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는 사람들

 

   신록의 계절이요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이라서인지 결혼하는 사람들이 유달리 눈에 뜨인다. 왕성한 생명력이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몸짓이 바로 결혼이다. 그런데 나처럼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세월이 가면서 자기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점차 자신 없는 일이 되어가는 것이 있다면 결혼이 그중 하나일 것이다. 세월 따라 결혼가능성이 줄어드는 것 말고도 실제 생명을 낳아 길러보지 못하는 독신이며 결혼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에게도 가끔 주례를 부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부부들이 어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두고 얘기해야만 되는 때가 있다. 결혼하는 사람들을 앞에 놓고 보면 나로서는 내심 덜컥 겁이 나면서 그렇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결정과 선택을 한 젊은이들이 참으로 대견하고 용감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혼자 살아서 한 가지가 어려울 것이라면 둘이 살아서는 두 가지가 어려울 것일 텐데 하는 생각, 또 집안과 집안의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복잡다단한 관계와 관계를 이들이 어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럼에도 내가 대신 살아줄 수 없으니 결국 걱정으로만 남을 수밖에 없긴 하다. 신랑 신부 앞에 서서 이런 저런 염려가 앞서다가 문득, 인생에 대하여 논할 것도 없고 결혼에 대하여는 아는 것도 없으니 소위 주례사라는 것 대신에 두 사람의 다짐과 선택을 축하하는 뜻으로 못하는 노래이지만 노래나 하나 불러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자주 한다.



  결혼하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함께 있고 싶어서 결혼한다고 한다. 사랑하기에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 함께 있고 싶다는 말이다. 필경 사랑의 본질은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과 시간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 함께 있고 싶다는 말은 외로운 나머지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다는 그런 뜻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외로워서 함께 있고 싶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의존하고 매달리게 된다는 점에서 집착이며 또 다른 면에서의 구속이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쓸쓸함의 고통과 오랜 기간의 방황을 끝내고 싶어 함께하자는 것도 불안함의 도피이며 두려움의 귀결이다.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너밖에 없다는 생각은 서로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조바심을 낳고, 숨이 막히는 헐떡임과 마비, 아픔과 상처에로 서로를 몰아간다. 그러므로 결혼이 둘이서 추는 우아한 춤이라면, 둘 사이에는 적절한 호흡의 공간과 여백이 있어서만 박자와 스텝이 가능한 그런 춤이다.



  결혼하는 사람들을 두고 어른들은 곧잘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서로 양보하면서 싸우지 말고 인내하며 잘 살아가라 한다. 이 말 뜻이 너도 절반 양보하고 나도 절반 양보하여, 곧 너의 50%와 나의 50%를 합하여 100%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라면 이는 잘못이다. 인생의 목표가 행복에 있고 그 행복이 온전한 자기실현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반쪽실현을 위해 결혼 한다는 것이 어리석기 때문이다. 나의 온전한 100%에 너의 온전한 100%를 합하여 200%를 이루어내야만 하는 것이 결혼이다. 인내하고 양보하면서 내 절반을 희생하여 상대방의 온전한 실현을 이루자는 것도 말이 맞지 않다. 둘이 의지하면서 상대방이 온전히 자기를 실현 할 수 있도록 서로 배려해야만 하는 과정이 결혼인 것이다.



   결혼하는 사람들에게는 한결같이 예쁜 자녀를 낳으라고 축원한다. 그러나 우리 둘이만 좋으면 그만이지 자식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살아가는 부부들이 많아져 가고, 거꾸로 이 세상에 자식 말고는 믿을 것이 또 어디 있겠느냐며 자식에게만 온통 모든 것을 쏟아 붓는 부부들도 점점 많아져 간다. 그러나 전자는 현재의 둘만을 생각할 뿐이라는 의미에서 미래와 세상에 대해 희망을 상실한 발상이고, 후자 역시 내 자식 외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미래와 사람을 두려워하는 발상이다. 아기는 이런 곳에 태어날 수 없고 태어나서도 안 될 것만 같다. 생명은 서로 발가벗은 채 아무 스스럼없이 자신을 온통 내어놓는 자리, 그렇게 서로 만나 고마워하는 자리, 그리고 애틋한 몸짓으로 서로 어루만져주는 자리에서 잉태된다.
(2007.5.11.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