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다운 축제

 

*어느 잡지의 부탁을 받고 앞의 글 ‘참 이상한 일이다’와 다소 중첩된 부분이 있으나 이번 월드컵의 길거리 응원을 지켜보면서 제가 갖게된 전반적인 생각들을 정리해 본 글입니다.






축제다운 축제




4강신화의 월드컵이 끝났다.


몇 천명으로 시작한 붉은 악마의 응원단이 몇 십만이 되고 몇 백만이 되어 급기야 700만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며 이른바 6월의 붉은 물결이요 붉은 혁명, 붉은 전설을 이루어 냈다. 원없이 소리도 질렀고 박수도 쳤으며 눈물도 흘렸다. 그런 현상을 목격하면서, 설마설마 하는 심정으로, 세계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깜짝 놀랐다. 온 국민이 월드컵이라는 최면에 걸렸는지, 붉은 악마라는 주문에라도 걸렸는지, 전 국민이 훌리건이라도 된 듯이 그렇게 법석을 떨면서 뜨거웠던 6월이 그렇게 갔다. 내 나이 많은 나이도 아니지만 이제껏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보고 듣지 못하던 그런 체험을 했다. 도대체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계층과 세대를 넘어, 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단시일 내에 상식과 순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그런 연출을 해 내고야 말았던 그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세상살이 각박하게 살다가 ‘에라’하고 월드컵을 빌미삼아 그 동안 못지르고 살았던 소리라도 냅다 질러대면서 이 기회에 스트레스라도 풀어보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지방선거니 대선, 지겹고도 지겨운 게이트니 뭐니, 또 베란다에 헌 수표를 궤짝으로 쌓아놓고 써 댔다는 대통령의 아들에 이르는, 말 그대로 거지같은 녀석들의 형편없는 스토리를 써 갈겨대고 있는 힘있는 사람들이 이쪽은 우리끼리 해 먹을테니 당신들은 축구구경이나 하면서 아기자기하게 살아가시라고 매스컴과 결탁해서 배려하고 조작해 놓은 3 S(screen, sex, sports) 정책이라는 술수요 농간이었을까? 아니면, 얼마 전까지 계속되어 왔던 애국가를 불러야만 영화를 보여주는 식의 국가 교육, 그리고 매주 애들을 운동장에 모아 애국조회를 하고 가슴에 손을 얹어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쳐야 하는 어렸을 때부터 줄기차게 시행하는 애국애족이라는 교육의 결실이었을까? 아니면, 바다건너 미국 사람들이 우리 국민성을 두고 무엇이든 엄청 시끄럽게 달아오르는 사건이 있더라도 그저 2 주만 지나면 한국에선 지나갈 수 있다면서 냄비근성이요 양재기 근성이라고 비아냥거렸다는 국민성이 이 번에는 긍정적으로 불같이 달아올라, 했다하면 무엇이든 일사천리로 기어이 해 내고야 마는 뜨거운 우리의 정열이 되어 모처럼 괜찮게 뻗쳐 나왔던 것일까? 거기에다가 롱다리 너네들이 하는 그까짓 축구쯤은 우리들이 이 악물고 덤비면 기꺼이 숏다리로도 거뜬히 해 낼 수 있다는 오기어린 열등감의 역작용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이번 축제의 주인공이 단연 붉은 물결을 이룬 수많은 대중이겠지만 그럼에도 어느 한 켠에 분명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 있다. 바로 히딩크라는 사람이다. 난 히딩크라는 아저씨를 그저 TV나 신문이 보여주고 가르쳐 준 정도밖에 모른다. 눈이 파란 네덜란드 사람, 2년도 채 안된 사이에 이 땅에서 엄청 큰 돈을 당당하게 벌어간 사람, 열 받아 소리지르다가 제지하는 부심 앞에 물이나 나눠 먹자면서 물병을 내 보이는 위트와 유머가 있는 듯한 사람, 골이 들어갈 때면 특유의 주먹질을 해대는 어설픈 매너와 제스쳐를 부리는 사람, 검은 피부의 애인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 가장 잘 나갈 때 혹시라도 또 남아서 훗날 뜨거운 꼴 보면 어떡하나 하던 염려를 불식시키면서 멋지게 퇴장할 줄 아는 똑똑한 사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서양 사람답지 않게 고개를 숙여 인사할 줄 아는 사람, 가끔 눈물기 있는 속정 깊은 눈매로 자기가 이끌던 팀을 포옹할 줄 아는 사람, 마지막 떠나는 공항에 모시한복 입은 한국인을 대동할 줄 아는 사람, 여러 외국말을 알았으나 한국말은 끝내 배우지 못한 사람, 반바지나 유니폼보다도 넥타이와 정장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사람…


뭐, 이런 정도이다. 그럼에도 그는 분명 한 팀을 철저하게 장악했던 리더였던 것이 사실인 듯 하다. 그는 리더였고, 철저하게 장악할 수 있었고 그래서 하나가 된 팀이 있었던 실력자 였다. 그의 실력이란 다가오는 상황에 대한 예측능력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선택에 대한 판단능력이며, 남들이 오랜 세월과 많은 자본으로 해 낼 수 있는 것을 불과 1년 반만에 해 내고 말았던 비용절감의 능력이었다. 이런 리더와 팀, 그리고 실력이라는 3박자가 히딩크에게는 운 좋게도 잘 맞아 들어갔다 싶다. 이런 것을 히딩크식의 경영이니 뭐니하고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다.




장대비를 맞으면서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를 꼼짝 않고 서서 박수치고 ‘대~한민국’을 외쳐대는 그 수많은 군중을 보면서 못내 머릿속에 지울 수 없는 의문들이 있었다. 도대체 저렇게 운집한 군중 속에서 생리현상은 어떻게 해결할까? 그렇게도 많은 군중이 몰려 지나간 뒤에 아무리 자발적이라지만 담배꽁초 하나 없이, 흔적도 없이 뒷처리가 그렇게도 깨끗한 것은 어찌된 연유일까? 이런 것이 나의 궁금증 이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축제를 정신적 퇴행이라 한다고 한다. 어른이나 성숙한 사람들이 애들처럼 유치해져서 서로 웃고 낄낄댈 수 있게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개인이나 소집단이 아닌 사회적 대집단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마땅히 그 과정 뒤에는 그 집단이 아무리 성숙한 집단이라 할 지라도 다소의 어지러움과 부작용이 있어야만 옳고, 또 가히 정상적이랄 수 있다. 그럼에도 이번 우리 6월 축제 뒤끝은 깨끗해도 너무 깨끗했다. 그래서 난 이번 축제가 틀림없이 뭔가 잘못된 축제 아니면 부족한 축제라고 믿고 싶다.




이번 축제는 월드컵 4강이라는 실적 외에도 어른들 눈에는 마냥 염려스럽고 걱정스럽기만 했던 이 땅의 젊은 세대들이 공동체와 연대감 속에서 하나의 영혼, 하나의 마음을 체험할 수 있었던 장이었고, 그저 빨갱이는 나쁜 놈이요 뿔 달린 적이기에 그를 묘사하는 빨강색 근처에는 얼씬도 말으라던 오랜 세월의 red-complex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면 극복할 수 있었던 체험의 장이었으며, 이 각박한 경쟁논리의 세상살이,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구미강호들을 격파해 내고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우리도 뭘 하면 해 낼 수 있겠구나 하는 강한 자신감을 획득할 수 있었던 체험의 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생리적인 현상마저도 꼼짝 못한 채로 긴장되어 절제되고, 내심 행여 누가 볼세라, 행여 누가 우리더러 저급한 족속이라 손가락 질 할세라, ‘그러면 그렇지. 결국엔 제깟 놈들이…’ 라고 말할까봐, 담배꽁초 하나까지도 남김없이 주어야만 했던 것이 우리의 이번 축제였다면 난 이를 감히 경직된 축제요, 조작된 축제였으며, 뭔가가 아직은 부족한 안타까운 축제였다고 말하고 싶다. 축제는 진정 축제다워야만 한다. 축제답지 않은 일회성, 내지는 일시적인 사회적 집단의 한풀이는 허탈과 공허, 그리고 심리적 공황만을 남겨둘 수도 있다.




지나치게 계획되고 절제된 축제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축제이며 축제가 아닌 축제이다. 자연스러운 기쁨의 축제는 생명과 그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이 세상살이 동안 진정 축제다운 축제, ‘거행되어지는 축제’가 끝내는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동경하고 기도한다. (2002.7.19)

축제다운 축제

 

축제다운 축제


   다시 6월이다. 우리에게는 6월하면 떠오를 수밖에 없는 전설 하나가 또 생겼다. 바로 4년 전의 월드컵 4강 신화의 전설이요, 붉은 악마의 전설이며,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었다던 길거리 응원의 전설이다. 우리는 불과 4년 전 몇 천 명으로 시작한 붉은 악마의 응원단이 몇 십만이 되고 몇 백만이 되어 급기야 700만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며 이른바 6월의 붉은 물결이요 붉은 혁명, 붉은 전설을 이루어 냈던 과정을 함께 체험했었다. 그때 우리는  원 없이 소리도 질렀고 박수도 쳤으며 눈물도 흘렸고 맥주를 마셔댔다. 그때 우리는 설마설마 하는 심정으로 밤잠을 설쳤고, 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우리 자신마저 깜짝 놀라기에 이르렀었다. 온 국민이 월드컵이라는 최면에 걸렸는지, 붉은 악마라는 마법의 주문에라도 걸렸는지, 전 국민이 훌리건이라도 된 듯이 그렇게 법석을 떨면서 뜨거웠던 6월이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제껏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보고 듣지 못하던 그런 체험을 함께 했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계층과 세대를 넘어, 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단시일 내에 상식과 순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그런 연출을 함께 해 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과연 왜 그랬을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신통방통하고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며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장대비를 맞으면서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를 꼼짝 않고 서서 박수치고 ‘대~한민국’을 외쳐대었던 군중들이 생리현상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본 결과에 따르면, 길거리 응원 초기에 그렇게 많은 군중이 몰릴지 몰라 사회적으로 대비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책 없이 그저 참거나, 혹은 재빨리 이튿날부터는 어른용 기저귀를 찼다고 했다. 또 다른 한 가지. 그렇게도 많은 군중이 몰려 지나간 뒤에 담배꽁초 하나 없이 뒷처리가 그렇게도 깨끗했던 것은 정말 우리의 높은 시민의식 때문이었을까? 답은 아무래도 그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것이 정설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축제를 정신적 퇴행이라 한다고 한다. 어른이나 성숙한 사람들이 애들처럼 유치해져서 서로 웃고 낄낄댈 수 있게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개인이나 소집단이 아닌 사회적 대집단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마땅히 그 과정 뒤에는 그 집단이 아무리 성숙한 집단이라 할지라도 다소의 어지러움과 부작용이 있어야만 옳고, 또 가히 정상적이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02년의 6월 축제는 월드컵 4강이라는 실적 외에도 어른들 눈에 마냥 염려스럽고 걱정스럽기만 했던 이 땅의 젊은 세대들이 공동체와 연대감 속에서 하나의 영혼, 하나의 마음을 체험할 수 있었던 장이었고, 그저 빨갱이는 나쁜 놈이요 뿔 달린 적이기에 그를 묘사하는 빨강색 근처에는 얼씬도 말라던 오랜 세월의 red-complex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면 극복할 수 있었던 체험의 장이었으며, 이 각박한 경쟁논리의 세상살이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구미강호들을 격파해 내고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우리도 뭘 하면 해 낼 수 있겠구나 하는 강한 자신감을 획득할 수 있었던 체험의 장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생리적인 현상마저도 꼼짝 못한 채로 긴장하고 절제하면서, 또 행여 누가 볼세라, 행여 누가 우리더러 저급한 족속이라 손가락질 할세라, ‘그러면 그렇지. 결국엔 제깟 놈들이…’ 라고 말할까봐 담배꽁초 하나까지도 남김없이 주워야만 했던 것이었다면, 난 이를 감히 경직된 축제요, 조작된 축제였으며, 뭔가가 아직은 부족했던 안타까운 축제였다고 말하고 싶다.


   축제는 진정 축제다워야만 한다. 축제답지 않은 일회성, 내지는 일시적인 사회적 집단의 한풀이는 허탈과 공허, 심리적 공황만을 남겨둘 수도 있다. 그리고 지나치게 계획되고 절제된 축제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축제이며 축제가 아닌 축제이다. 자연스러운 기쁨의 축제는 생명과 그 생명의 원천에 대한 신뢰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이 세상살이 동안 진정 축제다운 축제가 끝내는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를 동경하고 기도한다. 나는 다시 한 번 다가온 이번 월드컵 축제, 6월의 축제가 진정 축제다운 축제이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