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시간과 역사

탐욕의 시간과 역사

작년 이맘때쯤 600년이 주저앉는 어처구니없는 불도 보았고, 한철 내내 뜨거운 촛불이 함성 속에 타는 것도 보았으며, 급기야 용산의 성난 불이 우리 자신을 삼키는 것도 보았다. 허무와 허탈, 반성과 회한, 눈물 어린 각오와 결심으로 수도 없이 바라본 불이지만 ‘이미 보았던 불’을 우리는 언제까지 다시 보고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감당하지도 못할 만큼의 높이에 또 다른 높이를 더해가면서도 우리의 영적 수준과 도덕 수준은 점점 낮아져 간다. 넓고 곧은 길을 뚫고 또 뚫어도 우리의 시야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좁아져 가고, 날이면 날마다 온갖 것을 사들여 재어 놓지만 정작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물으려고 하면 공허한 빈손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고, 아파트를 짓고 또 지어도 집이 없다는 사람은 늘어만 가고, 보고 듣고 읽어 아는 것이 많아진다 해도 생각은 줄어들기만 하고, 수많은 건강보조식품과 신약, 그리고 운동법이니 도구들이 개발되어도 건강에 자신 있다는 사람은 더욱 찾기 힘들어지고, 별의별 전문가가 등장해도 해결되는 문제보다 풀지 못하는 문제만 더 많아져 간다. 한 뼘의 땅과 한 푼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서는 사기와 위장을 일삼으면서 돌보아야 할 이웃이 우수수 목숨을 잃어가는 처참함 앞에서는 핏대 세워 죽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씌우기에 급급하거나 숨기 바빠, 그 누구도 ‘내 탓이오’ 하며 가슴 치는 사람이 없다.

끝이 안보이는 물질적 탐욕

우리들의 마음에 미움과 분노의 크기는 날로 커져가고 사랑과 온유, 너그러움의 크기는 작아져만 간다.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정보를 축적할 줄은 알아도 그 정보가 정작 소통의 도구인 줄은 알지 못하고, 별나라 달과 화성에 무엇이 있는 것까지 알면서 앞집에 사는 가족들의 얼굴과 이름은 모른다. 세상 끝이라는 북극과 남극에도 가 닿아 사는 법을 알지만 나만의 고요한 자아의 섬에는 오른 적이 없어 무인도로 남겨놓고, 핵을 자유로이 다룰 줄 안다면서도 내 안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모르고, 그 어떤 복잡다단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세세히 분류해 순식간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줄은 알아도 유치원에서부터 배워 실천해야 한다는 기초윤리들은 모르며, 불순한 공기와 혼탁한 물을 걸러낼 줄은 알아도 영혼의 창을 맑게 닦을 줄은 모른다. 직업훈련이니 자격증이니 하며 생계유지수단을 개발하고 연마하지만 인간답게 사는 법은 습득하지 못하고, 약품과 도구들이 자아내는 찰나의 희열에 취하고 이기적인 욕구충족을 위해 가차 없이 타인의 생명을 끊어내면서도 밤새워 쓰는 사랑의 연서와 몇날 몇밤 가슴 두근거리고 얼굴 붉어지던 애절함은 잃어버린다. 모든 것의 뿌리는 탐욕이다. 탐욕은 우리들의 시간과 역사를 거꾸로 몰고 가는 힘을 지녔다.

호되게 맞고 있는 오늘의 금융위기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법적 투명성과 책임감의 결여뿐 아니라 잘못된 가치관을 토대로 사회를 건설하려 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오늘의 위기를 1930년대의 대공황과 견주기도 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초유의 사태라 하며, 60년 만의 ‘대사건’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아득한 옛날과 비교해 뿌리 깊은 영적위기를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 물질적으로 풍요롭다는 현대에 정신적 빈곤은 점점 확대되어 왔다. 내적 공허감, 알 수 없는 두려움, 자포자기의 심정 등이 여전히 번지고 있다.

영적 위기 동반에 더욱 심각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의미, 오직 사랑만이 제공할 수 있는 궁극적 의미들을 찾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도 생수의 원천을 저버리고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동굴만을 파고 있는지 모른다.(참고. 예레2,13) 어느 순간 내 옆의 그가 더 이상 내 곁에 있지 않게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을 행동해야 한다. 뜨거운 포옹과 입맞춤, 마주잡은 손, 그것만이 어쩌면 내가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유일무이한 것이요, 돈 주고 값을 매겨 살 수 없는 것이며 경쟁 없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니, 사랑에 시간을 쏟고 대화에 시간을 내며 값진 머릿속 생각을 나누는 데 시간을 써야 한다.(2009년 2월7일 경향신문)

미국이 문제인지, 우리가 문제인지

미국이 문제인지, 우리가 문제인지


 도대체 미국이 문제인지 우리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어째서 눈만 뜨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야기로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미국산 소고기를 먹어야만 우리가 잘 살게 된다하여 그것을 먹으라는 쪽과 못 먹겠다는 쪽이 갈려 연초부터 치열한 공방을 시작했지만, 그 논쟁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고 있는데 이번에는 미국 발 경제 위기라는 발도 없는 괴물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안팎으로 괴롭히니 모두가 못살겠다며 아우성을 지르고 있다. 괴로움의 호소를 넘어 미국이 잘 살아야만 우리가 잘 살게 될 것 같은 두려움 섞인 중압감은 어느 새 우리를 덮쳐 짓누르고 있다. 작년에는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이 몇 명 죽었는지 숫자세기로 하루가 시작되었는데, 이제는 미국의 경기지표 지수로 아침을 열면서 속수무책으로 그저 미국이 어서 빨리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주기만을 내심으로 바라고 있다. 듣기 싫어도 들리는 소리들이고 보기 싫어도 보아야만 하는 내용들이다. 머나먼 미국의 이야기들이고 우리나라와는 별로 상관없는 내용들이라고 큰소리치며 걱정 말라던 이들, 새로운 대통령이 들어서면 다른 것은 몰라도 경제만은 확실하게 발전시킬 것이라던 이들이 다 어디로 숨었는지 모르겠다. 대통령께서는 지금이 1년 내에 부자 될 수 있는 호기이니 이를 놓치지 말라시는데 당장의 민생고를 걱정하는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 같은 말씀이다. 우리는 이렇게 올 한 해를 마감하려는 끝자락에 와 있다. 우리는 금년 들어 무엇을 계획하였고 결심하였으며 그 결심들을 어떻게 얼마만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일까?


 자본주의가 이루려는 세상은 결국 허위욕구의 창출이고 허구의 상징화이다. 유용한 정보라며 다가오는 구매유혹, 포장(包裝)에 기술이 가세하여 생산해 낸 기만과 조작의 멈추지 않는 먹이사슬, 시장만능주의라는 굴레 안에서 우리는 소비가 미덕이라는 거짓을 학습 받고, 무한 경쟁이라는 원리를 신봉하며, 모든 것에 물질로 보상이 가능하다는 신념체계를 맹신한다. 거대한 소위 미국 발 경제위기는 물질적 가치와 탐욕의 가치 그리고 외면적 가치에만 매달려 허덕이는 인간들의 허상이 무너지는 과정이고 사람들을 정신 차리게 하는 계기이다. 그런 가치가 우선되어서는 안 되고 정신적 가치와 영적인 가치, 그리고 내면적 가치가 우선 될 때에만 인간들의 삶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소박한 진리를 다시 되새기게 하는 사건이다. 사람들은 정직과 신뢰에 바탕을 둔 가치체계가 붕괴될 때 어떤 결과들이 올 수 있는지를 주변의 고통으로 목격하고 피부로 체험한다. 약삭빠른 사람들은 좀 더 세련된, 이른 바 시스템의 정비만으로 이 모든 것들이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갈 것이라는 또 다른 거짓 명제를 만들어 내고, 끝나지 않은 위기가 없으며 극복되지 않은 위기란 있을 수 없다면서 과거의 위기와 현재의 위기가 어떻게 다르고 유사한지를 구분하기에만 여념이 없다.


 바람이 차다. 차라리 정신이 번쩍 들게 매서운 바람이었으면 좋겠다. 차가운 바람은 신록의 나뭇잎들을 떨어트리고 앙상한 가지들을 남기지만, 문득 그 나무들을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잎사귀 없는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면서도 저 나무들이 죽은 나무들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행복하다는 생각을 다시 해야 한다. 금융위기니 경제위기니 하는 와중에 우리가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값진 교훈 하나는 나 혼자만 잘 살겠다는 것이 공허한 발상이며 너와 내가 함께 잘 살 수 있을 때에만 우리 모두가 잘 살게 된다는 사실임을 상기하여야 한다. 세상이 언제나 그랬고 사람들이 언제나 그랬듯이 시간과 삶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을 묵묵히 꿰뚫어보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 우리 인간들이 마냥 어리석은 실수들을 반복하며 살아가지만 그 실수들의 반복 안에서도 깨우침을 얻어 조금씩 슬기롭게 전진하는 본성과 습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리고 조물주는 인간들이 그어놓은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한 선(線)을 가지고도 곧은 선을 긋기에 여념이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껏 우리가 함께 살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희망을 가져야 한다.(2008년 11월29일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