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표징, 프란치스코!


아름다운 표징, 프란치스코!



아름다운 표징, 프란치스코!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사악하고 절개가 없는 세대여서, 그런가 하면 하느님을 떠보고 시험하기 위해서, 그리고 불안에 떨면서 수상한 시절을 어찌할 바 몰라 두리번거리면서 하늘에 표징을 구한다. 이러한 인간들과 세대의 칭얼댐 앞에 하늘은 갓난아기의 표징밖에 없을 것이라 하고, 또한 큰 물고기 뱃속에 사흘 밤낮을 보낸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 한다. 하늘은 이적(異蹟)이 아닌 표징은 믿음으로만 보아지고 드러난다고 응답한다. 사람들은 표징을 보았다고 하면서도 표징을 보지 못하고, 결국 그것이 빵을 배불리 먹었던 결과임을 알아채지 못하는 우둔함 속에서 그날그날을 산다.

우리는 2014년 대한민국 뜨거운 여름 한 복판에서 아름다운 표징을 목격했다. 바로 가톨릭교회의 교종이신 프란치스코라는 표징이었다.

그분은 무엇보다도 ‘보편성’의 표징이었다. 불과 17만의 가톨릭 신자들을 초청해놓은 자리에 설마 100만이 모일까 싶었었는데, 과연 정말 100만이 모이는 것을 보았다. 그분께서 얘기하는 평화라는 가치는 가톨릭교회만의 것이 아니고 인류의 보편가치이며, 동서고금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통하는 인간의 가치였다는 것이 그렇게 드러났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진실한 눈빛과 몸짓이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평화라는 것이 단순하게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매일의 삶속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라는 것, 그 정의는 자기 목소리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만큼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의 척도로 측정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참을성 있는 대화만이 유일한 방책이라는 것, 이러한 것들이 모여 낳는 ‘보편성’, 그래서 과연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가치로서의 ‘가톨릭(catholic=보편적이라는 뜻을 지닌 낱말)’이어야 한다는 표징이었다.

그분은 또한 ‘가난’의 표징이었다. 인간이라는 것이 원래 존재론적으로 가난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분은 구체적으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눈길이 먼저 가는 그런 분이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먼저 교회가 가난하기를 역설하는 교회의 가난이었다. 기도해준답시고 사람들에게서 세금 걷듯이 헌금을 걷는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걸림돌일 뿐이라 했다. 다른 이들의 아픔과 상처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살을 파먹고 사는 사악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시며, 바야흐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소식보다 주식시장의 주가(株價)가 중요 뉴스가 되어버린 무관심의 세계화 앞에서 가난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가난이었고, 그런 세상에서 교회는 길거리에 세워진 야전병원이 되어서 상처받고 멍들고 부서진 사람들을 치유하는 치료소가 되어야 한다는 가난이었다. 그런 의미로 광화문 네거리 100만 명의 미사는 감히 길거리 미사의 원형이었고 우리가 본 가장 큰 기도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분의 가난이 부자들을 배척하고 단죄하는 가난은 아니었다. 상식 없는 부자들의 무지몽매함을 위해, 그러한 형제들의 가난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가난이었다. 그렇게 기도로 세상에 참여하는 기도의 가난이었다.

그분은 동시에 ‘공감’의 표징이었다. 그분을 처음 보았을 때 사람들은 모두 그분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 어떤 메시지를 남기시는가 하며 그분의 ‘입’에 주목했다. 그러다가 며칠이 가면서 사람들은 그분께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그분께서 다녀가신 뒤 뭐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보다는 남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갔다. 그분께서 만나는 사람들의 의미를 생각해갔다. 그분께서는 해결사가 아니었다. 아프고 어려우며 불쌍한 사람들,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서러운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과 함께 조용히 마음으로부터 눈빛을 교환하는 일이 전부였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많은 해결들의 본질이요 힘임을 알게 해주는 진정한 공감의 표징이었다.

보편성, 가난, 그리고 공감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한다. 우리를 다시 한 번 살게 한다.(2014년 8월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