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시간들

지나온 시간들

 

우리는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서

과거를 두 편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습성이 있다.

 

한 편은 감사해야 할,

그리고 오래도록 기억되어졌으면 좋을,

그런 은혜로운 순간들이고,

또 한 편에서는 잊어버려야 할,

아니 어쩌면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서 잊어버리고 싶어지는,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법한 체험의 시간들이다.

 

감사하며 은혜 속에 산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과거들,

좋았던 순간만큼이나 나빴던 순간,

그리고 기뻤던 때만큼이나 슬펐던 때까지도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지금 내가 서있는 현재의 이 자리에

우리를 있게 했던 지나온 모든 순간들을

우리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이라 이름 지어야 한다.

 

그렇다고 지나온 과거가

그런 대로 괜찮았었다고 자위하자는 말은 아니다.

또 그저 잊어버리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현존을 벗어나 이루어진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말하여야 된다는 것이며,

이는 지난날과의 용서요 화해를 뜻한다.

 

이처럼 우리의 지나온 순간들을

은총의 빛 안에 옮겨놓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다.

 

심지어는 부끄럽고 죄스러웠던,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법한 일들까지도

하느님의 눈으로 보겠다고 결심하고

용기를 내야하는 일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더욱 깊이 깨닫고,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더욱 깊은 신뢰를 가질 수 있으며,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이란 것이

하느님께 연결되어 진 것임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과정을 살아야 하는 일인 것이다.

 

 

 

 

 

Posted by benji

2015/12/29 19:11 2015/12/29 19:11

가장 잔인한 폭력, 그리고 하느님의 선택

 

어쩌면 가장 잔인하고 잔혹한 폭력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사되어진 폭력이다.

 

소위 종교의 이름으로 상처받고 불구가 되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시다 못해

분노하시고 화까지 내시었다.

 

당신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찬미하며,

주님, 주님하고 부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폭력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노하셨다.

 

사제나 봉헌된 자들의 불친절한 한 마디,

공공연하게

교회의 강론대에서 지적되고 쫓겨난 삶들,

식탁에 같이 앉기를 거부당했던 사람들,

잊혀지고 소외되었던 질병과 죽음,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가슴속에

상처가 되어 있는 아픔,

이혼중이거나 별거중인 부부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다는

동성연애자들,

한 형제요 한 자매였으나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던 집에서 추방당해야 했던

집 없는 사람들,

사랑을 기대하고 찾아갔으나 오히려 그곳에서

더 큰 폭력으로 내몰려야 했던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오늘날

참으로 막대한 정치·경제적 불확실, 불합리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명분있는 폭력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인간들의 원칙과 처세로,

그렇게 대치시키고 싶은 유혹 속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면서

하느님의 노여움보다는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믿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진노는 잠시 뿐이고

그 어지심은 영원하시다.”(시편 30,5)

시편 구절을 매일 아침 노래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말도 안 되게 막막한 현실,

끝없는 아픔과 상처,

그리고 거대한 폭력을 이겨내고자 하신

하느님의 선택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철저한 비폭력이었고,

(power)이 아닌 무능(powerlessness)

무력함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구원하셨다 했다.

 

그리고 이는 과거형이 아니고 아직도 현재형이다.

Posted by benji

2015/12/20 09:12 2015/12/20 09:12

한참 나이의 후배 하나가

한참 나이의 후배 하나가

 아직 채 50도 되지 않은 한참 나이의 후배 하나가 저 세상으로 갔다. 의사이기까지 한 후배였는데 자기 몸에 그렇게 몹쓸 암 덩어리가 온 몸을 잠식해 오는 동안에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한 채 정말이지 어이없게도 그렇게 가고 말았다. 안타까웠다. 정말 인생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허무한 것인가 하는 회의가 엄습해 왔다. 암이라는 병은 정말 지독한 녀석이고 대단한 녀석임에 틀림없다. 살아있는 모든 세포를 마지막 하나까지 깡그리 다 먹어치운 다음에야, 그것도 환자의 의식을 최후의 순간까지 또렷하게 유지시켜가면서 그렇게 자기도 죽어가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후배를 마지막 만난 것은 죽기 5일 전이었다. 이미 몸에는 복수가 차올라와 배가 풍선만 하여 졌으며, 간간이 복수를 빼 낼 때에는 복수에 피까지 섞여 나오는 상황이었고, 눈에는 황달이 역력했으며, 몸은 거의 가죽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의식은 모든 부분에서 뚜렷했고 서로 농담까지 주고받을 정도였으므로(그때 후배는 어머니께서 오실 것이라며 누나가 매만져 주는 대로 머리도 빗었고, 심지어 얼굴에 팩을 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배의 부고를 접하는 순간 ‘아니 벌써?’ 하는 내심 의외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그렇지! 사실 그때 몸의 상태로 봐서는…’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사람은 아무리 영특하다고 해도 자기 죽음을 예감하지는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본인이 의사였으므로 수도 없이 죽어가는 환자들의 마지막 단계가 어떨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학습하였을 터임에도, 본인의 몸에 다가온 그 상황은 필연적으로 나에게만은 예외라고 생각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아니면 너무 영리한 친구였으므로 본인은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을 주변에는 애써 숨기려 했던 것이었을까?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작은 체험들을 바탕으로 보면 인간은 자기 죽음의 순간을 결코 예감하거나 예견하지 못한다. 적어도 나에게만은 예외일 것 같다는 착각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죽음을 맞이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몇 년 전 어떤 선배 하나가 돌아가시기 전 불과 몇 시간 전에 둘이서만 한 병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때에도 그랬다. 서로 속엣말을 주고받을만한 처지였으므로 둘이서만 있는 자리에서 아주 가쁜 숨을 몰아쉬고 신음을 하고 있던 그 선배에게 내가 물었다. ‘죽을 것 같아?’ 엄청난 양의 진통제로 간신히 숨과 신음을 내뱉고 있던 위암의 그 선배도 그런 나의 질문에 똑똑하고 분명한 어조로 ‘아직,… 아니야.’ 라고 두 번에 끊어서 대답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도 ‘조금은 시간이 남았나보다’ 생각하고 잠깐 외출을 했었고 선배는 야속하게도 그 시간 동안에 운명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다소의 예외는 있다 하더라도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애써 외면하려는 부정 속에서, 아니면 전혀 실감하지 못한 채로 죽어간다. 실로 삶과 죽음의 이쪽저쪽이 순간이고 찰나인데 그것도 짐작 못하는 우둔한 만물의 영장이 바로 인간이다. 아니 인간의 우둔함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결코 깨우치지 못하는 죽음의 신비이다. 인간들은 평생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 종말이 가져다주는 증세들을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고 서술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의 죽음만큼은 예견할 수 없는 존재가 틀림없기에 죽음의 문제는 정말 신비이고 아이러니이다.

 문득, 두려움이 엄습한다. 나에게도 닥칠 죽음의 그 순간에 나도 그렇게 죽어갈 것이 뻔 하기에, 아직까지도 차일피일 미루면서 하느님 앞에 갈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내 자신의 후생이 걱정스럽고 두렵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우화대로 동굴의 위에서는 맹수가 으르렁거리고, 아래에서는 또 다른 맹수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다급한 상황에 간신히 중간의 나무에 매달려서 팔의 힘은 빠져 가는데, 그 와중에 낮과 밤이라는 흰 쥐와 검은 쥐가 나무를 갉아먹어 들어오는 다급하다못해 처절한 상황에서조차도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나뭇잎에 흘러내리는 꿀을 핥으려고 혀를 내밀고 눈을 돌린다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라 했던가? 마지막 날을 위해 정갈하게 준비하고 떠날 수 있는 인생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고 자위하면서, 그러니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어거지 아닌 어거지를 쓰는 심정으로 오늘 하루를 또 넘긴다. 잠은 죽음의 연습이라는데, 나는 그 죽음을 다시 한 번 연습해 보겠다고 또 잠자리에 든다.(2010년1월17일)

Posted by benji

2010/01/23 23:01 2010/01/23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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