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칠 상傷, 근심할 상慯

‘다칠 상傷’은 몸에 난 상처를, 그리고 ‘근심할 상慯’은 ‘마음 심忄’을 옆에 붙여 마음에 난 상처를 일컫는다. ‘상처’나 ‘다치다’라는 뜻을 표현하는 ‘다칠 상傷’이라는 글자를 풀어헤치면 ‘사람 인人’ 더하기 ‘화살 시矢’ 더하기 ‘볕 양昜’이다. ‘傷’의 오른쪽 위에 있는 모양새는 화살을 뜻하는 ‘矢’가 변형된 것이다. ‘쉬울 이’라고도 읽는 ‘볕 양昜’이라는 글자는 제단 위를 비추는 태양(日)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뜨거운 ‘볕’이나 ‘양지’라는 뜻이 있다. 대개는 ‘언덕 부阜’를 붙여 ‘볕 양陽’으로 쓴다. 그러니까, ‘다칠 상傷’은 화살에 맞아 다치고 열나서 뜨겁고 고통으로 화끈거리는 부위가 있는 사람이다. 화살에 맞아 다친 때 말고 칼에 맞아 다친 경우를 두고는 ‘칼 도刀’에 양쪽으로 피가 묻어 있는 형상을 그린 ‘다칠 창刅’이라는 글자를 쓴다. ‘다칠 창刅’을 ‘비롯할 창’이라고도 하는데, ‘창創’이라는 글자와 뜻이나 의미가 같다. ‘創’은 ‘곳집 창倉’과 ‘칼 도刀’의 결합이니 칼이나 연장을 사용하여 사냥해 온 동물 등을 놓아두는 창고라는 뜻으로부터 시작했다. ‘비롯하다’라는 뜻은 ‘처음 펴내다’ 할 때 ‘창간創刊’이라 하듯이 말 그대로 어떤 일에 ‘칼을 대다’라는 뜻이다.

사람은 살면서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어 앓는다. 죽어도 상처를 입지 않겠다고 아무리 다짐해도 그러다가는 자기가 만든 감옥에 갇히는 상처를 입는다. 내 주위를 내가 맴돌기만 하다가는 내가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결코 치유자일 수 없는 누군가의 시선에 내가 너무 의존하기만 하다가는 그 누군가가 마음대로 하도록 나를 너무 내주어서 나에게 상처를 입힌다. 결국 그런 상처는 그 사람이 내게 주는 상처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에게 덧씌운 굴레가 나에게 상처를 낸 것이다. 많은 경우에 상처를 치유한다고 애쓰면서 내가 나를 더욱 고립시키고, 아물지 않을 나의 상처를 침묵 속에서 핥기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인생에서 입은 상처는 대일밴드 하나로, 반창고 한쪽으로 가릴 수 없는 상처이게 마련이다. 내가 상처 입은 나를 보면서 짓는 웃음, 누군가가 다가오면서 짓는 웃음마저도 그 웃음에 묘한 자조와 조롱의 상처가 담겨 있을 때가 많다. 누군가가 미워질 때는 아마도 그가 나 모르는 사이에 나의 상처 부위를 찾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상처를 얘기하며 징징대고 상처 입은 눈으로 상처만을 보고 있으면 희망이 없고 장래가 암담하다.

현자가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다”(코헬 3,7)고 말해도 한번 찢어지고 벌어진 상처는 나의 분노가 드나드는 문이 되고, 볼 때마다 더욱 아리면서 좀체 아물지 않는다. 이럴 때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주문呪文을 담은 깊은 원망의 눈물이다. 상처는 부대끼며 ‘함께 산다’는 표시여서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살 때 생긴다. 인간끼리 상처를 낫게 하고자 하는 시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치유가 아니라 상처에 향유를 붓고 연고를 바르는 일이며 싸매는 일일 뿐이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도 아프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나만의 상처는 더욱 아프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상처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상처를 또 보게 한다. 아파도 사랑이면 괜찮다고 아무리 말해도 인생은 부질없어서, 인간은 항상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입히고 마는 존재여서, 사랑을 꿈꾸다가 그 사랑으로 상처를 입는다.

어쩌면 인간의 상처는 인간이 결코 가질 수 없고, 가질 수 있다고 해도 전혀 쉽지 않은 용서라는 천상의 명약으로만 치유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상처의 치유를 위한 인간의 노력은 상처와 반대되는 것만을 보고, 그것만을 얘기하려는 부단한 노력일 뿐이다.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1802~1885년)는 <레 미제라블>에서 『땅을 갈고 파헤치면 모든 땅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피우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라고 했다. 아름다운 꽃이 훗날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씨앗이나 열매가 더 먼 미래의 것이라면, 지금 나의 상처는 과거와 미래 사이 어딘가에서 훗날 누군가를 위해 진주를 영그는 과정일 뿐이다. 상처의 아픔은 그저 경고이고 생명으로 나아가라는 신호이며 아픔 다루기의 수련이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오직 치유를 위해서만 상처를 입히시고, 오직 생명을 위해서만 내리치신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말씀하시며 당신의 상처를 내어놓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자기의 상처로 들어와 나으라며 상처를 내보이신다. 예수님의 상처는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암시이고 비밀이다. 지상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마지막 기적들이 베드로가 휘두른 칼에 상처 입은 이의 치유였으며(루카 22,51), 십자가 위에서 자기 손에 상처를 내며 못을 박는 이들을 위한 기도(루카 23,34)였고, 함께 매달린 상처 입은 죄수 하나를 낙원에 들이신다는 선언(루카 23,43)이었으며, 만신창이 인간의 상처를 안고 영을 온전히 아버지께 맡기신다는 외침(루카 23,46)이었다. 본래부터 상처 난 인간은 그 무엇도 제힘으로 할 것이 없고, 예수님은 그저 자비하신 분이시니, 불쌍한 인간이 고쳐지기를, 내게도 어느 날 ‘다 나았다!’라고 큰소리로 선언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