런 형태로 발전해 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오래 전에 초등학교 아닌 국민학교에서 배웠다. 상류층과 하류층이 각각 위 아래로 조금씩이고 가운데 중산층이 많은 형태로 사회 구성원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추측컨대 이런 이론이 요즘 애들 교과서에서 사라진지 오래일 것이고 아마 지금쯤 이런 내용은 형편없는 구시대의 이론이 되었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라는 것이 이른 바 발달(?)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 상류층이 조금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중산층이 아닌 하류층으로 전락하면서 우리가 배운 바에 따라 아주 부적절한 사회요 퇴치의 대상인 피라미드 형태의 사회가 된다는데, 우리 대한민국도 어김없이 이런 자본주의의 과정을 밟아가는 사회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첨단을 이룬다는 미국은 일찍이 이를 내다보고 자기네들 화폐의 기초 단위인 1달러짜리 지폐의 뒷면에 삼각형의 피라미드를 새겨 넣었던 것일까? 우리나라가 정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혹시 삼각형의 사회에 진입한 것은 아닐까? 우리가 아직 마름모꼴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면 이것이 어쩌면 중산층이라고 착각하는 하류층의 자위 때문은 아닐까?


   삼각형의 피라미드 사회는 소위 20:80의 사회이다. 가진 자 20과 못가진 자 80으로 이루어진 사회인 것이다. 요즘 양극화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를 짐짓 우리 사회가 마름모꼴의 사회이고 건전한 중산층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위아래로 조금씩 분포한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격차가 극단적으로 벌어졌다는 식으로 이해하려 든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는 틀린 말이다. 양극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은 소박하게 말하여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대다수의 빈자와 소수의 부자로 사회가 재편되었다는 것이고 이 둘의 사이가 질적으로 점점 더 큰 편차를 지니게 된 것을 염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시대 우리 안에 커다란 고민거리요 화두로 부각되어졌다는 양극화의 문제는 이미 우리 사회가 충분히 피라미드 꼴의 사회가 되어있음을 스스로 자인하고 있음에 다름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또 다른 양극화의 갈래들 속에서 내가 이쪽일지 저쪽일지를 놓고 고민한다. 부자와 빈자, 가진 자와 못가진 자,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기득권층과 소외층,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 사지 멀쩡한 자와 신체적 결함을 가진 자, 강자와 약자, 속이는 자와 속는 자, 강탈하는 자와 뺏기는 자, 억압하는 자와 핍박받는 자, 때리는 자와 맞는 자, 보수와 진보, 우익과 좌익 등등. 모든 사회 계층을 이렇게 양분법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마땅치도 않지만, 우리는 매일 매순간 어떤 형태로든 우리 스스로가 어느 쪽인가를 가늠하면서 조바심 속에 살아간다. 이쪽은 저쪽을, 또 저쪽은 이쪽을 두려워하고 불편해 하며 귀찮게 생각하고 심지어 위협으로 여기면서 타도할 대상으로까지 몰아간다. 그리고 내가 다행히 저쪽이 아니고 이쪽인 것에 대해 안도하기도 하며, 내심으로는 분명히 저쪽임을 스스로 자인하고 있으면서 이쪽인 양 허세와 오기를 부려보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서 이런 저런 양극화의 해법들이 있다지만,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게 변두리 내지는 나머지, 소수점 이하, 속된 표현으로 떨거지와 같은 신분을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의 생각엔 서로가 서로의 처지, 차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고 본다. 이는 우리가 서로 네가 있음에 내가 있을 수 있음을 감사하는 것이고, 이 세상살이라는 것이 정해진 잣대로 치수를 재어 그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니게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며, 들쑥날쑥함 속에 세상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움을 빚어낸다는 사실을 자녀들과 후진들에게 가르치는 것이고, 우리 모두 조물주가 나에게 허락하신 것들과 너에게 허락하신 것들을 서로 나눌 수 있어서 네발 달린 짐승이 아니고 인간일 수 있음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잃음과 잃음의 연속

 

잃음과 잃음의 연속


   황금 돼지가 맞느니 붉은 돼지가 맞느니 하는 논란 속에 사람들은 붉은 돼지보다는 황금  돼지 쪽으로 심증을 굳힌 듯하다. 사람들은 그렇게 돼지 타령만으로도 절로 대박이 영글어 저마다 부자가 될 것 같은 생각들이 드나보다. 황금 돼지가 되었건, 붉은 돼지가 되었건 나하고는 결코 상관이 없을 일이고, 꿈도 꾸지 못할 일인데 그런 꿈을 현실로 살아가는 큰 부자 한 분을 만났다. 그분께서는 젊은 시절부터 근면하고 운이 따라 큰 재산을 이룬 분이었는데, 재산을 딸 둘에게 물려주려 했다가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다 하셨다. 재산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원심력을 지녀서 그 소유주의 둘레를 빙빙 돌면서 자꾸만 그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관성을 지녔고, 재산의 주인이 그 원심력을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힘을 지니면 그 재산은 주인의 둘레를 돌기만 할 뿐이지만, 언젠가 한 순간이라도 주인이 그를 지탱할 힘을 상실하거나 약해지기라도 한다면 가차 없이 그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또한 그 무게에 의해서 주인마저 넘어뜨리고 만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자식에게 뭔가를 물려주고 싶어도 그 자식이 그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 잘 가늠하고 그 녀석들이 감당할 만큼만 물려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자식 잡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그 부자의 말씀이었다.


   재산뿐만 아니라 어쩌면 인생살이도 이처럼 내가 중심을 잡고 서있는 둘레를 도는 원심력의 추처럼 자꾸 무엇인가가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려고만 하는 과정인지 모른다. 인생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축적하고 얻어가는 과정인 것 같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는 착각이다. 인생은 근본적으로 상실과 잃음의 과정이고 연속이다. 태어나면서 편안한 어머니의 자궁을 잃고, 학교라는 것을 다니면서는 집을 잃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 자신을 잃고, 결혼을 해서는 여러 선택의 가능성을 잃고, 점점 나이 먹어가면서 싱싱한 외모와 오랜 친구, 또 내 나름대로 괜찮았던 명성이나 평판을 잃어가고, 50대에 접어들면서는 시력부터 잃더니 노년에 이르러 내 마음대로 오갈 수 없는 의지와 자신감, 그리고 육체의 독립성을 잃고, 죽음에 당도해서 마침내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그뿐이 아니다. 이기심을 통해 우정을 잃고, 방탕으로 순진함을 잃으며, 포기와 버림, 그리고 곁눈질로 신뢰와 사랑을 잃고, 전쟁으로는 집과 생명을 잃으며, 쓰잘 데 없는 소모적인 정치적 논쟁으로는 국민과 조국을 잃고, 질병과 사고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으며, 지진, 홍수, 테러, 전염병으로는 생명을 잃는다. 잃음과 잃음의 매일 안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지켜야 하고, 얻어야 되며, 쌓아가야 되는 것일까?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세상의 거짓말과 가면을 벗길 수 있고, 유혹을 넘어설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파워와 영향력,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소박한 사람들의 미소와 작은 자리에서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들리지도 않는 호흡에 의해 이 세상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살아져가고 있다는 믿음 말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함께 얻어내야 하는 것은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 또 그 진리가 말해지는 자리들을 계속 함께 발굴해 가자고 하는 공동합의이다. 내 가정과 일터에서, 우리가 애초에 하나였고 그래서 너는 모두 내 살붙이이며, 너는 모두 나처럼 아주 보배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들, 또 그런 것이 말해지는 자리들을 계속 발굴해 내야 한다. 그런 합의는 소위 민주적이고 정치적이라는 합의절차내의 다수결이나 타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만 되는 존재임을 상기하는 진솔한 자각으로만 이루어진다.


   끝으로, 너와 나 사이에 서로 감사하는 감사의 정을 쌓아가야만 한다. 너와 내가 이 시간, 이 공간, 그리고 이 인연을 함께 살도록 조물주가 허락하셨고 그래서 너와 내가 이렇게 특별한 시기와 공간 안에 선택되어졌다는 사실을 서로 함께 감사해야 한다. 내 인생에 대하여, 너의 동행에 대하여, 이 세상이 이렇게 유지되고 있음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

두려움

 

두려움


   어린 애들이 학교에 다녀오자마자 이런 저런 학원에 가야만 되는 불쌍하고 안타까운 현실을 두고 수도 없이 많은 부모님들에게 물어보았다. 애들을 왜 그렇게 키워야만 되는 것이냐고. 그런 말 앞에서 부모님들은 이런 현실이 참으로 개탄스럽다고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그러한 세상에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그리고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자식만 바보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라고 결국 토로한다. 또 다른 얘기이다. 다 자란 애들이 성장하고 출가한 뒤에도 아직까지 애들 아닌 애들의 걱정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어떤 부모님들에게, 이젠 자기들 인생을 자기들이 살도록 내버려 두시고 제발 당신네 인생이나 잘 살 궁리하며 그 동안 고생하여 모은 재산일랑은 애들에게 물려줄 생각도 하지 말고 편안하게 사시라 하면, 어찌 인생이 그렇게 되느냐 하시면서 자식 없이 사는 신부니까 우리 마음을 이해 못할 거라고 말씀하시고, 마지막엔 이 세상에 믿을 것이 자식밖에 더 있겠느냐고 결국 말을 맺는다. 세상에서 믿을 것은 자식 말고 아무것도 없다는 두려움이 그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두려움으로 우리 인생을 시작했고 평생을 그렇게 매일 매일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두려움의 힘과 세력이 온 세상을 꽉 채우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되어질 때가 많다. 내 안의 두려움이 있고, 내 주변의 두려움이 있다. 어떤 두려움은 이미 피부에 와 닿아 있고, 어떤 두려움은 아직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두려움은 빤히 내 눈 앞에 와 드러나 있고, 어떤 두려움은 은밀하여 눈에 뜨이지 않게 숨어있다. 어떤 두려움은 내 자신 안에 있고, 어떤 두려움은 타인의 마음 안에 있다. 우리의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들이 어쩌면 온통 두려움에서 기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일정부분 두려움과 이런 저런 연관을 맺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때는 날 지배하고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 두려움인 것 같다. 두려움은 나를 화나게 하고, 흥분시키며, 거친 행동으로 내몰기도 한다. 때로는 절망과 실망에서 비롯된 두려움이 나를 의기소침하게 하고, 급기야는 죽음으로까지 나를 이끌어갈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두려움에 찬 아이들, 학생들, 환자들, 공무원들, 노동자들, 부모들 … 이렇게 두려움에 가득 차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두려움의 포로요 노예이다. 참으로 두려움의 파워가 지배하는 세상이요 두려움으로 가득한 세상인 것만 같다. 만일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만일 이것이 이렇게 안되면 어떻게 하지? 이런 식의 걱정스러운 의문과 두려움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우리는 결국 “만일”과 “어떻게”의 포로들이고 노예인 셈이다. 개인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온통 두려움의 논리와 두려움의 힘에 지배당하고 있다.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 정치적인 대부분의 사안들이 두려움으로 가득한 전제와 가설아래 기득권, 영향력, 힘에 있어 유리한 고지를 먼저 차지하려는 술책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가 걱정이 앞서고, 신경질적이 되어가고, 급기야 생존을 위한 마지막 방책이라면서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 서로 죽음과 파멸로 치닫게도 된다.


   두려움과 설레임으로 시작했던 한 해를 마감하는 끝자락에 와 있다. 두려움의 끈을 끊어야 한다. 누군가가 두려움의 끈을 ‘먼저’ 끊기 시작해야 한다. 끊으려고 해야만 끊어지는 것이 두려움의 끈이다. 두려움의 끈을 끊고 내 안의 진정한 나를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고, 내 옆과 주변에 있는 타인을 위해서 사랑의 문을 열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발견한 나와 너를 넘어서, 조물주가 이 지구라는 별 위에 나와 너를 살게 한 의미들을 새기면서 영원의 문을 열어야 한다. 의미는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발견되어진다. 인생의 의미들은 순간의 각박함이 아닌 온 생애로, 온 삶으로만 답해지는 기나 긴 숙제이다. 마음의 문, 사랑의 문, 그리고 영원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게을러서이든지, 이웃을 똑바로 보기 싫어서이든지, 각박한 세상살이에 너무 지치고 찌들어서이다.

그럴듯한 말들의 허구성

 

그럴듯한 말들의 허구성


어른들이 애들에게 곧잘 하는 그럴듯한, 그러나 허구성이 짙은 말들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애들이 어른들 보기에 못마땅한 행동을 할 때에 어른들은 ‘너 지금 그러면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못된다.’ 한다. 말의 뜻을 보면 지금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면 그 행동이 너의 훗날 어른이 되었을 때를 결정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어리거나 젊은 시기가 어른이나 기성세대를 위한 준비기라는 발상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청소년기는 어른을 위한 준비기가 아니다. 인생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 어느 시기도 준비기가 될 수 없는 실제 인생의 한 때인 것이다. 열다섯은 열다섯이고, 스물은 스물이며, 마흔은 마흔이지 어떻게 열다섯이 마흔을 위한 준비기가 될 수 있는지, 마흔을 위해 열심히 유보한 열다섯이 행여 그 과정 안에서 죽기라도 한다면 마흔을 위해 절제되고 유보되었던 열다섯을 그 누구도 보상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의미로 인생에 오픈 게임은 없다. ‘지금 그러면 안된다’ 는 말은 애들 앞에 좋은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어른들이 자기들의 못된 점을 따라하는 애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어른들의 궁여지책일 경우가 많다.


   둘째, ‘나중에 커서 뭔가 줄 수 있고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는 말이 있다. 언뜻 들으면 이 말은 참 좋은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말은 무서운 말이 될 수도 있다. 애들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 때문에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가지려고 든다면 큰 일 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준다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낫고 좋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는 커다란 잘못이다. 주는 것은 받아주는 상대방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로 준다는 것과 받는다는 것은 동격이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손을 맞잡을만한 거리에 상대방이 존재하며, 내가 주는 것을 상대방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 줄 때에만 나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줄 수 있게 된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나의 주는 행위를 통해 내가 얻는 무엇이 있어야만 되고, 상대방이 얻는 무엇이 있어야만 옳다. 그런 의미로 슬기로운 어른들은 뭔가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 대신에, 누군가와 뭔가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서 이웃과 자신을 나누는 나눔의 모범을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셋째, 어른들은 애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는 말을 너무도 쉽게 한다. 이는 대개 학교 공부나 책으로 하는 공부를 뜻한다.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어른들을 만날 때마다 애들을 만나 기껏 그런 말 밖에 할 말이 없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이런 말은 오로지 책으로 하는 공부만이 출세의 지름길이었던 시대를 살았던 어른들이 흔히 쓰는 말이다. 축구선수가 될 수도 있고, 게이머가 될 수도 있으며, 만화를 그리는 작가가 될 수도 있고, 요리사가 될 수도 있으며, 발레리나가 될 수도 있고, 피아니스트가 될 수도 있으며, 등등. 요즘은 성적을 따져야 하는 공부 말고도 공부의 길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대이다. 애들더러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어른들은 그 누구도 애들이 소위 학교 공부를 해야만 되는 이유를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고, 심지어 학교를 다녀야 되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재간이 없다. 사실 살아오면서 만나게 된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상호간에 얼마나 학교 공부를 잘했는지 따지고서 맺게 된 인간관계는 어쩌면 전무하다. 언제 어디에서 누가 발명했는지는 모르지만 수우미양가나 가나다, 혹은 1,2,3이나 ABC 라는 등급매기기의 발명 혹은 발견은 참으로 위대하다. 이 온 세상을 그렇게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내는 그런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등급매기기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가련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한탄하면서, 또 인생이란 것이 그렇게 몇 점의 점수로 간단히 정리되거나 순차적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우리는 우리보다는 훨씬 멋지게 이 지구라는 별 위를 살아갈 우리 뒤의 신세대들에게 점수와 등급이 그렇게 중요하다면서 그 점수와 등급을 오늘 이 순간에도 강요하고 있다.

지식답지 않은 지식

 


지식답지 않은 지식
  신부는 입만 천당 간다는 말이 있다. 아는 것이 많아서 해 대는 말이 많기 때문이다. 요즘 애들도 어찌나 유식한지 아는 게 참 많은 애들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우리 모두가 예전보다 이렇게 유식해지게 된 것은 상당한 부분이 인터넷 탓이다. 각양각색의 검색 사이트에선 벼라 별 유치한 질문에서부터 아주 고도의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무료로 친절한 답을 해 준다. 어디서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새우깡 한 봉지에 새우깡은 몇 개나 들어있는지, 사람들 머리 둘레를 화장지로 재어보면 대개 몇 마디 정도가 나오는지 등등 상상을 초월하는 궁금증과 그 답들이 모두 인터넷에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인터넷을 통해 구한 지식이 과연 지식다운 지식인지 묻게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지식답지 않은 지식의 종류를 몇 개 열거해보는 것은 우리의 지식을 점검해보고, 어른으로서 애들 앞에서나마 제대로 유식해 지고 싶어지는 까닭이며. 또한 지식인다운 지식인이 많지 않다는 세상에서 지식인이고 싶은 열망 때문이다.


   지식답지 않은 지식으로서 ‘바라본 지식, 건너편의 지식’이라는 것이 있다. 애들이 손쉽게 인터넷을 통해 구한 지식 대부분이 이 건너편의 지식에 해당된다. 여기저기서 마우스로 긁고 퍼서 조합한 지식들은 짜깁기의 형식과 모니터라는 틀 걸이 때문에 메시지 자체를 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니터를 통해 바라 본 지식은 말 그대로 바라본 지식으로만 남을 뿐 나의 지식이 되지는 못한다. 반드시 출력하여 밑줄 그으며 읽어 나의 내면에서 내 식대로 내면화 된 지식이 아니면 그 지식은 나의 지식이 아니다. 가상의 공간에서 얻어진 지식은 말 그대로 가상의 지식일진대 이를 나의 지식인양 착각해서는 안된다. 이런 지식은 건너편의 지식일 뿐이다. 요즈음 많은 애들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논리적으로 이를 되뇌일 수 없으며, 실제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나의 내면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정보는 모두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로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쓰레기의 바다일 수 있다. 


   ‘나의 힘과 무서운 무기가 되는 지식’ 역시 지식답지 않은 지식이다. 인간관계와 세상살이 안에서 내가 취득함으로써 누군가에게, 또는 어떤 조직이나 무엇인가에 나의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는 앎을 말한다. 누군가를 꿰뚫어보고 있어서 조종할 수 있고, 상대방의 비밀을 나만이 알고 있다고 은근히 즐기면서, 동시에 권모술수와 폭로라고 하는 무기로써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지식이다. 정치하신다는 분들에게서 가끔 듣게 되는 ‘내가 입을 열면 여럿이 다친다’ 혹은 ‘깃털’이니 몸통’이니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개인의 사생활로부터 한 국가의 사악한 비리에 이르기까지 이런 무기를 취득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과 조직, 그리고 물량과 에너지가 이 순간에도 엄청나게 소모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또 다른 폭로, 더 크거나 더 정교한 지식 내지 조작에 의해서 결국 자신도 죽거나 다치는 상황을 초래하게 마련이다. 지식은 누군가를 조종, 조작, 내지 지배하기 위한 힘이 아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팔아먹기 위한 지식’도 있다. 지식산업이니 지식의 지배, 또한 무한경쟁 이라는 끔찍한 말 속에서 지식을 팔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팔아먹기 위한 지식이라는 것이 되로 배워서 말로 팔아먹는 요령일 수도 있지만 이는 속된 표현으로 장사꾼의 상업적인 지식에 불과할 뿐 진정한 지식은 아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팔아먹게 되는 지식은 내가 시간과 공을 들여 수집하거나 훔친 여러 가지 자료로부터 어떤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분가 독립해서 자기 회사를 차린다며 일정부분의 몫을 들고 나가는 일, 혹은 한 두 시간의 강의에 어지간한 사람의 한 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거금을 챙기는 소위 명사의 명 강의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형태로 상존한다. 학교나 학원이 그렇게 많고도 많지만 선생님이 없다는 탄식이 그래서 등장한다.


   지식답지 않은 지식과 참된 지식, 그리고 지식과 지성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다. 참으로 뭔가를 알기 위해서는 책을 읽더라도 마침내 내가 읽고 있는 그 책이 나를 읽도록 읽어야 한다는 옛사람들의 말씀은 그래서 참 두렵고도 무서운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