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과 저쪽

 

이쪽과 저쪽


   사회가 건전하게 발달하게 되면 모양새로 보아 마름모꼴이 되는 것이고, 우리 사회는 그런 형태로 발전해 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오래 전에 초등학교 아닌 국민학교에서 배웠다. 상류층과 하류층이 각각 위 아래로 조금씩이고 가운데 중산층이 많은 형태로 사회 구성원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추측컨대 이런 이론이 요즘 애들 교과서에서 사라진지 오래일 것이고 아마 지금쯤 이런 내용은 형편없는 구시대의 이론이 되었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라는 것이 이른 바 발달(?)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 상류층이 조금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중산층이 아닌 하류층으로 전락하면서 우리가 배운 바에 따라 아주 부적절한 사회요 퇴치의 대상인 피라미드 형태의 사회가 된다는데, 우리 대한민국도 어김없이 이런 자본주의의 과정을 밟아가는 사회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첨단을 이룬다는 미국은 일찍이 이를 내다보고 자기네들 화폐의 기초 단위인 1달러짜리 지폐의 뒷면에 삼각형의 피라미드를 새겨 넣었던 것일까? 우리나라가 정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혹시 삼각형의 사회에 진입한 것은 아닐까? 우리가 아직 마름모꼴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면 이것이 어쩌면 중산층이라고 착각하는 하류층의 자위 때문은 아닐까?


   삼각형의 피라미드 사회는 소위 20:80의 사회이다. 가진 자 20과 못가진 자 80으로 이루어진 사회인 것이다. 요즘 양극화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를 짐짓 우리 사회가 마름모꼴의 사회이고 건전한 중산층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위아래로 조금씩 분포한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격차가 극단적으로 벌어졌다는 식으로 이해하려 든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는 틀린 말이다. 양극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은 소박하게 말하여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대다수의 빈자와 소수의 부자로 사회가 재편되었다는 것이고 이 둘의 사이가 질적으로 점점 더 큰 편차를 지니게 된 것을 염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시대 우리 안에 커다란 고민거리요 화두로 부각되어졌다는 양극화의 문제는 이미 우리 사회가 충분히 피라미드 꼴의 사회가 되어있음을 스스로 자인하고 있음에 다름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또 다른 양극화의 갈래들 속에서 내가 이쪽일지 저쪽일지를 놓고 고민한다. 부자와 빈자, 가진 자와 못가진 자,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기득권층과 소외층,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 사지 멀쩡한 자와 신체적 결함을 가진 자, 강자와 약자, 속이는 자와 속는 자, 강탈하는 자와 뺏기는 자, 억압하는 자와 핍박받는 자, 때리는 자와 맞는 자, 보수와 진보, 우익과 좌익 등등. 모든 사회 계층을 이렇게 양분법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마땅치도 않지만, 우리는 매일 매순간 어떤 형태로든 우리 스스로가 어느 쪽인가를 가늠하면서 조바심 속에 살아간다. 이쪽은 저쪽을, 또 저쪽은 이쪽을 두려워하고 불편해 하며 귀찮게 생각하고 심지어 위협으로 여기면서 타도할 대상으로까지 몰아간다. 그리고 내가 다행히 저쪽이 아니고 이쪽인 것에 대해 안도하기도 하며, 내심으로는 분명히 저쪽임을 스스로 자인하고 있으면서 이쪽인 양 허세와 오기를 부려보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서 이런 저런 양극화의 해법들이 있다지만,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게 변두리 내지는 나머지, 소수점 이하, 속된 표현으로 떨거지와 같은 신분을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의 생각엔 서로가 서로의 처지, 차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고 본다. 이는 우리가 서로 네가 있음에 내가 있을 수 있음을 감사하는 것이고, 이 세상살이라는 것이 정해진 잣대로 치수를 재어 그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니게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며, 들쑥날쑥함 속에 세상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움을 빚어낸다는 사실을 자녀들과 후진들에게 가르치는 것이고, 우리 모두 조물주가 나에게 허락하신 것들과 너에게 허락하신 것들을 서로 나눌 수 있어서 네발 달린 짐승이 아니고 인간일 수 있음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잃음과 잃음의 연속

 

잃음과 잃음의 연속


   황금 돼지가 맞느니 붉은 돼지가 맞느니 하는 논란 속에 사람들은 붉은 돼지보다는 황금  돼지 쪽으로 심증을 굳힌 듯하다. 사람들은 그렇게 돼지 타령만으로도 절로 대박이 영글어 저마다 부자가 될 것 같은 생각들이 드나보다. 황금 돼지가 되었건, 붉은 돼지가 되었건 나하고는 결코 상관이 없을 일이고, 꿈도 꾸지 못할 일인데 그런 꿈을 현실로 살아가는 큰 부자 한 분을 만났다. 그분께서는 젊은 시절부터 근면하고 운이 따라 큰 재산을 이룬 분이었는데, 재산을 딸 둘에게 물려주려 했다가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다 하셨다. 재산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원심력을 지녀서 그 소유주의 둘레를 빙빙 돌면서 자꾸만 그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관성을 지녔고, 재산의 주인이 그 원심력을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힘을 지니면 그 재산은 주인의 둘레를 돌기만 할 뿐이지만, 언젠가 한 순간이라도 주인이 그를 지탱할 힘을 상실하거나 약해지기라도 한다면 가차 없이 그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또한 그 무게에 의해서 주인마저 넘어뜨리고 만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자식에게 뭔가를 물려주고 싶어도 그 자식이 그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 잘 가늠하고 그 녀석들이 감당할 만큼만 물려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자식 잡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그 부자의 말씀이었다.


   재산뿐만 아니라 어쩌면 인생살이도 이처럼 내가 중심을 잡고 서있는 둘레를 도는 원심력의 추처럼 자꾸 무엇인가가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려고만 하는 과정인지 모른다. 인생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축적하고 얻어가는 과정인 것 같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는 착각이다. 인생은 근본적으로 상실과 잃음의 과정이고 연속이다. 태어나면서 편안한 어머니의 자궁을 잃고, 학교라는 것을 다니면서는 집을 잃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 자신을 잃고, 결혼을 해서는 여러 선택의 가능성을 잃고, 점점 나이 먹어가면서 싱싱한 외모와 오랜 친구, 또 내 나름대로 괜찮았던 명성이나 평판을 잃어가고, 50대에 접어들면서는 시력부터 잃더니 노년에 이르러 내 마음대로 오갈 수 없는 의지와 자신감, 그리고 육체의 독립성을 잃고, 죽음에 당도해서 마침내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그뿐이 아니다. 이기심을 통해 우정을 잃고, 방탕으로 순진함을 잃으며, 포기와 버림, 그리고 곁눈질로 신뢰와 사랑을 잃고, 전쟁으로는 집과 생명을 잃으며, 쓰잘 데 없는 소모적인 정치적 논쟁으로는 국민과 조국을 잃고, 질병과 사고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으며, 지진, 홍수, 테러, 전염병으로는 생명을 잃는다. 잃음과 잃음의 매일 안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지켜야 하고, 얻어야 되며, 쌓아가야 되는 것일까?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세상의 거짓말과 가면을 벗길 수 있고, 유혹을 넘어설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파워와 영향력,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소박한 사람들의 미소와 작은 자리에서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들리지도 않는 호흡에 의해 이 세상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살아져가고 있다는 믿음 말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함께 얻어내야 하는 것은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 또 그 진리가 말해지는 자리들을 계속 함께 발굴해 가자고 하는 공동합의이다. 내 가정과 일터에서, 우리가 애초에 하나였고 그래서 너는 모두 내 살붙이이며, 너는 모두 나처럼 아주 보배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들, 또 그런 것이 말해지는 자리들을 계속 발굴해 내야 한다. 그런 합의는 소위 민주적이고 정치적이라는 합의절차내의 다수결이나 타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만 되는 존재임을 상기하는 진솔한 자각으로만 이루어진다.


   끝으로, 너와 나 사이에 서로 감사하는 감사의 정을 쌓아가야만 한다. 너와 내가 이 시간, 이 공간, 그리고 이 인연을 함께 살도록 조물주가 허락하셨고 그래서 너와 내가 이렇게 특별한 시기와 공간 안에 선택되어졌다는 사실을 서로 함께 감사해야 한다. 내 인생에 대하여, 너의 동행에 대하여, 이 세상이 이렇게 유지되고 있음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

두려움

 

두려움


   어린 애들이 학교에 다녀오자마자 이런 저런 학원에 가야만 되는 불쌍하고 안타까운 현실을 두고 수도 없이 많은 부모님들에게 물어보았다. 애들을 왜 그렇게 키워야만 되는 것이냐고. 그런 말 앞에서 부모님들은 이런 현실이 참으로 개탄스럽다고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그러한 세상에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그리고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자식만 바보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라고 결국 토로한다. 또 다른 얘기이다. 다 자란 애들이 성장하고 출가한 뒤에도 아직까지 애들 아닌 애들의 걱정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어떤 부모님들에게, 이젠 자기들 인생을 자기들이 살도록 내버려 두시고 제발 당신네 인생이나 잘 살 궁리하며 그 동안 고생하여 모은 재산일랑은 애들에게 물려줄 생각도 하지 말고 편안하게 사시라 하면, 어찌 인생이 그렇게 되느냐 하시면서 자식 없이 사는 신부니까 우리 마음을 이해 못할 거라고 말씀하시고, 마지막엔 이 세상에 믿을 것이 자식밖에 더 있겠느냐고 결국 말을 맺는다. 세상에서 믿을 것은 자식 말고 아무것도 없다는 두려움이 그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두려움으로 우리 인생을 시작했고 평생을 그렇게 매일 매일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두려움의 힘과 세력이 온 세상을 꽉 채우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되어질 때가 많다. 내 안의 두려움이 있고, 내 주변의 두려움이 있다. 어떤 두려움은 이미 피부에 와 닿아 있고, 어떤 두려움은 아직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두려움은 빤히 내 눈 앞에 와 드러나 있고, 어떤 두려움은 은밀하여 눈에 뜨이지 않게 숨어있다. 어떤 두려움은 내 자신 안에 있고, 어떤 두려움은 타인의 마음 안에 있다. 우리의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들이 어쩌면 온통 두려움에서 기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일정부분 두려움과 이런 저런 연관을 맺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때는 날 지배하고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 두려움인 것 같다. 두려움은 나를 화나게 하고, 흥분시키며, 거친 행동으로 내몰기도 한다. 때로는 절망과 실망에서 비롯된 두려움이 나를 의기소침하게 하고, 급기야는 죽음으로까지 나를 이끌어갈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두려움에 찬 아이들, 학생들, 환자들, 공무원들, 노동자들, 부모들 … 이렇게 두려움에 가득 차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두려움의 포로요 노예이다. 참으로 두려움의 파워가 지배하는 세상이요 두려움으로 가득한 세상인 것만 같다. 만일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만일 이것이 이렇게 안되면 어떻게 하지? 이런 식의 걱정스러운 의문과 두려움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우리는 결국 “만일”과 “어떻게”의 포로들이고 노예인 셈이다. 개인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온통 두려움의 논리와 두려움의 힘에 지배당하고 있다.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 정치적인 대부분의 사안들이 두려움으로 가득한 전제와 가설아래 기득권, 영향력, 힘에 있어 유리한 고지를 먼저 차지하려는 술책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가 걱정이 앞서고, 신경질적이 되어가고, 급기야 생존을 위한 마지막 방책이라면서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 서로 죽음과 파멸로 치닫게도 된다.


   두려움과 설레임으로 시작했던 한 해를 마감하는 끝자락에 와 있다. 두려움의 끈을 끊어야 한다. 누군가가 두려움의 끈을 ‘먼저’ 끊기 시작해야 한다. 끊으려고 해야만 끊어지는 것이 두려움의 끈이다. 두려움의 끈을 끊고 내 안의 진정한 나를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고, 내 옆과 주변에 있는 타인을 위해서 사랑의 문을 열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발견한 나와 너를 넘어서, 조물주가 이 지구라는 별 위에 나와 너를 살게 한 의미들을 새기면서 영원의 문을 열어야 한다. 의미는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발견되어진다. 인생의 의미들은 순간의 각박함이 아닌 온 생애로, 온 삶으로만 답해지는 기나 긴 숙제이다. 마음의 문, 사랑의 문, 그리고 영원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게을러서이든지, 이웃을 똑바로 보기 싫어서이든지, 각박한 세상살이에 너무 지치고 찌들어서이다.

그럴듯한 말들의 허구성

 

그럴듯한 말들의 허구성


어른들이 애들에게 곧잘 하는 그럴듯한, 그러나 허구성이 짙은 말들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애들이 어른들 보기에 못마땅한 행동을 할 때에 어른들은 ‘너 지금 그러면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못된다.’ 한다. 말의 뜻을 보면 지금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면 그 행동이 너의 훗날 어른이 되었을 때를 결정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어리거나 젊은 시기가 어른이나 기성세대를 위한 준비기라는 발상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청소년기는 어른을 위한 준비기가 아니다. 인생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 어느 시기도 준비기가 될 수 없는 실제 인생의 한 때인 것이다. 열다섯은 열다섯이고, 스물은 스물이며, 마흔은 마흔이지 어떻게 열다섯이 마흔을 위한 준비기가 될 수 있는지, 마흔을 위해 열심히 유보한 열다섯이 행여 그 과정 안에서 죽기라도 한다면 마흔을 위해 절제되고 유보되었던 열다섯을 그 누구도 보상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의미로 인생에 오픈 게임은 없다. ‘지금 그러면 안된다’ 는 말은 애들 앞에 좋은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어른들이 자기들의 못된 점을 따라하는 애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어른들의 궁여지책일 경우가 많다.


   둘째, ‘나중에 커서 뭔가 줄 수 있고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는 말이 있다. 언뜻 들으면 이 말은 참 좋은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말은 무서운 말이 될 수도 있다. 애들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 때문에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가지려고 든다면 큰 일 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준다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낫고 좋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는 커다란 잘못이다. 주는 것은 받아주는 상대방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로 준다는 것과 받는다는 것은 동격이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손을 맞잡을만한 거리에 상대방이 존재하며, 내가 주는 것을 상대방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 줄 때에만 나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줄 수 있게 된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나의 주는 행위를 통해 내가 얻는 무엇이 있어야만 되고, 상대방이 얻는 무엇이 있어야만 옳다. 그런 의미로 슬기로운 어른들은 뭔가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 대신에, 누군가와 뭔가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서 이웃과 자신을 나누는 나눔의 모범을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셋째, 어른들은 애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는 말을 너무도 쉽게 한다. 이는 대개 학교 공부나 책으로 하는 공부를 뜻한다.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어른들을 만날 때마다 애들을 만나 기껏 그런 말 밖에 할 말이 없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이런 말은 오로지 책으로 하는 공부만이 출세의 지름길이었던 시대를 살았던 어른들이 흔히 쓰는 말이다. 축구선수가 될 수도 있고, 게이머가 될 수도 있으며, 만화를 그리는 작가가 될 수도 있고, 요리사가 될 수도 있으며, 발레리나가 될 수도 있고, 피아니스트가 될 수도 있으며, 등등. 요즘은 성적을 따져야 하는 공부 말고도 공부의 길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대이다. 애들더러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어른들은 그 누구도 애들이 소위 학교 공부를 해야만 되는 이유를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고, 심지어 학교를 다녀야 되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재간이 없다. 사실 살아오면서 만나게 된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상호간에 얼마나 학교 공부를 잘했는지 따지고서 맺게 된 인간관계는 어쩌면 전무하다. 언제 어디에서 누가 발명했는지는 모르지만 수우미양가나 가나다, 혹은 1,2,3이나 ABC 라는 등급매기기의 발명 혹은 발견은 참으로 위대하다. 이 온 세상을 그렇게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내는 그런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등급매기기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가련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한탄하면서, 또 인생이란 것이 그렇게 몇 점의 점수로 간단히 정리되거나 순차적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우리는 우리보다는 훨씬 멋지게 이 지구라는 별 위를 살아갈 우리 뒤의 신세대들에게 점수와 등급이 그렇게 중요하다면서 그 점수와 등급을 오늘 이 순간에도 강요하고 있다.

지식답지 않은 지식

  신부는 입만 천당 간다는 말이 있다. 아는 것이 많아서 해 대는 말이 많기 때문이다. 요즘 애들도 어찌나 유식한지 아는 게 참 많은 애들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우리 모두가 예전보다 이렇게 유식해지게 된 것은 상당한 부분이 인터넷 탓이다. 각양각색의 검색 사이트에선 벼라 별 유치한 질문에서부터 아주 고도의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무료로 친절한 답을 해 준다. 어디서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새우깡 한 봉지에 새우깡은 몇 개나 들어있는지, 사람들 머리 둘레를 화장지로 재어보면 대개 몇 마디 정도가 나오는지 등등 상상을 초월하는 궁금증과 그 답들이 모두 인터넷에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인터넷을 통해 구한 지식이 과연 지식다운 지식인지 묻게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지식답지 않은 지식의 종류를 몇 개 열거해보는 것은 우리의 지식을 점검해보고, 어른으로서 애들 앞에서나마 제대로 유식해 지고 싶어지는 까닭이며. 또한 지식인다운 지식인이 많지 않다는 세상에서 지식인이고 싶은 열망 때문이다.

 

   지식답지 않은 지식으로서 ‘바라본 지식, 건너편의 지식’이라는 것이 있다. 애들이 손쉽게 인터넷을 통해 구한 지식 대부분이 이 건너편의 지식에 해당된다. 여기저기서 마우스로 긁고 퍼서 조합한 지식들은 짜깁기의 형식과 모니터라는 틀 걸이 때문에 메시지 자체를 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니터를 통해 바라 본 지식은 말 그대로 바라본 지식으로만 남을 뿐 나의 지식이 되지는 못한다. 반드시 출력하여 밑줄 그으며 읽어 나의 내면에서 내 식대로 내면화 된 지식이 아니면 그 지식은 나의 지식이 아니다. 가상의 공간에서 얻어진 지식은 말 그대로 가상의 지식일진대 이를 나의 지식인양 착각해서는 안된다. 이런 지식은 건너편의 지식일 뿐이다. 요즈음 많은 애들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논리적으로 이를 되뇌일 수 없으며, 실제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나의 내면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정보는 모두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로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쓰레기의 바다일 수 있다. 

 

   ‘나의 힘과 무서운 무기가 되는 지식’ 역시 지식답지 않은 지식이다. 인간관계와 세상살이 안에서 내가 취득함으로써 누군가에게, 또는 어떤 조직이나 무엇인가에 나의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는 앎을 말한다. 누군가를 꿰뚫어보고 있어서 조종할 수 있고, 상대방의 비밀을 나만이 알고 있다고 은근히 즐기면서, 동시에 권모술수와 폭로라고 하는 무기로써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지식이다. 정치하신다는 분들에게서 가끔 듣게 되는 ‘내가 입을 열면 여럿이 다친다’ 혹은 ‘깃털’이니 몸통’이니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개인의 사생활로부터 한 국가의 사악한 비리에 이르기까지 이런 무기를 취득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과 조직, 그리고 물량과 에너지가 이 순간에도 엄청나게 소모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또 다른 폭로, 더 크거나 더 정교한 지식 내지 조작에 의해서 결국 자신도 죽거나 다치는 상황을 초래하게 마련이다. 지식은 누군가를 조종, 조작, 내지 지배하기 위한 힘이 아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팔아먹기 위한 지식’도 있다. 지식산업이니 지식의 지배, 또한 무한경쟁 이라는 끔찍한 말 속에서 지식을 팔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팔아먹기 위한 지식이라는 것이 되로 배워서 말로 팔아먹는 요령일 수도 있지만 이는 속된 표현으로 장사꾼의 상업적인 지식에 불과할 뿐 진정한 지식은 아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팔아먹게 되는 지식은 내가 시간과 공을 들여 수집하거나 훔친 여러 가지 자료로부터 어떤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분가 독립해서 자기 회사를 차린다며 일정부분의 몫을 들고 나가는 일, 혹은 한 두 시간의 강의에 어지간한 사람의 한 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거금을 챙기는 소위 명사의 명 강의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형태로 상존한다. 학교나 학원이 그렇게 많고도 많지만 선생님이 없다는 탄식이 그래서 등장한다.

 

   지식답지 않은 지식과 참된 지식, 그리고 지식과 지성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다. 참으로 뭔가를 알기 위해서는 책을 읽더라도 마침내 내가 읽고 있는 그 책이 나를 읽도록 읽어야 한다는 옛사람들의 말씀은 그래서 참 두렵고도 무서운 말씀이다.

한 형제의 죽음

   주어진 시간과 날들은 소리 없이 간다. 누가 훔쳐간 것도 아니고 몰래 어디에 숨겨둔 것도 아닌데 흔적도 없이 그렇게 가고 만다. 매일 아침 세수할 때는 손가락 사이로 지나가고, 밥을 먹을 때는 밥그릇 위로 지나가고, 멍하니 가만히 있으면 빤히 뜬 눈 앞으로 지나가고, 온 몸으로 가로막으면 나를 훌쩍 뛰어넘어 내 위로 지나가고, 잠자리에 누우면 내 옆을 돌아 내 옆으로 지나간다. 그렇게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하고 한 형제가 죽었다. 우리 수도자들은 핏줄, 출신, 성장 배경이 다른 채로 만나, 서로 형제라 고백하고, 매일 한솥밥을 먹으며 평생을 공동체라는 이름 안에 인생을 함께 동반한다. 이번에 돌아가신 형제는 일흔을 앞두고 소위 아홉수를 넘기지 못하면서 4년여 암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죽음에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온다는 보편성, 그 누구도, 또 그 무엇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대체 불가능성, 그리고 어떤 수단으로도 피할 수 없다는 불가피성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럼에도 한 형제의 죽음을 아주 가까이서 동행해야 했던 체험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죽음을 맞는 첫 번째 주제어는 품위와 자존심이다. 특별히 오랜 병고를 겪어야 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형제는 유달리 기저귀를 차기 싫어했다. 기저귀를 차야 한다는 내 말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기에 기저귀는 아니더라도 그 소재로 된 조각들을 잘라 한 쪽에 숨겨두면서 아무도 모르니까 써보라는 말을 하고, 자신이 몇 번 체험한 뒤에야, 그리고 그 기저귀라는 것을 가져다 드리면서도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고 나와 당신만이 아는 일이고 여기 침대 밑에 숨겨놓았다는 식의 공개된 거짓말 끝에야 그 기저귀라는 것을 차고 얼마동안을 지내다가 그렇게 형제는 돌아가셨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바지 끈을 누군가가 내려줘야 되는 상황이 가장 처절한 비참함을 맛보는 순간이라는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형제의 이런 모습들은 마지막 자기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해보려는 안간힘인 것 같았다.

 

   죽음의 두 번째 화두는 아마도 두려움이다. 형제는 마지막 날 까지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이 무척 두려웠던 것 같다. 죽음이나 준비 같은 마지막에 관한 말을 서로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감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에는 ‘이대로 죽으면 축복이지.’ 했다가도, 또 어떤 날에는 ‘아직은 조금 더 살 것이니 걱정 마.’ 라고 하면서 눈을 흘기기도 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거의 의식이 뚜렷해야 하는 잔인한 병인 암이었기에, 형제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임을 절절히 목격하였기에, 말 그대로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는 말이 무엇인지 내 눈으로 보았기에, 형제는 생의 인연을 놓기가 그렇게 두려웠고, 고통이 두려웠으며, 또 이 생(生)을 떠나 다른 생으로 옮겨가 맞닥뜨려야 하는 미지(未知)가 그렇게도 두려웠던 것일까 하고 되짚어 본다.

 

   죽음이 갖는 세 번째 특성은 일치라고 하는 속성이다. 가족 누군가가 아프거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할 때 모두는 쉽게 서로 한마음이 된다. 그리고 그 형제의 주위에 똑같은 마음을 지니고 모여들어 같은 눈물을 흘린다. 죽음은 혼자의 것이지만 동시에 주변에 있는 모든 이의 것이다. 가족 내에서 누가 아프다는 것은 그에게 가족들의 일치된 애정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왔다는 것이겠고, 형제의 죽음 주위에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은 죽음이나 인생살이가 철저히 혼자만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모든 이의 것이고, 우리의 것이며, 본질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동일하고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항구에서 어떤 배가 점점 멀어져가다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듯, 그렇게 한 형제의 죽음으로 그 형제를 이제는 더 이상 예전의 모습으로 볼 수 없게 되었기에,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평선 너머 다른 포구에서는 점점 다가오는 배를 바라보며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저 넘어 다른 포구를 생각할 수 있기에, 그리고 아무것도 확실히 아는 바는 없지만 뭔가를 나름대로 믿을 수는 있기에, 형제를 오래도록 기억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축제다운 축제

   다시 6월이다. 우리에게는 6월하면 떠오를 수밖에 없는 전설 하나가 또 생겼다. 바로 4년 전의 월드컵 4강 신화의 전설이요, 붉은 악마의 전설이며,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었다던 길거리 응원의 전설이다. 우리는 불과 4년 전 몇 천 명으로 시작한 붉은 악마의 응원단이 몇 십만이 되고 몇 백만이 되어 급기야 700만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며 이른바 6월의 붉은 물결이요 붉은 혁명, 붉은 전설을 이루어 냈던 과정을 함께 체험했었다. 그때 우리는  원 없이 소리도 질렀고 박수도 쳤으며 눈물도 흘렸고 맥주를 마셔댔다. 그때 우리는 설마설마 하는 심정으로 밤잠을 설쳤고, 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우리 자신마저 깜짝 놀라기에 이르렀었다. 온 국민이 월드컵이라는 최면에 걸렸는지, 붉은 악마라는 마법의 주문에라도 걸렸는지, 전 국민이 훌리건이라도 된 듯이 그렇게 법석을 떨면서 뜨거웠던 6월이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제껏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보고 듣지 못하던 그런 체험을 함께 했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계층과 세대를 넘어, 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단시일 내에 상식과 순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그런 연출을 함께 해 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과연 왜 그랬을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신통방통하고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며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장대비를 맞으면서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를 꼼짝 않고 서서 박수치고 ‘대~한민국’을 외쳐대었던 군중들이 생리현상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본 결과에 따르면, 길거리 응원 초기에 그렇게 많은 군중이 몰릴지 몰라 사회적으로 대비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책 없이 그저 참거나, 혹은 재빨리 이튿날부터는 어른용 기저귀를 찼다고 했다. 또 다른 한 가지. 그렇게도 많은 군중이 몰려 지나간 뒤에 담배꽁초 하나 없이 뒷처리가 그렇게도 깨끗했던 것은 정말 우리의 높은 시민의식 때문이었을까? 답은 아무래도 그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것이 정설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축제를 정신적 퇴행이라 한다고 한다. 어른이나 성숙한 사람들이 애들처럼 유치해져서 서로 웃고 낄낄댈 수 있게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개인이나 소집단이 아닌 사회적 대집단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마땅히 그 과정 뒤에는 그 집단이 아무리 성숙한 집단이라 할지라도 다소의 어지러움과 부작용이 있어야만 옳고, 또 가히 정상적이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02년의 6월 축제는 월드컵 4강이라는 실적 외에도 어른들 눈에 마냥 염려스럽고 걱정스럽기만 했던 이 땅의 젊은 세대들이 공동체와 연대감 속에서 하나의 영혼, 하나의 마음을 체험할 수 있었던 장이었고, 그저 빨갱이는 나쁜 놈이요 뿔 달린 적이기에 그를 묘사하는 빨강색 근처에는 얼씬도 말라던 오랜 세월의 red-complex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면 극복할 수 있었던 체험의 장이었으며, 이 각박한 경쟁논리의 세상살이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구미강호들을 격파해 내고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우리도 뭘 하면 해 낼 수 있겠구나 하는 강한 자신감을 획득할 수 있었던 체험의 장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생리적인 현상마저도 꼼짝 못한 채로 긴장하고 절제하면서, 또 행여 누가 볼세라, 행여 누가 우리더러 저급한 족속이라 손가락질 할세라, ‘그러면 그렇지. 결국엔 제깟 놈들이…’ 라고 말할까봐 담배꽁초 하나까지도 남김없이 주워야만 했던 것이었다면, 난 이를 감히 경직된 축제요, 조작된 축제였으며, 뭔가가 아직은 부족했던 안타까운 축제였다고 말하고 싶다.

 

   축제는 진정 축제다워야만 한다. 축제답지 않은 일회성, 내지는 일시적인 사회적 집단의 한풀이는 허탈과 공허, 심리적 공황만을 남겨둘 수도 있다. 그리고 지나치게 계획되고 절제된 축제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축제이며 축제가 아닌 축제이다. 자연스러운 기쁨의 축제는 생명과 그 생명의 원천에 대한 신뢰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이 세상살이 동안 진정 축제다운 축제가 끝내는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를 동경하고 기도한다. 나는 다시 한 번 다가온 이번 월드컵 축제, 6월의 축제가 진정 축제다운 축제이길 기대한다.

5월, 청소년의 달

 

청소년의 달


   5월, 청소년의 달이다. 우리의 미래라는 청소년을 이 5월 한 달만 생각하기 위해 청소년의 달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싶을 만큼 이 달에는 청소년들을 위한다는 각종 행사가 범람한다. 각양각색의 행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 이라는 단어를 두고 얘기할 때, 즉시 그 단어 뒤에 ‘문제’라는 말마디를 붙여서 이야기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이른 바 ‘청소년문제’는 대개 천편일률적으로 몇 가지의 통계 숫치를 인용하면서 세 가지 정도의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종결지어지게 마련인데, 가정교육이 엉망이니 이를 각 가정으로부터 잘 해야겠다는 것이 그 첫째이고, 입시 위주의 학교교육이 문제이니 그런 교육을 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것이 그 둘째이며, 가치관이 붕괴되었으니 전통적으로 값어치 있는 가치관의 고수를 위해 애를 써야겠다는 것이 그 셋째이다. 일반적으로 청소년이라는 주제어를 함유하고 있는 논문들이나 세미나들, 그리고 행사의 축사들이 대개 이런 틀 걸이 안에서 요약정리 할 수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먼저 나는 ‘요즘 애들은 형편없어.’ 라든가, ‘요즘 애들은’ 어쩌고저쩌고 해 가면서 애들을 문제의식이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을 반대한다. 기성세대의 눈에는 못마땅하게 보일지라도 요즘 애들은 이미 기존의 기성세대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잘났으며, 풍요로운 세대를 아름답게 잘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몇 배 몇 십 배, 부러울 만큼 더 잘 살아갈 것이 틀림없다. 아니, 적어도 그렇다고 믿어야만 한다. 청소년들은 우리의 미래이고 그 미래는 우리가 믿는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을 바라봄에 있어서도 부정적인 견해나 시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옮겨야만, 말 그대로 청소년들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할 줄 아는 어른이 되며, 칭찬받고 자란 아이가 칭찬 할 줄 아는 어른이 되며, 신뢰받고 자란 아이가 신뢰할 만한 어른이 된다. 애들을 더욱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둘째로 청소년은 우리 기성세대가 가르쳐야 할 대상이라든가 교육시켜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청소년은 기성세대가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기성세대와 함께 지구라는 별 위에서 인생의 한 때를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동반자이고 동행자이다. 나의 체험에 누군가의 체험을 더하면 그만큼 나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나의 생존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생각으로 기성세대는 청소년들의 체험을 자기들의 체험으로 삼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야만 한다. 물론, 청소년들 또한 기성세대의 체험을 자기네들의 체험으로 삼으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이것이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교육이라면 교육이다. 그런데 교육은 마음의 일이라서 강요로 되지는 않는다. 청소년들이 기성세대를 바라보면서 기성세대의 체험을 자기네들의 체험으로 삼고 싶어 하도록 멋진 삶을 보여주고 따라 하기를 그저 바랄뿐인 것이다. 그런 의미로 교육은 ‘보여주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청소년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으며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아 기성세대 역시 청소년들로부터 사랑받아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셋째로 오늘 이 땅의 청소년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애들이 머리에 물을 들이면 공부를 못하게 된다고 어른들이 말하지만 애들도 그렇고 어른인 나 역시도, 공부와 머리의 색깔이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 것인지 이는 도무지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고 또 이해가 되지도 않는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애들이 빨강이면 빨강으로, 파랑이면 파랑으로,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그렇게 어른들과 애들이 다르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해야만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상대방이 내 식대로 완벽해야 하지 않아도 되며, 또 그럴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어른됨이고 성숙함이다. 애들을 기성세대 식으로 너무 조급하게 몰아세우지 말고 시간의 인내로 바라보면서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봄꽃, 그리고 개(犬)혁

 

    꽃이 피는 시절이다. 오며 가며 길거리의 꽃집들을 눈여겨보게 된다. 꽃에는 아주 비싼 꽃도 있고 그저 단돈 몇 푼에 팔리는 꽃도 있으며, 다른 꽃이 팔릴 때 덤으로 끼워 팔리는 꽃들이 있는가 하면, 꽃집에서는 아예 팔리지 않는 꽃들도 있다. 들에만 피는 야생화들을 이제는 온실에서 키워 내다 파는 바람에 편리한 부분도 있긴 있지만 그 꽃으로 인하여 들에 나갈 필요가 줄었다는 점에서는 안타까운 면도 있다. 비싼 꽃이라면 백합이니 장미, 또 이름도 외우지 못하게 얄궂은 외국말 꽃, 그리고 화려한 꽃들이 많다. 그런 꽃들은 머리가 아플 만큼 향기도 아주 진하다. 내 개인적으로는 채송화를 좋아 한다. 생김새나 모양 그리고 색깔이 수수하면서도 독특한 탓도 있지만 그 나름대로 의미를 새길 수 있어서이다. 채송화는 꽃집에서 잘 팔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빨강, 파랑, 노랑, 하양, 분홍 등 가지각색의 꽃을 피울 줄 안다. 채송화는 향기가 없지만 아주 맨질맨질한 작고 새까만 씨앗들을 터질듯이 한 모듬씩 안고 있다. 더더욱 채송화가 매력적인 것은 화분에 담아 사무실 창가에 둔다 하더라도 왠지 모르지만 잎만 무성할 뿐 예쁜 꽃들을 절대로 피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먼지를 가득 뒤집어썼을지라도, 땅 바닥에 기듯이 바짝 붙어 피더라도, 채송화는 햇볕을 바로 받는 바깥 양지바른 곳에서만 자기 꽃을 제대로 피운다. 

 

    봄꽃들은 꽃샘바람과 추위가 나무들을 흔들고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만개한다. 흔들어 주어야만 정신이 번쩍 들어 꽃을 피워야 할 계절이 왔음을 나무 스스로 느끼는 것일까? 봄꽃들은 하나같이 꽃들이 먼저 피고 꽃이 진 다음에야 잎이 돋는다는 특징이 있다. 화려한 꽃잎으로  맘껏 자신을 표출한 뒤에 이제 또 한 해를 진지하게 살아갈 일상을 찾아가는 것일 게다. 봄꽃들은 대부분 슬픈 전설 하나씩을 동반한다. 진달래가 그렇고 자목련과 백목련이 그러하며 분꽃이 그렇다. 그리고 시인들이 노래하는 시들은 대개 봄꽃들임에 틀림없다. 봄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묘한 재주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봄꽃들은 향기를 갖지 못한다. 아마도 아직 4계절의 순환을 골고루 경험하지 못해서이다. 인생을 꽃에 비겨 이야기 한다면 말 그대로 꽃다운 나이를 지내고 있는 청소년들이 이런 봄꽃에 해당한다. 이런 저런 말 한 마디에 온 일생을 흔들어 자기 나름대로의 꽃을 피우는 시기, 꽃을 먼저 피우고 싶어 안달이 나는 시기, 온 세상의 고민과 슬픔을 제 한 몸에만 지닌 듯이 신화와 전설, 그리고 아픔과 눈물이 많은 시기, 하룻밤 새에 기나 긴 소설을 쓰기도 하고 시인이 되어 시를 읊어대기도 하는 시기, 아니 소설이요 시 자체가 되는 시기, 그럼에도 인생의 맛이나 멋을 담은 향기는 없는 풋풋한 시기, 바로 이런 시기가 청소년 시기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꽃과 같은 우리 애들에게 나 자신을 포함한 어른들이 하는 짓을 가만히 보면 마치 죄다 장미이고 백합처럼 비싼 꽃, 시장에 내다 놓아 잘 팔리는 꽃만 되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보여 질 때가 많다. 백합이 절대로 채송화가 될 수 없고 채송화가 결코 백합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말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자신이 백합이지 못했던 처지를 애통해 하면서 애들만이라도 기어이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하는 오기일까? 그런 것이 기성세대가 되어가는 것이고 어른이 되어가는 것일까? 사실 어른들이 애들에게만 그런 강요를 하는 것도 아니다. 어른들은 자기들끼리도 서로 그런 억지를 부리는 것만 같다. 언제부터인가 이 땅에 화두가 되어있는 소위 양극화의 해법과 개혁을 놓고도, 그 누구도 서로의 고유성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미성숙함, 상호간의 배려 부족을 스스로 성찰하려 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개혁은 채송화를 백합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백합을 채송화로 만드는 것도 아니며, 자신의 솔선수범과 희생, 그리고 소박한 결심과 실천들을 먼저 요구한다. 백합을 기어이 채송화로 만들어야만 속이 시원하겠다는 듯이 우기는 것은 우격다짐이요, 고집불통이며 오만이다. 그런 식의 이른 바 개혁은 개(犬)혁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되지 않을 선진국, 오지 않을 선진국

 

되지 않을 선진국, 오지 않을 선진국


   어떤 손님과 유명한 음식점에서 식사할 일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외식을 즐기고 있는 큰 식당이었다. 신부라 하면 부동산 투기할 일도 없고 보석으로 치장할 일도 없으며 멋드러진 집이나 처자식 먹여 살릴 걱정으로 번잡스럽지 않아도 되지만 유달리 맛좋은 음식과 그럴듯한 음식점에 상당한 집착을 보이고 마는 것이 사실이다. 드러남이 없이도 사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르(?)이기 때문일까? 아무튼, 식사가 계속되던 중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몹시 시끄러운 식당 안을 네다섯 살 정도의 두 아이들이 온통 휘젓고 다니는 것이었다.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애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 아빠도, 종업원들도,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그 어떤 사람도, 무감각한 것인지, 남의 집 자식에게 뭐라 해서 행여 욕이나 먹게 되지 않을까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시끄럽고 소란스러워 내가 먹는 그 음식에만 집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자는 것인지,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이 한참 지났고 급기야 내가 종업원 한 사람을 불러 아이들의 부모에게 얘기 좀 해 달라고 부탁했다. 종업원이 두어 번 쯤 아이의 부모님께 정중히 얘기하는 과정이 있었으나 애들은 여전하였고, 결국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망쳐버린 외식이었고 오랜만에 만나게 된 나의 손님과는 찝찝한 만남이 되고 말았다.


   정치하시는 어떤 분들이 잘하면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국민개인소득 2만 불의 시대를 맞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우리도 선진국에 진입하게 된다고 말한다. 어떻게 2만 불이라는 숫치가 선진국의 기준이 되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모른다. 2만 불의 시대가 오든 오지 않든, 그 2만 불이라는 기준을 도대체 누가 어떻게 만든 것인지, 그게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분명히 아는 사실 하나가 있다. 그것은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웃을 아랑곳하지 않는 그런 삶의 형태들을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소위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코 되지 않을 선진국이요, 오지 않을 선진국이다. 식당이란 곳이 내 돈 가지고 내가 밥을 사먹듯이 너도 네 돈 가지고 너의 밥을 사먹는 곳일 뿐이며, 주변을 깡그리 무시하는 행동을 해도 좋은 곳이고, 이런 외식의 자리에서나마 내 자식들이 맘껏 기를 발산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거나 기쁨의 표현이 아닌 소란을 피울 권리까지도 내 밥값으로 샀다고 생각하며, 행여 누가 주위에서 뭐라고 하면 눈 부릅뜨고서라도 남의 집 애들 기를 죽이는 당신은 도대체 뭐냐는 식으로 시시비비를 가려야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IT 강국이요 월드컵 4강 신화의 나라라고 뻐기더라도 아직 우리는 선진국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미개국이거나 개발도상국이며 바보 같은 혼자만의 멋에 겨운 초라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은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되는 존재라는 것, 그렇게 함께 살려면 서로가 서로를 배려해야 되고 상호간에 불편을 끼치는 일은 삼가야만 된다는 것, 그리고 혹시 그렇게 남에게 불편을 끼치게 되면 그것이 범죄이고 어떤 형태로든 함께 살기 위한 사회에서 격리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러한 사회의 기본원리에 관한 내용들을 철저히 교육시키는 가정교육이 없는 한, 대한민국에 선진국의 시대는 오지 않는다. 위대한 국가를 위대한 정치가가 만들어 줄 것이며 2만 불이라는 숫자가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는 착각이요 환상이다. 위대한 국가는 위대한 국민이 만들며 그 위대한 국민은 사회의 기초단위인 각 가정에서 비롯된다. 길거리를 걸으면서 여기 저기 침이나 가래침을 보지 않아도 될 때, 자동차의 차창 밖으로 던져지는 담배꽁초를 보지 않아도 될 때,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휴대폰 벨소리의 심포니나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때, 심란함이나 부담스러움을 안고서라도 어쩔 수 없이 공중변소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때,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는 선진국의 시대, 그리고 문명화된 사회의 일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