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할 변變

이곳 플로리다 여름 나라에도 나름 계절이 변한다. 9월 말이나 10월쯤 되면 사람들이 ‘지옥 끝, 천국 시작’이라고 부르는 좋은 시절에 들어간다. 신기하게도 이때만 나오는 과일들을 보면 실감한다. 반대로 천국이 끝나고 지옥처럼 더운 여름이 될 때면 ‘아, 또 그때가 왔구나!’ 싶다.

거의 같은 뜻으로 쓰는 것 같아도 계절이나 사물, 혹은 상황이나 사실이 A에서 B로,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것과 같은 내용을 ‘바뀌다’라고 하고, 한 내용 안에서 성질이나 모양, 상태 등이 달라지는 것을 ‘변하다’라고 한다. 이때 ‘변変’이라고 쓰는 ‘변할 변變’은 소릿값인 ‘어지러울 련/연䜌’과 뜻을 담은 ‘등글월 문攵=칠 복攴’의 조합이다. 두들겨서라도 어지럽게 뒤죽박죽이 되어있고 헝클어져 있는 무엇인가를 하게 해서 어지러운 심사나 상황을 바로잡아 달라지게 하는 것이다. 계절이 변화되는 시기는 그래서 마음을 정리하는 때이다. ‘변할 변變’이라는 글자를 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글자의 정 중앙에 ‘말씀 언言’의 ‘입 구口’가 자리하고 있으므로 정리된 마음으로 가지런히 정돈되면 절제된 입놀림으로 말이 나올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변할 변變’은 그래서 입으로 드러난다.

이렇든 저렇든 계절이 바뀌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여유와 기회를 갖는 것은 축복이다. 햇빛을 받아 지구라는 별의 얼굴이 바뀌는 것처럼 대기의 기온이 바뀌면서 호수의 얼굴도 바뀐다. 그러나 사람은 바뀌지 않고 달라진다. 변화한다. 사람이 바뀌면 사람들이 ‘죽을 때가 되었나!’ 한다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어서이다. 달라지고 변화한 사람이 어느 순간 계절이 바뀌는 것을 바라보면 슬프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오직 바라만보거나 느낄 수만 있는 인간의 때는 매우 슬프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나의 상처를 보여드리기 위해 변화되어야 한다. 현세적인 것은 영원한 것으로, 육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내 안에 갈라진 것은 하나로, 속된 것은 거룩한 것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은 원래 하느님께서 지으신 모습이므로 변하지 않는 존재여서 은총으로만 변화할 수 있다. 하느님만이 나의 의지, 사고, 몸, 내 존재 전체를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총을 기도한다. 기도로 이루어지는 변화는 고통을 수반하고 고통을 수반하는 변화만이 참된 변화이다. 어쩌면 고통의 극치인 죽음으로만 가능한 변화가 궁극의 변화이다.

인생살이 동안 나의 내면에서 어지러움을 몰아내야 한다고 아등바등하지만, 절대 나가지 않을 그것들을 내몰지 말고 변화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한 변화는 고요와 평온의 기도 자리에서만 가능하다. 신앙인들에게 진정한 변화는 성화聖化이다. 하느님께 맡기고 그분이 나를 변화시켜주시기를 청하여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하느님께 맡기는 것만 은총을 힘입어 변화할 것이다.

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선한 뜻을 담은 간절한 지향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설렘도 있어야 하며, 변화를 도모하는 차분한 실행계획이 있어야 하고, 변화를 이루어내는 요령도 있어야 하며, 변화를 향해 가는 내적인 힘이 있어야만 한다. 지향, 설렘, 실행계획, 요령, 힘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혼란스럽고, 불안하며, 내키지 않는 짜증이 앞서고, 좌절의 우울이 엄습하든지, 산만함으로 모든 것이 엉키고 만다.

프랭클린Franklin(1706~1790년)은 세상에는 절대 변하지 않는 사람과 변할 여지가 있는 사람, 그리고 변화하는 사람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바뀜과 변화가 다르고, 단순한 변화와 더 나은 쪽으로의 변화는 아주 다르다.

어지러울 련/연䜌

‘어지러울 련/연䜌’이라는 글자는 ‘말씀 언言’을 두고 양 옆에 ‘실 사糸’를 배치한 형태이다. ‘실 사糸’가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는 모양이라는 것 정도는 대개 안다. 그런데 ‘어지러울 련/연䜌’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가운데 들어있는 ‘말씀 언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글씨를 쓸 때에도 ‘말씀 언言’을 먼저 쓰고 왼쪽 ‘실 사糸’, 그리고 오른쪽 ‘실 사糸’를 차례로 쓴다.

‘말씀 언言’을 ‘매울 신辛’의 변형과 ‘입 구口’가 어우러진 것으로 본다든가(‘매울 신辛’은 손잡이가 있는 꼬챙이의 상형으로 보아서 입에서 나가는 말이 날카롭게 상대방에게 가서 꽂힌다든가 아니면 말을 잘못하면 매운 벌을 받게 된다든가 하는 식), 아래에서부터 입과 혀 그리고 ‘말’을 상징하는 가로획이 더해진 모양으로 본다든가(단순히 입과 혀의 상형으로 보기도 한다), 아니면 위로부터 머리·이마·눈썹·코 밑에 입이라는 형태로 본다든가(말은 곧 그 사람의 얼굴이라는), 아니면 다시 아래로부터 입에 물고 있는 소리 나는 나팔 같은 것으로 본다든가(말은 결국 소리이므로), 맨 밑의 ‘입 구口’를 통처럼 생긴 한글의 ‘ㅂ’ 모양으로 보고 그런 통에 담은 내용으로 본다든가(주술통과 같은 것에 담긴 주술 도구를 통해 전해진 신의 말 곧 신탁神託, 혹은 그러한 주술의 결과를 신과 인간·인간과 인간 이쪽저쪽을 실로 묶듯이 연결하거나 연결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풀기도 한다), 심지어는 맨 위의 점 하나는 하늘의 축복이고 그 밑을 ‘석 삼三’으로 본다든가(세 번 생각해야 하늘의 축복임을 알 수 있으므로), 머리(ㅗ)·둘(二)·입(口)으로 본다든가(머리의 생각과 입 둘이 만들어내는 것이 말이므로) 하는 등등의 여러 의미를 담은 풀이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러한 ‘말씀 언言’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 ‘실 사糸’를 붙이면, 실은 이어지는 것이므로 신과 인간 사이이든지, 인간과 인간 사이이든지, 아니면 세상과 인간 사이이든지 ‘어떤 말과 뜻이 이쪽저쪽에 연결되고 이어지기를 바라는 상황’을 뜻한다. 그런데도 이 글자가 ‘어지럽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은 왜 그러는지 이유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아마도 ‘실이 어지럽게 엉키면 풀기가 어렵듯이 말도 이쪽저쪽으로 얽히고설키면 풀기가 어려워서 어지럽다는 뜻이 담기지 않았을까? 또 ‘어지러울 련/연䜌’에는 ‘다스리다’라는 뜻도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렇게 실타래처럼 엉킨 인간사의 것들을 잘 풀어내어 다스린다는 뜻을 담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 볼 뿐이다. 아무튼, 이런 내력을 지닌 ‘어지러울 련/연䜌’이 다른 글자와 합해지면 다른 뜻을 가진 글자들이 아주 많이 생겨난다.

우선 ‘여자 여/녀女’를 밑에 붙이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아름다울 련/연孌’이 되고, ‘큰 대大’를 밑에 붙이면 아찔할 정도로 큰 것을 이루는 ‘이룰 련/연奱’이 되며, ‘마음 심心’을 밑에 붙이면 내 마음이 저쪽 마음에 가서 닿지 않으면 어찌할 것인가 애타면서 심란한 ‘사모할, 그리워할 련/연, 그릴 련/연戀’이 되고, ‘손 수手’를 밑에 붙이면 무엇엔가 걸려 넘어질 뻔하게 어지러워 손을 잡아주어야 할 정도의 ‘걸릴, 경련할 련/연攣’이 되며, 굽은 활 모양인 ‘활 궁弓’을 밑에 붙이면 어지럽게 구부러진 물길 같은 ‘굽을 만彎’이 되고, ‘벌레 충/훼虫’를 밑에 붙이면 나라를 어지럽히는 벌레 같은 이들인 ‘오랑캐 만蠻’이 되며, ‘칠 복攵’을 밑에 붙이면 어지럽게 정신 못 차리는 녀석을 몽둥이로 때려서라도 변화시키는 ‘변할 변變’이 되고, ‘아들 자子’를 밑에 붙이면 ‘말씀 언言’ 이쪽저쪽에 똑같은 ‘실 사糸’가 두 개 붙어있는 모양처럼 쌍둥이가 태어나 아찔하게 기쁜 ‘쌍둥이 련/연孿’이 된다.

인생을 살다 보면 환갑을 넘어서도 아직도 젊은 날의 ‘어지러운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어지러움은 희열이고 안타까움이며, 두근거림이고 아쉬움이다. 그런데도 ‘때’는 지나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면 문득 공허와 허망함이 남아 눈물이 난다. 그러다가 매섭게 추운 날 정신이 바짝 들 듯이 고개를 흔든다.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못내 저 밑바닥에 그래도 남겨놓아야만 할 것 같은 미련未練(아닐 미未, 익힐 련練)이 사람을 어지럽힌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은 상대방을 어지럽히고(참조. 아가 6,5), 죄악은 인간사의 질서를 어지럽히며(참조. 예레 5,25), 교활한 이들의 말은 거룩한 사람들의 정신을 어지럽힌다.(참조. 사도 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