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

위선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듣는 이에게 아주 직설적이고 혹독하며,
매우 아프다.

독사의 자식들뱀들눈먼 인도자들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는 (자들)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있는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마태 3,7;12,34;23,33;23,24-27) 하는 말들이 바로 그렇다.

성직자나 수도자의 삶이 위선적인 삶으로 비쳐지는 일이 많다. 또 쉽게 위선적인 삶으로 비쳐지게 된다. 성직자나 수도자의 삶이라는 것이 남을 가르치고 이끌어야 되는 소명이다 보니, 자신이 하는 말과 가르침대로 자신이 살지 못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꼴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성직자나 수도자로서 위선을 완전히 벗어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느님과 교회의 이름으로, 또 더 큰 공동체의 이름으로 우리 자신보다도 더욱 큰 이야기를 말해야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성직자로서 내 자신이 충분히 살지 못하는 생활에로 사람들을 불러내야 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말이다.

나는 위선의 가장 좋은 치유책이 공동체라고 본다. 왜냐하면, 공동체에서 나의 성덕이 연마되고 발전하여 내가 점점 훌륭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나의 연약함을 더욱 적나라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돌보려고 하는 그 사람들과 보다 가까이 하나 되어 살고, 내가 보살피는 바로 그들에게서 따뜻한 사랑의 매를 맞으며 용서받을 수 있다면, 위선자라는 소리는 듣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위선이란 내 말대로 내가 살지 못함에서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말대로 내가 살지 못함을 함께 사는 공동체에 고백할 수 없음에서 파생된다. ‘서원을 뜻하는 영어 profession이나 교수를 뜻하는 professor 모두 고백하다라는 뜻을 가진 professare에서 기원되는 것은 이런 연유이다. 사는 대로 말하고 말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나는 내가 돌보는 사람들에게 나의 실수와 잘못을 고백하고,
이에 용서를 구하는 사목자가 되어야 한다.

 

 

식탁

식탁

 

식탁은 친밀의 자리,

우리 서로를 발견하는 자리,

기도의 자리,

오늘 어땠어?’하고 묻는 자리,

함께 먹고 마시면서

, 더 들어!’ 라고 말하는 자리,

옛이야기와 새로운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자리,

웃음과 눈물이 있는 자리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서로서로 간에

어쩔 수 없는 거리와 한계가 다가서는 자리,

부모들 사이에서 애들이 긴장을 느끼는 자리,

형제와 자매들이

그들의 분노와 질투를 내뱉는 자리,

걱정에 걱정을 더하고 접시와 밥그릇이

폭력의 도구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자리,

그런 자리가 또한 식탁이다.

 

공동체 형제나 자매 중 누군가가

식탁에 함께 앉기를 어색해하거나

은근히 혼자 따로 먹기를 선호하고

일이라는 핑계로 빨리 일어나기를 자주 반복하면

우리의 공동체가 뭔가 이상 증세를 보이지 않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식탁에서

우리의 우정과 공동체가 어디쯤 와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우리의 미움과 분열이

어디까지 가 닿았는지도 알게 된다.

 

정확히 말해서 식탁은

모든 식구들의 친밀과 마음을 느끼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그 친밀과 마음의 어그러짐이

적나라하게 자기 실체를 드러내는

바로 그런 자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