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이 부럽다

스님들이 부럽다

온통 ‘쇠고기 수입’에 관한 이야기들로 범벅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방미 성과에서 시작된 ‘쇠고기 수입’ 파동이 갈수록 증폭되어 가는 인상이다.

형편없는 협약으로 왜 우리나라 사람들만 쓰레기 같은 미국산 쇠고기를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 먹거리와 식탁의 공포를 넘어 안전하고 환경친화적인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국민들의 건강과 환경으로까지 번져간 논조. “남들도 다 먹고 사는데 왜 우리는 먹을 수 없느냐”며 “그까짓 쇠고기 먹어주고 더 큰 국가적인 이득을 챙기면 되지 않는가” 하는 다른 한 편의 반박과 우리도 고부가가치를 담은 소를 만들면 되지 하는 부추김. 한우도 싫고 수입고기도 싫어 고깃집보다 횟집이 성황이라는 소식. 광우병의 무서움을 상세히 풀어놓은 정보, 길거리로 뛰쳐나온 10대들의 안전과 보호라는 이름 아래 교육청에서 장학사와 교감·교사들을 심야에 동원한다는 알림. 지난 정권에서 하지 못한 일을 국가적 차원에서 경제적 이득을 위해 우리가 어렵게 해냈노라고 뻐기던 정부이기에 국민의 건강 문제나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의사소통과 홍보의 문제일 뿐이라는 전제를 달아 ‘그저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군색한 변명.

– 쇠고기 논란 온나라가 들썩 –

이런 경우를 정치적으로 악용하지 말라는 비난과 호기호재를 만나 발목과 주도권을 잡으려는 줄다리기 사이에서 오가는 얄팍한 정치꾼들의 설전. 나라를 지키는 국방부에서조차 ‘우리는 그딴 소고기 안 먹일 것입니다’라는 어이없는 성명서를 발표해야 되는 딱한 상황. 이 모든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쇠고기 소식들의 홍수 또 홍수이다.

장수와 건강에 대한 인간 본연의 끊임없는 욕구, 다분히 정치적 이해득실의 저의를 담아 이번 기회를 유익한 호재로 활용하고자 하는 비겁한 사람들의 행실, 사회적 공포를 은밀히 증폭시켜 가면서 우리의 발목을 우리가 잡고서 낑낑대는 어리석음과 두려움. 그렇게 우리는 통조림 속의 칼날, 빵 속의 지렁이, 새우깡 속의 생쥐머리, 수입냉동 야채 속의 죽은 쥐와 미국산 수입 쇠고기를 들먹이며 이 봄을 화려하게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10대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왔다는 소식이 눈길을 끈다. 10대들의 촛불문화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1000만명은 족히 될 이 나라의 청소년들 중에서 불과 몇 만명이 길거리에 뛰쳐나왔다 해서 사회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을 법도 하지만, “우리 학교엔 돼지고기밖에 안 나와요/ 우리가 돈 냈잖아요. 죽으면 죽는 거지 돈 냈으니까 먹어야지요/ 요즈음 중간고사 성적표(등급) 전에 꼬리표(점수) 받아들고 정신 없어요/ 우리 선생님이나 학교는 그런 것 관심 없어요/ 광화문 나간 애들은 도대체 어느 학교 애들인지 모르겠어요”라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라지만, 또 누군가가 돈 들여 제작하고 나누어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는 획일적인 피켓을 들고 있는 애들의 모습에서 차라리 자기들 공책에 나름대로 써서 나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 담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지만, 광화문 10대들의 외침과 그 의미를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새기고 싶다.

– 기성세대가 부른 어리석은 결과 –

2008년 5월, 청소년의 달에 이 땅을 사는 우리 기성세대는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며, 비록 소수일지라도 이들을 누가, 왜 거리로 내몰고 있는지 생각해야만 한다. 아빠가 딸의 대학 진학과 논술에 도움이 될까 싶어 열심히 신문을 뒤져 광우병이나 쇠고기 수입과 관련한 기사를 스크랩하여 딸에게 건넸더니, 그 딸은 피곤하여 그런 내용을 들여다 볼 관심도 시간도 없더라는 슬픈 이야기를 씁쓸한 심정으로 되새겨야만 한다.

먹거리만큼은 안전한 나라라고 자부한다는 이웃 나라가 부럽고, 우리나라도 그저 그 나라나 다른 이웃 나라만큼만 하였으면 하는 바람 속에서 문득 다가올 끼니가 두렵고 산사의 스님들이 부러워진다.(2008년 5월 24일 경향신문)
 

5월, 청소년의 달

 

청소년의 달


   5월, 청소년의 달이다. 우리의 미래라는 청소년을 이 5월 한 달만 생각하기 위해 청소년의 달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싶을 만큼 이 달에는 청소년들을 위한다는 각종 행사가 범람한다. 각양각색의 행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 이라는 단어를 두고 얘기할 때, 즉시 그 단어 뒤에 ‘문제’라는 말마디를 붙여서 이야기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이른 바 ‘청소년문제’는 대개 천편일률적으로 몇 가지의 통계 숫치를 인용하면서 세 가지 정도의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종결지어지게 마련인데, 가정교육이 엉망이니 이를 각 가정으로부터 잘 해야겠다는 것이 그 첫째이고, 입시 위주의 학교교육이 문제이니 그런 교육을 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것이 그 둘째이며, 가치관이 붕괴되었으니 전통적으로 값어치 있는 가치관의 고수를 위해 애를 써야겠다는 것이 그 셋째이다. 일반적으로 청소년이라는 주제어를 함유하고 있는 논문들이나 세미나들, 그리고 행사의 축사들이 대개 이런 틀 걸이 안에서 요약정리 할 수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먼저 나는 ‘요즘 애들은 형편없어.’ 라든가, ‘요즘 애들은’ 어쩌고저쩌고 해 가면서 애들을 문제의식이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을 반대한다. 기성세대의 눈에는 못마땅하게 보일지라도 요즘 애들은 이미 기존의 기성세대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잘났으며, 풍요로운 세대를 아름답게 잘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몇 배 몇 십 배, 부러울 만큼 더 잘 살아갈 것이 틀림없다. 아니, 적어도 그렇다고 믿어야만 한다. 청소년들은 우리의 미래이고 그 미래는 우리가 믿는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을 바라봄에 있어서도 부정적인 견해나 시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옮겨야만, 말 그대로 청소년들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할 줄 아는 어른이 되며, 칭찬받고 자란 아이가 칭찬 할 줄 아는 어른이 되며, 신뢰받고 자란 아이가 신뢰할 만한 어른이 된다. 애들을 더욱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둘째로 청소년은 우리 기성세대가 가르쳐야 할 대상이라든가 교육시켜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청소년은 기성세대가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기성세대와 함께 지구라는 별 위에서 인생의 한 때를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동반자이고 동행자이다. 나의 체험에 누군가의 체험을 더하면 그만큼 나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나의 생존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생각으로 기성세대는 청소년들의 체험을 자기들의 체험으로 삼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야만 한다. 물론, 청소년들 또한 기성세대의 체험을 자기네들의 체험으로 삼으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이것이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교육이라면 교육이다. 그런데 교육은 마음의 일이라서 강요로 되지는 않는다. 청소년들이 기성세대를 바라보면서 기성세대의 체험을 자기네들의 체험으로 삼고 싶어 하도록 멋진 삶을 보여주고 따라 하기를 그저 바랄뿐인 것이다. 그런 의미로 교육은 ‘보여주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청소년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으며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아 기성세대 역시 청소년들로부터 사랑받아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셋째로 오늘 이 땅의 청소년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애들이 머리에 물을 들이면 공부를 못하게 된다고 어른들이 말하지만 애들도 그렇고 어른인 나 역시도, 공부와 머리의 색깔이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 것인지 이는 도무지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고 또 이해가 되지도 않는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애들이 빨강이면 빨강으로, 파랑이면 파랑으로,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그렇게 어른들과 애들이 다르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해야만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상대방이 내 식대로 완벽해야 하지 않아도 되며, 또 그럴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어른됨이고 성숙함이다. 애들을 기성세대 식으로 너무 조급하게 몰아세우지 말고 시간의 인내로 바라보면서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