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들의 박람회


마귀들의 박람회


어느 날 마귀들이 모여 인간들을 죄에 빠트리고 유혹하는 데에 유용할 여러 가지 도구들의 박람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박람회를 통하여 인간들을 공략할 새로운 무기들을 개발함과 동시에 마귀들의 세계에 새롭고 정교한 전략이나 무기체계들을 널리 판매하고 보급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마귀들은 몇날 며칠을 두고 장소를 물색하여 이곳을 치장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부스를 만들고 새로운 장식을 하고 각종 조명들을 화려하게 배치하고 바닥엔 카펫을 깔고…등등. 인간들을 공략하기 위한 마귀들의 최신 정보와 도구 및 장비, 그리고 신종 무기체계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당연히 여기에는 그러한 제품들의 결과로 인간들이 짓게 되는 각종 죄들의 목록이나 현상을 보여주는 영상물이나 쇼들도 등장하였다. 물론 이들을 간단한 이동식 저장 장치에 담아 놓은 CD, DVD를 비롯하여 열쇠고리, 장식품, 인형, 벽걸이용 액자나 액세서리, 책자 등과 같은 기념품들도 넘쳐났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소위 7가지의 대죄(七罪宗)를 위한 패키지 상품이었다. 이는 곧 교만, 질투, 분노, 게으름, 탐욕, 탐식, 사음(邪淫)에 관한 묶음 상품이었는데, 앞의 3가지는 인간이 타인들을 향해 짓게 만드는 죄들이었고, 게으름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짓도록 만드는 죄였으며, 그 다음 뒤의 3가지는 인간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지상 것들에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남용하여 죄를 짓도록 만드는 죄들이었다. 이와 관련된 각종 상품들은 특별히 왕창 세일을 하기도 하였는데 가격이 파격적이어서 여러 마귀들이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박람회장의 맨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유리 장식장에 특수 보안 장치를 해 놓은 특별한 상품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그 장식장에는 빨간 비단 천으로 만든 쿠션 위에 금장과 보석으로 꾸며진 열쇠 하나가 놓여있었다. 유일하게 세일을 하지 않는 상품이었고, 제품의 이름도 쓰여 있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가격조차 매겨지지 않은 상품이었다.

마침 박람회장을 찾았던 어떤 원로격인 마귀께서 그 상품의 범상치 않음을 간파하고, 거들먹거리면서 자기 비서에게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어 구입할 수 있으면 구입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비서는 백방으로 이 상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에 이르렀는데, 결국 그 원로 마귀와 박람회에 이를 출품하였던 원(原)작자가 서로 심한 유황 냄새를 풍기며 한 자리에 마주하게 되었다. 원작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열쇠는 인간이라면, 아무리 순수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심지어는 사제가 되었건 평신도가 되었건 수도자가 되었건 주교나 추기경이 되었건, 남녀노소 그 누구에게라도 영혼의 문을 열어 그 성덕이나 신앙을 망가트릴 수 있도록 접근할 수 있는 열쇠로서 여느 상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제품이어서 실로 그 가격을 책정할 수가 없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설명을 들은 원로 마귀는 더욱 더 안달이 나서 이 제품의 구입을 끈질기게 요구했는데, 한참 만에 원작자는 그 원로 마귀에게 그 제품의 이름이나마 가르쳐주겠다며 원로 마귀의 귀에 대고 누가 들을세라 조그만 목소리로 그 제품의 이름이 ‘실망(낙담, 의기소침scoraggiamento=depression, discouragement)’이라고 알려주었다.

용기를 잃고 실망한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다른 이들을 미워하게 되어 죄를 짓고 만다. 상처 입은 자가 상처를 낳는 법이기 때문이다. 실망이야 말로 신앙의 반대말이다.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8,31)” 하며 용기충천한 사람이다.
(2012년6월15일, 이태리어판 ‘살레시오 가족지 2012년 6월호’의 마지막 페이지를 의역하고 덧붙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