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할 추醜

어릿광대, 혹은 광대를 한자漢字로 뭐라 하는지 찾아보니 ‘소추小丑’라고 한다고 한다. 어리광을 연상하게 하는 ‘작을 소小’는 그럴듯하지만 ‘추할 추丑’가 그 말에 들어가 있는 것은 다소 의외였다. ‘丑’라는 글자는 ‘추할 추醜’를 간략하게 고친 간체자이다. 광대의 모습과 얼굴은 추하다기보다 슬프다는 생각이 앞섰는데 그래도 그 글자의 내력을 쫓다 보면 광대를 묘사하느라 그 글자를 사용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추할 추醜’는 술병을 형상화한 ‘닭 유酉’라는 글자(소리부)와 도깨비나 혼백魂魄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귀신 귀鬼’라는 글자(의미부)의 결합이다. ‘鬼’라는 글자는 무릎 꿇고 앉은 사람 위에 ‘밭 전田’이 올라가 있는 가분수假分數같은 모습으로서 뭔가 얼굴에 가면 같은 것을 쓰고 있는 모습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옛날 곰 가죽에 눈이 넷 달린 커다란 쇠 가면을 덮어쓴 방상시方相氏의 모습처럼 역병이나 재앙이 들었을 때 이를 몰아내는 사람의 모습에서 형상을 가져왔다.(하영삼, 한자 뿌리 읽기, 291회, 동아일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다. 『방상시方相氏는 중국의 신神으로, 곰의 가죽을 두르고 황금사목黃金四目의 가면을 착용하며 손에는 창과 방패를 든 형상을 말한다.…그 뜻은 ‘제멋대로인 얼굴을 한 사람’이며…무당으로 불리지는 않았지만…귀신을 쫓는 무당의 모습과 같다.(한국민속대백과사전)』

‘추할 추醜’는 추문醜聞, 추태醜態, 추행醜行과 같은 단어들에서 쓰인다. 얼핏 ‘추파’도 같은 글자를 쓸 것 같지만, 이때는 잔잔하게 햇빛에 반짝이며 예쁜 가을의 물결 ‘추파秋波’라고 쓴다. ‘추할 추醜’는 술병이 옆에 있어서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 가면을 쓴 모습, 귀신 같은 모습을 두루 담았다. 그래서 ‘못 생기다’나 ‘밉다’와 같이 용모가 아름답지 못한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광대라는 말은 원래의 이런 모습에서 진화하여 오늘날 익살과 우스꽝스러운 모습까지 담아 통용된다. 그러나 서양말은 재미있는 재능꾼인 클라운clown과 애처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삐에로pierrot를 구분하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 가면극이나 인형극, 줄타기나 판소리, 땅재주 등에서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던 직업적인 예능인을 광대라고 하면서 廣大로 표기했던 것은 한자 말이 아니라 한자에서 발음을 빌려와 그렇게 썼을 뿐이다.(국립국어원)

『이 세상을 한 판의 서커스 마당이라고 할 때 이 서커스 장에는 스타들도 있고 광대들도 있다. 이 서커스 판에서 중심은 당연히 명연기로 박수갈채를 받아내는 스타들임이 틀림없다. 반면에 광대들은 무대의 중심에 있지는 않다. 그들은 스타들 사이에 막간을 통해 등장하고 실수와 떠듬거리는 말 짓, 몸짓으로 우리를 몇 번이고 웃게 만들어 준다. 광대들은 스타들의 명연기 때문에 손에 땀을 쥐며 생겼던 긴장을 풀어 준다. 우리는 광대들을 만날 때 감탄이 아닌 공감으로, 놀라움이 아닌 이해로, 그리고 긴장이 아닌 웃음과 미소로 만난다.

사람들은 한때 저마다 스타가 되려는 열망을 가져 이를 시도하고 또 그 꿈을 가끔 이루기도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부분 삶은 스타와 광대로 나누어 볼 때 광대 쪽에 남는다. 스타이건 광대이건 한 살이라도 나이를 더 먹어가면서는 서로서로 공감, 이해, 웃음, 미소로 만나기를 희망하며 사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한때 자기 분야에서 나름대로 이름 날리는 스타였기에 스타였던 시절을 회상하며 산다고 하더라도 이는 자칫하면 우울증의 실마리가 될 뿐이다. 책으로 치자면 앞표지였던 시절보다 뒤표지에 가까워지는 나이, 내용 없는 기호에 불과한 듯한 일상의 날, 고상한 기품보다는 자칫 추해지기 쉬운 때에 원래 인생이 그런 쪽임을 알려주는 광대를 생각하면 혼자서도 웃을 수 있다.

광대는 인간사의 수많은 염려와 걱정, 긴장과 불안에 웃음과 미소를 요구하고 결국은 우리 모두 역시 광대라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광대가 광대를 발견한다. 세상에는 아름답고 유쾌한 광대들이 참 많다. 눈물로써 미소를 감추고 미소로써 눈물을 감추어야만 하는 광대들, 광대들은 종국에 민낯일 것을 빤히 알면서도 땀으로 범벅이 되거나 눈물이 나서 일그러지고 옅어지고 벗겨진 얼굴 위의 하얀 광대 칠을 굳이 벗겨내거나 지우려 애쓰지 말고 오히려 덧칠해야 한다면서 나를 부추긴다.(참조. 김건중, 어릿광대)』