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으로 놀라는가?

우리는 무엇으로 놀라는가?

 

우리들은 기쁨으로 놀라는가,

슬픔으로 놀라는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늘 슬픔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매체들은 연일 각종 사고와 살인,

개개인들과 국가 내지는 이해집단들 간의

다툼과 분쟁을 보도하여 우리를 놀라게 하고,

미움과 폭력, 그리고 파괴의 모습들로

우리 마음을 채우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 대화들은

너 그것 들었니?”

어쩌면 그렇게 끔찍한 일이?”

세상에 그런 일을 누가 그걸 믿을 수 있겠나?”

이런 말들의 연속일 때가 많다.

 

정말이지 어둠의 세력은

끊임없는 인간사의 비극으로 우릴 놀라게 한다.

그러나 이런 놀라움은

우리를 병들게 하고

우리 인생의 목표라는 것이

오로지 슬픔의 바다에서

살아남는 것에만 달려있는 듯

착각하게 할 뿐이다.

 

망망대해에서

난파선의 한 귀퉁이를 잡고 매달려 있는 듯한,

그래서 생존만을 생각하다가

점차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소위 인생이라는 악순환에 걸려든

희생양처럼, 그렇게 인생을 살아버리고 만다.

 

신앙의 위대한 도전은

바로 기쁨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자는 것이다.

또한 우리 자신이 기쁨의 사건들을 찾아내고

그 기쁨의 사건들로

놀라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우리는 기쁨으로 놀라고 싶은가,

아니면,

얼마나 멋있고 아름다운가,

허나 실제는 그게 아니야.

단지 이상理想에 불과해.”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계속 슬픔으로만 놀라고 싶은가?

아름답고 소중한 선물

아름답고 소중한 선물

추석이 바로 내일모레이던 날이었다. 새벽 미사를 끝내고 신자들에게 배웅인사를 하고 있었다. 칠순이 넘은 가난한 할머니 한 분이 주변에서 머뭇거리더니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해 살그머니 나 혼자 먹을 정도의 삶은 밤이 아직도 따뜻하게 담겨 있는 비닐봉지를 건넸다. 명절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할머니는 여러모로 무척 많이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고, 그 시간에 아직 봉지가 따뜻했던 것을 보면 적어도 새벽 5시 이전에는 그 밤을 삶았을 게 분명했다.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고 이제는 동화 속이나 시골의 이웃 간에나 남아 있을 법한 풍경인 듯싶었다. 나의 인생은 평생 누군가로부터 무엇이든 받아서만 살아온 인생이라는 생각, 이렇게 살았으니 죽으면 내세에서는 누군가에게 계속 뭔가를 갚으면서만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선물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할머니가 건네준 밤 한봉지

선물은 대개 보은이고 답례이며 정표이거나 예의의 범주에서 행해진다. 이러한 선물은 그 선물을 받고 상대방이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일단 상대방에게 주면 내 자신이 편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편해진다는 속성을 지닌다.

심하게 얘기하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의 이익과 만족을 위해 보내는 선물이거나 표시이고 눈도장이며 관례이다. 언젠가 필요한 경우에 조회할 수 있는 적절한 인간관계의 활용을 위하여 준다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정표로 주고받는 선물도 따지고 보면 어떤 의미에서 나와의 특별한 관계를 암시하고 내가 은밀하게 즐기기 위함이다. 추석날을 전후하여 무던히도 바빴을 택배회사의 물량 거의 대부분이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누군가에게 대가를 바라고 하는 선물도 있다. 이는 직접적인 사후 이득을 바라고 하는 일종의 투자라는 성격이 짙다. 선물이라기보다는 같은 ‘물’자 돌림을 쓰는 ‘뇌물’이라는 말이 훨씬 더 맞겠지만 ‘선물’로 포장된다. 승진, 일의 성사, 합격 등을 위해서 나보다는 영향력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선물이다. 이는 내가 보내는 선물로 상대방을 구입한다는 의미이다. 이때는 주의가 요망된다.

내가 사려는 값어치와 드리는 선물이 격에 맞아야 한다는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 값을 크게 밑도는 선물이면 상대방에게 불쾌함을 줄 것이며, 내가 얻고자 하는 값을 크게 능가하는 선물이라면 내 자신에게 오랫동안 계산 착오라는 아까움과 불쾌함, 내지는 속쓰림을 남겨주고 말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슬픔도 선물

어느 상사댁에 보자기에 싼 선물을 들고 찾아갔는데 그 상사의 사모님께서 그 선물은 보지 않고 그 보자기를 뒤집어보기까지 하면서 뭔가 봉투 같은 게 없는지 이리저리 뒤척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아차, 낭패로구나!’ 싶었다던 어느 분의 우스갯소리는 이렇게 값어치가 어긋나버린 경우에 해당한다.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잇고 있는 물건과 재화, 심지어는 나의 휴대전화나 e메일함에까지도 끊임없이 선물이라는 포장으로 둔갑해 배달되는 선물이 아닌 스팸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러나 이런 선물은 진정한 의미에서 선물이 아니다. 선물은 누가 주어서 기분좋은 그런 물건이나 재화 내지는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나에게 주어져 있어서 누리고 있는 것을 깨우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내용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지만 의미를 새길 줄 아는 이들에게만 발견되는 신비이다. 나에게 주어진 생명이 그렇고, 시간이 그러하며, 인연이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만 남모르게 주어진 슬픔, 그리고 고통과 십자가 역시 선물이다. 아니 선물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살아가는 그 아픔이 너무 억울할 것이기에 나만의 슬픔을 나만의 고유한 선물로 바꾸어내야만 한다. 이른 아침에 받아든 밤 한 봉지의 따뜻함은 내가 살아야 하고 맺어야 하는 소명과 관계를 일깨우기 위해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왔던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선물이었던 것이다.(2009년 10월17일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