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꽃 단상

 

제목 : 봄 꽃 단상 
 


봄이 오려고 그랬는지 지난 겨울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병원 신세를 졌다. 별로 술을 많이 먹고 살았던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뱃 속에 궤양도 심하고 혹도 하나 생겼다해서 그것을 치료도 하고 도려내어 버리고 왔다. 사는 곳이 아름답고 깨끗한 이 곳 춘천이니 공해 핑계 할 것은 없고, 무자식 상팔자고 돈 벌 걱정 아니해도 되니 스트레스 받을 일은 더욱 없고, 처자식 없는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처자식 없이 살아 아마도 식생활이 일정치 않았던 탓이라고 굳이 핑계를 대 본다. 그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못된 성질머리나 심술보 때문임이 분명하다.




내가 몸이 아프거나 어디가 망가졌다는 것은 주변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에 주변으로부터 사랑을 참 많이 받았다. 애들하고 사는 사람이라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청소년들이 사랑 받고 있음을 알도록 해야 됩니다’ 라고 하셨던 성인(聖人)교육자 죠반니 보스꼬의 말씀을 다시 떠올리고 반성도 좀 했다.




봄이 왔다. 봄은 뭐니뭐니해도 꽃의 계절이다. 봄꽃이라면 진달래, 목련, 벚꽃, 개나리들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사랑의 즐거움과 설레임을 담은 진달래는 슬피 우는 두견새의 울음 한 번에 꽃 한 송이씩을 피운다고도 하니 슬픈 꽃이다. 목련 역시 채 피워 보지도 못하고 죽음으로 마감했던 바다지기와의 사랑을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 자목련, 백목련 둘 다 고개를 한 쪽으로 돌린 슬픈 꽃이다. 벚꽃은 일본 국화라서인지 보기 좋으면서도 괜스레 한 켠에 미운 털이 박힌 것만 같은 꽃이다. 그래도 원산지가 제주도라고 하니까 ‘절세의 미인’이라는 꽃말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이곳 저곳 어디에서나 또 아무렇게나 격식없이 피어서인지, 아니면 이름 첫 자에 ‘개’자가 붙어서인지 ‘나리나리 개나리’는 그 연유나 사연을 아직은 모르겠다. 그러나 예로부터 희망의 꽃인 개나리꽃으로 술을 담가 여성들의 미용과 건강을 도왔다하니 소박하지만 기특한 꽃이다. 나로서는 건너편 여성들의 술이라 내버려두지만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살짝 한 번 먹어 볼까 싶다.




꽃들은 작년의 꽃 모두 그대로 인 것 같고, 옆에 흐르는 강물도 어제의 강물 그대로인 것 같은데, 나만 그대로가 아닌 것 같아서 이상한 기분이 드는 올 봄이다. 봄꽃들 역시 참 이상하다. 꽃들이 먼저 요란하게 피고 진 뒤에 잎들이 무성해 진다. 그리고는 녹색의 여름을 시작한다. 잎들이 한참 먼저 있었다가 꽃대가 나와 어려운 듯 꽃 한 송이를 피워내야 순리일 것 같고 논리적일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 어쩌면 봄꽃들은 이것저것 차곡차곡 되짚어보고 돌아서서 마음의 정리를 채 끝내기도 전에 불쑥 누군가로부터 부담스럽게 받아든 큰 선물 같다. 그런 뜻으로 봄꽃을 만나는 나 같은 신부는 회개(悔改)의 잎이 나기도 전에 은총의 꽃이 먼저 피어버린 것 같아서 자꾸만 한 켠에 이 봄이 부담스러워 지는 부분이 있다. (2001.4.10)

6월이면 생각나는 곳

 

제목 : 6월이면 생각나는 곳 
 


6월을 보훈의 달이라 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공공의 이익을 위해 흔연히 자신들의 삶을 희생하였던 분들을 기억하고 그 후손들에게 이 사회가 드릴 수 있는 정성을 모아 보는 달인 것이다. 이런 6월이면 내게는 생각나는 곳이 하나 있다. 바로 먼 미국 땅 이다.




그 때는 그러니까 1986년 여름이었다. 미국이라는 광활한 땅덩이를 목격하면서, 부러움과 시새움 속에서 버지니아의 숲들을 내려다보면서, 생각보다 시시하고 초라하게까지 느껴지는 워싱톤의 길거리와 TV에서 그렇게도 자주 보았던 백악관의 철제 담장을 지나가면서,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 비겨 볼 것도 없을 것처럼 유치하게까지 느껴지는 국회의사당과 링컨 기념관을 들러 차라리 베트남 참전 용사비가 있는 포트맥 강을 배경으로 한 강변이 훨씬 낭만적이고 편하다는 느낌을 가져 보면서, 전철을 타고 아알링턴 국립묘지에 들렀다.




존.F.케네디의 무덤 앞에서 종일 타고 있다는 별 것 아닌 불꽃도 보았고 동작동의 국립묘지보다는 훨씬 덜 조직적인 듯하여 우리 것이 더 나은 것도 있다는 남모르는 묘한 안도감 비슷한 것에 잠겨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가고 있을 때 였다. 한 순간 무명용사의 묘 앞에 이르렀을 때, 당혹스러울 만큼 강한 열등감이 찾아왔다. 비록 유치할 만큼 소규모의 대리석 조각 얼마로 만든 기념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하느님께는 결코 잊혀지지 않았을 수많은 이름 없는 용사들을 그 어떤 다른 묘들보다도 가장 성대한 수병의 의장행렬과 새로운 꽃의 장식으로 24시간 지켜간다고 하는 미국인의 긍지가 내 눈앞에 그렇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건 내 젊은 나이의 교만 앞에 말없는 겸손을 요구하는 충격이었다. 내 자신이 이러해야 할 것 같았고 세상 속의 교회가 그러해야 할 것 같았다. 세상을 위한 하나의 제사로서 교회가 그러해야 할 것 같았다. 바로 이것인가 싶었었다.




우리 스스로가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하느님께 기억되는 사람이 되자고 마음 먹고, 또 그 어떤 유명한 사람보다도 진정 하느님께서 기억하실 그런 분들을 기억하고 지켜가자는 것이 보훈의 달이 지닌 참 뜻일 것이다. (2001.6.2)

고슴도치의 애정 표현

 

제목 : 고슴도치의 애정표현  


 


온 몸에 아주 거친 가시를 수도 없이 많이 가진 동물이 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고슴도치이겠다. 추워서 서로 가까이 다가서려면 서로가 찔러대고…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살아야만 되는, 다시 말하면 정다운 포옹이나 어깨동무 한 번 할 수도 없는 가여운 동물인가 싶다. 그 동안 충분히 자연 학습을 하지 못한 나로서는 어떻게 저 동물들은 서로 좋아하는 애정표현을 할 수 있을까가 못내 궁금하였다.




최근 어떤 국제 모임에서 파푸아 뉴기니에서 온 젊은이 하나를 만나 의외로 그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행운이었다. 고슴도치들은 땅에 닿는 배 부분에 가시들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부분이 가장 신체적으로 약한 부위라고 한다. 그 가장 약한 부위를 서로 내어놓고 그 부위를 통하여, 그 부위를 맞대어 비비면서 서로 사랑을 표현하고 나눈다 한다.




미미한 동물의 이야기이지만 우리 사람들도 자신의 약점을 잘 숙고하고 그리고 그를 인정 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그 부분을 내어놓을 수 있을 때, 바로 그 부분을 통하여 주변의 따뜻함과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따뜻한 친구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하는 것을 이 번엔 고슴도치에게서 배워야 하나부다.




왠지 어수선하고 뭔지 모를 두려움이 가득 차 있는 요즈음 우리 사회 안에서 우리는 서로 너의 잘못만을 꼬집어 얘기하고 소위 정의를 빙자하면서 그렇게 산다. 두려움에 싸여 내가 살자고하는 공격이나 고발로부터, 너의 잘못이 곧 우리의 잘못이며 내자신의 잘못임을 알고, 서로 우리의 약점들을 내어 놓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서로 따뜻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01.6.1)

빈센트 반 고흐의 연보

 

열정, 연민 그리고 끊임없는 갈망


-“제 멋대로의 열정보다도 오히려 오직 약간의 예지를 갖는 것, 그 외에는 불필요하다”(여동생에게 보낸 편지-1890년 2월20일-에서)


-보통사람들을 위해, 보통 사람들을 주제로, 보통 사람의 눈으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했고, 평생 그 서약을 지키면서 해가 떠서 질 때까지 그림만 그리던 사람. 바보 같은 투신.


-어떤 전통이나 규율에도 얽매이지 않던 자유야말로 빈센트의 삶과 예술.


-가난한 사람들과의 공감, 연민. 맨 발로 떠나야 했던 보리나주. 어우러진 삶에 대한 간절한 바램.




시작


1853년 3월 30일 벨기에와의 국경지대인 네덜란드 남쪽 브라반트Brabant지방의 그루트 준데르트Groot-Zundert출생.(고흐 출생 꼭 1년 전 태어났던 형의 죽음, 그리고 똑 같은 이름을 가져야 했던 고호-어머니의 죽은 아들에 대한 아픔과 새로운 아들에 대한 희망의 교차 속에서. 같은 이름과 출생일을 지니고 대리 인생을 살아야 했던 고흐). 사망한 첫 아들 빈센트-빈센트 반 고흐-여동생 안나-남동생 테오-여동생 엘리사벳-여동생 윌헬미나-남동생 코르넬리우스 순으로 총 7남매 중 실질적인 맏이. 부친은 캘빈교의 목사. 3명의 숙부는 모두 화상


1857년 5월 1일 동생 테오 출생


1864년 1863년 3년제 초등학교 졸업 후 부근 도시 틸버그 중학 기숙학교에 입학, 2학년 중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익힘


1869년 7월 16세의 나이로 중학교 중퇴 후 1년 반 정도의 공백기를 거쳐 숙부인 센트Cent 가 일하고 있는 헤이그의 화랑에 취직


1872년 여름 동생과의 편지 시작(빈센트가 동생에게 쓴 편지는 668통이 남아있다.) 당시  동생은 기숙학교에서 학업 중.


1873년 5월 런던 지점으로 승진하여 전근, 동생 테오와의 편지 본격적인 시작. 동생도 브뤼셀 지점 화랑에 취직. 6월 하숙집 주인 딸 외제니Eugenie Loyer에게 청혼,  그리고 거절. 낙담.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이요 아픔이라고 생각하기 시작. 절망과  고립. 12월 크리스마스에 집에 갔을 때 방문 걸어 잠그고 줄담배와 낙서, 그리고 소묘. 여동생 안나와 함께 런던 행. 독서.


1874년 8월 하숙집을 옮김. 누이 동생도 직장 찾아 이동.


1874년 10월-12월 파리로 전근.


1875년 1월 런던 다시 근무.


1875년 1월 20일 밀레 사망. 밀레 사망 후 1월과 6월에 밀레의 소묘와 파스텔화의 경매에서 빈센트는 직접 밀레의 작품들을 접할 기회를 가졌고 이는 충격이었다. “나는 내가  서 있는 곳이 성스러운 땅이기에 신을 벗어야 한다고 느꼈다.(1875년 6월 29일)” 이때부터 빈센트는 밀레 작품의 판화들을 자신의 방에 걸어두고 신앙의 대상처럼 존중하고 밀레를 스승으로 여기기 시작했다.(1875년 7월 6일) 그러나 빈센트는 이미 밀레를 접했었다. “바로 그거다. 밀레의 그림 ‘만종’ 너무나 훌륭하다. 그것은 詩다.(1874년 1월)”


1875년 5월 15일 파리 본점으로 다시 전임. 성경, 하이네, 키츠, 롱펠로우, 엘리오트 등에 심취. 점원 및 손님들과 자주 싸움. 성서 탐독 시작.






소명을 찾아서


1876년 4월 1일 파리지점에서 파면 후 파리를 떠남. 4월 16일 런던 도착. 5월 말까지 영국 남동부의 람스게이트Ramsgate 초등학교에서 숙식만 제공되는 무급교사로 기초  프랑스어, 산수 선생으로 취직. 새로운 희망. 그러나 수업료 징수 등에 주로 종사. 이미 결혼한 외제니 발견. 챨스 디킨즈의 고장에서 가난의 발견. 동시에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 발견. 6월 중순 성직에 관한 문의에 이어 7-12월 존스Thomas Slade Jones 라는 목사를 만나 그가 운영하는 초등학교 선생으로 일함. 존스 목사의 교회에서 설교보조로서 설교하기도 함(특별히 시편 119장 19절에 관하여). 선생이나 목사가 되는 일이 여의치 않음에 따라 12월 성탄 때 네덜란드 귀국 결심.


1877년 1-4월 숙부의 소개로 도르트레히트Dordrecht 라는 도시의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함. 5월 9일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신학교 입학 공부 시작(당시24세). 15개월 동안 숙부의 집에서 기거하며 희랍어, 라틴어, 수학 등을 공부. 숙부의 딸인 코르넬리아 아드리아나Cornelia Adriana, 일명 케이를 만남. 당시 그녀는 고호보다 7살 연상.


      *“신의 말을 씨뿌리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는  밭에서 씨뿌리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루하루는 충분할 정도로 악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지는 수많은 싹을 낳으리라. 우리는 언제까지라도 서로 돕고 살자. 형제애를 추구하며 살자.(1877년 4월 23일. cf:마태 13,2-9. 18-23 마르 4,13-20 루까 8,4-15 요한12,24)”


1877년 6월 12일 첫 번째 소묘. “사막에서의 엘리야 예언자처럼 내면에서 솟구쳐 오르는 무엇”


1878년 7월 암스테르담 대학 신학부 입학시험에 실패하고 신학공부 포기, 전도사 양성 학교에서 전도사가 되기 위한 수련 시작. “그 어떤 어려움도, 근심거리나 장애물도 없는 상태로 자신을 방치해서는 안 돼. 너무 쉽게 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해. 교양 있는  계층에 속해있고 훌륭한 지인들이 많고 또 가장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 해도 로빈슨 크루소 같은 자연인의 본성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어야 해. 그것이 없다면 자신을 지탱해 줄 수 있는 뿌리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영혼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를 수 있도록 해야 해.(1878년 4월 3일)”


1879년 1월 프랑스와의 접경지대에 있는 탄광촌 보리나주Bornage에 월 50프랑 6개월 근무라는 조건으로 전도사직에 임명. 당시 보리나주는 3만 명의 광부, 2천 명의 여성 노동자, 2천 5백 명의 14세 이하 소년 노동자가 있던 곳. 가난의 발견. 동생의 첫 번째 송금 50프랑. 아버지의 생활보조비 중단. 근엄한 성직자라기보다는 온 몸으로 하나가 되고 싶어 했던 빈센트와의 괴리로 결국 7월 전도사직에서 파면. 해임 후 브뤼셀까지 걸어가 복직을 부탁했으나 빈센트의 데생들을 본 목사는 목사보다 화가가 되라고 충고. “예술, 그것은 자연에 인간이 더해진 것. … 자연, 현실, 진실, 거기에서 예술가는 감정과 해석, 개성을 끄집어내고 표현하며, 분출시키고, 뒤섞으며, 해방시키고, 빛나게 한다.(1879년 6월)”


1879년 10월 15일 동생에게 편지 쓴 뒤로 1880년 7월의 긴 편지에 이르기까지 편지 중단(7월의 편지에서 동생 테오가 보낸 최초의 50프랑에 대한 언급과 새장에 갇힌 새와도 같은 자신의 심경 토로). 교회의 허락 없이 계속 탄광촌에서 헌신. 소묘. 독서.


1880년 1월 동생에게 편지로 살아날 길은 화가가 되는 길밖에 없다 함. 8월 전도사 포기하고 화가로서 출발. 렘브란트(1606-1669)와 밀레(1814-1875)의 작품 모사(10월- ‘만종’ ‘삽질하는 남자들’ 등).


1880년 10월 보리나주 떠나 브뤼셀로 감. 데생 독학.




내가 사는 길, 나의 구원인 예술


1881년 4월 중순 독학으로 소묘에 열중하던 브뤼셀을 떠나 아버지 집인 에텐으로 귀향. 유화 최초 제작. 다시 만난 케이에게, 이미 8살 된 아들이 있고 과부가 되어있는 그녀에게 청혼, 그리고 실연. 아버지와의 극심한 불화. “내 마음 안에 끔직한 전쟁이 시작됐다.”고 동생에게 편지. 암스테르담으로 올라간 케이에게 계속 열렬한 편지. 급거 예고 없이 상경하여 “그녀가 나타날 때 까지” 촛불에 손을 넣어 화상을 입게 됨. “거대한 공허함만이 내 안에 남게 되었다.” 손에 입은 화상은 “참 삶(true life)”을 찾는 고흐를 가로 막아선 악마의 장난의 표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놈이라는 자격지심이 시작. “외제니도, Kee도, 아버지도, 친척들도 모두 날 버리고 이제 하느님을 위해 내 몫은 그림만이 남았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께서는 왜 날 버리시는가? 신은 없다.(1882년 5월 14일)” 고호가 미쳤다는 소문.


      12월에 에텐을 떠나 헤이그로 가서 사촌 매형 안톤 모베에게서 그림 공부 시작. 가족과의 결별. 두통과 치통 시작. 동생에게 병원비를 위해 송금 요청. 모베와의 사이에서도 모베가 소개하는 젊은 화가그룹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모베의 그림 가르치는 스타일이 전통적인 그림 연습이라는 점에서 불만. 급기야 석고상을 깨서 던져버리는 사건까지 발생.


1882년 1월 Clasina Maria Hoornik 일명 시엔이라 부르는 3살 위 창녀, 알콜 중독,  성병질환자, 5살 된 아기가 있었고 또 임신 중이었던 여성과 동거. “그 어떤 남자라도 이렇게 했을 것.” 첫 번째 중요한 작품이 되는 시엔을 모델로 한 소묘 “슬픔”. 3월 시엔 아들 출산. 안톤 모베와 결별. “너는 나에게 돈을 줄 수는 있어도 아내와  아이를 줄 수는 없다.”고 테오에게 편지. 시엔과의 동거는 고흐가 뭔가 결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즉 홀로서기의 시작이다. 선생도 지도도 없이 독학과 독습으로 땅을 일구는 농부처럼 그림을 그려 나간다. 적은 돈, 적은 힘일지라도 온통 독서와 그림에 쏟아 붓는다. “끓어오르는 내면의 불길, 어떻게 분출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나는 억지로 그 불길을 다잡고 있다.” 6월 성병 치료차 3주간 입원. “진실에 도달하려면 열심히, 오랫동안 일해야 해. 그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정말 힘들게 얻어내려 하는 필생의 목표인 것이야. 하지만 너무 높은 곳은 바라보지 않겠어. … 그러나 내가 그리는 대상들과 풍경 속에서 우수에 젖은 감상보다는 비극적인 고통을 표현하려 해. 그래서 결국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고 이렇게 말해주었으면 해. ‘이 남자는 뭔가 강렬하게 느끼고 있구나. 매우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야.’   이렇게 거친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내 진심을 생각해서 말이다.(1882년 7월)” “그린다는 것은 영원에 다가서는 것이다. 영혼의 상태를 표현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색채에는 조화와 대립의 비밀이 담겨있다. 어떨 땐 고분고분하게 도와주기도 하고, 또 어떨 땐 혼란에 빠트리기도 한다.(1882년 9-10월)” “이제 왜 화가가 행복해 질 수 없는지, 들어보렴. 화가는 절망과 우울 때문에 숨이 막히고 계속해서 인내심을 소진시켜야 해. 화가에게는 휴식이 허락되지 않으며, 수많은 결점과 실수, 특히 이러한 것들을 이겨낼 수 있을지 확실치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을 써야 해. 그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고 자신의 힘을 새롭게 하여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한 노력이야. 이것만도 어려운데 여기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더해지지.(1882년 11월)” 이 해에 출간된 상시에의 밀레 전기 탐독.


1883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 무력한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해. … 탐구를 계속해 나가다보면 스스로 이런 열정의 흔적과 시행착오를 발견하게 돼. 그것은 사람들이 바라는 평온함과 거리가 멀지. 평온하게 살고 싶다면 이런 삶은 버겁게 느껴질 것이야. 이 탐구는 소화불량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 동요, 불안, 과도한 흥분상태에 빠지게 해. 또 마치 여름 폭풍우를 맞는 것처럼 숨도 막혀.(1883년 2월 8일)” “이렇게 무지렁이처럼 살고 있다.(1883년 7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몇 년 안에 어떤 일이라도 해내야 한다는 것이지. 지나치게 서두를 필요는 없어. 그렇게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야. 조용하고 평탄하게, 규칙적으로. … 내 그림은 어떤 경향에 맞추려고 그린 게 아니라 인간 본연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야. 그러므로 그림만이 내 유일한 목표란다.“  9월 시엔과 별거. 헤이그를 떠나 드렌테Drenthe(북네덜란드의 농촌과 전원)로 이동. 12월 누에넨Nuenen의 아버지 집 귀향. 창고에 아틀리에를 꾸밈. 그림과 독서에 열중. 이는 가족과 다시 볼 수 있는 자존심을 회복한 것.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 동생인 너만이 예외란다.(1883년 10월)” “너만 빼고 모두가 날 버렸다.(1883년 12월)” “나는 개처럼 살기로 했어. 그러니 언제나 한 마리 개로 남을 것이야. 나는 가난할 테고, 그림을 계속 그릴 것이며, 한 사람의 인간, 자연인이 될 것이야. 자연에 등을 돌린 인간, 끊임없이 어떤 지위나 걱정하며 자연에서 멀리 떨어진 인간은-오!-결국 뭐가 희고 뭐가 검은지 분간조차 못하게 될 것이야. 이런 이들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들과 정반대 편에 서 있어.(1883년 말)”


1884년 10세 연상, 곧 41세인 시골 여자 마르호트(Margot Begeman)와 열애. 여자 측 집안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결혼 실패. 여자는 자살 시도.


1885년 3월 26일 아버지 갑작스레 사망(아버지와는 갈등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아무튼 아버지의 사망은 고흐를 도울 사람이 이제는 동생밖에 남지 않았음을 의미. “겨울은 눈 속에 깊이 파묻히고, 가을은 낙엽 속에 파묻히고, 여름은 뜨거운 보리 속에 파묻히고,  봄은 풀 속에 파묻히는 것이야말로 ‘좋은’ 것이야. 여름은 머리 위 하늘과 함께, 겨울은 난로 곁에서, 풀 베는 남자들이나 농가의 처녀들과 함께 있는 것은 정말 ‘좋은’ 것이야.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리라고 느끼는 것은 좋은 것이야.(1885년 6월 중순)” 11월 27일 안트웨르펜Antwerpen로 가서(이는 네덜란드를 영원히 떠나는 것이 된다.) 아틀리에 마련. 루벤스와 만나 대담한 윤곽선과 원색을 사용하는 일본 판화를 처음 접촉하여 매료됨. 가난한 일상.


1884-1885년 누에넨 시기에 적어도 280점 이상의 소묘, 수채화, 유화. 특히 1884년 1-4월 사이에만 180점 이상의 그림(이중 상당수는 잃어버림) 이 시기의 가장 큰 대작은 1885년 4-5월의 “감자먹는 사람들” 고호는 이 작품을 두고 “나는 이 그림을 살았고 호흡했다”고 묘사. “나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다. 따라서 그 그림은 ‘손으로 하는 노동’을 말하고 있고, 그들이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임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우리들 문명화된 인간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법이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따라서 누구나 다 갑자기 이 그림을 좋아해주기 바란다든가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 이 그림이야말로 진정한 농민화라는 것을 인정받게 되리라. … 농민을 소박한 모습 그대로 그리는 편이, 농민에게 진부한 매력을 부여하여 그리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얻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귀부인 같은 사람보다도 농민의 딸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먼지  투성이이고 발기발기 기운 흔적 투성이인 푸른 치마를 입은 농민의 딸이. … 이런 그림은 도시인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리라. … 농민의 생활을 그린다는 것은 진지한 일이다. 예술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진실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그림들 그리고자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 자신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다.(1885년 4월 30일)” “지금 그리고 있는 색은 ‘물론 껍질을 벗기지 않은 더러운 감자색’ 그대로이다. 나는 이를 그리면서 ‘밀레의 농민들은 씨뿌리기를 하고 있는 그곳 흙에서 그려지고 있다’는 말이 정말 옳다고 생각한다.(1885년 5월 초)” 이 시기의 작품 소재들은 감자, 열매, 새 둥지 등과 같은 생명과 자연 질서의 상징들을 그리는 한편 또한 노동자들을 소재로 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한 편으로 조용하고도 차분한 성서와의 삶을 살았기도 한 시기이며, 네덜란드의 삶을 끝마쳐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소용돌이-파리


1886년 1월 안트웨르펜 예술학원 입학. 데생반으로 옮기라는 학원장의 지시로 데생을 하던 중 미로의 비너스를 엉덩이가 큰 시골 여인의 나체를 연상시키는 그림으로 그렸고, 이를 선생이 찢자 “여자에게는 엉덩이와 아이를 키울 자궁이 있다”고 분개. 한 달만에 끝난 학원 생활. 어쩔 수 없이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 (자신의 자화상 그리기는 단순한 자기 모습 묘사가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탐색, 분석 성찰의 통로. 동시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두려움, 고뇌, 자기 과장, 가난, 고립감, 공격성의 복합. 유명한 화가이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지친 모습, 또한 “인간의 진실을 말하는 유일한 수단인 자화상 그리기”). 신경과민과 같은 성격 등장. 2월 28일 급거 테오가 근무하고 있던 파리 행(10년 만에 찾아 온 파리). 테오의 아파트에서 같이 지냄. 밝은 색으로 전환. 6월 코르몽의 아틀리에에 들어감. 여기서 로트렉과 만남. 루브르 박물관 가끔 방문. 르노아르, 모네, 시슬리, 드가, 고갱 등.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 아방가르드. 앙데팡당…빈센트는 그럼에도 바르비종의 전원풍경에 더 매료되고 들라크로아, 밀레, 루소, 디아스, 몬티첼로 등에 더 심취. “인상파 화가들에게서 색을 발견했다는 것은 큰 수확.” 11월 고갱과 처음으로 조우. 연말에 “낡은 구두”


       *(‘이 구두라는 도구의 밖으로 드러난 내부의 어두운 틈으로부터 들일을 하러 나선이의 힘겨운 발걸음이 엿보이고, 이 구두라는 도구의 실팍한 무게 속에는, 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 사이를 거친 바람 속에서 끈질기게 느릿느릿 걸어가는 발걸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구두 가죽 표면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로움이 깃들어 있다. 구두창 밑에는 해 저물 녘 들길의 정적이 깃들어 있다. 이 구두라는 도구 가운데서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이 일렁이고, 또 말없이 대지가 선사하는 무르익은 곡식이 손짓하며, 겨울 들판의 황량한 휴한지 가운데서 대지는 설명할 길 없는 거부의 몸짓을 전한다. 이 구두라는 도구에는 그저 먹고 살기 위한 생활의 걱정, 고난을 다시 극복한 뒤의 말없는 기쁨, 임박한 출산에 따른 초조함 그리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 느끼는 전율이 스며들어있다.’-마르틴 하이데거, 오병남 역, ‘예술 작품의 근원’, 경문사) 


 1887년 2-3월 카페 탕부랭에서 일본 판화전. 색채는 밝아지고 양식도 변화. 봄에 에밀 베르나르와 그림여행. 8-9월 해바라기 그리기 시작(고흐의 상징이자 태양의 상징, 태양과 노란 색에 미쳐버린 화가인 고흐?). 코르몽의 화실, 탕기 영감의 화랑에 출입(이는 자유와 해방?-가난한 사람들에게로 향한 자신의 봉사와 고통이 부족하다고 울던 이가 몇 년 만에 유럽에서 가장 시끄럽고 난잡한 술집에 앉아 신을 저주하는 사람들과 밤새도록 어울리던 시기, 압생트에 취한 시기.) 11-12월 앙크탕, 로트레크, 코닝, 기요맹, 베르나르 등의 그룹전시회.


       *이 해에 피사로, 드가, 쇠라, 시냑, 고갱등과 만나 인상파 영향, 점묘파기법. 빈센트 특유의 짧고 예리한 선이 정열적으로 소용돌이치는 강렬한 터치. 파리 체재 중에  200점이 넘는 초상화 및 자화상, 정물화, 풍경 등을 제작. 그럼에도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가까이 지내던 동생의 초상화는 하나도 없다는 점. 또한 일본 판화의 영향으로 소재보다도 색채나 구도에 치중하여 서민을 위한 그림이 되어가는 과정.




프로방스에 미쳐서


1888년 2월 20일 로트렉의 조언으로 아를 여행, 결국 파리를 떠나 아를의 레스토랑 칼레르에 정착. 아를은 마르세유 옆 동네이자 그가 존경하던 몬티첼리의 집이 있는 곳. 3월 화가들의 공동체 입안. 3월 22일-5월 3일 앙데팡당 전에 출품. 5월 라 마르티느가의 작은 노란 집을 15프랑에 임대 계약. 5월 30일-6월 3일, 6월 10-20일 남부 및 지중해 생트 마리드라메르 해안으로 그림여행. 7월 우체부 조셉 루랭과 친구가 됨. 9월 16일 노란 집 완전 이사. 이 1888년은 ‘밤의 카페’ ‘밤의 카페 테라스’를 비롯 여러 점의 밤 풍경화 제작한 시기. 9월 초상화를 교환하자면서 고갱에게 자기 자화상을 보냄. 이는 고갱이 아를에 오는데 하나의 결정적인 계기(?) 아를에서만 46점의 초상화(6점의 자화상 포함) 제작. “인간이야말로 모든 것의 뿌리이다. 인간의 얼굴이야말로 내 안에 있는 최고의 것, 가장 진지한 것의 표출이 된다.” 8-9월 공허하고 지친 삶,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 9월에 “론강 너머 별이 빛나는 밤”(“죽어서 묻혀버린 화가들은 그 뒷 세대에게 자기 작품으로 말을 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 별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지도 위에 시골과 도시를 가리키는 검은 점에 의해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간단히 꿈을 꾸게 된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점들이 어떻게 프랑스 지도의 검은 점보다도 도달하기 어려운 것일까? 어떤 도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기차를 타야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는 것처럼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에 닿을 수 없다. 증기선이나 합승마차, 철도 등이 지상의 운송수단이라면 콜레라, 담결석, 결핵, 암 등은 천상의 운송수단일지 모른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것은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1888년 7월)” “고갱을 환영하기 위해 해바라기만으로 장식했다.” 역시 같은 달 9월에 제작한  자기의 침실 그림에 의자 두 개와 한 침대에 베개도 나란히 두 개를 놓은 고흐. 10월 23일 고갱이 아를에 도착(고갱은 아를도 또 노란집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에밀 베르나르에게 쓴다. 한편 고갱은 고흐의 그림 작업에 기억과 상상력에 의존하여 불완전한 현실을 수정하는 그림과 마음에 떠오르는 인상을 담도록 훈수.) 11월 “붉은 포도밭” 12월 초에 고갱이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는 고흐”를 제작. 이에 대해 고흐는 “나긴 나지만 약간 미쳐있는 나.” 라고 평. 11월 20일 “고호의 의자” “고갱의 의자” 제작. 12월 고갱과 함께 브라야 소장전 보기 위해 몽펠리에 여행. 그러나 고갱은 빈센트가 자신이 숭배하는 라파엘이나 앵그르, 드가를 높이 평가하지 않고 밀레나 도비니, 그리고 루소를 숭배한다는 것에 의견 차이로 불화. 중순 고갱이 떠나기로 결정. 고갱이 자는 침대 발치에 물끄러미 서있던 고흐, 바에서 술(압생트라는 술) 마시다가 자신의 얼굴에 술을 쏟아버리던 고흐. 급거 바의 사건이 있던 날 고갱은 호텔에서 자겠다고 나감. 훗날 고흐가 고갱을 위협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고갱의 표현대로라면 ‘노려보았다.’ 12월 23일 귀의 일부를 잘라 가비 혹은 라헬이라 불리는 술집 여자에게 전달(첫 번째 발작). 다음 날 아침 피범벅이 된 고흐를 그의 침대에서 발견하여 병원 이송, 고갱은 체포되었다가 즉시 석방 후 파리 행. 다음 날 동생 테오 200km 거리인 파리로부터 급거 도착. 며칠 뒤 고흐에게 남은 건 오직 ‘공책과 스케치, 펜싱 마스크와 장갑들을 보내달라’는 고갱의 메모.




열정, 그리고 또 열정


1889년 1월 7일 퇴원. 2월 7일-17일 ‘음식에 독이 들었다’는 환청, 울기, 식음 전폐 등으로 가정부와 주민들의 신고(‘미친 빨강머리’)에 의해 재입원(두 번째 발작).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토해낼 수 없었던 열정. 4월 17일 동생 테오 네덜란드에서 조안나와 결혼. 5월 8일 노란 집을 폐쇄(1888년 2월 20일부터 1889년 5월 이때까지 1년 두 달 반에 유화 190점을 그렸다.-밀레의 작품들 다수 집중적으로 모사)하고 살레 목사의 도움으로 생 레미에 있는 생 폴 드 모졸 정신병원에 스스로 입원. (5월 8일부터 이듬해 5월 16일까지 꼬박 1년 동안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 빈센트는 정신병원이라는 폐쇄 공간에서 그림을 위한 치열한 내면의 투쟁. 총 28점의 유화를 모사-밀레 20점, 브르통, 도레, 도미에 각 1점, 렘브란트 1점, 들라크루아 3점).


      *“어떤 사람이 베토벤을 연주한다면, 그는 자기 특유의 해석을 가미하리라. 음악의 경우, 특히 가곡의 경우, 작곡가를 해석하는 것은 그것으로 가치 있는 일이고, 반드시 작곡가만이 자기 작품을 연주하는 것은 아니야. 여하튼 나로서는 특히 지금 병들어 있으므로 무엇인가 나 자신에게 위안이 되는 것을 그리고자 하고 있어. 나는 모티브로 삼기 위해, 들라크루아나 밀레의 흑백 작품, 혹은 그들의 흑백 모사 복제를 눈앞에 두고 있어. 그리고 그것들을 즉흥적으로 색채로 그린다. 물론 모든 것이 나의 창작은 아니고, 그들의 유화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작업을 한다. 그러나 기억이란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감정 속에 있는 색채의 막연한 협화음이라고 할 수 있지. 그것이야말로 바로 나의 해석이야.(1889년 9월 19일)”


      7월 아를 방문 후 환청, 환각으로 그림물감을 짜 먹는 등 자살 시도(세 번째 발작). 이후 증세는 9월에 가서야 진정됨. 8월 앙데팡당 전에 “아이리스”와 “별이 빛나는 론 강변의 밤” 출품. 9-10월 “피에타” “라자로의 부활(그리스도를 영원한 태양으로 대치)”등을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고 다시 그림. 싸이프러스(고호의 마음에서 횃불처럼 타오르던 그 열정의 상징이요 죽음의 전조?) 등이 등장. 12월 그림물감, 혹은 등유를 먹으려는 등(네 번째 발작).


1890년 1월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가 잡지에 빈센트에 대한 평론(살아생전에 유일무이한 평론-이에 대해 고흐는 “고맙지만 나는 2류이니 더 이상 쓰지 말아달라.-1890년 4월 29-30일의 편지-”고 응답) 실음. 2월1일 조안나 아기 출산. 1-2월 브뤼셀 레벵 전시회에 6점 출품. 1월 (다섯 번째 발작) 1주일 만에 회복. 2월 22일 (여섯 번째 발작) “지누 부인의 초상”을 들고 아를에 갔다가 발작. 2개월간 지속. 3월 앙데팡당 전에 출품. 브뤼셀 20인 전에 출품 했던 “붉은 포도밭”이 400프랑에 팔림(생애 동안 팔린 유일한 작품). 5월 17일 동생을 만나기 위해 생 레미를 떠나 파리에 도착하여 동생과 조카와 함께 이틀을 지냄.(1888년 2월에 아를로 떠난 뒤 3년 만에 다시 만난 파리.) 이때 탕기, 로트레크, 피사로, 기요맹 등이 테오 집을 방문하여 해후. 5월 21일 오베르를 방문, 의사 가세트와 친교. 6월 8일 제수인 조안나와 아기가 오베르를 방문하여 가세트의 집에서 점심. 이 때 동생은 형편이 나아지면서 전업가능성과 네덜란드 이주 계획이 진행되던 차. 7월 6일(일요일) 파리 방문-며칠 더 동생과 지내려 했으나 당일 저녁 오베르로 귀향. 파리에서는 로트렉 등과 재회. 오베르로 돌아와 “까마귀가 있는 밀밭” “오베르의 교회” 등을 제작. 1890년은 “북프랑스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방대한 연작을  제작한 시기이고, “까마귀가 나는 보리밭” “오베르의 교회” 등 초가집, 초상화, 보리밭 등 80점이 넘는 유화를 제작한 시기.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 내가 나를 죽인다.”       


1890년 7월 27일 취중에 성벽 근처의 밀밭에서 권총 자살 기도. 의사 가세트에게 동생 테오의 연락처를 가르쳐 주지 않던 고흐.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사망. “인생의 고통은 살아있는 그 자체”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8-9월 베르나르의 도움으로 테오의 아파트에서 유작전 개최. 10월 테오 정신병 발작으로 네덜란드 이송


1891년 1월 25일 테오 요독증과 정신병으로 사망. 23년 뒤인 1914년 네덜란드의 우트레히트에서 이장하여 고흐와 오베르에 합장.


1906년 어머니 사망


1909년 가세트 박사 고흐 죽음의 비밀 안고 사망.


1925년 테오 사망 후 재혼하여 미국 이민으로 살던 조안나(1년 반밖에 함께 살지 못했던 남편 테오, 그리고 단 5일밖에 만나지 못했던 형부 빈센트-고흐의 편지를 편집하고 번역하거나 작품들을 관리하고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오늘 날의 고흐가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덕이다.-그녀는 1901년 화가와 재혼하였다.) 사망. 당시는 빈센트의 서간집이 3분의 2정도 영역이 완료되었던 시기였다.


1978년 테오와 조안나의 아들인 빈센트 빌헬름 반 고흐(고호가 그토록 거부했던 고호의 이름을 딴 고흐의 조카) 사망.

코엘류

 

1411. 사람의 마음을 가장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은 바로 아름다움이거든요.



1412. 때로는 인생의 강물을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도 있다.



1413. 양들이 그에게 중요한 한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세상에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해 할 수 있는 어떤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는 바로 그 언어를 통해 지금까지 가게를 키워올 수 있었다. 그건 사랑, 열정, 무언가를 바라고 믿는 마음으로 만들어지는 감동의 언어였다.



1414.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1415. 결정이란 단지 시작일 뿐, 어떤 사람이 한 가지 결정을 내리면 그는 세찬 물줄기 속으로 잠겨 들어서, 결심한 순간에는 꿈도 꿔보지 못한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만난 헨리 나웬 신부(2)

 

   이렇게 난 헨리 나웬 신부님을 처음 알게 되었고, 그리고 그때부터 그분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모으고 무조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지금 세어보니 나의 책꽂이에는 그분의 책만 한 50여권이 된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뭘 하시는 분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채 그저 신부님이라는 것 밖에, 그리고 아주 쉬운 영어와 간결한 영성논리로 책을 쓰시는 분이라는 것만 아는 채로 그분을 만나던 시절이 5년 쯤 지나고, 그분과의 만남을 깊게 한 사건은 그러니까 1990년 말로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89년 가을 나는 첫 서원 때부터 소원이었던 선교사로서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눈물과 아쉬움 속에, 그럼에도 장한 모습으로 열렬한 환송을 받으면서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광대 쪽이어야 할 자신의 신분을 잠시 잊어버렸던 젊은 날 스타 쪽의 착각 속의 선택이었기에 1년이 채 못 된 1990년 말 내 딴에는 떠날 때보다 훨씬 더 큰 용기를 내어 다시 한국으로 되짚어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떠날 때의 결심과 환송이 그렇게 큰 것이었다고 한다면, 돌아올 때의 착잡함과 썰렁함은 훨씬 더 큰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처절함이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한국에 돌아와서 갈팡질팡 마음을 잡지 못하고 지내던 그 무렵 어느 날, 전남 순천에 살고 있던 누나네 집에 무슨 일인가 볼 일이 있어서 가던 날이었다. 출발 직전 미국 신부님이신 권선호 신부님을 만난 자리에서 권신부님께선 아직 당신도 읽지는 않았노라 하시면서 책 한 권을 빼 주셨다. 무심코 받아든 책은 다시 한 번 공교롭게도 헨리 나웬 신부님의 “In the name of Jesus(주님의 이름으로)”였다. 순천에 가기위해 여수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위에서 읽기 시작했던 81쪽 짜리 작은 책은 다시 한 번 나를 미치게 하고 말았다. 순천 누이 집에서의 모든 일을 제쳐놓고 2층 방에 올라가 새벽까지 그 책을 단숨에 다 읽어 버렸다. 그리고는 그 책이 주는 감동으로 벅차오르는 흥분 속에서 책의 앞장을 뜯어 다짜고짜로 그 책의 출판사인 뉴욕의 Crossroad 출판사로 저자에게 전해 달라는 겉봉과 함께 편지를 썼다. 편지의 내용은 대충 “너무나도 큰 감동을 주었던 당신 책들에 감사를 드립니다. 몇 년 전부터 책으로만 당신을 만나왔던 애독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그 귀한 소명으로 은총과 축복 속에 계속하여 열매 맺는 삶이되시길 기도드립니다.”는 것이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계속)



코엘류

 *당분간 파울로 코엘류의 작품들에서 밑줄을 그을만하거나

   기억해두고 싶은 귀절들을 연재합니다.

1408. 그걸 ‘은혜의 섭리’라고 부르지. 바로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거야. 그런 행운이 따르는 건 자네의 삶이 자네가 자아의 신화를 이루며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일세.



1409.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한 번 실수를 하면 매일 그 실수에 눌려 살아야 한단 말이야.



1410. 기회가 가까이 오면 우리는 그걸 이용해야 합니다. 기회가 우리를 도우려 할 때 우리도 기회를 도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은혜의 섭리라고도 하고  ‘초심자의 행운’이라고도 합니다.

내가 만난 헨리 나웬 신부

 

내가 만난 헨리 나웬 신부




<로마의 어릿광대>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85년, 그러니까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외국 땅, 이태리의 로마에 도착했을 때였다. 때는 6월이었기에 이미 학교의 기숙사는 텅 비어 있었고 나는 10월 학기의 입학을 위하여 아무도 없는 캠퍼스에서 정말이지 엉덩이에 솟은 땀띠가 짓물러 터지도록 앉아 인내롭게 이태리 말을 공부해야만 했던 때였다. 그런 정신없는 와중에 있던 내가 우스꽝스럽게라도 보였던지 뽈 반루펠렌 이라는 벨기에 국적의 한 친구가 뒤늦게 여름방학 휴가를 떠나면서 “Clowning in Rome(로마의 어릿광대)” 라는 영어로 된 책 한권을 선물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책이 그 저자인 헨리 나웬 신부님과 내가 만난 첫 번째 만남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국내에 이봉우 신부님께서 번역하셨던 “상처 입은 치유자” 라는 책이 이미 있었다. 어찌 되었건 나는 “로마의 어릿광대” 라는 책의 제목에 나의 처지를 견주면서 그 제목 때문에 읽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말을 배운답시고, 또 공부를 한답시고 그런 꼬락서니를 하고 있던 내 상황이 마치 광대짓 같이 여겨진 때문이었다. 제목 때문에 펼친 책이었지만 서문의 둘째 페이지 ‘광대’부분을 읽으면서 난 곧장 이 책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 대목의 내용은 이랬다.


   


   “서서히 나는 이곳 로마에 맹수들, 조련사들, 신기한 묘기로 우리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수많은 곡예사들, 그리고 실제적이고도 진실된 얘깃거리를 전해주는 어릿광대들이 어우러져 거대한 서커스가 한 판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광대들이 무대의 중심에 있지는 않는다. 그들은 스타들 사이에서 막간을 이용하여 등장하고  실수와 떠듬거리는 말 짓으로 우리가 경탄해마지않았던 대스타들의 명연기 때문에 생겼던 긴장 후에 우리를 몇 번이고 웃게 만들어준다. 광대들은 어딘가 이상하다. 그들이 하려고 하는 것에 성공하지도 못하고, 어딘가 서툴고, 균형을 잡지 못하는가 하면 어설프기 짝이 없다. 허나 그들은 우리 편이다. 우린 광대들을 대할 때 경탄이 아닌 공감으로, 놀라움이 아닌 이해로, 그리고 긴장이 아닌 웃음과 미소로 만난다. 우리는 그들이 뭐 하나라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고 곧잘 의구심을 가져보기도 한다. 광대들은 어쩌면 우리의  모습과도 같이 보인다. 광대들은 우리 모두가 인간적인 연약함을 지고 있음을 서로 공감하게 하고, 그래서 눈물과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렇다. 이 세상이 한판 서커스 장이라고 한다면 그 서커스 장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스타 쪽일 것인가, 광대 쪽일 것인가? 우리의 주님께서 대스타이시고, 또 대스타이셔야 하는 분이라면 우리는 틀림없이 광대 쪽이다.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명연기에 감탄하고 환호하며 긴장하고, 그 뒤를 따라가는 우리 어줍지 않은 신앙인들의 몸놀림에는 그저 공감으로, 이해로, 웃음과 미소로 우리를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고 살아가야 할 바인 것이다.
(계속)

Don Mclean 의 빈센트

*이 노래가 빈센트를 두고 부른 노래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또 그 가사가 빈센트의 일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번역되거나
 혹은 이해 될 수 없어서,
 이렇게라도 올려놓고자 하는 것입니다.
 원래는 돈 맥클린의 노래였으나
 여기서는 음질 등을 고려하여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음성으로 올려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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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ry, starry night


    -Don Mclean-




Starry, starry night                                     


별들이 반짝이는 밤.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ay


파란색과 회색으로 칠을 해 가며.




Look out on a summer’s day


With eyes that know the darkness in my soul…


내 마음 한 켠에 어두운 그림자


어느 여름 더운 날, 그 날을 보네.




Shadows on the hills


Sketch the trees and the daffodils


언덕 위의 그림자, 나무와 수선화의 스케치.




Catch the breeze and the winter chills


In colors on the snowy linen land.


산들거리는 미풍, 뺨에 스치는 매서운 겨울바람,


솜이불 같은 눈 덮인 들판.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이제는 알아요. 당신이 말하려고 했던 그것을.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얼마나 괴로웠던 나날이었는지,


또 얼마나 자유롭고 싶었었는지.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았기에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사연들.




Perhaps they’ll listen now.


아마도 이제는 듣고 있겠지요.




Starry, starry night


별들이 반짝이는 밤


Flaming flowers that brightly blaze


Swirling clouds in violet haze


불꽃처럼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꽃들,


보랏빛 아지랑이, 구름의 소용돌이.




Reflect in Vincent’s eyes of china blue


빈센트의 영롱한 초록 눈동자에 어리네.




Colors changing hue


형형색색 가지가지 빛과 색깔들.




Morning fields of amber grain


Weathered faces lined in pain


Are beneath the artist’s loving hand


누렇게 물든 아침들판,


고통으로 주름져간 그의 얼굴.


사랑스러운 그의 손길이 어루만지고.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이제는 알아요. 당신이 말하려 했던 그것을.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얼마나 괴로웠던 나날이었는지,


또 얼마나 자유롭고 싶었었는지.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았기에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사연들.




Perhaps they’ll listen now.


아마도 이제는 듣고 있겠지요.


For they could not love you


But still, your love was true


그 누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어도


당신의 사랑은 진실했었죠.




And when no hope was left inside


On that starry, starry night


You took your life as lovers often do–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되던 바로 그날,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그러듯


그렇게 당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죠.




But I could’ve told you, Vincent::


This world was never meant


For one as beautiful as you.


하지만 빈센트, 당신같이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이런 세상이 도무지 맞지 않았던 것을.




Starry, Starry night


별이 반짝이는 밤.




Portraits hung in empty halls


Frameless heads on nameless walls


텅 빈 홀에 걸려있는 초상화,


이름 없는 벽 위에 액자도 없이 걸려있는 그 모습.




With eyes that watch the world and can’t forget


Like the strangers that you’ve met


그저 세상을 바라보고만 있는


낯선 이방인의 눈길




The ragged men in ragged clothes


The silver thorn, a bloody rose


초라한 모습


핏빛 장미, 은빛 가시.




Lie crushed and broken on the virgin snow.


순백의 눈밭에 뭉게지고 부서지면서.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이제는 알아요. 당신이 말하려 했던 그것을.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얼마나 괴로웠던 나날이었는지,


또 얼마나 자유롭고 싶었었는지.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ening still–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았기에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사연들.




Perhaps they never will.


아마도 영원히 듣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