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독신자

거룩한 독신자

로마라는 도시는 참 오래된 도시이고 또 복잡한 도시이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관광객들, 자동차들, 이곳 저곳의 커피향기, 떠들썩한 로마사람들 특유의 제스처와 얘깃소리들, 심지어 길거리 여기저기를 누비는 수많은 도둑고양이들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복잡한 도시가 또 있을까 싶다. 그런 고도古都에는 유별나게 성당들도 많다. 그런데 그 어느 성당이든 성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 금방 그렇게도 복잡다단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죽은 듯이 고요한 침묵의 공간을 만나게 된다. 문 밖과 안이 이렇게 차이가 날까 싶다. 여러 가지 잡음도 소음도, 또 성급한 움직임도 없는 조용한 공간이다. 이 도시가 이렇게도 오랜 세월동안 활기찬 도시일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죽은 듯이 보이는, 비어있는 듯이 보이는 이 침묵의 거룩한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비유로 거룩한 동기에 의해 홀로 독신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지구라는 이 별 위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기발랄함과 활력을 위해, 죽은 듯이 빈 여백의 거룩한 공간의 역할을 살아야 하는 것이 거룩한 독신자의 몫은 아닐까?

그런 의미로 세상 안에서 고요한 침묵의 공간을 사는 자들이 바로 거룩한 독신자들이다.

 

 

봄 날

 

봄날




오늘로 두 번째 일요일, 아니다. 세 번째 일요일이 맞다. 내가 이 곳에 토요일에 도착했으니 말이다. 주일인 오늘 꼼짝도 하지 아니하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어제까지 주적주적 내리던 비도 말끔히 갠 하늘이고, 이런저런 꽃들도 많이 피었으며, 또 새들의 소리도 유난히 창 밖에서 요란을 떠는 화창한 봄날 인데 말이다. 슬슬 나가볼까 하는 마음이 수도 없이 교차했지만, 그럼에도 별로 날아오는 메일도 없는 메일 함만을 열 번도 넘게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면서 결국은 방에서만 하루를 지냈다.




로마에서라면 17 년 전 이 곳에서 공부할 때 31명이 함께 살던 공동체의 식구들 중에서 내가 가장 일가견이 있던 작자였었는데…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문득 찾아든다.




꼭 피곤하고 교통이 다소 불편하다는 탓만은 아닌 것 같다.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더 피곤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것이 나이를 먹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춘천에서의 6년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원래 내가 그런 성품을 지닌 것이었던 것일까?




어제 인편으로 내 손에 전달되어진 엽서 한 장이 있었다. 나보다 나이도 훨씬 어린 수녀님 한 분이 로마에서 3년의 공부를 마치고 떠나면서 내가 여기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엽서 하나를 남겨 놓았었던 모양이다. 수녀님은 나를 애초부터 잘 알고 있었다는 듯이 ‘밖으로 찾으러 많이 다니기보다 마음 안 깊은 샘에서 맑은 물을 기르시라’고 썼다. 수도자적인 직관의 능력으로 그렇게 예견하고 썼는지, 그냥 우연스러운 인연으로 그렇게 썼는지, 아니면 정말 나를 잘 알아서 그렇게 썼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 엽서가 책상 한 쪽 구석에서 말갛게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렇게 내 살던 곳을 떠나 맞아보는 이국에서의 봄은 내가 살았던 지난 날의 봄을 새삼 되새겨 보게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살았던 봄은 괜스레 어수선하기만 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뭔가 모를 기대와 불안, 그리고 수선스러움으로 뒤죽박죽되어 지나가버렸던 기억들. 40대의 봄은 으레 그런 것일까?




나만의 방에서 가끔씩 창 밖으로 하늘을 쳐다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으로 그렇게 봄날의 주일 하나가 지나간다.(2002.3.10)

첫 주말

 

첫 주말




로마에서의 첫 주말이었다. 여기 공부하고 있는 후배들을 만나고 또 오랜만에 돌아 온 로마에 인사도 좀 할 겸 시내에 나가기로 했다. 물론 내가 지금 묵고 있는 이 살레시오회 본부라는 곳이 로마 외곽에 있는 곳이기에 어지간히 각오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상상을 못했다.




먼저 후배들을 만나기 위해 1시간이 넘게 버스를 갈아타면서 그렇게 가고, 한국 사람이 가고 싶은 한국 식당은 너무도 비싸서 값이 비교적 싼 곳이랄 수 있는 중국 음식점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거기까지는 그런대로 그래도 괜찮았다. 돌아오는 길에 좀 빨리 오겠다고 머리를 쓴 것이 탈이었다. 로마 한 쪽에 교외선 시발역이 있으므로 거기에 가서 교외선을 타고 다시 버스를 갈아탄다면 한 30 여분은 절약이 가능할 것 같아 그렇게 하기로 했다. 교외선 역에까지 후배들이 동행했고 거기서 1시간 30 여분을 기다렸는데도 도무지 기차가 오질 않는 것이었다. 사실 홈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별 의심이 없었다. 특별히 내가 타려고 했던 그 교외선은 공항으로 가는 기차이므로 비교적 정확하고 빠른 것이 사실이었는데도 오랜 시간을 기다렸으나 감감 무소식이었다. 우리 일행 다섯 모두 이태리 말을 잘 하고, 또 우리 중 셋은 로마에서 현재 살고 있는 이들이었기에 오지 않는 기차를 알아본답시고 역사 여기저기에 가서 물어도 보고 별 짓을 다 해 보았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한 시간 반만에 우리가 도달한 결론은 역무원들과 철도청 관계자들이 기습적인 파업을 했다는 것이고, 우리는 결국 그 역을 떠나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시내로 나갔던 방법으로 되돌아오기로 작정하고 중앙역전에 가서 버스를 탔는데, 갈아타야 할 지점에서 또 다시 봉착한 문제는 일요일이기에 많은 버스가 다니지 않고 한 시간 반 간격으로 다닌다는 것이고, 그곳에 도착할 무렵에 갈아타야 할 버스가 떠났다는 것이며, 결국 한 시간 반을 다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길래 어두운 밤길이지만 걷기로 하고 걸었다. 주로 차들이 다니고 가로등도, 또 인도도 없는 2차선의 위험한 길을 빠른 걸음으로 걸어 발에 물집이 잡히면서까지 꼬박 한 시간이 넘게 걸어 결국은 숙소에 돌아 왔다.




곤한 잠을 자고 일어난 오늘 오전은 당연히 상당히 피곤 할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철도 관계자들의 파업과 일요일의 배차간격이 원인이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그런 것에 익숙하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100 여명도 넘게 기차를 타기 위해, 더구나 공항에 가기위해, 짐들을 들고 플랫 홈에 기다리던 사람들까지도 그 누구도 아무 말 없이 그저 마냥 서 있던 광경, 안내 방송 하나도 없던 상황, 또 버스 기사이건 누구이건 쉴 권리가 있다는 일요일을 절감하게 하는 시내버스 배차간격. 이미 오래 전에 익히 배웠고 알았던 로마이지만 오랜 만에 돌아와 촌놈 노릇을 톡톡히 하고 다리품을 엄청 팔고서야 그렇게 첫 주말이 지나갔다. 참으로 수도자는 집을 떠나 싸돌아 다니는 것이 영신사정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절감한 첫 주말이었다. 무서버서라도 다시는 나돌아 다니지 말아야 겠다.(2002.3.4)

자초지종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가 어찌하여 열 받았는지 궁금해 할 일이므로 이를 밝히는 게 도리인가 싶다.




서울에서 낮 1시 30분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파리에 도착한 것은 열 두어 시간이 흘러 이 곳 시간으로 저녁 5시 30분 정도 였다. 바로 1시간 뒤인 6시 30분에 파리에서 로마로 가는 에어 프랑스로 부지런히 옮겨 타야 하는 것이었는데… 아뿔사. 비 내리는 빠리의 저녁 공항에서, 그것도 1시간의 여유밖에 없이 비행기를 갈아탄다는 것이 유럽 사람들의 생리를 어느 정도 아는 내가 볼 적에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거의 무모한 시도였다. 그 한 시간 안에 사람이야 옮겨 타겠지만 짐을 찾아 옮겨 싣는 것이 급할 것 없는 이 곳 사람들에게 상당히 무리가 따르는 상황이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거의 짐이 사람과 함께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아야만 정상일 것 같다.




아무튼 로마에 도착하고, 그렇게 공항에서 두 시간여를, 보이지 않는 짐을 찾겠다고 기다리다가 결국 세관에 짐 잃었다 신고하고, 이곳 살레시오의 총 본부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넘어서였을까 싶다. 악몽은 그 때 부터 시작이었다. 속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바꾸어 입을 겉 옷도 또 양말도 없이 아무 것도 없이 그렇게 3일을 지낸 것이었으니… 그 처절하리만치 척척했던 3일의 몰골을 이루 다 서술 할 수가 없다. 그저 상상에 맡긴다. 나와 일행이었던 현신부는 털 많은 서양 사람이고 면도기마저 없어 3일 동안에 수염이라는 것이 수북하게 자라버리기 까지 했었으니 말이다. 그 동안 벼라 별 짓을 백방으로 다 하면서 짐을 찾았으나 끝내 오리무중이었고. 한국에까지 전화 한 끝에 그 짐이 로마 공항에 우리 도착한 다음 날 그러니까 일요일 아침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는데, 물론 그 날 일요일은 이태리 사람들의 관습으로 짐을 배달 할리가 만무한 것이고. 월요일 아침에나 배달해 주려니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월요일 저녁을 다 먹고 난 밤 9시가 되어서야 짐들이 나의 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짐을 받고 보니 이렇게 저렇게 없어진 소소한 것들도 있었고 말이다.




이번 기회에 ‘어디 갈 때는 겉옷도 속옷도 없이 가난하게 가야한다’던 예수님 말씀을 참으로 여러 번 되내었다. 그리고 반성도 좀 했다. 나는 왜 이렇게도 이런저런 것이 없이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는가 하고 말이다. 그리고 거의 한계에까지 가게 된 나의 인내력을 점검할 수가 있는 좋는 기회였다 싶다. 거의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박차고 나서기 직전의 단계에까지 갔으니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마 불란서나 이태리의 경제 사정이 아주 좋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 머나 먼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이라는 곳의 가난한 신부 짐을 슬쩍 몇 개 털어가야만 되는 상황이 되었으니 말이다.




실로 오랫만에 돌아 온 로마에서의 두 달 일정을 난 그렇게 시작했다. (20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