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님 !

김수환 추기경님 !

김수환 추기경님의 선종 때 날씨와 밤낮, 종파와 연령의 구별 없이 그분의 시신 앞에 지나치듯 단 몇 초를 서기 위하여 물밀듯 몰려들었던 군중은 아직까지도 그분의 묘소를 찾는다.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든 이유는 무엇이고, 보고 들으려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일관된 사랑


사람들은 추기경님에게서 조용한 웃음과 온화한 미소를 보고, ‘나는 바보야!’ 하는 말씀을 듣는다. 그런데 이 말씀은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듯 심한 자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고, 더더욱 자기 처지의 한탄도 아니다. 바보 같은 모습으로 살아온 당신 모습에도 불구하고 넘치고 후하게 백배 천배 만 배로 인생을 살게 해 주신 하느님께 대한 깊은 감사에서 나오는 거룩한 감탄이다. 추기경님의 말씀은 인생이 하느님 앞에 선 인간들의 불쌍한 처지를 깨우치는 지혜로부터 시작되고 마쳐질 수 있으며, 바보 같은 부족함 중에서도 감사하면서 감사할 은혜를 입는다는 말씀이다. 세상의 논리와는 맞지 않아서 바보이지만, 슬픔에 잠긴 자 기쁨에 잠길 이유가 있고, 눈물에 젖은 자 미소 지을 이유가 있으며, 이글거리는 분노에 사로잡힌 자 부드러운 우정으로 충만할 이유가 있고, 가난으로 고통 받는 자 가난의 가치를 깨닫고 위로를 얻을 이유가 있으며, 실망과 실의에 빠진 자 용기 충천할 이유가 있고, 악령에 시달린 자 안식을 누릴 이유가 있으며, 사악한 사념들과 유혹으로 고문당하는 자 영혼의 평화를 맛볼 이유가 있음을 그 바보가 알고 산다는 역설이다.

추기경님의 글들이나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같이 일관된 내용 하나가 있다. 그것은 세상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내용으로 정리가 가능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고 각기 나름대로 존재의미가 있으며,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가지 일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살아있는 것뿐만 아니라 돌멩이 같은 무생물에게도 존재의미가 있다. 다만 우리가 그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기에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일축해 버리게 된다. 만물의 영장이며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 창조된 인간과 인간의 삶에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소중하고 중요한 의미가 있다.

민중이란 의미의 교회서 사신 분

고장 난 신체도 신체이듯이 고장 난 이성도 이성이다. 그 이성을 지닌 인간이 병든 이가 되었건 장애인이 되었건 어찌 존엄하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가?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의 삶과 인간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생의 의미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않으면서 흘러가는 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갖고 주체적으로 생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살 것인가? 삶은 계란이 아니니, 그 의미는 오직 인간과 삶을 사랑하는 데서만 발견된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참으로 살 수 있고, 또한 그 사랑이 영원으로 승화될 때에만 비로소 삶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다.’(‘참으로 사람답게 산다는 것’ 중에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추기경님은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겼다.

나에게 사제 서품을 주어 사제로 살게 하셨던 추기경님은 천주교회라는 좁은 의미에서의 교회가 아니라 교회 본래의 의미인 군중과 민중이라는 의미에서의 교회 사람이었다. 1987년 4·13호헌조치라는 말도 안 되는 법이 생긴 며칠 뒤 로마에 가셨을 때, ‘이런 혼란시국에 외유나 즐기고 계시냐?’고 당돌하게 비난하던 어떤 젊은 사제에게 ‘교회는 강함도 약함도 아니게, 이쪽도 저쪽도 아니게, 좌파도 우파도 아니게, 그렇다고 타협이나 중도는 더 더욱 아니면서도 바른 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하며, 이쪽이든 저쪽이든 모든 이를 끌어안을 수 있어야만 되는 것이니, 그 교회의 어렵고도 힘든 책임을 맡은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셨다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인중이 유난히 길어 아주 오랜 세월을 사실 것 같았던 추기경님께서 기계에 의존하는 호흡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날과 숨을 스스로 다 하셨다.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코2, 11)” 하신 성서의 말씀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신 추기경님과 그분을 보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집으로 돌아가야 할 그날의 모습을 그려 본다.(2009년 3월14일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