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명복을 빌며

 

아무래도 써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써야만 할 것 같다.




지난 7월 5일이었다.


그 날은 무척이도 비가 퍼부어 대던 그런 날이었다.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샤워하고


부랴부랴 서울 해방촌 성당으로 향했다.


15년 전 7월 5일은 나의 첫 미사를 드렸던 날이었는데,


그래서 오붓하게 공동체와 이런저런 축하라도 받을 날이었는데,




그런데 15 년이 지난 뒤 7월 5일은 마음 아프게도


며칠 전까지도 이 곳 홈페이지에 자주 방문하던


오랜 친구 같은 한 사람의 장례미사를 드리러 가느라고


그렇게 아침부터 설쳐대야만 했던 것이다.


소위 교회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미사도 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그런 억울하고도 슬픈 죽음의 장례식을 지내러 다녀와야만 했다.


나보다 몇 살 더 먹은 사람,


남들 다니기 어려운 일류대학교를 버젓이 졸업하고,


남들 부러워하는 일류기업에 노른자위라는


인사부장도 했던 사람,


그러면서도 주변머리 없고 지지리도 못나게


이곳저곳 이사 가며 살아야 했던 사람,


어지간한 신부 수녀보다 교회 책을 많이 읽었던 사람,


이 사람 저 사람 영세시키고 싶어 이 책 저 책


원 없이 사다 뿌리던 사람,


아직 다 크지 않은 딸 하나 아들 하나 두고


부인과 티격태격 속상할 때 마다 나를 찾아오던 사람,


그럴 때는 자기는 마시지도 못하는


술 한 병씩을 들고 나타나던 사람,


술도 담배도 못하던 사람,


IMF 그 어려운 와중에 명퇴하고


1억 5천인가 하는 몫돈 쥐고서는


뱃 속 편하게 장사 좀 해 보려고 그런다던 사람,


장사 좀 되나 싶었더니 세든 건물이 다른 이에게 팔리는 바람에
가게의 몫돈이던 권리금을


푼돈의 위로금으로 되받을 처지에 놓였던 사람,


나는 그를 정확히 15년 전 내가 갓 신부 되었을 때,


어려운 청소년들과 사느라 고생하던 시절에


든든한 후원자로 만났었다.


그는 7월 3일 밤에 나한테 다니러 간다고 나섰다는데


나와 연락이 안된 탓이었든지


서울 톨게이트를 빠져 나갔고,


4일 하루를 돌아다니다가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오던 길에 천안에서


내게 가져다준다고 차 트렁크 뒤에 얼마 전에 실어 놓았다던


양주 두 병 중에서 한 병을 거의 다 먹고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나기로 작정했던 것 같다.


나는 이 번 나의 7월 5일 첫 미사 날을


그렇게 마음 아프고 슬픈 그런 날로 지내야만 했었다.




착하기만 했고 살아보려고 무던히도 애쓰던


그런 사람이 살기에는 정말이지 너무나 어려운


그런 세상이다.


우리나라 상법으로는 절대 보장이 안된다는


이른 바 권리금이라는 이유로


자기 돈 현금으로 버젓이 내놓고는


자기 온 생애의 전부일 것 같은 재산을 날린 사람이나


날릴 처지에 놓인 사람이 이 땅에 어디 한 둘 일까마는


그래도 너무너무 마음이 아프고 억울하다.


도대체 뭘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200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