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들이 짓기 쉬운 죄 세 가지

수도자들이 짓기 쉬운 죄 세 가지

 

봉헌생활을 하다보면

흔히 짓게 되는 죄 세 가지가 있다.

 

게으름, 험담, 그릇된 집착이 바로 그것이다.

 

게으름은

봉헌생활이라는 것이

처자식 먹여 살릴 걱정 없이 살아도 되고

내 입과 생존을 위해 벌이를 하지 않아도 되며

평생을 보장받는 철밥통인 까닭에서 비롯된다.

또 무슨 일을 하건 말건

데드라인이라는 것이 없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앞에서

훗날 셈해야 된다는

그럴듯한 명제 뒤에 우선 쉽게 숨을 수도 있고,

수 천 년을 살아온 매일의 일상사라는 매너리즘에

쉽게 빠질 수 있는 삶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험담이란

같은 공동체의 형제나 자매

그리고 이웃 공동체의 형제나 자매들을 두고

칭찬이나 격려보다는

뒤에서 입방아를 찧어대는 행위이다.

이는 인간의 본성인 시기나 질투에

그 뿌리를 둔다.

 

, 어떤 명분으로도

물리적인 폭력이 존재할 수 없는

봉헌생활의 구조 때문에,

소위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이

입뿐인 것이 수도자이기 때문이다.

 

그릇된 집착이란

그릇된 애정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다.

크건 작건 자기가 좋아하는

사물이나 상황, 장소, 시간대, 취미거리,

심지어 나만이 아는 은밀한 관계에 이르기까지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욕구들에 얽매이는 것이다.

부질없는 것들과 하찮은 것들에 대한 집착은

부족과 불만이 있을 때

곧잘 주변에 대한 분노와 공격성을

동반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세 가지 죄들이

수도자들이 짓기 쉬운 죄들이며

어떤 때는 봉헌생활을 그만두게까지 만드는

위험한 죄들임에 틀림없다.

게으름

게으름

 

게으름이라는 개념은

이 세상과 우리 자신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게으름은 얼핏 보기에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그저 무기력한 무관심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들에게 뭔가 말씀을 전하려고 할 때에

무척 어렵고

어떤 때는

아예 불가능하게까지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많은 경우에 게으른 사람을 만난 탓이다.

게으른 사람들은

아름다운 생각, 기막힌 구상, 고무적인 전망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고,

또한 추한 말, 혐오스러운 생각,

파괴적인 대안에 대해서조차도

아무런 대꾸조차하기 싫어한다.

 

에블린 와프는

게으름이야말로

현대사회의 고질적인 죄악이라고 했다.

게으름이야말로

정작 중요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져 버린

이 망가진 세대의 죄악이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목자의 소명은

바로

이 게으름이라는 수렁에 빠진 사람들을 일깨워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가꾸어 가는 것에

동기부여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사목자들을 두고 사람들이 너무 떠벌리고,

흥분하고 과장하는 것이 아니냐고 힐난해도

괜찮다.

미지근한 것보다는

차라리 뜨거운 쪽에 있어야 하는 것이

사목자의 소명일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내겠다.”(묵시 3,16)

하셨다.

 

게으름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월이 가고 장상이 바뀌어도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런 뜻으로 게으름은 나이 먹어 가는 사람들에게

더욱 쉽게 찾아오는 유혹이다.

 

사목자의 입장에서

또 다른 싸움을 위해

전쟁터에 나서야 된다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고,

그저 홀로 조용히 있고 싶을 때마저 많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빨리 쉬라고 하시지는 않는다.

끝까지,

끝까지 앞으로 최선을 다해 나아가야 한다고

다그치신다.

 

후배들을 바라보면서


후배들을 바라보면서


   매년 이맘때쯤이면 후배 신부들이 태어난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 어떤 형태로든 자기가 지나 온 과정에 입문하는 후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로 회한에 젖게 마련이다. 후배를 바라보면서 그 후배가 앞으로 살아갈 여정이 나보다는 멋있고 덜 후회스러우며 더욱 보람찬 삶이기를 기대하고, 자신을 돌아보면서는 그저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나는 수도원에 온지가 벌써 30년이 훨씬 넘었고, 사제가 된 것만도 훌쩍 만 20년이 지났다. 돌아보면 잘 했던 것보다는 잘못했던 것들이 더 많고, 그 동안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사람들이 더 많았으며, 나에게 누군가가 고마워해야 할 순간보다는 내가 고마워했던 순간이 더 많았다. 날이 갈수록 뭔가 해야 할 내용보다 후회할 내용들이 더 많아져 가는 것이 나이를 먹어가는 것일까? 그저 ‘사는 것이 죄’라는 말은 나이 지긋한 분들이나 하시는 표현이라고 알아왔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죄가 많은 사람들은 훗날 죄를 정화한 다음 레테의 강에 죄지은 몸을 씻고 에우노에 강물을 마심으로 선행의 기억을 되살린 연후에야 천국에 든다는데 자신과 이웃, 그리고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 무례하였던 죄들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누구 먹여 살리려고 아등바등 돈을 벌어본 적 없으면서 돈은 양심적으로 벌고 제대로 쓸 줄 알게 벌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배고파 본 적 없으면서 배고픈 사람들의 배고픔을 치유해야 한다고 떠들어 댔으며, 생명을 낳느라 배 아파 보거나 길러본 적 없으면서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목에 힘주었고, 가난해 본 적 없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진정 복되다 하고 그들과 우리가 하나라고 강조하며 살아왔던 일들, 그리고 전능하신 하느님께 겨자씨만한 믿음만이라도 둔다면 모든 게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에 따라서는 적어도 내 자신 안에서조차 하느님 뜻대로 이루어 진 것이 많지 않아 기도마저 별로 한 적이 없다는 얘기이니, 모든 것들이 그저 죄이고 사는 것 자체가 그저 죄일 뿐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큰 죄들 말고 게으름, 험담, 그릇된 집착 같이 일상처럼 짓는 죄들도 많다. 게으름은 제 할 바, 제 할 도리 아니하고 남의 집 숟가락 개수나 세고 있는 작태이다. 수도자의 게으름은 처자식 먹여 살릴 걱정 없이 살아도 되고, 내 입과 생존을 위해 벌이를 하지 않아도 되며, 평생을 보장받는 철 밥통인 까닭에서 비롯된다. 또한 무슨 일을 하건 말건 데드라인이라는 것이 없고, 하느님 앞에서 훗날 셈하면 된다는 그럴듯한 명제 뒤에 쉽게 숨을 수 있으며, 수 천 년을 살아온 매일의 일상사라는 매너리즘에 쉽게 빠질 수 있는 삶의 구조인 까닭도 있다. 험담이란, 같은 공동체의 형제나 자매 그리고 이웃의 형제나 자매들을 두고 칭찬이나 격려보다 뒤에서 입으로 찧어대는 행위이다. 이는 인간의 본성인 시기나 질투에 그 뿌리를 두는데 이를 해결할 물리적 폭력수단으로 수도자는 입만 가진 탓이 크다. 그릇된 집착이란 그릇된 애정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다. 크건 작건 자기가 좋아하는 사물이나 상황, 장소, 시간대, 취미거리, 심지어 나만이 안다고 착각하는 은밀한 관계에 이르기까지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욕구들에 얽매이는 것이다. 부질없는 것들과 하찮은 것들에 대한 집착은 곧잘 주변에 엉뚱한 분노와 공격성을 표출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죄들이 수도자들이 짓기 쉬운 죄들이며, 어떤 때는 수도생활을 그만두게까지 만드는 위험한 죄들이고, 아마 누구나 짓는 죄이기도 하리라.


   죄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해야 한다. 무디어져가는 양심과 그에 따른 생활태도 이완, 사전 양심보다는 사후 양심에 안주하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현실을 벗어나는 교묘한 변명, 그리고 어제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또 다른 오늘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상의 안이함을 경계해야 한다. 이런 죄들이 나를 야금야금 파고 들어와 점점 헤어날 수 없는 죄의 사슬에 얽매어 놓는다. 내 뒤에 오는 후배들은 이런 죄에 물듦이 없이 깨끗한 삶이어서,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참 생명의 삶이기를, 그래서 행복한 삶이기를 기대한다.(2007년7월28일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