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꾸는 꿈은 많은 경우에 꿈 그대로 남거나 허상, 망상, 상상, 공상으로 남는다. 그러나 누군가와 그 꿈을 나누면 많은 경우에 그 꿈은 현실이 된다.

성경에 나오는 요셉도 꿈을 나누면서 실제로 꿈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고,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며 친구인 돈보스코 역시 수많은 아이들과 꿈을 나누면서 오늘날의 살레시오회가 있게 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산상설교(5-7)에서 예수님께서 꿈꾸던 하늘나라의 꿈을 기록하려 했고, 요한 복음사가는 17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루기를 바랐던 마지막 꿈을 기록했다.

꿈은 그저 꿈일 뿐이라면서 현실에 안주해야 한다는 유혹을 강하게 하는 것이 현대 사회이고, 심지어 그 꿈들을 부수어야만 된다는 식의 공격성을 보이는 것이 현대 사회이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의 것이 아닌 차선을 갖기로 쉽게 결정하고, 이상적인 실제에 대해서는 냉소적이 되기 쉽다. 도리스 레싱은 진짜 죄는 진짜 좋은 것이 아닌 것, 차선을 손쉽게 원하는 것이고, 그 차선을 손쉽게 택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몇 년을 숨어 지내던 안네 프랑크는 우리 안에 이상, , 희망이 있지만, 우리가 대면하는 소름끼치고 파괴적인 현실밖에 보이지 않는 이 시대는 참으로 어렵다. 그럼에도 내가 나의 꿈들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불합리하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그 꿈들을 끝까지 붙들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그 꿈들이 성취될 시간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적었다.

꿈은 누군가와 함께 꾸어야 한다.
꿈은 조각 작품처럼 돌덩어리를 깨면서 서서히 드러난다.
돌덩어리 안에 내재한 꿈을 현실이 되도록 드러나게 하는 것은
돌덩어리를 깨는 정과 망치, 그리고 끌이다.

과연 나에게는 그런 꿈이 있는가?
과연 나에게는 그런 꿈을 나눌 형제가 있는가?
과연 나는 그런 꿈을 사는가?

 

 

 

어수선한 봄날

어수선한 봄날

이른바 3월의 위기라는 것도 지나갔고, 로켓이니 위성이니 미사일이니 하는 논란 속에 기어이 쏘아대고야 말 것이 뻔했던 북한의 시위도 우리가 ‘나무 심고 있을 때’ 지나갔다 하고, 돈이 많은 어떤 사람은 얼마나 돈이 많은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에게 돈을 싸다 주다 못해 심지어는 ‘가져가라’고까지 했다 하고, 여지없이 전직 대통령에 대한 비리 수사 역사가 되풀이 되고, 가련한 여배우의 죽음은 연예계와 스타의 삶이 으레 그렇게 슬픈 것인가 하는 절망을 자아내고, 불길 속에 죽어간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은 언제인가 싶게 잊혀가고, 몇몇 고위 얌체들은 대형 기사들에 고마워하며 용케 대중의 시선을 피해가고 있고…. 그렇게 봄이 오고 또 가고 있는 중에, 우리들은 여전히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피워대고, 너무 많이 마셔대고, 너무 많이 미워하고, 너무 많이 지껄이며, 너무 많이 TV 앞에서만 시간을 보낸다. 너무 빨리 달리고, 너무 빨리 열 받고, 너무 빨리 속단하면서 ‘빨리빨리’는 배워도 끈질긴 집요함과 기다림은 배우지 못한 채 또 한 철이 지나고, 계절도 그런 우리들을 닮았는지 기다림을 배우기 전에 꽃을 피웠고 떨어트렸으며 그렇게 이미 다음 철을 준비한다.

기다림 배우기전 또 한철은 가고


학기 초면 학생들에게 이력서 양식을 나누어주고 자신을 소개할 겸 간략하게 써 보라 하는데, 이번 학기의 한 학생이 문득 자신의 포부를 적으면서 ‘부자 되고 싶어요’라고 썼다. 이게 교수님께 제출하는 대학생의 대답일까 싶어 의아스럽다. 내가 어렸을 때 또래의 애들이 책상머리에 곧잘 붙여놓았던 최대 애용 표어는 ‘불가능은 없다’라든가 ‘청소년들이여, 야망을!’ ‘하면 된다’ 이런 것이었는데, 요즈음 아이들은 무슨 말들을 써 놓을까? 학년 초에 학교에서 나누어주고 기록하여 가져오라던 신상명세표 안에 등장하는 장래 희망이나 포부 난에는 무엇을 써 넣을까? 세상이 다양해지고 활발해져서 별의별 내용들이 다 많겠지만, 유달리 한시적 쏠림과 모방 내지 들끓는 속성이 강한 우리 사회의 특성상 요즈음은 스케이트 선수나 축구선수, 야구선수 같은 것을 쓸까? 취미 난에는 독서, 영화감상, 음악감상, 등산, 산책…이렇게 쓸까? ‘좋은 대학에 가서 돈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라는 희망과 ‘잠자기’와 같은 취미 아닌 취미를 쓸까? 그저 ‘몰라요’라는 답이 아닌 답을 쓸까? 꿈도 없고 취미도 없고 목표도 없으며 더더욱 성취동기가 없는 청소년들이라 하니 말이다. 이런 생각과 궁금증, 논의 자체가 구시대의 산물이요, 정신적인 사치와 허영일 뿐일까?

애들의 이야기는 노인에게까지도 마찬가지로 이어진다. 젊어서 자식들 키우고 뒷바라지 하느라 애쓰다가 이제는 그 자식들의 자식들을 돌보아 주는 힘에 부친 일을 얻기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일 듯이 살기가 일쑤이고, 종일 자기 혼자 수다 떠는 TV가 유일한 낙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다가 치매의 조짐이라도 보일 것 같으면 천덕꾸러기가 되고 다른 가족에게 부담으로 남아 요즘 유행인 동네 요양병원의 침대 하나라도 얻어 유기되면 불행 중 다행이겠고, 그것도 아니면 방 한 칸을 얻어 국가의 배려라는 몇 만 원의 보조금에 몇 푼을 더하여 스스로의 연명을 도모해야만 한다. 어차피 혼자 생을 마감해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지만 사회의 배려가 결여되어 있는 품위 없는 노년을 보면, 나는 치매 없이 온전한 정신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것이 과한 욕심이라면 설령 치매가 오더라도 배설물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게 되어있어서 관리자가 갈아줄 때까지 배설물 속에서 견뎌야 하는 소위 우주복은 입지 않아도 되는 치매가 왔으면 좋겠고, 치매에 걸려있는 나를 볼 때마다 다른 이들이 재미나게 웃을 수라도 있는 그런 치매였으면 좋겠다. 평상시 살았던 모습대로 치매에 걸린다 하니 그것도 어쩌면 불가능한 소망이다 싶어지지만 말이다.

양지녘서 배려의 사회 꿈꿔본다

어수선한 봄날, 양지쪽에 앉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청소년들에게는 뭔가 하고 싶고 되어보고 싶은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사회, 노인들에게는 소일거리와 품위를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하는 사회였으면 하는, 하려고 하면 마냥 어렵지만도 않을 것 같은 상상들을 해 본다.(2009년 4월 18일 경향신문)

코엘류

 

1416. 천지만물은 그것이 창조되던 태초에는 온 세상이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잊혀져버린 어떤 언어에 의해 만들어졌지. 난 사물들 속에서 바로 이 우주의 언어를 찾는 중이야. 내가 여기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고, 우주의 언어를 알고 있는 한 사내,  연금술사를 만나기 위해서지.


1417. 한 가지 일이 다른 일에 연결되는 신비로운 사슬에 관한 이야기…자신의 꿈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자아의 신화는 더욱 더 살아가는 진정한 이유로 다가오는 거야.


1418. 사막에는 시간의 힘과 그로부터 솟아나는 지혜가 느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