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루카복음 139절에서 56절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억눌리고 소외당했던 두 여인의 만남 이야기이다.

두 여인은 어느 순간 자신들의 처지가 지닌 위대한 의미를 발견하고는 그들이 받은 축복에 함께 감사하면서, 그 감사를 하느님 앞에 함께 거행하고자 한다. 둘이서 공동체를 이룬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했고, 그저 함께 있고 싶었으며, 서로를 보호하고, 서로를 도우며, 서로 서로가 흔들리지 않도록 믿음을 더해 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3개월을 함께 지냈는데, 그러고 난 뒤에 각자는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두려움 없이 홀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두 여인은 마침내 어머니로서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까지 된다.

공동체의 원리로서 우정(friendship), 보살핌(care), 그리고 사랑(love)의 의미들을 이렇게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가 이 이야기 말고 또 있을까?

부끄러움과 죄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우리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던 것처럼 서로를 방문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자유를 함께 선포하고, 우리가 받은 은총을 하느님 앞에 함께 거행할 수 있어야 한다. 마리아처럼 수상쩍은 속삭임과 분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깊은 이해와 사랑이 가득한 곳으로 어느 날 훌쩍 떠나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 적개심으로 가득 찬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두려움 없이 새로운 믿음 안에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benji

2016/02/21 16:53 2016/02/2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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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랑은

사랑은 지적질이 아니다.

사랑은 고발이 아니다.

사랑은 계도와 훈육, 계몽이 아니다.

사랑은 내가 아는 만큼 상대방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여럿이 함께 모여 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시기와 질투에 뿌리를 두고 상대방을 위하는 척 가장하는 가면이 아니다.

사랑은 분리와 분열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느낌이나 감정의 상태가 아니다.

사랑은 형용사나 부사가 아니다.

 

사랑은 동사이다.

사랑은 내가 먼저 행동하는 것이다.

사랑은 증거다.

사랑은 모범이다.

사랑은 자기희생이다.

사랑은 내가 죽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의 한계를 그러려니 하고 인정해주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의 미성숙을 감싸 안아주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의 우둔함을 드러나지 않게 감춰주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의 측은함을 눈물로 보아주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이 행한 선행만을 보는 것이다.

사랑은 일치의 열매를 맺는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콜로 3,14) 하신 말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핵심은 결국 모든 것이 원래대로 다시 살아나는 회복력이다.

 

Posted by benji

2016/02/14 16:56 2016/02/14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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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

 

사랑이란 주제어를 둘러싼 소용돌이의

중심개념은 결국 관계이다.

사람은 누구나 고립을 두려워하고,

외로움을 벗어나고 싶으며,

내 집에 있듯이 편안함을 누리고 싶고,

또 어딘가, 누군가에게 강하게 소속되고 싶으며,

안정된 나날이고 싶고,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랑을 받고 또 사랑하는

그런 관계를 살고 싶다.

 

관계와 관계 속에서

누군가가

내적 평화, 일치, 하나 됨, 전체, 완벽 같은

이런 느낌들을 일시적으로 맛보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진실한 인격적 만남이 아닐 때

찰나의 느낌들은 이내 공허해지고 고통이 된다.

 

사랑이 폭력이 될 때,

애무가 주먹질이 될 때,

입맞춤이 물어뜯는 것이 될 때,

부드러운 눈길이 의심의 눈초리가 될 때,

사랑의 몸짓이 강간이 될 때,

그럴 때 오는 고통은 처절한 것이다.

 

사랑을 갈망하고 추구하는

우리의 본성적인 욕구는

한 편으로 아름답고 가슴 설레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또 한 편으로는

잘못된 사랑의 끔찍함과 잔인함에 놀라는

이런 양면의 교차로 상에 있다.

그래서 사랑은 정말이지 너무나 어려운 것이다.

 

 

Posted by benji

2015/12/27 18:57 2015/12/27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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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시간과 역사

탐욕의 시간과 역사

작년 이맘때쯤 600년이 주저앉는 어처구니없는 불도 보았고, 한철 내내 뜨거운 촛불이 함성 속에 타는 것도 보았으며, 급기야 용산의 성난 불이 우리 자신을 삼키는 것도 보았다. 허무와 허탈, 반성과 회한, 눈물 어린 각오와 결심으로 수도 없이 바라본 불이지만 ‘이미 보았던 불’을 우리는 언제까지 다시 보고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감당하지도 못할 만큼의 높이에 또 다른 높이를 더해가면서도 우리의 영적 수준과 도덕 수준은 점점 낮아져 간다. 넓고 곧은 길을 뚫고 또 뚫어도 우리의 시야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좁아져 가고, 날이면 날마다 온갖 것을 사들여 재어 놓지만 정작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물으려고 하면 공허한 빈손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고, 아파트를 짓고 또 지어도 집이 없다는 사람은 늘어만 가고, 보고 듣고 읽어 아는 것이 많아진다 해도 생각은 줄어들기만 하고, 수많은 건강보조식품과 신약, 그리고 운동법이니 도구들이 개발되어도 건강에 자신 있다는 사람은 더욱 찾기 힘들어지고, 별의별 전문가가 등장해도 해결되는 문제보다 풀지 못하는 문제만 더 많아져 간다. 한 뼘의 땅과 한 푼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서는 사기와 위장을 일삼으면서 돌보아야 할 이웃이 우수수 목숨을 잃어가는 처참함 앞에서는 핏대 세워 죽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씌우기에 급급하거나 숨기 바빠, 그 누구도 ‘내 탓이오’ 하며 가슴 치는 사람이 없다.

끝이 안보이는 물질적 탐욕

우리들의 마음에 미움과 분노의 크기는 날로 커져가고 사랑과 온유, 너그러움의 크기는 작아져만 간다.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정보를 축적할 줄은 알아도 그 정보가 정작 소통의 도구인 줄은 알지 못하고, 별나라 달과 화성에 무엇이 있는 것까지 알면서 앞집에 사는 가족들의 얼굴과 이름은 모른다. 세상 끝이라는 북극과 남극에도 가 닿아 사는 법을 알지만 나만의 고요한 자아의 섬에는 오른 적이 없어 무인도로 남겨놓고, 핵을 자유로이 다룰 줄 안다면서도 내 안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모르고, 그 어떤 복잡다단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세세히 분류해 순식간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줄은 알아도 유치원에서부터 배워 실천해야 한다는 기초윤리들은 모르며, 불순한 공기와 혼탁한 물을 걸러낼 줄은 알아도 영혼의 창을 맑게 닦을 줄은 모른다. 직업훈련이니 자격증이니 하며 생계유지수단을 개발하고 연마하지만 인간답게 사는 법은 습득하지 못하고, 약품과 도구들이 자아내는 찰나의 희열에 취하고 이기적인 욕구충족을 위해 가차 없이 타인의 생명을 끊어내면서도 밤새워 쓰는 사랑의 연서와 몇날 몇밤 가슴 두근거리고 얼굴 붉어지던 애절함은 잃어버린다. 모든 것의 뿌리는 탐욕이다. 탐욕은 우리들의 시간과 역사를 거꾸로 몰고 가는 힘을 지녔다.

호되게 맞고 있는 오늘의 금융위기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법적 투명성과 책임감의 결여뿐 아니라 잘못된 가치관을 토대로 사회를 건설하려 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오늘의 위기를 1930년대의 대공황과 견주기도 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초유의 사태라 하며, 60년 만의 ‘대사건’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아득한 옛날과 비교해 뿌리 깊은 영적위기를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 물질적으로 풍요롭다는 현대에 정신적 빈곤은 점점 확대되어 왔다. 내적 공허감, 알 수 없는 두려움, 자포자기의 심정 등이 여전히 번지고 있다.

영적 위기 동반에 더욱 심각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의미, 오직 사랑만이 제공할 수 있는 궁극적 의미들을 찾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도 생수의 원천을 저버리고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동굴만을 파고 있는지 모른다.(참고. 예레2,13) 어느 순간 내 옆의 그가 더 이상 내 곁에 있지 않게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을 행동해야 한다. 뜨거운 포옹과 입맞춤, 마주잡은 손, 그것만이 어쩌면 내가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유일무이한 것이요, 돈 주고 값을 매겨 살 수 없는 것이며 경쟁 없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니, 사랑에 시간을 쏟고 대화에 시간을 내며 값진 머릿속 생각을 나누는 데 시간을 써야 한다.(2009년 2월7일 경향신문)

Posted by benji

2009/02/06 23:45 2009/02/06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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