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댈 녁疒

‘녁疒’이라는 글자는 오늘날 단독 글자로는 쓰이지 않고 부수로만 쓰이는 글자로서 병들어 침상에 누워있는 환자의 모습에서 왔다. 그래서 ‘병들어 기댈 녁/역, 병들어 기댈 상’으로 소리 값을 가진다. 모양새를 오른쪽으로 90도 돌려놓고(⤿) 보면 다리 달린 침상에 사람을 눕히는 모습이다. 한자에 ‘녁疒’이 들어가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마음과 몸의 크고 작은 질병(疾病)과 관련 있는 글자가 된다.

갓 스무 살 먹은 윤형이라는 아이를 만났다. 일종의 희귀병으로 담낭 옆에 염증이 생기는 병을 앓고 있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수술을 여러 번 했던 아이이다. 하필이면 내일 아침 일찍 6시에 집을 나서서 8시 반부터 수술에 들어가야 하는 아이였다. 윤형은 벌써 몇 번의 수술 경험이 있었고 다음날 수술을 위해서 이미 속을 비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함께 대화하고 기도하는 중에, 윤형은 애써 태연한 척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윤형의 두려움이 담긴 눈을 보고 말았다. 그 눈은 오래 내 마음에 남아 나를 사로잡았다. 하느님께서 귀한 생명을 주셨으면 계획하신 바 있었을 것이고, 이렇게 어린 나이에 고통을 받게 하시는 것도 틀림없이 섭리의 뜻이 있었을 것이지만, 윤형의 두려움 담긴 눈을 마주하면서, 용기를 내라 하고 그 고통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얘기하던 나의 말은 내 스스로가 생각해도 공허하게 들렸다. 문득 언젠가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가 되셨던 어머니께서 아픈 어린이를 두고 ‘인생 살만큼 산 저를 대신 더 아프게 하시고, 저 어린 것은 아프지 말게 하소서!’하고 기도하시던 모습이 생각났다. 무심코 넘겼던 그 말씀의 무게와 진실성이 그저 빈 말이 아니었음을 윤형의 엄마나 아빠보다 내가 더 먹은 나이가 되어서야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인간은 먼 세월이 지나서야 깨우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침상에 기대고 누울 녘에나 깨우치는 ‘어리석을 치癡/痴’가 되지는 말아야 할 텐데 하는 조바심이 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