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형제의 죽음

 

한 형제의 죽음


   주어진 시간과 날들은 소리 없이 간다. 누가 훔쳐간 것도 아니고 몰래 어디에 숨겨둔 것도 아닌데 흔적도 없이 그렇게 가고 만다. 매일 아침 세수할 때는 손가락 사이로 지나가고, 밥을 먹을 때는 밥그릇 위로 지나가고, 멍하니 가만히 있으면 빤히 뜬 눈 앞으로 지나가고, 온 몸으로 가로막으면 나를 훌쩍 뛰어넘어 내 위로 지나가고, 잠자리에 누우면 내 옆을 돌아 내 옆으로 지나간다. 그렇게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하고 한 형제가 죽었다. 우리 수도자들은 핏줄, 출신, 성장 배경이 다른 채로 만나, 서로 형제라 고백하고, 매일 한솥밥을 먹으며 평생을 공동체라는 이름 안에 인생을 함께 동반한다. 이번에 돌아가신 형제는 일흔을 앞두고 소위 아홉수를 넘기지 못하면서 4년여 암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죽음에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온다는 보편성, 그 누구도, 또 그 무엇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대체 불가능성, 그리고 어떤 수단으로도 피할 수 없다는 불가피성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럼에도 한 형제의 죽음을 아주 가까이서 동행해야 했던 체험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죽음을 맞는 첫 번째 주제어는 품위와 자존심이다. 특별히 오랜 병고를 겪어야 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형제는 유달리 기저귀를 차기 싫어했다. 기저귀를 차야 한다는 내 말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기에 기저귀는 아니더라도 그 소재로 된 조각들을 잘라 한 쪽에 숨겨두면서 아무도 모르니까 써보라는 말을 하고, 자신이 몇 번 체험한 뒤에야, 그리고 그 기저귀라는 것을 가져다 드리면서도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고 나와 당신만이 아는 일이고 여기 침대 밑에 숨겨놓았다는 식의 공개된 거짓말 끝에야 그 기저귀라는 것을 차고 얼마동안을 지내다가 그렇게 형제는 돌아가셨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바지 끈을 누군가가 내려줘야 되는 상황이 가장 처절한 비참함을 맛보는 순간이라는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형제의 이런 모습들은 마지막 자기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해보려는 안간힘인 것 같았다.


   죽음의 두 번째 화두는 아마도 두려움이다. 형제는 마지막 날 까지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이 무척 두려웠던 것 같다. 죽음이나 준비 같은 마지막에 관한 말을 서로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감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에는 ‘이대로 죽으면 축복이지.’ 했다가도, 또 어떤 날에는 ‘아직은 조금 더 살 것이니 걱정 마.’ 라고 하면서 눈을 흘기기도 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거의 의식이 뚜렷해야 하는 잔인한 병인 암이었기에, 형제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임을 절절히 목격하였기에, 말 그대로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는 말이 무엇인지 내 눈으로 보았기에, 형제는 생의 인연을 놓기가 그렇게 두려웠고, 고통이 두려웠으며, 또 이 생(生)을 떠나 다른 생으로 옮겨가 맞닥뜨려야 하는 미지(未知)가 그렇게도 두려웠던 것일까 하고 되짚어 본다.


   죽음이 갖는 세 번째 특성은 일치라고 하는 속성이다. 가족 누군가가 아프거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할 때 모두는 쉽게 서로 한마음이 된다. 그리고 그 형제의 주위에 똑같은 마음을 지니고 모여들어 같은 눈물을 흘린다. 죽음은 혼자의 것이지만 동시에 주변에 있는 모든 이의 것이다. 가족 내에서 누가 아프다는 것은 그에게 가족들의 일치된 애정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왔다는 것이겠고, 형제의 죽음 주위에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은 죽음이나 인생살이가 철저히 혼자만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모든 이의 것이고, 우리의 것이며, 본질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동일하고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항구에서 어떤 배가 점점 멀어져가다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듯, 그렇게 한 형제의 죽음으로 그 형제를 이제는 더 이상 예전의 모습으로 볼 수 없게 되었기에,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평선 너머 다른 포구에서는 점점 다가오는 배를 바라보며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저 넘어 다른 포구를 생각할 수 있기에, 그리고 아무것도 확실히 아는 바는 없지만 뭔가를 나름대로 믿을 수는 있기에, 형제를 오래도록 기억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축제다운 축제

 

축제다운 축제


   다시 6월이다. 우리에게는 6월하면 떠오를 수밖에 없는 전설 하나가 또 생겼다. 바로 4년 전의 월드컵 4강 신화의 전설이요, 붉은 악마의 전설이며,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었다던 길거리 응원의 전설이다. 우리는 불과 4년 전 몇 천 명으로 시작한 붉은 악마의 응원단이 몇 십만이 되고 몇 백만이 되어 급기야 700만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며 이른바 6월의 붉은 물결이요 붉은 혁명, 붉은 전설을 이루어 냈던 과정을 함께 체험했었다. 그때 우리는  원 없이 소리도 질렀고 박수도 쳤으며 눈물도 흘렸고 맥주를 마셔댔다. 그때 우리는 설마설마 하는 심정으로 밤잠을 설쳤고, 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우리 자신마저 깜짝 놀라기에 이르렀었다. 온 국민이 월드컵이라는 최면에 걸렸는지, 붉은 악마라는 마법의 주문에라도 걸렸는지, 전 국민이 훌리건이라도 된 듯이 그렇게 법석을 떨면서 뜨거웠던 6월이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제껏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보고 듣지 못하던 그런 체험을 함께 했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계층과 세대를 넘어, 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단시일 내에 상식과 순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그런 연출을 함께 해 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과연 왜 그랬을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신통방통하고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며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장대비를 맞으면서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를 꼼짝 않고 서서 박수치고 ‘대~한민국’을 외쳐대었던 군중들이 생리현상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본 결과에 따르면, 길거리 응원 초기에 그렇게 많은 군중이 몰릴지 몰라 사회적으로 대비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책 없이 그저 참거나, 혹은 재빨리 이튿날부터는 어른용 기저귀를 찼다고 했다. 또 다른 한 가지. 그렇게도 많은 군중이 몰려 지나간 뒤에 담배꽁초 하나 없이 뒷처리가 그렇게도 깨끗했던 것은 정말 우리의 높은 시민의식 때문이었을까? 답은 아무래도 그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것이 정설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축제를 정신적 퇴행이라 한다고 한다. 어른이나 성숙한 사람들이 애들처럼 유치해져서 서로 웃고 낄낄댈 수 있게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개인이나 소집단이 아닌 사회적 대집단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마땅히 그 과정 뒤에는 그 집단이 아무리 성숙한 집단이라 할지라도 다소의 어지러움과 부작용이 있어야만 옳고, 또 가히 정상적이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02년의 6월 축제는 월드컵 4강이라는 실적 외에도 어른들 눈에 마냥 염려스럽고 걱정스럽기만 했던 이 땅의 젊은 세대들이 공동체와 연대감 속에서 하나의 영혼, 하나의 마음을 체험할 수 있었던 장이었고, 그저 빨갱이는 나쁜 놈이요 뿔 달린 적이기에 그를 묘사하는 빨강색 근처에는 얼씬도 말라던 오랜 세월의 red-complex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면 극복할 수 있었던 체험의 장이었으며, 이 각박한 경쟁논리의 세상살이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구미강호들을 격파해 내고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우리도 뭘 하면 해 낼 수 있겠구나 하는 강한 자신감을 획득할 수 있었던 체험의 장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생리적인 현상마저도 꼼짝 못한 채로 긴장하고 절제하면서, 또 행여 누가 볼세라, 행여 누가 우리더러 저급한 족속이라 손가락질 할세라, ‘그러면 그렇지. 결국엔 제깟 놈들이…’ 라고 말할까봐 담배꽁초 하나까지도 남김없이 주워야만 했던 것이었다면, 난 이를 감히 경직된 축제요, 조작된 축제였으며, 뭔가가 아직은 부족했던 안타까운 축제였다고 말하고 싶다.


   축제는 진정 축제다워야만 한다. 축제답지 않은 일회성, 내지는 일시적인 사회적 집단의 한풀이는 허탈과 공허, 심리적 공황만을 남겨둘 수도 있다. 그리고 지나치게 계획되고 절제된 축제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축제이며 축제가 아닌 축제이다. 자연스러운 기쁨의 축제는 생명과 그 생명의 원천에 대한 신뢰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이 세상살이 동안 진정 축제다운 축제가 끝내는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를 동경하고 기도한다. 나는 다시 한 번 다가온 이번 월드컵 축제, 6월의 축제가 진정 축제다운 축제이길 기대한다.

5월, 청소년의 달

 

청소년의 달


   5월, 청소년의 달이다. 우리의 미래라는 청소년을 이 5월 한 달만 생각하기 위해 청소년의 달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싶을 만큼 이 달에는 청소년들을 위한다는 각종 행사가 범람한다. 각양각색의 행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 이라는 단어를 두고 얘기할 때, 즉시 그 단어 뒤에 ‘문제’라는 말마디를 붙여서 이야기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이른 바 ‘청소년문제’는 대개 천편일률적으로 몇 가지의 통계 숫치를 인용하면서 세 가지 정도의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종결지어지게 마련인데, 가정교육이 엉망이니 이를 각 가정으로부터 잘 해야겠다는 것이 그 첫째이고, 입시 위주의 학교교육이 문제이니 그런 교육을 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것이 그 둘째이며, 가치관이 붕괴되었으니 전통적으로 값어치 있는 가치관의 고수를 위해 애를 써야겠다는 것이 그 셋째이다. 일반적으로 청소년이라는 주제어를 함유하고 있는 논문들이나 세미나들, 그리고 행사의 축사들이 대개 이런 틀 걸이 안에서 요약정리 할 수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먼저 나는 ‘요즘 애들은 형편없어.’ 라든가, ‘요즘 애들은’ 어쩌고저쩌고 해 가면서 애들을 문제의식이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을 반대한다. 기성세대의 눈에는 못마땅하게 보일지라도 요즘 애들은 이미 기존의 기성세대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잘났으며, 풍요로운 세대를 아름답게 잘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몇 배 몇 십 배, 부러울 만큼 더 잘 살아갈 것이 틀림없다. 아니, 적어도 그렇다고 믿어야만 한다. 청소년들은 우리의 미래이고 그 미래는 우리가 믿는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을 바라봄에 있어서도 부정적인 견해나 시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옮겨야만, 말 그대로 청소년들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할 줄 아는 어른이 되며, 칭찬받고 자란 아이가 칭찬 할 줄 아는 어른이 되며, 신뢰받고 자란 아이가 신뢰할 만한 어른이 된다. 애들을 더욱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둘째로 청소년은 우리 기성세대가 가르쳐야 할 대상이라든가 교육시켜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청소년은 기성세대가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기성세대와 함께 지구라는 별 위에서 인생의 한 때를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동반자이고 동행자이다. 나의 체험에 누군가의 체험을 더하면 그만큼 나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나의 생존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생각으로 기성세대는 청소년들의 체험을 자기들의 체험으로 삼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야만 한다. 물론, 청소년들 또한 기성세대의 체험을 자기네들의 체험으로 삼으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이것이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교육이라면 교육이다. 그런데 교육은 마음의 일이라서 강요로 되지는 않는다. 청소년들이 기성세대를 바라보면서 기성세대의 체험을 자기네들의 체험으로 삼고 싶어 하도록 멋진 삶을 보여주고 따라 하기를 그저 바랄뿐인 것이다. 그런 의미로 교육은 ‘보여주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청소년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으며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아 기성세대 역시 청소년들로부터 사랑받아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셋째로 오늘 이 땅의 청소년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애들이 머리에 물을 들이면 공부를 못하게 된다고 어른들이 말하지만 애들도 그렇고 어른인 나 역시도, 공부와 머리의 색깔이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 것인지 이는 도무지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고 또 이해가 되지도 않는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애들이 빨강이면 빨강으로, 파랑이면 파랑으로,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그렇게 어른들과 애들이 다르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해야만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상대방이 내 식대로 완벽해야 하지 않아도 되며, 또 그럴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어른됨이고 성숙함이다. 애들을 기성세대 식으로 너무 조급하게 몰아세우지 말고 시간의 인내로 바라보면서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봄꽃, 그리고 개(犬)혁

 

    꽃이 피는 시절이다. 오며 가며 길거리의 꽃집들을 눈여겨보게 된다. 꽃에는 아주 비싼 꽃도 있고 그저 단돈 몇 푼에 팔리는 꽃도 있으며, 다른 꽃이 팔릴 때 덤으로 끼워 팔리는 꽃들이 있는가 하면, 꽃집에서는 아예 팔리지 않는 꽃들도 있다. 들에만 피는 야생화들을 이제는 온실에서 키워 내다 파는 바람에 편리한 부분도 있긴 있지만 그 꽃으로 인하여 들에 나갈 필요가 줄었다는 점에서는 안타까운 면도 있다. 비싼 꽃이라면 백합이니 장미, 또 이름도 외우지 못하게 얄궂은 외국말 꽃, 그리고 화려한 꽃들이 많다. 그런 꽃들은 머리가 아플 만큼 향기도 아주 진하다. 내 개인적으로는 채송화를 좋아 한다. 생김새나 모양 그리고 색깔이 수수하면서도 독특한 탓도 있지만 그 나름대로 의미를 새길 수 있어서이다. 채송화는 꽃집에서 잘 팔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빨강, 파랑, 노랑, 하양, 분홍 등 가지각색의 꽃을 피울 줄 안다. 채송화는 향기가 없지만 아주 맨질맨질한 작고 새까만 씨앗들을 터질듯이 한 모듬씩 안고 있다. 더더욱 채송화가 매력적인 것은 화분에 담아 사무실 창가에 둔다 하더라도 왠지 모르지만 잎만 무성할 뿐 예쁜 꽃들을 절대로 피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먼지를 가득 뒤집어썼을지라도, 땅 바닥에 기듯이 바짝 붙어 피더라도, 채송화는 햇볕을 바로 받는 바깥 양지바른 곳에서만 자기 꽃을 제대로 피운다. 

 

    봄꽃들은 꽃샘바람과 추위가 나무들을 흔들고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만개한다. 흔들어 주어야만 정신이 번쩍 들어 꽃을 피워야 할 계절이 왔음을 나무 스스로 느끼는 것일까? 봄꽃들은 하나같이 꽃들이 먼저 피고 꽃이 진 다음에야 잎이 돋는다는 특징이 있다. 화려한 꽃잎으로  맘껏 자신을 표출한 뒤에 이제 또 한 해를 진지하게 살아갈 일상을 찾아가는 것일 게다. 봄꽃들은 대부분 슬픈 전설 하나씩을 동반한다. 진달래가 그렇고 자목련과 백목련이 그러하며 분꽃이 그렇다. 그리고 시인들이 노래하는 시들은 대개 봄꽃들임에 틀림없다. 봄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묘한 재주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봄꽃들은 향기를 갖지 못한다. 아마도 아직 4계절의 순환을 골고루 경험하지 못해서이다. 인생을 꽃에 비겨 이야기 한다면 말 그대로 꽃다운 나이를 지내고 있는 청소년들이 이런 봄꽃에 해당한다. 이런 저런 말 한 마디에 온 일생을 흔들어 자기 나름대로의 꽃을 피우는 시기, 꽃을 먼저 피우고 싶어 안달이 나는 시기, 온 세상의 고민과 슬픔을 제 한 몸에만 지닌 듯이 신화와 전설, 그리고 아픔과 눈물이 많은 시기, 하룻밤 새에 기나 긴 소설을 쓰기도 하고 시인이 되어 시를 읊어대기도 하는 시기, 아니 소설이요 시 자체가 되는 시기, 그럼에도 인생의 맛이나 멋을 담은 향기는 없는 풋풋한 시기, 바로 이런 시기가 청소년 시기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꽃과 같은 우리 애들에게 나 자신을 포함한 어른들이 하는 짓을 가만히 보면 마치 죄다 장미이고 백합처럼 비싼 꽃, 시장에 내다 놓아 잘 팔리는 꽃만 되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보여 질 때가 많다. 백합이 절대로 채송화가 될 수 없고 채송화가 결코 백합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말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자신이 백합이지 못했던 처지를 애통해 하면서 애들만이라도 기어이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하는 오기일까? 그런 것이 기성세대가 되어가는 것이고 어른이 되어가는 것일까? 사실 어른들이 애들에게만 그런 강요를 하는 것도 아니다. 어른들은 자기들끼리도 서로 그런 억지를 부리는 것만 같다. 언제부터인가 이 땅에 화두가 되어있는 소위 양극화의 해법과 개혁을 놓고도, 그 누구도 서로의 고유성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미성숙함, 상호간의 배려 부족을 스스로 성찰하려 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개혁은 채송화를 백합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백합을 채송화로 만드는 것도 아니며, 자신의 솔선수범과 희생, 그리고 소박한 결심과 실천들을 먼저 요구한다. 백합을 기어이 채송화로 만들어야만 속이 시원하겠다는 듯이 우기는 것은 우격다짐이요, 고집불통이며 오만이다. 그런 식의 이른 바 개혁은 개(犬)혁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되지 않을 선진국, 오지 않을 선진국

 

되지 않을 선진국, 오지 않을 선진국


   어떤 손님과 유명한 음식점에서 식사할 일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외식을 즐기고 있는 큰 식당이었다. 신부라 하면 부동산 투기할 일도 없고 보석으로 치장할 일도 없으며 멋드러진 집이나 처자식 먹여 살릴 걱정으로 번잡스럽지 않아도 되지만 유달리 맛좋은 음식과 그럴듯한 음식점에 상당한 집착을 보이고 마는 것이 사실이다. 드러남이 없이도 사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르(?)이기 때문일까? 아무튼, 식사가 계속되던 중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몹시 시끄러운 식당 안을 네다섯 살 정도의 두 아이들이 온통 휘젓고 다니는 것이었다.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애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 아빠도, 종업원들도,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그 어떤 사람도, 무감각한 것인지, 남의 집 자식에게 뭐라 해서 행여 욕이나 먹게 되지 않을까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시끄럽고 소란스러워 내가 먹는 그 음식에만 집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자는 것인지,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이 한참 지났고 급기야 내가 종업원 한 사람을 불러 아이들의 부모에게 얘기 좀 해 달라고 부탁했다. 종업원이 두어 번 쯤 아이의 부모님께 정중히 얘기하는 과정이 있었으나 애들은 여전하였고, 결국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망쳐버린 외식이었고 오랜만에 만나게 된 나의 손님과는 찝찝한 만남이 되고 말았다.


   정치하시는 어떤 분들이 잘하면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국민개인소득 2만 불의 시대를 맞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우리도 선진국에 진입하게 된다고 말한다. 어떻게 2만 불이라는 숫치가 선진국의 기준이 되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모른다. 2만 불의 시대가 오든 오지 않든, 그 2만 불이라는 기준을 도대체 누가 어떻게 만든 것인지, 그게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분명히 아는 사실 하나가 있다. 그것은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웃을 아랑곳하지 않는 그런 삶의 형태들을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소위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코 되지 않을 선진국이요, 오지 않을 선진국이다. 식당이란 곳이 내 돈 가지고 내가 밥을 사먹듯이 너도 네 돈 가지고 너의 밥을 사먹는 곳일 뿐이며, 주변을 깡그리 무시하는 행동을 해도 좋은 곳이고, 이런 외식의 자리에서나마 내 자식들이 맘껏 기를 발산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거나 기쁨의 표현이 아닌 소란을 피울 권리까지도 내 밥값으로 샀다고 생각하며, 행여 누가 주위에서 뭐라고 하면 눈 부릅뜨고서라도 남의 집 애들 기를 죽이는 당신은 도대체 뭐냐는 식으로 시시비비를 가려야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IT 강국이요 월드컵 4강 신화의 나라라고 뻐기더라도 아직 우리는 선진국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미개국이거나 개발도상국이며 바보 같은 혼자만의 멋에 겨운 초라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은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되는 존재라는 것, 그렇게 함께 살려면 서로가 서로를 배려해야 되고 상호간에 불편을 끼치는 일은 삼가야만 된다는 것, 그리고 혹시 그렇게 남에게 불편을 끼치게 되면 그것이 범죄이고 어떤 형태로든 함께 살기 위한 사회에서 격리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러한 사회의 기본원리에 관한 내용들을 철저히 교육시키는 가정교육이 없는 한, 대한민국에 선진국의 시대는 오지 않는다. 위대한 국가를 위대한 정치가가 만들어 줄 것이며 2만 불이라는 숫자가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는 착각이요 환상이다. 위대한 국가는 위대한 국민이 만들며 그 위대한 국민은 사회의 기초단위인 각 가정에서 비롯된다. 길거리를 걸으면서 여기 저기 침이나 가래침을 보지 않아도 될 때, 자동차의 차창 밖으로 던져지는 담배꽁초를 보지 않아도 될 때,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휴대폰 벨소리의 심포니나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때, 심란함이나 부담스러움을 안고서라도 어쩔 수 없이 공중변소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때,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는 선진국의 시대, 그리고 문명화된 사회의 일원이 된다.

제발, 너나 잘 사세요

 

제발, 너나 잘 사세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나에게 상담차 호송(?) 되어 온 승모라는 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 아이가 컴퓨터 오락에 빠져 학교를 등한시하고 심지어는 이를 은폐 엄폐하기 위하여 거짓말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입장에서 아이가 사악한 길에 접어드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이와, 또 엄마와 만나보니 내게 승모는 극히 정상이었다.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따라 뭐든지 더 잘 해보려는 과도한 열성이 일을 망쳐버리듯 아이가 나름대로 커 나가길 기다려주지 못하는 엄마의 조바심과 과도한 열성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엄마는 나와의 만남 뒤에 속을 끓여가면서 아이에게 뭔가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애를 쓰셨다. 그럼에도 승모에게 엄마가 원하는 식의 뚜렷한 변화가 없는 채로 시간이 얼마쯤 흐른 뒤, 승모 엄마는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두고 아이와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래서 승모네는 이산가족이 되고 승모 아빠는 말 그대로 기러기 아빠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다가, 언젠가 승모 엄마는 결단을 내렸고, 승모만을 남겨놓은 채 한국에 돌아왔으며, 승모는 혼자서 아직도 미국이라는 곳에 살면서 대학 입학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 승모가 의젓한 모습으로 지난 해 말에 한국에 잠깐 다녀갔다.


   내 자식 없고, 또 자식 한 번 낳아 키워본 적도 없는 녀석이므로 속 편한 소리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너도 네 자식 낳아 키워보면 다를 것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자식 없는 사람이라는 자유로움으로 배짱 좋게 몇 마디 사설을 붙이고 싶어진다. 첫째, 우리 부모님들은 제발 자신들의 인생이나 잘 사시고 챙기셨으면 좋겠다. 자식들을 위한 인생을 살지 말고 자신들을 위한 인생을 사시라는 것이다. 요샛말로 하자면 ‘제발, 너나 잘 사세요’ 하는 말이다. 자식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되는 지도 모르면서 자식들 교육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망가지고 마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본다. 이런 경우의 부모님들은 부모라기보다 새끼들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그 새끼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들이 주변에 있는지 없는지 조바심 내면서 끊임없이 발톱을 세우는 동물의 어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둘째,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들과의 관계설정에 있어 그 관계가 종속관계나 상하관계 내지는 소유관계가 아니며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 같은 관계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손자를 보신 동네 할머니들이 문 앞에 금줄을 치시면서 ‘우리 집에 아기 손님이 드셨다.’ 하셨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조물주께서 부모와 자식으로서 일정 기간 동안 함께 의지하고 기쁨을 나누며 살아가라는 소중한 손님 같은 관계요, 인연이다. 자녀를 손님으로 대한다 함은 내 식대로 아이를 만들고 싶어 하는 부모와 이에 반항하는 아이들의 관계와는 아주 다르다. 손님과의 관계는 마음이 오고 가는 정중함과 예를 갖춰 대접해야 하는 사이 이다. 그래서 교육은 마음의 일이다. 셋째,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부모님들은 잘 생각해야 한다. 많은 부모들이 내가 못 배웠으니 자식들만이라도 잘 가르쳐야 되겠다고 하고, 내가 배고프고 못 살았으니 자식들만이라도 잘 살게 해 주어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은 ‘믿을 것이 결국 내 자식밖에 없다’는 식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의 발상이요 스스로 못남을 드러내는 치졸함이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와 자식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식을 둔 부부간에 아름답게,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사랑하며 사는 모습을 자기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엄마와 아빠가 아름답게, 열심히, 행복하게 사랑하며 사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가 자기도 그 엄마나 아빠처럼 아름답게, 열심히, 행복하게 사랑하며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같은 이런 방학기간 동안에 공항에 가면 외국에서 공부하는 애들이 오고가는 광경을 너무나도 쉽게 볼 수 있다. 언젠가 이런 방학기간에 외국으로 부인과 함께 자식을 떠나보내고 난 뒤, 쭈그리고 앉아 창문 밖을 멍하니 내다보면서 ‘도대체 이게 뭔 지랄인지 모르겠네.’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쓸쓸한 어떤 아빠의 모습이 오랜 기간 동안 지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